군림천하 2권 용문풍운(龍門風雲) 편 : 4화
제15장. 봉황금시(鳳凰金匙)
백의 청년들은 모두 그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음 순간, 그들의 안색도 일제히 새파랗게 변해 버렸다. 그들이 보고 있는 반대쪽, 고양동의 옆에 있는 동굴에서 갑자기 하나의 인영이 튀어나와 근처의 숲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닌가? 그 인영의 동작이 어찌나 빠르고 민첩했던지 한 마리의 날다람쥐를 보는 것 같았다. 중인들이 영문을 몰라 우두커니 있는 동안에 혁련삼이 폭갈을 터뜨리며 날아 올랐다.
“동중산! 이 쥐새끼같은 놈! 거기 서있지 못하겠느냐?”
그 고함소리를 듣자 동굴에서 튀어나온 인영은 더욱 빠르게 신형을 날렸다. 하나 그의 신형이 막 울창한 숲속으로 뛰어들려는 순간,
펑!
폭음이 터지며 그의 몸이 급살맞은 기러기처럼 허공에서 휘청거리며 아래로 떨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인영은 바닥에 내려선 후에도 몇 발짝이나 뒤로 정신없이 물러선 다음에야 간신히 신형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인영은 눈을 부릅뜨며 앞을 노려보았다. 숲속에서 하나의 인영이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백의를 입은 냉막한 표정의 중년인이었다. 오른손에는 하나의 길다란 물건을 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말채찍이었다.
그 백의 중년인을 보자 낙일방 등은 깜짝 놀랐다. 그 백의 중년인은 바로 운룡신차의 마부석에 앉아 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운룡신차가 나타났을 때 마부석에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숲속에 잠복해 있을 줄이야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백의 중년인을 보자 동굴에서 뛰쳐나왔던 인영의 몸이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네… 네놈은…”
백의 중년인은 냉막한 얼굴에 한 차례 차가운 웃음을 머금었다.
“동중산. 너의 얕은 수작으로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나 대공자님께는 어림없다.”
“그… 그럼 네가 여기 숨어 있었던 것은 운자추(雲子樞)의 지시였단 말이냐?”
“이를 말이냐? 대공자께선 이미 네가 무슨 수작을 부릴지 훤히 짐작하고 계셨다.”
동굴에서 뛰쳐나온 인영은 그 말에 어이가 없는지 한동안 우두커니 있다가 돌연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 운문세가 운대공자의 지략이 하늘을 뒤덮고 무공은 땅을 휩쓴다는 소문을 믿지 않았었는데… 오늘 이렇게 당하게 될 줄은 몰랐군.”
그는 전신에 칠흑같은 야행복(夜行服)을 입은 삼십 대 중반의 중년인이었다. 이목구비가 제법 수려했고 눈빛이 날카로웠으며, 날렵한 체구에 유난히 긴 팔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바로 비천호리 동중산이었다.
동중산은 별호 그대로 신법이 빠르고 두뇌가 영특하여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동중산은 짐짓 큰 소리로 웃으면서도 힐끗 백의중년인을 살펴보았으나, 백의중년인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한 채 한치의 헛점도 보이지 않았다. 동중산은 자신이 한 걸음만 내딛어도 금시라도 출수할 듯 백의 중년인이 눈을 번뜩이고 있자 감히 마음대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바로 그때 허공에서 희끗한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천둥같은 폭갈소리와 함께 하나의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네 이놈, 동중산! 감히 노부의 눈을 피해 잔꾀를 부리다니 각오해라!”
어느 틈에 수십 장을 날아온 혁련삼이 무서운 기세로 동중산을 향해 달려든 것이다. 동중산의 머리가 혁련삼의 음명장에 그대로 격중당하려 할 때 갑자기 동중산의 앞에 있던 백의 중년인의 오른손이 슬쩍 움직였다.
쐐액!
그의 손에서 한 줄기 흑선(黑線)이 꿈틀거리며 혁련삼의 우측 팔을 향해 쏘아져갔다. 그 속도는 눈부시게 빠르고 매서운 것이었다. 혁련삼은 이대로 계속 손을 내뻗었다가는 비록 동중산의 머리를 가격할 수 있더라도 백의 중년인이 날려보던 검은 흑선에 자신의 오른팔이 격중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히 오른팔을 제켜 올리며 피했다. 하나 흑선은 계속적으로 그의 오른팔을 따라 왔다.
“마부 따위가 감히…!”
혁련삼은 성난 눈으로 버럭 소리를 지르며 쳐들었던 오른팔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음명장 특유의 음유하고 독랄한 장력이 백의 중년인의 앞가슴을 향해 미끄러지듯 쏘아져갔다. 백의 중년인이 슬쩍 오른손을 휘젓자 흑선이 기이하게 회전하며 음명장의 장력을 뚫고 혁련삼에게로 접근했다.
혁련삼은 자신의 음명장이 너무도 수월하게 뚫리자 움찔하여 한 발짝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이번에는 쌍장(雙掌)을 흔들었다.
스으으응!
괴이한 음향과 함께 음명장의 장세가 한층 강력해지며 백의 중년인의 전신을 압박해 들어갔다. 백의 중년인은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우뚝 선 채로 오른 손목만을 몇 차례 움직였다. 흑선은 마치 눈이라도 달린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음명장의 장영(掌影)과 장영 사이를 교묘하게 뚫고 들어갔다.
그것은 마치 한 마리의 검은 뱀이 울창한 수풀 속을 헤치고 나아가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것을 보자 혁련삼은 문득 떠오르는 인물이 있어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토해냈다.
“흑사편(黑蛇鞭)? 너는 흑사편 곽당(郭幢)이구나…”
어찌나 놀랐는지 그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흑사편 곽당은 강호무림에서 한 자루 채찍으로 오래 전에 혁혁한 명성을 떨치던 고수였던 것이다. 당시 그의 채찍 솜씨는 강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고 까지 알려져 있었는데, 어느 날 부터인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많은 무림인들의 의혹을 사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설마 일개 마차의 마부가 되어 있을 줄이야…
혁련삼은 단순히 마부로만 알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백의 중년인이 한때 강호를 호령했던 흑사편 곽당 임을 알자 더이상 그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는 두 차례 장력을 날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흑사편을 물리친 다음 훌쩍 몸을 날려 뒤로 날아갔다. 그가 전권(戰圈)을 벗어나자 곽당은 더 이상 그를 쫒지 않고 슬쩍 오른손을 한차례 휘둘렀다.
그러자 그토록 영활하게 움직이던 흑선이 그의 오른 팔뚝으로 돌아오며 자연스레 감기는 것이었다.
정말 자세히 보지 않았다면 그 흑선이 단순한 채찍이 아니라 한 마리의 살아있는 뱀으로 착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동중산은 두 사람이 싸우는 틈에 몸을 날려 도망치려 했으나 어느 새 나타났는지 네 명의 백의 청년들이 에워싸고 있는 바람에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곁눈질로 싸움을 바라보다가 혁련삼이 쫒기듯 물러나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아무래도 오늘 일진은 길(吉)보다는 흉(凶)이 많겠구나. 운문세가의 힘이 이토록 강하다면 내가 살아날 길은 없다.’
약삭빠르게 머리를 회전시키며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그의 눈에 문득 번쩍하는 안광이 피어올랐다.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들은 바로 진산월 일행이었다.
그들을 보자 동중산은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갑자기 그는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네 명의 백의 청년들을 둘러보며 커다란 음성으로 소리쳤다.
“좋다! 운문세가가 이토록 강호의 도의(道義)를 모르고 사람을 핍박하여 살인멸구(殺人滅口)를 하려 하다니… 내가 비록 너희들 손에 죽더라도 진실은 언젠가는 강호무림에 명명백백하게 알려질 것이다!”
네 명의 백의 청년은 동중산이 눈알을 이리저리 굴릴 때부터 그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나 하고 바짝 긴장해 있다가 그가 돌연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동중산은 무언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되어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면서 더욱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나 하나쯤 죽인다고 너희들의 치부(恥部)가 숨겨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진실을 직시하는 눈은 저곳에도 있으니 말이다!”
동중산은 진산월 일행이 서 있는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네 명의 백의 청년의 시선이 엉겹결에 그쪽을 향했다. 바로 그 순간,
파앗!
동중산이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아 올라 백의 청년들의 검진을 벗어나며 근처의 숲을 향해 비스듬히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백의 청년들은 우두커니 진산월 일행을 쳐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바람소리와 함께 동중산이 자신들의 포위망을 빠져나가자 그제서야 자신들이 그의 꼬임에 넘어간 것을 깨달았다. 하나 그때는 이미 동중산의 신형은 거의 숲속에 다다르고 있었다.
동중산은 이제 한 번만 더 도약하면 숲속으로 뛰어들 수 있다는 생각에 안면에 희색이 가득했다. 일단 숲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제아무리 많은 고수들이 쫓아와도 그는 충분히 달아날 자신이 있었다. 하나 바로 그때 그는 무언가 차갑고 부드러운 것이 자신의 발목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 미처 정체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의 몸은 솟구쳐 오르던 방향에서 벗어나 허공을 한 차례 곤두박질쳐 버렸다. 그것은 그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돌발적인 상황이었다.
“헙!”
동중산은 다급한 경호성을 내지르며 공중제비를 하여 바닥에 내려서려 했으나, 그의 왼발이 제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쿵!
결국 그는 어깨부터 바닥에 틀어박히는 낭패스런 광경을 연출하고야 말았다.
“큭!”
동중산은 얼굴이 흙투성이가 되고 이마가 깨어져 피가 흘러내렸으나, 아픔보다는 경악을 먼저 느껴야 했다. 그가 허겁지겁 자신의 왼쪽 다리를 내려보니 그의 왼쪽 발목에 검은 동앗줄같은 것이 감겨 있었다. 그것이 바로 곽당의 흑사편임을 발견한 동중산의 안색은 시커멓게 변해 버렸다.
그의 전면에는 어느 새 냉막한 표정의 곽당이 우뚝 서 있었다. 곽당의 자연스럽게 내려뜨린 오른쪽 손에는 동중산의 왼쪽 발목을 묶고 있는 흑사편의 반대쪽 가닥이 가볍게 쥐어져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검고 길다란 채찍일 뿐이었으나, 동중산의 눈에는 그것이 맹독(猛毒)을 지닌 독사(毒蛇)보다도 더욱 무시무시하게 보였다.
동중산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절망어린 표정을 떠올렸다. 네 명의 백의 청년들은 어느 새 다가와 그의 사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호화로운 은색 마차 하나가 그린 듯 서 있었다. 바로 운룡신차였다.
혹시나 하고 찾아보았던 혁련삼은 낭패스런 몰골로 십 여장 밖에서 가야할지 말아야할지 모르는 표정을 짓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어디를 보아도 빠져나갈 곳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절망어린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동중산의 눈에 다시 한 가닥 희망의 빛이 떠오른 것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진산월 일행을 발견하고 난 후였다. 동중산은 갑자기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운문세가의 고수들을 올려다보며 처절한 모습으로 소리쳤다.
“가슴에 혈한(血恨)을 묻은 채 이대로 쓰러져야 하다니… 하늘이시어! 정말 너무 하십니다!”
그의 얼굴 표정이 어찌나 비장하고 절실했던지 웬만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저릴 정도였다. 하나 백의 청년들은 이미 그에게 한 번 당한 적이 있는지라 냉랭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을 뿐이었다.
곽당은 여전히 흑사편을 든 채 동중산을 향해 느릿느릿 걸어왔다. 동중산은 왼쪽 발목에 흑사편이 감겨 있어 일어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비스듬히 바닥에 누운 채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곽당을 공포에 질린 얼굴로 바라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더듬거렸다.
“과… 곽당. 네가 나를 죽인다 해도 내 혼백은 원귀(怨鬼)가 되어 기필코 이 복수를 하고야 말거다…”
곽당은 차갑고 냉정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허튼 수작은 이제 그만하지. 아무리 그래봐야 너를 위해 손을 내밀어줄 사람은 없다.”
바로 그때였다.
“없긴. 바로 여기에 있는데…”
장난기가 가득 담긴 음성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불쑥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곽당은 힐끗 그 인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그 인영이 아직도 얼굴에 붉은 빛이 가시지 않은 준수한 소년임을 알아차리고는 눈쌀을 살짝 찌푸렸다.
“지금 그 말은 네가 한 것이냐?”
홍안의 미소년은 히죽 웃었다.
“본 도련님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겠소?”
“도련님이라… 내게 도련님은 천하에서 오직 한 분 밖에는 안 계시다.”
미소년은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그렇소. 그게 바로 나요.”
곽당의 눈빛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말버릇이 형편없군.”
미소년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마주 쏘아붙였다.
“당신에게는 그것도 과분하지. 일개 마부 주제에 함부로 사람을 능멸하고 해치려 하다니 이것만 보아도 운문세가가 강호인들을 얼마나 업신여기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 아니오?”
곽당의 얼굴은 무표정하게 굳어졌다. 하나 그 미간에는 한줄기 냉혹한 살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무례한 놈.”
미소년은 비록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으나, 곽당의 얼굴이 살기등등하게 변해가자 속으로는 바짝 긴장하여 양 손에 공력을 가득 끌어올리고 있었다. 미소년은 물론 낙일방이었다.
낙일방은 처음부터 사태가 돌아가는 추이를 계속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동중산이 그들에게 거의 제압당할 처지에 빠지게 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불쑥 그들 사이에 끼어든 것이다.
그가 워낙 갑작스럽게 나섰기 때문에 정해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말릴 사이도 없이 그저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해는 쓴웃음을 지으며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저 녀석이 또 일을 저질러 버렸군요.”
진산월이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응계성이 퉁명스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뭐 어때서? 일방이 나서지 않았다면 나라도 뛰어나갔을 것이다.”
정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응계성은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눈을 부라렸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느냐? 운문세가 녀석들이 질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건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정해는 그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입가에 고소를 머금은 채 한 차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낙일방과 응계성 등은 얼마 전에 운문세가의 운자개와 벌인 시비 때문에 운문세가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했다.
정해도 물론 운문세가에는 전혀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비천호리 동중산이 어떤 인물인지 들어서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동중산은 강호에서도 잔꾀가 많고 심기(心機)가 깊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비록 무공은 이류급에 불과했으나, 워낙 약삭빠르고 강호 경험이 풍부하여 누구도 상대하기를 꺼려하는 존재였다.
지금도 얼핏 보기에는 그가 운문세가의 강압에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무언가 복잡한 사정이 담겨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정해는 좀 더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낙일방이 불문곡직하고 곽당의 앞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그의 계획이 어긋나고 말았던 것이다.
정해는 약간은 초조하고 약간은 긴장된 시선으로 장내를 주시하고 있었다. 여차직하면 자신도 손을 쓸 셈이었다.
사태는 그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곽당은 비록 운룡신차를 모는 마부의 신세였지만, 강호에서의 신분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 인물이 아직 얼굴에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애송이에게 거듭 놀림을 받았으니 어찌 분노하지 않겠는가? 그는 무서운 눈으로 낙일방을 쏘아보다가 오른손을 슬쩍 흔들었다.
그러자 동중산의 몸이 흑사편을 따라 그에게로 질질 끌려왔다. 동중산은 끌려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으나, 흑사편에 담긴 힘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바둥거리면서도 맥없이 끌려오고 있었다. 곽당은 동중산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며 낙일방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를 구할 수 있으면 구해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낙일방의 얼굴에 붉은 빛이 감돌았다. 낙일방은 급한 성격만큼이나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호승심(好勝心)의 소유자였다. 그는 곽당이 일부러 자신을 유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마음을 자제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곽당은 일부러 아주 천천히 동중산의 몸을 끌어당기고 있어 누구라도 그가 지금 낙일방을 향해 도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해는 낙일방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며 그의 숨이 거칠어지는 것을 보고는 그가 당장이라도 곽당에게 덮쳐들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황급히 그에게 달려왔다.
“일방….!”
하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오냐, 본 도련님이 못할 줄 아느냐?”
낙일방이 버럭 폭갈을 터뜨리며 곽당을 향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낙일방은 상대가 강호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고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자신이 가장 자신하는 장괘장권구식 중의 천성탈두를 펼쳐 곽당의 옆구리를 노리고 들어갔다. 낙일방의 공격은 빠르고 상당한 위력이 있어 보였다. 그동안 장괘장권구식에 나름대로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음이 분명했다. 곽당은 낙일방이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기는 했지만 의외로 그의 공세가 날카로운 것을 보고는 눈빛이 더욱 차갑게 번뜩였다. 그는 여전히 오른손으로는 동중산을 자신에게로 끌어오며 왼손을 낙일방 쪽으로 쭈욱 내밀었다.
쉬악!
한 줄기 소성과 함께 그의 손이 낙일방의 천성탈두 초식 사이를 교묘하게 뚫고 들어왔다. 천성탈두는 원래 빠르고 강맹한 위력을 지니고 있는 반면에 변화가 적고 단조로운 것이 흠이었다. 낙일방은 곽당이 간단하게 자신의 공세를 파해(破解)하고 들어오자 약이 바짝 올랐다. 그는 안색을 붉게 물들이며 훌쩍 옆으로 반 보 이동하여 곽당의 손을 피함과 동시에 두 팔을 활짝 펼치며 곽당의 앞가슴을 향해 뛰어들었다. 얼핏 보기에는 무모하다리 만치 과감한 이 초식은 홍안척령이라는 것으로, 장괘장권구식 중에서도 위력이 뛰어난 절초였다.
“흐흐… 과연 한 수가 있군. 하나 그것으로는 어림없지.”
곽당의 입에서 냉랭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허공을 스치고 지나갔던 그의 좌수가 기이하게 선회하며 낙일방의 관자놀이를 향해 다가왔다. 낙일방은 막 홍안척령으로 곽당의 상방신을 공격하려다가 무언가 빠르고 날카로운 것이 자신의 뒷통수 쪽에서 날아오자 움찔하여 고개를 옆으로 비틀었다.
팟!
아슬아슬하게 곽당의 왼손이 낙일방의 관자놀이 바로 아랫부분을 스치고 지나갔다. 낙일방은 가슴이 섬뜩했으나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홍안척령의 식으로 곽당의 앞가슴을 가격해 들어갔다. 그때 곽당은 오른손으로는 흑사편을 잡고 있고, 왼손은 막 낙일방의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간 상태인지라 가슴 쪽이 훤하게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자 이제껏 담담한 눈으로 장내를 주시하고 있던 진산월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발밑을 조심해라!”
낙일방은 막 무방비 상태로 벌어져 있는 곽당의 가슴을 후려치려다 진산월의 다급한 음성을 듣자 깜짝 놀라 힐끗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발 아래에서 무언가 시커먼 것이 그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낙일방은 사력을 다해 뒤로 몸을 젖혔다.
파아아…
가슴이 시원해지며 그의 가슴팍 부근 옷자락이 갈가리 찢겨져 버렸다. 낙일방은 뒤로 두 바퀴나 공중제비를 한 다음에야 간신히 신형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니 옷자락이 모두 찢겨져 가슴팍이 훤하게 드러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에 적지 않은 핏자국도 내비쳤다. 낙일방은 자신의 동작이 조금만 굼떴어도 핏자국 몇 개가 아니라 아예 가슴팍이 그대로 갈라지고 말았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대체 조금 전의 그것이 무엇이기에….’
낙일방은 자신의 발밑에서 솟구쳐 오른 시커먼 것의 정체를 알기 위해 곽당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눈을 크게 치켜뜨고 말았다. 곽당의 오른손에는 여전히 흑사편이 쥐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흑사편의 끝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이 아닌가? 갈라진 흑사편의 한쪽 끝에는 동중산의 왼쪽 발목이 묶여 있었지만, 다른 한쪽은 허공에서 가늘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조금 전에 낙일방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던 검은 그림자의 정체는 바로 흑사편의 갈라진 다른 한쪽 부분이었던 것이다. 사실 흑사편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것이 곽당의 손동작에 의해서 하나로 합쳐져 사용되기도 하고 때로는 두 개로 분리되어 움직이기도 하는 것이다. 곽당이 조금 전에 사용한 초식은 쌍두사(雙頭蛇)라는 것으로, 곽당이 강호에서 횡행(橫行)할 때 그의 이 쌍두사 초식에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영문도 모르고 비명횡사했는지 모른다. 낙일방이 우두커니 서 있는 동안에 진산월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담담한 눈길로 곽당을 응시했다.
“쌍두사는 너무 음독(陰毒)하고 잔인해서 강호에서는 사용하기 못하게 되어 있다고 들었소. 당년에 귀하가 강호에서 소리 없이 사라진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니오?”
곽당은 애송이인 낙일방이 자신의 쌍두사 초식을 피한 것에 내심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가, 난데없이 커다란 체구의 청년이 불쑥 나서서 입을 열자 눈쌀을 찌푸린 채 그를 쏘아보았다.
“용케도 그 사실을 알고 있구나.”
진산월의 표정이나 음성은 온화하고 부드러워서 조금도 화를 내는 것 같지 않았다. 하나 그의 말속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담겨 있었다.
“강호에서 금기(禁忌)시되는 초식을 나이 어린 소년에게 태연히 사용하는 것을 보니 당신이 왜 그 실력으로 남의 마부 노릇밖에 하고 있지 못한지 그 이유를 알겠소.”
곽당의 얼굴이 철갑을 두른 듯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것은 그에게는 들추고 싶지 않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석년에 곽당은 잔인한 손속으로 많은 원한을 맺어 피해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그가 몸을 의탁한 곳은 운문세가였다. 운문세가의 가주는 그를 받아주는 조건으로 그에게 소운룡을 끄는 마부의 직을 맡겼으며, 곽당은 어쩔 수 없이 그 조건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소운룡의 주인인 운자추가 당대의 손꼽히는 기재(奇才)라는 사실이 유일하게 곽당을 위안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정체도 모르는 새파랗게 젊은 청년에게서 그 뼈아픈 기억을 되살리는 말을 듣게 되자 곽당은 마음속으로 불같은 살심이 솟구쳐 올랐다. 그는 두 눈을 시퍼렇게 번뜩이며 진산월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너희들은 누구냐?”
진산월은 그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받고도 조금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당신의 그 도련님을 불러오면 말해 주겠소.”
곽당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모조리 간덩이가 부은 놈들이로군.”
그의 어깨가 한 차례 들썩거렸다. 진산월을 향해서 손을 쓰려고 한 것이 분명했다. 하나 곽당은 그를 향해 출수(出手)하지 않았다. 때마침 운자추의 음성이 들려왔던 것이다.
“나는 여기에 있소.”
운룡신차는 어느 새 그들의 지척에까지 도달해 있었다. 운룡신차의 양 옆으로 네 명의 백의 청년들이 마차를 호위하듯 양쪽으로 두 명씩 갈라서 있었다.
진산월은 담담한 시선으로 운룡신차의 주렴을 쳐다보았다. 주렴 안에 한 명의 인영이 앉아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긴 했으나, 아무리 안력을 돋구어도 그 이상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마차 속의 인물은 진산월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았는지 가볍게 웃었다.
“하하…. 이 주렴은 천산(天山)의 특수한 곤옥(昆玉)과 빙잠사(氷蠶絲)를 교대로 꼬아 만든 것이라서 안에서는 밖을 훤히 볼 수 있지만, 밖에는 도저히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소.”
진산월은 빙그레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귀한 주렴이구료. 확실히 나는 도저히 귀하의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었소.”
마차 속의 인물은 진산월의 침착한 모습이 의외였는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이렇게 왔으니 이제 정체를 말해주지 않겠소?”
진산월의 입가에는 여전히 담담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한 번 알아맞춰 보시오.”
“나는 점장이도 아닌데 귀하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거요.”
진산월이 말한 의도를 파악하려는지 마차 속에서 다시 약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짤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이제 알겠군. 당신들은 종남에서 오지 않았소?”
“그렇소.”
마차 속에서 다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며칠 전에 운자개가 당신들을 만났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 그 말을 듣고 호기심이 일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이것도 인연인가 보군.”
마차 속의 인물은 운자추였다. 운자개는 그의 형이 분명한데 그는 형의 이름을 아무런 스스럼없이 그냥 불렀다. 그리고 그것을 들은 백의 청년들과 곽당도 전혀 이상해 하지 않았다. 진산월은 일전에 석지명에게서 운자추가 비록 나이는 더 어리지만 정실의 자식이라 실질적인 운문세가의 대공자 노릇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 운자추는 단순히 지위 뿐 아니라 혈통적으로도 운자개나 다른 사람을 형제로 인정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의 형 이름을 남들 앞에서 태연히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운자추의 모습은 주렴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진산월은 주렴을 뚫고 한 줄기 예리한 안광이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 눈빛은 한동안 그의 얼굴과 전신을 구석구석 살핀 다음에야 천천히 거두어졌다. 주렴 속에서 운자추의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이 바로 당대의 종남파 장문인인 진산월이오?”
진산월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종남파 장문인이라는 말에 냉막한 얼굴로 옆에 서 있던 곽당의 몸이 한 차례 움찔거렸다. 비록 종남파가 지금은 잊혀져가는 문파라고는 하나, 한때는 대강남북(大江南北)에 명성을 진동시키던 명문정파였다. 그런 문파의 장문인이 이처럼 젊은 청년이리라고는 누구도 상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다른 네 명의 백의 청년들도 새삼스러운 눈으로 진산월을 쳐다보고 있었다. 진산월은 체구가 크고 인상이 순해서 첫 인상은 조금 둔해 보였다. 게다가 별로 말이 많은 성격도 아니고 좀처럼 화를 내거나 남들 앞에 나서지 않아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를 평범한 청년으로 착각하기 일쑤였다.
운자추는 잠시 침음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소.”
진산월은 뜻밖인 듯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렇소?”
그는 운자추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도 어느 정도 놀라고 있었는데, 그가 자신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고 하자 더욱 호기심이 일었다.
“듣자하니 당신은 먹는 걸 좋아해서 툭하면 주방에 들어가 직접 음식을 만들기도 한다더군. 그게 사실이오?”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오.”
“또한 당신은 남들과 싸우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몇 년 동안 정식으로 비무(比武)다운 비무를 한 적이 없다고 들었소. 그것도 사실이오?”
“확실히 나는 올해 들어와서 남과 비무를 한 기억이 없소.”
“게다가 당신은 천성이 게으르고 성격이 느긋해서 좀처럼 화를 내는 법이 없다고 하오. 그래서 사람들은 당신을 나보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들었소.”
진산월은 빙긋 웃었다.
“나보살이라… 그런 말을 들은 것도 같군.”
듣고 있던 곽당과 네 명의 백의청년들은 진산월이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운자추가 말한 것은 하나같이 장점보다는 단점에 가까운 것들로, 일파(一派)의 우두머리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태들이었다. 그런데도 진산월은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부인하지 않고 태연하게 그것을 모두 시인한 것이다.
운자추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한 가지 좋은 점도 있다고 들었소.”
진산월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먹을 것을 밝히고 남과 싸우기 싫어하며 게으른 내게도 좋은 점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구료. 그게 무엇이오?”
“그것은 자신이 입밖으로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는 것이오. 다시 말해서 당신은 어떤 일이 있어도 신용(信用)이 있다는 말이오.”
“신용이라… 듣기는 좋지만 왠지 부담스러운 말이로군. 그런데 나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 줄 수 있겠소?”
이번에는 운자추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한 번 알아맞춰 보시오.”
진산월은 눈을 반짝 빛냈다.
“생각해 보면 알아낼 수 있는 인물이란 말이겠군?”
“하하… 확실히 당신과는 말하기가 쉽군. 물론 그렇소.”
진산월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방금 운자추가 말한 것은 그와 오랫동안 동고동락(同苦同樂)한 사형제들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사항들이었다. 그러니 신목오호 악자화 외에 달리 누가 있겠는가?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운문세가가 신목령과 밀접한 관계라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소. 그건 그렇고, 나도 당신에 대해서 몇 가지들은 소문이 있소.”
운자추는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그렇소? 어떤 소문이오?”
남들이 자신을 무어라고 평가하는지는 누구라도 궁금해하는 사항이 아닐 수 없었다. 운자추 같이 자타가 뛰어나다고 공인하는 인물은 더더욱 그러했다. 진산월은 서슴없이 말했다.
“당신은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하고 무공에 대한 재질이 탁월하여 열 세 살이 되기 이전에 이미 운문세가의 모든 가전무공을 완벽하게 익혔다고 하더군.”
“사실이오.”
“그 후로 다섯 명의 무림 기인(奇人)들에게서 사사(師事)하여 몇 년전부터는 그들조차 능가했다고 들었소.”
운자추는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오. 나는 오절(五絶)을 능가한지 이미 오래 되었소.”
오절이란 운자추를 가르친 다섯 명의 전대기인(前代奇人)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하나 그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자세히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다만 그들 개개인의 무공과 실력이 능히 강호를 주름잡을 수 있는 탁월한 것이라는 소문만이 무성할 뿐이었다. 진산월은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게다가 당신은 성격적으로 치밀하여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실수를 해 본적이 없다고 하더군.”
“확실히 나는 지금까지 일을 잘못 처리해 본 기억이 없소.”
“더구나 당신은 인물됨이 준수하고 당대에 보기 드문 미남자라 사람들이 당신을 옥면무적(玉面無敵)이라고 부른다고 들었소.”
“그런 이름을 들은 것도 같군. 그 밖에도 또 있소?”
“한 가지가 더 있소.”
“그게 무엇이오?”
진산월은 운룡신차의 주렴을 응시하며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너무 자만심이 강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기 때문에 언제고 한 번 큰 낭패를 볼 거라고 하더군.”
그 말을 듣는 순간, 곽당과 네 명의 백의 청년들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네놈이 감히 공자님을 능멸하다니…”
곽당은 금시라도 진산월을 향해 달려들 듯한 기세였다. 그것을 보고 정해와 응계성등도 앞으로 뛰쳐나오려 했다. 그때 운자추의 침착한 음성이 들려왔다.
“곽당. 무례를 범하지 마라.”
곽당은 그 음성을 듣자 즉시 날리려던 몸을 멈추며 고개를 수그렸다.
“죄송합니다.”
운자추의 음성 하나에 강호의 이름난 고수인 흑사편 곽당이 꼬리를 내린 개처럼 얌전해 지는 것을 보자 중인들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말 한 마디에 곽당같은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는 운자추의 능력이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주렴 속에서 운자추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진 장문인의 말씀은 나에 대한 따끔한 충고로 받아들이겠소.”
진산월은 빙긋 미소지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니 내가 오히려 미안하구료. 강호의 소문은 왕왕 와전(訛傳)되기 마련이니 운공자는 너무 신경쓰지 마시오.”
운자추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는 한층 냉정해져 있었다.
“오늘 일은 저자와 본가(本家) 사이의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요. 그러니 진 장문인은 더 이상 이번 일에 개입하지 말기를 바라오.”
그때 아직도 곽당의 흑사편에 한쪽 발이 묶여 있던 동중산이 안색이 변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건 거짓말이오! 나는 정말 억울하며, 운문세가에서 나를 강제로 핍박한 것이오!”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군.”
곽당이 차갑게 중얼거리며 오른손을 슬쩍 휘둘렀다. 그러자 동중산의 발목을 휘감고 있는 흑사편이 더욱 조여들며 동중산의 몸을 바닥에서 몇 번 구르게 했다.
“으…윽… 이… 이런다고 내가 굴복할 것 같으냐?”
동중산은 온 몸이 흙투성이가 되고 발목이 부러질 듯 아파왔으나 계속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로서는 그야말로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기로(岐路)에 서 있는지라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상태였다. 곽당이 분기탱천하여 그의 몸을 한 차례 더 세차게 바닥에 내동댕이치려 할 때였다.
“제기랄. 강호의 고수라는 놈이 사람을 묶어 놓고 패려 하다니… 그러고도 네가 무림인이란 말이냐?”
난데없이 사나운 폭갈소리가 터져나왔다. 곽당의 눈빛이 살벌하게 변했다.
“어느 놈이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리느냐?”
진산월의 뒤에서 응계성이 씩씩거리며 걸어나왔다.
“바로 나다.”
응계성은 아까부터 곽당의 행태가 못마땅했던데다 곽당이 동중산을 바닥에 쓰러뜨린 채 괴롭히는 모습을 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