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권 용문풍운(龍門風雲) 편 :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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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권 용문풍운(龍門風雲) 편 : 6화


제17장. 도룡거사(屠龍居士)

갑자기 동중산은 진산월을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진 장문인. 한 가지 제안할 것이 있소.”

진산월은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특유의 침착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엇이오?”

동중산은 비천호리라는 별호 답지 않게 약간 머뭇거리다가 힙겹게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에게 한 가지 제안할 것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소?”

진산월은 이미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훤히 알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말씀해 보시오.”

“솔직히 지금의 내 능력으로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도 불가능한 일이오. 그래서 말인데…”

동중산은 목소리를 한층 낮추어 진산월에게 소근거렸다.

“나를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면 삼분지 일을 드리겠소.”

“삼분지 일이라니?”

“그러니까… 이번 일로 얻게 되는 소득의 삼분지 일을 주겠단 말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오?”

동중산은 멀거니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진 장문인께서는 정말로 이번 일의 내막을 전혀 모르고 끼어드셨단 말씀이오?”

“물론이오.”

진산월이 태연히 고개를 끄덕이자 동중산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반쯤 입을 벌린 채 한동안 멍하니 진산월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조금 전에 진산월이 운자추와 하는 대화를 듣기는 했으나, 사실은 진산월이 내막을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종남파가 자신 때문에 운문세가를 적(敵)으로 만들면서까지 이번 일에 개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진산월의 말과 표정을 보니 진정으로 그는 이번 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였다. 혹시나 하여 종남파의 다른 고수들의 표정도 슬쩍 살폈으나 그들 또한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한심한 작자들이 있나? 하남성 일대를 뒤흔들고 있는 이런 일도 모르고 있었다니…’

동중산은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오히려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에… 말하자면 긴 이야기요. 일단 이곳을 벗어나면 자세히 말씀해 드리겠소.”

동중산이 급하게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진산월은 느긋한 표정이 되었다.

“어떤 일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귀하의 제안을 받아들이란 말이오?”

동중산은 기분 같아서는 꽥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으나 억지로 눌러 참으며 재빠른 음성으로 말했다.

“절대로 종남파에게 손해나는 일은 아니오. 오히려 종남파를 다시 예전의 거대문파로 키울 수 있는 초석(礎石)을 만들지도 모르는 일이오.”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진산월은 별로 탐탁치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본파의 부흥을 위해 귀하에게 손을 벌릴 생각은 조금도 없소.”

동중산은 절로 마음이 다급해져서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내 말은 절대로 거짓이 아니란 말이오. 정말 이번 일만 잘되면 종남파는….”

“본파는 남의 도움을 바라지 않소.”

진산월의 음성은 비록 크지 않았으나 묘한 위엄을 담고 있었다. 동중산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나 그의 머리 속은 몇 배나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정말 앞뒤가 꽉 막힌 작자로군. 그나저나 이거 큰일났는 걸. 이자가 도와주지 않으면 도저히 이곳을 벗어나갈 길이 없는데…’

동중산은 아무리 생각해도 진산월의 도움을 받는 수 밖에 없었다. 하나 진산월은 더 이상 그를 위해 손을 내뻗을 의향이 없는 듯 했다. 게다가 막대한 이득이 눈앞에 떨어진다고 해도 전혀 반응이 없으니 동중산으로서는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종남파를 다시 부흥시킬 수 있다는 말에도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눈앞의 이 장문인 이란 작자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위인인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의 머리를 해부하여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들여다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나 어쨌든 시간은 초조히 흘러가고 뚜렷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동중산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무림의 여우’ 라는 동중산만이 떠올릴 수 있는 기발한 방법이었다. 동중산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진 장문인.”

진산월은 정신없이 눈을 굴리던 동중산이 돌연 심각한 음성으로 자신을 부르자 이자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나 하여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왜 그러시오?”

동중산은 절대절명의 순간이라도 닥친 사람처럼 표정을 무겁게 굳히며 신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종남파는 문호(門戶)를 닫았습니까?”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소.”

“그렇다면 문하제자를 받는단 말씀입니까?”

“물론 그렇소. 한데 그건 왜 물으시오?”

동중산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급히 물었다.

“종남파에서 문하제자를 받는데 자격요건이 까다롭습니까?”

“별로 까다로운건 아니오. 본파(本派)를 위해서 한 몸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고, 앞으로 본파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을 각오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소.”

동중산은 손뼉을 탁 쳤다.

“그렇다면 잘 됐습니다.”

돌연 동중산은 진산월을 향해 넙죽 절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 태생의 소인 동중산은 감히 대종남파의 제자가 되기를 간청하는 바입니다.”

진산월은 그가 종남파의 규율에 대해서 물을 때부터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가 그가 막상 자신을 향해 대례(大禮)를 올리자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정해를 비롯한 종남파의 고수들도 모두 어처구니가 없는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동중산은 진산월이 말릴 사이도 없이 잽싸게 삼배(三拜)를 올려 약식으로 배사지례(拜師之禮)를 취한 후 고개를 쳐들고 웃었다.

“헤헤… 이제 저도 종남파의 제자가 된 것이지요?”

진산월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으로는 안되오.”

“예?”

“본파의 정식 제자가 되려면 먼저 조사상(祖師像)을 앞에 두고 향을 올려 충성의 서약(誓約)을 한 다음, 사부에게 배사지례를 하고 다시 술잔을 돌려 사문의 다른 어른들에게 가입했음을 인증받아야 하오.”

동중산의 얼굴이 휴지조각처럼 구겨졌다.

“그런 것 말고 유사시에 간편하게 하는 방법은 없습니까?”

진산월은 그를 뚫어지게 주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소.”

동중산은 귀가 번쩍 뜨이는지 급히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약지(藥指)의 끝을 잘라 그 피를 술에 타서 돌려 마시는 것으로 대신 할 수가 있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중산은 재빨리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작은 술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허리춤에서 소도(小刀)를 꺼내 자신의 왼쪽 약지를 살짝 벤 후 그 피를 술병에 따랐다. 피가 열 방울쯤 떨어지자 그제서야 지혈 한 후 술병을 몇 번 흔들더니 진산월을 향해 두 손으로 공손히 술병을 바쳤다.

“장문인께서 먼저 드십시오.”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격으로 빠르고 민첩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진산월은 묵묵히 동중산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동중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두 손으로 술병을 내밀고 있었다. 그저 진산월의 처분만 바란다는 모습이었다. 종남파의 모든 제자들은 침을 꿀꺽 삼킨 채 진산월의 다음 행동을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문파 제자를 받는 것은 장문인의 고유권한이기 때문에 다른 누구도 간섭할 수 없었다. 하나 그들의 눈은 어서 빨리 거절하라는 간절한 염원의 빛을 담고 있었다. 동중산은 강호에서 약삭빠르기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많은 무림인들의 표적이 되어 있어서 그야말로 움직이는 화약고(火藥庫)라고 할 수 있는 상태였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인물을 문하제자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 뒷감당을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상원건도 흥미진진한 얼굴로 진산월과 동중산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그는 사태가 이렇게까지 진행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으나, 아무튼 일이 무척 재미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과연 진산월은 동중산을 받아들일 것인가, 거절할 것인가? 어느 쪽이든 앞으로의 사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그때 진산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릎을 꿇으시오.”

그의 음성은 평소와는 달리 무겁고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동중산은 황급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두 손으로 술병을 머리위로 들어올린 자세로 있었다. 마치 그 자세를 허물어 버리면 진산월이 자신을 종남파의 문하로 받아들이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제법 진지한 모습이었다. 진산월의 얼굴에는 엄숙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입속으로 무어라고 웅얼거리고는 천천히 눈을 떠 동중산을 내려다 보았다. 이어 그는 서슴없이 동중산이 내민 술병을 받아 들었다. 그 광경을 보자 정해는 한숨부터 흘러나왔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안색이 변해 버렸다. 진산월은 술병을 들어 먼저 동중산의 주위 바닥에 약간 뿌린 다음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삼고두(三叩頭)를 해라.”

동중산은 그가 대뜸 하대(下待)를 하자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거렸으나 순순히 무릎을 꿇은 자세로 양손을 가지런히 머리위로 모은 채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 원래 삼고두란 문파에 가입할 때 조사(祖師)의 위패에 예(禮)를 취하는 것으로, 머리를 바닥에 부딪쳐 소리가 나도록 절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 이곳은 위패도 없고 바닥도 그냥 땅바닥이라 동중산은 머리를 바닥에 살짝 갖다대는 것으로 삼고두를 대신했다. 그러자 진산월이 한층 엄격한 음성으로 말했다.

“다시 삼고두.”

동중산은 힐끗 그를 올려보았다. 진산월은 항상 입가에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나, 지금 동중산을 내려다보는 눈길은 사납고 험악해 보였다. 특히 굳게 다문 입술과 각진 턱이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유난히도 강인하게 느껴졌다.

‘제길. 이렇게 된 이상…’

동중산은 그의 모습에 찔끔 놀라 마음을 모질게 먹고 바닥에 머리를 세차게 부딪치며 절을 했다.

쿵! 쿵! 쿵!

일부러 그가 더욱 세게 머리를 찧는 바람에 바닥에 머리 부딪치는 소리가 제법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그제서야 진산월은 안색이 조금 풀어졌다.

“원래는 스승께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려야 하나, 아직 너의 스승이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구배지례는 다음으로 미루겠다.”

동중산은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럼…”

진산월은 담담하면서도 엄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너는 본파의 이십이대(二十二代) 제자가 되었다.”

젊은 진산월이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동중산에게 하대를 하는 모습은 왠지 어색해 보였다. 동중산도 약간은 계면쩍은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장문인께선 몇 대 이십니까?”

“나는 종남파의 이십일대 장문인이다. 조만간 네 사부를 정해 줄 테니 그리 알아라.”

동중산의 얼굴이 약간 우거지 상으로 변했다. 동중산의 나이는 사십이 넘었는데, 진산월의 아래 항렬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진산월 뿐 아니라 정해와 낙일방 등 그의 사형제 모두가 그에게는 사숙(師叔)이 되어 버린 것이다. 비록 동중산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종남파의 제자가 될 생각을 한 것이었으나, 자신보다 훨씬 어린 사숙들을 두게 되었으니 그의 입맛이 쓸 수 밖에 없었다. 하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진산월의 사부인 태평검객 임장홍이 살아 있었다면 그의 제자로 들어갈 수도 있었으나, 임장홍이 죽고 진산월이 종남파의 가장 웃 어른이 된 이상 동중산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사람이라 해도 종남파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진산월의 아랫 항렬이 되는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상관없다. 이곳을 벗어나기만 하면 종남파 따위와는 만날 일도 없으니 배분이야 어찌 되었건 신경 쓸 필요 없겠지.’

동중산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알을 떼구르르 굴렸다. 그때 낙일방과 정해 등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낙일방은 그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다가 히죽 웃었다.

“늙은 사질(師姪). 축하해.”

동중산의 눈꼬리가 꿈틀거리며 하늘 높이 치켜 올라갔다.

‘축하한다고? 이런 대가리에 피도 안마른 자식이 감히 반말을 해?’

하나 그가 채 성을 내기도 전에 이번에는 정해가 그를 향해 미소지었다.

“아무튼 처음으로 생긴 사질이니 반갑다고 해야 겠지. 앞으로 잘해 봅시다.”

정해는 그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동중산의 얼굴이 몇 차례 욹으락붉으락하게 변했다. 배분이 그들보다 한 배(輩) 뒤지니 그들이 아랫 사람 대하듯 하는 것을 감수해야겠지만 아무리 강호의 여우라 불리우는 동중산이라 해도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원건은 이 광경을 보고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저거야 말로 제 꾀에 제가 당한 꼴이로군. 그나저나 동중산이 결코 순순히 종남파의 제자로 남아 있으려 하지 않을텐데 그가 무슨 생각으로 저 자를 받아들였는지 궁금하군.’

상원건이 슬쩍 진산월을 쳐다보자 진산월은 곰곰히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머리가 복잡한지 그는 뒷통수를 긁적거리기도 하고 어깨를 으쓱거리기도 했다. 그때 지금까지 아무런 말이 없던 임영옥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사형.”

진산월은 그녀를 돌아보고는 이내 빙긋 웃었다.

“사매. 걱정이 돼서 그래?”

임영옥은 별빛같이 영롱한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저자는 결코 본파가 좋아서 들어온 것이 아니에요. 하지만 사형은 사형대로의 생각이 있겠지요.”

“생각은 무슨. 다만 찾아오겠다는 사람을 거절한다는 것은 전통 있는 문파가 할 짓이 아닌 것 같아서 말이지. 적어도 사부님이었다면 동중산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인물이라도 찾아온 사람을 내쫓지는 않으셨을 거야.”

“아버님이라면 물론 그러셨겠죠. 하지만 지금 본파의 장문인은 사형이에요. 괜히 아버님을 생각해서 문파의 일을 결정할 필요는 없어요.”

“나도 알아. 하지만 적어도 군림천하를 목표로 하고 있는 문파라면 동중산 정도의 인물은 충분히 다스릴 수 있어야겠지.”

임영옥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사형은 정말 저 자를 다스릴 자신이 있어요?”

진산월은 빙그레 웃었다.

“그거야 해봐야 알 일이고… 아무튼 일단은 이곳을 벗어나는게 급선무겠지?”

이어 그는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듯 한 차례 더 웃어주고는 운룡신차로 시선을 돌렸다.

“어떻소? 이제는 슬슬 가야할 때라고 생각되는데…”

운자추는 사태가 의외의 방향으로 전개되자 내심 당혹감을 느꼈는지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나 이내 운룡신차에서 그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과연 당신은 재미있는 사람이오. 새로운 문하제자를 맞게 된 것을 축하드리는 바이오.”

진산월은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을 머금었다.

“나를 좋게 보아주니 고맙소. 나도 운공자가 자신이 내뱉은 약속은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나는 물론 귀하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요.”

이어 운룡신차에서 갑자기 나직하면서도 힘있는 운자추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 주변에 많은 고수들이 오신 것을 알고 있소. 하지만 이곳 용문 일대는 본 운문세가의 관할이므로, 본가의 체면을 보아 용문에서는 가급적 조용히 지내주셨으면 하오.”

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는데도 아주 멀리까지 퍼져나가고 있었다. 원래 목소리에 공력(功力)을 실어 담아 보내는 것은 웬만큼 무공을 익힌 고수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지금처럼 나직한 음성을 또렷하게 사방으로 멀리 내보낸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것만 보아도 운자추의 공력이 소문보다 결코 못하지 않음이 분명했다. 그러자 멀지 않은 숲 속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운공자의 말씀은 알아 듣겠소. 그런데 용문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되는거요?”

그자의 음성은 거칠고 카랑카랑 했으나 강호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그가 일부러 음성을 변조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운자추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나는 용문 밖에서의 일까지 관여할 생각은 추호도 없소.”

그러자 카랑카랑한 음성은 이내 의미심장한 흉소를 날렸다.

“흐흐… 운공자의 뜻은 잘 알겠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절대로 용문에서는 손을 쓰지 않을 거요.”

그 말에 주위에서 숨어 있는 많은 고수들도 동조하듯 여기저기서 짤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도 그렇소.”

“우리도 운공자의 의견을 존중해 드리겠소.”

이곳에 모인 고수들의 수는 적지 않았고, 그들 중 상당수는 강호무림에서 혁혁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선뜻 운자추의 말에 협력하는 것은 운자추가 그만큼 상대하기 까다로운 고수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뒤에는 운문세가가 버티고 있으므로 누구도 함부로 그의 비위를 거스리려 하지 않았다. 더구나 운자추는 용문 밖에서의 일은 전혀 간여하지 않겠다고 공언(公言)했으니 그들로서는 공연히 이곳에서 손을 써서 운문세가를 적으로 만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운자추는 다시 진산월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나는 약속을 지켰으니 당신들은 서슴없이 이곳을 떠나도록 하시오.”

종남파 고수들의 안색에는 모두 분노와 낭패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들은 설마 운자추가 이와 같은 방법을 쓰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말이야 약속을 지킨 것이지, 결국은 그들이 용문을 벗어나면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진산월은 오히려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지은 채 선뜻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고맙소.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보겠소.”

이어 누가 무어라고 할 사이도 없이 선뜻 몸을 돌리는 것이었다. 정해가 재빠르게 그에게 다가왔다.

“장문사형. 이대로 이곳을 벗어나면…”

진산월은 가볍게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이곳에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떠나려면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다.”

정해는 평소에는 영리하고 총명한 인물이었으나 지금은 의아함을 참지 못하고 급히 물었다.

“좋은 기회라뇨?”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날이 어두워진다. 지금 출발하면 용문을 벗어날 때 쯤에는 주위가 캄캄해져서 그들의 추격을 벗어나기가 용이할 것이다.”

“그러면 아예 어두워진 다음에 떠나는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더 지체하면 그들에게 오히려 기회를 주게 된다. 지금은 그들도 미처 용문 밖에 포위망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므로 재빨리 행동한다면 의외로 수월하게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어 진산월은 응계성이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응계성은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 바닥에 누워 있었으나 혈색은 조금 전보다는 한결 좋아진 상태였다. 진산월은 낙일방을 손짓해 불렀다.

“일방. 이리 오너라.”

낙일방은 황급히 그에게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장문사형?”

진산월은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한 자 한 자 분명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계성을 너에게 맡기겠다. 그를 책임질 수 있겠느냐?”

낙일방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그를 마주보며 자못 비장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맡겨 주세요. 응사형은 제가 반드시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지키겠습니다.”

진산월은 한 차례 더 각별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다가 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너를 믿겠다.”

낙일방은 평소와는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응계성에게로 달려갔다. 그는 자신의 옷자락을 길게 찢더니 부상을 당한 응계성의 팔이 겹질리지 않게 조심해서 그를 등뒤에 업고는 자신과 응계성의 몸을 찢은 옷자락으로 칭칭 동여매었다. 그리고는 양 손에 자신의 검과 응계성의 검을 나누어 쥐고는 몇 차례 흔들어 보았다. 진산월은 잠시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다시 정해와 임영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는 선두를 맡고, 사매는 후미를 책임진다. 나는 정해의 뒤에서 그를 보조해 주겠다.”

그때 상원건이 그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후미를 여자에게 맡긴다는 건 너무 위험한 일 아니오? 괜찮다면 내가 맡았으면 하오만…”

진산월은 그를 돌아보며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매의 무공이라면 별 탈이 없을 겁니다. 그보다 상대협께서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낙일방과 응계성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상원건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두 사람은 내가 잘 지켜보겠소.”

이런 상태에서 후미를 맡는다는 것은 전체 일행의 안위(安慰)를 책임지는 중대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만큼 위험천만한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상원건이 아무리 강호의 이름난 고수라고 해도 종남파의 입장에서는 엄연한 외인(外人)인 그에게 그런 일을 부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진산월의 말대로 임영옥의 무공이라면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가? 상원건이 보기에도 일전에 목격한 그녀의 무공은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던 것이다. 상원건은 상소홍을 이끌고 낙일방의 옆으로 갔고, 정해와 임영옥은 각기 일행의 가장 앞과 뒤로 위치를 잡았다. 이제 남은 사람은 동중산 뿐이었다. 동중산은 한쪽에서 눈알을 떼구르르 굴리며 이 광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원래는 그도 다가가서 역할을 자청(自請)해야 정상이겠지만, 동중산은 마치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 양 멀찌감치 떨어져서 모른 척 하고 있는 것이다. 진산월은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너는 앞에 있겠느냐, 뒤에 있겠느냐?”

동중산은 그가 자신에게 선택권을 주자 오히려 약간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사실 그는 진산월이 자신에게 어떤 일을 맡기든 핑계를 대어 빠질 생각이었다. 가급적이면 부상을 당한 응계성을 업고 있는 낙일방 부근에서 얼쩡거리며 기회를 엿보다가 포위망이 허술해지면 혼자서 소리없이 내뺄 생각이었다. 그런데 진산월이 태연히 그에게 어디에 있을거냐고 묻자 아무리 낮짝이 두껍고 뻔뻔한 그도 가장 안전한 한가운데 있겠다는 말이 선뜻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번개같이 머리를 굴리다가 제법 담대한 태도로 말했다.

“제자는 후미를 책임진 사고(師姑)님을 돕겠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발적으로 가장 위험한 일을 자청한 것 같았으나, 사실은 나름대로의 치밀한 계산에 의한 판단이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여자인 임영옥의 근처에 있으면 나중에 도망치는 것이 더 수월할 것 같았던 것이다. 물론 뒤에서 쫏아오는 고수들에게 꼬리를 잡힐 위험도 있었으나, 어차피 앞이든 뒤든 위험하긴 마찬가지일테고 그럴 바에는 언제라도 쉽게 몸을 뺄 수 있는 뒤가 더 낫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진산월은 그의 의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을 했다.

“좋다. 그럼 이제 출발을 하자.”

그는 운룡신차에서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운자추를 향해 가볍게 포권을 하고는 일행을 이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주위의 짙은 어둠 속에서 수많은 인영들의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스스슥….

그들의 수는 얼핏 보기에도 결코 적지가 않았다. 운룡신차와 네 명의 백의 청년들은 진산월 일행이 떠나가는 광경을 묵묵히 지켜본 채로 그 자리에 말없이 서 있었다. 진산월 일행은 이수 강변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숲속 너머로 사라지자 그제서야 운룡신차 안에서 운자추의 침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혁련노사께서는 저들을 쫏지 않을 생각이시오?”

그러고 보니 혁련삼은 화의 노인과 함께 여전히 처음의 위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혁련삼은 운자추의 음성을 듣자 얼굴에 징그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흐흐… 그러는 운대공자는 설마 저들을 순순히 보내줄 생각이란 말인가?”

“나는 물론 그들을 무사히 보내주기로 약속을 했으니 당연히 그럴 생각이오.”

혁련삼의 입꼬리에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흐흐… 다른 사람은 속여도 노부는 속이지 못하네.”

“그게 무슨 뜻이오?”

“운대공자가 그 물건을 얼마나 가지고 싶어하는지 이미 환히 알고 있다네. 운대공자는 절대로 동중산이 그 물건을 가지고 자신의 수중을 벗어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사람이 아닐세.”

운자추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혁련노사께서 나에 대해 그토록 자세히 알고 있을 줄은 몰랐구료. 그렇다면 혁련노사께서는 내가 어떻게 하리라고 보시오?”

혁련삼은 힐끗 자신의 옆에 서 있는 화의 노인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미리 묵계(默契)가 되어 있기라도 한 듯 화의 노인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불쑥 입을 열었다.

“그거야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는 일이지.”

그의 음성은 부드럽고 온화했으나 말꼬리가 묘하게 비틀려져 있어 듣는 사람의 마음에 괴이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마치 금시라도 새된 비명을 내지를 것 같은 나이 어린 새댁의 음성처럼 불안한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운자추는 이미 화의 노인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는지 음성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평온을 유지했다.

“변대협(卞大俠)께서 멀리 선하령(仙霞嶺)을 떠나 이곳 용문까지 오셨는데 미처 마중을 나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변대협께선 무슨 고견(高見)이 있으신지요.”

화의 노인은 운자추가 자신의 정체를 궤뚫어보고 있음을 알고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고견이랄 것은 없고, 단지 노부는 자네가 그들을 사지(死地)로 내몬 이상 필시 다른 복안(腹案)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 뿐일세.”

“제가 그들을 사지로 내몰다니요?”

“용문을 벗어나는 길은 오직 세 갈래 뿐이네. 그중 어느 쪽을 가더라도 결국은 숨어 있는 고수들의 매복을 피할 수 없지. 자네는 그들이 별 수 없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거라고 생각하고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운룡신차에서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화의 노인은 도룡거사(屠龍居士) 변천붕(卞天鵬)이라는 인물로, 심계가 깊고 무공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강하여 누구나가 두려워 마지 않는 무서운 고수였다. 그는 멀리 절강성(浙江省)의 선하령에 칩거하여 좀처럼 무림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오늘 장강을 넘어 하남 땅에 나타났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운자추는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변천붕의 말이나 행동으로 보아 그도 동중산이 지닌 물건에 눈독을 들이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성미가 급하고 독선적인 혁련삼이 변천붕과 친분이 있다는 것은 운자추로서는 예상 밖의 일이었다. 혁련삼 하나라면 운자추도 충분히 상대할 자신이 있었으나 변천붕마저 가세한다면 쉽사리 사태를 낙관할 수 만은 없었다. 변천붕은 지략이 뛰어나고 심기가 깊어 혁련삼보다 몇 배나 더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이었다. 한참 후에야 운자추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변대협이 이 자리에 남아 계신 것은 단순히 그 일 때문만은 아닐 것 같은데…”

변천붕의 얼굴에 알 듯 모를 듯한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운대공자의 눈치는 확실히 빠르군. 노부는 운대공자에게 한 가지 제안할 것이 있어서 지금껏 기다리고 있었네.”

“그러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서슴치 말고 말씀하십시오. 귀를 씻고 경청(敬聽)하겠습니다.”

“노부는 자네가 그 물건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네.”

“변대협께서 원하

시는 것은?”

변천붕의 눈에서 번갯불같은 섬광 한 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대신에 노부는 동중산을 데리고 가겠네.”

운자추는 그의 말이 예상밖인 듯 불쑥 되물었다.

“물건은 제가 가지고 변대협은 사람을 취하겠다는 말씀입니까?”

변천붕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네. 자네에게는 전혀 손해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어떤가, 승낙하겠나?”

운자추는 다소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중산이 가치가 있는 것은 그 물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건이 없는 동중산은 거추장스럽고 귀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그런데 대체 변천붕은 무슨 이유에서 물건 대신 동중산을 원하는 것일까? 운자추는 상대가 심계가 깊기로 이름난 변천붕이어서 그의 뜻밖의 제안에 더욱 신경이 거슬렸다.

‘대체 저 늙은이가 무슨 생각에서 저런 제안을 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을 굴려 보았으나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변천붕이 말한대로 자신으로서는 전혀 손해볼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제안을 거절하여 변천붕을 적으로 돌린다면 그보다 몇 배 어려운 일이 닥칠지 몰랐다. 변천붕의 의도가 어찌되었든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더 늦기 전에 동중산에게서 물건을 입수하는 일이었다. 운자추는 마음을 결정하고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변대협은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분이시라 스스로 말씀하신 약조는 다른 누구보다도 잘 지키시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변천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노부도 자네가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그럼 이제 결정되었군.”

운자추는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야릇한 미소를 보자 다시 마음이 불안해졌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좋습니다. 그런데 변대협께서는 어떻게 동중산을 잡을 생각이십니까?”

“동중산은 약기가 여우와 같고 심성이 사갈(蛇蝎)과 같은 자일세.”

“알고 있습니다.”

“그런 동중산이 제 발로 종남파의 문하로 들어간 것은 그들의 힘을 빌려 이곳을 벗어나보기 위한 발버둥일세.”

그것은 굳이 변천붕이 말하지 않아도 운자추도 충분히 짐작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변천붕은 쉴 사이 없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동중산은 기회를 보아서 그들에게서 빠져나와 도망치려 할걸세.”

운자추는 맞장구를 쳤다.

“틀림없이 그럴 겁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게 분명하네.”

그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위기에서 벗어난 동중산이 무엇때문에 다시 호랑이 굴 속같은 이곳으로 돌아온단 말인가? 하나 운자추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게 분명했다. 그는 오히려 짤막한 탄성을 토해냈다.

“음! 변대협도 짐작하고 계셨군요.”

변천붕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그를 잡고 있다가 순순히 종남파에 넘겨줄 때 알아 차렸지. 동중산은 몸에 그 물건을 지니고 있지 않았겠지?”

“확실히 그렇습니다. 저는 곽당이 종남파의 고수와 싸우는 동안에 사람을 시켜 그의 몸을 뒤져보게 했지만 그의 몸에는 아무 것도 없더군요.”

“그래서 자네는 선뜻 그를 그들에게 인도한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그 약아빠진 동중산은 자신이 붙잡힐 경우를 생각해서 그 물건을 다른 곳에 숨겨둔 게 확실하네. 하지만 그는 계속 이곳 용문 일대를 벗어난 적이 없으므로 그가 물건을 숨겨둔 장소는 이 근처 밖에는 없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변천붕은 운룡신차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그래서 자네는 이곳을 지키고만 있어도 조만간에 동중산이 다시 돌아오리라고 생각한 거겠지. 하지만 자네의 생각은 한 가지가 잘못 되었네.”

운자추는 궁금한 듯이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동중산은 잔머리를 굴리는 것으로는 강호에서도 손꼽히는 자일세. 그런 그가 자네의 수하들이 자신의 몸을 수색해서 물건이 없음을 알고 난 다음에 자신을 순순히 놓아준 것을 어떻게 생각하겠나?”

그 말에 운자추는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토해냈다.

“음….”

“그는 틀림없이 자신이 물건을 다른 곳에 숨겨놓았다는 사실을 자네가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할 걸세. 그런데도 자네가 기다리고 있을 게 뻔한 이곳으로 그가 다시 돌아올 리가 있겠나?”

그것은 운자추도 미처 생각치 못한 것이었다. 확실히 변천붕의 말대로 동중산은 운자추가 이곳에서 자신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할게 분명했다. 이곳 외에는 달리 물건을 숨겨둘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중산은 결코 쉽사리 이곳으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운자추로서는 언제까지고 마냥 그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에 결국 동중산을 생포하는 일은 당초 생각한 것만큼 수월하게 해결될 일이 아닐 것이다. 변천붕은 눈을 번쩍이며 말을 계속했다.

“또 하나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은 과연 동중산의 몸에 그 물건이 없는 것이 확실하냐 하는 것일세.”

“그것은 사상검수의 수장(首長)인 소일이 확인해 보았습니다. 소일. 내가 직접 말씀드려라.”

소일이 성큼 앞으로 나서며 딱 부러지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그 자의 몸을 구석구석 빠지지 않고 뒤져 보았습니다. 심지어는 입속과 항문 부근까지 뒤져보았으나 어떠한 물건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변천붕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물론 자네는 그의 몸을 잘 뒤져보았겠지. 하나 그의 몸 속까지 들여다 보지는 않았지 않는가?”

소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살아 있는 사람의 몸 속을 어떻게 들여다 본단 말입니까? 그리고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물론 일반적으로야 그럴 필요까지는 없겠지. 하지만 동중산은 워낙 교활한 놈이라 방심할 수가 없단 말일세.”

이어 변천붕은 운룡신차를 향해 물었다.

“내가 알기로는 자네가 찾고 있는 물건은 하나의 열쇠라고 들었네. 그게 사실인가?”

운자추는 즉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것의 크기는 어느 정도인가?”

“어린 아이의 손바닥 만합니다.”

변천붕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삼키는 것도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군.”

그 말에 소일의 안색이 핼쓱하게 변했다. 그제서야 변천붕이 말한 뜻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동중산이 그 물건을 이미 삼켜 버렸다면 아무리 그의 몸을 뒤져도 발견하지 못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운자추는 이미 변천붕이 처음에 물건의 크기를 물었을 때부터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던 듯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확실히 변대협의 말씀이 옳습니다. 동중산이 그 물건을 자신의 뱃속에 넣어 가지고 다닐 수도 있겠군요.”

“그렇게 귀중한 물건을 그가 다른 곳에 두고 다닌다는 건 별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 그러니 그가 이곳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운자추는 변천붕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중산의 성격으로 보아 그가 물건을 다른 곳에 숨겼을 확률보다는 자신의 몸 속에 넣고 다닐 확률이 훨씬 높았다. 뿐만 아니라 설사 물건을 이 근처에 숨겨져 있다 할지라도 이미 운자추가 기다리고 있음을 안 이상 단시일 내에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운자추는 자신의 생각이 확실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변대협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동중산은 이곳을 벗어난 다음 종남파 고수들의 눈을 피해 달아날 걸세. 그런 연후 조용한 곳에 가서 뱃속의 물건을 몸 밖으로 배설하여 꺼내려고 하겠지.”

그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를 잡기 위해서는 그가 종남파에서 도망쳐 혼자의 몸이 되었을 때가 가장 적합하네.”

“하지만 그가 언제 도망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변천붕의 얼굴에 다시 예의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거야 우리 하기 나름이겠지.”

변천붕의 말은 단순한 것 같았으나 그 속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운자추는 두뇌가 명석한 인물이었으므로 단번에 변천붕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변대협의 말씀은 그가 도망가는 시기를 우리가 조종할 수도 있다는 것이로군요.”

“확실히 자네와는 이야기 하기가 쉽군. 그가 도망갈 수 있는 기회를 우리가 일부러 만들어 준다면 우리는 그의 행동을 사전에 파악할 수 있을 걸세.”

“그를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도망치게 한 다음 그를 쫓으면 어렵지 않게 그를 생포할 수 있겠군요.”

변천붕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렇지. 결국 그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우리의 손 안을 벗어날 수 없을 걸세.”

운자추는 변천붕의 계략이 확실히 탁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운자추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물었다.

“변대협께서는 무슨 수로 그를 도망치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변천붕의 음성이 갑자기 낮게 가라앉았다.

“그 것에는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제 도움이 필요하다고요?”

“그렇지. 자네가 도와준다면 동중산에게 도망칠 기회를 주는 것은 결코 어렵지가 않네.”

이어 변천붕은 전음으로 운자추를 향해 무어라고 소근거렸다.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운자추는 변천붕이 왜 독자적으로 동중산을 잡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과 손을 잡으려 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변천붕의 계략은 확실히 절묘하기 그지 없었으나, 그것은 운자추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한 방법이었다. 만약 그의 도움이 필요치 않았다면 변천붕은 절대로 운자추와 손을 잡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변대협의 지략은 놀랍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운자추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변천붕에 대해 한층 더 경계심이 끓어 올랐다. 동중산이 자신들의 수중에 떨어진다면 그때 가장 주의해야 할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도 변천붕이 될 것이다. 지금은 비록 협력관계에 있지만 그가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운자추는 실로 오랜만에 방심할 수 없는 상대를 만나게 되었다는 생각에 마음 속으로 묘한 흥분이 피어 오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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