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권 영웅대회(英雄大會)편 : 1화
3권 – 영웅대회(英雄大會) 편
제22장. 봉황금시(鳳凰金匙)
황의 미녀는 피부가 백옥같이 희고 고왔고, 눈빛이 영롱하기 그지없어 마치 보석을 박아놓은 것 같았다. 그녀를 보자 누산산은 언제 화를 냈느냐는 듯 얼굴이 활짝 펴지며 그녀에게 쪼르르 달려가는 것이었다.
“셋째 언니.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누산산이 금시라도 자신의 품속으로 뛰어들 듯한 기세로 다가오자 황의 미녀는 슬쩍 손을 내밀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육매에게서 말을 듣고 급히 달려왔다.”
누산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요?”
“왜긴. 네가 무슨 엉뚱한 짓을 벌일지 몰라 걱정스러워서 그랬지.”
누산산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엉뚱한 짓을 벌이긴요? 내가 무슨 사고뭉치인 줄 아세요?”
황의 미녀는 나직하게 웃으며 발갛게 상기된 그녀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호호… 그거야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니?”
누산산이 바짝 약이 올라 무어라고 볼멘 소리를 하려 하자 황의 미녀는 재빨리 진산월 일행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진산월은 그녀가 일전에 보았던 천봉팔선자 중의 셋째인 영봉 금교교임을 알아보고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안녕하셨소?”
금교교는 살짝 고개를 숙여 답례를 했다.
“또 만나게 되었군요. 그동안 별 일 없으셨어요?”
무심코 묻고 나서 금교교는 아차 싶어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별 일 없을 리 있겠는가? 지금 그녀가 보기에도 종남파 일행들 중에는 부상당한 채 아직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사람도 있었고, 안색이 핼쓱한 자도 있어서 별로 좋은 상태가 아님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었다.
“강호의 물은 제법 차갑지만 그럭저럭 견딜만 하오. 그보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금교교는 검게 빛나는 보석처럼 영롱한 눈을 반짝였다.
“말씀하세요.”
진산월은 금교교의 옆에 서 있는 누산산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분 소저의 말로는 봉황금시가 천봉궁의 물건이라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오?”
금교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확실히 봉황금시는 본 궁의 물건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는구료.”
금교교는 잠시 진산월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붉은 입술을 열었다.
“십 여년 전까지만 해도 봉황금시는 본 궁의 궁주(宮主)님의 신물(信物)과도 같은 것이었어요. 그러다 궁주님께서 당시 어느 분에게 그것을 선물하셨고, 그 후로 봉황금시는 더 이상 본 궁의 소유가 아니게 되었어요.”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가 다시 물었다.
“천봉궁주께서 봉황금시를 선물했다는 그 분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겠소?”
금교교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궁주님의 허락 없이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 그 물건이 어떻게 해서 다시 강호(江湖)로 나오게 된거요?”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겠군요. 아무튼 그 물건이 본 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어요.”
“저 분 소저의 말로는 그 봉황금시를 본 파의 제자인 동중산이 입수했다고 하오.”
금교교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문은 나도 들었어요. 동중산이 어떻게 봉황금시를 입수했는지 알고 계시나요?”
“아직 그에게 그 일에 대해서 자세히 물어보지 못했소. 그보다 천봉궁에서는 다시 그 물건을 돌려 받기를 원하는 거요?”
금교교는 잠깐 머뭇거렸다. 진산월의 질문은 얼핏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당연한 것 같았지만 그 속에는 미묘한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천봉궁주가 그 물건을 남에게 주었다면, 그의 강호상에서의 신분이나 지위로 그 물건을 다시 돌려 받는다는 것은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더구나 당시에 물건을 받은 당사자가 아닌 제 삼자에게 물건을 돌려 달라고 한다는 것은 이치상으로도 맞지 않았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그녀가 그 물건을 돌려 받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지금 돌려 받아서는 안되었다. 금교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예의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본 궁의 궁주님께서 결정하실 문제라서 내가 지금 무어라고 말할 상황이 아닌 것 같군요. 단지 우리는 그 물건으로 인해 무림이 시끄러워 지거나 나쁜 마음을 먹은 자들의 손에 넘어가 잘못된 일에 쓰일까 봐 걱정될 뿐이에요.”
“무림이 시끄러워 진 것은 이미 벌어진 일이니 그건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소. 하지만 다른 자들의 손에 넘어가게 하지는 않을테니 그 점은 안심해도 좋을거요.”
그때 아까부터 입을 열고 싶어서 좀이 쑤셔 하던 누산산이 뾰쪽한 음성으로 코웃음을 쳤다.
“흥!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는군요. 하지만 당신들이 바로 그 나쁜 마음의 소유자들인지 어떻게 알아요?”
진산월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웃었다.
“그거야 우리를 믿어달라고 할 수 밖에… 어쨌든 앞으로 자주 만나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지 않겠소?”
누산산은 쌍심지를 곤두세운 채 가느다란 허리에 손을 올려 놓으며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
“자주 만나다니… 우리가 왜 당신네들을 자주 만나야 한단 말이죠?”
진산월은 멋적게 웃으며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아무래도… 강호에서 생활하다보면 종종 마주치지 않겠소? 그리고 사실 나는 왠지 우리들이 조만간에 또 다시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구료.”
누산산의 몸이 한 차례 흠칫 거렸다. 하나 그녀가 무어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금교교가 살짝 그녀의 손을 잡으며 앞으로 나섰다.
“아무튼 지금으로서는 진장문인의 말씀을 믿을 수 밖에 없겠군요. 우리는 진장문인께서 그 물건을 잘 보관하고 계시리라고 믿고 있겠어요.”
그녀의 말은 아주 교묘해서, 자칫하면 진산월은 봉황금시에 대한 권리는 전혀 없이 보관의 책임만 떠맡는 격이 되고 말 것 같았다. 진산월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알겠소. 소저의 말대로 동중산을 잘 타일러 보겠소. 소저께서도 귀궁의 궁주께 잘 말씀드려서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해주셨으면 하오.”
이번에는 금교교의 얼굴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무골호인(無骨好人)처럼 웃고 서 있는 진산월을 응시하며 속으로 번개같이 생각을 굴렸다.
‘이 사람은 둔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상당히 날카롭구나. 자칫 방심했다가는 의외의 낭패를 당할지도 모르겠는걸.’
그녀는 천봉팔선자 중에서도 가장 심기가 깊고 지략이 뛰어나서 천봉궁의 사실상 두뇌 역할을 해 오고 있었다. 그녀는 강호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상대해 왔지만 남과의 거래에서 손해를 본 적은 별로 없었다. 그녀는 한 차례 더 기이한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하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우리 쪽에서는 다른 문제가 없을 거예요. 진장문인은 몸 조심 하세요.”
이어 그녀는 누산산의 손을 잡고 몸을 날렸다.
“가자.”
누산산은 아직 떠나기 싫은 눈치였으나 금교교가 자신의 손을 잡은 채 이미 허공으로 몸을 띄우고 있는 상태인지라 어쩔 수 없이 신법을 펼쳐 그녀를 따라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진산월을 향해 소리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흥! 만약 봉황금시를 엉뚱한 놈들 손에 넘기기라도 하는 날에는 당신들은 단단히 각오해 두는게 좋을 거에요. 특히, 기생오라버니 같은 당신!”
누산산은 낙일방을 쏘아보았다. 낙일방은 멀거니 서있다가 그녀가 자신을 지목하자 움찔하여 그녀를 쳐다보았다. 누산산은 짐짓 고운 아미를 치켜 뜨며 눈을 부라렸다.
“다음에 다시 만날 때도 함부로 입을 놀리면 그땐 본 낭자가…”
그녀의 다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때 금교교가 그녀의 몸을 잡아 끌며 입을 열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고 어서 가자.”
“읍… 어… 언니…”
누산산은 몇 번 발버둥치다가 금교교의 손에 반강제로 이끌리며 어둠속으로 멀어져 갔다. 두 여인의 신법은 과연 뛰어나서 신형을 몇 번 날리지도 않았는데 이미 아득히 멀리로 사라지고 있었다. 낙일방은 멋적게 피식 웃고 있다가 진산월에게로 다가갔다.
“장문사형. 그런데 봉황금시라는게 대체 뭐죠? 굉장히 귀중한 것 같던데 그녀들이 순순히 물러나니까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드는데요.”
진산월은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무언지는 차차 알게 되겠지. 우선 그보다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이어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강변에 세워져 있는 나룻배로 걸음을 옮겼다. 그제서야 중인들은 퍼뜩 정신이 들어 그를 따라 나룻배로 다가갔다. 주인이 없어진 나룻배는 흔들리는 물살에 몸을 맡긴 채 삐걱거리고 있었다. 나룻배는 멀리서 볼 때보다는 그리 작지 않아서 중인들이 모두 올라갔는데도 그다지 좁게 느껴지지 않았다. 진산월은 아직도 배의 바닥에 쓰러져 있는 동중산을 내려다 보다가 손을 내밀어 짚혔던 그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혈도가 풀리자 동중산은 어색한 표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동중산이 제아무리 낯짝이 두껍고 뻔뻔하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태연할 수는 없었다. 동중산은 얼굴을 붉히며 중인들의 표정을 살피다가 진산월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자… 장문인께서 제자를 구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천하의 동중산도 이때만은 목소리가 어색하게 굳어졌다. 중인들은 묵묵히 동중산을 쳐다본 채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 비록 입으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동중산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는 실로 다채로운 표정들이 떠올라 있었다. 동중산으로서는 그야말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때 진산월이 불쑥 입을 열었다.
“다친 곳은 없느냐?”
그의 음성은 여전히 평온했고,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떠올라 있어 문파 제자를 염려하는 전형적인 장문인의 모습이었다. 그럴수록 동중산은 더욱 어색해서 어찌해야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당최 진산월의 지금 속마음을 짐작할 수 없어서 불안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동중산은 머쓱한 표정으로 엉거주춤하게 서 있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예. 다행히…
진산월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정해를 돌아보았다.
“정해. 배를 띄워라. 더 늦기 전에 이곳을 떠나는게 좋겠구나.”
“알았습니다, 장문사형.”
정해는 재빨리 대답하고는 노를 저어 배를 강심(江心)으로 몰고 나아갔다.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웠고, 멀리 하늘에는 새벽별이 떠오르고 있었다. 나룻배를 타고 깊은 밤의 강물 위를 흐르듯 미끄러져 가는 것에는 나름대로 야릇한 정취가 있었다. 하나 동중산은 그러한 정취를 감상할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는 비록 혈도가 제압당해 쓰러져 있었지만, 귀는 막혀 있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전에 천봉팔선자 중의 두 사람이 나타나 봉황금시에 대해 이야기한 내용을 모두 듣고 있었다. 그는 틀림없이 진산월이 봉황금시에 대해 자신을 추궁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진산월은 배를 띄운지 한참이 되었는데도 그 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동중산은 절로 초조해져서 안절부절하며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왜 아무 것도 안 물어 보는거지? 이 자는 내가 도망칠 수 없는 곳으로 가서 나를 추궁하려는 걸까?’
동중산은 계속 슬쩍슬쩍 진산월의 표정을 살펴 보았으나 진산월은 뱃전에 팔짱을 낀 채 어두운 강물위를 응시하고 있을 뿐,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이상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진산월이 아니라면 다른 누구라도 동중산을 꾸짖거나 야단을 쳐야 정상일텐데 아무도 그러한 기색을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정해는 묵묵히 노만 젓고 있었고, 낙일방은 응계성의 붕대를 새 것으로 갈아매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임영옥 또한 동중산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진산월만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동중산은 불안함을 감출 길 없어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우연히 상원건과 시선이 마주쳤다. 상원건은 동중산의 불편한 모습을 보고는 이내 희미하게 웃는 듯 했으나,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 버렸다. 동중산은 그저 쓴 입맛을 다시며 멍하니 선 채로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진산월은 여전히 뱃전에 서서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으며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때 인기척과 함께 누군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진산월은 돌아보지 않아도 가까이 온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미묘하게 자극하는 담담하고 그윽한 향기, 아련한 체취, 그리고 그녀만의 독특한 내음… 임영옥은 진산월의 옆에 나란히 선 채 죽립을 들고 진산월을 바라보았다.
“괜찮으세요?”
한참 후에 임영옥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진산월은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맑고 깨끗했으나, 그 속에는 숨길 수 없는 걱정의 빛이 담겨 있었다.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견딜만 해.”
사실 진산월은 조금 전에 심옥당과의 싸움에서 비록 그를 물리치긴 했으나 적지 않은 내상(內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억눌러서 내상이 도져 있는 상태였다. 그가 가끔씩 말을 멈추고 가만히 있는 것도 치밀어 오르는 핏물을 눌러 삼키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들을 노리는 인물들이 계속 등장하여 그들에게 약세를 보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룻배를 이용해 동중산을 제압했던 노인도 진산월이 부상을 당한 것을 알았다면 그토록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내의 사람들중 누구도 그러한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임영옥만은 처음부터 진산월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적지 않은 내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진산월이 피를 토하고 쓰러질까봐 내심 조마조마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영옥은 다시 무어라고 입을 열려다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사형은… 항상 모든 짐을 혼자서만 지려고 해서 탈이에요.”
“……”
“제가 지켜드릴테니 상처를 치료하세요.”
“아직은 안돼.”
임영옥은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왜요?”
진산월은 천천히 시선을 어두운 강물 위로 옮겼다.
“아직은 상황이 끝난게 아니야.”
“그럼…”
“조금 전에 심옥당이 떠나면서 한 말이 맞다면 그자는 마지막 기회를 노리려 할거야. 그자에게 헛점을 보일 수는 없어.”
“그자가 누구지요?”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운자추.”
임영옥의 눈빛이 죽립을 뚫고 나올 만큼 강렬하게 반짝거렸다.
“역시 그로군요. 그가 심옥당을 사주한 것인가요?”
“그래.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운문세가는 신목령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해.”
“그렇다면 조금 전의 그 노인도 혹시 그의 지시를 받은게 아닐까요?”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십중팔구 그렇겠지. 아무튼 이걸로 보아 운자추는 그 물건을 쉽게 포기하려 하지 않을 속셈인게 확실해.”
“그는 어떻게 하려 할까요?”
“심옥당과 그 노인이 모두 실패한 지금 그에게 남은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뿐이야.”
“어떤 것이죠?”
“본인이 직접 나서는 것이지.”
임영옥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할 길도 오직 하나 뿐이로군요.”
“그래.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그가 나타날거야. 그를 물리쳐야만 비로소 쉴 수가 있지.”
임영옥의 미간에 다시 그늘이 드리워졌다.
“사형은 그때까지 참을 수 있겠어요?”
진산월은 그녀를 응시하며 빙그레 웃었다.
“사매, 잊었어? 참는건 나의 주 특기잖아.”
임영옥도 따라 웃었으나,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녀는 진산월의 상세(傷勢)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괘장권구식은 비록 절초이나 심옥당의 낙화십팔산수를 단숨에 물리칠 만큼의 위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진산월이 심옥당을 물리친 것은 기병(奇兵)의 묘(妙)를 살려 상대를 방심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 와중에 무리를 하여 기혈(氣血)이 역류하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종남파의 내공심법이 너무도 보잘 것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로부터 비전(秘傳)되어 오던 육합귀진신공이 실전된 이후, 종남파의 진전내공은 현청건강기(玄淸乾?氣)와 태을신공(太乙神功) 등 몇 개의 극소수 구결 밖에 남지 않았다. 그중 현청건강기는 비록 패도(覇道)적인 위력이 있으나 구결이 정순하지 못하고 심오한 맛이 부족하여 자칫하면 오히려 낭패를 당하기 일쑤인 헛점투성이 심법이었다. 태을신공은 나름대로 정묘한 맛이 있으나 본연의 위력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태평검객 임장홍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 내공 중 각자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여 익히도록 했고, 진산월은 파괴적이지만 위험천만한 현청건강기보다는 위력은 떨어지나 정심(精深)한 태을신공을 택했다. 진산월의 태을신공은 임장홍에 필적하는 팔성(八成)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낙화십팔산수에 내재되 있는 심옥당의 경력(勁力)을 온전하게 감당해 내지 못했던 것이다. 처음 부상을 입었을 때라면 어느 정도의 운기조식 만으로도 쉽게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겠으나, 지금은 그것을 억지로 억누르고 있느라 상세가 악화된 상태였다. 이런 몸으로 강북(江北)에서도 손꼽히는 기재라는 운자추와 운문세가의 고수들을 상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진산월은 결코 뒤로 물러서려 하지 않을 것이다.
임영옥은 내심 탄식이 흘러 나왔으나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봉황금시에 어떤 비밀이 있길래 운자추를 비롯한 군웅들이 그토록 집요하게 그 물건을 노리는지 이유를 모르겠군요. 사형은 혹시 그에 대해 짚히는 거라도 있어요?”
“나도 그 점을 계속 생각해 보았는데… 몇 가지 가능성이 있지.”
진산월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우선은 그것이 이름 그대로 귀중한 보물이나 기서(奇書)를 보관한 창고를 열 수 있는 열쇠의 역할을 한다는 거야.”
“그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로군요.”
“가장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지. 하지만 만약 봉황금시가 정말 그런 용도에 쓰이는 것이라면 천봉궁주가 왜 그것을 남에게 선물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지.”
“남에게 선물할 생각이었으면 열쇠 보다는 보물이나 기서를 직접 주는게 더 낫겠죠.”
“그렇지. 하지만 봉황금시를 사용할 장소를 몰라서 열쇠만 주었을 확률도 있지.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왜 사용할 장소도 모르는 물건을 남에게 선물했느냐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게 되지.”
“조금 복잡해 지는군요. 또 다른 가능성은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을 가능성도 있어. 봉황금시가 특정한 문파나 개인의 신물(信物)로, 그것을 지니고 있으면 문파나 개인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권위를 지닌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지.”
임영옥은 반론(反論)을 제기했다.
“만약 그게 신물이라면 천봉궁의 신물일 확률이 가장 높은데, 그렇다면 조금 전의 그녀들이 선뜻 물러난게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그렇다고 다른 문파의 것이라고 한다면 왜 천봉궁주가 다른 문파의 신물을 남에게 주었는지도 의아스럽고요.”
“그것도 아니라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 밖에 없군.”
“그게 무엇인가요?”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봉황금시 자체가 특이한 효능을 지닌 하나의 보물이라는거지.”
임영옥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이내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 같아요. 그렇다면 천봉궁주가 그것을 남에게 선물한 경위나 군웅들이 그 물건을 노리는 이유가 합당하게 설명되는군요. 그럼 사형은 봉황금시의 효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진산월은 싱겁게 히죽 웃었다.
“그거야 나도 알 수 없지. 하지만 알려줄 사람이 있을거야.”
임영옥은 힐끗 동중산을 돌아보았다.
“그가 순순히 말을 해 줄까요?”
진산월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어둠속의 한 곳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꼭 그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있겠지.”
임영옥은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부터인지 그들에게서 삼십 여장 떨어진 강물 위에 한 척의 커다란 범선(帆船)이 나타났다. 그 범선은 마치 물 위를 미끄러지듯 빠른 속도로 그들이 타고 있는 나룻배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순식간에 두 배 사이의 간격은 십 여장 이내로 좁혀지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 범선으로 향했다. 가까이서 보니 범선은 더욱 크고 호화찬란했다. 너비는 거의 삼장에 달했고, 길이는 십 장이 훨씬 넘어 보였다. 바다에서나 볼 수 있는 거대한 범선이 강물 위를 달려오는 광경은 장엄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한 것이었다. 정해는 자신의 노젓는 실력으로는 제아무리 발버둥쳐봤자 그 범선의 달려오는 속도를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우두커니 서서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범선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세 개의 커다란 돛대가 달려 있는 범선 위에는 한 점의 불빛도 없어 왠지 괴이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 범선은 나룻배를 단숨에 동강낼 듯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더니 갑자기 속도를 늦추었다. 그와 함께 범선 위에 하나 둘씩 등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눈깜짝할 새 수십 개의 등불이 내걸리더니 칠흑같이 어두웠던 범선 위는 순식간에 대낮같이 환하게 밝아졌다. 범선 위에 몇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중인들이 보니 그들은 두 명의 노인과 세명의 청년이었다. 두 명의 노인은 중인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바로 파천노괴 혁련삼과 조금 전에 동중산을 사로 잡았던 나룻배의 주인이었다. 두 사람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세 명의 젊은이들은 모두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그들은 제각기 화려한 자의(紫衣)와 남의(藍衣), 금의(錦衣)를 입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훤칠한 키에 수려한 용모의 소유자들이었다. 상원건이 그들을 힐끗 보더니 진산월을 향해 나직한 음성으로 소근거렸다.
“저들은 하남삼수(河南三秀)라는 자들일세. 하나같이 무공이 뛰어나고 특히 한 가지 절기씩에 아주 능통해서 상대하기 까다로운 자들로 알려져 있네.”
하남삼수라면 진산월도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자의 청년은 하남삼수의 우두머리로, 자전서생(紫電書生) 양취록(梁聚祿)이라 했다. 그는 무림일절(武林一絶)로 알려진 자전무궁신법(紫電無窮身法)과 자하지(紫霞指)로 명성을 떨치는 인물이었다. 체구가 우람한 남의 청년은 패권(覇拳)이라는 무시무시한 권법을 지닌 것으로 유명한 남패자(藍覇子) 화웅(華雄)이었고, 비쩍 마르고 눈빛이 서늘한 금의 청년은 암기 무공의 달인(達人)으로 알려진 금묘수사(金妙秀士) 정소명(鄭召命)이었다. 이들 세 사람은 주로 하남성과 산서성 일대에서만 활동하기 때문에 중원 전체에는 그 이름이 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강호무림의 어떤 고수들에 못지 않은 무서운 실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상원건은 하남삼수 세 사람을 한 차례씩 차례로 살펴 보다가 문득 시선을 혁련삼과 그 옆의 노인에게로 향했다. 순간, 무엇을 보았는지 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혁련삼 옆의 노인은 조금 전에 입었던 뱃사공의 복장을 벗어버리고 알록달록한 화의를 입고 있었다. 노인의 잡털 하나 없는 새하얀 백발과 술취한 듯 붉은 얼굴이 범선 위에 내걸린 등불을 받아 더욱 하얗고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제서야 상원건은 그 노인의 정체를 알아 보았던 것이다.
‘이… 이제 보니 이 자는…’
상원건은 한 순간 숨이 막히는 듯한 경악에 빠져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화의 노인의 얼굴은 온화하고 자상해 보였지만, 그의 두 눈은 괴이하리만치 차가운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화의 노인은 그런 눈으로 진산월의 얼굴을 내려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또 만났군. 노부가 다시 나타난 것이 뜻밖인가?”
진산월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귀하가 그대로 순순히 물러나리라 고는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고 있었소.”
화의 노인의 눈빛에 한광(寒光)이 이글거렸다.
“과연 일파의 장문인다운 배짱이군. 하지만 강호에서의 일이 배짱 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그렇다고 무력(武力)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오.”
화의 노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그래서 노부가 한 가지 제안을 하겠네.”
“동중산을 넘겨 달라는 것이라면 사양하겠소.”
“동중산 따위는 필요없네. 노부가 원하는 건 하나의 열쇠일세.”
화의 노인은 말을 돌려서 하지 않고 직접 요구조건을 말했다. 화의 노인은 진산월이나 동중산이 모두 상대하기 힘든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동중산을 넘겨 받는다고 봉황금시를 얻는다는 보장이 없는 만큼 화의 노인은 보다 확실하게 일을 처리하려는 것이다. 진산월은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나는 열쇠 같은건 가지고 있지 않소.”
화의 노인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쓸데없는 말장난은 하고 싶지 않네. 자네가 열쇠만 내놓으면 우리는 조용히 물러나겠네.”
화의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무뚝뚝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노부가 이런 말을 하는건 불필요한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일세. 만약 자네가 그래도 노부의 말을 못알아 듣는다면… 그건 자네에게 불행한 일이 될 걸세.”
진산월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더니 갑자기 한쪽에 서 있는 동중산을 불렀다.
“중산. 이리 오너라.”
동중산은 찔끔 놀라 안색이 살짝 굳어지다가 머뭇거리며 진산월에게 다가갔다.
“부르셨습니까?”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저 분 노인이 하는 말을 들었느냐?”
동중산은 힐끗 화의 노인을 쳐다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습니다.”
“너는 저 분 노인이 원하는 열쇠를 가지고 있느냐?”
동중산은 진산월의 의중을 몰라 마음이 절로 초조해 졌으나, 강호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답게 겉으로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대답했다.
“제자는 저 노인이 말하는 게 무얼 가리키는지 짐작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단 말이냐?”
“제자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지금 제 수중에는 아무런 열쇠도 없다는 것입니다.”
동중산의 말은 교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확실히 지금 그의 수중에는 어떤 열쇠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몸을 직접 뒤져본 화의 노인이 다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나 그렇다고 동중산이 그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는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진산월은 그를 한 차례 더 응시하다가 천천히 화의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들은 대로 동중산은 귀하가 말하는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오. 나도 또한 아무런 열쇠도 없으니 귀하는 아무래도 잘못 짚은 것 같소.”
화의 노인의 붉은 얼굴에 한 차례 음산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무서운 눈으로 진산월을 쏘아보았다.
“역시 그렇군. 말로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어.”
화의 노인은 슬쩍 턱짓을 했다. 그러자 하남삼수 중의 일인(一人)인 남패자 화웅이 성큼 앞으로 한 발 나섰다. 그는 고리 눈을 부릅뜨고 나룻배 위의 중인들을 노려보며 우렁찬 음성으로 소리쳤다.
“종남파의 떨거지들. 어서 이리로 올라와라. 강호의 물이 얼마나 쓴 지 똑똑히 보여 주겠다.”
그의 음성이 어찌나 크고 강력하던지 이수의 강물이 통째로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 음성 하나만 보아도 화웅의 내공이 얼마나 심후한지 여실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진산월은 침착한 태도로 자신이 타고 있는 나룻배를 둘러 보았다. 그런 연후에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일방은 이곳에서 계성을 지키고 있어라.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함께 배 위로 올라가자.”
낙일방이 무어라 입을 열려 했으나 진산월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한 후 상원건을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아무래도 상대협의 도움을 받아야 할 듯 싶습니다.”
상원건은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우리는 이미 남이 아니니 진장문인은 너무 어려워말고 어서 말씀하시오.”
“따님과 함께 이 배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상원건은 움찔하는 기색이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오. 하지만 정말 그래도 괜찮겠소?”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었다.
“계성과 일방은 모두 상처를 입어 며칠 간은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할 겁니다. 오히려 상대협께 쓸데없는 짐을 지워드린 것 같아 죄송하군요.”
“무슨 말씀을. 하지만…”
상원건은 힐끗 배 위에 오연히 서 있는 화의 노인을 돌아보며 나직한 음성으로 소근거리듯 말했다.
“내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 저 자는 선하령 일대에서 제왕(帝王)처럼 군림한다는 도룡거사 변천붕임이 분명하오. 하남삼수 뿐이라면 모를까, 혁련노괴에 변천붕 마저 가세했다면 오늘 일은 결코 수월하게 끝나지 않을 거요.”
변천붕이라는 말에 중인들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변천붕은 비록 멀리 절강성 일대에서 주로 활동하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명성은 멀리 장강(長江)너머의 이곳에까지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화의 노인이 그 무시무시한 도룡거사 변천붕이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진산월도 틀림없이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 졌을 것이다. 하나 겉으로 드러난 그의 얼굴은 조금도 표정의 변화가 없는 담담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누구이든 저희들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상대협께서 일방과 계성을 데리고 먼저 떠나면 저희들도 곧 뒤따라 가도록 하겠습니다.”
상원건은 진산월등이 위기에 빠진 것을 뻔히 보면서도 자신들만 먼저 피한 다는 것이 못내 내켜하지 않는 눈치였다. 진산월은 그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는지라 그를 향해 조용히 웃어 보였다.
“아직 원하는 물건을 얻지 못한 이상 변천붕은 우리에게 마음대로 살수(殺手)를 쓸 수 없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상원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소. 이곳에서 하류로 이백 리쯤 가면 팽파진(彭婆鎭)이란 곳이 있소. 그곳에서 소림사까지는 육로로 반나절 밖에 걸리지 않으니 그곳에서 만나는게 좋을 거요. 팽파진의 화평객잔(和平客棧)에서 기다리고 있겠소.”
“늦어도 이틀 내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상원건은 씁쓸하게 웃었다.
“진장문인만 믿고 있겠소. 너무 늦게 와서 우리를 애타게 하지는 마시오.”
진산월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에서 멍하니 서 있는 낙일방의 어깨를 툭 쳤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느냐?”
낙일방은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붉게 상기된 얼굴로 더듬거렸다.
“자… 장문사형. 저… 저는…”
진산월은 돌연 정색을 하며 엄숙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와 계성은 지금 이곳에 있어 보았자 짐이 될 뿐이니 상대협을 따라 어서 떠나도록 해라.”
낙일방은 울상이 되어 진산월을 쳐다보다가 임영옥과 정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나 임영옥은 아무 말이 없었고, 정해도 가만히 고개짓을 했다. 낙일방의 고개가 힘없이 떨구어졌다. 속절없는 눈물 방울이 그의 눈가에 아롱거렸다. 하나 그 눈물은 끝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진산월이 갑자기 그의 어깨를 힘껏 움켜 잡았기 때문이다.
“일방.”
낙일방은 움찔하여 고개를 쳐들었다. 진산월은 별빛같이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계성을 너에게 맡긴다는 내 말을 잊지 않았겠지?”
낙일방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해라. 가장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살아남는 것이다.”
“……!”
“계성이 깨어날 때까지 그를 지키고,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네가 다치지 않고 무사히 있는 것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이다. 지금부터는 오직 그것만을 생각해라. 알겠느냐?”
낙일방은 조그만 음성으로 대답했다.
“예.”
진산월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희미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다둑거려 주었다.
“네가 잘 해주리라 믿겠다.”
이어 그는 임영옥과 정해, 그리고 동중산을 돌아보았다.
“준비는 되었겠지?”
임영옥과 정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동중산은 떫은 감을 씹은 듯한 표정으로 머뭇거리고 있었다. 진산월의 시선에 한 줄기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중산. 네가 진정으로 종남의 제자라면 자신이 벌인 일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동중산은 찔끔하는 기색이더니 이내 억지웃음을 지었다.
“제자도 물론 준비가 되었습니다.”
“됐다. 그럼 저자들에게 본파의 저력을 보여주자.”
이어 진산월은 갑판을 박차고 범선위로 신형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임영옥과 정해가 몸을 날렸고, 제일 마지막으로 동중산이 마지못해 따라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