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권 영웅대회(英雄大會)편 :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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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3권 영웅대회(英雄大會)편 : 5화


제26장. 검광난무(劍光亂舞)

낙일방의 음성이 워낙 컸기 때문에 주루에 있던 중인들의 시선이 일시지간에 그들에게로 모두 쏠렸다. 낙일방은 중인들이 모두 자신을 쳐다보자 멋적은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고 있다가 빠른 걸음으로 정해와 진산월을 향해 다가오며 히죽 웃었다.

“언제 오시나하고 한참 기다렸어요. 장문사형께서 못오시면 어떡하나 하고 얼마나 걱정한 줄 아세요?”

정해가 자꾸 그에게 눈짓을 보냈으나 낙일방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큰 소리로 웃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상대협께서 장문사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결국 그 분 말씀대로 됐군요. 하하하…”

보다 못한 정해가 그를 반강제로 붙잡아 자리에 앉혔다.

“제발 그 입 좀 다물어라. 며칠 안 본 사이에 목소리만 커졌구나.”

“정사형은 날 다시 만난게 반갑지도 않아요? 왜 자꾸 말도 못하게 그래요?”

“그게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 실갱이를 하자 진산월이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만 해라. 그보다 계성은 어떻느냐?”

낙일방은 진산월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것이 마냥 신이 나는 듯 연신 히죽히죽 웃으며 떠들어댔다.

“많이 좋아졌어요. 어제는 누워만 있는 게 너무 갑갑하다며 밖으로 나가겠다고 하는 통에 상대협께서 말리시느라 아주 애를 먹었는걸요.”

“너희는 어디에 묵고 있느냐?”

“원래는 여기 후원에 묵으려고 했는데, 빈 방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방을 구했어요. 그래서 제가 매일 수시로 이곳을 들락거리며 장문사형이 오시나 지켜보고 있었죠. 헤헤…”

“그럼 여기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그곳으로 가자꾸나.”

“좋아요. 그렇지 않아도 배가 출출하던 참이니…”

낙일방은 고개를 돌려 점소이를 찾았다. 바로 그때였다.

“당신들은 혹시 종남파에서 오지 않았소?”

그의 등뒤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낙일방이 움찔 놀라 뒤를 돌아보니 낯선 청삼의 소년이 자신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낙일방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그렇소만, 그건 왜 물으시오?”

청삼 소년은 그의 말에는 대꾸도 없이 건너편 탁자에 앉아 있는 다른 몇 명의 청삼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맞습니다, 사형. 이자들은 종남파의 인물들입니다.”

정해는 올 것이 왔다는 듯 쓴웃음을 머금었으나, 낙일방은 아직도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청삼 소년의 어깨를 툭 쳤다.

“대체 왜 그러는거요? 아니, 그보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순간 청삼 소년은 번개같이 몸을 돌리며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내 몸에 손대지마.”

낙일방은 어이가 없는 듯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서서히 준수한 얼굴이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대뜸 와서 시비를 건게 누구인데 오히려 큰 소리냐?”

그는 거친 숨을 씩씩 몰아쉬며 청삼 소년의 목소리보다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청삼 소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오른 손이 검의 손잡이를 향해 움직였다. 그에 뒤질새라 낙일방도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금시라도 출수할 듯한 자세를 취했다. 두 사람 사이에 흉흉한 기운이 감돌고 있을 때, 진산월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일방. 물러서라.”

낙일방은 사나운 눈으로 청삼 소년을 노려보고 있다가 정해가 손을 잡아끌자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디 사는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런 말버릇은 고치는게 좋을거야.”

청삼 소년의 눈에서 싸늘한 빛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다음 순간,

팟!

낙일방은 무언가 차가운 광망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을 느끼고 화들짝 놀라 황급히 뒤로 몸을 날렸다. 하나 어느 사이에 그의 가슴팍 부근 옷자락이 길게 베어져 앞가슴이 훤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닌가? 낙일방은 안색이 여러 차례 변한 채 자신의 베어진 옷자락을 멍하니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청삼 소년의 손에는 언제 빼들었는지 날카로운 검광(劍光)을 뿌리는 장검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낙일방은 생전 이토록 빠른 검법(劍法)은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그런 검법이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소년 검수의 손에서 펼쳐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이 순간 그의 마음속에 떠오른 것은 경악도, 수치도 아닌 분노였다. 그것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하고 착잡한 마음 속에서 싹터오른 것이었다. 청삼 소년은 그때까지도 별빛처럼 차가운눈으로 낙일방을 응시한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검을 들고 있는 자세라던지 방금 전에 보여준 놀라운 검술등은 과연 명가(名家)의 후예 다웠다. 청삼 소년의 얼굴에는 언제든지 다시 덤벼보라는 듯한 오만하고 도발적인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낙일방은 약간 창백하게 굳어진 얼굴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일방.”

정해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잡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낙일방은 두 주먹을 부서져라 움켜쥔 채 그의 손을 뿌리치며 계속 청삼 소년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정해는 절로 다급한 심정이 되어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그는 진산월이 제지해 주기를 바랬으나, 조금 전만 해도 낙일방에게 물러서라고 했던 진산월은 의외로 침묵을 지킨 채 그를 막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장문사형…”

정해가 참지 못하고 무어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모욕을 당했으면 갚는게 도리지. 그게 강호의 법칙이다.”

정해는 그 말에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진산월의 말이 일리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진산월이 처음에 낙일방에게 물러서라고 했던 것은 쓸데없는 시비를 일으키지 않으려는 생각에서였다. 하나 이미 시비는 벌어졌고, 낙일방은 상대의 검에 옷자락이 잘라지고 말았다. 낙일방 같이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무인(武人)이라면 이러한 모욕은 결코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 상대가 자신과 엇비슷한 나이의 소년이라면 더더욱 그러하지 않겠는가? 낙일방이 청삼 소년에게 다가갈수록 장내의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주루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무림인들이기 때문에 두 소년이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하나같이 기개가 헌앙(軒仰)하고 무공이 특출한 명문정파의 제자들임을 알아 보았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숨소리조차 죽인 채 두 소년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청삼 소년은 여전히 수중의 장검을 비스듬히 가슴 앞에 세운 채로 석상처럼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그 자세와 기도는 무림에서도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낙일방은 준수한 얼굴이 약간 창백해진 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청삼 소년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자세는 헛점 투성이였고, 마음 속의 분노가 겉으로 드러나 평정심이 흐트러져 있는 상태였다. 누가 보기에도 낙일방은 청삼 소년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 같았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좌동. 검을 거두어라.”

청삼 소년의 등뒤로 다가오던 두 명의 청삼인들 중 얼굴이 네모지고 체격이 건장한 청삼인이 앞으로 나서며 그들을 제지했다.

“이곳은 사람이 많은 주루 안이니 이런 곳에서 함부로 검을 휘둘렀다가는 엉뚱한 사람이 다칠지 모른다.”

“알겠습니다, 사형.”

청삼 소년, 좌동은 능숙한 솜씨로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청삼인들은 물론 형산파의 고수들인 황일기와 조뢰명이었다. 황일기는 신광(神光)이 번쩍이는 눈으로 진산월 일행을 한 차례 둘러보다 진산월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귀하는 혹시 종남파의 당대 장문인이신 진산월, 진장문인이 아니십니까?”

진산월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반갑습니다. 저는 형산파의 십삼대 제자인 황일기라 하며, 이 두 사람은 제 사제들입니다.”

“반갑소.”

진산월은 앉은 상태에서 가볍게 목례만 했다. 황일기의 뒤에 서 있던 조뢰명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어졌으나, 황일기는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으며 오히려 나직한 웃음까지 터뜨렸다.

“하하… 그렇지 않아도 요즘에 진장문인의 대명(大名)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 왔던 터라 꼭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유명인사가 되었다니 뜻밖이구료.”

황일기의 얼굴에 한 줄기 야릇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원래 사람은 자신에 관련된 소문은 잘 모르는 법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듣자하니 진장문인께서는 무공이 탁월하고 심기가 깊어서 과거 종남파의 영화(榮華)를 능히 부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하더군요.”

진산월은 묵묵히 앞에 놓인 물을 들이마셨다. 황일기는 그를 뚫어지게 주시하며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구대문파에서 쫏겨난 종남파가 소림의 대집회에 참석하려는 이유도 이번에 커다란 활약을 해서 다시 그 지위를 되찾기 위함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진장문인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정해는 물론이고 낙일방의 표정이 모두 변했다. 황일기의 말은 얼핏 듣기에는 정중하고 예의를 차린 것 같았으나, 그 안에는 은근한 비웃음과 경멸, 그리고 도발의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하나 진산월은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일은 원한다고 해서 이루어질 일도 아니고, 또 원하지 않는다고 이루어지지 않을 일도 아니지.”

“하하… 누군가가 진장문인은 말과 배짱과 심기가 뛰어나서 삼절(三絶)이라고 한다던데, 과연 듣던대로 말 솜씨가 보통이 아니군요.”

황일기는 자신의 등 뒤에 말없이 서 있는 조뢰명을 가리켰다.

“이쪽은 내 사제인 조뢰명이라고 하는데, 진장문인의 명성을 듣고 흠모하여 그동안 진장문인을 만나뵙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조뢰명은 성큼 앞으로 한 발 나서며 손을 앞으로 쭈욱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형산파의 상징인 푸른 수실이 묶인 청강장검이 검집째 쥐어져 있었다.

“진장문인에게 한 수(手) 가르침을 청하는 바이오.”

너무도 단도직입적인 그의 말에 정해와 낙일방은 화가 나기에 앞서 오히려 어리둥절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아무리 종남파가 별 볼 일 없는 문파라고 해도 엄연한 일파의 장문인에게 다른 문파의 제자가 이런 식으로 도전(挑戰)을 해 온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더구나 그것이 한때 구대문파에 속해 있고 수 백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정파의 장문인에게 하는 것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으리라. 낙일방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조뢰명을 향해 덤벼들려 했다. 하나 그때 진산월의 침착한 음성이 들려왔다.

“가르침을 받고 싶다면 예의를 갖추어 정중하게 부탁을 하는 게 도리가 아닐까?”

조뢰명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치켜 올라갔다. 황일기 또한 진산월의 반응이 의외인 듯 날카로운 눈으로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공손하게 포권을 하며 머리를 숙였다.

“형산파의 십삼대 제자인 조뢰명과 황일기가 종남파의 장문인께 삼가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진장문인께서는 귀찮다고 피하지 마시고 모쪼록 고명한 솜씨를 보여주어 저희들의 미흡한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로 두 사람을 응시하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장소와 시간을 정하게.”

그는 거리낌없이 그들에게 하대(下待)를 했다. 그들이 스스로 다른 문파의 제자임을 밝혔으므로, 일파의 존주(尊主)인 그의 신분으로 하대를 하는 것이 당연했던 것이다. 황일기는 이미 생각해 놓은 것이 있는 듯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일리(一里)쯤 떨어진 곳에 있는 관제묘(關帝廟) 주위는 제법 풍광(風光)이 수려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진장문인께서 식사를 마치신 후 그곳에서 뵈었으면 좋겠군요.”

“좋네. 한 시진 후에 그곳으로 가도록 하지.”

진산월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일기는 다짐이라도 받으려는 듯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럼 한 시진 후 관제묘 앞에서 진장문인의 가르침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공력이 담겨 있어서인지 주루의 구석구석까지 아주 똑똑하게 들렸다. 당연히 주루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말을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황일기는 입가에 빙긋 미소를 지으며 진산월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한 후 그때까지도 여전히 수중의 장검을 불쑥 내밀고 서 있는 조뢰명을 툭 건드렸다.

“사제. 그만 가자.”

조뢰명은 진산월을 한 차례 더 쏘아보고는 장검을 거두어 들이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때 정해는 조뢰명의 중얼거리는 듯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종남파의 무공 따위로 과연 구대문파를 넘볼 수 있는지 확실하게 알게 해주지.”

그의 말은 완전히 진산월 일행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정해는 평소에 침착하고 좀처럼 냉정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절로 안색이 변하며 가슴속에서 분노가 솟구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하나 진산월은 그 말을 못들었는지 태연한 표정으로 잔에 물을 따라 마시고 있었다. 정해는 그런 진산월의 모습에 약간의 답답함을 느꼈으나, 한편으로는 쉽게 경동(驚動)하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그의 태도에 왠지 듬직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정해는 멀어져가는 형산파 고수들의 뒷등을 보고 있다가 진산월을 향해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저 자들은 형산파의 삼결 고수들인데, 과연 저들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진산월은 물을 한 잔 따라 맛있게 마신 후 그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왜, 내가 그들을 당해내지 못할까봐 걱정되느냐?”

정해는 약간 머쓱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진지

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평상시라면 저도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겠지만, 지금 장문사형은 아직 부상이 완쾌되지 않은 상태가 아닙니까? 혹시라도 장문사형께서 실수 하실까봐…”

그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낙일방은 움찔 놀라 황급히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그게 정말입니까? 장문사형. 정말 다치셨어요?”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었다.

“걱정할 것 없다. 나는 이번 싸움에 나서지 않을테니…”

“그럼 누가 그들과 싸웁니까?”

진산월은 낙일방을 바라보았다.

“물론 너다.”

그 말에 낙일방은 물론이고 정해도 눈을 크게 뜨며 그를 쳐다보았다.

“아니 장문사형. 그게…”

“왜? 형산파 고수들이 두려우냐?”

낙일방은 한 차례 마른 침을 꿀꺽 삼킨 후 힘있게 고개를 저었다.

“두렵지 않습니다. 제가 그놈들에게 본파의 무서움을 단단히 보여주겠어요.”

진산월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됐다. 지금은 식사를 할 상황이 아닌 듯 하니 계성을 만나러 가자.”

낙일방은 무슨 말인가를 할 듯 하다가 한 차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길을 안내하기 위해 주루 밖으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진산월은 정해와 임영옥, 동중산과 함께 그의 뒤를 따라 주루를 벗어났다. 낙일방이 진산월 등을 안내해 간 곳은 화평객잔에서 백 여장 떨어진 곳에 있는 어느 허름한 객잔의 후원이었다. 후원에 들어서서 작은 뜨락을 지나자 세 개의 방이 나란히 보였다. 낙일방이 그중 가운데 방으로 가서 방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중년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시오?”

“접니다. 장문사형께서 오셨습니다.”

낙일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상원건의 모습이 나타났다. 상원건은 진산월을 보자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반가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과연 무사하셨구료.”

진산월은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상대협의 노고가 많으십니다.”

상원건은 황급히 마주 답례를 했다.

“노고는 무슨… 어서 안으로 드시오. 응소협이 진장문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소.”

진산월이 안으로 들어가자 방의 구석에 하나의 침상이 보였다. 침상 위에는 상체를 벌거벗은 채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건장한 청년이 막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진산월은 그를 제지하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괜찮다. 누워 있거라.”

청년은 다름아닌 응계성이었다. 그동안 응계성은 부상이 많이 회복된 듯 얼굴에 예전의 혈색이 되돌아와 있었다. 하나 두 팔과 가슴 부위에 아직도 두꺼운 붕대가 칭칭 감겨 있어 제대로 운신(運身)하기는 힘든 모습이었다. 응계성은 진산월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기를 쓰고 침상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 바람에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왔는지 붕대의 군데군데가 붉게 물들었다. 하나 응계성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붉게 상기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장문사형. 정말 너무했습니다. 장문사형이 내게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낙일방은 막 진산월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오다 이 말을 듣자 입꼬리를 삐죽거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제만 해도 장문사형 볼 낯이 없다며 시무룩해 하더니 대뜸 보자마자 큰 소리부터 치는군.’

진산월은 빙긋 웃으며 물었다.

“내가 무엇을 너무 했단 말이냐?”

응계성은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으르렁거리듯 소리쳤다.

“나는 지금까지 몸뚱아리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적에게 등을 보이고 도망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장문사형은 나를 적이 두려워 도망치는 졸장부로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의 말을 듣자 정해와 낙일방 등은 모두 쓴 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이 억지에 가깝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하나 진산월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그렇군. 내가 잘못했다.”

응계성은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된 채 다시 무어라고 입을 열려다 인상을 있는대로 찡그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만 두세요. 장문인 체면으로 남들에게 함부로 사과하는 모습은 더 보기 안좋습니다.”

“그 말도 맞는 것 같군. 그것도 내가 잘못했다.”

“그만 두라니까요. 그런 것도 자꾸 하면 버릇이 된단 말입니다.”

진산월은 조용히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알았으니 너무 성질내지 말고 누워 있어라. 네가 자꾸 화를 내면 나도 괜히 사과하고 싶어지니 말이다.”

응계성은 아직도 무언가에 성이 잔뜩 난 모습이었으나 진산월의 말대로 더 이상 무어라고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는 진산월이 하는대로 침상에 몸을 눕히며 아무 말도 않고 있었다. 진산월은 그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조금 쉬어라. 앞으로 며칠간은 여유가 있으니 그동안 몸을 완쾌시키는 것이 지금 네가 해야할 유일한 일이다.”

응계성은 말없이 몸을 돌리더니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진산월은 다시 한 차례 빙긋 웃더니 중인들에게 눈짓을 하고는 방을 벗어났다. 정해가 빠르게 그의 뒤를 따라오며 물었다.

“지금 관제묘로 가시겠습니까?”

“그럴 생각이다.”

정해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정말 일방으로 하여금 그들을 상대토록 하실 생각입니까?”

“그렇다.”

“하지만… 일방이 그들의 원공검법을 당해낼 수 있을까요?”

“그거야 싸워봐야 알겠지.”

정해는 아무리 생각해도 낙일방의 실력으로는 형산파의 삼결은 고사하고 이결 고수도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진산월이 결코 아무 생각없이 일을 벌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무공이란 것이 하루 아침에 향상 될 수 없는 이상 진검(眞劍) 승부에서 부족한 실력을 메꿀 방법이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정해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낙일방은 그들에게서 삼 장쯤 떨어진 곳에서 묵묵히 그들을 따라 오고 있었는데,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정해는 잠시 걱정스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진산월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조금 전에 일방은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주루에서 일방은 몹시 흥분한 상태였습니다. 그때 형산파의 고수와 싸웠다면 낭패를 면치 못했을텐데, 때마침 황일기인가 하는 자가 제지하는 바람에 다행히 위기를 넘겼지 않습니까? 아마 그 자는 자기의 사제가 그런 식으로 승리를 거두는 것이 별로 떳떳치 않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진산월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정해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어 되물었다.

“그럼 장문사형은 다르게 생각하신단 말씀입니까?”

“물론이다. 조금 전에 그 자가 말리지 않았다면 낙일방이 쉽게 승리했을 것이다.”

“예?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조금 전에 낙일방이 무척 화가 나서 흥분한 건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남과 싸운다는 것이 불리한 일이겠지만, 일방은 조금 다르다.”

진산월은 특유의 침착하고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고수들 간의 격전에서 흥분은 금물이라고 하지만, 때로는 흥분한 상태에서 실력 이상의 솜씨를 발휘하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그때 일방이 바로 그런 상태였다. 일방이 장기로 삼는 장괘장권구식을 펼치기 위해서는 빠르고 강력한 힘이 필요한데, 당시 일방은 화를 참지 못하여 광폭한 기운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물불을 안가리고 상대를 쓰러뜨리겠다는 결의가 충만된 상태였지.”

“아…”

“반면에 형산파의 그 젊은 친구는 일방을 경시하여 몸의 중심이 위로 쏠려 있었지. 그런 상황에서 격전이 벌어졌다면 일방이 어렵지 않게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해는 멍하니 진산월의 말을 듣고 있다가 눈을 반짝였다.

“그렇다면 황일기란 작자는 그것을 알고 일부러 그를 막은 것이로군요?”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조뢰명이 청의방 고수들의 귀를 자를 때도 제지하지 않던 그자가 굳이 그 상황에서 끼어들 리가 있겠느냐?”

정해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잠시 후 관제묘에서 싸울 때는 상황이 달라지겠군요?”

“그렇지. 그 젊은 친구도 이제는 냉정을 찾았을테고, 일방을 경시하는 마음도 버렸겠지. 그에 비해 일방은 화도 가라앉고 흥분도 식어서 조금 전처럼 폭발적인 힘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일방을 내보내시렵니까?”

“일방을 한 번 믿어 보자꾸나.”

정해는 못내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 젊은 녀석이라면 모르지만, 조뢰명이나 황일기가 나서면 일방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일방이 그 젊은 친구를 물리치기만 하면 다른 두 사람은 따로 상대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예? 그가 누굽니까?”

진산월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건 그때 가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정해는 영특하기 이를데 없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알쏭달쏭한 눈으로 우두커니 진산월을 응시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때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의 환성이 들려왔다.

“와! 종남파의 고수들이 왔다!”

때 아닌 함성에 정해가 움찔 놀라 보니 그들은 어느 새 관제묘에 거의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관제묘의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잔뜩 늘어서 있는 것이 아닌가? 대부분이 병장기를 찬 무림인들이었으나, 그렇지 않은 일반인들의 모습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정해는 물론이고 낙일방과 동중산, 심지어는 좀처럼 냉정을 잃지 않던 임영옥도 모두 놀란 모습들이었다. 정해는 약간은 당황하고 약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진산월을 향해 물었다.

“장문사형.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요?”

진산월은 피식 웃었다.

“어떻게 되긴. 본파와 형산파의 고수들이 한 판 붙는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든 거겠지.”

“예?”

“주루에서 황일기가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어 댔는데 아무도 구경나온 사람이 없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 아니겠느냐?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으니 절로 흥이 나는구나.”

진산월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정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다시 사람들 틈에서 요란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와아! 형산파의 고수들이다!”

사람들 사이로 길이 뚫리며 몇 명의 인영들이 관제묘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형산파의 삼결 고수인 황일기와 조뢰명, 이결 고수인 좌동이었다. 관제묘 앞은 제법 넓은 공터였는데, 약간 구릉을 형성하고 있어서 멀리까지 내려다 보였다. 황일기의 말마따나 풍광(風光)이 수려했고, 날씨도 더할 나위없이 좋아서 평상시라면 누구라도 계절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나 지금은 누구도 주위의 경치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황일기는 날카로운 눈으로 진산월 일행을 둘러 보더니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과연 약속을 지키셨군요. 진장문인과 한 수 겨루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의 말투와 행동은 조금 전과 다름이 없었으나, 눈치가 빠른 사람은 그의 말이 묘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주루에서는 ‘가르침을 받겠다’ 고 했던 황일기가 지금은 ‘겨루겠다’ 고 말을 바꾼 것이다. 두 말은 그 의미가 전혀 다른 단어들이었다. ‘가르침을 받겠다’ 는 것은 진산월을 일파의 장문인으로 존중한다는 것이지만, ‘겨루겠다’ 고 하는 것은 이미 그를 자신들과 동격(同格)의 상대로 보고 있다는 의미였다. 하나 진산월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형산파 고수들의 검법을 견식하게 되어 나도 기쁘게 생각하오. 그런데 그 전에…”

진산월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낙일방을 가리켰다.

“내 사제가 귀파의 젊은 친구에게 받아야 할 빚이 있는 것 같구료.”

낙일방은 그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무심결에 앞으로 두 걸음 걸어나왔다. 황일기는 입가에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빚이 있다면 당연히 갚아야 겠지요. 좌동.”

그가 부르자 그의 뒤에서 좌동이 빠르게 튀어나왔다.

“부르셨습니까, 사형?”

“종남파의 고수분께서 네게 받을 빚이 있다고 하니 냉큼 갚아드리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좌동은 냉큼 대답하고는 낙일방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두 사람은 이 장의 간격을 두고 우뚝 선 채 서로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두 사람의 기질은 언뜻 보기에도 판이하게 달랐다. 낙일방이 얼굴에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보일 정도로 성급하고 직선적인 성격이라면, 좌동은 나이답지 않게 침착하면서도 냉정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무공도 전혀 달랐다. 낙일방은 병장기 보다는 권장지각(拳掌指脚)등의 맨손을 사용하는 것을 더 좋아했고, 좌동은 형산검파의 제자답게 예리한 검법을 소유하고 있었다. 공통점이라면 그들의 나이가 십칠팔 세로 엇비슷했고, 두 사람 모두 좀처럼 보기 힘든 미소년들이라는 것 뿐이었다. 두 명의 젊고 준수한 소년들이 서로 노려본 채 마주 서 있는 광경은 주위에 늘어서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족한 흥미로운 것이었다. 정해는 진산월이 낙일방에게 무언가 조언(助言)이라도 해주길 바랬으나, 진산월은 묵묵히 장내의 광경을 주시하고만 있었다. 답답함을 느낀 정해가 진산월을 향해 무어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낭랑한 기합소리와 함께 낙일방과 좌동의 몸이 거의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압!”

먼저 손을 쓴 사람은 낙일방이었다. 낙일방은 좌동의 앞가슴으로 뛰어들며 처음부터 장괘장권구식 중의 절초인 천성탈두(天星奪斗)를 펼쳐냈다. 천성탈두는 장괘장권구식 중에서도 가장 빠르고 매서운 초식이어서 지금처럼 앞으로 돌진하면서 펼치자 한층 더 강맹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정해는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탄성을 토해냈다.

“잘한다!”

낙일방이 자신의 앞으로 몸을 날리는 순간, 좌동도 앞으로 빠르게 한 걸음 내딛으면서 손으로 검잡이를 힘껏 움켜쥐고 있었다. 하나 낙일방의 돌진하는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빨라서 좌동이 미처 검을 뽑기도 전에 좌동의 앞가슴이 천성탈두의 공세에 훤하게 노출되어 버렸다. 좌동은 뜻밖의 날카로운 공격에 내심 당황한 듯 황급히 앞으로 내딛었던 발을 거두어들이며 빠르게 옆으로 두 걸음 이동했다. 그의 발을 움직이는 동작은 민첩하고 영활해서 과연 명가(名家)의 제자다운 면이 있었다.

낙일방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계속 좌동의 앞으로 파고들며 연속해서 장괘장권구식중의 절초들을 펼쳐냈다.

파파파팍!

주위 사방이 온통 경기(勁氣)에 휘감기며 좌동의 옷자락이 금시라도 찢어질 듯 마구 펄럭거렸다.
좌동은 눈을 부릅뜬 채 낙일방의 공세에서 미세한 헛점이라도 찾아내기 위해 애를 썼으나, 워낙 질풍처럼 빠르고 날카로운 공격인지라 검을 뽑아서 반격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는 계속 옆으로 움직이며 낙일방의 공세를 피하려 했으나 낙일방이 끈질기게 품속으로 파고 들며 공격해 들어오자 마침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조뢰명의 안색이 굳어지며 호통소리가 터져나왔다.

“저런 바보… 뒤로 물러나면 안돼!”

좌동은 움찔하여 황급히 물러나던 몸을 멈추려 했으나, 그때는 이미 낙일방이 몸을 바짝 숙인 채 그의 가슴 아래로 파고 들며 두 주먹을 질풍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원래 고수들간의 격전에서 뒤로 물러난다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쉬웠다. 더구나 지금처럼 상대가 가깝게 접근하여 빠른 공격을 해올 때는 더더욱 물러나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물러나는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 해도 앞에서 달려오는 것보다는 느리기 때문에 도저히 상대의 공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좌동도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낙일방의 공세가 워낙 집요하게 이어져서 자신도 모르게 뒤로 뒷걸음질 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단 한 걸음에 불과했으나, 그 짧은 순간에 낙일방은 세 걸음이나 내딛으며 그의 코앞으로 육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낙일방의 두 주먹은 십자(十字)로 교차되며 좌동의 아랫배 쪽에서 턱을 향해 위로 솟구치듯 올라왔다. 이것은 장괘장권구식 중의 영양괘각(羚羊卦角)이라는 절초로, 영양이 뿔로 치받듯 아래에서 위로 공격하는 무공이라서 지금같은 접근전에서 상대의 앞가슴으로 뛰어들며 펼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초식이었다. 좌동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사력을 다해 몸을 뒤로 젖혔다.

팍!

낙일방의 두 주먹이 그의 턱 밑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올라갔다. 좌동은 젖힌 몸을 일으킬 사이도 없이 뒤로 누운 상태에서 몸을 빙글빙글 회전시키며 옆으로 일장여나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그가 방금 펼친 것은 구선비응(九旋飛鷹)이라는 상승(上乘)의 신법이었다. 이 구선비응은 익히기가 어려워서 십 년 이상 각고를 기울여야만 겨우 터득할 수 있는 것인데, 아직 십 칠팔 세에 불과한 좌동의 몸에서 펼쳐졌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좌동은 눈깜짝할 새 일장 밖으로 물러나며 회전하던 기세를 그대로 살려 몸을 일으켰다. 하나 그가 채 신형을 안정시키기도 전에 허공에서 예리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쉬악!

좌동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안색이 핼쓱하게 변하고 말았다. 그의 머리 위에서 낙일방이 무서운 기세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좌동은 낙일방이 대체 언제 자신의 머리 위쪽으로 올라가 있었는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낙일방은 조금 전에 영양괘각의 일식으로 치켜올라가던 몸을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가 좌동의 몸이 회전을 멈춘 순간에 먹이를 본 매처럼 덮쳐왔던 것이다. 말은 쉬웠지만 그 짧은 순간에 상대의 반응을 예상해서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서 정확하게 상대가 정지한 지점으로 떨어져 내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치 기러기가 날개짓을 하듯 양팔을 활짝 벌린 채 좌동의 머리위로 떨어지는 낙일방의 기세는 절정고수의 그것에 못지 않은 것이었다.

파팡!

“윽!”

짤막한 신음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휘청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중인들이 놀라 보니 좌동이 가슴을 부여잡은 채 술취한 사람처럼 금시라도 쓰러질 듯 물러서고 있었다. 형산파의 고수들은 물론이고 종남파의 인물들마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장내의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들은 설마 낙일방이 이토록 일방적으로 좌동을 몰아붙여 승리를 거두리라고는 전혀 예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좌동도 어이가 없는 지 가슴의 통증을 억누르며 눈을 부릅뜨고 낙일방을 노려보았다. 그는 자신이 이토록 맥없이 패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듯 입을 반쯤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낙일방은 조금 전에 좌동이 서 있었던 자리에 우뚝 선 채 당당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일검(一劍)의 빚을 일권(一拳)으로 갚았으니 이제 우리는 서로간에 아무런 빚이 없다.”

하얀 백삼을 펄럭이며 낭랑하게 소리치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임풍옥수(臨風玉樹)라는 말이 그대로 어울리는 것이었다. 좌동은 사나운 눈으로 낙일방을 쏘아보고 있다가 이 말을 듣자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더니 그를 향해 달려들려 했다. 그때 하나의 손이 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좌동은 움찔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사형…”

그의 어깨를 잡은 사람은 황일기였다. 황일기는 평소와는 다른 엄격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너는 이미 내상을 입었으니 뒤로 물러나라.”

좌동은 무언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저는…”

“물러가 있어라.”

황일기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좌동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조뢰명은 싸늘한 눈으로 좌동을 쏘아보며 씹어 뱉듯이 말했다.

“바보같은 놈. 권격(拳擊)을 하는 상대에게 거리를 내주어 접근을 허용 하다니… 그런 기초적인 것도 모르는 놈이 본파의 제자란 말이냐?”

좌동의 고개가 더욱 떨구어졌다. 사실 좌동이 패한 것은 낙일방보다 실력이 뒤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남과 싸운 경험이 거의 없어 너무 쉽게 낙일방의 접근을 허용했기 때문이었다. 권법에 능한 낙일방으로서는 상대의 앞가슴으로 뛰어들면서 마음껏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좌동은 거리가 너무 가깝고 상대의 질풍같은 공격에 당황하여 제대로 검 한 번 뽑아보지 못하고 맥없이 격퇴당했던 것이다. 황일기가 좌동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것도 좋은 경험이다. 저자는 너를 상대할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는데, 너는 네 실력만을 믿고 상대의 공격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세워놓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지, 저자의 내공이 조금만 더 높았더라면 너는 중상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좌동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이 말만을 뇌까리고 있었다. 조뢰명은 못마땅한 눈으로 좌동을 쏘아보고 있다가 시선을 낙일방에게로 돌렸다. 낙일방은 승리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 준수한 얼굴을 붉게 상기시킨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로서는 강호에 출도하여 많은 사람들의 이목 속에 거둔 첫 번 째 승리였으니 그 감회가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일전에 그는 운문세가의 삼총관인 철산반 하후성을 격퇴시킨 적이 있었으나, 그때는 주위에 그의 일행들 외에는 아무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승리의 기쁨을 제대로 실감할 수 없었다. 하나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선망에 찬 눈초리와 탄성을 받게 되자 그는 몸이 저절로 허공을 붕붕 떠 다니는 듯한 가슴 벅찬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야릇한 황홀경 같은 것이었다. 그때 그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오며 어깨를 툭 쳤다.

“일방. 정말 굉장하구나.”

낙일방은 고개를 돌렸다가 그 사람이 정해임을 알아보고는 멋적은 표정으로 히죽 웃었다.

“정사형. 굉장하긴요. 운이 좋았던 거지요.”

“운만으로는 그렇게 안되지. 무엇보다 상대에게 거리를 주지 않고 가슴팍을 파고 들며 연속 공격을 한 것은 정말 멋진 작전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공격을 할 생각을 했느냐?”

“장문사형께서 이번 싸움을 제게 맡긴다고 하셨을 때부터 혼자 나름대로 곰곰히 생각해 보았죠. 제가 저자의 날카로운 검술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하고요. 결론은 하나 뿐이었어요.”

“바로 접근전이었군.”

낙일방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맞았어요. 상대에게 검을 펼칠 시간과 거리를 주지 않고 몰아붙이면 제게 승산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때 진산월의 음성이 들려왔다.

“옳은 생각이다. 검이나 도같은 병장기를 사용하는 자에게 맨손으로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최대한 상대에게 바짝 붙어서 공격하는 것이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좋았던 것은 상대에게 숨쉴 여유도 주지 않고 계속 몰아쳤던 너의 연속공격이었다.”

낙일방은 진산월의 칭찬을 듣자 계면쩍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건… 일단 상대에게 반격할 틈을 주면 도저히 그 빠르고 날카로운 검을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아 죽기 살기로 공격한 거에요. 솔직히 주루에서 저 녀석의 일검을 보고는 정면 승부로는 도저히 당해낼 자신이 없었거든요.”

진산월은 낙일방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잘했다. 그나저나 문제는 이제부터로군.”

진산월의 말대로 상황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조뢰명이 어느 새 낙일방의 앞으로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자 정해와 낙일방은 바짝 긴장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정해는 일전에 주루에서 조뢰명의 솜씨를 보았기 때문에 그가 좌동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검법의 소유자임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형산파에서 이결과 삼결의 차이란 단순히 실력이 한 단계 차이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무공과 경험, 승부에의 집념 등 무인(武人)으로서의 모든 것이 한 차원 틀리다는 의미였다. 지금도 양 팔을 늘어뜨린 채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조뢰명의 모습은 얼핏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은 것 같았으나, 사실은 신(神)과 기(氣)가 일치되어 차츰 하나의 기세를 형성하고 있었다. 검을 익힌 검객의 몸에서 기세가 형성된다는 것은 보검에 날(刃)이 서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 기세가 강하면 강할수록 보검의 날 또한 날카로워져서 나중에는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만으로도 능히 사람을 살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의기상인(意氣傷人)의 경지였다. 조뢰명의 기는 의기상인의 경지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으나, 강호무림의 일류검객에 못지 않은 예리하고 위압적인 것이어서 지금 낙일방의 수준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낙일방의 이마에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조뢰명이 검을 뽑아 그를 위협하는 것도 아닌데 낙일방은 벌써 그의 기세에 적지 않은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조뢰명이 다가올수록 더욱 거세어져서 마침내 낙일방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자세를 잡았다. 한데 낙일방을 향해 일직선으로 곧장 다가오던 조뢰명의 몸이 갑자기 우뚝 멈추어졌다. 조뢰명의 걸음이 멈춘 순간, 낙일방은 자신의 전신을 무겁게 짓눌러오던 기세가 씻은 듯 사라짐을 느끼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조뢰명을 바라보았다. 하나 조뢰명은 그가 아닌 엉뚱한 곳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조뢰명의 시선은 낙일방의 뒤에 서 있는 한 사람에게로 못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죽립을 깊게 눌러 쓴 임영옥이었다. 임영옥을 바라보는 조뢰명의 얼굴에는 한 줄기 야릇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무언가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한 듯한 놀라움과 의외의 빛이었다. 그는 기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임영옥을 뚫어지게 주시하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종남파에서 이토록 강력한 검기(劍氣)를 발출할 수 있는 여검수(女劍手)가 있을 줄은 몰랐군. 낭자의 이름을 알 수 있겠소?”

사람들은 오만하기 이를데 없던 조뢰명이 뜻밖에도 임영옥에게는 제법 격식을 갖추어 말하자 뜻밖이라는 듯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임영옥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 이름은 임영옥이에요.”

조뢰명의 눈에 한 줄기 섬광처럼 예리한 안광이 번뜩였다.

“낭자는 혹시 전대장문인이었던 태평검객의 따님이 아니오?”

“그래요.”

“역시 그렇군. 예전에 나는 사부님에게서 낭자에 대한 말을 들은 적이 있소. 사부님께서는 태평검객의 검은 비록 날카롭지 못하지만 그의 딸은 가다듬기에 따라서는 천하의 어떤 검보다도 예리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

“당신의 사부님은 누군가요?”

“사부님은 칠지신검 좌군풍이라 하오.”

그 말에 중인들은 놀란 빛을 감추지 못했다. 칠지신검 좌군풍은 형산파의 열 다섯 명 밖에 안되는 오결검객중 하나로, 그 명성이 강남 뿐만 아니라 강북에도 널리 퍼진 절세의 고수였다. 더구나 좌군풍은 평소에 입이 무겁고 말이 별로 없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런 좌군풍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절대 허언(虛言)일 리가 없었다. 조뢰명은 임영옥을 빤히 쳐다보며 한 자 한 자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래서 나는 언제고 낭자를 한 번 만나게 되면 반드시 그 솜씨를 보고야 말겠다고 결심하고 있었소. 그런데 오늘 드디어 그 기회를 갖게 되었구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임영옥을 향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비록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누구라도 그의 얼굴을 보기만 하면 그의 마음이 확고하게 굳어져 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 그가 채 세 걸음을 걷기도 전에 어디선가 날카로운 음성이 터져나왔다.

“그 자는 내 몫이다.”

그와 함께 하나의 인영이 중인들의 머리를 뛰어 넘어 장내로 뛰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조뢰명과 임영옥의 한가운데로 날아든 사람은 상의를 대충 걸치고 머리가 부스스한 사나운 인상의 청년이었다. 그를 보자 정해와 낙일방 등은 모두 표정이 변했다.

“으… 응사형!”

나타난 사람은 뜻밖에도 침상에 누워 있는 줄 알았던 응계성이었던 것이다. 응계성은 급하게 뛰어나온 듯 옷도 제대로 여미지 않아서 앞 가슴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드러난 그의 앞가슴은 온통 붕대로 칭칭 동여매어져 있었고, 여기저기에는 희미한 혈흔(血痕)마저 내비치고 있었다. 하나 응계성은 주위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고리 눈을 부릅뜨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자는 내가 상대한다. 불만 있느냐?”

그의 눈에서는 벼락같은 안광이 이글거렸고, 코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멀리 떨어진 사람도 들릴만큼 세차게 뿜어나오고 있었다. 그 험악한 기세에 정해와 낙일방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지금 응계성이 거의 폭발 직전으로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아 차렸던 것이다. 응계성은 비록 평상시에도 화를 잘 내고 성질을 부렸으나 지금처럼 화를 많이 내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자칫 말 한 마디라도 잘못하면 정말 호되게 경을 칠 수 밖에 없었다. 응계성의 시선은 다시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장문사형. 이번에는 내 차례요. 나를 막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시오.”

이건 도저히 문파 제자가 장문인에게 할 소리가 아니었다. 하나 진산월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묵묵히 고개만 끄덕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응계성은 다시 임영옥을 쳐다보았다.

“사저. 비키시오.”

임영옥 또한 말없이 뒤로 물러났다. 지금의 응계성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제서야 응계성은 조뢰명의 앞에 우뚝 서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나는 종남파의 응계성이다. 사저에게 한 수 배우려면 먼저 나를 쓰러뜨려야 한다.”

조뢰명은 느닷없이 나타난 응계성이 흉흉한 기세로 종남파의 고수들을 뒤로 물러서게 하고는 자신에게 다가서자 어이가 없는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서서히 그의 눈에서 칼날같은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어디서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하나 그가 채 생각을 굴리기도 전에 응계성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대뜸 그를 향해 덤벼드는 것이었다.

“어디 형산파의 원공검법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자!”

쉬악!

응계성은 마치 성난 멧돼지처럼 거칠게 조뢰명의 앞으로 돌진하며 검을 휘둘렀다. 그는 앞 뒤 두서가 없이 마구잡이로 공격하는 것 같았으나 그 기세만큼은 날카롭고 흉폭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조뢰명은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전혀 의외의 인물에게 공격을 받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나 그가 미처 정신을 가다듬기도 전에 응계성의 검은 벼락같은 기세로 그의 미간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조뢰명은 정신이 번쩍 들어 뒤로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출검(出劍)했다.

팟!

그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보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그의 허리춤에서 하나의 새하얀 섬광이 응계성의 검을 향해 폭사되어 갔다.

따앙!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음향이 울려퍼지며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던 응계성의 몸이 멈칫거렸다. 섬광과 부딛힌 순간 응계성은 검을 쥔 손목이 떨어질 듯한 충격을 느꼈던 것이다. 반면에 조뢰명은 언제 뽑아들었는지 수중에 예리한 검광이 흐르는 장검을 든 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조뢰명이 득수(得手)를 한 것 같았으나, 사실은 조뢰명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에 그는 응계성의 검을 막음과 동시에 반격을 가하려 했으나, 응계성의 검에 실린 힘이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어서 반격은커녕 막는 것만으로도 힘이 벅찰 지경이었던 것이다.

‘힘 하나는 좋은 놈이군.’

조뢰명은 상대를 경시하려던 마음을 버리고 날카로운 눈으로 상대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수중의 검을 중단으로 들어 올렸다. 응계성은 호리호리한 체격의 조뢰명이 자신의 전력이 들어간 일검을 가볍게 막아내자 처음에는 움찔거렸으나 이내 불같은 호승심과 투지가 끓어올랐다.

“좋다. 어디 이번에도 막을 수 있나 보자!”

그는 벼락같은 노호성을 지르며 다시 조뢰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달려드는 동작은 그렇게 매끄럽지도 않았고, 빠르거나 민첩하지도 않았다. 하나 아무렇게나 덤벼드는 듯한 그 동작이 조뢰명에게는 상당히 위력적인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일견 헛점투성이 같으면서도 나름대로 힘과 기(技)가 함께 갖추어져 있어 일시지간 어떻게 공격을 해야할지 망설여졌던 것이다. 조뢰명은 조금 전의 일격으로 상대의 공력이 자신에 못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정면으로 격돌하지 않고 슬쩍 옆으로 몸을 이동시키며 수중의 장검으로 두 개의 검화(劍花)를 그려냈다. 그것은 상대의 눈을 현혹시킴과 아울러 상대의 다음 동작을 알아보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 하나 응계성은 허공에 그려진 두 개의 검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맹렬한 기세로 이동하는 조뢰명을 따라 바짝 다가서며 검을 수직으로 내려그었다.

쾌액!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섬뜩한 파공음과 함께 폭포수같은 검광이 조뢰명의 머리위로 떨어져내렸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조뢰명은 상대의 무지막지한 공격에 어이가 없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해서 다시 빠르게 세 걸음 옆으로 이동하며 다시 다섯 송이의 검화를 발출했다. 이번의 다섯 송이 중 세 송이는 먼저 번과 같은 허초(虛招)였으나, 마지막의 두 송이는 살수(殺手)가 담긴 실초(實招)였다. 만약 응계성이 이번에도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조뢰명이 발출한 검화를 무시하고 무작정 달려든다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응계성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그은 검초는 조뢰명의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단순히 스치기만 했는데도 조뢰명의 옷자락이 찢어질 듯 펄럭거릴 정도로 위력적인 일초였으나 어쨌든 조뢰명은 무사히 그 살인적인 검초를 피해냈다. 그와 함께 조뢰명이 발출한 다섯 송이의 검화가 응계성의 코앞으로 화악 다가왔다. 응계성은 처음 두 개의 검화는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조뢰명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하나 세 번째 검화가 다가왔을 때는 몸을 움찔거리더니 곧이어 살초(殺招)인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검화를 보자 밑으로 떨어뜨렸던 장검을 곧장 위로 치켜 올리며 검화를 막아갔다.

까깡!

불똥이 튀기며 두 사람의 검이 허공에서 맹렬하게 격돌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치열한 격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검세는 서로의 성격을 말해주듯 판이하게 달랐다. 응계성의 검이 거의 무모하리만치 공격 일변도에 살벌한 위력을 담고 있다면, 조뢰명의 검은 빠르고 날카로우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응계성의 공세가 워낙 흉흉해서 얼핏 보기에는 그가 금시라도 조뢰명을 쓰러뜨리고 말 것 같았으나, 조뢰명이 한 차례씩 반격을 가할 때마다 응계성은 위급한 상황에 처하고는 했다. 황일기는 묵묵히 두 사람의 격전을 지켜보고 있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왜 조사제가 아직 저 자를 쓰러뜨리지 못하는 것일까?’

그가 보는 견지에서 응계성은 조뢰명의 적수가 안되었다. 저렇게 거칠고 막무가내식의 공격은 강호의 하류무사들에게는 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형산파의 체계적이고 엄격한 수련을 겪은 삼결의 고수에게는 헛점투성이의 어린아이 장난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십 여초가 되도록 장내의 상황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고 조뢰명이 일부러 사정을 봐주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조뢰명의 성격상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으며, 실제로 조뢰명은 비록 원공검법을 펼치지는 않았으나 그에 못지 않은 칠살검법(七煞劍法)의 절초들을 사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응계성의 투박한 검초를 제대로 뚫지 못하고 있었다. 황일기는 답답함을 느끼고 눈쌀을 살짝 찌푸렸다.

‘이런 상태라면…’

그가 무언가 깊은 상념에 빠져들려 할 때였다.

차창!

갑자기 지금까지와는 다른 살벌한 마찰음이 연거푸 터져나오며 장내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황일기는 퍼뜩 정신이 들어 장내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치열하게 격전을 전개하고 있던 두 사람은 어느 새 일 장여의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었다. 응계성의 풀어헤쳐진 가슴을 뒤덮은 붕대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어 어찌 보면 낭패스럽기 조차한 모습이었다. 하나 황일기는 응계성의 손에 들린 장검에 한 방울의 핏물이 흘러 내리고 있는 것을 보고 안색이 약간 변했다. 그 핏물은 검신(劍身)을 타고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단 한 방울의 핏물이었으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황일기는 황급히 조뢰명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조뢰명은 안색이 약간 창백했을 뿐, 언뜻 보기에는 별다른 부상을 입은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수중의 장검을 오른 손에 비스듬히 움켜쥐고 오른 발을 앞으로 내밀고 왼발은 뒤로 쭉 뻗은 채 허리를 앞으로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 자세는 칠살검법중 의 절초인 병단천남(屛斷天南)을 펼치고 난 후의 모습이었다. 황일기는 조뢰명의 왼쪽 옆구리가 가늘게 찢어져 있고, 그 사이로 미미한 혈흔(血痕)이 내비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병단천남을 펼쳤는데도 상대의 검을 막지 못했단 말인가?’

형산파에는 모두 구종(九種)의 검법이 있었다. 그중 강호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물론 그 유명한 원공검법이었다. 하나 원공검법은 형산파의 아홉 가지 검법 중 겨우 세 번째 서열에 불과할 뿐이었다. 단지 원공검법은 이대 제자 이상이면 누구나가 익힐 수 있기 때문에 강호인들이 그만큼 많이 접해본 것 뿐이었다. 원공검법 보다 강하다는 두 종의 검법은 형산파에서도 특수한 신분의 고수들만이 익힐 수 있으며, 특히 그중 일종(一種)의 검법은 장로회의(長老會義)에서 통과한 인물에게만 전수된다 고 한다. 칠살검법은 구종검법 중 서열 오위에 올라 있으나, 그 위력은 원공검법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병단천남은 공격과 수비를 겸비한 절초 중의 절초로서, 일검에 산을 자를 정도로 위력적인 초식이었다.

그런데도 조뢰명은 옆구리에 상대의 일검(一劍)을 허용한 것이다. 그것이 비록 피부가 살짝 갈라진 미미한 것에 불과할 지라도 황일기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종남파의 일개 고수의 실력이 저 정도라면 장문인인 진산월의 무공은 보지 않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더구나 진산월의 뒤에 조용히 서 있는 죽립 여인 임영옥의 검술 또한 결코 만만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번에 나온 종남파의 인물들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것 같군.’

황일기는 머리속으로 번개같이 생각을 굴리며 조뢰명을 향해 한 발 내딛었다. 그때 갑자기 그 자리에 미동도 않고 우뚝 서 있던 응계성의 몸이 한 차례 휘청거렸다. 그와 함께 응계성의 앞가슴을 동여맨 붕대가 반으로 갈라지며 그곳에서 시뻘건 선혈이 뿜어나오기 시작했다.

“아앗!”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 틈에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종남파의 인물들 또한 안색이 변해 급히 그를 향해 달려오려 했다. 그때 응계성이 돌연 웃통을 벗더니 자신의 가슴을 동여맨 붕대를 마구 풀러버렸다. 상체가 드러난 그의 가슴에는 예전에 당한 상처에 덧붙여 새로 생긴 일자(一字)모양의 검상(劍傷)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응계성은 왼손을 천천히 내려 자신의 가슴을 가른 상처에 갖다대더니 그 피를 찍어 입가로 가져갔다. 자신의 손가락에 묻은 시뻘건 피를 붉은 혀로 햝아나가던 그의 눈에 보는 사람의 등골을 떨게 할만큼 무시무시한 광망이 뿜어나오기 시작했다.

“피를 보자 이거지. 좋아. 누가 먼저 죽나 끝장을 보자.”

피투성이의 상반신을 그대로 드러낸 채 이를 갈아붙이는 그의 모습은 한 마리의 상처난 야수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살벌한 광경을 본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창백하게 변했다. 심지어 여전히 병단천남의 자세를 유지하며 냉정한 눈으로 응계성을 쏘아보고 있던 조뢰명의 손끝도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만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조뢰명은 지금까지 적지 않은 고수들과 싸웠지만 응계성같은 인물은 아직 상대해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무식할 정도로 과격하게 공격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자는 아예 두려움이란 것을 몰랐다. 적어도 자신의 생명에 조금이라도 애착이 있는 사람이라면 헛점을 파고 들어오는 조뢰명의 예리한 반격에 진즉 뒤로 물러났어야 했다. 그랬다면 조뢰명은 자신의 특기인 빠른 신법과 변화무쌍한 검술을 적절히 활용하여 어렵지 않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 이 자는 조뢰명의 반격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일검을 격중 당하더라도 조뢰명의 몸에 검을 꽂아넣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는 식의 수비를 도외시한 공격을 퍼부었다. 처음에 조뢰명은 상대의 공격이 아무리 무지막지하더라도 자신이 냉정함만 잃지 않는다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응계성의 공격은 그의 예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안전을 전혀 돌보지 않고 쉴 틈없이 밀어붙이는 그의 공세는 조뢰명으로서도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결국 조뢰명은 이런 식으로는 결판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상대의 가벼운 일검을 맞아주는 대신 상대에게 치명적인 일검을 가하는 이대도강(李代桃疆)의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그의 계산은 멋지게 적중하여 그는 비록 옆구리에 일검을 스치긴 했으나, 응계성의 가슴을 병단천남의 식으로 갈라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의당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질 줄 알았던 응계성이 오히려 선불맞은 멧돼지마냥 웃통을 벗어붙인 채 더욱 기세등등하게 날뛰고 있으니 아무리 조뢰명이라 하더라도 마음 한 구석이 불안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은 무공 이전에 기백(氣魄)의 차이였다. 명문세가에서 정통적인 방법으로 검법을 수련한 조뢰명으로서는 이런 방식으로 싸우는 응계성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멈칫거리고 있는 순간에 응계성은 피묻은 검을 번쩍 쳐든 채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응계성의 갈라진 가슴 부위에서는 아직도 핏물이 흘러나와 상체는 물론이고 바지까지 시뻘겋게 물들였으나, 응계성은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황일기가 짤막하게 소리쳤다.

“잠깐.”

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이상하게도 응계성은 인상을 찡그린 채 조뢰명을 향해 다가서던 몸을 멈춰 세웠다. 황일기의 음성을 듣는 순간, 응계성은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던 것이다. 황일기는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의 몸이 향하고 있는 곳은 응계성 쪽이 아니라 의외에도 진산월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는 응계성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진산월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진장문인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말하게.”

황일기는 예리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진산월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원래 제 의도는 진장문인의 고명한 솜씨를 구경하여 안목을 넓히자는 것이었는데, 지금 상황은 너무 살기등등해 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일은 이쯤에서 접어두고 진장문인께는 다음에 가르침을 받을까 하는데 진장문인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종남파의 고수들은 모두 뜻밖이라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황일기의 의도가 그의 말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삼척 동자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응계성이 비록 난폭하게 날뛰고 있지만 조뢰명과 다시 붙는다 해도 승산을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갑자기 황일기가 물러서려 하자 그의 의중을 몰라 모두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 진산월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 깊은 친구로군. 그렇게 하게.”

황일기의 얼굴에 잠시 묘한 빛이 떠올랐다. 생각이 깊다는 진산월의 말이 단순한 칭찬인지 아니면 무언가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명확치 않았던 것이다. 하나 황일기가 아무리 진산월의 표정을 살피어도 진산월의 얼굴은 무덤덤하여 당최 그 속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황일기는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만큼 살짝 눈쌀을 찌푸리다가 이내 다시 머리를 숙였다.

“그럼 다음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이어 그는 휑하니 몸을 돌려 조뢰명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조뢰명은 그때까지도 검을 든 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황일기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사제. 오늘은 이만하면 됐다. 그만 가도록 하자.”

조뢰명은 불만에 가득찬 얼굴로 무어라고 입을 열려 했으나 황일기가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자 입을 다물고는 말없이 검을 거두었다. 황일기는 다시 뒤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좌동을 손짓해 부르고는 천천히 장내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조뢰명과 좌동은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장벽처럼 늘어섰던 사람들이 허겁지겁 비켜서며 그들이 지나가도록 길을 비켜 주었다. 진산월은 형산파의 세 고수가 멀어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가 중앙에 우뚝 서 있는 응계성에게로 다가갔다. 응계성은 그때까지도 인파 속으로 사라져 가는 형산파 고수들의 뒷모습을 잡아먹을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어깨가 연신 부르르 떨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장이라도 그들의 뒤를 쫓아가 끝장을 내려는 충동이 계속 마음 속에 들끓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진산월은 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다. 응계성은 고개를 돌려 진산월을 쳐다보며 무어라 입을 열려 했으나 진산월은 손을 내밀어 그의 가슴팍에 흐르는 피를 지혈(止血)한 후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속이 좀 시원하느냐?”

응계성은 한 차례 얼굴이 붉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산월은 그가 벗어던진 상의를 집어들고 그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네가 참지 못할까봐 걱정했는데 잘 참아 주어서 고맙구나.”

응계성은 한 차례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갑자기 퉁명스런 음성으로 말을 내뱉었다.

“장문사형이 전음(傳音)을 보내지 않았으면 이런 모욕을 당하고 가만있지 않았을거요. 그런데 대체 왜 나보고 무작정 참으라고만 한거요?”

사실 조금 전 응계성이 조뢰명을 향해 다가가던 몸을 멈춘 것은 황일기의 음공(音功) 때문이 아니라 뒤이어 들려온 진산월의 전음성 때문이었다. 진산월이 전음으로 신신당부하지 않았다면 응계성은 불문곡직하고 조뢰명에게 달려들어 생사(生死)를 결(決)하고 말았을 것이다. 진산월은 담담하게 말했다.

“앞으로 그자들하고는 신물나도록 싸우게 될텐데 한 번쯤 참는다고 해서 해가 될건 없지. 더구나 너는 지금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데 이런 때 싸운다는 것은 너무나 불공정한 일이다. 그래서 참으라고 한 것이다.”

응계성은 진산월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 지 씩씩거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런 놈은 내 몸이 아무리 정상이 아니어도 언제라도 쓰러뜨릴 수 있소. 장문사형이 그런 것까지 신경쓸 필요는 없단 말이오.”

진산월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빙긋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음에는 네가 그 자와 무슨 짓을 하건 절대로 말리지 않겠다.”

진산월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응계성도 더 이상 불평만 늘어놓을 수는 없었다. 사실 응계성이 기세에서 앞서기는 했지만 조금 전에 조뢰명과 다시 싸움이 벌어졌다면 승패를 예측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응계성은 며칠 동안 계속 침상에만 누워 있었기 때문에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비록 순간의 격분을 참지 못하고 만용에 가까운 용기를 보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적절한 순간에 싸움을 제지한 진산월의 판단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었다. 정해가 옆으로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그 자들이 순순히 물러난 것이 조금 이상하군요. 다른 의도가 숨어 있는게 아닐까요?”

“그들은 아마도 우리의 실력을 탐지하기 위한 선발대 역할을 한 것일 것이다. 자신들만으로 우리를 충분히 누를 수 있다면 계속 싸움을 걸어왔겠지만, 우리가 만만치 않다고 생각하고는 실력을 알아보는 선에서 마무리 지은 것이겠지.”

“그렇다면 조만간에 또 다른 자들이 시비를 걸어오겠군요.”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가 형산파와의 진정한 격돌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이어 진산월은 응계성을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알겠느냐? 앞으로 그자들과 싸울 기회는 얼마든지 남아 있다는 말이다.”

응계성은 아직도 얼굴에 못마땅한 표정이 남아 있었으나, 음성은 처음보다 많이 풀려 있었다.

“아무튼 그 기생오라비 같은 놈은 내 몫이오. 다음에 그 녀석을 보게 되면 행여 장문사형이 손쓸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시오.”

“물론이다. 하지만 그 전에 네 몸이 빨리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 말에 응계성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종남파의 고수들은 각기 다른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낙일방이 문득 생각난 듯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무튼 이제는 소림사로 가는 일만 남았군요.”

그 말에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렇다. 형산파와의 싸움이야 어찌되었건, 그들은 이제 무림사상 초유의 대집회가 벌어지는 소림사의 지척에 오게 되었다. 떨어졌던 종남파의 위상을 되찾고 강호무림에 명성을 날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종남산을 떠난 지 십삼일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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