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4권 무림연맹(武林聯盟)편 :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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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4권 무림연맹(武林聯盟)편 : 1화


제31장. 심야기사(深夜奇事)

한 밤의 깊은 정적은 때로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진산월의 말이 끝난 후 장내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종리궁도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무언가에 몹시 화난 사람처럼 사나운 눈으로 진산월을 노려보고 있었고, 금포 복면인은 복면 밖으로 유일하게 드러난 두 눈에 이채로운 빛을 번뜩이며 진산월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진산월만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금포 복면인은 천천히 복면을 벗었다. 고운 턱선이 먼저 나타나고 이어 도톰한 입술과 유난히 오똑한 콧날, 차갑게 반짝이는 눈, 그리고 여인치고는 드물게 짙은 눈썹이 차례로 드러났다. 뒤이어 치렁한 흑발이 나타나자 금포 복면인은 보기 드문 미모의 여인으로 변해 버렸다. 이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겉에 걸치고 있던 헐렁한 금포마저 벗어 버렸다. 그녀는 금포 속에 백설(白雪)처럼 새하얀 눈부신 백의를 차려 입고 있었다.

“내가 바로 정소소에요.”

그녀의 변성하지 않은 음성은 상당히 그윽하면서도 독특한 매력이 담겨 있었다. 단정하게 뒤로 묶은 비단결 같은 검은 머리카락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 표정과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려 보였다.

백봉 정소소.

천봉팔선자의 첫째이며 천봉궁에서 대외(對外)적인 모든 일을 총괄한다는 신비의 여고수가 드디어 진산월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진산월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정소저가 말한대로 우리는 결국 만나게 되었구료.”

정소소는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내 예상보다는 조금 빨랐군요. 이런 식으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는데…”

“만남이란 어떤 식으로든 의미가 있는 거요. 교교한 월광 아래 풍경 좋은 이곳에서 절세가인(絶世佳人)을 만나게 되니 나로서는 더할 나위없이 만족스럽소.”

정소소의 눈빛은 월광과 뒤섞여 묘한 색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무튼 정말 놀랐어요. 진장문인이 나를 알아보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었는데…”

“동중산은 잘 있소?”

진산월의 물음에 정소소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정말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이에요. 그는 우리에게 온 후로 단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있어요.”

“그는 결코 바보가 아니니 쉽게 당신들이 알고자 하는 것을 알려줄 리가 없지. 그래서 내가 운자추를 만나려 한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당신들이 반드시 나를 찾아오리라고 생각했었소.”

정소소의 눈이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그래서 당신은 일부러 정각을 통해 운자추에게 말을 전하게 한 거로군요.”

“그렇소. 우리가 소림사에 도착하자마자 엄쌍쌍이 쉽게 우리를 찾은 것을 보고 정각이 당신들과 끈이 닿아 있다는 걸 짐작했지. 하지만 설마 정소저께서 직접 나설 줄은 몰랐소.”

“이번 일은 우리에게도 중대해서 내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어요.”

“천봉궁의 방침이 정해졌소?”

정소소는 한동안 물끄러미 진산월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궁에서는 봉황금시 때문에 무림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 물건을 회수하기로 결정했어요.”

진산월은 다시 물었다.

“그건 천봉궁주(天鳳宮主)의 생각이오?”

정소소의 유달리 짙은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렇게 묻는 의도가 무언지 궁금하군요.”

진산월은 습관적으로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별 뜻은 아니오. 난 단지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천봉궁주가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오.”

정소소의 음성은 여전히 차분하고 부드러웠으나, 그 속에는 무언지 모를 엄격함이 담겨 있었다.

“그건 궁주님의 지시가 아니니 쓸데없이 궁주님을 모독하는 일은 하지 말기 바래요.”

진산월은 짐짓 눈을 크게 떴다.

“그렇소? 그럼 누가 그런 결정을 내린 거요?”

“본궁의 자세한 사정을 굳이 당신에게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보다…”

그녀는 진산월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어요. 당신은 봉황금시의 행방을 알고 있나요?”

그녀의 음성이나 태도는 처음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주위의 공기는 어딘지 모르게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말을 하는 동안에 양 손을 가만히 늘어뜨렸고, 그와 동시에 종리궁도가 진산월을 향해 몸을 비스듬히 돌렸기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의 동작은 별로 대수로울 것이 없어 보였으나, 진산월은 자신의 대답 여하에 따라 그들이 언제라도 손을 쓸 수 있는 자세로 전환한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진산월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모르오.”

정소소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으나, 종리궁도는 입가에 싸늘한 웃음을 떠올렸다.

“흐흐… 운자추에게는 그런 식으로도 통했을지 모르나 우리에게는 어림없다.”

진산월은 힐끗 그를 돌아보았다.

“일파의 장문인 신분으로 내가 거짓말을 할 것 같소?”

종리궁도의 가뜩이나 흉악한 얼굴이 음산하게 굳어졌다.

“종남파 따위의 시시한 문파를 이끄는 게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네놈이 계속 허튼 소리를 지껄인다면 따끔한 맛을 보여주고야 말겠다.”

종리궁도가 계속 험악한 표정으로 말을 하는데도 정소소는 전혀 제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진산월은 종리궁도와는 더 상대하고 싶지 않은 듯 정소소를 응시하며 침착한 음성으로 물었다.

“정소저도 내 말을 믿지 못하오?”

“나는 단지 당신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제시해 주길 바랄 뿐이에요.”

“그건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니오? 물건은 동중산이 가지고 있고, 나는 그에게 물건의 행방을 추궁하지 않았소.”

“당신은 입버릇처럼 자신이 장문인으로서 문파의 제자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동중산이 무엇을 가지고 있든 신경쓰지 않았다고 하니 정말 이해하기 어렵군요.”

진산월은 빙긋 웃었다.

“동중산이 본파의 제자인 것과 그가 무림의 기보를 얻은 것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추궁한다고 해서 동중산이 선뜻 입을 열었을 리 없지 않겠소?”

정소소는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상념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다. 하나 다시 고개를 들어 진산월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평소와는 다른 날카로움이 담겨 있었다.

“당신은 보기와는 달리 두뇌가 명석한 사람이에요. 그런 당신이 동중산을 곁에 두고서도 봉황금시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당신은 틀림없이 무언가 봉황금시의 행방을 알 수 있는 나름대로의 조치를 강구해 두었을 거에요.”

“나를 그렇게 대단한 사람으로 보아주니 고맙지만 나는 정말 물건의 행방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소.”

“그렇다면 당신은 무슨 수로 운자추를 납득시키려고 했죠?”

“사실대로 말하면 그가 이해해 주리라고 생각했소.”

정소소의 얼굴에 엷은 웃음이 떠올랐다.
하나 그것은 결코 호의적인 웃음이 아니었다.

“내가 당신을 잘못 보았군요. 당신은 영리한 척 하지만 사실은 아주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아니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영리하던가…”

“내가 영리한지 어리석은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소.”

정소소는 더 이상 그와 입씨름을 하기 싫은 듯 오른 손을 슬쩍 내저었다.

“당신이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로서도 다른 방법이 없군요.”

그녀의 손짓이 신호였는지 호시탐탐 진산월을 노려보고 있던 종리궁도의 신형이 움직이려 했다.
하나 종리궁도의 어깨가 막 흔들리려는 순간, 진산월이 갑자기 짤막하게 소리쳤다.

“잠깐.”

정소소는 다시 오른 손을 까닥거려 종리궁도에게 가만있으라는 신호를 했다.

“이제 생각이 바뀌었나요?”

“내가 물건의 행방을 모른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오. 하지만 한 가지 방법이 있소.”

정소소의 눈빛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그게 무언가요?”

“동중산을 내게 돌려보내시오. 그럼 그에게서 물건의 행방을 알아내어 소저에게 알려주겠소.”

종리궁도는 그의 말에 어이가 없는지 입을 딱 벌리고 무어라고 고함을 내지르려 했다.
하나 그보다 먼저 정소소의 냉정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당신은 그 제의를 내가 들어주리라고 생각하나요?”

진산월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가 너무나 자신있게 대답을 하자 정소소는 오히려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거죠?”

“내가 동중산에게서 물건의 행방을 알아내든 그렇지 않든 정소저로서는 손해 볼게 없기 때문이오.”

그건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진산월이 동중산의 입에서 물건의 행방을 알아내면 물론 더할 나위없이 좋은 일이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녀는 두 사람을 온전하게 자신의 수중에 두고 감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의 그녀로서는 동중산의 입에서 물건의 행방을 알아낼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진산월이 스스로 동중산에게서 물건의 행방을 알아내겠다고 한 이상 그에게는 나름대로 무언가 방법이 있지 않겠는가?
마침내 정소소는 마음을 결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당신을 동중산에게 데려다 주겠어요. 하지만 그에게서 물건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하면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각오해 두는게 좋을 거에요.”

진산월은 조용하게 웃었다.

“물론 각오하고 있소. 대신 물건의 행방을 알게 되면 더 이상 동중산과 본파의 일에 간섭하지 말아주었으면 하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물건 때문이 아니라면 동중산 같은 인물을 만나는 일 따위는 절대로 없었을 테니까.”

“동중산은 지금 어디 있소?”

정소소는 한 차례 더 진산월을 쳐다보다가 먼저 몸을 돌렸다.

“따라오세요.”

진산월은 천천히 그녀의 뒤를 이어 몸을 움직였고, 종리궁도가 진산월을 감시하듯 제일 뒤에서 어슬렁거리며 따라왔다.
월광이 환하게 비치는 탑림의 그림자 속을 거니는 것은 나름대로 독특한 정취가 있었다.
더구나 절세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걷는 기분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었다.
정소소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그윽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취하게 만드는 듯한 향기가 풍겨 나오고 있어 진산월은 자신도 모르게 빙긋 미소지었다.
진산월은 비록 호색(好色)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도 엄연한 남자인지라 아름다운 여인의 우아한 자태를 감상하는 것이 싫을 리 없었다.
그때 정소소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듯 힐끗 고개를 돌렸다.
진산월은 정소소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기색도 없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정소소의 고운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왜 웃는 거죠?”

진산월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달빛이 너무 좋아서 잠시 옛날 생각이 났소. 예전에 밤길을 걸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지금처럼 달빛이 환해서 마치 사방에 온통 서리가 내린 것 같았소.”

정소소는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감상적인 이야기로군요.”

“별로 그렇지는 않소. 그때 나는 남과 처음으로 결투를 하러 가는 길이었지. 그 전까지는 가슴이 몹시 두근거리고 손이 떨렸는데, 이상하게도 달빛을 받으며 가는 동안 마음 속의 두려움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소.”

정소소는 조금 흥미가 이는 듯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승부에 이겼나요?”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결투는 벌어지지 않았소.”

“왜요?”

“나와 싸우려던 상대가 오지 않았소.”

정소소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겁이 났었나 보군요.”

“나중에 들으니 그는 약속장소로 오다가 연못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고 하오. 그때 연못 위에 비치는 달빛이 너무 밝아서 자신도 모르게 한동안 멍하니 연못 속의 달을 구경하고 있었다고 하더군.”

“……”

“그런데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마음 속에 들끓었던 분노와 살심(殺心)이 모두 가라앉으며 나와 싸운다는 것이 너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고 하오. 그래서 결국 그는 밤새 그 연못 앞에 쭈그리고 앉아 달을 구경하다가 그대로 돌아가고 말았소.”

정소소가 무어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진산월의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종리궁도가 불쑥 말을 내뱉었다.

“시시한 이야기로군. 그런 놈은 무인(武人)의 자격이 없는거야.”

진산월은 힐끗 그를 돌아보았다.

“귀하에게는 시시한 이야기겠지. 하지만 그 뒤로 그는 나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소. 그래서 이렇게 달빛이 좋은 밤이면 그 친구 얼굴이 떠오르곤 하오.”

종리궁도의 얼굴에 짙은 비웃음의 기색이 떠올랐다.

“흐흐… 달빛을 보다가 마음을 바꾸었다는 그 대단한 친구가 누구냐?”

진산월은 그의 조롱섞인 질문에도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조일평(趙一平)이라 하오.”

그 말에 종리궁도는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조일평이라면… 일검혈견휴(一劍血見休)라고 소문난 마검(魔劍) 조일평 말이냐?”

“그렇소.”

종리궁도는 물론이고 앞에서 걷고 있던 정소소마저 눈에 이채를 띄고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조일평은 최근 들어 강호무림에 명성이 널리 알려진 인물로, 검(劍)에 관한 한 철저한 승부사(勝負士)라고 소문이 났다.
일단 그의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면 반드시 상대의 피를 보았기 때문에 일검혈견휴라는 별호가 붙었으며, 지난 오 년 동안 산서성(山西省)에서 배출된 검객들 중 가장 특출난 실력을 지닌 것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조일평은 굉장히 무뚝뚝하고 냉혹한 성격이어서 친구가 없기로 유명한 인물인데, 진산월의 말이 사실이라면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종리궁도는 진산월의 말의 진위(眞僞)를 탐색하려는 듯 진산월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하나 월광 아래 드러난 진산월의 얼굴은 그저 담담할 뿐이었다. 종리궁도는 한 차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씹어뱉듯이 중얼거렸다.

“만일 그렇다면 너는 정말 운이 좋았구나. 조일평과 결투를 약속하고도 살아 남았다니…”

진산월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래서 나는 오늘의 내 운도 그리 나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소.”

“흐흐…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겠지.”

종리궁도는 음산하게 웃으며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탑림을 지나 소림사의 후원에 있는 객방 근처에 도착하게 되었다. 진산월은 자신들이 향하는 곳이 천지현황우주홍황의 팔대객방 중 천방(天房)의 방향임을 알았다. 미로와도 같이 복잡한 길을 얼마쯤 가던 정소소는 그중 하나의 객방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이상하게도 그들이 지나가는 동안 주위에는 인기척이 전혀 없었고, 단 한 사람의 경비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 진산월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구석구석에 적지 않은 고수들의 눈길이 숨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정소소가 진산월을 데리고 들어간 곳은 한 채의 아담한 대청 안이었다.

“이곳에서 기다리세요.”

정소소는 진산월을 대청의 의자에 남겨둔 채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고, 종리궁도만이 진산월을 지키듯 대청 한쪽 구석에 비스듬히 서 있을 뿐이었다.

진산월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청 안은 별다른 장식은 없었으나 정갈하고 깨끗해서 고아한 분위기가 났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두 명의 여인이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들은 다름 아닌 천봉팔선자 중의 영봉 금교교와 남봉 엄쌍쌍이었다. 엄쌍쌍은 진산월과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를 속이고 동중산을 빼돌렸던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진산월은 그녀를 책망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담담하게 웃으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시오?”

엄쌍쌍은 고개를 거의 목아래까지 떨군 채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신 금교교가 특유의 침착한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진장문인이 여기까지 찾아오실 줄은 몰랐어요. 과연 진장문인은 대단한 사람이에요.”

“운이 좋았을 뿐이오. 그런데 정소저는?”

“큰언니는 때가 되면 나올테니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금교교의 모습이나 표정은 처음 만났을 때와 별반 달라진 곳이 없었으나 진산월은 왠지 자신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냉랭해 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실내의 분위기도 약간은 어색하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진산월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문득 자신의 위치가 공교롭게도 세 사람에게 포위된 형상이라는 깨닫고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자신의 등뒤에 종리궁도가 있고, 자신의 앞쪽으로 엄쌍쌍과 금교교가 양 옆으로 비스듬히 벌려서 있었던 것이다. 언뜻 보아서는 대수로울게 없는 것 같았지만 진산월은 그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종리궁도는 물론이고 금교교와 엄쌍쌍도 자리에 앉지 않고 서 있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천봉궁의 고수들은 그를 매우 경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때 다시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동중산이었다.

동중산은 못마땅한 얼굴로 진산월의 앞으로 걸어오더니 그에게는 아무런 인사도 없이 의자 위에 걸터앉았다. 그것은 도저히 장문인을 대하는 문하제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진산월은 평소에는 좀처럼 화를 낼 줄 모르는 선량한 사람이었으나 이때만은 얼굴색이 변하며 눈빛이 차가워졌다.

“중산. 일어서라.”

동중산은 그의 냉랭한 음성에 순간적으로 움찔하여 그를 쳐다보았다. 진산월의 얼굴은 평상시와는 다르게 무서울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고, 전신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흘러나왔다.

“일어서라!”

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동중산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산월은 그의 눈을 뚫어지게 주시하며 한 자 한 자 분명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외인(外人)과 결탁하여 사문(師門)의 존장(尊丈)을 속인 것은 기사멸조(欺師滅祖)의 죄에 해당된다. 너는 그 벌칙이 무엇인지 아느냐?”

동중산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졌다.

어느 문파이든 기사멸조는 가장 큰 죄로 여겨 엄벌에 처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것은 문파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데 꼭 필요한 것이어서 결코 예외를 두거나 대충 처리하지 않는다. 역사가 오래된 문파일수록 그 벌은 더욱 가혹해져서, 종남파 정도의 역사를 지닌 문파라면 단순한 파문(破門)이나 가벼운 징계 정도에 그칠 리가 없었다.

“본파에서 기사멸조의 죄는 내공(內功)을 전폐시키고 손발의 힘줄을 자른 다음 영구히 본파에서 축출하는 것이다. 너는 형벌을 받을 준비를 해라.”

동중산은 자신도 모르게 한 차례 몸을 떨다가 급히 소리쳤다.

“나… 나는 종남파를 그만 두겠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의자에 앉아 있던 진산월이 오른쪽 발로 그의 정강이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팍!

“우욱!”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진산월의 기습적인 행동에 동중산은 그대로 허물어지듯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다리가 부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눈을 부릅뜨며 진산월을 올려다보았다.

“자… 장문인…”

하나 다음 순간, 진산월은 불쑥 오른손을 내밀어 그의 마혈을 짚어 버렸다. 그것은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동중산은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자세 그대로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진산월을 쳐다보는 그의 두 눈에는 경악과 당혹, 그리고 은은한 두려움의 빛이 담겨 있었다.

놀란 사람은 비단 동중산 만이 아니었다. 진산월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종리궁도와 엄쌍쌍, 금교교도 뜻밖의 상황에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들은 그동안 온순하고 조용하기만 했던 진산월이 이런 행동을 하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금교교는 안색이 서릿발처럼 차갑게 변한 채 날카롭게 소리쳤다.

“진장문인. 이게 무슨 짓이죠?”

진산월은 조금도 흐트러짐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장문인으로서 본파의 문호(門戶)를 정리하려는 거요. 그러니 귀궁은 상관할 필요가 없소.”

평소의 그답지 않게 단호한 그의 음성을 듣자 금교교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하나 그녀는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산월의 말마따나 이것이 문파 내부의 일이라면 다른 사람들은 개입할 명분이 없는 것이다.

진산월은 동중산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며 나직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본파가 삼백 여년을 내려오는 동안 기사멸죄의 중죄(重罪)를 지은 자는 채 열 명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너는 본파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외부인과 결탁하여 장문인을 농락하고 본파의 얼굴에 먹칠을 했으니 그 죄를 어찌 엄히 묻지 않을 수 있겠느냐?”

“……”

“게다가 형벌이 두려워 스스로 파문을 자처하다니 본파가 네 마음 내키는대로 들락거릴 수 있는 시정(市井)의 주루인 줄 알았느냐?”

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그 속에는 준엄한 질책과 추궁의 빛이 담겨 있어 그야말로 서릿발을 보는 것 같았다.

평상시의 진산월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더욱 삼엄해 보였는지도 몰랐다. 동중산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진땀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진산월은 낭패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핼쓱하게 굳어있는 동중산의 두 눈을 쳐다보며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는 너를 본파로 압송하여 죄를 추궁해야 하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 자리에서 바로 형을 집행하도록 하겠다.”

그는 오른손이 번쩍 쳐들었다. 이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동중산의 단전혈(丹田穴)을 향해 맹렬하게 손을 내리치려는 순간,

“잠깐!”

날카로운 여인의 음성이 그의 귓전을 찔렀다. 진산월은 오른손을 동중산의 단전 바로 위에서 멈춘 채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금교교의 수정처럼 맑고 차갑게 반짝이는 눈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진산월은 냉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왜 그러시오, 금소저?”

금교교는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그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진장문인께서는 정말로 그를 징계하실 생각인가요?”

“물론이오.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오?”

금교교는 붉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문 채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귀파의 일에 간섭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하지만 지금은 우선 본궁의 일부터 해결해야 하는 게 순서라고 보여지는군요.”

진산월은 눈쌀을 찌푸렸다.

“소저의 말씀은 물건부터 회수하고 그를 징계하라는 뜻이오?”

금교교는 평소에는 점잖고 온화하던 그가 오늘따라 조금은 까다롭게 군다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사실 그 일은 지금까지 너무나 시간을 끌어 본궁으로서는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에요.”

“그건 금소저를 처음 만났을 때와 말이 조금 다르구료. 그때는…”

진산월이 미처 말을 맺기도 전에 금교교가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챘다.

“본궁의 상황이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어요. 그러니 진장문인께서 이해하세요.”

진산월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다가 다시 동중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소저가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그럼 징계를 잠시 늦추도록 하겠소. 중산, 나를 보아라.”

동중산은 그때까지도 새파랗게 질려 있다가 그의 말에 조금 안도의 빛을 띄웠다. 조금 전에 금교교가 나서주지 않았다면 그는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하고 무림인으로서의 생명이 끝장날 뻔 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진산월을 쳐다보는 그의 시선에는 아직도 은은한 두려움의 빛이 담겨 있었다. 진산월은 엄숙하면서도 진지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본파로 들어온 지는 불과 열흘도 되지 않지만 그동안 네가 본파에 끼친 물심양면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네가 본파의 제자로 무사히 정착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너로 인한 모든 잡음들을 기꺼이 감수해 왔다.”

동중산은 그에게서 추상과도 같은 기세를 느껴서인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푸르뎅뎅하게 굳은 얼굴로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너의 안하무인격인 행동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너의 무공을 폐하고 너를 파문시키려는 지금, 나는 장문인으로서 너에게 본파의 제자로서의 충성심을 입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고자 한다.”

동중산의 몸이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만큼 가늘게 떨렸다. 진산월은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을 계속했다.

“이제 너에게 묻겠다. 봉황금시는 어디에 있느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동중산에게로 고정되었다. 동중산의 얼굴은 보기에 안타까울 정도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고, 두 눈은 나방이 활개치듯 쉴 새없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잔꾀가 많고 두뇌가 비상하여 강호에서 비천호리라고 까지 불리웠던 동중산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낭패스런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동중산은 진산월이 설마 이토록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손을 쓰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진산월과 함께 지내오면서 그가 무척 유순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연중 그에 대한 경계를 늦춘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동중산은 무방비 상태에서 너무나 맥없이 제압당한 자신의 부주의가 뼈저리게 후회스러웠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동중산이 얼굴 표정만 여러 차례 변한 채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자 진산월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아직도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잔머리를 굴릴 셈이냐?”

진산월의 호통에 동중산은 당혹한 빛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억지로 입을 열었다.

“자… 장문인. 그건…”

진산월은 손을 내저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사실 나로서는 네가 봉황금시의 행방을 말하든 말하지 않든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어차피 그 물건은 본파의 것도 아니고, 그 물건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네가 아직도 쓸데없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나를 속이려 한다면, 본파의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너를 처단하지 않을 수 없다.”

“……”

“마지막으로 묻겠다. 물건은 어디 있느냐?”

동중산의 입꼬리가 부르르 떨렸다. 그의 눈에서 세찬 망설임과 갈등의 빛이 교차로 흘러나왔고, 숨소리가 눈에 띨 정도로 거칠어졌다. 진산월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오른손을 번쩍 쳐들었다. 이번에는 다른 어떤 사람이 말린다 해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한 결연한 모습이었다. 막 그 오른손이 움직이려 할 순간, 동중산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제자가 가지고 있습니다.”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금교교와 엄쌍쌍, 종리궁도는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않고 동중산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진산월은 여전히 금시라도 내려칠 듯 손을 쳐든 채로 다시 물었다.

“그럼 물건을 네 몸에 지니고 있단 말이냐?”

동중산은 이미 모든 것을 포기했는지 순순히 대답했다.

“예.”

“그것을 내놓아라.”

동중산은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씁쓸하기 그지없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 전에 장문인께 몇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동중산은 잠시 침음했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제자가 그 물건을 내놓게 되면 그것을 어떻게 처분하실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진산월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즉시 말했다.

“원주인에게 돌려줄 생각이다.”

동중산은 다시 물었다.

“만약 원주인이 물건을 돌려받을 수 없는 상황이거나 물건을 돌려받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금교교 등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금교교와 종리궁도는 워낙 속이 깊은 인물들이라 별로 표시가 나지 않았지만, 엄쌍쌍은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동중산의 두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 물건을 다시 네게 돌려주겠다.”

엄쌍쌍이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무어라고 입을 열려 했으나 금교교가 살짝 그녀의 손을 잡아 당기며 그녀를 제지했다. 핼쓱하게 굳어있던 동중산의 얼굴에 일말의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한 가지 더 여쭈어 볼 것이 있습니다. 물건을 내놓고 난 후에도 저에 대한 처벌이 계속 되는 것입니까?”

진산월의 표정이 돌연 엄숙하게 변했다.

“그것은 네가 관여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장문인인 내가 결정할 문제이니 너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고 물건을 내놓은 다음 처분을 기다려라.”

동중산은 약간 실망하는 듯한 눈치였으나, 더 이상은 무어라고 말하지 않았다. 금교교는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내심 초조한 마음으로 동중산이 어서 빨리 봉황금시를 꺼내기를 기다렸다. 사실 그녀는 봉황금시를 몸에 지니고 있다는 동중산의 말을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동중산 같이 약삭빠르고 교활한 인물이 그렇게 귀한 물건을 몸에 직접 지니고 있을 리 없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동중산이 자는 동안 종리궁도를 시켜 은밀히 동중산의 몸을 샅샅이 뒤져 보았으나 전혀 봉황금시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의구심은 더욱 짙어만 갔다. 종리궁도는 그런 일에는 그야말로 철저한 사람이어서 동중산이 아무리 은밀하게 봉황금시를 숨기고 있다 할지라도 몸에 지니고 있다면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궁금한 것은 진산월도 마찬가지였다. 진산월은 일전에 동중산이 운문세가의 고수들에게 사로 잡혔던 것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때 운문세가의 고수는 동중산의 몸을 그야말로 이 잡듯이 뒤졌으나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동중산이 봉황금시를 자신의 몸에 지니고 있다고 하니 그로서도 호기심이 동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대체 동중산은 봉황금시를 어디에 숨기고 있단 말인가? 동중산은 중인들의 시선이 온통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보고 한 차례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다음에 한 일은 모든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돌연 동중산은 입을 딱 벌리고 자신의 입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는 것이었다. 중인들이 영문을 몰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동안 동중산은 손가락 두 개를 어금니 쪽으로 깊숙히 집어넣어 무언가를 잡아 당겼다. 진산월은 안력을 돋구어 자세히 보고서야 동중산이 지금 엄지와 식지를 이용하여 잡아 당기는 것이 하나의 가느다란 실임을 알 수 있었다. 놀랍게도 동중산의 왼쪽 어금니에 하나의 실이 묶여 있었던 것이다.

“으웩!”

동중산은 실을 잡아 당기며 몇 차례 구역질을 했다. 그와 함께 그가 잡아 당기는 대로 그의 목구멍을 타고 무언가 하나의 물체가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의 가죽주머니였다. 가죽주머니는 길이가 어린 아이의 손바닥만하고 굵기는 손가락 정도로 가늘었다. 얼핏 보기에는 도장이나 인장을 넣는 주머니 같았는데, 무슨 가죽으로 만들었는지 표면이 아주 매끄러웠다. 동중산은 구토를 하느라 입가에 묻은 침을 소맷자락으로 대충 닦은 다음 가죽주머니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중인들이 모두 홀린 듯이 보고 있는 가운데 동중산은 천천히 가죽주머니를 묶었던 실을 풀었다. 그러자 갑자기 주머니 안에서 휘황한 금광(金光)이 흘러나오며 금빛 찬란한 물체 하나가 튀어 나왔다. 그것은 길이가 두치 쯤 되는 황금 열쇠였다. 열쇠의 손잡이 부분은 정교한 봉황(鳳凰)문양의 조각이 있고, 끝 부분은 기이한 요철을 이룬 특이한 형태였다. 봉황의 조각이 어찌나 생생한지 금시라도 작은 봉황 한 마리가 황금빛 날개를 펄럭이며 열쇠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더구나 봉황의 눈 부분에는 깨알만한 붉은 빛 보석이 박혀 있어 더욱 그러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한동안 장내에는 이상한 정적이 감돌았다. 모두들 정신없이 동중산의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는 황금빛 열쇠를 들여다보느라 할 말을 잊고 만 것이다. 종리궁도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짓눌린 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것이… 봉황금시로구나…!”

그렇다. 이 황금빛 찬란한 봉황 문양의 열쇠가 바로 봉황금시였다. 놀랍게도 동중산은 봉황금시를 실에 매달아 자신의 뱃속에 넣어가지고 다녔던 것이다. 금교교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동중산을 바라보았다.

‘정말 절묘한 방법이다. 이래서 운자추가 그를 사로잡고도 봉황금시를 손에 넣지 못했던 것이구나.’

금교교는 머리가 비상하고 영특한 여인이었으나, 이와 같은 식으로 물건을 숨기는 방법이 있을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간혹 귀중한 물건을 삼켜서 보관하는 경우는 있다. 하나 그것은 배설할 수 있을 정도의 아주 작은 물건에 해당되는 경우이며, 봉황금시 정도의 크기라면 배설이 되지 않기 때문에 누구도 동중산이 그것을 삼켰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배를 가르는 것 외에 물건을 꺼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봉황금시가 아무리 중요한 기보라 할지라도 자신의 목숨보다는 소중할 리가 없었다. 동중산같은 인물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도 동중산은 일반인들의 의표를 찔러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였으니 그녀가 감탄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 보기에는 간단한 것 같았지만, 작지 않은 크기의 봉황금시를 실로 묶어 뱃속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것은 상당한 인내와 끈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더구나 동중산이 물건을 입수한 것은 거의 열흘 전이었으니, 그동안 그의 고충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인지 봉황금시를 꺼내 놓은 동중산의 얼굴에는 짙은 아쉬움과 함께 일말의 후련함이 담겨 있었다. 진산월은 동중산의 손에서 봉황금시를 건네받았다. 그때 금교교가 한발 앞으로 나서며 손을 내밀었다.

“이제 진장문인께서 약속을 지킬 차례로군요.”

진산월은 봉황금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그녀를 힐긋 돌아보았다.

“그 전에 한 가지 확인할 일이 있소.”

“무엇인가요?”

“이 물건의 원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거요.”

금교교의 낯빛이 조금 달라졌다.

“진장문인이 질문하시는 의도가 궁금하군요. 일전에 말씀드린대로 봉황금시는 본 궁의 궁주님의 신물(信物)이에요.”

“금소저의 말씀은 잘 기억하고 있소. 그때 금소저는 봉황금시가 천봉궁주의 신물과도 같은 것이며, 천봉궁주께서 그 물건을 누군가에게 주었다고 하지 않았소?”

금교교는 진산월이 오래 전에 그녀가 한 말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모두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내심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나 겉으로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냉랭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 물건이 다시 강호에 유출된 이상 본 궁은 그걸 다시 회수할 권리가 있는 거에요.”

“나도 공연한 말트집을 잡을 생각은 없소. 하지만 소저의 말씀대로라면 천봉궁주가 그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건넨 순간부터 물건의 소유주는 그 사람이 되는거요. 그렇다면 그 후에 어떤 경로로 물건이 유출되었건 그 물건의 원주인은 바로 그 사람이 아니겠소?”

“그건 억지에요. 누군가가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물건을 빼돌렸다면 그 물건을 찾아서 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기본적인 도리가 아닌가요?”

진산월은 문득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소저가 이 물건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결국 이것을 원래 주인에게로 되돌려 주기 위해서란 말이오?”

금교교는 이런 상황에서 진산월의 미소가 조금 꺼림칙했으나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렇다면 금소저는 걱정할 필요가 없소. 물건의 주인이 누구인지 내게 알려주면 내가 그 분께 직접 전해 주겠소.”

금교교의 미간에 차가운 빛이 드리워졌다.

“굳이 그런 일로 진장문인께 수고를 끼쳐드리고 싶지 않군요.”

진산월은 부드럽게 웃었다.

“하하…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수고라고 할 것 까지야 있겠소? 그런데 천봉궁주가 물건을 건네준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 알 수 있겠소?”

금교교의 의도는 진산월로 하여금 다른 마음을 먹지 않고 봉황금시를 순순히 내놓도록 하려는 것인데, 진산월은 교묘하게 그녀의 의도를 피해가며 자신이 궁금해 하는 것을 캐물었다. 금교교는 두뇌가 명석한 여인인만큼 진산월의 의중을 파악하고 재빨리 잘라 말했다.

“그건 본궁의 기밀이니 밝힐 수가 없어요. 진장문인께서는 쓸데없는 심력(心力)을 낭비하지 말고 봉황금시를 본궁에 돌려주기 바래요.”

그녀의 말은 겉보기에는 예의를 차린 것 같았으나, 그 속에는 은근한 압박이 담겨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종리궁도가 진산월을 향해 성큼 앞으로 다가섰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종리궁도는 단지 한 걸음만을 내딛었을 뿐이나, 두 눈에서는 날카로운 신광(神光)이 줄기줄기 뿜어 나오고 전신의 기세는 맹렬하게 피어올라 있어 누가 보기에도 그가 지금 양 손에 공력을 가득 끌어올린 채 당장이라도 손을 쓸 준비를 갖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장내에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진산월의 태도 여하에 따라 한 바탕의 격변이 몰아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도리어 낭랑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하하… 물론 나는 봉황금시에는 아무런 미련도 없소. 단지 나는 일을 순리(順理)에 맞게 처리하고 싶을 뿐이오.”

“그 물건은 본궁에서 나온 것이니 본궁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게 바로 순리가 아닌가요?”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 물건에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사람 뿐이라고 생각하오.”

금교교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게 누군가요?”

“첫째는 물론 천봉궁주에게서 제일 처음 이 물건을 건네받은 사람이오. 그는 실질적인 이 물건의 주인이니, 당연히 권리가 있소.”

“다른 한 사람은?”

“천봉궁주요.”

금교교는 재빨리 말했다.

“그렇다면 더 생각할 것도 없지 않나요? 그 물건의 원주인은 지금 이 자리에 없고, 우리는 여기에 있어요. 진장문인 말씀대로 우리는 그 물건을 돌려받을 권리가 있단 말이지요.”

진산월은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담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내가 말한 사람은 천봉궁주 본인이오. 그리고 아쉽게도 소저는 천봉궁주가 아니오.”

그 말에 금교교는 입술을 꼬옥 다문 채 사나운 눈으로 진산월을 쏘아보았다. 진산월의 등뒤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종리궁도가 금시라도 덤벼들 듯 양쪽 어깨를 흔들며 음산하게 소리쳤다.

“더 두고 볼 것 없소. 이 놈은 지금 쓸데없는 말만 늘어 놓고 시간을 벌어보자는 수작이오. 당장 쓴 맛을 보여주지 않으면 결코 물건을 내놓으려 하지 않을거요.”

금교교는 아무 말없이 진산월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하나 진산월은 그녀의 따가운 눈빛에도 아랑곳없이 특유의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머금은 채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 금교교는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는지 한결 차분하면서도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진장문인은 보기 보다는 정말 까다로운 사람이군요. 그렇다면 진장문인께서는 그 물건을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인지요?”

종리궁도는 그녀의 지시가 내려지기만 하면 이 얄미운 종남파의 애송이 장문인을 단단히 혼 내주려고 벼르고 있다가 실망을 금치 못하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내게 맡기기만 하면 쉽게 해결될 일을 가지고 조금 전에 큰 소저도 그렇고 셋째 소저도 그렇고 왜 이런 버르장머리없는 녀석에게 자꾸 기회를 주려는 거지? 정말 속이 터져 미치겠군.’

진산월은 수중에 들고 있는 봉황금시를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봉궁주 본인이 직접 오거나 아니면 그의 친서(親書)를 소지한 사람의 요구가 있으면 건네주도록 하겠소.”

“본 궁의 궁주께서는 신상(身上)에 일이 있어 이번에 소림으로 오시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그 분의 친서는 없지만 큰 언니는 그 분의 외조카로서 그 분의 의중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 큰 언니께 부탁드리도록 하겠어요.”

“백봉 정소저가 천봉궁의 요직에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그녀가 천봉궁주를 대변할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구료.”

금교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었다.

“본 궁에서 이번 일을 조용히 마무리짓기 위해 가급적이면 무력(武力)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방침이 없었다면 진장문인은 이미 커다란 낭패를 면치 못했을 거에요.”

진산월은 빙긋 웃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우리는 지금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물건을 되찾기를 원해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진장문인께서 물건을 건네주실 수 있죠?”

진산월은 이미 생각해 놓은 것이 있는 듯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천봉궁주가 제일 처음에 물건을 건네준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소. 그래서 가급적이면 그에게 직접 물건을 주고 싶고, 만일 그게 불가능하다면 그에게서 물건의 처분에 대한 의견을 들었으면 하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금교교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잘라 말하자 진산월은 돌연 정색을 했다.

“금소저. 내가 비록 그리 대단한 인물은 못되지만 그래도 어엿한 한 문파를 이끌고 있는 장문인이오. 내 신분으로 많은 사람들이 노리고 있는 강호의 기보를 함부로 처리할 수는 없는 법이오. 나중에라도 이 문제로 인해 다른 풍파(風波)를 겪고 싶지 않기 때문에 무리한 줄 알면서도 소저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거요. 그러니 한 번 더 심사숙고해 주시오.”

진산월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금교교도 무작정 거절할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말을 해주어야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때 그녀의 시선이 우연인지 슬쩍 한쪽 구석에 걸려 있는 족자를 향했다. 그 족자는 한적한 야산(野山)의 풍경을 담담하게 묘사한 수묵화(水墨畵)인데, 별로 특이할 것도 없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끌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 족자를 쳐다본 시간은 아주 짧았고, 그 동작도 자연스러워서 장내에서는 아무도 눈치챈 사람이 없었다. 하나 진산월은 은밀히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그녀의 행동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그녀가 오늘 일의 진정한 주재자(主宰者)가 될 수 없다고 짐작하고 있었다. 천봉궁에서 이번 일에 보인 관심도에 비추어 아무리 그녀가 천봉팔선자의 하나라 해도 최종 결정권자가 되기에는 미흡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더구나 자신들을 이곳으로 안내한 백봉 정소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에도 의구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금교교가 중요한 사안을 결정할 시기가 되면 반드시 다른 누군가의 지시를 받을 것이고, 그 지시를 내린 자야 말로 천봉궁의 실질적인 우두머리일 것이며, 그자와 담판을 내어야 만 비로소 이번 일이 원만하게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동안 진산월은 그자가 이 방에서 일어난 일을 어디선가 듣고 있을 거라는 판단하에 주의를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지금 금교교의 행동을 보고 그자가 어디에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금교교는 이내 족자에서 눈을 돌리며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좋아요. 진장문인의 부탁을 들어드리겠어요. 하지만 우리도 조건이 있어요.”

“말씀해 보시오.”

“우선은 그 사람의 정체나 신분에 대해서 절대로 외부에 발설해서는 안되요. 심지어 종남파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예외는 안됩니다.”

진산월은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소.”

“둘째로 그 물건을 본궁이나 그 사람쪽으로 전달할 때까지 진장문인은 우리와 행동을 함께 해야 해요.”

금교교의 제의는 진산월로서도 다소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금소저의 말씀은 물건을 내놓기 전에는 내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의미요?”

“그런건 아니에요. 단지 우리는 만에 하나라도 진장문인의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여 물건을 또 다시 분실하는 일이 없도록 만반의 대비를 하고 싶을 뿐이에요.”

그녀의 말은 얼핏 듣기에는 그럴 듯 했지만, 사실은 물건을 내놓던지 아니면 계속 자신들의 감시 하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무림인이라면 남에게 이런 말을 듣고 절대로 가만 있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일파의 장문인으로서 여인에게 이런 말을 듣는 다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진산월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빙긋 웃으며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미녀들이 많다는 천봉궁에 신세를 진다는건 나로서도 별로 기분 나쁜 일은 아니오. 하지만 그러다가 자칫 영원히 귀궁에 묻혀 살게 되지 않을까 조금 걱정되는구료.”

금교교는 모처럼 그를 보며 예쁘게 웃었다.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 없어요. 진장문인은 늦어도 내일이면 안전하게 돌아가실 수 있을 거에요.”

“어? 그건 왜 그렇소?”

“내일 그 분의 측근 한 사람이 오기로 했어요.”

진산월은 그녀의 말이 다소 의외인지 급히 되물었다.

“그 분이라면… 천봉궁주가 봉황금시를 건네 주었다는 바로 그 사람 말이오?”

“그래요.”

진산월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정말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구료. 그 사람은 대체 누구요?”

금교교의 표정이 돌연 진지하게 변했다.

“진장문인께서는 혹시 오십 년전에 황산(黃山)의 천도봉(天都峯)에서 벌어진 사건을 알고 있나요?”

“오십 년전에 천도봉…?”

무심코 중얼거리던 진산월의 얼굴이 처음으로 가볍게 굳어졌다. 비단 그 뿐이 아니라 지금까지 옆에서 묵묵히 두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동중산은 안색이 아예 흙빛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진산월은 이내 침중한 눈으로 금교교를 바라보며 물었다.

“금소저가 말씀하는 것은 혹시 백년 내 무림에서 가장 치열한 싸움으로 알려진 마성지쟁(魔聖之爭)이 아니오?”

“그래요.”

금교교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산월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성지쟁이란 오십 년전의 천하제일마(天下第一魔)였던 혈마(血魔) 좌무기(左無忌)와 검성(劍聖) 모용단죽(慕容丹竹)이 벌인 처절한 싸움을 말한다. 당시 좌무기는 강호의 십대고수들을 연파하며 무림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희대의 마인(魔人)으로, 아무도 그의 피빛 자욱한 혈해강기(血海?氣)를 당해내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 그때 한 명의 청년이 단신으로 좌무기에 도전하니, 그가 바로 후대에까지 검의 성인(聖人)으로 칭송받는 모용단죽이었다. 모용단죽은 황산의 천도봉에서 좌무기와 일주야(一晝夜)를 꼬박 싸운 끝에 그의 목을 베고 백년 내 강호제일의 고수로 공인받게 된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무림인들 사이에 회자(膾炙)되는 가슴 두근한 영웅담으로, 그 일전 이후 모용단죽의 명성은 불후의 것이 되어 버렸다. 더불어 그를 배출해낸 모용세가(慕容世家)는 천하제일세가(天下第一世家)로 불리우며 강호인들의 칭송을 받게 되었고, 그 명예는 오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져 이제는 당대의 누구라해도 모용세가의 이름만 나오면 존경의 빛을 감추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금교교가 갑자기 이미 오래전에 벌어진 마성지쟁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천봉궁주가 봉황금시를 주었다는 그 사람이 바로 검성 모용대협(慕容大俠)이란 말이오?”

금교교의 대답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래요.”

모용단죽! 이 세상에서 대협(大俠)이란 명호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을 한 명만 뽑는다면 대다수의 무림인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를 선택할 것이다. 마성지쟁 이후 모용단죽이 걸어온 길은 강호인들의 귀감(龜鑑)이자, 선망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가 강호무림에서 활동한 시기는 불과 십 여년 밖에는 되지 않았다. 하나 그는 그동안 벌어진 크고 작은 수십 번의 싸움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으며, 사마외도(邪魔外道)를 물리치고 강호의 도의(道義)를 바로 세우는데 심신을 기울였다. 강호인들이 그의 별호에 ‘성(聖)’ 이라는 글자를 붙인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사실 모용대협은 본 궁의 궁주님과 어린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어요. 마성지쟁으로 모용대협의 명성이 천하를 진동한 후에도 두 분의 우의(友誼)는 조금도 변하지 않고 수십 년간 지속되어 왔어요.”

금교교의 이야기는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모용단죽은 사십 년전에 더 이상 무림에 뜻을 잃고 은거에 들어갔다. 그의 거처는 모용세가에서도 극소수의 수뇌급 인물들 외에는 알지 못했으며, 그 뒤로 강호무림에서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 때문에 많은 신비와 전설이 생겨날 정도였다. 어떤 사람들은 모용단죽이 무공의 극의(極意)를 깨닫고 새로운 절세무학을 창안하기 위해 폐관(閉關)에 들어갔다고 하기도 했고, 또 다른 이는 모용단죽이 모용세가에서만 비전(秘傳)되는 특이한 신공(神功)을 익히다가 주화입마(走火入魔)했을 거라고 떠들기도 했다.

또 모용단죽이 은밀한 곳에서 자신을 능가하는 재질을 지닌 희대의 기재(奇才)를 양성하고 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심지어는 모용단죽이 모용세가 안에서 벌어진 일련의 세력 다툼에서 패해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있다는 뜬금없는 말도 퍼져 있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모용단죽이 천봉궁의 궁주와 친밀한 사이로 오랫 동안 교분을 유지해 왔다니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진산월은 치밀어 오르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 모용대협은 지금도 건강하게 잘 계신단 말이오?”

“모용대협에 관한 것은 저도 더 이상 알려 드릴 수 없어요. 다만 두 분의 그런 친분관계 때문에 몇 년전에 궁주님께서 모용대협께 봉황금시를 선사했다는 것만 말씀 드리죠.”

금교교는 말을 멈춘 채 영롱한 눈으로 진산월을 빤히 응시했다. 그것은 마치 이제 모든 사실을 알았으니 순순히 봉황금시를 내놓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무언(無言)의 압력 같았다. 진산월은 선뜻 봉황금시를 내놓지 않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다. 금교교는 한동안 그가 무슨 말인가를 하기를 기다렸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자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제 말이 믿어지지 않아서 그런가요?”

진산월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그녀를 쳐다보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금소저가 결코 허언(虛言)를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은 나도 익히 알고 있소. 다만 나는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천봉궁주께서 모용대협께 봉황금시를 준 것일까를 생각하고 있었소.”

금교교의 몸이 한 차례 흠칫거렸다.

“그건 무슨 말씀이죠?”

“내가 너무 예민한 건지 모르지만… 수십 년간이나 우정을 쌓고 있던 두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상대방에게 선물을 준다는 것은 기념할 만한 일이 일어났거나, 아니면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변고(變故)가 생긴 경우이지 않겠소?”

금교교는 평소에 성격이 침착하고 좀처럼 평정을 잃지 않는 여인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슴 한 구석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사람은 정말 방심할 수가 없구나. 겉으로는 무심한 것 같으면서도 단 한 구석도 소홀히 지나치는 법이 없으니…’

그녀는 새삼 온순해 보이는 얼굴만으로 진산월을 오판하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건 저도 정확히 모르겠군요. 아무튼 그 뒤로 봉황금시는 쭉 모용대협이 보관하고 계셨어요.”

“그럼 그 물건이 어떻게 강호에 유출된 것이오?”

금교교의 시선이 진산월의 뒤에 무릎을 꿇고 있는 동중산에게로 향했다.

“그건 나보다는 저 자에게 물어야 할 것 같군요.”

동중산은 그동안 묵묵히 두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중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번쩍 고개를 쳐들고 진산월을 올려보며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제자는 우연히 강호에 기보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뒤를 쫒다가 만리운연(萬里雲煙) 황동(黃動)에게서 그 물건을 건네받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 물건이 어떻게 모용대협의 손에서 황동에게로 전해졌는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종리궁도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건네받다는 말이 훔쳤다는 말과 같은 뜻인줄은 미처 몰랐군.”

동중산은 얼굴이 조금 붉어졌으나 감히 종리궁도를 향해 무어라고 반박하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이 황동에게서 봉황금시를 훔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금교교가 다시 조용한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했다.

“이제는 진장문인께서 결정하실 시간이군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금소저께서 귀중한 사실을 알려준 것에 감사드리오. 모용세가에서 사람이 나오면 그에게 봉황금시를 건네주도록 하겠소.”

진산월의 시선이 슬쩍 벽에 걸린 수묵화로 향했다.

“물론 그 전에라도 귀궁의 궁주께서 직접 요구하시면 바로 반환해 드리겠소.”

금교교의 얼굴에 한 줄기 고소가 떠올랐다.

“진장문인은 잘못 생각하고 계세요. 궁주님께서는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나는 물론 금소저의 말씀을 믿소. 단지 남들 앞에서 꼭두각시 춤을 추는 것을 원래 좋아하지 않을 뿐이오.”

“그건 정말 오해…”

금교교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으려 할 때였다.

스르르릉….

진산월이 쳐다보았던 수묵화 족자가 걸린 벽이 미약하게 움직이더니 돌연 족자의 우측 부분이 갈라지며 그곳에서 하나의 밀실이 나타났다. 밀실 안에는 붉은 궁장(宮裝)의 여인과 노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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