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4권 무림연맹(武林聯盟)편 : 7화
제37장. 무림연맹(武林聯盟)
중인들이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이미 많은 무림인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무림집회가 벌어지는 초조암 앞의 공터로 모여들고 있었다.
집회장에는 구파일방을 비롯한 명문정파의 고수들이 대부분 자리에 나와 있었고, 상당수의 무림인들이 주위를 빽빽이 에워싸고 있었다.
어찌 보면 무림대회가 시작된 오전보다도 더욱 많은 군웅들이 운집하는 것 같았다.
정확히 미시가 되자 대의 중앙에 다시 대현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미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던 수많은 군웅들이 그의 출현을 보자 우렁찬 함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와아!”
그 함성은 숭산 전체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군웅들의 함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대현은 손을 들어 군웅들을 제지시켰다.
함성이 점차 잦아들자 대현은 낭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오전에 말씀드린대로 무림맹의 창설에 대한 안건을 본격적으로 토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에 먼저 이번 일에 대해 강호의 명숙(名宿) 몇 분의 고견(高見)을 듣는 것이 순서일 듯 싶군요.”
주위는 여전히 소란스러웠지만, 대현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점차로 시끄러움이 가시더니 마침내는 사위(四圍)가 조용해지며 대현의 음성만이 멀리까지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 분들의 말씀을 들은 다음 무림맹을 창설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하고, 이어 천룡사와의 대전을 준비하는 것이 순서일 듯 싶습니다.”
대부분의 군웅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으나, 일부는 다소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정해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정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이건 조금 이상하군요.”
낙일방이 멀뚱한 눈으로 정해를 바라보았다.
“이상하다니요? 이런 중요한 일에 무림 명숙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건 당연하잖아요.”
정해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명숙들이 어디 한 두명이겠느냐? 그 많은 사람들 중 누구의 의견을 듣는단 말이냐? 지금 대현이 말하는 것은 그들 중 극히 한정된 몇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낙일방은 여전히 정해의 말뜻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어차피 이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모두 들어볼 수는 없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최소한 각 지역을 대표하는 명숙들과 명문정파의 수뇌부들의 의견 정도는 수렴을 해서 중론(衆論)을 모으는게 정상이겠지. 그런데 지금 대현은 몇몇 사람의 의견을 들어본 다음 결정을 내리자는 식으로 일을 진행하고 있으니 이상한 일이 아니겠느냐?”
“설마 그럴리가요.”
“아니다. 모르긴 해도 무림맹의 창설에 대한 것은 이미 결론이 난 듯 하다. 문제는 누가 무림맹의 수뇌가 되느냐 하는 것이겠지.”
정해는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니면 그것도 이미 결정되어 있을지도 모르지…”
그 목소리는 워낙 낮아서 낙일방은 미처 듣지 못했다.
하나 진산월과 뇌일봉, 상원건 등은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일제히 정해를 쳐다보았다.
뇌일봉은 눈쌀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고, 상원건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단지 진산월만이 빙긋 웃으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을 뿐이다.
“그거야 대현이 처음 무림맹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이미 예상했던 일이 아니냐?
그보다는 대현이 과연 누구를 불러내어 말을 시킬지 궁금하구나.”
낙일방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왜 궁금합니까? 정사형 말대로라면 누가 나와서 말해도 상관없는 일 아닙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정해가 그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
“이런 바보. 아무 것도 모르면 제발 입이나 다물고 있어라.”
“왜요?”
“생각해 봐라. 아무나 나와서 무림맹을 만들자고 말하면 군웅들이 선뜻 수긍을 하겠느냐? 그러니 대현이 불러낼 사람들은 틀림없이 무림인들이라면 누구나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대단한 권위와 명성을 지닌 인물들 일 것이란 말이다.”
상원건이 한 마디 거들었다.
“게다가 그들은 이미 무림맹의 창설에 대해 소림사와 상호 교감이 되어 있는 자들이겠지. 그러니 그들이 누구인지 안다면 이번 무림맹의 수뇌가 누가 될 것인지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지 않겠나?”
정해와 상원건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 나서야 낙일방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았습니다. 그러고보니 장문사형 말씀대로 대현이 불러낼 사람들이 누구인지 정말 궁금해지는군요.”
그때 대현이 막 첫 번째 명숙을 불러내고 있었다.
“우선 형산파의 수석장로(首席長老)이신 용선생(龍先生)께서 한 말씀 해주시겠습니다.”
그 말에 장내가 한바탕 크게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형산 용선생이라면 비단 형산파에서 최고의 배분에 있는 어른일 뿐 아니라, 강호무림에서 가장 뛰어난 지법(指法)의 달인(達人)으로 알려진 절대의 기인이었다.
그는 당대 무림 최고의 고수들인 무림구봉(武林九峯)에도 속해 있으며, 인물됨이 고고하고 수양이 깊어 많은 무림인들의 숭앙을 받고 있었다. 당초 형산파에서 이번 무림대회에 파견한 인물들은 세 사람의 오결검객을 포함하여 모두 열 두 명이었다. 그들 중 우두머리는 오결검객중 연장자인 비응검 사공표였고, 그 위의 수뇌는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사공표보다 한 배(輩)나 더 높은 형산파의 최고 어른인 용선생이 참석했다고 하자 모든 군웅들은 커다란 놀람과 함께 설레는 기쁨을 느꼈던 것이다. 뇌일봉 또한 뜻밖이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거 정말 놀랍군. 평소에는 형산 아래에도 내려오지 않던 용선생이 이곳까지 왔다니 정말 의외인데?”
낙일방이 재빨리 물었다.
“뇌숙부께선 용선생을 잘 아세요?”
뇌일봉의 얼굴에 한 줄기 고소가 떠올랐다.
“내 주제에 어떻게 용선생과 잘 아는 사이이겠느냐? 그냥 예전에 한 두 번 먼 발치에서 얼굴만 보았지.”
뇌일봉은 항상 자긍심이 대단하고 자신만만한 사람이었는데도 이런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용선생의 강호에서의 위치가 어떠한지 여실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와아… 정말 용선생이다!”
갑자기 군웅들의 틈에서 요란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낙일방이 목을 길게 빼고 보니, 형산파의 장막 속에서 한 명의 인물이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푸른 학창의를 입고 머리를 뒤로 단정하게 묶은 초로의 노인이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피부에 윤기가 흐르고 있었고, 자세가 학처럼 곧아서 고고한 기상을 절로 느끼게 했다. 그러나 낙일방이 소문으로 듣던 것처럼 나이가 많은 것 같지는 않았다.
‘이상하군. 아무리 보아도 오십 정도 밖에 안되어 보이는데… 저 노인이 정말 용선생이란 말인가?’
낙일방의 의문을 알기라도 한 듯 뇌일봉이 학창의의 노인을 빤히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정말 저 모습은 여전하군. 내가 이십 년 전에 용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도 저 모습 그대로였다.”
“엑? 그게 정말이에요?”
“내가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하겠느냐? 겉모습은 저래 보여도 용선생의 지금 나이는 팔십이 훨씬 넘었을 것이다.”
그 말에 모두들 새삼스러운 눈으로 학창의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학창의의 노인은 느릿느릿 걸음을 움직이는 것 같은데도 순식간에 넓은 대 위를 가로질러 대현의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창공을 노니는 한 마리 학처럼 유유자적해 보였다. 대현은 그 노인을 향해 정중하게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소림의 대현이 용선생을 뵙니다.”
용선생은 젊은이의 그것처럼 팽팽하고 탄력있는 얼굴에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젊은 인재를 만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 자네의 스승은 누구인가?”
대현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사부님의 함자는 굉도(宏道)라 하옵니다.”
“이제 보니 굉도선사(宏道禪師)의 고제(高弟)였군. 선사께선 별래무양 하신가?”
“덕분에 아직도 건강하십니다.”
굉도선사는 소림사의 전대장문인이었던 굉요대선사의 사제로, 성격이 침착하고 학식이 높은 덕승(德僧)이었다. 용선생은 그에게 간단히 굉도선사의 안부에 대해 몇 가지를 물은 다음 천천히 군웅들을 둘러 보았다. 그의 시선은 여타 고수들처럼 강렬한 신광이 번뜩이지 않고 오히려 투명할 정도로 담담했다. 그런데도 그가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자 저자거리처럼 시끌벅적하던 대회장이 일순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용선생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노부는 형산파의 볼품 없는 늙은이이지만, 미력한 힘이나마 강호의 도의(道義)를 지키는데 보태기 위해서 이 대회에 참석하였소.”
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는데도, 드넓은 무림대회장의 가장 먼곳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똑똑하게 들렸다. 그것만 보아도 그의 공력이 얼마나 심후하면서도 정순한지 알 수 있었다. 주위의 시선이 온통 그에게로 집중된 가운데, 그는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 소림사에서 발의한 무림맹의 창설은 매우 시의적절하면서도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하오. 이는 본파(本派)의 모든 고수들과 심사숙고한 것이며, 구대문파의 다른 분들도 뜻을 함께 하리라고 믿고 있소.”
그의 말은 비록 간단했으나, 그 안에 포함된 내용은 분명하면서도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뇌일봉은 무거운 낯빛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정말 의외로군. 설마 일이 이 정도까지 진행 되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정해 또한 바짝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형산파 뿐만 아니라 구대문파가 모두 무림맹의 창설에 의견을 같이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무림맹이 창설되는 것은 시간문제로군요.”
군웅들도 모두 용선생의 말에 적지 않은 충격과 놀람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용선생의 강호에서의 지위와 신분을 고려해 볼 때, 그의 말은 구대문파에서 소림사의 이번 무림맹 창설에 대한 발의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선언과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서로 견제와 경쟁을 일삼았던 구대문파의 지금까지의 행태로 보아 쉽게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용선생이 군웅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후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때까지도 군웅들은 충격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다시 대현의 음성이 이어졌다.
“다음에는 개방의 용두방주이신 만리무영개(萬里無影?) 나자행(羅慈行), 나대협의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을 듣자 상원건은 갑자기 나직한 탄식을 토해냈다.
“절묘하군. 정말 절묘해…”
낙일방이 급히 물었다.
“무엇이 절묘하다는 말씀입니까?”
상원건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구대문파에 이어 강호에서 가장 거대한 방파(幇派)인 개방의 방주마저 무림맹의 창설에 동의한다면 이제는 어느 누가 감히 무림맹 창설에 이의를 제기 하겠는가? 자칫하면 구파일방(九派一幇)을 모두 적으로 돌리게 될지도 모르는데 말일세.”
낙일방은 듣고 보니 상원건의 말에 일리가 있는지라 막연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그렇다면 장문사형의 짐작대로 저자들은 이미 서로간에 묵계(默契)가 되어 있는 모양이군요. 그럼 결국 우리들은 들러리만 서게 되는 거 아닙니까?”
상원건의 표정도 그리 밝지 않았다.
“아무래도 결국은 그렇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
정해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려면 강호의 명문정파인 구파일방이 그렇게까지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겠습니까? 설사 그렇더라도 군웅들이 쉽게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그때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진산월이 불쑥 입을 열었다.
“군웅들은 용납할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게 되겠지.”
정해는 눈을 번쩍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개방 방주에 이어 한 사람만 더 나와서 무림맹의 창설에 찬성하게 된다면 군웅들은 무림맹을 창설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부감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정해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급히 물었다.
“그 사람이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정해는 물론이고 상원건과 뇌일봉 또한 진산월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진산월은 특유의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짐작이 맞다면 대현이 다음에 불러낼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뿐이다. 그는 바로…”
바로 그때 군웅들 틈에서 요란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와! 개방방주다!”
그 함성은 금새 무림대회장을 환호와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대 위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봉두난발의 괴인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까치집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남루하기 짝이 없는 누더기를 걸친 육십 대의 노인이었다. 몸이 어찌나 깡말랐던지 바람만 불어도 그대로 날려가 버릴 것만 같았고, 얼굴에는 땟국물이 자르르 흘러 거지 중에도 상거지의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가 여느 거지와 다른 점은 오직 두 가지, 그의 비쩍 마른 오른 손에 푸른 색 대나무로 만든 삼척 길이의 죽장(竹杖)이 쥐어져 있다는 것과, 그의 허리춤에 아홉 개의 매듭이 묶여 있다는 것 뿐이었다. 하나 그 두 가지야 말로 이 거지노인을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 만든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푸른 대나무 지팡이는 개방 용두방주의 신물(信物)인 취옥장(翠玉杖)이었으며, 아홉 개의 매듭은 개방에서 오직 하나뿐인 구결(九結)의 신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십만의 문하제자들을 거느렸다는 천하제일의 거방(巨幇), 개방의 용두방주! 당대 무림에서 신법(身法)의 제일인자로 불리우는 무림구봉 중의 일인(一人)! 그리고 개방 사상 최강(最强)의 고수로 불리우는 명실상부한 개방제일인(?幇第一人)! 그가 바로 만리무영개 나자행이었다. 나자행은 전대 방주인 천지일걸 도조산의 수제자로, 도조산은 말년에 나자행에게 방주직을 인계하면서 아주 행복한 표정으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나자행이 자신의 뒤를 이어 개방을 더욱 번성시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나자행은 도조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개방을 발전시켜, 당대에 이르러서는 능히 구대문파에 비견 될 만큼 거대한 문파로 성장시켜 놓았다. 그에 대한 개방 방도들의 성원과 지지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어서, 지금도 무림대회장의 구석구석에 있던 수많은 거지들이 그를 향해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나자행은 앙상하게 마른 손을 들어 군웅들의 환호성에 답례를 했다.
“비천한 이 늙은 거지를 이토록 환대해 주니 무어라 할 말이 없구료. 그래서 간단하게 한 마디만 지껄이고 재빨리 사라지겠소.”
그의 음성은 마치 고목나무를 커다란 쥐가 갉아 먹는 듯 카랑카랑하고 거칠어서 듣기 거북했으나 아무도 눈쌀을 찌푸리거나 싫어하는 표정을 짓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나자행의 지위와 명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 늙은 거지는 이번이야말로 강호무림의 오랜 숙원이었던 무림맹을 창설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오. 따라서 개방의 모든 제자들을 대표해서 무림맹의 창설을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바이오.”
“와아!”
사방에 있던 적지 않은 수의 거지들이 함성인지 환호성인지 모를 소리를 내질렀다. 나자행은 다시 몇 차례 손을 휘휘 내젓고는 나타날 때와 같이 표홀한 동작으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 버렸다. 용선생에 이어 나자행까지 무림맹의 창설에 적극적인 찬성의 뜻을 나타내자 군웅들은 크게 술렁거렸다. 대부분의 군웅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두 절대 고수들의 말에 동조하는 분위기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감히 반대의 의견을 함부로 제시하지 못했다. 대현이 다시 낭랑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마지막으로 한 분만 더 모시겠습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대현에게로 쏠렸다.
군웅들은 용선생과 나자행에 이어 세 번째로 나타날 사람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때 정해가 무엇을 보았는지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장문사형의 짐작이 맞았군요.”
중인들이 정해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천봉궁의 인물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가장 상석(上席)에 있는 단봉공주의 바로 옆에 앉아 있던 하늘색 유삼의 문사였다.
그는 챙이 넓고 은빛 그물망이 달린 모자를 눌러 쓰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으나, 멀리서 보기에도 고고하면서도 당당한 기상을 느낄 수 있었다.
중인들이 그 하늘색 유삼 문사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을 때, 대현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분은 바로 모용대협의 유일한 후계자이신 모용봉, 모용공자이십니다!”
대현의 말은 장내에 있는 모든 군웅들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충격과 흥분을 안겨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설마 이곳에 모용공자가 와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삽시간에 장내는 열광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군웅들은 소리를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고, 모용공자의 모습을 보기 위해 목을 길게 빼고 눈에 불을 켰다.
사람들이 너도 나도 앞으로 밀고 나오는 바람에 대의 주변이 아수라장이 될 정도였다.
누구도 이와 같은 엄청난 반응을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그만큼 강호 무림인들의 마음속에 드리워져 있는 모용대협의 그림자가 거대하다는 생생한 반증(反證)이었다.
“우와아아아!”
우레와 같은 환호성을 받으며 대의 중앙으로 걸어가는 모용봉의 모습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허리는 곧았고, 걸음걸이는 침착했으며, 군웅들의 열광적인 반응에도 결코 흥분하거나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은빛 그물망 사이로 내비치는 눈빛은 한층 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았다.
모용봉은 특이하게도 아무런 신법이나 보법도 펼치지 않고 대의 중앙까지 걸어왔다.
그가 무슨 놀라운 신법을 보여줄 지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사람들은 내심 실망을 금치 못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런 모습에 더욱 듬직함을 느끼는 군웅들도 적지 않았다.
모용봉은 대현과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 받고는 대의 중앙에 우뚝 선 채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군웅들은 그의 음성을 듣기 위해 함성을 멈추고 모두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를 중심으로 시간이 멈춰진 듯한 광경이었다.
수많은 군웅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당당한 자세로 서 있는 모용봉의 모습은 그야말로 창천(蒼天)에 홀로 떠 있는 한 마리의 고고한 학(鶴)과도 같았다.
마침내 모용봉의 입에서 담담하면서도 청명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불초는 무림맹의 창설이 강호 무림의 안녕(安寧)에 커다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할아버님의 오랫동안의 염원이기도 합니다.”
모용봉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고, 그 내용도 간단명료했다.
그래서 군웅들의 뇌리에 더욱 선명하게 새겨졌는지도 모른다.
무림맹의 창설을 찬성하고 있던 사람이든, 반대하고 있던 사람이든 모용봉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제 무림맹의 창설은 기정사실화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군웅들의 얼굴 표정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형산파의 최고 어른인 용선생부터 시작하여 개방의 용두방주인 만리무영개 나자행을 거쳐 마지막으로 등단한 모용공자의 발언은 화룡점정(畵龍點睛)과도 같은 것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을 지닌 구파일방에 이어 천하제일고수인 모용대협의 유일한 후계자마저 찬성을 했으니 어느 누가 무림맹 창설에 반기를 들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곧 천하무림(天下武林) 전체에 대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군웅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것은 천하무림의 뜻이다!’ 라고…
뒤이어 터져나온 군웅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성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와아…! 무림맹 만세!”
“무림맹 만세! 모용공자 만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온 박수와 함성은 순식간에 드넓은 초조암 공지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그 함성은 마치 무림역사상 처음으로 만들어지는 무림맹의 장도를 축하하는 축포소리 같았다.
대 위에 자리를 잡고 있던 각 문파의 고수들도 모두 일어나 그 열광적인 분위기에 동조했고, 심지어는 구대문파의 수뇌급 인물들도 흡족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들이었다.
상원건은 군웅들의 너무나 열렬한 환호성을 듣고 있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진장문인의 말씀대로 무림맹 창설은 누구도 거부하지 못할 대세가 되었구료. 누가 생각한 계책인지 모르지만 세 사람을 연거푸 등장시켜 강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번 일은 정말 절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소.”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원건은 진산월이 무슨 말인가 하기를 기다렸으나 아무런 대꾸가 없자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그가 깊은 상념에 빠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고개를 끄덕인 것도 무의식 중에 한 행동임이 분명했다.
상원건은 그의 생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이번에는 정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무림맹이 창설된다면 무림맹주(武林盟主)는 누가 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가?”
정해는 총기가 가득한 눈을 연속해서 깜박거렸다.
그것은 그의 머리 속이 빠르게 회전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구파일방의 수뇌들 중에서 결정되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강호에서는 전통과 세력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자네의 말도 일리가 있군.”
“대협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상원건은 잠시 침음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오늘 나온 세 사람 중에서 나오지 않을까 하네.”
정해의 눈이 활개치듯 맹렬한 속도로 깜빡였다.
“그것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로군요. 강호에서의 명성이나 지위로 보아 그들 세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도 더욱 무림맹주가 될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지요.”
중인들은 부지불식간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상원건과 정해의 말이 그럴 듯 했던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들 세 사람은 이곳에 모인 수많은 군웅들 중에서도 군계일학(群鷄一鶴)과도 같은 존재들이 아닐 수 없었다. 구대문파에서도 최근들어 가장 혁혁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형산파의 최고 어른 용선생, 강호에서 가장 많은 휘하세력을 거느린 거대문파 개방을 이끌고 있는 만리무영개 나자행, 그리고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고수의 후계자이며 어쩌면 이미 최고 고수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모용봉. 그야말로 누가 무림맹의 맹주가 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인물들이었다. 상원건은 정해의 지혜가 번뜩이는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는 그들 중 누가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가?”
정해는 난처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건 정말 추측하기 어려운 질문이군요. 단지… 모용공자는 비록 모용대협이 공인한 후계자라고는 해도 아직 나이가 너무 어리고, 강호에 정식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에 조금 어렵지 않을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렇다면 아무래도 용선생과 나자행 중 한 사람이 될 확률이 높겠군.”
정해가 막 그의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이려 할 때였다.
“그들은 아닐 겁니다.”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며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진산월이 불쑥 입을 열었다. 상원건은 그가 결코 허언(虛言)을 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말에 호기심과 함께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자는 지금까지 우리들의 말을 듣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조금 전에 이자가 심사숙고하고 있었던 것은 혹시 우리와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상원건은 머리 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굴리며 급히 물었다.
“진장문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소?”
진산월의 대답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그들이 구파일방의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상원건은 물론이고 정해를 비롯한 중인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들이 구파일방의 인물들이라서 무림맹주가 될 수 없다니… 구파일방의 인물이라는게 유리한 조건은 될 수 있을지언정 불리한 조건이 될 수는 없지 않겠소?”
진산월은 침착한 음성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구파일방은 비록 이번에 무림맹의 창설에 뜻을 같이 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상대방이 자신들의 머리 위에 올라가는 것을 용납하려 하지 않을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문파에서 무림맹주가 나오지 않는 것은 상관없지만, 구파일방 중의 다른 누군가가 무림맹주가 되는 것은 결코 환영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상원건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아! 그 생각을 미처 못했구료.”
“구파일방은 오랜 세월동안 서로 협력과 공생(共生)의 길을 걸어왔지만, 어느 한 문파가 나머지 다른 문파들을 누르고 군림하는 것만은 철저히 막아왔습니다. 이번에 창설될 무림맹은 강호 역사상 최초의 것이니만큼 초대 무림맹주의 역할과 권위는 실로 엄청날 것입니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오히려 구파일방에서는 어느 누구도 무림맹의 맹주 자리에 오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진산월의 자세한 설명에 그제서야 중인들은 모두 납득을 하는 표정이었다. 상원건은 약간은 허탈한 듯한 미소를 떠올렸다.
“진장문인의 말씀을 듣고 보니 내가 너무 식견이 좁았던 것 같구료. 정말 탁월한 고견(高見)이오. 그렇다면 진장문인께서는 누가 무림맹주에 오르리라고 보시오?”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었다.
“고견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아직 무림맹이 정식으로 발족되지도 않았는데 누가 무림맹주가 될지를 제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중인들은 실망하는 눈치였다. 하나 상원건은 기대어린 눈으로 진산월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도 진장문인께서 조금이라도 그에 대해 생각한 것이 있을게 아니겠소?”
“저 혼자만의 생각이 있기는 합니다만 아직 남에게 발설할 정도는 아닙니다.”
상원건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내가 듣고 싶은 건 바로 그 진장문인의 생각이오. 단순한 추측이라도 좋고 짐작이라도 좋으니 말씀해 주시면 정말 고맙겠소.”
강호의 이름난 명숙인 상원건이 이렇게 까지 부탁을 하는데 아무리 진산월이라도 더 이상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진산월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차례 빙긋 웃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이번에 창설되는 무림맹의 맹주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상원건은 급히 물었다.
“그것이 무엇이오?”
“첫째로는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구파일방에 적(籍)을 둔 인물은 안된다는 겁니다. 두 번째로 구파일방이 아닌 다른 문파라도 그 문파의 우두머리 지위를 맡고 있는 사람도 안될 겁니다.”
“그건 또 왜 그렇소?”
“생각해 보십시오. 구파일방에서는 다른 아홉 개 문파를 견제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는데, 또 다른 호랑이를 키우려고 하겠습니까?”
상원건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진산월의 말마따나 누가 무림맹주가 되든 그가 한 문파의 장(長)으로 있다면 그 문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옳은 말이오. 그렇다면 특정 문파에 소속된 인물은 아무래도 힘들다는 말이겠군.”
“세 번째로는 강호에서 명성이 널리 알려지고 누구나가 실력을 인정하는 고수이어야 하며, 아울러 군웅들이 순순히 믿고 따를만한 인품(人品)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그것도 당연한 말이로군. 네 번째도 있소?”
“그렇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일지도 모르지요. 그것은 바로 구파일방에서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상원건은 곰곰히 생각에 잠겨 있더니 문득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진장문인의 말씀이 옳소. 결국 무림맹주를 결정하는 것은 구파일방의 뜻에 달려 있다고 봐야겠지.”
그렇다. 그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었다. 강호의 역사(歷史)는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구파일방에 의해 쓰여져 왔다. 강호의 질서는 그들에 의해 개편되어 왔으며, 그들이 강호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무림맹이 강호인 전체의 뜻을 모은 것 같은 형식을 취했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그것은 철저히 구파일방에 의해 주도되는 모임일 뿐이었다. 그것이 냉엄한 현실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누구도 그것을 거역하거나 변모시키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림이 철저한 강자존(强者存)의 세계이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그러한 현상을 타파하기 위한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 그러한 시도들은 모두 처참한 실패를 하고 말았으며, 그에 대한 구파일방의 응징은 가혹할 정도로 철저한 것이었다. 상원건은 무거운 마음을 떨쳐버리려는 듯 한 차례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진산월에게 질문을 던졌다.
“진장문인께서는 그러한 조건에 부합되는 인물이 누구라고 생각하시오?”
강호에 고수들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구파일방은 물론 어느 문파에도 속해 있지 않으며 구파일방에서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인품과 무공을 지닌 인물은 결코 흔하지 않았다. 상원건은 냉큼 떠오르는 인물이 없어 진산월에게 물어본 것이다. 진산월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세 사람 정도 있다고 봅니다.”
상원건은 귀가 번쩍 뜨이는 듯 황급히 물었다.
“그들이 누구요?”
“강호에서 누구나가 인정하는 무공과 명성을 지닌 자들은 정파의 삼성(三聖)과 구봉(九峯), 사파의 일령(一令)과 사마(四魔)입니다. 그들 중 일령과 사마는 사도의 고수들이니 제외한 삼성과 구봉이라면 충분히 그 조건에 부합되지 않겠습니까?”
상원건은 아차하는 표정이었다.
“그렇구료. 미처 그들 생각을 하지 못했소.”
삼성과 구봉은 당대 무림에서 제일가는 고수들이며, 정파인(正派人)들에게는 우상(偶像)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비단 강호에서의 신분도 높을 뿐 아니라 무공과 인품에서 누구나가 인정해 마지 않는 최고의 기인들이었다. 삼성은 소림사의 범범대사(凡凡大師)와 무당파의 대엽진인(大葉眞人), 그리고 태산석옹(泰山石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들은 무림구봉보다 한 배분 위의 고수들이며, 강호무림의 전설적인 존재들이었다. 무림구봉은 현재 강호에서 활동하는 무림인들 중 최고의 고수들로, 각기 한 방면에서 능히 천하제일(天下第一)을 다툴만 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들 중 네 사람은 구파일방의 고수들이며, 두 사람은 문파의 우두머리였다. 진산월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삼성과 구봉 중 구파일방에 속하거나 문파의 우두머리인 인물을 뺀다면 모두 네 사람이 남습니다. 삼성 중의 한 분인 태산석옹과 구봉 중의 일장개천지(一掌開天地) 위지립(慰遲立), 환상제일창(幻想第一槍) 유중악(柳重嶽), 그리고 번신봉황(飜身鳳凰) 이북해(李北海)입니다. 이들 중 종적이 신비하고 행적이 일정치 않은 번신봉황 이북해를 제외한 세 사람이라면 누가 무림맹주가 되어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상원건은 눈을 반짝이며 활짝 웃었다.
“진장문인의 말씀을 듣고 보니 눈앞이 맑아지는 느낌이오. 확실히 그분들이라면 구파일방을 비롯한 누구라도 거부하지 않을거요.”
낙일방이 옆에서 불쑥 끼어들었다.
“모용공자는 어때요? 그자도 장문사형이 말씀하신 조건에 부합되잖아요?”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안될 것이다.”
“왜요? 조금 전에 정사형이 말한대로 그 자의 나이가 너무 어리고 강호초출(江湖初出)이기 때문인가요?”
“그것보다는 구파일방에서 그가 무림맹주가 되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더 큰 이유지.”
낙일방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또 왜 그렇지요? 모용공자는 모용대협의 후계자이며, 모용대협은 구파일방에서도 떠받들던 인물이 아니에요?”
“물론 그렇다. 그래서 구파일방에서는 그가 제이(第二)의 모용대협이 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다.”
낙일방은 진산월의 말이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으나, 이내 그 말속에 숨은 뜻을 깨닫고는 짤막한 탄성을 터뜨렸다.
“아! 그렇군요.”
진산월은 빙긋 웃었다.
“이제 알았느냐?”
낙일방은 멋적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구파일방에서는 그동안 모용대협의 신위(神威)에 눌려 있었는데, 그분이 은거하시는 바람에 이제 그분의 그늘에서 벗어나 예전의 성세를 되찾을 기회를 맡게 되었지요. 그러니 모용공자가 과거 모용대협처럼 자신들의 위에 서는 것을 바라지 않는게 당연하겠군요.”
“바로 그렇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그는 구파일방에서 가장 원치 않는 인물인 셈이지.”
낙일방은 곰곰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제법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강호란 정말 이상하군요.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별하기가 점점 힘들어져요. 이런 식으로 지내다가는 정(正)과 사(邪)의 개념조차 모호해 질 것 같아요.”
진산월은 문득 정색을 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정과 사란 마음에 달린 문제다. 무엇이 정이고 무엇이 사인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결국 자신의 판단밖에는 없다.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행하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낙일방은 진산월의 말뜻을 속으로 되새기며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상원건은 진산월을 향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진장문인은 그들 세 사람 중 누가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하시오?”
“강호에서의 명성이나 배분으로 보면 태산석옹이 가장 적임자일테지만, 그 분은 워낙 명리(名利)에 담백하시고 좀처럼 태산의 거처를 떠난 적이 없어 무림맹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지립과 유중악 중 한 사람이 될 확률이 높겠구료.”
“아마 그럴 겁니다.”
상원건은 두 눈에 번쩍 기광을 번뜩이며 진산월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진장문인은 두 사람 중 어느 쪽 손을 들어주고 싶소?”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들 중 누가 된다 해도 저로서는 별다른 감흥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마 구파일방에서는 이미 누구를 맹주로 추대할 지 이미 결정이 되어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결코 무림맹의 창설에 이렇듯 쉽게 동조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상원건이 조금 전에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환상제일창 유중악은 강호에서 제일가는 창술(槍術)의 명인(名人)일 뿐 아니라 인물됨이 공정하면서도 풍류(風流)를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강호를 유람하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었거니와, 그중에서도 안탕산의 괴걸인 팔비신살 고자령과는 관포지교(管鮑之交)라 할만큼 두터운 우정을 쌓고 있었다.
그리고 고자령은 태평검객 임장홍의 생사지교로, 뇌일봉과 함께 임장홍에게는 단 두 명 뿐인 절친한 친구사이였다.
다시 말해서 유중악은 비록 임장홍과 직접적인 친분관계는 없었지만, 팔비신상 고자령을 매개체로 하여 나름대로 상당히 친밀한 사이였던 것이다.
상원건은 이를 알고 있기에, 은근히 진산월의 의중을 물어보았던 것이다.
환상제일창 유중악이 무림맹주가 된다면 종남파로서는 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해가 될 리 없기 때문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무림맹주는 철저히 구파일방의 뜻대로 결정될 것이며, 이미 그 대상자는 선정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진산월의 짐작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하늘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모용봉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후 무림대회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대현은 무림맹의 발족에 대한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고,
당연히 어느 누구도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대현의 공식적인 선포와 주위가 떠나갈 듯한 군웅들의 환호성으로 무림맹의 창설은 결정되었으며, 그것은 강호의 역사가 새로 쓰여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후의 일은 너무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오히려 맥이 빠질 정도였다.
대현은 이미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한 듯 천하무림을 지역과 고수들의 비중에 따라 열 개의 조직으로 나누었으며, 그것은 아무리 불만이 많은 사람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정도로 합리적인 것이었다.
소림사와 개방을 위시한 하남성(河南省)의 고수들은 하락지단(河洛支壇)으로, 강북삼보중의 하나인 삼월보(三月堡)와 하북팽가를 위시한 산서성(山西省)과 하북성(河北省)의 고수들은 화북지단(華北支壇), 화산파와 초가보를 위시한 섬서성(陝西省)과 감숙성(甘肅省)의 고수들은 관서지단(關西支壇), 아미파와 청성파, 점창파, 사천당문 등 사천성(四川省)의 고수들은 사천지단(四川支壇), 무당파와 천봉궁을 비롯한 호북성(湖北省)과 안휘성(安徽省)의 고수들은 화중지단(華中支團)으로 조직되었다.
또한 강남의 문파와 고수들도 각기 남궁세가가 있는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을 중심으로 한 강동지단(江東支團), 형산파가 자리한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한 소상지단(瀟湘支壇), 강서성(江西省)과 복건성(福建省)이 한데 뭉친 화남지단(華南支壇), 광동성(廣東省)과 광서성(廣西省), 해남도(海南島)의 고수들을 모은 남해지단(南海支壇), 운남성(雲南省)과 귀주성(貴州省)의 고수들을 모은 운귀지단(雲貴支壇)의 다섯 개 지단으로 나누어졌다.
문파에 소속된 고수들은 해당 문파의 본산(本山)이 있는 지단에 배속되며, 그 외의 고수들은 자신이 원하는 지단에 마음대로 가입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은 뿌리가 없이 떠도는 많은 무림인들의 마음에 드는 방식이어서, 대부분의 군웅들은 별다른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상원건만 해도 주로 활동하는 무대는 감숙성이었으나, 종남파가 속한 관서지단에 가입할 수 있어서 한시름을 덜은 느낌이었다.
사실 그는 종남의 문인(門人)도 아니었고 그들과 알게된 지도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진산월을 비롯한 종남파의 고수들에게는 이상하리만치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만에 하나라도 그들과 다른 지단에 속하게 되었다면 상당히 서운했을 것이다.
그는 이런 방식이 혹시 있을지도 모를 군웅들의 반발을 최소한으로 막기 위한 용의주도한 계획의 일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내심 다행스럽게 생각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구파일방을 비롯한 강호의 거대문파 수뇌들이 거푸 회동(會同)을 한 끝에 무림맹의 정식 명칭이 정해졌다.
- 강호무림영웅연맹(江湖武林英雄聯盟)!
다소 거창한 이름이었으나, 군웅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 중 누구도 이런 식의 이름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칭이야 어찌 되었건 강호인들에게 그것은 ‘무림맹(武林盟)’ 이었고, 모두들 그것으로 만족을 했다.
그래서 무림 역사상 최초로 생긴 무림인들의 총집합체 ‘강호무림영웅연맹’ 은 단순히 ‘무림맹’ 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던 것이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西山)마루로 기울고 있을 유시(酉時)무렵, 대현은 군웅들을 향해 오늘 모임의 종료를 선언했다.
“오늘 창설된 강호무림영웅연맹은 강호의 역사를 새롭게 세울 것입니다. 내일은 십대지단의 수뇌들을 선발하고, 그분들이 다시 강호무림영웅연맹의 초대 맹주를 뽑게 될 것입니다.”
“와아…. 무림맹 만세!”
군웅들의 요란한 함성을 마지막으로 뜨거웠던 대회장의 열기도 급격히 식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대회가 열렸던 초조암의 공지를 빠져 나가며 자기네들끼리 앞으로 벌어질 무림맹의 수뇌부 선출에 대한 열띤 의견들을 주고 받았다. 개중에는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서로 언성을 높이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었다. 진산월 일행은 흩어지는 무리들에 섞여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자신들의 거처인 지방(地房) 부근에 왔을 때였다. 갑자기 근처에 지나가는 무림인들 중에서 하나의 인영이 진산월 앞으로 툭 튀어 나왔다. 진산월 옆에서 걷고 있던 낙일방이 움찔 놀라 무의식 중에 진산월 앞을 막아서려 했다. 하나 그때 진산월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괜찮으니 물러서라.”
낙일방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진산월의 앞에 나타난 인물을 바라보았다. 그 자는 짙은 남색 장삼을 걸친 사십 대 초반의 중년인이었다.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특이한 점이 보이지 않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남삼 중년인은 처음부터 진산월만이 목표인 듯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다른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그의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낙일방은 눈쌀을 찌푸린 채 진산월의 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그의 앞을 막아서려다 등뒤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말았다. 조금 전의 남삼 중년인이 어느 새 그의 등뒤에서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
낙일방의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낙일방은 이 믿어지지 않는 사실에 멍하니 남삼 중년인을 쳐다보고 있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뒤를 돌아 보았다. 과연, 남삼 중년인은 처음의 위치에서 여전히 진산월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낙일방은 한참을 더 두리번거린 다음에야 그들이 동일인물이 아니라 두 명의 똑같이 생긴 쌍둥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닌게 아니라, 그들은 닮아도 너무나 똑같이 닮은 인물들이었다. 낙일방은 쌍둥이를 여러 번 보았으나 눈앞의 이들 두 사람처럼 똑같이 생긴 쌍둥이는 본 적이 없었다. 몇 번이고 살펴보아도 전혀 두 사람의 외모에서 차이점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비단 얼굴 뿐 아니라 체격과 체형, 심지어는 걸음걸이 마저도 똑같았다. 한참을 더 본 후에야 낙일방은 그들을 구분할 방법을 알아냈다. 앞에서 걸어오는 남삼 중년인과는 달리 뒤에 나타난 남삼 중년인의 허리춤에는 검이 아닌 장도(長刀)가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두 명의 남삼 중년인은 진산월의 가까이까지 다가왔다. 중인들이 바짝 긴장하여 병장기를 움켜잡으려 할 때 그들은 마치 신호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낙일방은 이들의 이런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해서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하나 상원건과 뇌일봉 등 강호 경험이 풍부한 고수들은 웃기는커녕 오히려 얼굴이 무겁게 굳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 두 남삼 중년인의 일치된 행동이 오랜 동안의 무서운 수련을 거친 끝에 얻어진 합심공(合心功)의 일종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일반적으로 쌍둥이들은 남들보다 친밀한 정신적인 감응(感應)을 이용하여 특이한 합격술(合擊術)을 연마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남삼 중년인들이 합격술을 익혔다고 해서 그다지 특이할 것은 없어 보였다. 하나, 이런 합격술은 어느 경지 이상까지 익히게 되면 두 사람의 행동은 물론 말투와 사고방식 마저 흡사해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합격술을 익힌 고수들이 얼마나 닮았는가에 따라 그들의 합격술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두 사람은 비단 외모 뿐만 아니라 동작이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합격술 또한 엄청난 수준에 올라와 있음이 분명했다. 더구나 여타의 합격술을 익힌 고수들과는 달리 각기 도(刀)와 검(劍)이라는 다른 병기를 사용하는 점 또한 이들이 여느 평범한 고수들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강하게 들게 했다. 두 명의 남삼 중년인은 진산월을 빤히 쳐다보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공자(公子)께서 뵙자고 하시오.”
두 사람의 말투와 어조는 너무나 똑같아서 마치 한 사람이 말을 한 것과 같았다. 느닷없는 그들의 말에 중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이미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하시오.”
낙일방은 표정이 변해 황급히 진산월을 제지하려 했다.
“장문사형. 이들은…”
진산월은 조금도 걱정할 것이 없다는 듯 온화한 눈으로 그를 보며 웃었다.
“나는 이들을 따라 잠시 다녀올테니 너희들은 먼저 숙소로 가도록 해라.”
“하지만…”
낙일방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정해가 총기 가득한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하며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장문사형. 저들은 혹시 모용…”
“그렇다. 그들은 모용공자의 지시를 받고 온 사람들이니 너희들은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중인들은 다시 한 번 놀라며 새삼스러운 눈으로 남삼 중년인들을 살펴보았다. 모용공자의 위명은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진산월은 중인들이 더 입을 열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성큼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갑시다.”
두 명의 남삼 중년인은 마치 그를 앞뒤에서 호위하듯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해 등은 비록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진산월과 남삼 중년인들이 인파들 속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수 밖에는 없었다. 하나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짙은 호기심과 함께 일말의 불안한 그림자가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