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4권 무림연맹(武林聯盟)편 : 9화 (4권 끝)

랜덤 이미지

군림천하 4권 무림연맹(武林聯盟)편 : 9화


군림천하 4권 무림연맹(武林聯盟)편 : 9화

제39장. 심야기사(深夜奇事)

어두운 밤길을 홀로 되돌아가는 진산월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검은 하늘에는 수레바퀴같은 만월(滿月)이 떠올라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있건만, 진산월의 가슴 속에는 검은 먹장구름이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 특별히 무언가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의 만남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바다를 처음 만난 강물이 비로소 자신의 미약함을 깨달은 것처럼 그는 오늘 자신의 부족함을 거듭 절감하고 있었다. 정말 그가 오늘 만난 인물들은 그에 비하면 대해(大海)와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진산월은 성격이 낙천적이고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이었지만, 지금의 의기소침은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이 그들을 능가할 수 있는 방법이 쉽게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비단 조금 전의 그들 뿐이 아니었다. 그 전에 만났던 형산파의 백대행이나 운문세가의 운자추도 분명 자신보다는 몇 수 위의 실력을 지닌 고수들이었다. 강호에는 그들과 같은 고수들이 또 얼마나 많이 숨어 있을 것인가? 진산월은 둥근 만월을 올려다 보며 소리없이 중얼거렸다.

‘한 가지씩만 생각하자. 지금의 내게 중요한 것은 천룡사와의 격전이 끝날 때까지 제자들을 한 사람도 다치지 않게 잘 이끄는 것이다. 그들을 능가하고 하지 않고는 그 다음 문제다.’

일단 그렇게 마음을 정하자 한결 기분이 가라앉았다.

‘우선은 무림대회, 다음은 천룡사다. 나머지 문제는 종남산으로 돌아간 다음 고민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진산월은 침울했던 마음을 떨쳐버리려는 듯 한 차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의식적으로 그는 단봉공주에 대한 생각은 머리 속에 떠올리지 않았다. 그녀를 생각하면 자기 자신이 더욱 비참해 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였다.

“진장문인….!”

진산월이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의 거처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진산월이 돌아보니 그를 불러 세운 사람은 의외로 석성이었다. 석성은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도 부지런히 다리를 놀려 진산월의 앞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진산월은 그가 자신을 따라올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지라 다소 의아하면서도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귀하는 나에게 볼 일이 있소?”

석성은 뚱뚱한 얼굴에 환한 미소를 떠올렸다. 제딴에는 친근함을 나타내려고 그러는 것이겠으나, 달빛이 너무 환해서인지 오히려 약간은 귀기스러워 보였다.

“헤헤… 이런 밤길을 혼자 걷는 것보다는 함께 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소? 진장문인의 숙소는 어느 쪽이오?”

“저쪽이오.”

진산월이 자신의 거처 방향을 손으로 가리키자, 석성은 이빨을 드러내며 더욱 크게 웃었다.

“우헤헤… 그거 참 잘됐군. 나도 마침 그쪽으로 가려던 참이었소.”

석성은 자신이 먼저 디룩디룩한 몸을 움직여 진산월이 가라킨 방향으로 걸어가다가 진산월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자 땀에 젖은 손수건을 흔들며 그를 재촉했다.

“어서 갑시다. 이러다가는 숙소에 돌아가기도 전에 새벽을 맞을 지도 모르겠소.”

진산월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좋소.”

한동안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밤길을 걸어갔다. 비록 달빛이 밝다고는 해도 아름드리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속의 소로는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석성은 진산월에게 뒤쳐지는 것이 싫은 듯 그와 보조를 맞추어 열심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이내 지쳐버렸는지 숨을 헐떡이며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진장문인… 헉헉… 조금 쉬었다 가면 안되겠소?”

아닌게 아니라 가뜩이나 땀이 많은 석성의 몸은 이미 흐르는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고,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진산월이 고개를 끄덕이자 석성은 근처에서 멀지 않은 커다란 암석 위에 털썩 주저 앉았다.

“으와… 정말 힘들군. 이렇게 많이 걸어본 것이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구나…”

비대한 몸을 헐떡이며 암석 위에 앉아 있는 석성의 모습은 사냥꾼의 화살을 맞고 쓰러져 있는 한 마리의 멧돼지를 연상케 했다. 석성은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진산월을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사실은… 나는 밤길을 혼자 다닌 적이 별로 없어서 조금 무서웠소. 옛말에도 있지 않소? 밤길을 다니다보면 언젠가는 귀신을 만나게 될거라고.”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나도 어렸을 때는 밤에 혼자 다니는 것을 무척 싫어 했었소.”

석성은 뜻밖이라는 듯 작은 눈을 슬쩍 치켜 떴다.

“진장문인도 그랬소? 역시 진장문인과 나는 통하는 것이 있구료.”

“하지만 마음이 떳떳하면 어둠 따위는 문제가 안된다는 것을 알고 그 뒤로는 더 이상 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소.”

석성은 한 차례 날카로운 눈으로 진산월을 바라보더니 이내 계면쩍은 미소를 흘렸다.

“진장문인의 말이 맞소. 나는 장사를 전문으로 하다보니 아무래도 남들 앞에 떳떳치 못할 때가 가끔 있소. 그래서인지 아직도 밤길을 다니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는구료.”

진산월은 ‘그렇게 무섭다면 사람들을 부르지 않고 왜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거요?’ 라고 묻고 싶은 생각이 불쑥 솟구쳐 올랐으나 그 말을 목구멍 속으로 집어 삼켰다. 대신 그는 전혀 다른 것을 물었다.

“아까 모용공자에게 갚아야 할 것과 받아야 할 것이 있다고 했는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겠소?”

석성은 뜻밖의 질문에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걸 알려는거요?”

“별다른 이유는 없소. 그저 모용공자같은 사람도 남에게 빚을 지고 있다길래 그것이 무엇일까 궁금한 생각이 들었을 뿐이오.”

석성은 조금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가 이내 얼굴 가득 미소를 떠올렸다.

“갚아야 할 게 무엇인지 알려주는건 어렵지 않소. 하지만 받아야 할 것이 어떤 건지는 묻지 말았으면 좋겠소.”

진산월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석성은 손수건으로 목에 흥건히 고여 있는 땀을 닦으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내가 모용공자에게 진 빚은 모두 세 가지요. 그것은 바로 한 권의 책과 한 잔의 술, 그리고 하나의 목숨이오.”

진산월은 결코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으나, 이순간만큼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책과 술, 목숨을 빚졌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오?”

석성은 갑자기 땅이 꺼져라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건 모두 내가 멍청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오. 몇 달 전에 나는 우연히 하나의 아주 오래된 고서(古書)를 입수하게 되었소.”

그 고서는 고대(古代)의 기이한 금수(禽獸)와 이물(異物)들을 적어 놓은 것으로, <환우지이록(環宇地異錄)> 이라 했다. 석성은 원래 이런 종류의 서적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거금(巨金)을 들여 그 고서를 어렵게 구입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책은 이미 오래 전에 절전(絶傳)된 고대의 범문(梵文)으로 쓰여진 것이어서 석성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독(解讀)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석성은 고대의 범문을 아는 사람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하나 천하가 아무리 넓어도 범문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뿐 아니라, 아주 오래 전에 잠깐 사용했다가 이내 사라진 고대범문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던 중, 천축(天竺)에서 왔다는 괴이한 승려가 자신이 그 책을 해독하겠노라고 찾아왔다. 석성은 반신반의했으나, 어차피 달리 해독할 방법이 없었는지라 그 승려에게 환우지이록을 맡겨 번역하게끔 했다. 그 승려는 보름의 말미를 요구했고, 석성은 이를 흔쾌히 승락했다. 그런데 보름 후 석성이 그 승려의 거처로 가보니, 승려는 온데간데 없고 한 장의 종이만이 동그마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석성은 허겁지겁 그 종이를 읽어 보았다.

<이 책은 본래 천축의 물건인지라 다시 천축으로 가지고 가겠소. 또한 이 책에 나오는 모든 금수들은 현세(現世)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想像)속의 존재들일 뿐이니 굳이 알려고 하지 마시오.>

서명도 없이 대충 흘려 쓴 그 종이를 읽는 순간 석성은 너무도 화가 나고 어이가 없어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까무러칠 뻔했다. 그는 분기탱천하여 급히 사람을 풀어 그 승려의 행방을 찾았으나, 마치 바다 속에 빠진 조약돌처럼 승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석성이 낙담하여 있다가 마침 석가장을 찾아온 모용봉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그 승려를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혹시라도 강호무림의 절세고수인 모용공자라면 그 승려의 정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용봉은 석성에게서 그 승려의 인상착의를 자세히 전해 듣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 가는 인물이 있소.”

석성은 귀가 번쩍 뜨여 급히 물었다.

“그가 누굽니까?”

모용봉은 그의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불쑥 되물었다.

“당신이 찾는 것은 그 승려요, 아니면 그가 가져간 책이오?”

석성은 그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를 몰랐으나, 나름대로 심사숙고 한 끝에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전 그저 물건만 되찾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모용봉은 짤막하게 말했다.

“열흘 내로 물건을 되찾아 주겠소.”

그리고는 즉시 그는 석가장을 떠나갔다. 열흘 후, 석성의 앞으로 모용세가의 식솔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가 내민 상자 속에는 잃어버렸던 환우지이록이 곱게 담겨 있었다.

석성은 모용봉에게 사례하고 싶었으나, 식솔로부터 들은 대답은 모용봉이 이미 무림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소림사로 떠났다는 말 뿐이었다. 그래서 석성은 모용봉을 찾아 소림사로 와야만 했던 것이다. 석성의 긴 말이 끝나자 진산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용봉은 그 승려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소?”

“그렇소.”

“왜 그렇소?”

“내가 그 승려에 대해 아무 것도 묻지 않았기 때문이오.”

석성의 말에 진산월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당신은 왜 그 승려에 대해 묻지 않았소?”

갑자기 석성은 얼굴을 일그러 뜨리며 씁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모용공자에게 술 한 잔과 목숨 하나를 다시 빚지게 된 이유요.”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석성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모용공자를 찾아 이곳에 왔을 때 한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났소.”

“그가 누구요?”

“모르오.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회색 장포를 뒤집어 쓴 괴인이었었는데, 나는 시퍼런 안광을 번뜩이는 두 눈만을 볼 수 있을 뿐이었소.”

석성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조마조마한지 평소와는 다른 침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는 대뜸 내게 환우지이록을 내놓으라고 욱박질렀소. 내가 그 책을 석가장에 두고 왔다고 하자 그가 갑자기 오른 소매를 크게 휘둘렀소. 그 순간 나는 기이한 향내를 맡았고, 이내 내가 중독된 것을 깨달았소. 회포 괴인은 내게 오일 내로 환우지이록을 가져오지 않으면 한 줌의 핏물이 되고 말거라고 협박하며 홀연히 떠나가 버렸소.”

진산월은 눈을 빛내며 석성을 살펴 보았으나, 그의 어디에도 중독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석성은 그의 의중을 알았는지 쓴웃음을 지으며 이마를 수건으로 닦았다.

“지금까지 중독되어 있다면 나는 아마 홧병이 나서 이미 쓰러져 버렸을거요.”

진산월은 조용히 물었다.

“회포 괴인이 사용한 것은 필시 비전(秘傳)의 극독(劇毒)이었을텐데 당신은 어떻게 그것을 해독(解毒)했소?”

“회포 괴인이 떠나간 후 나는 가슴이 떨리고 겁이 나서 이대로 석가장으로 되돌아 가려고 했소. 하나 여기까지 온 김에 모용공자의 얼굴이라도 보려고 그를 찾아왔소. 그는 나의 안색을 보더니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술이나 한 잔 하라며 술을 따라 주었소.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을 것 같소?”

“술을 마시자 중독된 것이 풀렸단 말이오?”

석성은 커다란 입을 벌리며 웃었다.

“헤헤… 바로 그렇소. 모용공자가 따라준 술을 마시자 전신에 한 차례 짜릿한 기운이 퍼지더니 이내 찌부둥했던 몸이 개운해지며 독기운이 모두 사라져 버렸소. 그제서야 나는 그 술이 평범한 것이 아니라 희대(稀代)의 영물(靈物)임을 깨달았소.”

“그래서 당신은 그에게 책 한 권과 술 한 잔을 빚지게 된 것이로군.”

“그렇소. 아울러 이 한 목숨도 건지게 된 것이오. 모용공자는 부인하고 있지만, 그 술이 아니었다면 내가 회포 괴인의 말대로 한 줌의 핏물이 되고 말았을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 가 아니겠소?”

진산월은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당신은 그에게 세 가지를 빚지게 되었군.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두 가지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구료.”

“헤헤… 그렇소.”

진산월은 모용공자에게서 받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고 석성에게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이미 그와 약속을 했는지라 그런 생각을 눌러 참을 수 밖에 없었다.

“당신은 회포 괴인이 그 승려와 관계가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 그들에 대해 모용봉에게 묻지 않았소?”

석성은 돌연 정색을 했다.

“나는 무림인(武林人)이 아니라 장삿꾼이오. 그런데 내가 무엇 때문에 무림인들과 원한관계를 맺어 번거로움을 자초한단 말이오?”

“하지만 회포 괴인이 다시 당신을 찾아오지 말란 법이 없지 않소?”

“그는 오지 않을 거요.”

“왜 그렇소?”

석성은 씨익 웃었다.

“모용공자가 내 독을 해독시켜 주었기 때문이오.”

그의 말은 복잡한 속뜻을 담고 있었으나, 진산월은 이내 알아차렸다. 모용봉은 틀림없이 그 승려의 정체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회포 괴인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모용봉이 석성의 안색만 살피고도 대뜸 술에 영약을 타서 그의 중독을 해소시킨 것만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모용봉이 석성을 구해준 것은 그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는 무언(無言)의 시위였다. 회포 괴인이 아무리 환우지이록을 노리고 있다고 해도 모용봉이 석성을 구해준 이상 모용봉을 무시하고 다시 석성에게 살수(殺手)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석성은 그들에 대해 모용봉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더 이상 자신에게 손을 쓰지 않는다면 자신도 그들과의 일을 모두 잊겠다는 신호를 보낸 셈이었다. 그의 이런 계산이 얼마나 적중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석성으로서는 자신의 안전에 대한 최선의 대비책을 마련해 놓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석성을 향해 물었다.

“당신은 그 세 가지 빚을 어떻게 갚을 생각이오?”

석성이 모용봉에게 진 빚들은 결코 작은게 아니었다. 석성이 그 빚을 갚기 위해서는 상당한 대가를 치루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석성은 별로 걱정이 되지 않는지 오히려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헤헤… 그 빚들은 이미 갚았소.”

진산월은 어리둥절하여 되물었다.

“정말 갚았단 말이오?”

석성은 자신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깨끗하게 정리했소.”

“언제 갚았단 말이오?”

“조금 전에.”

진산월은 더욱 영문을 몰라 석성에게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모용공자와 헤어질 때 이미 그 빚들을 모두 갚았단 말이오?”

석성은 입을 반쯤 드러내고 어린 아이처럼 웃었다. 물론 그렇다고 순진한 어린 아이의 웃음 같지는 않았다.

“우헤헤… 그렇소.”

진산월은 어떻게, 무슨 수로 그것을 갚았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나 그가 채 묻기도 전에 석성이 먼저 설명해 주었다.

“진장문인도 알다시피 나는 모용공자에게 한 가지 받을 것이 있었소. 그런데 그걸 받지 않고 그냥 나왔지. 그걸로 우리들은 서로 아무 것도 빚진게 없게 된 것이오.”

그제서야 진산월은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석성의 말대로라면 그가 모용봉에게 갚아야 할 세 가지의 빚이 그가 받아야 할 것과 서로 상쇄되어 아무런 빚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석성이 모용봉에게 받기로 했던 한 가지는 무척 커다란 것임이 분명했다. 최소한 그것은 석성의 세 가지 빚을 모두 합친 것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귀중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석성이 그렇게 선심 쓰듯 모용봉에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모용봉도 원치 않은 양보를 받은 듯한 딱딱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진산월은 석성이 모용봉에게 받기로 했던 그 한 가지가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어서 가슴 속으로 의문이 더해만 갔다. 기서(奇書)와 영약(靈藥), 그리고 목숨과 맞바꿀만한 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모용봉은 어떻게 석성에게 그러한 커다란 빚을 지게 되었던 것일까? 모용봉같은 인물이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진다는 자체가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진산월이 마음 속에 솟구쳐 오르는 여러 의문에 휩싸여 상념에 잠겨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무언가 차갑고 서늘한 것이 그의 관자놀이를 향해 빠르게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진산월이 그것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그 물체는 그의 지척에 도달해 있었다. 진산월은 있는 힘껏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파앗!

우측 귀 밑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나가며 한 자루의 비도(飛刀)가 아슬아슬하게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천하의 진산월도 이때만큼은 모골이 송연해져서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버렸다. 어둠 속에서 느닷없이 날아온 비도는 가까이 올 때까지 아무런 소리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무형무음(無形無音)의 암기는 강호상(江湖上)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었다. 그를 스치고 지나간 비도는 어린 아이의 손가락처럼 가느다란 굵기에 길이는 두 치를 조금 넘길 정도로 작은 것이었다. 더구나 비도의 끝에는 앙증맞게도 붉은 색 수실이 매달려 있어서 얼핏 보기에는 여인의 장신구를 연상케 했다. 하나 시퍼런 인광(刃光)을 번뜩이는 칼날은 날카롭기 그지없어서 아무리 강철같은 피부라도 종잇장처럼 뚫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지금도 비도는 그를 스치고 지나간 여세로 삼 장여 밖의 바닥에 손잡이부분까지 깊숙히 꽂혀 있었고, 비도가 땅에 박힐 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은 것만 보아도 그 날이 얼마나 예리한 것인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진산월은 재빠르게 비도가 날아온 방향을 훑어 보았다. 하나 짙은 어둠만이 주위를 감싸고 있을 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비도가 워낙 은밀하게 날아들었는지라 석성은 비도가 날아온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눈으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진장문인. 갑자기 왜 그러는거요?”

진산월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사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석성은 자신도 진산월을 따라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찾고 있는거라도 있소?”

진산월은 말없이 상념에 잠겨 있었다. 느닷없이 날아든 비도 하나! 그것은 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날려 보낸 것이란 말인가? 진산월은 머리 속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당금 강호에서 그와 같은 형태의 비도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앗? 저게 뭐지?”

무엇을 보았는지 갑자기 석성이 놀람에 가득찬 경호성을 터뜨렸다. 진산월은 무심코 석성이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실로 괴이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땅 속에 자루까지 깊이 박혀 있던 붉은 수실의 비도가 땅 밖으로 천천히 솟아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석성과 진산월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들처럼 우두커니 선 채로 조금씩 허공으로 올라가고 있는 비도를 쳐다보고 있었다. 비도는 어느 새 바닥에서 석 자 위까지 떠올랐다.

“대…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진산월의 귓가로 석성의 망연자실한 음성이 들려왔다. 진산월의 지금 심정도 그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하나 진산월은 이내 바짝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허공으로 솟아 오른 비도가 점차로 한광(寒光)을 발하며 미약하나마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비도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진산월을 향해 쏘아져 오는 것이 아닌가? 조금 전처럼 비도가 날아오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단지 기이한 섬광만이 한 가닥 뇌전(雷電)처럼 진산월의 미간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것이다. 진산월이 그 비도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의 배짱이 남들보다 좋았기 때문이었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돌발적인 상황에 놀라고 당황하여 미처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진산월은 놀라는 대신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고, 비도가 자신을 향해 날라오자 지체하지 않고 옆으로 빠르게 이동하여 비도를 피했던 것이다. 비도는 그가 서 있던 자리를 지나 바닥에 떨어지는 듯 했다. 그런데 다시 허공에서 괴이하게 꿈틀거리더니 방향을 되돌려 또다시 진산월을 향해 날아들었다. 새하얀 섬광을 그리며 소리도 없이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오는 비도의 모습은 흡사 유령(幽靈)의 보이지 않는 손에 조종되는 마법의 칼 같았다. 이번에 날아드는 비도의 기세는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빠르고 강력했다. 분명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건만, 흡사 주위의 공기가 비도로 인해 마구 요동을 치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리 비도가 작고 예리하다고 해도 이런 속도로 날아오는 데도 전혀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진산월은 다시 옆으로 몸을 비틀어 피하려 했다. 그러다 생각이 들었는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비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앗? 위험하오!”

석성이 자신도 모르게 비명같은 외침을 토해냈다. 비도는 이미 진산월의 지척에 이르러 있었다. 이제는 피하고 싶어도 완벽하게 비도를 피해낸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막 비도가 진산월의 미간을 관통하려는 순간, 갑자기 검광이 번뜩이며 진산월의 허리춤에서 새하얀 백광(白光)이 뿜어 나왔다.

땅!
그와 함께 귀청이 떨어질 듯한 마찰음이 울려퍼졌다.
석성이 놀라 보니 진산월은 그 자리에 미동도 않고 우뚝 서 있었다.
언제 뽑아들었는지 그의 오른손에는 장검 하나가 굳게 쥐어져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무서운 기세로 날아들던 비도는 어디로 날라가 버렸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절대절명의 순간에 진산월은 허리춤에 차고 있는 장검을 번개같이 뽑아들어 세차게 비도를 후려쳤던 것이다.
하나 진산월의 안색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비록 그는 비도를 막아냈으나, 그 비도에 담긴 역도(力道) 때문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그의 오른손은 장검을 들고 있을 수도 없을만큼 심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어린 아이의 손바닥만한 비도 안에 그토록 가공할 경력이 담겨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동안 주위에는 죽음 같은 정적이 감돌았다.
석성은 거듭되는 사태에 놀라 어쩔 줄 모르고 망연자실한 모습이었고, 진산월은 장검을 쥔 채로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그때 다시 어둠 속에서 무언가 희끗한 것이 날아들었다.
그것은 진산월의 검에 격중되어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린줄 알았던 비도였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조금 전 만해도 하나 뿐이었던 비도의 숫자가 두 개가 되어 있는 것이다.
짙은 어둠을 뚫고 허공을 천천히 날아오는 두 개의 비도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괴이한 전율과 공포를 느끼게 했다.
석성은 온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마구 떨며 두려움에 가득 찬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귀… 귀신의 짓이다….”

아닌게 아니라 무공을 모르는 그의 눈에는 귀신의 장난으로 보일 법도 했다.
하나 비도를 응시하는 진산월의 눈빛은 진중(眞重)하기만 했다.
그에게서 이 장여까지 다가온 두 개의 비도는 점차로 속력을 더하더니 이내 두 개의 빛살이 되어 그의 전신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쏘아져왔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역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비도의 날아오는 방향이 조금 전과는 달리 그의 등 뒤 명문혈(命門穴)과 목 아래 인후혈(咽喉穴)이라는 점 뿐이었다.
두 군데 모두 인체의 치명적인 급소이며, 둘 중 한 군데라도 일단 격중되면 대라신선이 와도 살아남지 못하는 곳들이었다.
진산월은 횃불같은 광망이 번뜩이는 눈으로 전면을 주시하고 있다가 벼락같은 호통을 내지르며 수중의 장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이얍!”

따땅!

불똥이 튀기며 두 개의 연속된 마찰음이 터져 나왔다.
곧이어 그토록 살벌하게 날아들던 비도들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진산월은 두 개의 비도를 정확하게 튕겨낸 것이다.
하나 진산월의 낮빛은 더욱 무겁게 굳어져 있었다.
두 개의 비도에 실린 힘은 처음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비록 빠른 손놀림으로 비도를 격중시킬 수는 있었으나,
진산월은 오른쪽 팔 전체가 마비되는 듯한 충격을 느껴야만 했다.
진산월이 채 숨을 돌릴 겨를도 없이 다시 어둠속에서 한광(寒光)이 번뜩이며 비도가 날아들었다.
이번에 날아드는 비도의 숫자는 무려 네 개나 되었다.
칠흑같은 어둠에서 아무런 기척도 없이 불쑥 날아오는 네 개의 비도는 누가 보기에도 괴이하고 섬뜩한 것이었다.
석성은 아예 아래턱을 덜덜 떨며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아이고… 내가 드디어 귀신을 만나고야 말았구나.”

네 개의 비도는 허공을 거침없이 날아 진산월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네 놈 따위가 어떻게 나를 당해낼 수 있느냐’ 고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진산월의 손에 들린 장검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러더니 그 흔들림이 점차로 커지며 이내 눈부신 속도로 사방으로 확산되었다.

따따땅!

네 개의 비도는 나타날 때보다 더욱 빠르게 허공에서 격퇴되고 말았다.
얼핏 보기에 이번의 비도는 지난번 것보다는 한결 수월하게 떨어뜨린 것 같았다.
하나 검을 휘두른 진산월의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으로 보아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달리 진산월이 상당히 힘들어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진산월의 몸이 한 차례 휘청거리고 있는 것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진산월은 신형을 안정시키고는 어둠에 쌓인 숲속의 어느 한 부분을 똑바로 응시했다.

“언제까지 숨어서 귀신장난만 하고 있을 셈이오?”

비도는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대신 냉혹하리만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호홋… 석성의 개 치고는 제법이구나.”

음산하고 싸늘한 음성이었으나, 분명 여인의 목소리였다.
그와 함께 어둠속에서 돌연 두 개의 인영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들의 등장이 어찌나 갑작스럽고 빨랐던지 흡사 아무 것도 없는 어둠속에서 두 개의 유령(幽靈)이 튀어나온 것 같았다.
나타난 인영들은 일남일녀였다.
남자는 등이 굽은 꼽추노인이었다.
한데 노인답지 않게 체구가 우람하고 거대해서, 꼽추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일반인보다 훨씬 더 커 보였다.
아마 허리가 굽지만 않았다면 보기 드문 거구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에 비해서 여인은 전신에 착 달라 붙은 홍의를 입은 미모의 젊은 여인이었다.
풍만한 몸매에 요염한 미소를 지닌 홍의 여인의 모습은 남자라면 누구나 으스러지도록 안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하나 진산월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이 아닌 손에 가 있었다.
백옥같이 고운 그녀의 손가락에 쥐어져 있는 물건.
그것은 다름 아닌 조금 전에 진산월을 향해 날아들었던 네 개의 비도였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