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6권 서장격변(西藏激變)편 : 6화
제53장. 사전모의(事前謀議)
저녁때가 되니 강가의 바람이 돌연 차가워졌다. 진산월은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우두커니 강둑에 서 있었다. 사천은 유달리 강이 많았다. 그가 서 있는 강은 장강(長江)의 한 지류로, 전강(前江)이라 했다. 전강의 강둑에서 강물을 내려다보는 진산월의 마음은 한없이 무겁고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붉은 노을이 강 위에 비끼자 강물이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어 마치 피의 강(江)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진산월이 마음속으로 떠오르는 수만 가지의 상념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 강을 건너면 바로 대죽(大竹)이오. 감종간(甘宗幹)은 그곳에 있을 거요.”
진산월은 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이정문임을 알 수 있었다. 대죽은 만원현에서 하루쯤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로, 그들의 최종 목적지인 검각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진산월과 이정문이 이곳까지 온 것은 감종간이란 자를 뒤쫓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진산월도 감종간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이정문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성 그는 감종간이 상관욱의 사형이며, 단목초의 대제자(大弟子)임을 알게 되었다.
“감종간은 단목초에게는 오른팔과도 같은 존재요. 상관욱이 갑작스럽게 실종되어 소식이 끊겼다면 단목초는 감종간을 보내 경위를 알아보려 할 것이고, 그때 감종간의 뒤를 추적한다면 단목초를 찾아낼 수 있소.”
“단목초에게 제자가 네 명이라고 했었소?”
“그렇소. 이미 죽은 상관욱을 제외하고 감종간과 위태심(葦泰心), 백석기(伯錫騎)가 그들이오. 그들 중 감종간이 대사형으로 단목초를 가까이서 보필하며 모든 일을 총괄하고 있고, 위태심은 작전을 입안(立案)하고, 백석기가 자금 및 물자를 조달하는 일을 맡고 있소.”
진산월은 이정문이 단목초의 측근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단목초의 제자들에 대해서는 강호에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는데, 이정문은 이미 그들의 신상명세와 직책까지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서장무림과의 싸움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사람은 사실 십이기나 십육사가 아니라 단목초 사제(師弟)들이오. 그들이 실질적으로 서장무림을 지휘하고 있기 때문이오. 뱀을 잡으려면 먼저 그 머리를 치라는 말처럼 그들만 제거할 수 있다면 이번 싸움을 승리로 가져갈 수 있소.”
진산월은 묵묵히 이정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야율척이란 인물은 어떤 사람이오?”
이정문은 진산월이 그에 대해 물어올 줄은 몰랐는지 다소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마디로 신(神)과도 같은 사람이지. 오만하고 자존심 강하며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요. 무공으로는 당대(當代)의 누구도 견줄 수 없고, 오직 전성기 때의 모용 대협만이 비교될 수 있을 뿐이오.”
이정문이 하는 말은 진산월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이었다. 진산월이 야율척에 대해 물은 의도는 이런 것이 아니었기에 그가 다시 물으려 하자 이정문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게 내가 아는 전부요. 다시 말해서 나도 진 장문인만큼이나 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는 이야기요.”
아마 이 말이 다른 사람에게서 나왔다면 진산월도 별도 뜻밖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무림맹의 정보를 담당하고 있고 천하에서 가장 많은 소식통을 가진 이정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자 진산월은 놀랍기도 하고 의아스럽기도 했다.
이정문은 진산월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고 있는지 고소를 머금으며 말을 계속했다.
“서장에서 야율척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철저하게 금기시되어 있소. 게다가 야율척은 천룡사에 칩거한 채 평상시에는 좀처럼 밖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천룡사 내에서도 그를 본 사람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요. 그에 대해 알려진 단편적인 이야기들도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확인할 수 없는 소문에 불과할 뿐이오. 상황이 이러하니 그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오.”
그제서야 진산월은 빙긋 웃으며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야율척이 그토록 신격화(神格化)된 것에는 아마도 그러한 비밀스러움이 많이 작용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이정문도 그를 따라서 조용히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아마 우리가 야율척을 직접 만나더라도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라 몰라볼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소? 후후…”
이정문의 웃음소리는 다소 특이했다. 입을 크게 벌리지 않고 입꼬릴 비틀며 속으로 삼키는 듯이 웃었기 때문에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다면 그가 지금 웃고 있는지, 아니면 속으로 웅얼거리고 있는지를 분간하기 힘들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기분 나쁠 수도 있겠으나, 진산월은 그와 동행하면서 그의 성격을 대충 파악하고 있었기에 이런 웃음소리를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때 멀리 않은 숲 속에서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무얼 그리 웃고 있는 거예요?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나요?”
나타난 인영은 다름아닌 육난음이었다. 육난음은 짙은 자주색 치마에 소매가 넓은 남색 저고리를 입고 있었는데, 약간은 풍만한 그녀의 몸매와 아주 잘 어울려 보였다.
이정문은 그녀를 보자 언제 웃었냐는 듯 표정이 딱딱해지며 음성 또한 무뚝뚝하게 변했다.
“별일 아니야. 그보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어?”
육난음이 그의 이런 표정이 익숙한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에게 다가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었다.
“나한테 웃는 얼굴 좀 보여주면 큰일나기라도 하나요? 이런 심통 사나운 모습이 당신에게는 더 잘 어울려 보이기 하지만 가끔은 나도 별식(別食)을 먹고 싶을 때가 있단 말이에요.”
이정문의 비쩍 마른 얼굴에 뚱한 표정이 떠올랐다.
“별식이 먹고 싶다고? 그게 여자 입으로 할 소리야?”
“호호… 당신의 이런 표정도 귀엽군요. 알았어요. 별식은 취소하기로 하지요. 갔던 일이야 물론 잘되었죠.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
육난음은 이정문의 빰을 한차례 살짝 꼬집으며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이러한 요염하면서도 자유분방한 모습만 보아서는 누구도 그녀가 강호무림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정의 여고수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이정문은 여전히 퉁명스러운 얼굴이었으나, 그녀의 그런 행동에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진산월은 가끔 그가 그것을 즐기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할 정도였다.
“그가 무어라고 했어?”
육난음은 그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애교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누구 말이라고 거역하겠어요? 당신이 준 편지에 적힌 대로 하겠다고 했지요.”
“기밀엄수(機密嚴守)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 주었어?”
육난음은 잠짓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 말을 했던가, 안 했던가 기억이 안 나네…”
이정문이 사나운 눈초리로 쏘아보자 그녀는 다시 방긋 웃으며 요염한 입술을 살짝 열었다.
이정문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그렇게 공갈 협박할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그런데 왜 하필이면 열여덟 군데야? 아예 벌집을 만들어 놓겠다고 하지.”
“내가 동시에 날릴 수 있는 암기 수가 고작 그것밖에 안 되어서 그래요. 벌집이 필요하면 다른 사람을 써 보지 그래요?”
육난음이 돌연 토라진 듯 쌀쌀맞게 대꾸하자 이정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못 말릴 여자로군. 쓸모 없는 벌집 백 개보다는 당신의 손이 더 필요하니 아무 소리 말라구.”
육난음은 자신의 풍만한 가슴에 그의 팔을 더욱 꼬옥 끌어안았다.
“이제야 비로소 바른 말을 하는 군요. 걱정 말아요. 당신이 아무리 떠나라고 해도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는 절대로 안 떠날 테니까.”
이정문은 쓴웃음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 대꾸하다가는 한없이 말이 길어진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육난음은 지금까지의 장난스러운 태도를 버리고 돌연 진지한 표정으로 이정문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자가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에요? 내가 직접 찾아가서 부탁을 해야 할 정도로?”
이정문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는 않던데…”
“그가 대단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 이번 일이 잘되느냐 못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에게 달려 있어. 중요한 건 바로 그거야.”
“그럼 왜 당신이 직접 찾아가지 않았나요?”
이정문은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남자의 부탁은 들어주지 않아. 오직 마음에 드는 여자가 찾아와야만 부탁을 들어주지.”
그 말에 육난음의 아미가 하늘로 솟구쳤다.
“뭐라고요? 그럼 당신은 미인계(美人計)를 썼단 말이에요? 나를 미끼로?”
“그렇게 고함칠 필요 없어. 그게 다 당신이 이쁘니까 가능한 이야기야.”
“바른 대로 말해요. 진짜 나를 미인계로 쓴 거예요.”
그녀가 정색을 하며 대들자 이정문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말했다.
“사실 그는 예전에 당신의 사부에게 신세를 진 적이 있었지. 그래서 당신이 찾아가면 거절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거야.”
육난음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그를 잔뜩 노려보더니 그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이럴 때는 정말 얄미워 죽겠어. 그건 미인계가 아니잖아요.”
“누가 미인계를 썼다고 했어? 당신이 자기 입으로 말한 것이지. 아무튼 그자가 나서 준다면 일이 한결 수월하게 진행될 거야.”
육난음은 다시 요염한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말해 줘요, 그가 대체 왜 그렇게 중요한지. 그는 무공의 고수는 아니지요?”
“무공은 삼류(三流)를 간신히 면한 상태야.”
“그럼 돈이 엄청나게 많은가요?”
“당신도 만나 봐서 알 게 아니야? 그는 빈곤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남들보다 특출난 부자도 아니야.”
“그럼 이 일대에서 세력이 당당한가요?”
“부자도 아니고 무공도 강하지 않은 사람이 세력이라고 별달리 있겠어?”
“그럼 독(毒)을 유별나게 잘 쓰거나 의술이 뛰어난가요?”
“그런 건 나보다 더 문외한 일걸.”
“그럼 진법(陣法)의 달인인가요?”
“진법은 고사하고 골목길이 조금만 복잡해도 길을 잃어버리는 사람이야.”
“그럼 대체 뭐예요? 그자는 뭐 하는 사람이에요?”
육난음의 집요한 물음에 이정문은 별반 표정 없는 음성으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는 관(棺) 짜는 사람이야.”
육난음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이정문을 쳐다보며 되물었다.
“관 짜는 사람?”
“그래, 그는 사천성에서 가장 관을 잘 만들지. 그래서 일감이 비록 많지는 않아도 가끔 부잣집에서 의뢰를 받곤 해서 수입은 짭짤한 모양이야.”
육난음은 전혀 예상을 벗어난 대답에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붉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관을 짜는 사람이란 말이죠?”
이정문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최고로 관을 잘 짜는 사람이지.”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죠?”
“친한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가 좋은 관을 쓰고 싶어하지 않겠어?”
“그래서요?”
“하지만 좋은 관은 비싸지. 최고의 솜씨를 지닌 사람이 만든 관은 더욱 비싸겠지.”
육난음은 세 번째로 똑 같은 물음을 했다.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생각을 좀 해보라구. 최고의 관을 주문할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육난음은 더 생각할 여지도 없다는 듯 재빨리 말했다.
“그야 왕후장상(王候將相)이거나 돈을 쌓아놓고 사는 갑부이거나 세력이 당당한 세도가…”
“아니면 서장의 명망(名望) 있는 기인(奇人)의 제자이든가 말이지.”
그제서야 육난음은 무언가를 느낀 듯 입을 다물었다. 이정문은 특유의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감종간이란 인물이 있어. 그는 서장의 유명한 기인의 수제자지. 그에게는 상관욱이라고 하는 사부가 가장 아끼는 사제(師弟)가 있는데, 어느 날 그가 변사체로 발견된 거야. 그러니 감종간은 그 시체를 어떻게 처리하겠어? 자신의 사부가 가장 아끼는 제자의 시신을 화장(火葬)하거나 아무데나 묻을 리는 없잖아. 틀림없이 사부가 있는 곳으로 옮기려 할 거야.”
“…!”
“그러니 그가 시체를 운반하려면 관이 필요하겠지. 감종간 같은 인물이 남들처럼 허름한 관에 사제의 시체를 보관할 리는 없으니 필시 최고의 관을 쓰려고 할 거란 말이야.”
육난음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이정문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계속 입을 열었다.
“결국 그는 그 최고의 장인에게 관을 부탁할 테고, 장인은 열심히 관을 만들겠지. 그 관이 무사히 단목초에게 전해지면 단목초는 반드시 죽은 제자의 마지막 얼굴을 보려고 할 거야. 단목초가 관 뚜껑을 열었을 때, 그 속에서 자신이 아끼는 제자의 시신 대신 자신을 향해 찔러오는 한 자루 칼날을 발견한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
그녀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그의 입을 막았다.
“잠깐… 그러니까 당신 말은…”
그녀는 크게 흥분한 듯 얼굴이 새빨갛게 상기되었다.
“맙소사, 당신은 시체 대신 살수(살수)를 그 관에 넣으려는 거로군요? 그게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왜 아니겠어?”
“하지만… 그건 너무 무모해요. 발각되지 않을 리가 없어요.”
그녀가 안절부절 못할수록 이정문은 태연자약했다.
“왜? 난 오히려 발각당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터무니 없는 방법을 그들이 모를 리가 없잖아요.”
이정문은 팔짱을 낀 그녀의 손을 다독거려 주었다.
“터무니없기 때문에 그들을 속일 수 있는 거야. 누구도 그런 방법을 사용하리라고 전혀 예상치 않기 때문에 오히려 성공할 확률이 높은 거라구.”
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서야 겨우 진정이 되는지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하나 얼굴 한구석에는 아직도 불안한 그림자가 어른거려 있었다.
“당신 말은 그럴듯하긴 하지만… 시체가 가짜라는 걸 감종간 같은 인물이 알아차라지 못할까요?”
“감종간이 발견한 시체는 진짜 상관욱의 것이야. 당연히 그는 처음에는 시체를 자세히 조사하겠지만 곧 의심을 풀 거야.”
“그럼 언제 시체를 바꾸는 거죠?”
“시체를 바꾸는 게 아니라 시체와 함께 관에 들어가 있는 거야. 시체 밑에 빈 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 숨어 있으면 돼.”
“그럼 언제 관 속으로 들어가는 거죠?”
“감종간이 상관욱의 시체를 관 속에 넣고 관을 봉(封)한 다음에 들어가야 그의 의심을 피할 수 있지.”
육난음은 여전히 영문을 몰라 했다.
“하지만… 무슨 수로 봉해진 관으로 들어갈 수 있죠? 조금만 잘못되어도 감종간은 관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즉각 알아차릴 거예요.”
“그래서 그자의 도움이 필요한 거야.”
이정문의 조용한 음성을 듣고서야 육난음은 머리 속이 활짝 개이며 의혹스러웠던 부분의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가슴을 한 대 쳤다.
“그렇군요. 당신은 이미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었군요. 어쩜 그러면서도 나한테는 한 마디 말도 안 해주고…”
이정문은 그녀에게 맞은 가슴 부분을 손으로 문지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어쨌든 당신도 이제는 알게 됐잖아. 당신이 미리 이 사실을 알고 그자를 만나게 되면 그자에게 무언가 낌새를 눈치채게 할 것 같아서 미리 알리지 않았던 거야.”
육난음은 흰자위가 가득 드러나도록 그를 흘겨보았으나, 이내 다시 배시시 웃었다.
“정말 이럴 때는 미워 주겠다니까. 호호… 그럼 당신이 그에게 전해 주라는 편지에도 자세한 내막은 안 적혀 있는 거예요?”
“당연하지. 다만 편지에는 관이 봉해진 후에 아무런 흔적도 없이 그 관을 다시 열 수 있는 방법을 만들라고만 적어 놓았어. 물론 그는 그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상상을 하겠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겠지.”
“정말 봉해졌던 관을 흔적도 안 남기고 다시 열고 닫을 수 있을까요?”
이정문은 피식 웃었다.
“아까 내 말을 잊었어? 그는 관 짜는 일에는 최고의 실력가라니까. 마음만 먹는다면 못할 게 없지. 문제는 그가 자발적으로 협력을 해주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당신의 도움으로 그걸 해결하게 되어서 다행이야.”
육난음은 두 눈을 실눈처럼 감으며 웃었다.
“그럼 나도 이번 일에 큰 힘이 된 거로군요.”
“그렇지.”
육난음은 흐뭇한 생각이 드는지 콧노래라도 부를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잠시 후에 그녀는 다시 이정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요.”
“말해.”
“누가 관 속에 들어갈 거지요? 설마 당신은 아니겠죠?”
“나는 밖에서 준비할 게 많아서 안 돼. 게다가 검을 쓸 줄도 모르잖아.”
“그럼…”
무어라고 입을 열려던 육난음의 시선이 자신들의 옆에 있는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진산월은 담담하게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미약하나마 본인이 시체의 동행이 되기로 했소.”
그제서야 육난음은 이정문과 진산월이 사전에 서로 계획에 대해 상의를 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진산월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이윽고 용기를 내어 물었다.
“진 장문인은 이번 일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나요?”
“그렇소.”
“그런데도 승낙을 했단 말이에요?”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소.”
“하지만 일이 잘못되면 목숨을 잃는 것은 진 장문인이에요.”
“단목초를 상대로 하는 데 그 정도 위험은 각오해야 하지 않겠소?”
육난음은 한동안 진산월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더니 그녀답지 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진 장문인은 속마음을 모르겠군요. 자신의 목숨이 달린 일을 남의 일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다니…”
진산월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소. 이 형이 알아서 잘 수진할 거여. 이 형이 얼마나 치밀하고 빈틈없는 사람인지는 육 소저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게 아니겠소?”
육난음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물론 잘 알고 있지요. 하지만 아무리 사람이 완벽한 계획을 짠다 해도 일이란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거예요. 더구나 이번 일은 털끝만한 착오라도 발생하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진 장문인은 절대로 살아날 수가 없어요.”
진산월은 별달리 걱정하는 빛도 없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소저 말대로 진인사(盡人事) 대천명(待天命)이오. 만약 일이 잘못되어 내가 죽는다면 그건 내 수명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소?”
“…”
“게다가 나는 이 형을 믿고 있소. 그가 나를 아무런 대책도 없이 허술하게 사지(死地)로 보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오. 그렇지 않소?”
진산월이 이정문을 바라보자 이정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진산월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해졌을 때 이정문은 혼자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무런 대책도 없지는 않지. 하지만 그게 당신 목숨을 살릴 수 있을지는 나로서도 장담할 수 없는 걸.”
그 중얼거림을 들은 사람은 육난음 뿐이었다. 육난음은 안색이 조금 굳어져서 이정문을 올려다보았으나, 다만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무뚝뚝한 얼굴의 평상시 모습뿐이었다. 육난음은 한동안 이정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뜻 모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시체를 본다는 것은 언제 어느 때라도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 시체가 자신과 가까운 동문 사형제 중 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감종간이 상관욱의 시체를 처음 본 것은 만원현에 있는 상관욱의 비밀처소였다. 이틀 동안이나 상관욱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자 단목초가 감종간을 불렀고, 감종간은 한달음에 만원현으로 달려왔다.
만원현에 도착한 감종간은 두 가지 이상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만원현에서 상관욱의 거처는 호호루였다. 그런데 호호루의 점원들 중 상관욱의 심복이라고 할 수 있는 몇몇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더욱 이상한 것은 호호루 외에도 상관욱이 비밀스럽게 사용하는 몇 군데의 장소 어디에도 상관욱은커녕 그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감종간은 밀방(蜜房)을 떠올리게 되었다. 밀방은 만원현의 서북쪽에 있는 뒷골목에 있었다. 이름 그대로 벌의 집처럼 작고 폐쇄된 방들이 오밀조밀하게 붙어 있어서 이곳의 지리에 정통하지 않은 사람은 어디가 어디인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밀방에 거주하는 사람의 수는 수천 명에 육박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누군가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 밀방의 한복판에 상관욱의 비밀처소가 있었다. 아주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거나, 아니면 꼭 필요한 휴식을 취해야 할 때면 상관욱은 늘 이 밀방의 처소로 오곤 했다. 그의 이 처소를 아는 사람은 상관욱의 최측근 두세 사람과 그의 사형제들뿐이었다. 감종간은 미로(迷路)처럼 복잡하고 후미진 밀방의 골목을 반 시진이나 헤맨 끝에 간신히 상관욱의 처소에 도착했다.
상관욱은 과연 그곳에 있었다. 그는 가슴에 시커먼 구멍이 뚫린 차가운 시신이 되어 좁다란 자신의 침상 위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처음 상관욱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 감종간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이것은 함정이다.’
라는 것이었다. 함정이 아니고서야 상관욱의 시신이 자신의 처소에 누워 있을 리가 없었다. 어디에서 죽었건 상관욱의 시신은 누군가에 의해 이곳으로 운반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상관욱을 죽인 흉수(兇手)일 것이다. 그렇다면 흉수는 왜 상관욱의 시신을 이곳에 가져다 놓았을까? 그것은 이곳을 찾아올 누군가를 노리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감종간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나 이내 그는 자신의 그런 생각을 수정했다. 우선 누군가가 이곳에 잠복해 있다면 지금쯤은 이미 공격이 시작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주위에는 전혀 인기척이 없었고, 사람의 흔적 또한 보이지 않았다. 매복 같은 것은 없었다. 또한 이곳을 찾아올 사람을 노리고 있다면 굳이 상관욱의 시신을 이곳에 가져다 놓을 필요가 없었다. 그냥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될 텐데, 번거롭게 무거운 시신을 이곳까지 끌고 올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이 밀방의 처소를 아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들 중 누군가가 배반하여 적에게 이곳을 누설했다는 것은 그다지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오히려 그보다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상관욱이 필사적으로 이곳까지 도망쳐 와서는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 더 가능성이 많은 이야기였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상관욱의 침상에는 그가 몸부림친 흔적이 여기저기 나 있었다. 아마도 상관욱은 죽기 직전까지 몹시도 고통스러워했을 것이다.
상관욱의 시신은 이제 막 부패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만 보아도 상관욱은 이삼 일 전에 죽은 게 확실했다. 그렇다면 더욱 이야기가 맞아떨어진다. 상관욱의 소식이 끊긴 것은 삼 일 전이었다. 이틀 동안 연락이 없어서 사부의 밀명을 받고 그가 이곳까지 달려온 것은 다시 하루가 지난 후였다. 시체의 부패 상태로 보아 상관욱은 소식이 끊어지기 전에 이미 숨이 끊어졌으며, 삼 일 동안 이런 상태로 방치된 것이 분명했다. 만일 흉수가 시체를 갖다 놓은 것이라면 이렇게 며칠씩이나 시체를 내버려두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상관욱이 제 발로 여기까지 와서 숨이 끊어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제 중요한 것은 누가 상관욱을 죽였으며, 상관욱의 정보망이 어디까지 파괴되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흉수가 누구인지는 굳이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상관욱의 상대는 무림맹의 정보책임자인 이정문이며, 이정문은 상관욱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상관욱을 죽인 흉수는 이정문임이 분명하다.
또한 호호루와 만원현에서 상관욱의 부하들을 찾기 어려운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이 일대에서의 정보망은 철저하게 궤멸되었을 것이다. 삼 일이라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지금쯤 이정문은 만원현 일대의 상관욱의 세력을 모두 소탕하고는 득의만면하여 검각으로 향하고 있을지 모른다.
감종간은 이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상관욱의 시신을 이대로 썩게끔 이곳에 둘 수는 없었다. 더구나 상관욱은 사부가 가장 아끼는 제자가 아니었던가? 상관욱의 죽음을 사부가 알게 되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능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아마도 사부는 상관욱의 마지막 모습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려 할 것이다.
감종간은 이내 자신의 행동을 결정했다. 우선은 상관욱의 시신을 더 이상 부패하지 않게끔 방부 처리한 후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사부에게 가져간다. 그리고 남은 인력을 최대한 동원하여 상관욱의 흉수인 이정문의 행방을 캐내면 되는 것이다. 일단 행방이 노출되면 이정문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부의 경천동지할 능력으로 보아 이정문을 죽이는 것은 여반장(如反掌)이나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상관욱의 빈자리는 자연히 자신의 차지가 될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감종간은 상관욱의 죽음이 그다지 비통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렇지. 이곳에서 멀지 않은 대죽에 왕방(王方)이 있지. 왕방의 관이라면 사부께서도 사제의 시신을 소홀히 대했다고 하지는 못하실 것이다.’
감종간은 일이 뜻밖에도 수월하게 풀리고 있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조용히 미소지었다.
왕방의 나이는 올해로 오십칠 세. 젊었을 때는 사천성 일대에서 제법 명성을 날리기도 했고, 멀리 섬서(陝西)와 하남성(河南省)까지도 활동무대로 삼은 적도 있었다. 나이를 먹어서 대죽에 거처를 잡았고, 그 뒤로 이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대죽의 밖으로는 나가지 않았다.
그가 대죽에 거처를 잡은 이유는 이곳에 유달리 질 좋은 오동나무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오동나무로 만든 관은 부식이 잘 생기지 않고 뒤틀림도 없어서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다. 오동나무 중에서도 삼십 년 이상 된 것들이 특히 좋았다. 장정 두세 사람이 손을 맞잡아야 닿을 만큼 잘 자란 오동나무를 결이 상하지 않게 잘 베어서 철심목(鐵心木)의 수액(樹液)을 입히고 그늘진 곳에서 이삼 일 정도 말리면 최고의 관을 짤 재질이 되는 것이다.
하나 나무를 자르고, 수액을 입히고, 그것을 다시 잘 말리는 일은 여간 손이 많이 가는 것이 아니었다. 자칫 그중 어느 한 가지라도 잘못되면 아까운 나무만 못쓰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왕방이 관을 짤 수 있는 개수는 한 달에 다섯 개 남짓에 불과했다. 달리 가족도 없고, 일을 가르칠 제자도 없어서 왕방은 지금도 아침 일찍 일어나 근처의 산에 올라가 오동나무를 자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곤 했다.
나이에 비해서 그의 체격이 건장한 것도 이런 일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해 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동나무를 자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나뭇결을 손상시키지 않고 알맞은 두께로 자르는 것은 몹시 까다롭고 솜씨가 필요한 일이었다. 너무 두꺼우면 관이 무거워져서 운반이 힘들고, 그렇다고 너무 얇게 되면 묵직한 모양이 나오지 않을뿐더러 나중에 변형이 되거나 파손되기가 쉬웠다.
왕방은 오랜 동안의 경험으로 나무 두께는 두 치 반이 가장 적당하며, 여름이나 겨울보다는 봄과 가을에 벤 나무가 더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겨울이 오기 직전의 늦가을이 오동나무를 베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오늘은 서늘한 바람이 불고 날도 그다지 덥지 않아서 나무를 베기에 적당한 날씨였다. 요새는 일감이 그리 많지 않아서 굳이 나무를 벨 일도 없었으나 왕방은 오랜 동안의 습관으로 한 그루의 커다란 오동나무를 잘랐다.
그놈은 벌서 몇 달 전부터 그가 눈여겨봐 오던 나무로, 아주 곧게 위로 뻗어 있고 잔가지도 적당해서 최고의 관짝이 될 가능성이 다분히 있었다. 오동나무를 보는 왕방의 눈길은 마치 여인들을 보는 바람둥이의 눈과 같아서 곧고 잘 자란 오동나무는 마치 절세의 미녀처럼 보이기도 했다.
왕방이 베어진 오동나무를 결대로 손질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불쑥 그를 찾아왔다. 왕방은 그동안 적지 않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대부분이 부유한 상인이거나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간혹 무림의 고수들도 섞여 있었다. 한데 지금 찾아온 사람은 상인 같지도 않고 관리 같지도 않았다. 무림의 고수는 더더욱 아닌 것 같았다.
그 사람은 허름한 모자를 쓰고 거친 마의(麻衣)를 입고 있었는데, 얼굴이 검게 그을려 있어서 쟁기라도 들고 있으면 영락없이 농부(農夫)로 오인을 했을 것이다. 하나 평범한 농부라면 비범한 솜씨만큼이나 품삯이 비싸기로 유명한 왕방을 찾아왔을 리가 없었다.
그 사람이 슬쩍 모자를 쳐들고 왕방을 쳐다보았을 때, 왕방은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투박한 얼굴 한가운데 박여 있는 두 개의 눈은 수정(水晶)처럼 차갑고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은 조금도 깜박거리지 않고 왕방의 주름진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주문하러 왔소.”
나직하게 가라앉은 음성이었으나, 왠지 강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왕방은 하던 일을 멈추지 않고 물었다.
“언제 필요하오?”
그 사람의 말은 음성만큼이나 간결하고 명확했다.
“내일 아침, 최고로 만들어 주시오.”
하루라면 최고의 관을 만들기에는 너무도 촉박한 시간이었다. 왕방이 그 점에 대해 말하려 하자 그 사람은 말없이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그의 앞에 던져 놓았다.
차르르…
주머니가 반쯤 풀리며 누런 금화 수십 개가 보였다.
“황금 오십 냥이오. 내일 인시(寅時)에 관을 가지러 오겠소.”
황금 오십 냥이란 말에 왕방은 거절하려던 말을 목구멍 속으로 집어삼켰다. 그의 관 값이 아무리 비싸다고 해도 황금으로 치면 몇 냥 되지 못할 것이다. 황금 오십 냥이라면 그가 몇 달 버는 돈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었다. 왕방은 주머니를 확인해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내일 오시오.”
그 사람은 한차례 더 왕방을 쳐다보았다. 조용한 눈길이었으나 왕방은 왠지 가슴 한구석에서 오한이 일어났다. 너무 맑고 차갑게 빛나고 있어서 마음속의 어떠한 비밀이라도 꿰뚫어 볼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 사람은 그런 눈으로 왕방을 응시하더니 말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왕방은 그 사람이 사라진 곳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넋이 나간 듯한 모습이었으나, 그가 무언가를 나직하게 중얼거리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과연 왔구나. 듣던 대로 눈빛이 예리하군. 이번 일은 만만치 않겠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