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9권 풍운기혜(風雲起兮)편 :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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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9권 풍운기혜(風雲起兮)편 : 1화


제78장. 일모도원(日暮途遠)

눈 온 뒤의 하늘은 언제 보아도 한없이 청명(淸明)했다. 그 하늘의 시리도록 투명한 색깔이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서문연상(西門燕裳)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눈에 가득 들어온 것은 바로 그 한없이 푸른 하늘이었다. 그 하늘색이 너무도 시려서 그녀는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녀가 울리 않은 것은 주위에 아무도 자신을 보아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운다는 것은 무언가를 쟁취하기 위한 가장 유력한 수단이었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운다는 것은 전혀 무용(無用)한 일이었다. 그녀가 울어도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던 적은 태어난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가 집을 나온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 생각을 하자 그녀는 다시 마음이 울적해졌고, 울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자신이 그토록 부탁했는데 이번에는 정말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안 돼!”

그 말을 할 때의 아버지의 표정은 정말 진지하다 못해 심각할 정도였다. 그녀는 그때를 떠올리며 입을 삐죽거렸다.

“칫, 정말 안 되는지 두고 보라지.”

아마 지금쯤은 그녀가 없어진 것을 모두들 알아차렸을 테고, 그들은 한바탕 난리법석을 피우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그녀는 얼마쯤 마음이 유쾌해졌다. 솔직히 미안한 마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집을 나올 때 그녀를 책임지기로 한 비룡검(飛龍劍) 위소룡(威小龍)은 어려서부터 그녀를 몹시 귀여워해 주던 사람이었는데, 이번 일로 아버지에게 호되게 경을 칠 것이 분명했다. 하나 아무리 그래도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누구도 내게 강요할 수는 없다. 적어도 내 앞길의 중요한 일은 내가 결정해야 한다. 그녀는 이렇게 마음먹으며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지금 그녀는 다시 또 결정을 내려야 했다. 눈앞에 있는 주루는 크고 화려한 것이 한눈에 보아도 음식값이 만만치 않을 게 분명했다. 평상시라면 당연히 그 주루에 들어갔을 테지만, 아쉽게도 지금 그녀는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몰래 빠져 나오느라 기껏 그녀가 챙긴 것은 시비(侍婢)가 가지고 있던 약간의 은자가 전부였던 것이다. 아무리 세상 물정에 어두운 그녀라도 이 정도의 은자 가지고는 결코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앞에 있는 주루로 갈지, 아니면 조금 전에 이곳을 올 때 보아두었던 거리 반대편의 그 허름하고 볼품없는 주루로 가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하나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그녀는 이내 마음을 결정했다.

‘그래, 이번 기회에 밑바닥 생활이라는 걸 경험해 보는 거야. 내가 항상 제멋대로 살지만은 않는다는 걸 보여 주겠어.’

그녀는 다부진 미소를 지으며 발길을 돌렸다. 올 때는 몰랐는데, 다시 돌아가려니 무척 먼길이었다. 갈수록 길도 좁아지는 것 같았고, 거리도 지저분해서 그녀는 점점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꾹 눌러 참고 걸음을 내디뎠다. 얼마쯤 가니 아까 보았던 그 낡고 허름한 주루가 나타났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정말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런 곳에서 나오는 음식이란 안 봐도 뻔할 것이다. 용기를 내서 주루 안으로 들어가자 퀘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휴, 이런 곳에 음식을 먹는 사람도 있네.’

뜻밖에도 그 허름한 주루 안에는 벌써 몇 명의 손님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사람과 어린 소년이 앉아 있었고, 그 옆 탁자는 젊은 부부인 듯한 두 남녀가 있었다. 서문연상은 아미를 살짝 찌푸리고 있다가 문에서 가장 가까운 탁자로 다가갔다. 탁자는 그런데로 깨끗했는데, 그래도 그녀는 그냥 앉는 것이 못마땅해서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간신히 엉덩이 끝만 걸치고 앉았다. 주방장이 다가와 물었다.

“무얼 드시겠습니까?”

그녀는 이미 생각해 놓은 것이 있는지 재빨리 입을 조잘거렸다.

“여기서 가장 싸고 빨리 되는 걸로 하나 해주세요.”

주방장은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주방 안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그녀는 탁자에 턱을 괸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 보면 볼수록 초라하고 볼품없는 주루였으나, 그래도 구석구석에 제법 청소가 되어 있는지 먼지가 앉거나 더러운 곳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다신 한쪽에 미리 와서 식사를 하고 있는 네 명의 손님들에게로 향했다. 따로 떨어져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일행은 아닌 듯 했다. 젊은 남녀는 뜨거운 김이 나는 국수를 먹고 있었는데, 여자는 제법 반듯한 용모에 이목구비가 또렸했으나 눈빛이 매서워서 성질이 보통이 아닐 것 같았다. 그에 비해 남자는 평범한 얼굴에 순한 인상이었다. 서문연상은 그들 남녀가 부부(夫婦)이며, 틀림없이 남자가 여자에게 쥐어 잡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하인이었던 유노삼(劉老三)과 하대랑(何大랑) 부부도 꼭 저들처럼 여자는 똑똑하고 남자는 숙맥 같아서 유노삼이 하대랑에게 쩔쩔매는 광경을 자주 보아았던 것이다.

‘그래도 하대랑이 자식을 여섯이나 낳았으니, 저들도 어쩌면 앞으로 자식을 줄지어 낳을지도 몰라.’

서문연상은 눈앞의 날씬하고 똑 소리 나게 생긴 젊은 여자가 아이를 쑥쑥 낳은 장면을 떠올리자 갑자가 우스워져서 혼자 킥킥거렸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젊은 여자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처댜보았다. 서문연상은 여자의 날카로운 눈빛에 찔끔 놀랐으나 아내 입을 삐죽거렸다.

‘흥, 자기가 노려보면 어쩔 건데? 나한테 덤비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젊은 여자는 서문연상의 미모에 놀란 듯 눈이 조금 크게 뜨여졌으나, 이내 별 관심이 없는지 고개를 숙여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서문연상도 그녀를 한차례 쏘아봐 주고는 다시 시선을 그들의 옆 탁자로 이동시켰다. 옆 탁자에 앉은 사람들은 앙상하리만치 마르고 키가 껑충하게 큰 사나이와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았을 듯한 어린 소년이었다. 소년의 얼굴은 여기저기에 피멍이 나 있어서 구타를 당했던 흔적이 역력히 나 있었다. 서문연상의 눈썹이 다시 찡그려졌다.

“보아하니 저들은 부자지간(父子之間) 같은데, 자기 자식을 저렇게 두들게 패다니 정말 못된 아버지네.”

그녀는 제멋대로 상상하며 그 키 크고 깡마른 사나이를 못마땅한 눈으로 흘겨보았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깡마른 사나이는 닭국물 같은 것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먹는 모습도 영 시원치 않아서 왜 그렇게 말랐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상상은 계속 되었다.

‘틀림없이 아들에게 동냥이나 구걸 같은 걸 시켜서 돈을 벌고 있을 거야. 그러다 벌이가 시원치 않으면 매질을 할 테고…… 얼마나 못 먹었으면 저렇게 말았을까? 조금 불쌍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들을 부려먹다 못해 때리기까지 하다니 용서할 수 없어. 어떻게 혼내 줄까?’

그녀가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을 때, 마침 주방에서 주방장이 요리를 가지고 나왔다. 그것을 본 그녀의 머리에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주방장이 탁자 위에 올려놓은 것은 고기국물에 푸른 배추를 넣고 끓인 국수였다. 그녀는 그 국수를 쳐다보지도 않고 주방장을 향해 도리질을 해보였다.

“마음이 변했어요. 여기에서 가장 맛있고 비싼 요리를 내오세요.”

주방장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그녀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하나 주방장이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새침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녀의 깜찍한 옆모습뿐이었다. 주방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혼잣말로 무어라고 중얼거리며 주방 안으로 사라졌다. 서문연상은 짐짓 먼 산만 쳐다보고 있다가 슬쩍 눈을 돌려 깡마른 사나이 쪽을 쳐다보았다. 깡마른 사나이는 국물을 다 먹었는지 막 숟가락을 놓고 있었다. 그녀는 기회가 왔음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갔다.

“이봐요.”

그녀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자, 사나이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무심코 사나이의 얼굴을 본 그녀는 내심 움찔 놀랐다. 깡마르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사나이는 왼쪽 뺨에 커다란 흉터까지 나 있어 첫인상은 섬뜩하고 무섭게 느껴졌던 것이다.

‘정말 생긴 것도 악질 같구나……’

서문연상은 속으로 덜컥 겁이 났으나 이내 얼굴에 방긋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초면(初面)에 미안한데,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사나이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말하시오.”

그녀는 갑자기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사실은 나한테 남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이는 나와 나이 차이는 제법 났지만 우리는 무척 사이가 좋았지요. 그런데 몇 년 전에 가뭄이 심하게 들었을 때, 그 아이가 그만 괴질(怪疾)에 걸려서 할 수 없이 병을 고치려고 아주 먼 곳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어요. 그 뒤로 나는 아직까지 동생을 만나지 못했어요.”

그녀의 시선이 소년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오늘 이 아이를 보니 내 동생이 생각나는군요. 내 동생이 나와 헤어진 게 꼭 저 나이 때였죠. 그래서 이 아이에게 무언가 맛있는 거라도 사주고 싶어요.”

사나이는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내 동생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걸 무엇보다 좋아했거든요. 괜찮겠죠?”

그녀는 사나이가 무어라고 할 사이도 없이 재빨리 자리에 앉으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귀업게 생겼구나. 이름이 뭐니?”

소년은 말없이 그녀를 빤히 응시하고만 있었다. 그 모습이 어린아이답지 않게 과묵하고 의젓해 보여서 그녀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맛있는 걸 사준다고 하면 아주 반색을 하고 좋아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녀는 다시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몇 살이니?”

소년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상한 아이로군. 벙어리인가?’

그녀가 의아함을 느낄 때 사나이의 음성이 들려 왔다.

“그렇게 하시오.”

“고마워요.”

그녀는 무심코 대꾸하고는 내심 피싯 웃었다. 자기가 사주는 입장인데 왜 고마워해야 한단 말인가? 소년은 비록 얼굴의 여기저기가 멍들어 있었고 피부색도 썩 좋지 않았지만, 흑백(黑白)이 분명한 두 눈은 초롱초롱했고 오뚝한 콧날고 굳개 다문 입술이 제법 의지견정(意志堅定)해 보였다. 서문연상은 보면 볼수록 추레한 소년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목소리를 최대한 부드럽게 하여 물었다.

“이름이 무언지 이 누나에게 말해 줄 수 있겠니?”

아마 평소에 그녀를 알던 사람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깜짝 놀라고 말았을 것이다. 그녀는 항상 남에게 떠닫듦을 받고 살았을 뿐 아니라 성격이 괴팍해서 제멋대로 행동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물론 본성이 나쁘지 않아서 가끔 남에게 친절을 베풀 때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 보는 행색이 남루한 아이에게 이토록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은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소년도 무거운 입술을 처음으로 열었다.

“유소응이에요?”

“소응, 좋은 이름이구나. 나이는?”

“열한 살.”

서문연상은 손뼉을 탁 쳤다.

“정말 잘됐네. 내 동생이 헤어질 때하고 나이도 똑같구나. 오늘 이 누나가 너 먹고 싶은 거 많이 사줄 테니 실컷 먹어라.”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유소응은 별로 기뻐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특별히 싫거나 귀찮아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참 이상한 아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 마침 주방에서 주방장이 요리들을 들고 나왔다. 주방장은 서문연상이 자리를 바꿔 사나이와 소년과 같이 탁자에 있는 것을 보고는 얼굴에 한 줄기 야릇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를 손짓해 불렀다.

“이쪽으로 가지고 오세요.”

주방장은 요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면서도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이고, 얘는 내 동생이에요.”

주방장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표정을 보니 별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서문연상은 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음식을 유소응의 앞으로 옮겨놓으며 다정스럽게 그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이런 거 처음 먹어 보지? 많이 먹어.”

아닌게 아니라 이번에 나온 음식들은 유소응으로서는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는 진수성찬이었다. 그동안 여기저깃 눈칫밥만 먹고 지내온 데다, 이곳에 와서도 그냥 평범한 음식만 먹어온 터라 지금 탁자 위에 놓인 도미를 쪄서 가미하 청증가어(靑蒸加魚)와 생선과 야채를 넣고 볶은 초활어편(炒滑魚片), 전복의 살을 냉채를 만든 양반포어(凉拌鮑魚), 송이버섯과 닭고기를 가늘게 찢어 볶은 송이계사(松?鷄絲) 같은 값비싼 요리들은 구경도 못해 본 것들이었다. 유소응은 사나이를 힐끔 쳐다보더니 사나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천천히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하나 먹는 모습이 영 신통치 않았다. 젓가락으로 여기 조금, 저기 조금씩 떼어먹을 뿐이었다. 보다못한 그녀는 자기가 직접 젓가락을 들고 유소응의 앞에 놓인 음식들을 그에게 먹여 주려 했으나, 유소응은 고개를 저으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난 이렇게 먹는 게 좋아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삐죽거렸다.

‘누가 부자(父子)간이 아니랄까 봐 청승 떠는 것도 똑같네. 그렇게 궁상맞게 먹으니 들어오려던 복(福)도 달아나 버리겠다.’

하나 겉으로는 여전히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편한 대로 먹어. 시간은 많으니까.”

“누나도 드세요.”

“알았어.”

서문연상도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으나, 그녀의 모습도 그다지 시원스럽지는 않았다. 그녀는 몇 점 먹지도 않고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소응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까닥거렸다.

“먹고 있어. 잠깐만 나갔다 올게.”

유소응은 어디를 가려느냐고 물으려다 참았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여인에게 그런 걸 묻는다는 게 실례가 된다는 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서문연상은 측간이 있는 후원 쪽으로 가고 있었다. 주방장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지 그녀가 후원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유소응은 계속 접시의 여기저기를 들척거리기만 하더니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의 앞에 앉아 있던 진산월이 조용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물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느냐?”

유소응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다 처음 먹어 보는 것들이어서 그렇습니다. 게다가 전 원래 생선보다는 고기를 좋아해서……”

그러고 보니 나온 음식들은 대부분이 어패류(魚貝類)였다. 유소응이 살던 몽고 지방은 일년 내내 생선을 구경도 할 수 없는 내륙지방이었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양고기를 즐겨 먹던 유소응의 입맛에 생선요리가 맞을 리 없었다. 진산월도 그 점을 알고 있기에 더 이상 그에게 강요하지 않고 옆 탁자로 시선을 돌렸다. 방취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피식 웃었다.

“정말 맹랑한 아가씨네. 장문사형이 그런 꼴로 있으니까 거렁뱅이인 줄 알았나 봐요.”

진산월은 별로 개의치 않는지 담담한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의 선의(善意)를 나쁘게 해석하면 안 되지.”

“매사를 좋게 생각하려고만 하는 버릇은 여전하군요. 하지만 그 아가씨 얼굴 보니까 만만한 성격이 아니던데, 필시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장문사형에게 접근한 걸 거예요.”

진산월이 별다른 대꾸 없이 묵묵히 있자 방취아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두고 보세요. 내 말이 틀림없을 테니까.”

진산월은 그 점에 대해서는 더 말하고 싶지 않은지 방취아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소지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초가보에서 본파에 파견한 고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소지산은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사패(四覇) 중의 검패(劍覇) 양전(楊剪)이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그외에 칠객과 팔수 중 몇 명이 함께 있을 겁니다.”

사패라면 초가보에서도 최고의 실력자들로, 하나같이 강호무림의 유명한 고수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검패 양전은 이미 이십 년 가까이 관중(關中) 일대에서 명성을 떨쳐 온 인물로, 화산파의 장로급 고수들에 못지않은 절정검객으로 알려져 있었다. 소지산, 방취아와 실로 감격적인 해후(邂逅)를 한 후, 진산월이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어떻게 하면 초가보에게 점령당한 종남파의 본산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일파의 장문인으로서 본산을 남에게 빼앗기고 뿌리 없이 떠돈다는 것은 선조들에게 머리를 들리 못하는 수치스러운 일일뿐더러 종남파의 재건(再建)을 위해서도 하루속히 시정되어야 할 일이었다. 하나 문제는 그것이 결코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초가보에서는 이미 최절정고수들을 보내 종남파의 본산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이 본산을 되찾겠다고 쳐들어올지모를 종남파의 잔여 세력을 뿌리뽑기 위해 엄밀한 함정을 파놓고 있으리라는 것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느니, 자칫 하다가는 본산을 되찾기는 켜녕 오히려 종남파의 마지막 남은 불씨마저 꺼져 버릴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하루빨리 본산을 되찾고 흩어진 제자들을 수습하여야만 종남파 재건의 희망을 이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소지산은 진산월의 이런 속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만남의 기쁨도 잠시뿐, 자신들 앞에 펼쳐져 있는 가혹한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오직 암담할 뿐이었다.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 했던가? 가야 할 길이 정말 멀고 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소지산은 자신이 진산월이라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으나 아무런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도대체 단 세 명의 인원을 가지고 거대한 초가보의 세력에 어떻게 대항한단 말인가?

‘아니, 정확히 네 명이군.’

소지산은 진산월의 앞에 있는 유소응을 보면서 쓴웃음을 머금었다. 삼년 만에 불쑥 나타난 진산월이 자신의 제자라면서 유소응을 소개했을 때, 솔직히 소지산은 놀라움과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그동안 자기 앞가림하기도 벅차 있을 줄 알았던 진산월이 제자를 받아들였다는 것도 뜻밖이었지만, 그 제자의 행색과 모습이 너무도 초라하고 볼품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보아도 정통 중화인(中華人)이 아니라 다른 민족의 피가 섞인 혼혈(混血)임이 분명해 보였다. 두 눈에 특별한 총기가 번뜩이는 것도 아니었고, 신체 골격이 남보다 뛰어난 것 같지도 않았다. 왜소한 체구에 피부는 거칠었고, 영양실조에 걸린 듯 앙상하게 마른 몸에 말이 없는 소년, 얼굴의 여기저기에 나 있는 타박상은 고사하고라도 아무리 좋게 보아도 결코 무공을 익힐 만한 뛰어난 인재라고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진산월이 이런 소년의 무엇을 보고 제자로 삼았는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하나 그 점을 대놓고 진산월에게 물어 볼 수는 없었다.

‘장문사형에게도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겠지. 지금은 장문사형의 안목을 믿어 볼 수밖에……’

사실 소지산이 진짜 물어 보고 싶었던 것은 지난 삼년 동안 진산월이 어디에서 무엇을 했느냐는 것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연락 한번 하지 않고 있다가 이렇게 변해 버린 모습으로 나타났단 말인가? 마음속의 의혹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의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듯 처음 진산월의 품에서 흐느껴 울던 방취아는 눈물을 그치자마자 그를 붙잡고 쉴새없는 질문을 던졌었다. 하나 진산월은 단지 짤막하게 말했을 뿐이었다.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 일이 우리보다 중했나요? 문파의 존립보다 중한 것이었나요? 그동안 우리가 어떤 꼴을 당했을지 조금이라도 상상해 봤나요?”

그때 소지산이 눈짓을 하지 않았다면 방취아는 아마 이렇게 물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방취아도 차마 그런 말은 하지 못했고,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에 진산월에 대한 아무런 원망도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그녀는 아직도 종남파가 초가보의 공격으로 쑥밭이 되던 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몸서리쳐지는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끝 모를 슬픔을 잊지 않고 있었다. 사형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믿었던 소지산마저 외팔이 불구가 되어 필사(必死)의 탈출을 감행했을 때의 그 절박하고 비통한 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하나 그녀는 그에 대한 하소연을 단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마음이 바다처럼 넓어서는 결코 아니었다. 단지 그녀는 살집 좋았던 진산월의 해골처럼 마르고 초췌한 얼굴과 움푹 파인 두 눈가에 흐르는 우울하고 쓸쓸한 눈빛에 목이 메인 것뿐이었다. 그동안 대체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대체 무엇이 그를 이토록 괴이한 모습으로 바꾸어 놓은 것일까? 삼년은 물론 짧은 세월이 아니었지만, 한 사람이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장문사형도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들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더욱 힘든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종남파로 돌아올 수 없는 필연적인 곡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마음속으로 되뇌고 나서야 그에 대한 원망의 마음을 접을 수 있었다. 지금, 그녀는 진산월과 소지산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다가 갑자기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장문사형, 장문사형은 지금 본산을 되찾으려고 쳐들어가려는 생각이죠? 그렇죠?”

진산월은 두 뺨이 발갛게 상기된 채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방취아의 고운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담담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할 일이 있다.”

방취아는 초가보의 수중에 넘어갔던 종남파의 본산을 되찾는다는 말에 기뻐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먼저 할 일이라뇨?”

“초가보를 바쁘게 만들어야 돼. 그러지 않으면 본산을 되찾아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

“초가보를 바쁘게 만들다니요?”

“지금 당장 본산으로 가서 초가보의 고수들을 물리친다고 해도 다음에 초가보에서 진용을 갖추어 재차 쳐들어오면 계속 수세(守勢)에 있을 수밖에 없다. 수적으로 우리가 절대적으로 불리하기 때문이지.”

방취아는 눈을 반짝인 채 진산월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손뼉을 치며 재빨리 말했다.

“이제 알겠어요. 장문사형 말은 우리가 본산을 되찾아도 초가보가 다시 쳐들어 오지 못하도록 다른 일로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로군요?”

“바로 그렇다.”

방취아는 이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무슨 수로 초가보를 정신없도록 만들죠?”

소지산도 그 점이 궁금했던지 관심 어린 표정으로 진산월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나한테 한 가지 생각이 있다.”

“그게 뭐지요?”

“느긋하게 쉬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방취아의 얼굴에 한 줄기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겨우 생각한 것이 무작정 기다리는 거란 말이에요?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죠?”

진산월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하기만 했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길어야 열흘.”

“열흘이 지나면 무슨 뾰쪽한 수라도 생긴단 말이에요?”

“열흘 후면 달이 바뀌지.”

“그래서요?”

“그때가 되면 초가보는 정신없이 바빠질 것이다.”

방취아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그때 소지산이 불쑥 끼여들었다.

“장문사형께서 말씀하신 것은 혹시 다음달 초에 초가보에서 열린다는 강북삼보의 회동(會同)…”

그때 어슬렁거리며 후원 쪽으로 사라졌던 정산이 안색이 변해 뛰어들어왔다.

“자… 장문인, 조금 전의 그 여자가 이쪽으로 오지 않았습니까?”

“오지 않았네. 무슨 일인가?”

정산은 낭패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여자가 하도 나오지 않아서 후원 일대를 샅샅이 뒤져보았는데도 보이지 않더군요. 아마도 몰래 도망을 친 것 같습니다.”

“이 비싼 음식을 남겨 두고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가끔 무전취식(無錢取食)을 하는 자들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 여자는 멀쩡하게 생긴 데다 귀한 집에서 자란 것 같아서 안심을 했었는데…”

정산은 머리 속으로 음식값을 계산해 보고는 울상이 되었다. 사실 정산은 전신에서 은연중에 귀티가 흐르는 그녀가 명문세가의 자제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비싼 요리를 준비했던 것이다. 요즘같이 장사가 잘 안 되는 시절에는 거의 보름치 벌이가 날아가 버린 셈이다.

“에구… 그 여자가 나와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네요. 배가 고프면 그냥 밥 한끼만 먹고 가도 되는 일을…”

정산이 우거지상을 하고 있자 방취아가 키득거렸다.

“호호… 어쩐지 그 여우 같은 계집애가 눈알을 떼구르르 굴릴 때부터 수상쩍다 싶더니… 모르긴 해도 당신이 아니라 장문사형을 골탕먹이려고 한 짓일 거예요.”

이번에는 진산월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나는 그녀와 일면식(一面識)도 없는데…”

“낸들 그 여우의 속마음을 알겠어요? 하지만 아까 장문사형에게 접근했을 때부터 장문사형을 쳐다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어요. 아마 무언가 단단히 오해한 게 있든지 아니면 장문사형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장문사형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싶었던 거겠죠.”

진산월은 그저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방취아는 다시 까르르 웃더니 정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어차피 시킨 음식이니 우리가 계산할게요.”

정산은 황급히 도리질을 했다.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제가 두 분을 다시 만난 기념으로 대접해 드리는 것으로 하지요.”

“정 대접하고 싶으면 다음에 따로 정식으로 하세요. 아무튼 오늘 이건 내가 계산할 테니 군소리 마세요.”

방취아가 딱 부러지게 말하자 정산도 더 이상은 강요하지 못하고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헤헤… 방 소저는 뵐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성격이 시원시원하시군요. 존경스럽습니다.”

방취아는 샐쭉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낯간지러운 소리 하지 말고 술이나 몇 병 가져와요. 좋은 안주가 있는데 그냥 남겨 둘 순 없잖아요.”

“마침 십년 묵은 매화주(梅花酒)가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정산은 신이 나서 부리나케 주방 쪽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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