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9권 풍운기혜(風雲起兮)편 : 3화
제80장. 사찰참변(寺刹慘變)
서안에서 남쪽으로 이십 리쯤 가면 종남산 자락 아래 하나의 커다란 계곡이 나온다. 이곳은 태화곡(太和谷)이라고 하는데, 예로부터 천하의 절경으로 이름이 높아서 당(唐) 태종(太宗)이 이곳으로 자주 피서를 왔다고 한다.
사방이 온통 붉은 노을에 잠겨 있을 즈음,
석양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태화곡 안으로 들어서는 두 인영이 있었다. 그들은 각기 검고 푸른 장삼을 걸친 청년들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청년은 이십대 후반쯤 되었으며, 얼굴이 길쭉했고 눈빛이 아주 날카로웠다. 전신은 날씬하면서도 단단해서 마치 회초리처럼 민첩해 보였다.
짙은 남색 장삼을 걸친 청년은 그보다 대여섯 살쯤 어려서 막 이십대에 들어선 나이로 보였다. 전체적으로 준수한 인상이었으나, 얼굴에 붉은빛이 감돌고 두 눈이 부리부리해서 성격이 화급한 인상이었다.
두 사람 모두 허리춤에 장검을 차고 있었는데, 자세가 안정되고 걸음걸이가 날렵해서 상승검도(上乘劍道)를 익혔음이 분명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태호곡의 경내는 기암괴석과 계류(溪流)들로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비록 한겨울이라 물의 양이 그다지 많지 않았고 일부는 얼어 있기도 했으나, 눈 덮인 바위 사이로 흐르는 계곡 물은 수정(水晶)처럼 차고 깨끗했다.
두 사람은 제법 빠른 걸음으로 태화곡 안으로 계속 들어갔다. 얼마쯤 가니 완만하게 곡선을 이루며 휘어진 길의 끝 부분에 울긋불긋한 단청(丹靑)의 기와지붕이 살짝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자 두 사람의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단청의 기와지붕은 점차로 확대되어 이내 하나의 고색 창연한 사찰이 모습을 드러냈다. 절은 제법 규모가 컸으며, 크고 작은 몇 채의 전각이 주변의 산세와 너무도 잘 어울려 보였다.
낮은 담장 위로 보이는 전각들의 지붕은 형형색색으로 물들어 있었으며, 절의 뒤쪽으로는 수십 개의 석탑(石塔)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절의 입구로 다가가던 두 사람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춰졌다. 평상시라면 여기저기서 분주히 오갔을 중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던 흑의청년이 문득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피 냄새가 나는군.”
이어 그의 신형은 쏜살같이 허공을 날아 절 안으로 들어갔다. 남삼청년도 황급히 그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아!”
막 절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남삼청년은 짤막한 외침을 토하며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제법 넓은 공터 안에 몇 구의 시신이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 시신들은 모두가 가사(袈裟)를 입은 중들이었으며, 예리한 흉기에 당한 듯 하나같이 팔다리가 잘려 나간 참혹한 모습들이었다.
흑의청년은 벌써 공터를 가로질러 대웅전(大雄殿) 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남삼청년은 급히 주위의 전각들을 둘러보았다. 전각마다 적게는 서너 구에서 많게는 대여섯 구의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
남삼청년은 절 안에 살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흑의청년이 들어간 대웅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널찍한 대웅전 안은 은은한 피비린내가 감돌고 있었다. 남삼청년은 대웅전의 한복판에 흑의청년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황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흑의청년은 한곳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를 향해 무어라고 입을 열려던 남삼청년은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그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원래 대웅전의 중앙에는 거대한 세 개의 본존불(本尊佛)이 놓인 단(壇)이 있었는데, 지금 세 개의 본존불은 모두 파괴된 채 바닥에 이리저리 보기 흉하게 벌려져 있었다.
그들을 본 남삼청년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좌측에 앉아 있는 사람은 황색 가사를 입은 인자하게 생긴 노승(老僧)이었고, 우측에는 십여 세 가량 된 어린 소년이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푸른 학창의를 입고 머리가 눈부신 백발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대웅전 안은 비록 어둑어둑했지만, 남삼청년은 한눈에 그들이 모두 숨이 끊어진 시체임을 알아보았다. 흉수는 잔인하게 세 사람을 살해한 후 본존불상 대신 불단(佛壇)에 앉혀 놓았던 것이다.
흉수는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것일까? 그리고 세 구의 시신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남삼청년이 우두커니 세 구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흑의청년은 느릿느릿 몸을 움직여 세 구의 시신 앞으로 다가갔다.
사인(死因)은 쉽게 발견되었다. 세 구의 시신 모두 목덜미가 예리한 흉기에 잘려져 있었다. 인후혈(咽喉穴)만을 정교하게 잘라낸 그 솜씨는 가히 놀라운 것이었다.
흑의청년은 그 상흔을 살펴보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빙검(氷劍)의 일종(一種)을 썼군.”
빙검이란 강한 음기(陰氣)를 띤 신병이기(神兵異器)를 말하는 것이었다. 검 자체에 기이한 냉기(冷氣)를 담고 있어서 일단 스치기만 해도 그 기운이 혈맥을 타고 퍼져 나가 상대는 치명적인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세 구의 시체는 모두 목이 잘렸는데도 별다른 혈흔(血痕)이 보이지 않았다. 남삼청년은 밖에 널려 있는 시체들도 사지가 잘렸음에도 의외로 흘러내린 핏물은 아주 적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것은 흉수가 사용한 흉기가 강력한 냉기를 지닌 빙검이어서 검에 베인 상처 부위가 모두 얼어붙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냉기를 띤 신검(神劍)은 그리 흔치 않은데……”
흑의청년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남삼청년은 잠깐 머뭇거리다 물었다.
“이 시체들은 누구입니까?”
흑의청년은 좌측의 노승을 가리켰다.
“이분이 오늘 내가 만나려고 했던 이 절의 주지(住持) 스님이시다.”
“옆의 두 사람은 누굽니까? 보아하니 조손(祖孫) 사이 같은데……”
“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 노인은 소요검객(逍遙劍客) 사익(史翊)일 것이다.
이 아이는 그의 손자겠지.”
남삼청년의 몸이 한차례 움찔거렸다.
“사익이라면 화산파의 열 명의 장로 중 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렇다.”
남삼청년은 경악을 금치 못하는 모습이었다.
“화산파의 장로가 이런 곳에서 시체로 변해 있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는군요. 게다가 절 안의 승려 대부분은 무공도 모르는 자들 같았는데,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두 살해하다니 대체 누가 이런 잔혹한 짓을 했단 말입니까?”
흑의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누가 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무슨 이유 때문에 이런 짓을 했느냐는 것이다.”
“사익은 원한 관계에 있는 누군가가 한 게 아닐까요?”
“사익은 지난 십여 년 간 화산에서만 칩거(蟄居)한 채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게다가 평소에도 성격이 원만해서 누구와 원한을 맺을 인물이 아니다.”
남삼청년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화산에만 머물러 있던 사익이 왜 갑자기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을까요?”
“아마도 나름대로의 용무가 있었겠지. 어쩌면 나처럼 주지스님에게 무언가 부탁할 것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나저나 사태가 상당히 복잡하게 되었군.”
“그렇지요? 자파(自派)의 장로가 이곳에서 죽은 걸 알면 화산파가 벌컥 뒤집혀질 겁니다.”
“그게 아니다. 사익도 사익이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이어 그는 남삼청년이 묻기도 전에 좌측의 노승의 시신을 가리켰다.
“너는 이 절의 주지가 누구인 줄 아느냐? 그는 바로……”
바로 그때였다.
“이 흉적(凶賊)! 신성한 사찰에 와서 이런 참혹한 짓을 저지르다니……”
갑자기 여인의 찢어지는 듯한 고함 소리가 들려 옴과 동시에 무언가 차갑고 예리한 것이 두 사람의 뒷등을 향해 빠르게 날아들었다.
흑의청년과 남삼청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옆으로 비스듬히 몸을 날렸다.
팍! 팍!
방금 전만 해도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 두 개의 날카로운 비수가 틀어박혔다.
비수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손잡이를 제외한 날이 모두 바닥에 박힌 것으로 보아 그 안에 실린 역도(力道)를 짐작할 수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비수가 날아든 속도였다.
일반적인 경우, 고함을 지른 후에 비수를 날린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여인의 고함과 비수의 도착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비수가 날아든 속도가 가히 가공(可恐)스러웠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움직임이 조금만 늦었어도 꼬치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흑의청년은 두 눈에 신광(神光)을 번뜩이며 비수가 날아든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웅전의 입구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일남일녀(일남일녀)가 나란히 서 있었다.
남자는 청삼을 차려 입은 준수한 미남자였고, 여자는 한 떨기 꽃처럼 상큼한 미모를 자랑하는 십대 후반의 소녀였다.
비수를 던진 사람은 소녀가 분명했다.
소녀는 두 사람이 자신의 비수를 가볍게 피한 것에 놀랐는지 아름다운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두 사람을 쏘아보고 있었다.
흑의청년은 이미 소녀가 자신들을 오해하고 있음을 알아차렸기에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소저가 무언가 잘못 생각한 것 같군.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우리가 한 게 아니오.”
소녀는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냉랭하게 소리쳤다.
“홍! 현장에서 발각됐는데도 엉뚱한 소리를 하는군. 이 승려들은 모두 너희들이 허리에 차고 있는 그 검으로 살해한 게 아니란 말이냐?”
흑의청년은 그녀가 계속 자신들을 흉수로 몰자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무공을 모르는 사람을 향해 검을 뽑아 본 적이 없소. 이번 일은 소저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금만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오.”
소녀는 다름아닌 서문연상이었다.
그녀는 이존휘와 함께 태화곡 일대의 절경들을 감상하느라 취미사에는 예정보다 늦게 도착했는데,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던 취미사가 온통 피비린내 나는 학살(虐殺)의 현장으로 변해 있자 크게 놀람과 동시에 흉수에 대한 엄청난 분노를 느꼈다.
그러다 대웅전에서 인기척이 들려 오자 이곳으로 왔다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불문곡직하고 손을 썼던 것이다.
그녀도 지금은 자신이 너무 성급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흉수란 증거는 어디에도 없고, 자신들처럼 취미사를 찾아온 것일지도 모르는데 다짜고짜 살수(殺手)를 쓴 것은 확실히 경솔한 행동이었다.
하나 평소에도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그녀는 흑의청년의 훈계조 말에 불쑥 화가 솟구쳐 올라 쌀쌀맞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내가 마음을 가라앉히든 말든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죠? 괜히 어물쩍거리며 피하지 말고 바른 대로 말해요. 죽였어요, 안 죽였어요?”
그녀의 질문은 누가 보기에도 억지에 가까운 것이었다. 설사 흑의청년이 흉수라 해도 이런 상황에서 어찌 자신의 입으로 선뜻 시인을 하겠는가? 흑의청년은 더 이상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는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대신 옆에 있던 남삼청년이 인상을 찡그리며 앞으로 나섰다.
“소저는 괜히 애꿎은 사람을 의심하지 말고 돌아가시오. 기분 같아서는 우리에게 함부로 비수를 날린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지만, 이곳의 상황이 이러나 참는 거요.”
서문연상의 얼굴에 ‘오냐, 잘 걸렸다’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오라, 이제 보니 진짜 흉수는 여기 있었네. 당신이 뭔데 나에게 오라가라 하는 거예요?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으니까 우리를 내쫓으려 하는 거 아니에요?”
남삼청년의 얼굴에 험악한 표정이 떠올랐다. 흑의청년이 슬쩍 그의 소매를 붙잡지 않았다면 그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흑의청년은 그녀와 시비를 일으키고 싶은 생각이 없는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시신들의 상태를 보면 흉수가 이들을 살해한 것이 이미 몇 시진(時辰) 전의 일임을 알 수 있을 거요. 우리가 흉수라면 왜 지금까지 이곳에서 얼쩡거리고 있었겠소?”
서문연상이 듣고 보니 일리(一理)가 있는 말이었다. 확실히 시신들은 죽은 지 적어도 한두 시진은 족히 되어 보였다. 그녀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흑의청년은 그녀에게 가볍게 포권을 했다.
“다른 일이 없다면 우리는 이만 가 보겠소. 소저는 천천히 구경하다 가시오.”
두 사람이 휑하니 몸을 돌려 떠날 기색이자 그녀는 황급히 그들을 제지해 불렀다.
“멈춰요.”
흑의청년은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는 데 반해 남삼청년은 어깨가 한차례 크게 들썩거렸다. 막상 그들을 멈춰 세운 서문연상은 일시지간 할말이 없는지 머뭇거렸다. 그들을 그냥 보내기도 꺼림직하고 그렇다고 붙잡고 있자니 특별히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때 지금까지 그녀의 옆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이존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 이대로 떠나신다는 것은 조금 무책임한 처사 같군요.”
흑의청년의 칼날 같은 시선이 이존휘의 준수한 얼굴에 화살처럼 날아가 꽂혔다.
“그게 무슨 말이오?”
“불초도 이번 일은 두 분과 별다른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두 분은 이번 일의 최초의 목격자들이오. 그러니 싫든 좋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겠소?”
이존휘는 빙긋 미소지었다.
“일단 관가(官家)에 가서 두 분이 지금까지 본 일을 모두 그대로 고하고, 저 두 조손의 가족에게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오.”
흑의청년은 눈을 반짝 빛냈다.
“당신은 육선문(六扇門:관가)의 인물이오?”
“그렇지 않소. 단지 내 집안이 장안지부(長安知府)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뿐이오. 두 분이 관가로 가시겠다면 결코 불리한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약속 드리겠소.”
“장안지부라…… 당신의 성은 혹시 이씨(李氏)가 아니오?”
이존휘는 조용히 웃으며 포권을 했다.
“나는 이존휘라 하오.”
흑의청년은 이존휘의 이름을 듣고도 별로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이제 보니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만상공자이셨구려. 못 알아봐서 미안하오.”
“별말씀을, 그보다 나를 믿고 나를 따라 장안지부로 가주었으면 하오.”
“그건 곤란하오. 나는 관가와는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는 걸 원하지 않소. 게다가 이번 사건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 공자와 다를 바가 없소. 그러니 공연히 당신을 따라가 보았자 피차간에 서로 피곤한 일이 될 뿐이오.”
이존휘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자신이 신분까지 밝혔는데도 상대가 거절했으니 그로서는 체면이 손상되었다고 느낄 만도 했다. 이존휘의 얼굴에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지만, 음성에는 은근한 날카로움이 담겨 있었다.
“나로서는 두 분께 충분히 예의를 갖추었다고 생각하오. 이대로 두 분이 떠난다면 이번 사건은 자칫 영원한 미궁(迷宮)에 빠질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소?”
흑의청년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당신의 말은 우리가 흉수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내가 아는 거은 이곳에서 전대미문의 끔찍한 혈겁(혈겁0이 벌어졌고, 귀하들이 최초로 그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뿐이오. 다른 억측이나 상상은 하지 싶지 않소.”
“내가 따라가지 않겠다면?”
이존휘는 정색을 했다.
“그런 행동은 공연히 의심만 더할 뿐이오. 모쪼록 귀하들이 현명한 선택을 하기를 바라겠소.”
이번에는 흑의청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갑고 냉혹한 미소였다.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게 이씨가문의 방식인가? 마음에 드는군.”
그건 명백한 조롱의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이존휘의 얼굴 표정도 점차로 냉랭하게 변했다.
“굳이 권주(勸酒)를 마다하고 벌주(罰酒)를 마시겠다는 거요?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은 강권(强勸)하지 않겠소.”
삽시간에 주위는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 버렸다. 자존심 강하고 흥분 잘하는 서문연상과 참을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남삼청년은 뒷전에 서 있고, 오히려 침착하고 차분한 이존휘와 냉정한 태도를 지닌 흑의청년이 맞서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존휘는 뒷짐을 진 양손을 자연스레 늘어뜨린 채 흑의청년을 응시하고 있었다. 흑의청년 또한 검을 잡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한데 흑의청년의 자세를 본 이존휘의 표정이 조금씩 이상하게 변했다. 허술한 듯 보이는 흑의청년의 자세가 사실은 빈틈 없을 뿐 아니라 칼날같이 예리한 기운이 솟구쳐 나오고 있는 것이다.
‘만만한 인물이 아니로군. 이 정도 기도를 발출할 정도면 틀림없이 이름이 알려진 검수(劍手)일 텐데……’
이존휘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흑의청년의 인상착의와 비슷한 고수들을 헤아려 보았다.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하나 진짜 그인지를 확인할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이존휘는 슬쩍 앞으로 한걸음 내디뎠다. 순간 그의 피부에 예리한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흑의청년이 검에 손을 갖다 대지도 않았는데, 무형(無形)의 검기(劍氣)가 다가온 것이다. 이존휘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더 버티다가는 그 검기에 쓰러지든지, 아니면 출수(出手)를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존휘는 다시 한걸음 물러난 다음 양쪽 소매를 털었다. 대수롭지 않은 행동이었으나, 이번에는 흑의청년이 슬쩍 옆으로 한걸음 이동했다.
파아아…
흑의청년이 서 있던 자리를 한 줄기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이곳은 대웅전 안인데 난데없이 회오리바람이 불다니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하나 장내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무공에는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는 고수들이어서 어찌된 일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조금 전에 이존휘는 양쪽 소매를 떨치는 동작응로 무형의 암경(暗勁)을 두 가닥 발출했으며, 흑의청년이 피하는 바람에 그 두 개의 암경이 서로 부딪쳐 회오리를 형성했다가 소멸한 것이다. 흑의청년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가(李家)의 철선수(鐵旋袖)는 고요한 가운데 금강동인(金剛銅人)도 박살낸다고 하더니 과연 대단하군.”
이존휘는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과찬이시오. 오히려 귀하의 무형검기에 놀라 어설픈 솜씨를 보였으니 민망할 따름이오.”
이어 그는 은근한 음성으로 물었다.
“귀하는 혹시 한번 검을 뽑으면 반드시 피를 보고야 만다는 일검혈견휴(一劍血見休) 조일평(趙一平), 조 대협이 아니오?”
흑의청년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바로 조모요.”
그 말에 이번에는 서문연상이 해연히 놀랐다. 조일평은 요즘 섬서성에서 최고의 검객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인물로, 검을 귀신같이 잘 사용한다고 해서 마검(魔劍)으로까지 불리고 있었다. 검으로는 섬서성뿐 아니라 강북(江北) 전체를 통틀어도 능히 열 손가락 안에도 꼽힐 수 있을 거라는 것이 그를 아는 무림인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이존휘는 자신의 짐작대로 그가 마검 조일평임을 알게 되자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조 대협인 줄도 모르고 결례를 했으니 용서하시오.”
이존휜의 태도는 깍듯했고, 명문제자다운 진중함이 담겨 있었다. 조일평은 성격이 누구보다도 날카롭다고 소문난 인물이었다. 자신이 먼저 남에게 시비(是非)를 건 적은 없었지만, 남이 걸어온 시비는 그대로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지금도 그는 이존휘가 예의를 차리는 것을 알면서도 음서은 여전히 냉랭하기 그지 없었다.
“아직도 이 공자는 나를 관가로 데려갈 생각이오?”
이존휘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내게 그럴 담력이 있겠소? 조 대협의 명성과 신분으로 보아 허언(虛言)을 했을 리 없으니 이번 일은 이쯤에서 그치는 것이 좋겠소.”
“바라던 바요. 그럼 우리는 이만 가 보겠소.”
조일평은 다른 말은 하나도 하지 않고 이 말만을 한 후 남삼청년과 함께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그야말로 거칠 것 없고 망설임 없는 마검 조일평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남삼청년은 무언가 못마땅한 것이 많은지 서문연상과 이존휘를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고는 조일평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존휘의 두 눈에는 기이한 광채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때 서문연상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그의 귓전에 들려 왔다.
“아니, 이 공자는 왜 저자를 그냥 보내는 거에요? 저런 거만한 작자는 한번 따끔하게 혼구멍을 내줘야 하는데……”
이존휘는 그녀를 돌아보며 조용하게 웃었다.
“하하…… 조일평이라면 저 정도 위세를 떨 자격이 있지요. 아무튼 그의 말마따나 이번 일은 저자들과는 별 연관이 없는 게 확실하니 이 정도로 그만두는 것이 서로에게 이로울 것이오.”
“정말 저자들이 이번 사건과 관련이 없단 말이에요?”
“이곳의 승려들을 해친 자는 차가운 성질을 띤 신검(神劍)을 사용했소. 하나 내가 조금 전에 보니 조일평이 차고 있는 것은 평범한 청강검(靑剛劍)이었소. 그러니 그는 흉수가 아닐 거요.”
서문연상이 신기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흉수가 그런 병기를 사용했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이존휘는 시신들의 상처를 가리켰다.
“보시오. 상처 주위가 얼어붙어 있지 않소? 이미 죽은 지 적지 않은 시간이 경과했는데도 냉기가 사라지지 않은 것을 보면 흉수의 병기가 어떤 것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소.”
서문연상은 이존휘가 가리키는 곳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흉수가 이런 특이한 병기를 사용했다면 정체를 알아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겠군요.”
으외로 이존휘는 무거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사실은 그 반대요.”
“네?”
“내가 알기로 강호무림에서 이런 종류의 신검을 소지한 사람은 모두 세 명이 있소. 하지만 그들 중 이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 선뜻 떠오르지 않는구려.”
서문연상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급히 물었다.
“그들이 누군데요?”
“첫째는 형산파의 오결검객 중 하나인 냉홍검(冷虹劍) 고진(古震)이오. 그의 냉염신검(冷焰神劍)은 일 장 밖의 바위도 얼린다는 소문이 있소.”
“나도 그 사람의 이야기는 들었어요. 듣자하니 그는 형산의 제일봉(第一峰)인 축융봉(祝融峰) 정상 부근의 동굴에 기거하며 벌써 몇십 년째 검을 수련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는 평생을 형산에서 삼백 리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고 하니 그는 아닐 거예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둘째는 요즘 강북삼보의 하나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검보(劍堡)의 전대 보주(堡主)인 검왕(劍王) 서문동회(西門冬懷)요.”
그 말을 듣자 서문연상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의 음성이 자신도 모르게 가늘게 떨렸다.
“왜…… 왜 그분을 의심하는 거죠?”
그녀는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급히 말을 덧붙였다.
“내가 듣기로는 그분은 당대에 보기 힘든 협객(俠客)이라고 하던데……”
이존휘의 시선이 한순간 칼날처럼 예리해졌으나, 아내 다시 평상시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검왕 서문동회는 물론 나도 존경하는 무림의 대선배이시오. 단지 나는 일전에 그분이 신병이기(神兵異器)들을 수집하는 걸 광적(狂적)으로 좋아하셔서 무림의 온갖 기이한 병기들을 소장하고 계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소. 그중에서도 특히 열두 개의 신병(神兵)이 유명한데, 그 십이신병(十二神兵) 중 빙백검(氷魄劍)이라는 것이 있다고 알고 있소. 그 빙백검은 비단 금석(金石)을 무처럼 자를 뿐 아니라, 전신에 기이한 냉기가 뿜어나와 단순히 칼날에 스치기만 해도 웬만한 사람은 심맥(心脈)이 얼어붙어 숨이 끊어진다고 하오.”
서문연상의 얼굴에 여러 가지 복잡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존휘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아는지 모르는지 허공을 흥시하며 혼잣말처럼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분은 이미 십여 년 전에 보주의 지위를 아들인 서문장천(西門長天)에게 인계하고 은둔생활을 즐기고 계신다고 하는데…… 그런 분이 여기까지 와서 이런 혈겁을 저지를 리가 없지.”
서문연상은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이는지 재빨리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그분의 명성과 지위로 보아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지요. 틀림없이 세 번째 인물이 흉수일 거예요.”
이존휘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런데 세 번째 인물도 명성이나 지위로 보아 서문동회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결코 못하지 않은 인물이오.”
서문연상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가 누군데요?”
“그는 바로 당금 무림의 흑도제일고수(黑道第一高手)인 신목령주(神木令主)요.”
신목령주란 말에 서문연상은 짤막한 탄성을 터뜨렸다.
“아! 그도 신검을 가지고 있나요?”
“신목령주의 한목신검(寒木神劍)은 마도인(魔道人)들에게는 절대적인 권위의 상징일 뿐 아니라 무림최고의 신병 중 하나요. 신목령주가 한목신검을 휘두르면 반경 십 장 이내가 온통 얼음으로 뒤덮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요.”
서문연상은 놀란 눈을 크게 뜨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신목령주라면 확실히 검보의 전대 보주인 서문동회보다 명성이나 지위가 높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비단 마도의 최고고수일 뿐 아니라, 환우삼성(?宇三聖)을 제외하고는 당금 무림에서 가장 높은 배분을 지니고 있었다. 휘하의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말 한마디면 무림 전체가 뒤흔들릴 판이었다. 그러니 무엇이 아쉬워 이런 외진 곳까지 와서 은밀하게 혈겁(血劫)을 저지른단 말인가? 생각해 보니 이존휘의 말대로 세 사람 중 누구도 이런 혈겁을 저지를 만한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중에서도 한 사람은 전혀 그럴 리가 없지.’
서문연상은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굴리며 물었다.
“그들 외에 그런 신병을 지닌 사람은 없나요?”
이존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과문(寡聞)해서인지 더는 생각나는 사람이 없소. 하지만 강호는 워낙 넓고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니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그런 병기를 지니고 있을 수도 있을 거요.”
그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휙휙!
갑자기 대웅전 밖에서 두 개의 인영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서문연상은 그들이 조금 전에 떠나간 조일평과 남삼청년인 줄 알고 깜짝 놀라 소맷자락 속에 숨겨 둔 비수를 움켜쥐었다.
조일평이 다시 돌아와 덤벼드는 줄로 알았던 것이다. 하나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일남일녀였다.
‘대체 한겨울에 외진 절간에 무슨 사람들이 이렇게 계속 찾아오는 것일까?’
의아한 생각이 들어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은 얼굴이 곰보인 청의중년인과 늘씬한 남색 경장의 미녀였다.
그들은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더니 갑자기 본존불상의 불단 위에 놓인 세 구의 시신 앞으로 달려갔다.
“사백(師伯)님!”
두 남녀는 세 구의 시신 중 머리가 허연 노인의 시신 앞에 엎드려 비통한 외침을 토하는 것이었다.
한동안 노인의 시신을 끌어안고 슬퍼하던 두 남녀는 노인의 시신을 향해 삼배(三拜)를 한 후 이존휘와 서문연상을 향해 돌아섰다.
“네놈들이 본파의 사백을 죽이고 아직도 태연히 이 자리에 머물러 있다니 간덩이가 부은 놈들이구나!”
여인이 날카롭게 쏘아붙이며 장검을 뽑아 들었다.
창!
눈부신 검광(검광)이 주위를 어지럽히는 가운데 남색 경장의 여인은 금시라도 검을 휘두르며 그들에게 덤벼들 것만 같았다.
서문연상은 당혹스럽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기도 해서 일시지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다짜고짜 자신에게 추궁을 당한 조일평의 심정도 아마 이러했을 것이다.
“사매, 이들은 흉수가 아니다. 실례를 범하지 마라.”
청의중년인의 제자하자 남색 경장의 여인이 뾰쪽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사형,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시신들은 모두 기이한 검에 당했는데, 이들 중 누구도 검을 소지한 사람이 없다. 더구나 시신들의 상태로 보아 흉수는 적어도 두 시진 전에 이곳에 왔다 갔을 것이다.”
남색 경장의 여인이 머뭇거리다 검을 거두고 물러나자 청의중년인은 두 사람을 향해 포권을 했다.
“본인은 화산파의 일대제자인 천개방이라 하오. 두 분께 긴히 여쭐 말이 있으니 아는 대로 대답해 주셨으면 하오.”
느닷없이 나타난 일남일녀가 화산파의 일대제자라는 말에 서문연상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째 오늘 여기에 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림의 고수가 아닌 사람이 없을까?’
그녀보다는 한결 침착한 이존휘가 마주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이제 보니 요즘 화산파에서 떠오르는 신성(新星)으로 알려진 청평검객(淸平劍客) 천 대협이었군요. 그렇다면 옆에 계신 분은 남연(藍燕) 백수함, 백 소저이겠군요.”
이존휘가 천개방뿐 아니라 자신의 이름까지 알자 백수함의 얼굴이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나를 어떻게 알죠?”
이존휘는 준수한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떠올렸다.
“화산파의 용(龍)과 봉(鳳) 같은 두 분이 함께 활동하신다는 것은 적어도 장안 일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소. 두 분을 뵙게 되어 반갑소. 불초는 이존휘라 하오.”
확실히 사람은 이름이 나고 볼 일이었다.
이존휘의 신분을 알게 되자 천개방과 백수함의 눈빛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이 공자이셨구려. 몰라보고 결례를 하게 되어 죄송하오.”
“아니오. 그보다 저분 노선배께선 화산파의 존장(尊長)이셨다니 뜻밖이구려.”
이존휘가 노인의 시신을 가리키자 천개방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분은 본파의 장로이시며 예전에 소요검객이라는 명호로 활동하셨던 사익 사백이시오. 이곳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상상도 못했소.”
이존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이분이 가만히 있으면 흔들리는 한 줄기 바람이요, 일단 움직이면 한 마리 학(鶴)처럼 표홀하다는 소요검객 사 대협이시란 말이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군요.”
“원래 사백께서는 오랫동안 본파에서만 기거하셨던지라 이번에 잠시 바람을 쏘이기 위해 손자를 대동하고 산을 내려오신 거요. 이곳 취미사의 주지와는 평소 친분이 있어서 이쪽으로 걸음을 하신 모양인데 이런 참변을 당하셨으니…”
이존휘는 십여 년 간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소요검객이 모처럼 산을 내려온 것이 단순히 유람을 위해서는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그런 점은 추호도 내색하지 않고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셨군요. 우리도 조금 전에 이곳의 풍광(風光)을 구경하기 위해 왔다가 시신을 발견했소.”
“혹시 무언가 이상한 점이나 수상한 행적의 사람을 보지 못했소?”
“그런 점은 별로……”
이존휘가 고개를 저으려 할 때, 옆에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서문연상이 재빨리 끼여들었다.
“두 사람을 봤잖아요. 우리보다 먼저 와서 시체들을 뒤적거리고 있던……”
그 말에 천개방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런 자들이 있었소?”
이존휘는 서문연상을 한차례 쳐다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듯 말했다.
“우리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있기는 했었소. 하지만 그들은……”
천개방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들이 누구라도 상관없소. 흉수를 색출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지옥의 염라대왕이라도 만날 생각이니까. 그들에 대해 자세히 말해 주시오.”
이존휘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실 그들은 흉수가 아니라 단순히 우리보다 먼저 이곳에 온 향화객(香火客)인 것 같소. 그들 중 한 사람은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인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