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9권 풍운기혜(風雲起兮)편 :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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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9권 풍운기혜(風雲起兮)편 : 7화


제84장. 개방고수(?幇高手)

이존휘는 확실히 군계일학(群鷄一鶴) 같은 존재였다. 지금도 시장바닥처럼 소란스러운 주루의 한복판을 청삼 자락을 펄럭이며 유유히 걸어오는 그의 모습은 단연 돋보이는 것이었다. 서문연상은 취한 듯 홀린 듯 그의 그런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존휘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서문연상을 향해 다가오다가 그녀의 앞에 웬 꾀죄죄한 몰골에 키가 큰 괴인이 앉아 있는 것을 보자 눈살을 찌푸렸다. 하나 이내 다시 미소지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늦어서 미안하오. 오래 기다렸소?”

서문연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방금 왔어요. 어서 앉으세요.”

이존휘의 시선이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이분은?”

진산월은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지 호기심이 일어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서문연상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빈자리가 없어서 합석한 거예요.”

“그랬구려. 실례하겠소.”

이존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때 마침 점소이가 낑낑거리며 그녀가 주문한 음식들을 가지고 왔다. 이존휘는 넓은 탁자가 접시들로 뒤덮이는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서문연상을 쳐다보았다.

“이걸 다 소저가 시킨 거요?”

“이분이 합석을 승낙해 주신 것에 보답도 할 겸해서 조금 넉넉히 시켰어요.”

그녀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이존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빙긋 웃었다.

“나는 하마터면 날씬한 선 소저가 이 많은 음식을 어떻게 먹어치우려는지 걱정할 뻔했구려.”

“이 공자도 농담을 하는군요. 이 공자께선 무조건 절반 이상 드셔야 해요.”

이존휘는 다시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형장도 드시지요.”

진산월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앞에 놓인 소채를 가리켰다.

“나는 이것으로 충분하오.”

서문연상이 날카로운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궁상 떨지 말고 빨리 들어요. 나중에 괜히 후회할 거면서……”

진산월은 그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음식은 서문연상이 주문한 대로 맵지도 짜지도 않았고, 기름기도 없었으며, 시거나 달지도 않았다. 당연히 싱겁고 심심한 맛일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군. 예전하고는 맛이 틀려진 것 같은데, 주방장이 바뀌었나?”

이존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서문연상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특별히 주문한 거예요. 어려서부터 자극적인 음식을 피하고 위에 부담을 주지 않는 것들만 먹었거든요.”

“그랬구려. 음식에조차 그토록 신경을 쓰다니 소저의 집안도 가풍(家風)이 몹시 엄격하겠구려.”

“그 정도는 아닌데, 너무 맵고 짜거나 기름진 음식은 무공을 익히는 사람들 에게는 좋지 않다는 게 할아버지의 지론(持論)이라서 어쩔 수 없었어요.”

이존휘는 감탄성을 발했다.

“아, 무인(武人)으로서 정말 존경할 만한 분이구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소저의 조부님 성함을 알 수 있겠소?”

“할아버지는 그저 가전무공(家傳武功)만을 익혔을 뿐, 무림에 명성을 날리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분이어서 말해도 이 공자는 모르실 거예요.”

그녀는 이존휘가 계속 물어 보면 어쩌나 속으로 은근히 걱정했으나, 다행히도 이존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열심히 요리를 먹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이것도 계속 먹으니 나름대로의 맛이 있군. 앞으로는 나도 가급적이면 소저의 조부님의 방식을 따라야겠소.”

“호호…… 그러세요.”

그때 다시 주루 위로 몇 사람이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세 사람이었는데, 하나같이 검은 색 피풍의를 입고 머리에는 죽립을 눌러쓰고 있었다. 비록 겨울이라고 해도 요즘의 날씨는 그답지 춥지 않아서 이들처럼 발목까지 오는 피풍의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사람들은 죽립인들의 특이한 모습에 잠시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기도 했으나, 이내 관심을 끊고 식사에 열중했다. 하나 그들 중 한 사람만은 죽립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존휘는 식사를 하다 말고 서문연상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자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요리가 입맛에 맞지 않소?”

서문연상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도리질을 했다.

“아…… 아니에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녀는 얼굴이 붉게 상기되더니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이존휘는 이상함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별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 세 명의 죽립인은 일층에서 빈자리를 찾지 못하고 막 이층의 계단 위로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로 서문연상은 갑자기 식욕이 떨어졌는지 식사하는 모습이 영 시원치 않더니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음식이 많이 남았는데 벌써 그만 먹는 거요?”

“많이 먹었어요. 평소에도 이 정도밖에는 먹지 않아요.”

그녀는 자리에 더 머물러 있는 것이 불편한지 어서 일어났으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존휘는 그녀가 왜 갑자기 그러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으나 더 있기도 어색해서 이내 식사를 마쳤다.

“차(茶)는 이곳에서 마시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소? 내가 아주 괜찮은 다관(茶館)을 알고 있는데……”

서문연상은 반색을 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에요. 그렇지 않아도 좋은 차를 마시고 싶었어요. 어서 가요.”

그녀가 당장이라도 일어설 듯 하자 이존휘는 조용하게 웃었다.

“너무 서두르지 마시오. 가기 전에 이곳에서 잠깐 해야 할 일이 있소.”

“그게 무언데요?”

“누굴 만나기로 했는데…… 아! 마침 저기 오는군.”

서문연상이 이존휘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막 주루 위로 한 사람이 올라오고 있었다. 한데 올라온 사람을 본 서문연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그는 머리가 봉두난발(蓬頭亂髮)인 중년의 거지였던 것이다. 그 중년의 거지는 여기저기를 덕지덕지 꿰맨 낡은 장포를 입고 이마와 허리에는 누런 새끼줄을 동여매고 있었다. 얼굴에는 땟국물이 자르르 흘렀는데, 그래도 손에 들고 있는 죽장(竹杖)은 제법 반질반질해 보였다. 대왕루는 비록 출입이 까다롭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거렁뱅이는 입구에서부터 철저히 통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중년의 거지는 전혀 거리낌없이 주루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이상한 것은 그가 들어오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점소이들이 누구 하나 나서서 그를 제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중년의 거지를 힐끔거리며 그의 곁으로는 다가서지 않고 은근히 피하는 듯한 모습마저 보였다. 중년의 거지는 주루 안으로 들어오더니 마치 이존휘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듯 곧장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이존휘의 앞에 있는 빈자리로 가서 털썩 앉더니 아무 말도 없이 탁자 위에 놓인 음식들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젓가락은 사용하지도 않고 때가 꼬질꼬질한 손가락으로 이것저것을 마구 집어먹는 것이었다. 서문연상은 그저 아연한 표정으로 중년거지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순식간에 탁자 위에는 빈 접시만이 수북이 쌓이게 되었다. 중년거지는 정신없이 음식들을 몽땅 먹어치우더니 목이 메이는지 진산월이 마시다 만 술병을 들고는 허락도 받지 않고 제멋대로 벌컥벌컥 마셨다. 술병은 금세 동이 났다.

“꺼억……!”

요란한 소리를 내며 트림을 한 중년거지는 그제서야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땟국물이 자르르 흐르는 소맷자락으로 음식 찌꺼기가 묻은 입을 쓰윽 닦았다.

“음식이 오늘따라 좀 싱겁긴 하지만, 한끼를 채우기에는 충분하군.”

그는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서문연상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이존휘를 바라보며 주절거렸다.

“이 공자, 덕분에 잘 먹었소. 앞으로 이런 일이 있으면 자주 불러 주시구려.”

이존휘는 중년거지의 평소 습성을 잘 알고 있는지 별로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오늘은 당신이 잘못 생각했소. 이 음식들은 내가 산 것이 아니라 이분 소저가 주문한 것들이오.”

“엥? 그런가?”

중년거지는 서문연상을 돌아보더니 대문짝만한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덕분에 잘 먹었소, 소저. 종종 신세 좀 집시다.”

아미(娥眉)를 치켜세우며 그를 쏘아보고 있던 서문연상이 냉랭한 코웃음을 날렸다.

“흥, 개방(?幇)이라는 이름만을 믿고 너무 천방지축으로 날뛰는군요. 내가 그렇게 함부로 농(弄)을 걸 수 있는 상대로 보여요?”

중년거지는 한 방 맞은 듯한 모습이 되었다.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씻은 듯이 사라지며 제법 진지한 표정이 떠올랐다.

“소저는 어떻게 내가 개방의 사람인 줄 알았소?”

“내가 바보인 줄 아세요? 죽장을 들고 허리에 매듭을 묶은 거지가 개방 밖에 더 있어요? 당신 허리의 매듭이 세 가닥인 걸 보니 삼결(三結)이란 소린데, 그러면 분타주(分舵主)쯤 되나요?”

중년거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맥빠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거 오늘 완전히 부처님 손바닥의 손행자(孫行者)가 된 기분이군. 소저의 말이 맞소. 내가 바로 장안을 맡고 있는 소가(簫家)요.”

막상 중년의 거지가 선뜻 시인을 하지 서문연상은 내심 깜짝 놀랐다.

장안은 예로부터의 고도(古道)로, 경제와 교통의 중심이었다. 개방에서도 당연히 장안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대로 장안분타주는 개방의 삼결제자 중에서도 손꼽히는 인물들로 선임되었다. 현재의 장안분타주는 나타개(懶惰?) 소방방(簫放放)이었는데, 그는 비록 게으르고 지나치게 술을 좋아하는 단점이 있기는 했으나 누구보다도 유능하기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그녀는 주루의 점소이들이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과 그가 몸에 의결(衣結)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보고 대충 넘겨짚은 것인데, 막상 말은 해놓고도 그가 개방의 장안분타주인 소방방 본인이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소방방은 소방방대로 자신의 정체를 한눈에 파악한 눈앞의 미소녀에 대한 흥미가 이는지 지금까지와는 다른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찬찬히 훑어보고 있었다.

‘전형적인 명문세가에서 태어난 아가씨로군. 다른 부분에 비해 소맷자락이 넓은 옷을 입은 것이 특이한데, 수리검(袖裡劍) 종류를 익힌 것 같구나.’

소방방의 예측은 상당히 정확한 것이었다.
그녀의 소맷자락 속에 가려진 팔뚝에는 수리검은 아니지만 작고 날카로운 비수가 양쪽으로 여덟 개씩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소방방은 그녀에 대한 관찰을 마치고 다시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소저의 방명(芳名)을 알려 달라고 하면 틀림없이 안 된다고 할 테니 그건 생략하고 대신 저분이 누구인지 물어 봐도 되겠소?”

소방방이 가리킨 것은 뜻밖에도 한쪽에 묵묵히 앉아 있던 진산월이었다.
서문연상은 쌀쌀맞은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나도 몰라요.”

솔직히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으나, 소방방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이번에는 이존휘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이분 아가씨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것 같은데 이 공자께서 말씀해 주셔야겠소.”

이존휘는 힐끔 진산월을 돌아보더니 이내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궁금하면 왜 본인에게 직접 물어 보지 않는 거요?”

소방방은 비듬투성이인 자신의 머리를 툭 쳤다.

“내 정신 좀 보게. 그런 방법이 있었지.”

소방방은 싱겁게 웃으며 이번에는 진산월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가 귀하에게 귀하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대답해 주겠소?”

참으로 엉뚱한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서문연상은 그가 왜 이렇게 쓸데없는 질문을 하나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하나 이존휘는 그보다는 소방방이 왜 이 앙상하게 마르고 키만 커다란 괴인에게 이토록 관심을 갖는지가 더 궁금했다.
진산월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싫소.”

매정하기 이를 데 없는 대답이었으나, 소방방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며칠 전에 유화상단에 들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해 주겠소?”

진산월은 한동안 묵묵히 앉아 있더니 담담한 시선으로 소방방을 마주보았다.

“당신이 어떻게 그런 일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런 적이 있는 것 같군.”

소방방은 그 시선을 받자 무언지 모를 섬뜩함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나 이내 그런 마음을 떨쳐버리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별로 대단한 건 아니오. 장안에 벌어지는 모든 일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내 귀에 들어오게 되어 있소. 귀하의 행색이 너무 특이해서 분간하기 수월했을
뿐이오.”

“내게 볼일이 있어 온 건 아닐 텐데……”

“물론이오. 이건 그저 단순히 개인적인 호기심이었소.”

진산월의 음성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렇다면 그 호기심을 이제는 그만 거두어 달라고 말하고 싶군.”

소방방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귀하가 불편하다면 그렇게 하겠소. 나는 단지 화산파의 신성인 천개방을 단 일검에 격파시킨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을 뿐이오.”

소방방의 말에 서문연상은 물론이고 이존휘마저 흠칫 놀란 시선으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천개방은 최근 들어 화산파에서 배출한 신진고수들 중에서는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로, 적지 않은 명성을 쌓고 있었다.
그런 천개방이 이름도 모르는 괴인에게 패했다는 것도 처음 듣는 이야기
이거니와, 그 승부가 단 일초에 불과했다는 것은 더욱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이 말이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면 별로 신빙성이 없겠지만, 강호의 거대방파인 개방의 장안분타주의 말이라면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소방방은 볼품없고 추레한 외모와는 달리 허언(虛言)이니 식언(食言)을 잘 하지 않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서문연상은 도저히 참지 못하겠는지 진산월에게로 얼굴을 바짝 다가가며 뾰족한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도 무공을 익힌 무림인인 줄은 몰랐군요. 왜 나를 속였어요?”

“내가 무얼 속였다는 거요?”

진산월이 반문하자 서문연상은 말문이 막힌 듯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사실을 말하면 그녀는 눈앞의 이 비리비리하고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 같은 말라깽이가 정말로 돈 없고 불상한 가난뱅이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화산파의 고수를 일검에 제압할 정도의 고수라고 하자 왠지 모르게 속았다는 느낌과 배신당한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건 모두 그녀 혼자 제멋대로 상상한 결과이니 진산월이 일부러 그녀를 속인 것은 아니었어도 그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내 볼멘 표정으로 퉁퉁거렸다.

“아무튼 당신은 나빠요. 그렇게 불쌍한 표정을 짓고 가만히 있으니 오해할 수밖에 없잖아요. 앞으로 고수면 고수답게 행동하세요.”

진산월은 그녀의 충고(忠告) 아닌 충고에 그저 묵묵부답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불쑥 손을 내밀었다.

“오른손을 줘 보세요.”

“그건 왜 그렇소?”

“잡아먹지 않을 테니 달라면 빨리 주세요.”

진산월은 제멋대로에 막무가내인 이 아기씨와 정말 다투기 싫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어야만 했다.

“사내가 소심(소심)하기는, 손만 잠깐 살펴보고 말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녀는 태연히 진산월의 오른손을 잡고는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아무리 그녀가 무림의 여인이라고 해도, 젊은 여자가 남자의 손을 떡 주무르듯 주물럭거리는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손을 잡힌 진산월은 말할 것도 없고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존휘와 소방방 또한 어이가 없는지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진산월의 손은 다른 사람보다 조금 컸다. 하나 워낙 살점이 없어서 뼈와 신경으로만 이루어진 것 같았다. 마디는 두툼했으며, 손가락이 워낙 가늘어서 세게 누르면 부러져 나갈 것만 같았다. 손바닥 또한 별다른 살이 없었다. 단지 쇳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은 손바닥에 종횡(縱橫)으로 수십 개의 선이 그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모두 손바닥이 갈라 터졌다가 다시 이어진 자국들이었다. 그 선들가 손바닥의 굳은 살들이 이리저리 일그러져 마치 귀신(鬼神)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했다. 평소의 모습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진산월의 손바닥을 살펴보고 있던 서문연상의 얼굴이 점차로 심각하게 변했다. 하나 그녀는 이내 진산월의 손을 놓아주었다.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내 손금이 어떻소? 말년 운(運)은 있을 것 같소?”

“내가 손금쟁이인 줄 알아요?”

그녀는 쌀쌀맞게 쏘아붙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표정이 경직되어 있었다. 그녀는 한차례 더 진산월을 쳐다보고는 아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진산월로서는 그저 쓴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기껏 사람의 손을 보자고 해놓고는 실컷 주무르더니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도 없는 것이다. 아무리 귀하게 자라서 제멋대로라고 해도 너무 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존휘와 소방방도 그녀가 지나치다고 생각했으나, 당사자인 진산월이 가만히 있으니 무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존휘는 진산월에게서 소방방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되었소?”

소방방은 히죽 웃었다.

“이 공자의 특별한 부탁인데 소홀히 할 수 있겠소? 단지 사안(事案)이 사안인지라 완벽하게 조사하려면 앞으로도 이삼 일은 더 소요될 듯 싶소.”

“우선 지금까지 알아낸 사실만이라도 먼저 알려 주시오.”

“그러겠소. 우선 형산파의 냉홍검 고진에 대해서는 호남성 장사분타주(長沙 분舵主)에게 연락을 해서 지난 몇 달 간 그의 행적을 알아보라고 했소. 내일 밤이나 늦어도 모레 아침이면 아마 자세한 소식이 올 거요.”

이존휘는 감탄성을 발했다.

“이곳에서 형산까지는 오천 리가 넘는데 하룻밤 사이에 소식을 주고받다니 과연 개방의 천리신합(千里迅?)은 명불허전이구려.”

한쪽에서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서문연상이 갑자기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이 공자는 어재의 취미사 혈겁을 조사하려는 거군요.”

“그렇소. 내가 현장을 목격한 이상 그대로 지나칠 수 없지 않겠소? 그래서 어제 저녁에 바로 소 분타주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소.”

서문연상의 얼굴에 초조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단순히 흉수가 한기(寒氣)가 강한 신검을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의심할 수는 없지 않아요.”

“물론 그렇소. 그러나 지금으러썬 그쪽밖에 단서가 없으니 아쉬운 대로 조사를 시작한 거요.”

서문연상은 웬일인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강호의 이름난 명숙(名宿)들이고 신분이 높은 인물들인데, 나중에라도 자신들이 조사 받았다는 것을 알면 문제가 생길지도 몰라요.”

“그 정도는 그들도 이해해 줄 거요. 오히려 그들로서는 쓸데없는 의혹을 받지 않을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겠소?”

서문연상은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얼굴 표정은 그리 밝아지지 않았다. 소방방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소.”

“그건 무슨 말이오?”

“어제 이 공자가 조사하라고 한 세 사람 중 고진과 신목령주는 너무 멀리 있어서 당장 그들에 대한 정보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소. 하지만 또 한 사람은 그런대로 가까운 곳에 있어서 밤사이에 본 방의 제자들을 풀어 나름대로 약간의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소.”

이존휘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런데 그에게서 무슨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는 말이오?”

소방방의 음성이 한층 낮게 가라앉았다.

“어젯밤에 소식을 받았는데, 검보의 전대 보주인 검왕 서문동회가 기거하는 검심각(劍心閣)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었다고 하오.”

“그게 무슨 말이오?”

“며칠 전부터 검심각에 서문동회의 부하들인 해천팔검(海天八劍)이 부산하게 들락거리더니 그들 중 세 사람이 황급히 검심각을 떠났다고 하오.”

“해천팔검이라면 서문동회가 아들인 서문장천에게 보주 지위를 넘져주고 검심각에 은거할 때 같이 따라갔던 그의 최측근 수하들이 아니오?”

“그렇소. 더욱 중요한 것은 검심각을 떠난 세 사람이 이곳 장안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거요.”

이존휘의 짙은 검미(劍眉)가 꿈틀거렸다.

“그게 정말이오?”

“내가 오늘 아침에 직접 확인한 사실이오. 그들은 어젯밤에 평안객잔에 들러 투숙을 하고는 이른 새벽에 그곳을 빠져 나왔다고 하오.”

이존휘는 손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흠, 그건 과연 이상하군. 해천팔검은 서문동회의 수족(手足)과도 같은 인물들이라 그의 지시가 없이는 검심각 주위에서 절대로 벗어나는 일이 없다고 하는데, 그들이 무슨 이유로 장안에 나타난 것일까?”

소방방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나도 그들이 이곳에 나타난 시기가 무척 공교롭다고 생각하오. 이 공자도 아시다시피 서문동회는 검보를 아들인 서문장천에게 넘겨준 후 강호의 일에 전혀 관여치 않은 지 오래되었소. 이번에 초가보에서 벌어지는 삼보회동(三堡會同)에도 그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하던데, 왜 갑자기 해천팔검을 세 사람이나 이곳으로 보냈는지 모르겠소.”

두 사람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한쪽에 있던 서문연상은 낯빛이 이상하리만치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하나 두 사람은 이야기에 열중이라 그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직 진산월만이 냉정한 시선으로 그녀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존휘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조금 전보다 한결 침착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언젠가는 밖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소.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조만간에 밝혀질 테니 그 전에 우리가 먼저 성급하게 속단할 필요는 없소.”

“그렇다면 화산파에는 아직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이 좋겠소?”

“그렇다고 생각하오. 지금 화산파의 사람들이 너무 격앙되어 있어서 자칫 하다간 불필요한 오해를 살 여지가 있소. 좀더 해천팔검의 행적을 파악한 후에 미심쩍은 일이 생기면 그때 알려도 늦지 않을 거요.”

“이 공자의 말씀이 옳소. 그렇게 하겠소.”

이존휘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소 분타주의 노고가 많소. 일이 모두 해결되면 내가 반드시 장안분타의 모든 사람들에게 단단히 한턱을 내겠소.”

소방방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흐흐…… 이 공자가 아직 우리들이 얼마나 걸귀(乞鬼)들인지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요. 이 공자의 말대로 했다가는 이씨가문이 아무리 부유하다 해도 기둥뿌리도 남아나지 않을거요.”

“하하…… 진짜 그렇게 되는지 한번 봅시다.”

소방방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소.”

그는 진산월과 서문연상을 둘러보더니 가볍게 포권을 했다.

“두 분도 다음에 뵙기를 기대하겠소.”

이어 그는 휑하니 몸을 돌려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표정은 각기 달랐다. 이존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이었고, 서문연상은 초조함과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얼굴이었다. 진산월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 이상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그에게 어떤 희미한 불안감을 주었다. 그의 불안한 생각은 그대로 적중되었다. 주루를 벗어나던 소방방은 채 대왕루 밖으로 열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맥없이 쓰러져 버렸다. 주위 사람들이 황급히 그에게 다가갔을 때는 그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개방의 촉망받는 고수 중 한 사람이며 장안분타주이기도 한 나타개 소방방은 이렇게 하여 파란만장한 생(生)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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