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9권 풍운기혜(風雲起兮)편 : 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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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9권 풍운기혜(風雲起兮)편 : 9화


제86장. 해천팔검(海天八劍)

이른 아침의 공기는 언제나 신선하다. 겨울의 아침은 더욱 그러하다. 진산월은 코끝이 시릴 정도로 차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천천히 취미사의 산문 안으로 들어갔다. 태화곡은 종남산의 끝자락에 있기는 했으나, 그 지세가 움푹 파인 분지(盆地)에 가까워 안개가 끼인 날이 많았다. 태화곡뿐 아니라 종남산 일대는 유독 안개가 자주 끼었다. 특히 겨울철에는 수시로 안개가 껴서 자욱한 연무(煙霧)가 일대를 뒤덮기 일쑤였다. 관중팔경(關中八景) 중의 하나인 ‘초당연무(草堂煙霧)’ 도 바로 이런 기후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종남산에서도 특히 초당사(草堂寺) 부근이 연기처럼 자욱이 피어오르는 연무로 인해 절경을 이루고 있기에 이런 명칭이 붙게 된 것이다. 지금도 희미한 안개가 취미사의 울긋불긋한 단청 지붕을 거의 가리고 있었다.

사각…… 사각……

겨울인데도 지열(地熱) 때문인지 땅이 얼지 않아서 낙엽을 밟는 촉감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취미사 안으로 들어오자 안개가 조금씩 걷히며 대웅전을 비롯한 전각들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진산월은 신발이 이끼에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취미사 안을 여기저기 걸어다녔다. 소문으로 듣던 시체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누군가가 깨끗이 수습해 간 모양이었다. 하나 시체들이 흘린 핏자국은 간간이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 많은 선혈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사람이 쓰러져 있던 흔적 옆에 나 있는 핏자국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섬뜩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었다. 진산월은 취미사의 경내를 한바퀴 둘러보고는 이어서 대웅전으로 들어섰다. 대웅전 안도 마찬가지로 텅 비어 있었다. 하나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의당 불단 위에 있어야 할 불상들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려져 있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 불단 위에도 엷으나마 핏자국이 있었다. 진산월은 그 핏자국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곳이 굉지선사와 사익의 시체를 올려놓았던 자리인 모양이군.’

일부러 대웅전의 불상을 치우고 그 자리에 시체를 올려놓다니, 흉수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무척이나 혐오스럽고 엽기적인 것은 사실이었다.

진산월이 이른 아침에 취미사에 온 것은 며칠 전에 벌어졌다는 혈겁에 대해 나름대로의 조사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건이 벌어진 지는 이틀이나 지났고,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샅샅이 훑어보았겠지만, 그래도 소문으로만 듣는 것과 직접 와서 보는 것은 아무래도 틀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진산월은 지금처럼 직접 현장에 나와서 맡는 공기를 좋아했다. 어제 서문연상에게서 대충의 이야기를 듣기는 했으나, 막상 불단에 시신들이 놓여져 있다고 생각하자 처음 그 장면을 발견한 사람들이 얼마나 당혹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진산월은 불단 위에 올라가서 시체가 놓여 있던 자리에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불단의 높이는 보통 사람의 허리쯤 되었기에 그다지 높지는 않았으나, 막상 올라가서 앉아 있으니 주위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그리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흉수는 여기서 굉지선사와 사익을 죽인 것일까? 아니면 다른 곳에서 살해하고 이곳으로 끌고 온 것일까?’

해답은 쉽게 나왔다.

‘다른 곳에서 살해하고 시체를 이곳으로 가져온 것이 분명하다.’

사익은 화산파의 장로일 뿐 아니라, 강호무림에서도 내로라 하는 절정의 검객(劍客)이었다. 대웅전에서 그가 살해되었다면 틀림없이 격전의 흔적이 남아 있을 텐데, 불상이 파괴된 것 외에는 대웅전은 전혀 손상된 곳이 없었다. 게다가 불단 주위에 발자국이 전혀 없다는 것도 이들이 처음부터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님을 나타내 주는 생생한 증거였다. 그렇다면 과연 사익과 굉지는 어디에서 살해된 것일까? 그리고 흉수는 왜 그들의 시체를 일부러 대웅전까지 끌고 오는 번거로운 일을 했던 것일까? 진산월이 불단 위에 앉은 채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였다.

“과연 당신은 이곳에 왔군요.”

갑자기 여인의 뾰쪽한 음성이 들려 왔다. 고개를 쳐든 진산월의 눈에 대웅전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한 인영의 모습이 보였다. 뜻밖에도 그 인연은 서문연상이었다. 서문연상은 날카로운 눈으로 진산월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역시 옛날 속담이 틀린 게 없군요. 살인자는 반드시 자신이 살인을 저지른 장소를 다시 보고 싶어한다더니……”

진산월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당신이 취미사의 혈겁을 저지른 흉수임을 부인할 생각인가요?”

이런 말을 들었다면 누구나 황당하든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겠지만 진산월은 별반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서문연상의 얼굴은 평소와는 달리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당신을 잘못 보았어요. 나는 당신이 그저 단순한 가난뱅이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무서운 실력을 지닌 검수(劍手)였어요.”

“……”

“우리 집안은 대대로 검만 익혀 온 곳이라 나는 검을 익힌 사람들을 무수히 보면서 자랐어요. 그래서 손만 보아도 그 사람의 검법이 어느 수준인지 알 수 있죠. 하지만 우리 집안의 누구도 당신 같은 손을 가진 사람은 없었어요. 당신의 손은 상상을 초월하는 극한(極限)의 수련을 한 사람에게서만 나타난다는 귀면상(鬼面像)을 지니고 있었어요. 아직 우리 할아버지도 가지고 있지 못하는 귀면상을……”

“그래서 나를 의심하는 거요?”

“놀라운 검법을 지닌 고수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다면 의심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흉수는 단 일검으로 사익의 목줄기를 베었어요. 그런 실력을 지닌 검수는 결코 흔하지 않아요.”

그녀의 언성이 갑자기 높아졌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정체가 뭐예요?”

진산월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뜩이나 키가 큰 그가 불단에서 일어서자 마치 거대한 천신상(天神像)이 일어서는것 같았다. 서문연상의 얼굴에 두려운 빛이 떠오르며 그녀의 몸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진산월은 천천히 불단에서 내려왔다. 그런 다음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를 지나쳐 대웅전을 벗어나려 했다.

휙!

한 줄기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그녀가 그의 앞을 막아 섰다.

“말해 봐요, 당신의 정체가 뭐예요?”

“그냥 평범한 과객(過客)이오.”

“왜 이곳에 온 거죠?”

“산책을 나온 거요.”

“왜 이렇게 이른 아침에 이곳에서 서성이고 있었어요?”

“아침 공기를 좋아하니까.”

“불다넹 앉아서 무얼 하고 있었지요?”

“그곳에 앉으면 멀리까지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자꾸 이런 식으로 말장난을 할 건가요?”

진산월의 왼쪽 뺨에 나 있는 굵은 흉터가 꿈틀거리며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왠지 차가워 보이는 미소였으나 서문연상은 그 미소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말장난은 당신이 먼저 시작했지.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그저 와 보고 싶었기 때문이오.”

이 말을 끝으로 진산월은 그녀를 지나쳐 대웅전을 벗어났다. 웬일인지 이번에는 그녀도 그의 앞을 가로막지 않았다. 대신 그의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진산월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는 대웅전을 나와 취미사의 다른 건물들을 이리저리 돌아보았다. 그동안에도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서문연상 또한 입을 굳게 다문 채 그가 가는 곳마다 계속 따라다녔다. 진산월의 발길이 머문 곳은 대웅전의 뒤에 있는 작고 아담한 선실(禪室)이었다. 그 선실에는 흔한 현판 하나 걸려 있지 않았으나, 진산월은 직감적으로 그 선실이 굉지선사의 방임을 알아차렸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은은한 단향(檀香)이 코를 찔렀다. 그다지 넓지 않은 방은 사방의 면벽이 불경(佛經)으로 뒤덮여 있었고, 한쪽에 작은 침상과 서탁(書卓)만이 동그마니 놓여져 있었다. 서탁 주위에는 세 개의 의자가 있었는데, 그 의자들을 서탁에서 조금씩 떨어진 채로 불규칙하게 흩어져 있었다. 서탁 위에는 세 개의 찻잔과 하나의 찻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진산월은 찻잔 속을 들여다보았다. 두 개는 절반쯤 차가 남아 있었고, 하나는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찻주전자를 열어보니 그 속에 찻물이 삼분지일 가량 담겨 있었다. 진산월은 다시 서탁을 신중히 살펴보았다. 특별히 이상한 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는 침상으로 다가갔다. 침상 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진산월은 무엇을 발견했는지 허리를 숙여 침상 위에서 무언가를 집어들었다. 그가 집어든 물체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을 때, 등뒤에서 서문연상의 음성이 들려 왔다.

“뭘 보고 있는 거예요?”

그의 뒤를 계속 따라왔던 서문연상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연 것이다. 그녀는 아예 그의 옆으로 바짝 다가와서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물체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하나의 길다란 머리카락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아직도 윤기를 잃지 않고 있어 왠지 섬칫해 보이기도 했다. 그녀의 얼굴에 엷은 실망감이 떠올랐다.

“난 또 무슨 중요한 거라도 발견했다고. 이건 그냥 평범한 머리카락이 아니에요?”

“머리카락 자체야 평범하지. 하지만 이곳에서 발견된 이상 평범한 것은 아니오.”

서문연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 침상이 누구의 것이라고 생각하오?”

“그야…… 이 방이 굉지선사의 방장실이니 굉지선사의 것이겠죠.”

말을 하다 말고 그녀는 아차하는 표정이 되었다.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굉지선사는 승려(僧人)이니 당연히 이러한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지.”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소요검객 사익의 것인가 보죠. 그가 이곳에 굉지선사를 만나러 왔다가 침상에 앉았을 수도 있잖아요.”

“저기에 의자가 있는데 왜 남의 침상에 앉겠소? 게다가 이 머리카락은 노인의 것이 아니오.”

그녀는 손뼉을 탁 쳤다.

“맞아요. 그럼 틀림없이 사익의 손자일 거예요. 굉지선사와 사익이 저 탁자에서 담소를 나누는 동안 그 아이가 이 침상 위에 앉아 있었을 거예요. 어린아이라면 남의 침상 위에 올라가더라도 그렇게 큰 실례가 아니잖아요.”

“그렇소. 그러니 이상한 일이 아니오?”

“뭐가요?”

진산월은 턱으로 찻잔이 놓여진 서탁을 가리켰다.

“저 탁자 위의 찻잔은 모두 세 개요. 그러니 세 사람이 앉아서 차를 마셨다는 이야기인데, 사익의 손자는 침상에 있었으니 결국 굉지선사와 사익 외에 다른 누군가가 그들과 함께 차를 마셨다는 말이 되오.”

서문연상으이 얼굴이 홱 변했다.

“그렇군요. 그 점을 미처 몰랐어요.”

그녀는 이내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그게 꼭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불 수는 없잖아요. 굉지선사에게 다른 손님이 와서 차를 마시고 간 후 나중에 혈겁이 벌어졌을 수도……”

“그건 그렇지 않소. 저 의자들을 보면 사람들이 앉아 있다가 일어난 상태로 그냥 방치되어 있소.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손님이 간 후에 굉지선사는 의자들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았을 거요. 이렇게 깨끗하게 정돈된 방의 주인이 의자들을 지저분하게 벌려 놓을 리는 없을 테니까.”

“……!”

“결국 의자들이 이렇게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는 건 굉지선사가 의자를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을 뜻하오.”

서문연상은 곰곰이 그의 말을 되씹어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이 맞아요. 그렇다면 굉지선사와 사익이 살해된 곳은……”

“바로 여기요.”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흉수는 굉지선사를 찾아와 함께 차를 마시다가 갑자기 살수(殺手)를 쓴 것이오.”

그녀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윽고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그런 것 같군요. 그저께 이 공자와 함께 이 방을 조사했었어요. 그때 탁자 위에 찻잔이 사람 수대로 세 개가 있고 실내도 별로 어질러진 곳이 없길래 별 생각 없이 그냥 나왔는데, 설마 이곳이 범행 현장이었을 줄은 몰랐네요.”

“그게 흉수의 치밀한 점이오. 이곳을 깨끗하게 치워놓았으면 오히려 의심을 샀을 텐데 일부러 평상적인 모습을 유지하여 사람들의 이목에서 벗어나게 했던 거요.”

“하지만 아무리 암습을 당했다고 해도 사익 같은 고수가 제대로 반항도 하지 못하고 당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군요.”

“정상적인 상태에서 화산파의 장로를 단 일검(一劍)에 쓰러뜨릴 수 있는 사람은 강호상(江湖上)에서 아무도 없소. 하지만 이 찻잔을 보시오.”

진산월은 서탁에 있는 세 개의 찻잔 중 하나를 가리켰다.
서문연상은 그 찻잔을 살펴보더니 의아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건 그냥 비어 있잖아요.”

“차를 마시다 잔이 비게 되면 어떻게 하겠소?”

서문연상은 별 생각 없이 대꾸했다.

“그야 물론 다시 차를 따라 마시겠죠.”

“그렇소. 저 찻잔이 사익이 마시던 것이라고 가정해 보시오. 사익이 주전자로 찻물을 따를 때 그이 오른손은 주전자를 잡고 있었을 거요. 바로 그때 옆에 있던 누군가가 암습을 가해 온다면 아무리 사익이 뛰어난 검객이라 해도 대항하지 못하고 쓰러질 수밖에 없을 거요.”

“아!”

서문연상은 머리 속에 그 장면이 그려지는 듯 했다.
즐거운 듯 담소를 나누던 세 사람, 찻잔이 빈 것을 알고 무심코 주전자를 잡던 사익은 방금 전까지 자신과 웃으며 이야기하던 사람이 갑자기 검을 날려 자신의 목덜미를 찔러 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목이 베이는 순간, 사익은 어떠한 생각이 들었을까?
사익이 쓰러진 다음, 무공도 모르는 노승과 어린 소년을 살해하는 것은 흉수에게는 손바닥을 뒤집는 것만큼이나 수월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흉수는 틀림없이 굉지선사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겠군요.”

“그렇소. 그리고 사익과도 안면이 있는 사이일 거요. 그렇지 않으면 굳이 사익과 같은 자리에서 차를 마실 리는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흉수가 시체들을 대웅전의 불단 위로 옮긴 것은 자신이 이들을 여기서 살해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한 것이로군요.”

“바로 그거요. 여기서 살해한 것을 알면 누구나 흉수가 굉지선사와 안면이 있는 사이였음을 짐작하게 될 테니 말이오.”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더욱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시신들을 하필이면 불상이 있던 자리에 놓은 것도 사람들의 관심을 그쪽으로 유인하여 죽인 장소에 대해 신경 쓰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었을 거예요. 그리고 자신이 온 것을 알고 있으니 당연히 취미사의 다른 승려들도 모두 살인멸구(殺人滅口)할 수밖에 없었겠죠. 이제 사건이 분명해지는군요.”

진산월은 의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달라지는 건 별로 없소. 흉수가 굉지선사와 아는 사이였다고 해도 그가 누구인지, 무슨 이유로 이들을 살해했는지는 여전히 밝혀진 게 없으니 말이오.”

“그 정도만 알아낸 것도 대단한 수확이에요. 그저께 이 공자와 한참 동안이나 이곳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니며 조그만 단서라도 찾아내려고 했었는데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한번 쓰윽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참 많은 걸 찾아내는군요.”

진산월을 쳐다보는 서문연상의 두 눈은 유난히 번쩍거리고 있었다.
한참을 그런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하고 있던 그녀는 문득 얼굴을 살짝 붉혔다.
왜냐하면 그때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진산월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이 세차게 뛰고 있는 것을 깨닫고 속으로 반문했다.

‘내가 왜 이러지? 설마 이렇게 불품없고 험악하게 생긴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솔직히 며칠 전에 만났던 이존휘에게 짙은 호감을 느껴고 있었다.
그는 비단 인물됨이 준수할 뿐 아니라 태도도 부드러웠고 명문세가의 후손이라면서도 결코 뻐기거나 오만하지 않았다.
게다가 두뇌도 명석하고 무엇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내심으로 그와 정식으로 사귀어 볼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이 앙상하게 마르고 키만 커다란 괴인의 앞에서 혼자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으니 그녀가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이른 아침에 장안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것도 이곳에 오면 그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 아니었을까?
자기 자신에게는 의혹에 싸인 그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일 뿐이라고 변명했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녀는 감히 더 이상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때 마침 진산월의 음성이 들려 왔다.

“밖에 누가 왔소.”

그녀는 움찔 놀라서 방문의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문밖에 누군가가 서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들을 본 서문연상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검은색 피풍의로 전신을 감싼 채 죽립을 깊게 눌러쓰고 있는 그 세 사람은 어제 대왕루에서 보았던 자들이었던 것이다.
죽립 사이로 번뜩이는 안광으로 보아 그들은 모두 높은 내공을 지닌 고수들 임이 분명했다.
한데 그들을 발견한 서문연상의 다음 행동이 전혀 뜻밖이었다.
그녀는 쏜살같이 밖으로 달려나가더니 그들을 향해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진산월이 미처 제지할 사이도 없이 그녀는 죽립인들에게 가더니 그들의 품에 폭삭 안겼다.

“하(何) 숙부, 위(衛) 숙부, 지(池) 숙부!”

그녀는 그들을 끌어안으며 반색을 했다.
세 명의 죽립인 또한 그녀를 보자 움찔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들 중 중앙에 있는 죽립인이 그녀의 어깨를 잡더니 정색을 하고 물었다.

“상아(霜兒)로구나. 위소룡은 어디에 두고 너 혼자 여기에 있는 것이냐?”

이 말을 듣자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럼 이분들은 나를 찾기 위해 오신 게 아니란 말인가?’

그녀가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자 중앙의 죽립인이 굳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네가 또 사고를 친 모양이구나. 이번 일에는 네 장래의 중대사(重大事)가 걸려 있는데 어찌 이런 경솔한 행동을 한단 말이냐?”

“……”

중앙의 죽립인의 시선이 슬쩍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저자는 누구냐?”

꾸중듣는 어린아이처럼 풀이 죽어 있던 서문연상이 이 물음에 정신이 번쩍 난 듯 고개를 쳐들고 그를 보더니 이내 배시시 웃었다.

“그걸 알아보려던 참이었어요.”

그녀의 엉뚱한 대답에 어이가 없는지 중앙의 족립인은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더니 피싯 웃고 말았다.

“정말 못 말릴 아이로군. 그렇게 남자 무서운 줄 모르고 함부로 따라다니다가는 크게 한번 경을 칠 날이 있을 것이다.”

“누가 따라다녔다고 해요? 그나저나 할아버지는 잘 계시죠?”

그녀가 할아버지에 대해 묻자 세 사람의 표정이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물론 잘 계신다. 그런데 네가 이곳에는 무슨 일이냐?”

그녀는 자신이 먼저 묻고 싶었던 것을 그가 물어보자 답답한 표정이 되었다.

“그냥 저자를 뒤쫓고 있었어요. 그보다 숙부님들이 이곳에 온 것은……”

그녀가 물어 볼 여유를 주지 않고 죽립인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저 방에는 왜 들어가 있었느냐? 거기서 무엇을 발견하기라고 했느냐?”

서문연상은 그의 거듭된 질문에 내심 의혹을 느꼈다.

‘하 숙부는 좀처럼 냉저을 잃지 않는 분이라 이런 적이 없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세 명의 죽립인은 그녀의 할아버지의 오랫동안의 수하들이었다.
할아버지의 수하들은 모두 여덟 명이었는데, 오늘 온 사람들은 그들 중에서 각기 셋째와 다섯째, 그리고 일곱째였다.
중앙의 죽립인이 셋째인 하종기(何宗期)였고, 우측의 인물이 다섯째인 위병국(衛昞局), 그리고 좌측이 일곱째인 지소흠(池昭欽)이었다.
그때 진산월이 몸을 움직여 방을 빠져 나왔다.

“어딜 가려고요?”

“소저가 가족분들을 만난 것 같으니 나는 이만 가 보겠소.”

그가 금시라도 떠나갈 듯 하자 그녀의 얼굴에 다급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나 그녀가 채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하종기가 짤막하게 물었다.

“잠깐 멈추시오.”

이어 하종기는 번갯불 같은 시선으로 그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그 시선이 어찌나 날카로웠던지 마치 두 개의 예리한 칼날이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나 진산월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태연한 얼굴로 그 시선을 받았다.

“귀하는 누구요?”

하종기의 물음에 진산월은 아까 했던 대답을 그대로 했다.

“지나가는 과객이오.”

하종기는 다시 물었다.

“이곳에는 무슨 일이오?”

“산책을 나온 거요.”

“이렇게 이른 아침에 말이오?”

“원래 아침 공기 마시는 걸 좋아하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서문연상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들의 대화가 조금 전에 자신이 했던 것과 똑같았던 것이다.
하종기는 힐끗 그녀를 쳐다보더니 다시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말을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거요?”

“사실을 듣고 싶소?”

“물론이오.”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들이 누구이며, 왜 이곳에 온 것인지를 먼저 밝히시오. 그러면 대답해 주겠소.”

하종기의 안광이 더욱 매서워졌다.

“말하지 않겠다면?”

“그럼 우리는 볼일이 없는 것이지. 안녕히 계시오.”

진산월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멈추라는 소리가 들려 오지 않았다.
대신에 하종기의 좌우측에 서 있던 죽립인들이 그의 앞뒤를 막아 섰다.
그들의 신법은 그야말로 바람과도 같이 표홀(飄忽)해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서문연상이 안색이 변해 소리쳤다.

“하 숙부님!”

하종기는 냉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는 이번 일에 끼여들지 말고 가만히 입다물고 있어라.”

그 음성이 너무도 차가워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진산월은 그들에게 앞뒤로 포위된 상태에서도 별로 긴장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앞을 막아 선 일곱째 지소흠이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 귀신 같은 몰골을 한 놈이 배짱 하나는 좋군. 하지만 지금의 네게 선택할 권리는 없다. 순순히 사실을 털어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진산월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자 이번에는 하종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평상시라면 우리도 이렇게 무리한 짓은 하지 않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어쩔 수가 없소. 우리로 하여금 손을 쓰도록 하지 말고 스스로 입을 열도록 하시오.”

서문연상은 눈앞의 사태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하종기는 과묵하고 냉정한 성격이기는 했으나 절대로 힘을 앞세워 남을 윽박지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체 그들은 무엇 때문에 생면부지의 인물을 이토록 압박하는 것일까?
진산월의 뺨에 있는 흉터가 꿈틀거리며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조금 전에 서문연상이 보았던 것보다 한층 더 삭막하고 차가운 미소였다.

“할 수 있다면 해보시오.”

그의 앞을 막아 섰던 지소흠이 참지 못하고 버럭 폭갈을 터뜨렸다.

“건방진 놈!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말아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오른손이 피풍의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며 벼락같이 진산월의 앞가스를 후려쳐 갔다.
그야말로 눈부시도록 빠르고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진산월은 피할 엄두도 나지 않는지 아니면 피할 생각이 아예 없는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앗? 피해요!”

서문연상의 놀란 외침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폭음이 들렸다.

펑!

“큭!”

먼지가 자욱이 일며 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금시라도 쓰러질 듯 휘청이며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난 사람은 뜻밖에도 먼저 공격했던 지소흠이었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벌어진 사실을 믿을 수 없는지 몇 번이나 ‘이럴 수가……’라는 넋두리를 중얼거렸다.
진산월은 처음의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늘어져 있던 그의 오른손이 어느새 올라와 가슴 앞에 자연스레 놓여져 있다는 것이었다.
조금 전에 그는 지소흠의 손이 막 가슴을 가격하려는 찰나에 오른손을 쳐들어 막아냈다.
손과 손이 마주친 순간, 지소흠은 손목이 부러지는 듯한 엄청난 통증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지소흠은 자신의 무공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신이 비루먹은 말처럼 비쩍 마른 괴인에게 일수(一手)만에 격퇴당한 사실이 좀처럼 실감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놀라기는 다른 두 명의 죽립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손과 손이 마주치는 격돌은 내공(內功)의 우열로 판가름이 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직 젊은 진산월보다는 중년의 지소흠이 훨씬 승산이 많은 것이었다.
그런데 단 한 번의 격돌로 지소흠이 일방적으로 격퇴당하고 말았으니 실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더구나 진산월은 공격을 당하는 입장이었지 않은가?

‘손을 쓰는 속도와 내공이 모두 뛰어난 놈이로군. 맨손으로는 지 노제(池老弟)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하종기는 재빨리 머리를 굴린 후 진산월의 뒤에 서 있는 위병국에게 눈짓을 했다.
위병국은 즉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들었다.

창!

요란한 검명(劍鳴)과 함께 위병국이 검을 뽑아 들자 서문연상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숙부님들은 자존심이 강해서 웬만한 경우에는 쉽사리 검을 뽑지 않는데……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분들이 이토록 공격적으로 변한 것일까?’

검을 뽑아 든 위병국은 진산월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젊은 친구가 솜씨가 뛰어나군. 내 아우는 이미 부상을 당해 자네를 상대할 수 없으니 나와 한번 겨뤄 보세.”

진산월은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위병국은 손에 들릴 검을 비스듬히 가슴 부위로 들어올린 다음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가 이긴다면 여기를 떠나도 좋네. 하지만 패한다면 순순히 우리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해주게.”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위병국은 가슴 언저리에 있던 검을 한바퀴 돌려 몸의 정중앙으로 가져갔다. 단순한 동작이었으나, 그것으로 위병국의 자세는 완벽해졌다. 검을 잡은 손의 모양과 팔의 자세, 몸의 형태가 한치의 허점도 없었다. 지금에서야 비로소 진산월은 검을 잡는 자세만 보아도 상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는 옛 검객들의 전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울러 삼 년 전의 자신이 얼마나 미숙한 존재였는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그때는 이러한 자세가 갖는 의미를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수준의 검객에게 맨손으로 사운다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한치의 주저함 없이 자신이 먼저 위병국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것은 마치 불을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무모해 보였다. 구경을 하고 있던 중인들도 모두 진산월의 행동이 의외라는 표정들이었다. 순식간에 일 장의 거리를 날아 위병국과 거리를 좁힌 진산월이 막 출수를 하려 할 때 였다. 미동도 않고 있던 위병국이 갑자기 들고 있던 검을 한차례 흔들었다.

스륵!

마치 대나무숲에 바람이 스치는 듯한 음향이 흘러 나오며 십여 개의 검영(劍影)이 진산월의 코앞으로 쏘아져 왔다. 눈부실 정도로 부드러우면서도 현란한 공격이었다. 예전의 진산월이었다면 상대의 이런 공격에 쩔쩔매며 뒤로 물러섰거나 막기 바빴을 것이다. 진산월은 검영 사이를 뚫고 앞으로 계속 전진하며 오른손을 빠르게 허공으로 찔러 넣었다.

팡!

그가 내갈긴 일장(一掌)이 허공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검영 하나와 정면으로 부딪치며 작은 폭음이 일어났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하종기가 나직한 신음성을 토해냈다.

“대단하군. 위 노제(衛老弟)의 환영일섬(幻影一纖)을 맨손으로 가볍게 막아내다니……”

조금 전에 위병국이 발출한 검영 속에는 한 가지의 무서운 살수(殺手)가 섞여 있었다. 열두 개의 검영에 바로 뒤이어 하나의 은밀한 검영이 따라오는 것이다. 자칫 열두 개의 검영에 현혹되어 그쪽에만 신경을 쓰게 된다면, 바로 이어지는 하나의 검영에 그대로 쓰러지고 만다. 이 초식은 환영십팔검(幻影十八劍) 중의 환영일섬이란 것으로,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이 초식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는지 모른다. 그런데 진산월은 한눈에 그 숨어 있는 검영을 간파하고 가볍게 그것을 해소해 버렸으니 그들이 놀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위병국은 진산월이 자신의 살초를 뚫고 들어오자 수중의 검을 앞으로 곧장 내뻗었다.

쉬악!

바람이 갈라지는 음향이 터져 나오며 조금 전만 해도 진산월의 전신을 휘감았던 열두 개의 검영들이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빛살 같은 검기 한 가닥이 그의 코앞으로 날아들었다. 이것은 환영십팔검 중의 전궁무영(電穹無影)이라는 초식으로, 빠르고 날카롭기가 가히 살인적인 수법이었다. 중인들은 진산월의 앞가슴이 그 검기에 그대로 꿰뚫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나 뒤이어 드러난 광경은 중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의당 가슴이 피범벅이 되어 바닥을 나뒹굴 줄 알았던 진산월의 신형이 어느새 위병국의 뒤에 가 있었던 것이다. 위병국은 방금까지만 해도 눈앞에 있던 진산월의 모습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지자 직감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빙글 몸을 돌리며 장검을 옆으로 그어댔다. 하나 그때 진산월의 몸은 다시 허공으로 솟구쳐 그의 머리 위에 가 있었다. 위병국이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진산월이 그의 머리 위에서 아래도 떨어져 내리며 질풍노도 같은 장력(掌力)을 내갈리고 있었다.

팡!

“음……!”

답답한 신음 소리와 함께 위병국은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할 줄 알았던 진산월은 어찌된 일인지 뒤로 훌쩍 물러섰다. 위병국도 휘청거리던 몸을 가누더니 들고 있던 장검을 다시 검집으로 집어 넣었다. 중인들이 자세히 보니 위병국의 앞가슴은 옷자락이 찢어져 너덜너덜해 있었다. 하종기가 황급히 그에게 다가왔다.

“괜찮나?”

“소제는 괜찮습니다. 추한 꼴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하종기는 그의 목소리가 정상인 것을 보고는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옷이 이렇게 해어질 정도면 틀림없이 가슴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을 텐데……’

그제서야 하종기는 왜 위병국이 더 이상 덤비지 않고 검을 거두었는지 알 수 있었다. 위병국은 한차례 한숨을 내쉬고는 진산월을 향해 포권을 했다.

“손에 사정을 봐주어서 고맙네. 내가 패했음을 시인하겠네.”

그의 신분으로 다른 사람에게 패했다는 소리를 내뱉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진산월은 그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주저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좋은 검법이었소.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소.”

서문연상은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무어라고 입을 열려다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종기와 위병국은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무거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제일 처음에 손목을 부상당했던 지소흠이 위병국을 돌아보며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왜 순순히 패배를 시인한 겁니까? 진짜 승부(勝負)는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위병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하종기가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꼭 피를 보아야만 승패(勝敗)를 알 수 있는 건 아니지. 저자의 실력은 확실히 우리의 예상 밖이었다.”

그의 시선이 서문연상에게 향했다.

“저자가 누구인지 정말 모르느냐?”

서문연상은 그의 칼날 같은 시선을 받자 몸을 움찔했으나 이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정말 몰라요. 제가 알면 왜 숙부님께 말씀드리지 않았겠어요?”

하종기는 그녀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 날카롭게 쏘아보더니 이내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어쨌든 상관없다. 저 정도 실력이면 조만간에 반드시 강호에서 그 이름을 들을 수 있을 테니까.”

서문연상은 그가 계속 추궁할 것이 두려워 자신이 먼저 물었다.

“그러데 숙부님, 이곳에는 대체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하종기는 돌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길다. 우선은 네 이야기부터 듣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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