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105화
시에프리너가 끝없이 뿜어내는 벼락 때문에 코볼드 통로에 있던 왕비는 팔뚝의 털이 서고 피부가 근질거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앞에 시에프리너 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데는 그것으로도 충분했지만 왕비는 확인할 방법을 아끼지 않기로 했지요. 왕비는 유모차로 몸을 숙였어요.
“시에프리너는 어디 있지?”
왕자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팔을 약간 들어 앞쪽을 가리켰어요. 왕비는 예언자를 돌아보았죠. 예언자는 비통한 것인지 허무한 것인지 알기 어려운 얼 굴을 하고 있었어요. 장례식장에서조차 어울리지 않을 얼굴이라는 점은 분명했어요. 왕비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유모차를 밀었습니다. 예언자는 지 친 걸음으로 그녀를 따랐어요.
통로 끝은 바위로 막혀 있었어요. 왕비가 예언자를 돌아보았습니다. 예언자는 반대쪽에서 열고 나왔기에 이쪽 편의 문 개폐장치는 알지 못했지요. 하지만 예언자는 과거 코볼드들이 그것을 이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잠시 후 예언자는 무릎 높이의 바위틈에 교묘하게 감춰져 있는 개폐장 치를 왕비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왕비는 바위에 귀를 댔어요. 바위는 제법 육중했지만 드래곤의 흥분한 숨소리를 막지는 못했습니다. 시에프리너의 숨소리였지요. 왕비는 흠칫하고 물러났다가 다시 귀를 대고 그 소리에 집중했습니다.
드래곤의 거대함을 단번에 느끼게 해주는 숨소리였지요. 결코 크지는 않았어요. 크기로 따진다면 시에프리너가 호흡하는 번개가 공기를 태우는 소 리가 더 컸죠. 하지만 왕비를 압도한 것은 시에프리너의 호흡 소리였습니다. 왕비는 눈을 감고 그 소리에 집중했어요. 어느새 그녀의 호흡이 시에프 리너의 그것과 일치되었습니다. 드래곤의 호흡 속도가 인간보다 훨씬 느리지만 시에프리너는 그 순간 꽤 빠르게 호흡하고 있었지요. 왕비는 적당한 속도로 숨을 쉬는 것만으로 시에프리너와 함께 호흡할 수 있었습니다.
“왕이 오는군요.”
왕비는 눈을 떠 예언자를 보았습니다. 예언자가 어눌하게 말했습니다.
“바위가 무너져서 왕이 뛰어들었습니다. 잘됐군요. 시에프리너가 왕에게 신경 쓰는 사이에 이 문을 열면 되겠군요.”
“뭐라고?”
“지금 그걸 열면 시에프리너의 벼락이 날아올 겁니다. 왕이 올 때까지 기다리시죠.”
왕비는 숨을 멈췄습니다. 다음 순간 왕비는 발작적으로 개폐장치를 발로 걷어찼습니다.
바위가 가벼운 나무문처럼 홱 열렸지요. 왕비는 그걸 보지도 않은 채 유모차의 손잡이를 잡았죠. 왕자가 웃었습니다. 예언자는 턱을 비틀어 입을 열 었지요. 왕비는 유모차를 열린 문으로 떠밀었습니다. 예언자가 비명을 지르려 했습니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유모차 안에서 왕자가 크게 웃었습니다. 왕자는 생애 첫 번째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벌렸죠.
거센 벼락이 날아와 유모차와 왕자를 박살냈습니다.
유모차는 한 번 튕겨 올랐다가 불이 붙은 채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자신이 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시에프리너는 그 광경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시 에프리너는 망아 상태에 빠져 불타는 유모차와 거기서 튕겨져나온 고깃덩이를 보았습니다. 깨진 알껍데기, 흐느적거리는 사산아. 그런 단어들이 떠
올라 시에프리너는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왕비를 보지 못했어요.
왕비는 팔을 들어올렸습니다. 그림자 지우개의 덮개는 한 손으로도 열 수 있지요. 왕비는 마음속으로 목표를 정했습니다. 왕비는 그림자 지우개를 겨냥했습니다. 그 순간 왕비는 엔진음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레어 저편을 보았어요.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형체가 있었습니다. 바위벽이 무너져 바깥 의 빛이 들어오고 있었기에 왕비는 어두운 그림자밖에 볼 수 없었지요.
그 그림자를 열렬히 연모하며 왕비는 그림자 지우개의 덮개를 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