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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자국 – 109화


왕거미는 멍한 표정으로 걸어갔습니다.

일몰 무렵의 태양은 피처럼 붉었어요. 그토록 붉었던 까닭은 대기에 가득한 연기와 먼지 때문이겠지요. 들판은 타버린 검은 흙과 재로 가득했고 선 채로 숯덩이가 된 나무들이 여기저기에 외롭게 서 있었어요. 몇몇 나무들은 아직도 작은 불꽃들을 붙인 채 서서히 타들어가고 있었고 어떤 것들은 더 서 있을 수 없다는 듯 푸서석 하며 쓰러졌어요. 불탄 나무가 쓰러질 때마다 새카만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지요.

그 황량하게 타버린 땅 한가운데 그녀가 등을 보인 채 서 있었습니다. 그녀는 피투성이였지요. 도살장 인부도 그렇게 피에 젖기는 어려울 것 같았어 요. 피를 욕조 가득 모은 다음 그 속에 몸을 담갔다 일어나야 그녀처럼 보일 수 있을 것 같았지요. 물론 그 다음엔 벽난로에서 긁어낸 재를 뒤집어쓰 는 일이 필요하겠지요. 피와 재 때문에 그녀는 엘프는커녕 생물처럼 보이지도 않았지요. 하지만 이가 다 빠진 피투성이 장검을 들고 일몰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분명 엘프 이루릴 세레니얼이었습니다.

왕거미가 가까이 다가갔지만 이루릴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어요. 왕거미는 그녀를 끌어안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난이도는 낮지만 꽤 끔찍한 등반을 해야 했지요. 지독한 피 냄새 때문에 심호흡을 할 수도 없었지요.

왕거미는 짧고 얕은 호흡을 몇 번 한 다음 지골레이드의 시신을 기어오르기 시작했어요.

여덟 개의 갈고리만 있으면 빗물을 타고 하늘도 기어오른다고 알려져 있는 왕거미에게도 그 등반은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쯤 굳은 피는 진득거 리며 발을 끌어당겼고 비늘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발을 미끄러지게 했지요. 그 모든 것이 등반가를 의기소침하게 만들기 충분했죠. 곧 왕거미는 숨 이 가빠졌습니다. 피의 악취는 익숙해지기는커녕 계속해서 그녀의 속을 뒤집었죠. 마침내 이루릴 곁에 도착했을 때 왕거미는 그녀를 끌어안기에 앞 서 무릎에 손을 짚고 숨을 골라야 했어요. 그러자 그녀를 끌어안기엔 좀 애매해졌어요. 왕거미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에 떠오르는 대로 말 했어요.

“지골레이드에게 다른 자식이 있었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말을 끝낸 왕거미는 얼굴을 조금 붉혔습니다. 왕거미가 방금 꺼낸 말 같은 건 이루릴이 수백 년 동안 수만 번 이상 해본 생각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이루릴은 힐난하는 기색 없이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그랬을 테죠.”

“미안해. 난 그냥…………”

“정말 이상했어요. 우리도 지골레이드에게 그렇게 권유했고 지골레이드도 처음 얼마 동안은 열성을 보였어요. 하지만 지골레이드에게 더 이상의 자 식을 허락하지 않는 어떤 운명이 있었던 것처럼 그는 자식을 얻지 못했죠. 지골레이드가 죽은 자식을 되살릴 방법에 몰두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어 요. 그는 죽은 자식이 자신의 대용물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후손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드래곤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를 믿을 수 없는 기묘한 생각에 사로잡혔죠.”

이루릴은 여기저기가 타서 끔찍한 모습인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쓸어넘겼어요.

“그리고 나는 무언가 아름다운 것, 가치 있는 것들을 만들어내기는커녕 그런 것들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에도 바빴어요. 그에게 신경쓸 수가 없었지 요. 그가 수백 년에 걸쳐 서서히 마법의 기묘한 영역에 다가갔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드래곤이니까 괜찮을 거라 자위했어요. 예. 수백 년이에요. 급 격한 변화였다면 어떻게 대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너무 길어요. 씨앗이 숲이 될 만한 기간이었지요. 변화를 눈치채기도 쉽지 않았죠.”

왕거미는 지난 몇 개월 동안 미친 지골레이드가 때려 부순 도시들과 국가의 숫자를 떠올렸어요. 내 자식이 어디 있냐고 외치는 드래곤을 보며 사람 들은 세계 종말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여기게 되었지요. 그런 상황을 더 두고 볼 수 없었던 이루릴은 지골레이드와 싸우기로 결정했어요. 이루릴 은 그것이 참혹한 결정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은 더 참혹했죠. 이루릴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항상 드래곤들을 위해서라면 나와 싸울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하곤 했어요. 그 말이 사실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가 자신의 말에 충실했 다면 좋았을 텐데.”

왕거미는 조금 전 이루릴과 함께 이곳으로 오다가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어요. 미친 지골레이드가 황금빛 드래곤을 땅에 때려 박는 모습을. 그걸 본 이루릴은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 지골레이드를 공격했어요. 황금빛 드래곤과 싸우느라 크게 다쳤던 지골레이드는 이루릴의 맹공을 버티지 못하고 십 여 분만에 그녀의 발 아래 누운 시체가 되었지요.

“왜………… 지골레이드와 싸운 거예요. 당신은 드래곤의 후원자인데.”

왕거미는 저 앞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래쪽에 있을 땐 지골레이드의 시체 때문에 보기 힘들었던 것이 똑똑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곳엔 드래곤 레이디 아일페사스의 처참한 시체가 놓여 있었지요. 이루릴과 지골레이드의 처절한 싸움이 일어나는 동안 그 땅은 무수한 벼락과 화 염, 눈보라, 광풍, 그리고 설명할 말도 없는 기이한 현상들로 포화 상태가 되었죠. 그 때문에 위대한 드래곤 레이디의 시신은 흉측하기 짝이 없는 꼴 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친구를 위해 동족과 싸운 드래곤 레이디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이루릴이 속삭였습니다.

“내 세계가 부서졌어요. 돌이킬 수 없이.”

왕거미는 지골레이드의 시신을 기어올랐던 이유를 떠올렸습니다. 그녀는 이루릴을 등 뒤에서 힘껏 안았습니다.

“아물 거야.”

“불가능해요. 불가능해요. 펫시가…………”

“좋았겠다, 아일페사스!”

이루릴의 몸이 굳었습니다. 쓰러지려는 나무를 끌어안는 것처럼 이루릴을 잡아당기며 왕거미는 아일페사스를 쳐다보았습니다. 찢어지고 그리고 얼어터지고 녹아내린, 산더미 같은 고깃덩이.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살다가 자기 죽고 싶은 대로 죽었잖아. 정말 좋았겠다! 당신 정말 예쁜 여자야. 최고야!”

이루릴이 몸을 비틀었어요. 이루릴이 흐느꼈어요. 이루릴이 비명을 질렀어요. 하지만 왕거미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왕거미는 함께 흐느끼 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계속 중얼거렸습니다.

아물 거야. 아물 거라고.

부서질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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