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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자국 – 141화


“그 선언을 철회해요. 드래곤 레이디.”

이루릴의 말투는 고요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사용한 호칭은 아일페사스의 입 주위에 파르스름한 불길을 일렁거리게 했지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부당하니까요.”

“시에프리너에게 그렇게 말해 봐. 우리는 알을 낳아. 그 때문에 시에프리너는 출산은 출산대로 경험하고 자식은 보지 못했어. 누가 말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예언 때문에 그런 기막힌 일을 경험해야 했어! 바이서스 인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방관하고서 자신은 무죄라 말할 건가? 자신이 직접 방아쇠를 당긴 것은 아니라고 말할 건가? 그럴 수는 없어. 그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하길 포기했다면 어떤 미래가 그들을 찾아가도 거절할 수 없 어. 서로를 잡아먹는 미래라 해도 그들에게만큼은 정당해.”

거센 바람 속이었지만 이루릴은 눈을 가늘게 뜨거나 하진 않았어요. 그녀는 앞쪽 멀리 있는 아일페사스의 머리와 그 너머 하늘을 똑바로 보며 말했 죠.

“내 말을 오해했군요. 드래곤 레이디. 나는 그것이 시에프리너에게 부당하다고 말한 거예요. 당신 말처럼 바이서스 인들은 그런 처우에 불평할 수 없을 테죠.”

왕지네의 턱이 덜컥 떨어졌습니다. 그녀는 왕자를 끌어안으며 간곡한 시선으로 이루릴을 쳐다보았어요. 하지만 이루릴의 대답은 냉엄했어요.

“스스로 피해자가 되는 방법으로 다른 이를 가해자로 만드는 재주를 계속 부리면 언젠간 진짜 피해자가 되는 법이죠. 당신도 알잖아요? 왕이 왜 그 랬는지. 패전 때문에 이반한 민심을 다시 휘어잡으려고 멀쩡한 나라가 망한다고 떠들어 댄 거예요. 말하기도 뭣할 만큼 케케묵은 수법이죠.”

“예언이………… 있었어요.”

“누가 한 예언이죠?”

왕지네는 대답할 수 없었어요. 아무도 누가 그 예언을 했는지 모르니까요.

“당신들이 왕의 계략을 폭로하기 어려웠다면 하다못해 누가 그 예언을 했는지라도 알아냈어야 했어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죠. 피해자 되길 좋아하 는 습성 때문이겠지요. 당신들의 묵시적 동조 덕분에 민심을 다시 장악했지만 왕은 자기 말에 책임을 져야 했지요. 그래서 솔베스로 진군했어요. 임 신해서 몸이 불편한 용이니까 간단히 패퇴시킬 수 있다고 믿은 것이겠지요. 그리고, 보세요. 이 상황을 왕의 공범인 당신들은 왕이 받을 보복도 분담 해야 해요.”

왕지네는 말문이 잘 열리지 않았어요. 대답을 기다리던 이루릴은 곧 포기하고 아일페사스에게 말했죠.

“하지만 당신은 시에프리너에게 부당하게 대해선 안 돼요. 드래곤 레이디.”

“무슨 말이지?”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시에프리너는 가장 큰 복수를 할 기회를 잃게 돼요. 당신에겐 그녀에게서 그걸 뺏을 권리가 없어요.”

아일페사스는 입을 꽉 다물었습니다. 그녀는 이루릴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지요. 이루릴은 용서를 말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시에프리너 가 그들을 용서하고 싶어졌다 하더라도 그들이 남아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루릴과 까마득한 세월을 함께 보낸 친구가 아니었던 왕지네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죠. 왕지네에게 이루릴의 말은 ‘당신이 바이서스 인들 을 다 죽여버리면 시에프리너가 죽일 숫자가 부족해질 텐데’라고 말하는 것으로 들렸죠. 그런 해석은 왕지네 속에서 격한 반발심을 끌어냈고 그 덕 분에 왕지네는 고함을 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왕은 배신감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 왕자는 왕의 자식이 아니에요!”

아일페사스마저 당황하여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이루릴이 말했어요.

“날짜가 맞지 않는다는 그 이야기 말이군요. 왕비가 바이서스 임펠로 돌아오고 여덟 달 후에 왕자가 태어난 걸 가지고 뜬소문이 돌았죠. 공식적인 설명은 조산이었다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잖아요. 하지만, 아니에요. 왕자는 왕비가 솔베스에 있을 때 생겼어요.”

“왕비가 외도를 했다는 말인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왕비는 왕에게 솔베스를 되찾아줄 방법을 찾기 위해 직접 변장하고 솔베스를 찾았어요. 그 덕분에 시에프리너가 수면기 에 접어든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냈고요. 그런 왕비가 외도를 할 리 없잖아요.”

“그럼 왕비가 겁탈이라도 당했다는 건가요?”

“아니요! 왕비는 왕 이외에 어떤 남자도 가까이하지 않았어요! 왕비를 솔베스로 안내하고 수행했던 제가 보증할 수 있어요!”

이루릴의 얼굴에도 당황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이 지금 유도하려는 결론은…… 설마……”

왕지네는 품안의 왕자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안쓰러움이 가득한 시선이었지만 그 시선 속엔 두려움에 가까운 위화감도 섞여 있었죠. 

“그래요. 왕도 믿지 않았고 당신도 아마 믿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그건 분명한 사실이에요. 왕자는 그냥 생겨났어요. 아버지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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