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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자국 – 28화


사람이 무엇인가에 익숙해지는 것은 정말 놀랍죠. 신이 사람들과 거의 접촉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몰라요. 자주 만났다간 대접이 형편없어질 지도 모르잖아요.

정상적이라는 말과 동떨어진 장소에서 오랜 기간을 보낸 예언자를 보면 사람의 적응력을 잘 알 수 있지요. 예언자는 휘파람을 불면 음식이 되는 나비나 손가락을 튕기면 물잔이나 술잔이 되는 꽃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장기판 위에서 스스로 움직이는 기물들에 대해서는 경 계심, 혹은 적개심만을 느꼈지요. 승률이 형편없었거든요.

예언자는 부드러운 털바닥에 앉은 채 한 때 나비였던 빵을 씹으며 바닥에 놓인 장기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습니다. 그의 상대는 드래곤 레이디 아일 페사스였지요. 하지만 그 자자손손 자랑할 만한 상대가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일페사스는 카르 엔 드래고니안에 앉은 채 목소리 와 스스로 움직이는 기물만으로 솔베스의 예언자와 대전하고 있었지요.

그 장기 덕분에 예언자는 수감 생활의 지루함에서도 제법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장기였기에 익힐 것도 많았고 또한 그 장기에는 드 래곤 레이디의 역사가 담겨 있었거든요. 아일페사스가 각 기물에 얽힌 이야기들을 설명할 땐 역사학자들을 광분시킬 만한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왔기 에 언제나 흥미로웠습니다. 지금도 예언자는 아일페사스가 운차이로 자신의 엑셀핸드를 잡아서 자신이 ‘말과 함께 친구 타기’라는 그 괴상한 규칙을 써먹을 수 있게 해줄지, 아니면 위대한 왕국의 시조가 된 그 인물의 야사를 들려줄지 궁금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일페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대국을 중단해야 할 것 같군. 자네에게 급한 전언이 있어.”

예언자는 의아해하며 승낙했습니다. 이윽고 들려온 목소리는 이루릴 세레니얼의 것이었죠. 이루릴은 예의바르게 예언자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하지 만 예언자는 이루릴이 약간 서두른다는, 동시에 주저한다는 느낌을 받았죠. 얼마 있지 않아 이루릴은 본론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런 표현 케케묵은 것이지만 의외로 쓸 일은 적지요. 당신에게 전할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요. 좋은 소식은 이거예요. 당신에게 아들이 있 “어요.”

예언자의 손에서 빵이 떨어졌습니다. 기가 막혀 말도 못하는 예언자를 눈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이루릴이 차분하게 말했어요.

“당신이 교제하던 화가를 기억하나요?”

“그녀가…………”

“예. 얼마 전에 아들을 낳았어요. 당신이 아버지에요.”

예언자는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기뻐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충격이, 그리고 그 때문에 일 어난 두려움이 좀 더 컸죠. 이루릴이 두 가지 소식이 있다고 말한 것을 떠올린 예언자는 허겁지겁 그것에 매달렸어요.

“나쁜 소식은 뭡니까? 산모가 잘못되었습니까?”

“산모는 건강해요.”

“그럼 나쁜 소식은 뭐란 말입니까? 혹시 여기서 내보내줄 수 없다는 건가요? 그럴 순 없어요. 지금 그녀가 얼마나 불안하고 힘들겠습니까? 하다못해 얼굴만이라도 비춰야 해요. 맹세하겠습니다. 그녀와 내 아들만 보고…………!”

난생 처음 사용한 내 아들이라는 호칭에 예언자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그는 속으로 그 말을 반복해 보았어요. 내 아들? 내 아들? 내 아들! 예 언자는 거의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에겐 이루릴의 말이 잘 들리지도 않았어요.

“내보내 줘요! 두 사람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절대로 예언을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두 사람 곁에 있어야 한다고요! 잠깐. 조금 전에 왕비가 어떻 다고 말을 했습니까? 왕비가 어쨌다는 거죠?”

이루릴은 한참을 침묵했습니다. 견디지 못한 예언자가 다시 질문하자 비로소 이루릴은 말했어요.

“이 소식은 왕비가 알려준 거예요.”

“예?”

“그리고 왕비는 당신이 한 달 내로 자신에게 오지 않으면 당신의 아들이 해를 입게 될 거라고 말했어요.”

예언자는 비명을 질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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