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85화
이루릴은 절벽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지평선을 바라보았습니다.
인간이 보는 지평선과 엘프가 보는 지평선은 다르지요. 엘프의 눈이 훨씬 더 날카로우니까요. 인간도 ‘돛대는 보이는데 선체는 보이지 않는 유명한 현상을 통해 세상이 둥글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프는 돛대에 서 있는 감시원의 상체는 보이는데 하체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지요. 그 정도로 날카로운 눈에 보이는 지평선은 선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거칩니다. 인간에게 지평선이 칼날이라면 엘프에겐 톱날 인 셈이죠. 물론 거기에 맞물려 있는 하늘도 톱날일 겁니다. 맞물린 이빨이 떠오르세요? 하지만 엘프들은 지평선을 맞물린 이빨에 비유하진 않습니 다. 그들도 인간이나 다른 종족처럼 그것을 선이라 말합니다. 맞물린 이빨 뒤에는 보통 목구멍이 있겠지요. 하지만 선은 넘어오거나 넘어갈 수 있는 경계지요. 지평선이란 그런 것 아니겠어요.
이루릴의 곁에는 거대한 드래곤이 앉아 있었습니다. 조금 전 지평선에서 넘어온 드래곤입니다. 폐소공포증을 가진 이에겐 악몽이 될 듯한 그 크기를 고려하면 앉아 있는 절벽이 당장 무너져내려야 할 것 같지만 절벽은 끄떡없었습니다. 붉은 몸에 검은 줄무늬가 덮인 그 드래곤에게 아무런 무게도 없 는 것처럼.
‘왜 돌아왔어요?
설명은 필요 없지. 나는 당신이니까.
이루릴은 크라드메서를 돌아보곤 조용히 미소지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크라드메서의 환영을 만들어낸 이유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토벌 군은 그 어떤 드래곤도 시에프리너를 돕기 위해 날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고만장해 있을 겁니다. 그들을 경계하게 하고 의혹에 빠지게 하려면 드 래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겠지요. 그래서 이루릴은 그녀가 알고 있는 드래곤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고 자신이 예전에 한 번 만들어보 기도 했던 드래곤의 환영을 만들어내었죠.
적어도 이루릴이 느끼기엔 그것이 자신의 이유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확신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루릴은 토벌군을 향해 날아가던 크라드메 서의 환영을 다시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그 어떤 극단도 거부한 채 오직 자신의 기준을 고집했던 드래곤을, 비록 그것이 환영이라 하더라도, 그녀가 확신할 수 없는 일에 동원하는 것은 부당하게 느껴졌거든요.
‘이런 기분, 낯설군요. 내 생각과 행동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 같아요. 인간들이 그런 상태에 대해 멋진 표현을 몇 가지 알려주긴 했지만 나는 표 현하기 힘들어요.’
‘혹시 그림자 지우개 아닐까?”
‘의심은 해요. 인과의 그물에 생긴 기운 자국, 혹은 멀리까지 뻗어간 주름.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이 그것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림자 지우개는 모 든 것을 의혹으로 만들면서 그 자신은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아요. 그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니까.’
‘가을이야.’
‘예?’
‘어쩌면 누군가의 마법의 가을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군.’
‘크라드메서?”
크라드메서의 환영이 사라졌습니다. 이루릴은 참으로 오래간만에 들은 그 고풍스러운 표현에 조금 동요했습니다. 아일페사스도 이제는 쓰지 않는 표현이지요. 예. 그 옛날에 이 땅을 떠난 크라드메서가 다시 돌아온다면 사용할 만한 표현이었습니다.
이루릴은 지평선보다 가까운 쪽을 살펴보았습니다. 크라드메서의 말대로였어요. 어느새 다가온 가을이 솔베스에 흐르고 있었지요. 시들어가는 풀은 방종한 초록빛 대신 우수 어린 연갈색을 띄고 있었고 대지엔 여름 동안 사라졌던 습기가 돌아왔습니다. 태양이 수분의 징세에 흥을 잃은 탓이죠. 습 기를 머금은 검은 흙 위에서 반쯤 말라 버석거리는 풀잎들. 그 위로 부는 메마른 바람. 가을은 물이 아래로 고인다는 직관적 진실을 담담하게 보여주 기에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잔뜩 끓여서 사방팔방에 습기를 날리는 여름과는 다르지요.
한 여인이 가을의 갈피를 들추고 걸어나왔습니다.
여인은 겨냥했던 소총을 내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얼굴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지요. 아무래도 조금 전까지 그곳에 있던 크라드메서의 환영 때문 인 것 같습니다. 이루릴은 그림자 지우개를 훔친 것 때문에 그녀를 원망하는지 자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지요. 차라리 그녀를 동정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지만 이루릴은 그러지도 않았습니다. 이루릴은 다만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긴 여행에서 돌아온 친구에게 말하듯 말했습니다.
“오래간만이군요. 왕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