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87화
그 옛날 드래곤 레이디가 드래곤 로드를 계승했을 때, 둘 더하기 셋이 뭔지 아는 모든 종족들은 카르 엔 드래고니안의 새 지배자의 영토 정책에 대해 궁금해 했습니다. 분명 전 세계의 관심이 쏠릴 만한 일이었지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혹은 아버지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딸은 아버지의 옛 영광을 회복하려 할까요?
드래곤 레이디 아일페사스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세계가 아닌 카르 엔 드래고니안만 소유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일페사스 는 아버지보다 더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지요. 드래곤 로드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사실, 즉 이제 카르 엔 드래고니안의 주인은 세계뿐만 아니 라 드래곤도 지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녀는 과감하게 인정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드래곤들의 조언자 및 후원자로 지칭했지요. 어떤 이들은 좋 아하고 어떤 이들은 실망했지만 그들 모두 카르엔 드래고니안의 새 지배자가 온화한 드래곤이라는 것에 동의했어요.
실로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사람들은 그것이 정확한 판단이면서 동시에 오해였음을 깨달았습니다.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드래곤 로드는 다른 드래곤의 생사에 일희일비하는 일은 별로 없었어요. 그가 비정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관점에 서 보면 그는 천성적인 지배자였던 거죠. 수하의 생사와 지배자인 자신의 그것을 동일시하는 것이 그에겐 불가능했죠. 하지만 다른 드래곤들과 자신 을 동격으로 여기는 아일페사스는 시에프리너와 자신을 쉽게, 그러니까 드래곤 로드보다는 쉽게 동일시할 수 있었지요. 그녀는 시에프리너의 위험을 자신의 위험처럼 느꼈어요. 드래곤 레이디는 그녀를 온화한 드래곤이라 믿었던 이들을 기겁하게 만든 뜨거운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너희들은 드래곤을 육종할 수 없다. 나쁜 혈통은 도축하고 좋은 혈통만 남겨둘 수는 없다!
비록 다른 드래곤들을 지배하진 않았지만 강대한 드래곤 레이디에겐 긴 세월 동안 우의를 다져온 강력한 친구들과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충성스러운 종복들이 있었습니다. 시에프리너의 레어를 탈출한 예언자를 찾기 위해 움직였던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지요. 하지만 드래곤 레이디 는 그들을 부르지 않았고 따라나서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아일페사스는 홀로 솔베스를 향해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고독한 비행이라 부를 수는 없었습니다.
세상에 활엽수들이 가득하여 숲의 소리도 훨씬 풍요로웠고 강물 속의 바위들은 헤엄치는 물고기를 동강낼 만큼 예리했던 시절, 드래곤 로드가 세상 을 지배하던 때, 연보랏빛 구름 위를 나는 황금빛 드래곤의 모습은 창조의 긴 후렴 같았습니다. 시간은 어떤 경고도 없이 흘러갔어요. 세계는 죽음을 무한히 되새김질했습니다. 계절의 끊임없는 원무 속에서, 활엽수의 그늘에서 자란 침엽수들은 울창한 숲을 이루고 강물 속의 바위들은 모서리를 찾 아보기 어려울 만큼 무뎌졌습니다. 그런 지금 세계는 다시 연보랏빛 구름 위로 날아오르는 황금빛 드래곤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결코 고독한 비행이 아니었지요. 내가 여전히 여기 있다는 외침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