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99화
왕은 퍼시발에 뛰어올랐습니다. 주위의 아무도 왕의 행동을 제 때에 제지하지 못했지요. 루트에리노의 후손들에겐 모두 그런 면이 있었지요. 간혹 몇 대에 걸쳐 잠잠해서 사라졌나 싶다가도 갑작스럽게 불쑥 나타나는 성격. 격동하는 흐름을 한 손에 끌어 모아 쥐고 아무도 말릴 수 없는 기세로 앞 으로 달려가는. 예. 그런 성격 덕분에 루트에리노 대왕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드래곤 로드에게 돌격할 수 있었지요.
왕 또한 그러했습니다. 그가 퍼시발을 출발시켰을 때 그 거대하고 초자연적인 전투는 갑자기 왕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왕의 바람도 그런 것이었지요. 절망적이라는 말도 부족한 그 상황을 단숨에 뒤엎을 방법은 드래곤 레이디를 쓰러트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왕은 자신의 칼끝으로 그 일을 해낼 작정 이었지요.
불덩이가 떨어지는 하늘을 봐야했기에 왕은 고개를 숙일 순 없었습니다. 왕은 고글과 얼굴 앞에 세운 칼날에 의지한 채 머리를 빳빳이 세우고 달려 갔습니다. 발톱과 집게, 단단한 날개, 그리고 독침이 달린 바람이 그의 얼굴과 상체를 세차게 때렸지요. 왕의 얼굴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습니 다. 고통은 가까스로 참을 만했지만 숨을 쉬기 어려운 것은 정말 힘들었죠. 하지만 왕은 겁을 먹는 대신 사납게 웃었습니다. 그는 말보다 느리고 민첩 하지도 않고 걸핏하면 고장나는 바이크를 왜 타냐고 비웃던 신하들을 속으로 조롱했습니다. 말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기겁했겠지요. 하지만 바이크는 충실하게 왕을 드래곤 레이디에게 운반했습니다.
그를 향해 걸어오는 금발 엘프를 보며 왕은 ‘혹시나’ 하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습니다.
왕은 스로틀을 세게 연 다음 오른손을 레버에서 떼어 장검을 뽑아들었습니다. 솔로처가 만든, 드래곤도 죽인다는 검이 마침내 그 위력을 발휘할 때 가 왔지요. 시에프리너가 바로 그 대상일 거라던 왕의 예상은 빗나갔지만 드래곤 레이디라면 불만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가 속도를 높이자 마주오고 있던 드래곤 레이디 또한 걸음 속도를 높였습니다. 어느 틈에 그녀의 손엔 장검이 들려 있었지요. 왕은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대로 달려가 베겠다는 듯 도전적으로 검을 흔들던 왕은 뒤로 뛰어내렸습니다. 그 또한 말이 아닌 바이크였기에 가능한 재주라 하겠지요.
바이크는 아무 두려움 없이 아일페사스를 향해 굴러갔습니다. 아일페사스는 황급히 옆으로 피했지요.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속도를 줄인 채 멈춰 서 게 되었습니다. 구르다가 일어선 왕은 바로 그 순간을 노려 구르던 기세까지 더해 장검을 세차게 휘둘렀지요.
하지만 그 대단한 공격은 믿을 수 없는 방어에 막혔습니다. 아일페사스는 왼손으로 자신의 칼날을 잡고 왕의 공격을 간단히 막더니 그대로 몸을 오 른쪽으로 비틀며 칼자루를 쥔 오른손을 놓았습니다. 그러자 칼자루가 휙 튀어올랐습니다.
아일페사스는 칼날을 쥐고 칼자루로 왕의 앞이마를 세게 때렸습니다.
반격의 충격보다 그 경이적인 기술에 대한 놀라움 때문에 왕은 소름이 끼친 채 뒤로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곧 모욕감이 그를 휘감았지요. 초인적인 기술이지만, 거기엔 분명히 조롱이 담겨 있었죠.
“이 더러운 짐승!”
“언사를 주의하라. 바이서스의 왕. 내가 누군지 몰랐다고 잡아뗄 순 없을 텐데.”
“아직도 경의를 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나. 죽은 이를 저토록 모욕하고서!”
“나를 들이받았던 멍청이들 말인가? 스스로를 그렇게 대하는 바보에게 내가 왜 잘 대해줘야 하지? 너희들은 대접받고 싶은 만큼 대접하라고 하더 군. 그건 자기한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지 않아?”
“무슨 소린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다.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포기하지 않았는가! 상식이 있는 인간 장수였다면 비록 적이라도 그들을 수습하여 장례도 치러줬을 것이다. 제기랄. 이런 걸 일일이 설명해야 하나. 제아무리 오래 살았다 해도 천생 짐승이란 말인 “가?”
“너희들의 빈곤한 정신이 만들어낸 그 혼란스럽고 자기파멸적인 논리 말이군. 너희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를 만들지. 너희들을 보호해야 하므로 국가는 강하고 위대해야 하지. 그런 국가에 비하면 너희들은 약하고 초라하지. 그래서 너희들은 국가를 위해 죽지. 보모를 사형집행자로 바꾸 는 그 묘기에 내가 경탄해야 하나?”
“보모는 사형집행자가 된 것이 아니야. 내가 된 것이다! 나는 단수가 아니야!”
드래곤 레이디는 입을 닫았습니다. 말도 하기 싫은 것 같았어요.
“우리는 자신이 만지지도, 보지도 못할 것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던진 이들 덕분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들은 지금도 살아있다. 우리라 는 이름으로 바뀌어서. 그들은 자신을 초라한 것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을 확장시키고 더 위대한 것으로 만든 것이다!”
아일페사스는 신경질적으로 팔을 뻗었습니다.
긴장하던 왕은 소리의 부재를 느꼈습니다. 수억 마리의 곤충과 벌레들이 내던, 그 단절을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부우우우웅 하는 소리가 어느새 사라 졌어요. 고개를 든 왕은 불붙은 비행기들도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왕은 반가움에 얼굴을 폈지요. 하지만 아일페사스의 표정엔 미소 비슷한 것도 없었습니다.
“코볼드들이 저희들을 확장시키고 싶어하는 것 같군. 존중해야겠지?”
왕은 주춤 물러났습니다. 저 멀리서 빠른 발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흥분에 미쳐버린 듯한 숨소리,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렸지요. 왕은 주위를 둘러보 다가 조금 전 무너져내린 바위들 중 하나로 뛰어올라갔습니다. 그가 바위 정상에 섰을 때 격분한 첫 번째 코볼드가 무너져내린 바위굴에서 포효하며 뛰쳐나왔습니다. 그것은 화산 폭발과 지진, 그리고 암반 붕괴에게 배운 듯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시에프리너! 시에프리너! 시에─프리너—!”
코볼드들이 용출하는 지하수처럼 동굴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