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31화
음….
지금은 이미 해가 져서 하늘엔 구름 몇 조각이 달빛을 받으며 천천히 흐르고 있다.
현재 내가 서 있는 메인 건물의 입구는 물론이고, 건물 앞의 넓은 공터 역시 항상 여기저기 세워진 수십 개의 기름 횃불로 밝혀져 있다.
조금 먼… 약 3, 40미터 정도 되는 거리에서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이 대충 보일 정도니까, 상당한 밝기인 셈이다.
아-!
갑자기 월영당주의 짧은 검이 번뜩이며 수십 개의 검광(劍光)을 형성하고 있다.
그 검광에 둘러싸인 총관, 꼼짝없이… 어, 슬쩍 상체를 옆으로 틀었을 뿐인 것 같은데 말짱하네?
아니, 상체를 틀면서 아래로 내려트린 한 손이 뭔가 했나?
그의 손이 뭔가 튕겨 내는 걸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
“과연 혈마검호로군! ‘분광가검식’을 저렇듯 쉽게 와해하다니..”
어디선가 낯익은 음성이 탄성을 섞어 흘러나왔다.
본격적인 관람(?)을 위해 입구의 석재 계단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나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말한 모양이다.
언뜻 돌아보니 화이트 롱 수염 노인네, ‘야후’ 장로와 그의 제자 한 명이었다.
“허… 소운연 당주의 검법이 더 엄밀해지고, 보법의 안정성으로 보아 공력도 많이 진보한 것 같으니, 허허.. 지 총관이 오늘 고생 좀 하겠습니다.”
야후 장로는 인사 대신 그렇게 말하며 내 옆에 서서는 한 손으로 여유롭게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저 두 남녀… 본래 사이가 안 좋아서 툭하면 싸웠던 모양이지?
음…
야후 장로 정도의 안목이야 없겠지만, 나도 그동안 비록 ‘가상 현실’이긴 해도 초고수들의 대결을 지속적으로 관찰해 와서 그런지 지금의 싸움이 어느 정도는 눈에 들어왔다.
일단… 총관이 한 수 위의 고수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현란한 동작으로 총관 주위를 날아다니며 연신 검광을 뿌리는 월영당주… 그 날카롭고 살벌한 공격을 총관은 그다지 크게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막아내고 있고…
게다가 지금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작은 부채였다.
흠… 그리고 저건 검기(劍氣)인가?
월영당주의 검 끝에서 발출되는 것이 내 눈에 확실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총관 주위가 마치 총이 난사되는 것처럼 흙가루가 튀며 패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월영당주가 공격을 멈추고는 총관으로부터 조금 멀리 몸을 날렸다.
잠깐 숨을 돌리려는 건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흥! 칠비폭(七匕爆)!”
월영당주가 그렇게 외치며 왼팔 소매를 크게 휘두르자, 그 소매 안에서 작고 가느다란 화살촉 같은 것들이 총관을 향해 쐐애액! 쏘아졌다.
총관은 크게 놀라는 기색으로 몇 걸음을 물러서며 부채를 펼쳐 휘둘러 그 암기들을 막아냈다.
에-? 뭐야?
월영당주의 암기들이 날아가며 웬지 빛을 내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총관의 부채에 부딪치는 순간 파악! 하고 불꽃을 일으키며 폭발한다.
“소당주! 당신 정말 이러기요?”
“잔말 말고 각오해욧!”
노기를 띤 총관의 고함에 표독스런 음성으로 받아치며 월영당주의 공격이 재차 이어졌다.
칠비폭인지 뭔지 하는 암기 때문에 부서지고 타버린 부채를 버린 총관은 할 수 없이 월영당주의 공격을 맨손으로 방어하기 시작했다.
이제 현격하게 밀리기 시작하는 총관…
후… 하지만 정말 대단한 걸?
유연하게 피하는 것도 피하는 거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저 빠르게 엄습하는 검날의 면을 손가락으로 퉁겨 밀어낸다.
하핫-! 평소엔 무뚝뚝한 중년 선비 정도로만 보이던 총관이지만 싸우는 모습은 정말 멋지다.
음- 근데, 그러고 보니 총관은 왜 계속 방어만 하는 거지?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월영당주를 쓰러트릴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아차차! 톡! 톡! 톡!
“몽몽, 저거 녹화 떠놔. ..아, 그리고 지금 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을 수 있을까?”
두 사람은 싸우면서 계속 뭐라 말다툼을 하는 것 같은데, 거리가 멀다 보니 내가 확실하게 들을 수 있었던 건 고함을 지른 것뿐이었다.
[두 가지 다 가능합니다만, 영상 녹화는 많은 데이터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누적된 데이터 때문에 앞으로 12시간 13분 11초 분량의 저장 공간이 허가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런… 몽몽이라고 무한대의 기억 용량을 가졌을 리 없는데, 그간 내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나?
조만간 데이터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좀 하시오. 부끄럽지도 않소?”
“흥! 내가 왜 부끄럽겠어요? 천하의 혈마검호께선 나 같은 하수와 다투는 것이 부끄러울지 몰라도…”
“그렇게 비꼬지 마시오. 소당주 아니, 운연…”
“무슨 염치로 내 이름을 불러욧!”
“운연, 이미 곡주님도 뜻을 바꾸셨다고 하잖았소. 난 당신을 위해…”
“닥쳐욧! 내가 당신이 기르는 화초인 줄 알아요? 내가 곡주님께 다시 청을 드리고 말 거예요!”
“운연, 제발… 이러지 마시오.”
“흥! 오늘은 적당히 끝내지 못해욧!!”
월영당주는 카랑카랑하게 외쳤다. 그리고 갑자기 뒤쪽으로 몸을 날렸는데, 멈춰 섰을 때는 어느 사이 검을 왼손으로 바꾸어 들고 있었다.
이어 오른손으로는 허리춤에서 웬 시커먼 채찍을 꺼내 들었다.
그 채찍을 총관에게 휘두르기 시작했는데, 맙소사! 후황! 횡!! 휘두르는 소리도 장난이 아니고 채찍이 친 땅바닥은 아예 펑펑 터져 나간다.
세상에, 무슨 여자가… 곱상한 얼굴과 달리 엄청 터프하군. 어쨌든… 그로써 대화는 중단!
흠… 저 ‘터프 우먼’이 나에게 뭘 청하려고 해서 총관이 저렇게 막고 난리인 걸까?
그리고 저 두 사람 사이… 어째 좀 수상하군.
주위를 슬쩍 돌아보니, 야후 장로는 그저 허허거리며 나보다도 더 흥미롭게 싸움을 지켜볼 뿐이었지만, 소교와 동생들은 아까부터 난처한 표정인 것이 뭔가 알고 있는 눈치다.
“뭐, 보는 우리야 재미있지만… 저 두 사람, 대체 뭣 때문에 저렇게 싸우는 거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슬쩍 운을 띄어 보았더니, 대뜸 야후 장로가 입을 열었다.
“전들 알겠습니까. 허허- 남들 보기에 사소한 일 가지고도 종종 싸움을 벌이곤 하는 터… 뭐, 부부싸움이란 것이 다 그렇기는 하지요.”
부부싸움…? 흠, 역시….
“허허헛-! 그러고 보니 저 두 사람이 맺어진 것이 벌써 7년이나 되었군요. 그동안 두 사람이 싸운 횟수가… 일흔한 번이던가… 두 번이던가…”
이 노인네, 별걸 다 세고 있었군.
그건 그렇고, 총관과 월영당주는 결혼한 후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저렇게 무지막지하고 살벌하게 싸웠다는 건가?
최근 1년 정도는 같이 안 있어서 못 싸웠고…? 거참, 무슨 부부가…
“못 본 사이 높아진 공력을 내게 자랑하고 푼 모양인데, 좋소! 내 상대해 주겠소!”
총관의 노기 띤 음성이다. 흠… 이번엔 진짜 화가 난 것 같은데…?
내가 잠깐 한눈판 사이 총관의 옷자락이 좀 찢겨져 나가 있었다. 피가 나는 부상 같진 않지만… 어쨌든 채찍 공격이 생각보다 매서운 모양이다.
“미령, 검!”
총관이 오른손을 이 편으로 내밀며 외치자, 내 뒤에서 무언가 획! 던져지더니 총관 쪽으로 날아갔다.
미령이의 ‘한혈검(寒血劍)’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