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4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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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총관은 구출 대상과 그 주변 상황에 대해 그간 수집한 자료를 이들에게 모두 제공해.
세 사람은 우선 그거 다 보고… 거기엔 여기 구월화의 진술 내용도 있겠지만, 직접 본인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좋겠지.
그리고 구출 작전이 세워지는 대로 내게 먼저 보고하도록 해.”
“존명!”
세 명의 당주가 동시에 포권하며 절도 있게 대답했다.
상당한 사이코에 껄렁한 바람둥이로밖에 보이지 않던 고시리 당주도 제법 진지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음… 저희들이 직접 현장과 상황을 확인한 후에 작전을 세우는 것이 좋을 듯 하니, 일단 한 달 정도 기간을 주셨으면 합니다만…”
만독당주의 조심스러운 말이었다.
당근, 말밥… 그 어떤 작전이든 현장 답사는 중요하다.
하지만 그 현장 답사를 한 달씩이나…?
총관 말로는 목적지까지 가는데 말 타고 삼일인가 걸린다고 했다.
가고 오는데 일주일 정도 빼도, 최소한 삼 주 정도를 상황 분석에 투자하겠다는 거다.
음, 과연…
나는 말없이 웃으며 만독당주를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만독당주는 조금 당황한 표정이 되어 황급히 입을 열었다.
“꼭 한 달이나 걸린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보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냐, 아냐… 오해하지 마. 나 지금 진짜 진심으로 웃은 거야.”
제기… 맘대로 웃지도 못하겠네.
난, 나 좀 믿어 줘…라는 표정을 애써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문득, 만독당주처럼 신중한 사람을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이번 일… 소신껏 진행해 봐.”
“허허….”
만독당주는 조금 쑥스러운 기색의 웃음소리를 냈다.
다른 두 당주들도 크게 내색은 안 해도 어쩐지 매우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어쩌면… 자신들의 주인인 내가(?) 평소엔 맛이 가 있지만, 역시 전투 지휘 때만은 정상이다,라는 걸 확인한 기쁨인지도….
세 명의 당주와 구월화.
이번 작전의 주축이 될 인물들을 보안에 특히 주의할 대화를 나누기 위한 장소라는 이 대청각 건물 안에 자리한 안가(安家)에 보낸 후, 나는 잠시 더 자리에 머물러 앉아 있었다.
대충 오늘 일들을 되짚어 보며 특별히 잘못된 것이 있었나… 하고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진 것이었다.
특별히 말실수 한 건 없었던 것 같고… 해야 하는데 안 한 것도 없는 것 같고… 음… 그밖에 장기적인 관점에서 잘못 진행될 만한 일을 벌인 건… 음… 그런 것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어쨌건 그간 골치 아팠던 일의 대부분이 일단락 지어진 것 같으니까 말이다.
흐흐…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서 대교 자매들에게 턱짓하며 외쳤다.
“얘들아, 가자!”
뒷짐을 진 자세로 장포를 휘날리며 슬로우 모션(?)으로 대청각을 나서는 나 ‘극악서생’…
백그라운드로 빠~밤~! 빠바 바바 빠바바~~~~!
이연걸 주연의 영화 ‘황비홍’의 배경 음악을 까는 황비홍 모드(?)를 혼자 연상하며 웃었다.
흐흐… 내가 지금 기분이 좋은 원인… 그건 지극히 소박(?)하다.
“오늘 내 방 당번이 소교 너지?”
“예, 곡주님!”
나는 내 옆으로 바싹 다가와 걷기 시작한 소교에게 씨-익-! 웃어 보였다.
“금주는 어제가 끝이다. 무슨 말인지 알지..?”
살포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소교의 옆얼굴이 새삼 사랑스럽다.
그래… 오늘밤은 저 귀여운 것이 앙증맞은 손으로… 술잔을 채워주겠지?
“역시 자주 즐기시던 백화주로 하시는 것이 어떨지…”
“나야 쐬주가 최고지만, 백화주도 나름대로 괜찮지.”
“..쐬..주.. 라고 하셨습니까?”
“후후… 그런 게 있어. 본명(?)은 그냥 소주지만 일명 ‘두꺼비’라고 불리는 천하의 명주가…”
“송구스럽습니다. 소녀는 견문이 넓지 못해 그런 귀한 술은 잘 알지 못합니다. 가르침을 내려 주시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흐… 모르는 게 당연하지. 니가 우리 대한민국의 대중주 ‘쬐주’를 알면 그게 견문이 넓은 정도겠냐?
“안됐지만… 내가 말해 줘도 소용없어. 지금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술이니까.”
내가 피식거리며 하는 말에 소교는 그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올려다보더니 낮게 한숨을 내쉰다.
“어… 이봐, 그 소주 얘긴 아쉬워서 그냥 해본 소리였어. 지금에 와서는 나도 못 구하는 술이니까 공연히 부담 갖지 말라구. 그리고 그 뭐냐, 그 소주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술은 아니고 말야…”
나는 내 처소로 돌아가면서 소교와 동생들에게 ‘소주’라는 술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에… 코리아 교 역대 교주 중의 한 분이 말이야.
신도들에게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술이 존재하길 바라셨어.
코리아 교는 음주가무를 즐기는… 그런 면에서는 아주 개방적인 종교였거든.
음… 몇몇 재능 있는 신도들이 그 뜻을 받들어 그 ‘소주’라는 것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는데, 보해 소주라던가, 선양, 진로… 종류도 꽤 많지.
에… 말하자면, 소주는 코리아 교 신도들이 가장 흔히 마시는 술인데 그냥 먹으면 아주 쓰고 향도 개판… 아니, 어쨌든 상당히 안 좋아.
하지만 일단 차게 식히면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지.
안주로는 바다 새우… 가루를 개어 튀긴 ‘새우깡’이라는 하급(?)에서부터 ‘김치’라는 코리아 교 특유의 야채 절임 음식을 끓인 찌개류…”
엄청 신비로운 이야기를 듣는 듯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는 대교 자매들 때문에 나도 공연히 흥이 나서, 말도 안 되는 말을 막 갖다 붙이고 멋대로 각색하여 계속 지껄이다 보니 어느 사이 처소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세 명 모두 방안의 탁자에 앉히고는 소주와 그 안주에 관한 강의(?)를 계속했다.
“후… 어떻게 보면 소주만큼 안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술도 드물 거야.
그건 사실 소주가 가진 좋지 못한 맛을 없애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는데… 소주 안주가 자꾸 발달하다 보니 오히려 서로 너무 잘 어울리는 궁합이 탄생하여 나중엔 소주 없이는 안주가 제 맛이 안 나는 경우까지 생기게 되었지.
코리아 교의 주당들은 그 안주가 되는 음식을 보면 먼저 소주 한 잔을 떠올리곤 한다…고 하더군.
음… 대표적인 것이 싱싱한 바다 생선회인데… 흐흐… 역시 두꺼비에는 생선회가 가장 죽이지… 흐흐… 으으….”
막상 생선회 얘기까지 하다 보니까 진심으로 입안에 군침이 고이며 웃음이 신음(?)으로 바뀌고 말았다.
소주… 소주에 생선회 안주라… 이럴 줄 알았으면 부대에서 PX 병 족쳐서 소주 몇 병 꼬불쳐 나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하지만 제대하고도 소주 한 잔은 커녕 구경조차 못할 줄 누가 알았나? 빌어먹을…
“후우… 곡주께선 시서화(詩書畵)… 모든 재능이 하늘에 닿아 계신데, 주도(酒道)마저 그토록 깊은 경지이시니, 미천한 소녀들의 보필이 미흡하여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응…? 아, 그게 아니라… 주도는 무슨, 그냥 마시다 보니까… 어이- 소교야.
난 지금 백화주 정도면 만족하니까 그렇게 신경 쓰지 마. 음… 그러고 보니 백화주에 생선회도 괜찮겠는걸?”
내 말이 끝나자마자 소교는 슬쩍 창 밖을 살피고는 포권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시간이 다소 있으니, 반드시 싱싱한 생선회를 준비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한 경우를 빼곤 난 해가 져서 어둑어둑 해질 때에야 술을 마시곤 했다.
지금 창 밖에 보이는 태양의 위치로 판단했을 때, 대충 1-2시간 후면 해가 질 것 같았다.
소교 태도로 보아 그 시간 동안 횟감이 될 만한 민물고기를 잡아오겠다는 것 같은데…
내가 말릴까 말까 잠시 망설이는 사이 소교는 벌써 서둘러 문 밖으로 나가 버린 후였다.
후… 그 사이 나도 남들 부려먹는 일에 익숙해져 버렸나?
내가 뭐 좀 먹고 싶다고 한 말 정도에 목숨 거는(?) 모습을 보면서 미안한 감정이 별로 들지 않다니…
어차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런 식으로 처리되는 것이 이 곳의 정상적인(?) 흐름이라는 것도 알긴 하지만… 음… 어쩐지 조금 찝찝하군.
쓴웃음을 짓는 나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해 온 것은 ‘돌발 소녀’ 소령이었다.
“저어… 그 소주라는 술에 정말 두꺼비도 조금 들어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