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4화
[ ‘장명’이라는 이름의 인물은 이 시대에 2명이 존재합니다. 그 중 장청란이라는 이름과 연관된 인물은 현재 위치에서 북서쪽 58.6km 정도로 추정되는 위치부터 세력권을 형성한 ‘해남파’의 인물로서…]
그래, 너 잘났다. 크기에 비해 터무니없이 많은 기억 용량을 가진 이 미래 기계야!
“임마! 추려서 얘기해. 아니… 일단, 화천루(化天樓)에 대해서 말해봐.”
[ 화천루는 이 시대에서도 최초 구성 시기 미상의 단체입니다. 성향은 ‘정(正)’. 시조의 무공 수위를 기준으로 하는 이 시대 사회의 영향력 평가 기준은 상위 1% 안에 속합니다. 제 데이터 상 가장 최근의 활동 상황은…]
더 들을 것도 없었다.
무협지 식으로 하면 정파의 ‘강력 울트라 신비문파’의 인물이 관련된 사건이 발생했다는 얘기였다.
물론 그렇게 말하자면 이쪽도 ‘울트라 캡 사악한 마교’쯤 되겠지만…
나는 일단 현재 상황에 대해 조금 더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대교에게 시선을 주었다.
“야후 장로가 습격을 받았고… 그다음은?”
“장로님과 우리 측 일행의 피해, 상세한 교전 결과는 아직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야후 장로께서는 조금 전 장명을 생포하여 무사히 곡으로 귀환했다고 합니다.”
음… 자세한 건 직접 가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취각주..! 담에 올게.”
나는 간단하게 비취각주에게 인사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야후’라는 늙은 장로를 잘 알고, 걱정되어서 술자리를 끝내고 일어선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두 달 가까이 이곳에서 ‘왕변태’의 신분으로 살면서 느낀 것은 아무리 내 원판이 그 명호처럼 극악무도한 인간이라고는 해도…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이곳의 인간들이 날 떠받든다는 점이었다.
공포와 두려움에 의한 복종… 그 외에도 이들이 날 추종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원판’이 아무래도 ‘극악’뿐이 아닌 어떤 지도자적인 카리스마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암튼… 중요한 것은 현재까지의 내 판단으로는 내가 이 시대에서 돌발적인 위기 상황을 만난다면 그 것은 ‘외부’에서 찾아 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 ‘진’이라는 여자가 오기까지 살아남으려면 신경 쓸 일은 써야 했다.
그 외부의 위험…
막상 얘기를 들어보니 참 허무했다.
희고 긴 수염이 멋진 노친네, 야후 장로는 내가 비취각에서 보고를 듣고 바로 이 ‘대청각(臺廳閣, 말 그대로 업무처리 하는 곳)’으로 나온 것이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들어왔다.
“허허… 급한 일도 아닌데, 공연히 아랫것들이 부산들 떨어 곡주의 주흥을 깬 모양입니다.”
그렇게 사람좋고 인자해 보이는 웃음과 함께 시작한 롱 수염 노친네의 ‘보고’는 대충 이러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시간 전.
과거 야황살후(夜皇殺厚, 이 동네는 명호에 殺자 정도는 기본으로 붙는 것 같다)로 명성을 떨친 바 있는 이 노친네에게 ‘장명’이라는 애송이가 감히 떨거지들을 이끌고 도전해 온 것.
언제 손봐줬는지, 기억도 잘 안 나는 ‘오상’이란 인물이 그 장명의 처가 쪽 되는 모양이란다.
암튼, 과거나 지금이나 ‘거물 마두’인 야후 장로와 세 명의 제자 일행은 사건 발생 30분 만에 가뿐하게 종결 짓고 룰루루~! 돌아왔단다.
약 20여 명의 해남파 무사들을 몰살시키고, 생포한 장명은 그래도 일파의 중견 인물이므로 나름대로 대우를 해주어 데려왔고…
귀환하는 동안 그 장명을 구하기 위해 해남파로부터 두 차례의 습격이 더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장로의 제자들 중 두 명도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아주 경미한 부상이었다고 야후 노친네는 말했다.
“..별로 경미한 부상이 아닌 것 같던데?”
내가 반문하자, 야후 노친네는 조금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의화각(醫華閣, 이곳의 사설 병원)이 비취각에서 더 가까워서 난 이 노친네에게 오기 전에 그 ‘경미한 부상자’들을 보고 왔었다.
처참하게 일그러지고 푸르딩딩한 멍으로 얼굴을 도배하고 쌍코피를 명주필로 막고 누워있는 두 사람…
난 처음엔 에이리언 두 마리가 사람의 복장을 하고 침상에 누워있는 줄 알았다.
야후 노친네는 자못 근엄한 얼굴을 하며 한 손으로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허허.. 이 늙은이가 한동안 그 놈들 수련하는 걸 챙기지 않았더니…
아, 글쎄 해남파의 떨거지들을 상대하면서 아무리 경미하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부상씩이나 당했지 뭡니까…”
“….각각 손등과 어깨에 입었다는 가벼운 찰과상 말이로군.”
어이가 없었다.
제자들이 좀 수준이 떨어지는 상대와 싸우다가 실수로 조금 다쳤기로서니 그렇게 무자비한 ‘구타’를 자행하다니…
겉모습은 곱게 늙은 ‘관운장’인데 성질머리는 ‘장비’인 모양이다.
내가 달리 할 말이 없어 입맛을 다시고 있자, 내 의자 옆에 서 있던 총관 혈마검호(血魔劍豪)가 입을 열었다.
“그 연세에도 장로님의 공력은 날로 더 진보하시니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허나… 이번에 생포하여 곡내로 끌고 오신 그 천진수(天震手) 장명은 아시다시피 냉화절소(冷華絶笑) 장청란의 친삼촌인데…”
“본시, 강호에 떠도는 소문이란 과정이 많은 법.
난 그 냉화절소라는 애송이가 화천루의 전인이라는 말을 믿지 않소!”
장로가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단호하게 선언했다.
총관은 씁쓸하게 웃으며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보내왔다.
눈치를 보니 저 노인네, 일단 저지른 일이니까 우기고 보자는 의도인 것 같았다.
“저기… 일단 일어난 일이니까.
일단 대책에 대해서나 얘기해 보자구.
그… 냉화절소인가 하는 놈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총관 생각은…?”
내 말에 총관은 웬지 어색하게 웃었다.
나도 알지만 당신 생각은 어떠냐고 나름대로는 머리 써서 물어본 건데 왜 그래?
“저… 냉화절소는 ‘놈’이 아니라, ‘년’입니다.”
에…?
“아…하!하…! 여자…였었지? 참…”
“무림에 출현한 지 1년이 채 지나기 전에 천하사미(天下四美)라는 말을 천하오미(天下五美)로 바꾸어 놓은 소녀…
뭐, 아직 저도 직접 목도한 바는 없습니다만…”
음, 드디어 떴군!
초 절정 미모와 무공의 여자 고수라…
문득, 무지하게 궁금해진다.
겨우 시녀로 근무(?)하는 대교 자매가 저렇게 살벌하게 예쁜데,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