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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50화


잠시 기다리고 있자, 창고 곳곳에 매복하고 있던 자들이 하나둘 내 앞으로 들려 나오기 시작했다.

매복자들은 흑주에게 무슨 혈도를 잡혔는지, 우스꽝스럽게도 숨어있을 때 취한 자세 그대로 동상처럼 굳어진 채 얼굴 표정조차도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문가의 나무 상자 뒤에서 식당의 점소이 녀석이 쪼그려 앉은 자세로, 천장 대들보 위에서는 힘께나 쓸 것 같이 생긴 사내 두 명이 도끼를 움켜쥐고 뛰어내리려던 자세로, 그리고 저 구석에 수북히 쌓인 짚더미 속에서는…. 뭐야 저것들은?

백상은 꼴사납게 알몸으로 얽혀있는 남녀를 내려다보며 잠시 망설이더니 그냥 남녀의 다리를 하나씩 잡고 동시에 질질 끌어오고 있다.
내 참, 별놈들이 다 있었네.
저희 패거리가 사람 도살하려는 현장에 숨어서 그 짓을 하고 있었단 말야?

예전의 나 같으면 우선 뭐라도 걸쳐서 가려 주라고 했겠지만,
그동안 하도 비정상적인 꼴들을 많이 봐서 그런지
그럴 필요성도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음.. 처음엔 그래도 다들 꼴이 우습고, 눈꺼풀을 닫을 수가 없어서 그런지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점도 조금 안되어 보였다.
그러나 이들의 자세나 표정을 찬찬히 살펴보니, 도저히 이건 용서가 안 된다.

점소이 녀석은 비록 이들과 함께 뛰쳐나와 우릴 습격할 자세는 아니었지만, 일을 치른 후 우릴 쩝쩝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입맛을 다시며 재수 없게 웃는 표정이었다. 싸-가지 없는 놈 같으니.

천장 위의 두 놈은 끌어내려지기 전의 위치와 시선 각도를 잘 따져 보면 두 놈 다 미령이를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저 음흉스런 표정과 군침 흐르는 입가를 보면 두 놈이 뭔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뻔하다.

누워서 침 뱉기인지 모르지만, 이 놈들에게 해 주고 싶은 최대의 욕은..
이런 ‘극악서생’같은 놈들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인 남녀 SEX 교육 교재로 만들어진 마네킹 같은 꼴이 된 두 년 놈들…
옆에 미령이도 있고 해서 자세히 들여다보진 못했지만,
지금 여자 위에 겹쳐진 남자의 엉덩이 위치와 두 다리로 남자의 허리를 감아 붙인 여자의 자세를 보면…!

흠, 그나마 이 커플이 가장 동정이 가는군.
한참 열을 올리다가 영문도 모르고 혈을 잡힌 것도 그렇고
지금은 또 우리 앞에서 저 자세로 굳어져있어 얼마나 썰렁한 기분일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 인간들도 결코 봐 줄 기분이 안 든다.

“아이고~ 이게 무슨 날 벼락이람~!”

“으으- 저흰 아닙니다. 곡주님~!”

흑주를 시켜 일단 말만 할 수 있게 했더니 대뜸 아우성을 친다.

“흐흑~! 이 더러운 놈아! 어쩌자고 날 이런 곳으로 끌어 들여서~ 으흐흑-!!”

“이 년아! 어느 안전이라고 소란을 피워! 그 주둥이를 닥쳐야
내가 곡주님께 설명을 드려 살길을 찾을 거 아냐?”

“어허~헝~~!!”

“천신보다도 위대하신 비화곡의 주인이시여! 하늘에 맹세코, 저희는 저 식인왕이라는 놈과 관련이 없습니다! 저희는 그저 밀회 장소를 찾다가 우연히…”

여자는 계속 울고 남자는 목청 높여 설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끄러워 죽겠네!

내가 인상을 쓰며 턱짓하자 흑주는 대뜸 다시 두 남녀의 입을 막았다.
미령이가 옆에서 키득대는 웃음소리를 낸다.
아닌 게 아니라 웃기는 장면이긴 하다.

“뭐.. 내가 보기에도 두 사람이 이 녀석들 일당이 아니라는 건 알겠어. 근데 말이야.. 남자 너! 좀 전에 표정까지 굳어 있을 때,
너의 표정이나 시선이 어땠는지 알아?”

나는 몸을 숙여 두 사람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는 자세로 말을 이었다.

“이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며 무지하게 흥미로워하는 표정이더군. 어서 빨리 죽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죽여 나를 더 즐겁게 해줘-! 그런 표정..! 너 변태지..? 피를 보며 흥분하는 변태.”

“으~우우~”

애써 억울하다는 뜻의 신음소리를 내도 소용없다 이놈아. 아까 니 표정이 얼마나 적나라했는지 알아?

“여자..! 너도 마찬가지야. 니 표정도 만만치 않았다고.”

나는 몸을 일으킨 다음 황성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남녀. 이 상태 그대로 장터 한 가운데에 갖다 놔.”

“존명!”

오늘 가경촌 장터에 구경거리 하나 늘겠군.

“그리고 식인왕과 나머지 놈들은 모두 풀어 줘. 이 마을 관리자에게 얘기해서 곡 바깥으로 나갈 수 있도록 조치하고..”

“예?”

깜짝 놀라서 반문한 것은 미령이였다.

“이 더러운 식인귀들을 그냥 풀어 준다고요?”

“풀어 준다고 했지, 용서한다고는 안 했어.”

“그럼..?”

나는 가능한 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식인왕과 그 일당을 향해 말했다.

“추적은 열흘 후부터 시작하게 할 거니까, 그 사이 재주껏 멀리 도망쳐. 강호에서 도망 다닐 때하고 이 비화곡주가 보낸 사신(死神)들에게 쫓기는 차이를 한 번 느껴보도록.”

——————————

솔직히 나도 성격이 그렇게 착해 빠진 놈은 아니다.
이들이 나와 일행에게 시도했던 악행을 생각하면 당장 내 눈앞에서 죽여 없애고 싶은 기분이다.

하지만 내 의지로 ‘살인’이라는 강을 넘어 버리면…
그럼 난 결코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20세기의 대한민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후에 과연 ‘살인자’라는 죄책감을 지우고 태연히 살아갈 수 있을까?

후… 그래서 실제로 살수들을 보내 이 자들을 죽이게 할 생각은 없다.
뭐, 강호에 원수들이 많아서 비화곡으로 피해 들어온 이들을 다시 내쫓는다는 자체가 저들의 처지를 위기로 몰아넣는 것일 테니, 어쩌면 결국 내 손만 더럽히지 않으려는 얄팍한 자기 만족일지도 모르지만…

제기, 생각이 깊어지니까 괜히 또 열 받네?
우이쒸-! 이 빌어먹을 놈들은 왜 잘 놀고 있는 사람 건드려서 기분 꿀꿀하게 만드는 거야?

나는 기어이 성질을 못 이기고, 생긴 거부터 가장 싸가지 없게 생긴 점소이 녀석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한 대 갈겨주고서야 자리를 떠났다.


“호호… 그 못된 식인귀들, 당장에 죽여 버려도 좋겠지만 꽁지에 불붙은 쥐새끼처럼 도망 다니게 만드는 것도 통쾌하네요.”

확실히 자매들 중에서 가장 비화곡에 어울리는 성격을 가진 건 이 아이 미령이 같다.
아까 보니 미령인 복통이 어지간히 가라앉으니까 당장에 식인왕의 요리용 칼을 주워들었었다.
그들을 당장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아마도 제일 먼저 미령이가 손을 썼을 것이다.

“곡주님, 이제 본단으로 돌아가실 건가요?”

“음… 그래. 술이나 한잔하고 가려 했는데 그냥 가야겠다. 이런 흐름이면… 주루는 더 위험해.”

내 말은 ‘무협지의 전형적인 패턴으로 자꾸 상황이 벌어지니 무협물에서 많은 말썽이 시작되는 장소는 가기 싫다’는 의미였지만, 그런 뜻까지 미령이가 알아들을 리가 없다.
미령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내 말을 생각해 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좀 전의 잡배들 때문에 기분이 상하신 건 알지만, 기왕에 어려운 걸음 하셨는데 가경촌의 명소라는 소호루(素湖樓)에는 들려 보시는 것이 어떨지…”

아까 장신구 파는 노점상이 귀띔해 주었던 술집을 말하는 거다.
그때는 춤과 노래에 뛰어난 미모의 여자가 주인이라고 해서 흥미를 가졌었지만, 글쎄… 지금은 오히려 그 것 때문에 내키지 않는다.

가무(歌舞)에 능한 주루의 여인, 한 예술 하는 등장인물… 대뜸 눈빛이 오가고 멜랑꼴리한 분위기… 어김없이 등장하는 라이벌… 쌈박질…!
이상하게 꼬여서 위기 연속…! 왠지 상황이 그런 식으로 흘러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요즘 갈수록 내가 무협지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있는데, 오늘은 아주 날을 잡았는지 가경촌에 내려오면서부터는 계속 공식 패턴을 밟아 짜증이 난다.
아리따운 아가씨와의 짧고 아름다운 로맨스가 발생하는 흔하지만 마음에 드는 패턴은 생략하고 웬 식인왕에 변태들만 나오지 않나.
하필 대본소용 3류 성인무협물 패턴만 따라가니 원…

내가 정말 소설 속의 인물이라면 작가는 분명, 스토리가 딸린다 싶으면 흥미 위주의 돌발 사건과 에로틱 야설로 지면을 메우는 문제 작가일 것이다.

음… 황성과 백상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돌아왔군.

“곡주님! 하명하신 일을 모두 처리했습니다.”

한 체력하는 고수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는 것으로 보아 뭐 빠지게 뛰어다니며 내가 시킨 일들을 처리했나 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이 두 친구들도 맛난 거 사 먹이겠다고 해놓고 깜빡하고 있었네? 제기… 갈등 때리누만.


한나절 동안 혈랑들에게 국수와 만두만 달랑 먹인 것도 미안하고, 미령이도 은근히 조르고…
결국 난 그게 내 운명의 신인지 작가인지 몰라도 하여간 웬지 누군가가 준비한 무대로 끌려가는 기분을 느끼며 소호루라는 곳으로 향하게 되었다.

가경촌 외곽에 자리한 소호루는 건물부터가 깔끔하고 고급스러워 일단 첫인상은 좋았다.
실내로 들어가 보니 실내 장식이나 종업원들 차림새와 행동에도 모두 기품이 있어, 식인왕의 식당과는 비교조차 미안할 지경이다.
백상이 나서서 최고의 자리를 요구하자, 한쪽이 1층의 무대 쪽으로 트인 이층 난간 자리로 안내된다.

주루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조금 기분이 풀리긴 했지만, 여기 온 건 두 혈랑대원들 때문이니 메뉴 선택은 그들에게 일임했다.
그러나 들어올 때부터 웬지 평소 같지 않고 쭈볏거리는 태도였던 두 혈랑은 메뉴판(이런 것도 있군 그래.)을 들고 버벅댄다.

음… 하긴, 나도 옛날에 레스토랑 처음 가봤을 때 저랬다.
나중에는 그때 가본 곳도 대중적인 식당에 불과했고, 진짜 고급 레스토랑은 장난 아니게 비싼 것도 모자라 메뉴판도 상류층 부자들만 알아볼 수 있게 암호(?)로 써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미령아, 네가 대신 시켜 줘.”

메뉴판이 자신에게 넘겨지자 미령이는 신이 나서 온갖 요리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비화곡 내에서도 상류층 인사들만 상대하는 비취각 출신답게 아는 것이 많은지, 나도 아직 처음 들어보는 요리까지 해서 열여섯 종류의 요리와 다섯 가지 술을 주문해 버린다.
제법 품위를 유지하고 있던 웨이터의 눈이 휘둥그래지는군.

시켜놓고 말리기도 뭐해서 그냥 뒀지만, 나중에 미령이 데려가는 놈은 이 아이 거둬 먹이는 것만으로도 등골 빠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부터도 담에는 절대 데리고 나오지 말아야겠다.

음… 근데 혈랑대 친구들은 왜 이리 인상이 굳어져 있어?
황성은 그렇다 치고 비교적 느긋한 성격에 한 말빨하는 백상까지…

“호홋-! 너무 좋아서 말도 안 나오나요?”

당신 때문에 이렇게 많이 시킨 거라고 놀리는 미령에게 백상은 별다른 대꾸도 없이 싱겁게 미소를 지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식인왕 일당을 만난 이후부터는 이들이 본래 혈랑대 특유의 표정으로 돌아간 것 같다.

경호가 시원찮았다고 곡에 돌아간 후 깨질 걸 두려워하는 건 아닌 듯한데, 지금부터라도 결코 마음을 놓지 않고 경호에 전념하겠다는 건가?

그와 반대로 아까 흑주의 활약을 보고 더욱 안심을 한 눈치인 미령이는 태연히 1층 무대를 내려다보고 있다.

“곡, 아니 형님..! 저기에서 이 집 여주인이 손님들에게 노래와 춤을 보여주는 가봐요. 후후.. 제법 솜씨가 있다고 소문이 나있는 모양인데, 과연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네요.”

미령이의 말투가 어쩐지 자신에 차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난 아직 대교가 노래하는 것 밖에 못 들어 봤지만 대교 자매들 모두 가무에 상당히 능하다고 했다.

악기 다루며 노래하는 건 대교가 제일 낫고, 소교는 시(詩) 전문, 소령이와 미령이는 한 춤 한다지 아마?

“훗-! 이제 보니 네가 사람들 앞에서 솜씨를 뽐내보고 싶은 모양이구나.”

“어머, 그건 아니에요. 전 다만…”

어머..? 음식 나르는 종업원들 왔다갔다하는 거 안 보이냐? 이 아인은 도대체가 자신이 남장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없다.

에휴-! 이미 애초의 계획 망가진 지 오래인데 자꾸 따지면 무엇하리, 술이나 마시자.

나는 첫잔만 모두와 원샷을 한 후, 날라져 온 음식 중에서 마파두부 한 접시만 술안주로 내 앞에 끌어 놓고 천천히 혼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나 의식하지 말고 먹으라고 재촉했지만, 황성과 백상은 이런 고급음식들을 감히 내가 먹어도 되는 걸까.. 하는 표정으로 망설이고 있었다.

“명령이다. 맛있게, 양껏 먹어!”

쯧쯧..! 이제야 덥석 덥석 집어먹는다. 북한의 군대 취사장에 붙어 있다는 ‘식사도 전투처럼’이란 구호가 생각나는군.

음… 나 혼자 한잔 미령이와 한 잔, 그런 식으로 마신 술 기운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아래층이 다소 어수선해진다 싶더니만, 무대 위로 이곳 지배인 정도로 여겨지는 사내가 뛰어 올라갔다.

“오늘도 저희 소호루를 찾아 주신 여러 군호들께 저희 ‘이화’ 아씨를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무대 사회자였나..? 음, 박수치는 분위기로군. 그럼 나도 짝!짝!짝!

“이 곳의 주인이신 이화 아씨께서는 본래 오늘 몸이 불편하여 쉬려고 하셨으나..”

“어허- 그럼 되나. 우린 모두 이화 아씨의 꽃 같은 모습을 보기 위해 온 것인데!”

어디나 성질 급한 친구들이 있군.

음.. 여기저기서 고함쳐대는 자들도 그렇고 대부분 사람들의 기대에 찬 시선들로 보아 꽤 인기 있는 여자인 모양이다.

이름 그대로 자태는 배꽃 같고, 음성은 천상의 옥음이니 하는 아부성 소리들… 미령아, 넌 왜 코웃음을 치고 그러니, 질투할걸 해라.

사회자는 결국은 주인공이 등장하신다..로 말을 맺고 슬쩍 무대에서 내려왔고, 아래 층 무대 뒤에 드리워져 있던 흰 천막이 서서히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하면서 실내는 갑자기 조용해져 버린다.

그렇게 꽤 분위기를 잡으며 등장한 여인-!

에.. 웬 천녀유혼?

얼굴을 반투명의 망사로 가리어 신비감을 연출한 이화라는 여자가 천천히 앞으로 나서자 무대는 온통 그녀의 넓고 치렁한 백의 자락으로 뒤덮여버린다.

저 차림으로 뭔 춤을 추겠냐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자는 무대 가운데에 살며시 자세를 낮추어 앉았다.

“..오늘은 제가 여러분께 몇 곡의 노래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여러 영웅들께선 모자란 점이 있더라도 넓은 아량으로 들어주시길…”

목소리는 제법 듣기 좋은.. 음..? 갑자기 문자 메시지가 뜨네?

< 여성의 음성에 pme97계열의 에너지 포함. 살상 및 위협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것으로 추정. 위험성 1.5 %. >

흐음~! 어쩐지 거리에 비해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린다 했더니만, 음성에 내공을 실어 말했단 말이지?

새삼스럽게 여자를 보니 에너지 그래프는.. 뭐, 별거 아니군.

하긴, 이 곳에서 무공 익힌 사람이 특별한 것도 아니고.. 역시 별로 관심이 생기진 않아서 나는 여자의 비파 연주와 노래는 듣는 둥 마는 둥 술만 마셨다.

“후후.. 저 여자 생각보다는 제법이네요.”

“그냐..?”

“아-! 이백의 시에 누가 저런 아름다운 음률을 조화 시켰을까요?”

“난 아니니까, 묻지마.”

내 시큰둥한 대꾸에 기분이 상했는지 미령이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렇게 술잔 만 기울이시다니.. 아직도 기분이 풀리지 않으셨어요?”

“………”

미령아, 그래서 이러는 게 아니야. 저 여자가 언제부터인가 자꾸 내게 야릇한 시선을 던져서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나 진유준이 그렇게 매력적인 용모가 아니라는 건, 나 자신이 안다. 생전 여자에게 먼저 추파를 받아 본 적이 없는데 왜 지금 이러냐구.

으으.. 결국 또 시작인가? 제기- 좋아, 좋다구. 맘대로 해.

그럼 어디.. 하나, 둘, 셋엣- 획!(고개 돌리는 소리.)

그려.. 내 이럴 줄 알았어. 내가 딱, 쳐다보는 순간 여자가 얼굴을 가린 천을 풀어 던지는 무대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고.. 약속이라도 한 듯 내 시선과 그녀의 시선이 마주친다.

자.. 내가 시선을 떼기 전까지 그녀도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고….

에.. 그럼 이제 이런 상황을 눈치 챈 사내가 실내 어디에서 날 노려보고 있을 텐데..? 어디보자~ 그래, 저 친구로군.

내공 수치가 상당히 높고 살기(殺氣) 수치 그래프가 급격히 올라가는 중인 저 백의 장한. 역시 같은 테이블에 만만찮은 동료들도 있군.

그 다음엔 저 여자가 어떤 핑계를 대고 나에게 접근하려고 하겠지? 음.. 지배인인지 사회자인지가 다시 무대에 올라오는 것으로 보아 여자는 자신의 특기인 노래나 시, 하여간 예술계통 종목에 자신이 상품이 되어 경매(?)를 벌일 가능성이…

“오늘도 변함없이 이화 아씨의 접대를 받을 분은 아씨가 제시한 주제로 가장 아씨의 마음을 끄는 시를 짓는 분이 될 것입니다.”

너무 딱딱 맞아떨어지니까, 이젠 화도 안 난다.

어쩌면.. 아까 내가 생각한, [ 내가 정말 소설 속의 인물이라면 작가는 분명, 스토리가 딸린다 싶으면 흥미 위주의 돌발 사건과 에로틱 야설로 지면을 메우는 문제 작가일 것이다.] 라는 것은 내 오해가 아닐까..?

혹시 대한민국의 대본소용 무협지 작가들은 이 시대 상황을 완벽하게 알아낸 이들로서, 전문 역사 학자들을 능가하는 인재들이 아닐까?

우쒸-! 별생각이 다 나네, 벌써 취했나..?

음.. 그나저나 사회자인지가 긴 두루마리를 아래로 내려 펼쳐 보이고 있군. 거기에 쓰여진 글자가…

[ 英雄之道 ]

뭐라는 거야? 영웅의 도..? 영웅이 갈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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