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51화
어이- 몽몽! 아무리 쉬워 보이는 글이라도 일단 해석은 해줘야 할 거 아냐?
….쳇-! 그래 관두자. 나도 더 이상 상황에 따라가는 건 싫기도 하고.. 의미를 정확히 안다고 해서 내가 정말 시를 짓겠냐 뭘 하겠냐? 개뿔이, 시를 짓기는 고사하고 중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시 몇 개 외우는 대도 머리에 쥐나는 줄 알았었다.
“어.. 오늘은 너무 어려운 걸? 너무 막연하잖아?”
“영웅이라니, 우리 마도의 영웅을 말하는 거겠지?”
“이화 아씨가 본래 정파 출신이니, 이번엔 정파의 도리를 구하는 거 아닐까?”
“이 비화곡에 정파에서 말하는 협의영웅도를 논할 자가 어디 있겠어?”
시제가 뜻밖이었느지,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사방에서 그 것도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하나 둘씩 일어서서 짐짓 목소리를 다듬으며 시를 읖조리는 사내들이 있었다.
“천하영웅이 많다 하나 진정한 도를 얻은 자 드문..”
“굳은 의지로 검신을 갈고 닦아..”
“강호의 정의는 땅에 떨어져 진정한 영웅은..”
뭐.. 나야 한시고 현대시고 간에 아는 게 없지만, 일단 그리 쓸만한 내용은 없는 것 같군. 몽몽이 알아서 뜻풀이 해줘서 그런지, 그냥 너무 평범하다고 할까..? 하여간 밋밋한 표현들만 나온다는 느낌이다.
훗..! 그러고 보니 저 이화라는 여자, 공주병 걸린 거 아냐? 이 많은 사내들을 경쟁시켜 놓고 은근히 즐기는 표정인 걸? ..뭐야, 왜 또 날 봐? 나..? 기대 하덜 마쇼. 대한민국 예비역 하사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말라구.
뭐, 혈랑대들이 칼 쓰는 것처럼 시도 잘 쓴다면 대신 시켜보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이 친구들 시키면 아마, ‘한 칼 하는 우리들 그 힘을 곡주님을 위해 쓰세. 그게 우리 혈랑 영웅의 도..’ 어쩌구 이러겠지?
“후후~ 저런 자들이 감히 우리 형님 앞에서 시를 논하다니. 형님, 이 가소로운 자들에게 부끄러움을 알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미령이 니가 끝내 배신을 때리려는 거냐? 나보고 어쩌라구..?
“형님..?”
“..귀찮아, 임마!”
“우.. 저런 수준 낮은 자들이 시를 운운하는 것이 듣기 싫지도 않으세요?”
미령이 녀석 기어이 귀여운 걸 넘어서 얄미운 경지로 달리는구나. 원판 ‘극악..’놈은 그런 거 잘했는지 몰라도.. 나 진유준은 ‘교양’이란 말과는 38선 그어 놓고 사는 군바리에서 아직 회복(?)이 안 된 상태야.
그러니까- 그렇게 애초로운 표정으로 졸라도 이번엔 소용없어~!!
“시는.. 스스로 즐기는 거야. 남이 즐기는 걸 공연히 트집잡지 마.”
시는 아니지만, 명언(?) 수준은 될 말을 해 주었는데도 미령이는 불만스런 표정이다.
그러고 보니 이 아이도 볼이 발그스래 한 것이 취기가 조금 오르나 보다. 까불지마! 라는 표정으로 이마를 쿡 쥐어박았더니 히잉~! 볼멘 소리를 낸다. 짜슥~!
“이번엔 이 ‘패권웅( 拳雄) 왕정’이 이화 아씨께 한 수 읊어보겠소.”
오- 드디어 나왔군. 아까 이화가 날 쳐다본다는 이유로 날 노려보던 그 등빨(체격?) 좋은 사내…
“곡 밖의 강호는 다툼이 그칠 줄 모르고 의리는 사라져도 산하는 남아있으며 곡 안은 배꽃이 만발하다. 장강은 한 조각 암석수에서 시작되었고 태산은 흙과 돌이 근본임을 잊지 않으니 높고 푸른 하늘도 한 폭의 그림 속에 들어가는구나. 정이 깊으니 어려움에도 님을 만나고 웅지를 버리지 않으니 천하를 품겠다.”
오호~ 좀 하는데..? 난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이제까지의 평범하고 직설적인 문장들보다는 뭔가 있어 보이는 걸?
사방에서 한숨 섞인 감탄사가 터져 나오고, 이화라는 여자도 꽤나 감동한 표정으로 저 친구를 올려다보고 있다.
음.. ‘패권웅 왕정’이라고 했지? 명호로 보아 한 칼은 아니라도 한 주먹 하는 자 일거고, 학벌(?)이 좋아 보이지도 않는데… 거참,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가지고 판단하면 안되나 보다.
“역시 오늘도 왕사부가 이화 아씨를 차지하겠구먼.”
“에이- 항상 정해진 결과인 걸, 무엇 하러 우리가 머리 아프게 시를 지어야 하지?”
“이 친구야, 그가 무슨 시성(詩聖)이라고 매일 이화 아씨 마음에 드는 시를 지을 수 있겠나. 언제인가 미천이 떨어질 걸세.”
“아직 속단하지 말아! 내가 지은 시도 있는 걸!”
“우하하! 꿈 깨시게 이 친구야!”
들려오는 소리들로 보아 우승(?) 후보는 거의 결정이 된 것 같다.
음.. 지금은 좀 취해서 그런지, 아까와 달리 뭔가 내가 해 볼 만한 종목이었으면 나도 한 번 도전이라도 해 볼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목숨 걸 만한 경품이 아니더라도… 뭐, 빨대로 막걸리 빨리 마시기라던가.. 코끼리 아저씨 자세로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열 바퀴 돈 다음 상품 빨리 집어 오기라던가.. 연인들끼리 몸 사이에 풍선 끼워 넣고 눌러 터트리기라던가.. 하여간 이런 종목이었다면, 승패 관련 없이 재미있게 참여했을 텐데 말야.
“..오늘 본녀를 위해 아름다운 문장을 들려주신 여러 영웅들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이화가 직접 수상자(?) 발표하려는 모양이지..?
아함~! 난 어째 좀 졸립군. 몇 잔만 더 마시고 돌아가야겠…
“흥! 자신이 직접 지은 것도 아니면서 대접을 받으려 하다니, 뻔뻔스러운 자로군.”
으윽~! 놀라서 술이 코로 들어갈 뻔했다. 미령이 너 또 왜 그래? 갑자기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그것 두 그렇게 커다랗게.. 으으~ 이미 소호루 안의 사람들이 모두 우리 쪽으로 시선을 모았잖아?
“무슨 말씀이신가요. 소공자..?”
“흥! 좀 전의 시를 패권.. 뭐라는 사람이 지은 게 아니라고 했어요. 이봐요, 당신이 남자라면 솔직히 인정하고, 남자가 아니라면 어디 변명을 해봐요.”
대표로 나서 반문하는 이화를 씹고 미령이는 패권웅에게 그렇게 외쳤다. 남자라면 인정하고, 아니면 변명해라? 그게 선택권을 준 거냐..?
그나마 입을 열어 말을 꺼내려던 패권웅은 이화가 씹으며 자기가 대답을 하고 나선다.
“호호~! 이제 보니 소공자께서 오해를 하셨군요.”
“흥-! 내가 무슨 오해를 했다는 거죠?”
“소공자께선 저의 소호루에 처음 오신 분이라 모르셨던 모양이네요. 패권웅께선 초패왕(楚 王) 같은 신력(神力)을 타고 나셨으나 불행히도 소공자처럼 편안히 학문을 익힐 수 없는 환경에서 태어나셨어요. 본녀는 그래서.. 패권웅 같은 분들께는 가까운 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예외를 두었답니다.”
“그, 그런.. 그런 법이 어딨어요. 단순히 물건을 놓고 경합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어떻게 남의 재능을 빌릴 수가 있다는 거죠?”
“후- 참으로 고지식한.. 그래서 더욱 사랑스러운 소공자로군요.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문장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아무에게나 자신의 문장을 넘겨줄까요? 그만큼, 부탁하는 사람이 절실한 진심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그건 괴변이에요!”
“..분명 조금 전의 시는 유하종 선생께서 지으셨겠지요?”
이화가 말하며 패권왕의 자리 쪽으로 시선을 던지자 패권왕은 얼굴을 붉히며 한 걸음 물러났고, 대신 탁자에 묵묵히 앉아있던 점잖은 인상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렇소. 난 살아오며 내 문장을 팔아 본 일이 없소. 여기 왕형과는 뜻이 맞아 늘 친하게 지내고 왕형이 이화 아씨를 생각하는 깊은 정에 감복해 내 얄팍한 문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해서…”
뭐, 양측 주장의 논리적인 검증(?)을 할 것도 없이 일단 논쟁은 미령이의 판정패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 같군. 처음 미령이가 자신 있게 시비를 걸었던 ‘대리 시험(?)’ 부분을 출제자까지 합세해서 ‘그거 원래 그러기로 한 거야.’라고 해버린 것이다.
미령이는 이제야 민망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힌 채 내게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보내왔지만 나는 공연히 딴청을 피우며 술잔을 채우기만 했다. 녀석아, 그러게 왜 나서고 그래…
“저 유모라는 사람이 대신 시를 지은 것은.. 그래요. 그건 당신들이 멋대로 규칙을 정한 거니, 내가 따질 수 없다 쳐요. 하지만, 내가 보기엔 저 사람의 문장도 대단한 건 못돼요. 여기 계신 저의 형님으로 말하자면…”
“어, 야아~!”
나는 말리고 싶어 황급히 입을 열었지만 이미 늦었다.
“..시재(詩才)는 천래(天來)의 재, 즉 천재(天才)이시며 자미(子美), 태백(太白) 두 시성(詩聖)에 버금가는 신품(神品)이시란 말이오.”
..오- 마이 갓-!
미령이의 엄청무쌍하게 과장된 자랑 때문에 나는 순식간에 모든 사람들의 뜨겁고(?) 따가운 시선을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으으- 미령이 이 대책 없는 계집애야, 너 집에 가서 두고 보자!
“오오- 그런데, 어째서 아직 시문을 내세우지 않았지?”
“글세 말이야. 시성께서 한 마디만 하면 당장에 이화 아씨를 품에 안을 수 있었을 텐데? 하핫!”
“흐흐.. 이젠 개나 소나 다 시성이구만!”
응..? 모오야! 이 것들이-?
“갈!!”
으왓-! ..깜짝 이야!
“함부로 혀를 놀리는 놈들이 누구냐?”
결국.. 황성, 백상 두 혈랑들이 일어서는군. 처음의 일갈에는 무엇보다 내가 먼저 귀청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그나저나, 혈랑들의 살기 등등한 모습에 기가 죽어 찌그러지는 이들은.. 음, 한 삼분의 일 정도..?
나머지 삼분의 이 정도의 사람들은 일견 별다른 행동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표정은 상당히 호전적.. 그리고 패권왕과 그 일파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이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군.
에휴..!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제기.. 그래 싸워라 싸워. 나도 이제 더 이상 숨기고 어쩌고 할 마음도 없다. 여차하면 그냥 내가 ‘극악..’이다,라고 해서 상황 마무리짓고 집에 가서 잠이나 잘란다.
“잠깐, 모두들 진정해 주세요.”
에..? 이화가 나서니까 당장에 험악한 분위기가 진정되기 시작한다.
“제 소호루에서 소란을 피우는 건 용서할 수 없어요.”
찬바람이 쌩쌩 부는 단호한 음성이었다. 그런 그녀의 말에 거의 대부분의 사내들이 일시에 기세를 죽이고는 슬며시 찌그러진다(?). 생긴 건 대단한 미녀도 아닌 것 같은데 사내들에게 영향력이 대단하.. 음..? 이제야 내가 있는 2층으로 올라오며 차츰 가까워져 오는 그녀를 보니 이거.. 생각보다 꽤 미인인 걸?
누군, 100미터 미인이네 어쩌네 그러는데, 이 여자는 가까이 볼수록 그 미모가 더 확실해지는 타입인가 보다.
“흥-!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눈을 가진 자들 같으니..!”
미령이의 노기 띤 말에 이화는 여유롭게 웃는다. 웬지.. 불길한 느낌이 든다.
“후후- 소공자 말씀대로라면.. 저희 소호루는 다시 없는 귀한 손님을 모신 셈입니다. 부디 시성께서 저희의 좁은 안목을 조금이나마 넓혀 주시길 바랍니다.”
우쒸-! 이 상황에서는 대판 패싸움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텐데 이렇게 신사적으로 나오면.. 그러면 나만 곤란하잖아..?
“형님..!”
형님은 개뿔이. 미령이 너 이제 와서 재촉만 하면 다냐? 일은 니가 다 꼬이게 해 놓고…
“거.. 철없는 내 아우 때문에.. 공연히 일이 요란스러워진 듯 하군. 미안하게.. 되었소, 이화 아씨…”
막상 입을 여니까 내가 그 사이 좀 취한 것이 느껴진다. 혀가 자연스럽게 움직이지 않는 느낌이…
“후.. 시성께서 오늘은 약주가 과하신 듯 합니다. 그럼 시성의 시문은 다음 기회에…”
“..아, 난 아직 괜찮아! 지금 하지 뭐!”
이런..! 술 마셨으니까 봐주겠다는 식의 말에 그만 반사적으로 반응하고 말았다. 아이고~ 진짜 일났다.
시성은 커녕 내가 아는 시라고는 고작해야, 고작해야.. 에… 그러고 보니 아는 시가 있긴 있다. 하지만 그건….
에라이, 될 대로 되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그래, 이 시는 나도 안다. 기왕 한 거 계속하지 뭐.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