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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5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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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군대 3년 동안 수시로 머리 속을 포맷하고, 때때로 로우레벨 포맷까지 강요당하며 기존의 ‘감동적인 문학 작품 감상’, ‘전공 분야 지식’ 등의 데이터가 있던 자리에 겹쳐서 ‘직속상관 관등성명’, ‘고참 서열’ 등의 새로운 데이터를 입력당했음에도.. 그래도 살아 남은 악성 바이러스(?)와 맞먹을 정도의 생명력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대중 시! 그게 바로 윤동주님의 서시(序詩)이다. 나 진유준이 외워서 주절거릴 수 있을 정도이니 말해 무엇하랴.

근데 그보다.. 내가 지금 계속 이렇게 지긋이 눈을 감은 채 폼잡고 있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눈을 슬며시 뜨면서 미령이를 보았다. 일단 저지르긴 했지만 차마 딴 사람들 반응을 보기가 두려워 미령이 눈치를 먼저 보게 된 것이다.

“아아~!”

뭐야? 나는 미령이 표정을 제대로 살피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그 한숨소리(?)가 들려온 쪽에 시선을 옮겼다.

“오~ 부디 천녀의 무례를 용서하소서-! 아직 고인의 함자조차 묻지 못했습니다.”

이화였다. 근데 이 여자 표정과 태도가 갑자기 왜 이래? 마치 서태지를 실물로 대한 10대 소녀 팬처럼 거의 맛이 간.. 어, 그럼..?

“모두 귀를 후벼파고 잘 들으시오. 이 분의 성명삼자는 ‘진’자 ‘유’자 ‘준’자를 쓰시며, 세 속의 명리(名利) 멀리 하시는 분이라 아직 명호조차 알려지지 않았으나-“

나대신 미령이가 신이 나서 외치는 터무니없이 과분한 내 소개를 말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이 분은 아래 하(下) 선비 사(士) 두 글자로 자신을 나타내는 쓰시는 분이라오.”

“아..! 이런 고금의 명문을 가지신 분이 스스로를 그토록 낮추시다니, 천녀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겠습니다.”

이화는 가장 선두로 나서 소위 ‘뽕간 표정’이었고 다른 이들도 이화 정도는 아니었으나 대체로 놀라서 감탄하기에 바쁜.. 그런 분위기였다.

운이 좋아 대충 넘어가기만을 바랐는데.. 이런 ‘대박’이라니~!! 음뿌왓하하하하~~!!!

우..으.. 아니.. 너무 표나게.. 웃으면.. 안 되는데… 으..손으로.. 입 닦는 척하며 가리자..! 후흐흐..!!

“자, 잠깐!”

응..? 누구지?

“커험-! 진대가께서는 과연, 근래 드문 명문으로 저를 비롯하여 오늘 비화루를 찾은 이들의 안목을 트이게 해 주셨습니다. 음.. 저 유모도 오늘 경탄을 금치 못했소이다. 허나…”

좀 아까 패권웅의 친구로써 대타 쳤다는 그 남자군. 이름이 유.. 뭐라고 했던 것 같다.

“오늘 이화 아씨의 시제는 ‘영웅의 도’였소.”

에.. 맞다. 주제가 ‘영웅의 도’였지?

“진대가의 싯구가 비록 여인의 감성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명문이라고는 하나, 너무 감상적인 측면이 강하여 ‘영웅의 도’를 표현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오.”

우쒸-! 잘 나가고 있는데 저 자식이 초를 치네?

“그러니, 이화 아씨는 판단에 있어 좀 더 신중을 기하셨으면 하오.”

이화는 그에게 웬지 원망스런 시선을 보내고 있지 만, 다른 사람들은 대체로 저 친구의 말에 동조하는 분위기이다.

그보다.. 잠깐 깜박했었는데, 지금 저 여자를 놓고 시로 경쟁하는 상황이었지? 쳇..! 오늘은 미령이까지 데려온 처지에 이기면 뭐 하나, 아쉽기만(?)하지.

뭐.. 나도 한 교양 한다는 것을 보이는 목적은 차고 넘치게 달성한 것 같으니, 이 정도에서 끝내는 게 더 낫겠다. 사실상 나도 이미 실탄(외우고 있는 시)이 떨어진 셈이기도 하고…

“흥-! 당신은 부끄럼도 모르고 남의 작품을 비방하는군요. 그러고도 어찌..”

“그만, 됐다! 아까도 내가 말했지. 시는 스스로 즐기는 거라고.. 서시가 맘에 안 드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 거지 뭐. 그렇게 따지지 말…”

따지지 말고 얌전히 앉아 있으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미령이가 갑자기 기쁜 표정이 되어 냉큼 앉아 버려서 말을 맺지 못했다. 뭐야? 얘가 갑자기 왜…

“과연-! 그토록 아름다운 서시를 들려 주셨으니, 본문을 듣기 전에 제가 감사의 술을 올릴까 합니다.”

또 기뻐하며 나서는 사람은 이화였다. 술을 따라 주니까 얼결에 받긴 받았는데.. 가만있자, 내가 좀 전에 무심결에 서시라고 말했지? 그럼 그게 시작하는 의미의 시.. 서두, 서문.. 그런 식으로 해석된 건가..?

으으… *됐다. 말 한마디 실수로 사태가 원점으로 돌아와 버렸잖아?

우쒸- 어쩌지..? 이제 정말 아는 시라고는.. 한산섬 깊은 달밤에 큰 칼 옆에 차고..? 으- 이순신 장군의 그 유명한 시도 갑자기 생각이 잘 안 난다.

평소에 하도 ‘화장실 깊은 달밤에 긴 휴지 옆에 차고..’ 어쩌구하는 패러디(?)를 즐겨서 그런가?

아니, 생각이 난다고 해도 그렇지 서시보다 짧은 본시(?)라면 말이 안 될 것 같고…

으~ 빌어먹을! 다들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지 말라구, 부담되게 시리..!

“허허~ 시성께서 술이 모자라신 모양이오.”


누군가의 외침이 있자 이화는 기다렸다는 듯 다시 술병을 들고 다가온다.

어.. 이럼 안돼는 데? 술 많이 마실수록 더 머리가 안돌…

에라이, 그래 일단 마시고 보자.

쭈-우-욱! 커어~!

우~ 하필 꽤 독한 술을 따라줘서 그걸 원샷 했더니 그야말로 핑 도는 것 같다.

그래.. 차라리 술 취한 척 하고 쓰러져 버릴까..?

음.. 좀 치사한 짓 같지만.. 할 수 없지.. 실제로도 지금 꽤 취했기도 하고..

그려.. 조금 헛소리하다가.. 쓰러져 자버리자. 나중에 취해서 그랬다고 얼버무리기로 하고…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엔.. 아직 그대가 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아무 소리나 하겠다고 입을 열었는데 서태지 노래가 사가 나왔네..?

근데.. 가사가 이게 처음이 아니지..?

“..세상은 빨리 돌아가고 있다.. 시간은 그대를 위해.. 멈추어 기다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대의 머리 위로 뛰어다니고.. 그대는.. 방 한 구석에 앉아.. 쉽게 인생을 얘기하려 한다..”

어- 취하긴 취했나 보다. 그 좋아하는 서태지 노래가 군데군데 밖에 생각이 안 나는걸..?

…어쨌거나 이쯤에서 막 내리자. 픽~!

“세, 세상에 이를 어째!! 얘들아, 어서 천심단(天心丹)을..!! 무엇들 하느냐? 어서!!”

과감하게(?) 탁자에 머리 박고 쓰러져 버렸는데, 놀라서 다가오며 외치는 이화의 음성이 귓속을 왕왕 울린다.

천심단..? 그거 혹시 술 깨는 약..?

오- 안돼! 나 정신 차리기 싫어-!!

“저리 비키시오! 어딜 감히..!!”

다가온 이화를 미령이가 밀어내는 기색이다. 휴우~ 다행이다. 기특한 우리 미령이…

응..? 실눈을 뜨고 보니 미령이는 이화의 종업원들이 가져온 약을 지가 먼저 조금 깨물어 먹어 보고 있다.

그럼..?

으으- 안돼 미령아~!!

…빌어먹을! 잠시 후 나는 다시 깨어나(?) 앉아야 했다.

첨엔 입안에 들어온 약을 안 삼키고 버텨 보려 고 했는데, 미령이가 약을 지 입안에서 우물우물 한 다음 입에서 입으로.. 그런 식으로 먹이려고 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그냥 일어났다.

정말이지.. 담엔 절대로 미령이를 데려오지 말아야겠다고 새삼 맹세해 본다.

그나저나 약발은 더럽게 잘 받네. 벌써 어느 정도 머리가 맑아져 오고 있으니…

“후우.. 제가 예전에 운이 좋아 기인을 만나 얻은 비방이 없었다면, 오늘 진대가의 명문을 더 이상 듣지 못할 뻔했습니다.”

기인인지 뭔지 만나면 욕이라도 한바탕 해주고 싶다. 숙취 해소라면 몰라도 잘 먹은 술을 깨게 하는 천인 공노할(?) 약을 만들다니..!

그나저나… 남의 속도 모르고 천만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서 있는 이화. 그리고 여전히 기대에 차 있는 사람들…

이건 또 뭐야, 서시야 본래 시니까 그렇다 쳐도, 서태지와 아이들 노래도 통했단 말야?

“껄껄껄-! 노부가 오늘 이 곳에서 뜻밖의 고인을 만났소이다.”

응..? 왠 점잖게 생긴 노인 아니, 거의 옛날 이야기 에 나오는 산신령 분위기가 나는 흰 수염 할아버지가 이 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고결한 영웅의 정신세계를 묘사한 서시에 이어 필부들의 나약한 정신을 질타하는 통렬한 문장이었소. 진정 감탄했소이다.”

포권하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노인에게 나도 포권으로 인사를 했다.

알아서 그렇게 갖다 붙여 해석해 주니 정말 고마운 마음이 든다.

어쨌거나 20세기의 미국에 있을 서태지에게도 감사해야겠다. 나를 비롯한 수많은 젊은이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며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에 한 획을 긋더니 만, 이제는 나를 위기에서 구해주다니…

“어머.. 귀유옹(鬼儒翁)께서 오신 줄을 몰랐네요. 이화가 인사 올립니다.”

“허허~! 젊은 기재에게 넋을 빼앗겨 이제야 이 늙은 이를 알아보는 구려.”

귀유옹..? 내공 수치 그래프도 상당히 높게 올라가 고, 어째 보통 인물이 아닌 것 같다.

< 귀유옹 최현리. 추정연령 62세. 독문 절기, 혼세권(魂洗拳). 특기 사항, 유림(儒林) 출신으로 박학 다식. >

음.. 선비 출신의 권법 고수라, 특이한 인물인걸?

“반가운 마음에 이렇게 나섰으나, 공연히 방해가 된 것 같소. 노부도 이만 물러나 다음 문장을 들어야겠소이다.”

아, 이런! 서태지의 환상 속의 그대가 ‘마무리’로 들리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으.. 위기는 아직 지나간 것이 아닌가?

하지만 너무나 훌륭한 우리나라 대중가요가 이 곳에서 ‘명시’로도 통한다는 걸 알았으니, 또 그 쪽에서 그럴싸한 거 생각해 봐야겠다.

영웅의 도라는 주제에 어울릴 마무리 곡이.. 음… 뭐가 좋을 까..? 갑자기 생각하려니까 잘 생각이.. 아 그래, 그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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