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69화
성실한 마인….
영화적인(?) 표현으로 보면 잠깐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4년 정도의 기간 동안 그를 지켜본 그의 사부 마검인 월문의 평가대로 그는 정말 성실하게 처음의 결심대로 행동하는 인간이었다. 몇 년의 무공 수련기간 동안 본래의 강렬한 ‘복수심’이 많이 사라져 버린 것은 내가 봐도 안다. 일단 그의 눈빛만 보아도 처음의 그 처절한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처음 말했던, 처음 결심했던 대로 아주 ‘성실하게’ 복수를 시행하는 것이다.
어느 결에 강호에서 ‘혈마’로 불리기 시작한 그가 피처럼 검붉은 옷자락과 머리결을 날리며 멋드러진 자세로 바위 위에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은 마지막 웬수인 성천국주에게 보다 고통스런 시간을 안겨 주기 위해서 일 것이다.
이어지는 장면을 보면,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있자 성천국주는 사방에서 인맥과 돈을 동원하여 사람을 끌어 모으고 대비하고 있다.
보통 무협지에서는 주인공이 최후의 원수를 만날 때 항상 위기를 겪는다. 솔직히, 웬수가 그 정도로 대비할 만큼의 틈을 왜 주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천공도 다른 표국을 작살 낼 때와는 달리 성천표국에 와서는 진로가 그리 빠르지 못했다. 처음 문에 들어섰을 때부터 웬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고수들이 앞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조금 한다 싶은 자들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일 검..에는 아니었어도 지천공의 겨우 이 검 정도도 못 버티고 죽어 나자빠지는 것이다.
결국 주저앉아 떨고있는 성천국주와 지천공 사이를 가로막은 것은 성천국주 성안동의 딸, 지천공의 옛 약혼녀 ‘성가려’였다.
그녀는 너무나 슬프고.. 그리고 아름다운 자태로 두 팔을 벌린 채 눈물을 흘리며 지천공에게 말한다.
“상공, 당신이셨군요. 당신이 살아 있었어요.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전 오직 당신이 살아 있기만을 바랐어요. 당신을.. 이렇게 만날 수 있기만을…..”
아버지를 살려 달라거나 다른 말이 없다. 오직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기뻐할 뿐… 이 여자는 정말 지천공을 사랑했던 것일까?
“…당신의 마음에 감사하오.”
정말 빌어먹게 성실한 마인이요, 복수의 화신이다. 망설이는 제스처조차 없이 옛 약혼녀이자 사랑했던 여자를 그냥 베어 버린다.
“너, 넌.. 악마냐..?”
더듬거리는 성천표국주의 머리 위에 검을 겨눈 채 지천공은 쓸쓸하게 웃는다.
“실망이오. 당신은 좀더 악인답게 최후를 맞기 바랐는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지천공의 검이 성천표국주의 몸을 가른다. 제기- 끔직하다. 몽몽 녀석 정말 왜 이런 장면은 편집 안 하는 거야?
“국주님.. 그 동안 제가 계속 추적해 보았습니다만 아직 아가씨들의 행방은…”
노상에 무릎을 꿇고 지천공에게 보고하는 노인은 예전의 금마표국의 집사였다는 그 노인이다.
다시 장면은 시체들이 사방에 늘어진 어느 건물 안이다. 시체들 사이에 주저앉아 넋을 잃고 있는 한 남자의 앞에 지천공이 서 있다. 본래는 험상궂은 인상이었을 남자가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다.
“..4년 전, 성천표국의 국주에게 두 명의 소녀를 산 일이 있을 것이다. 기억해 내라.”
하늘에 흰 눈발이 날린다. 홍등가로 여겨지는 거리에도 눈이 쌓여 깨끗함과 더러운 이미지가 혼존하고 있다.
붉은 등불이 흔들거리는 어느 초라한 방문을 열고 사내가 들어선다. 눈이 두껍게 쌓인 방갓을 깊게 눌러 써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방안의 여자가 손짓한다.
“이리와요. 먼 길을 오신 분이군요. 제가 곧 따뜻하게….”
“나요, 누님.”
“………..”
지천공은 방갓을 벗고 서글픈 표정으로 반라의 아름다운 여인, 그의 누님을 본다.
“….공이냐..? 네가 왔느냐..?”
“그렇소이다. 천공이오. 내가 왔소.”
“……………..”
지천공과 그의 누나는 한참을 서로를 마주 보며 그렇게 아무 말이 없었다. 이윽고…
“천하는 내가 직접 땅을 파고 묻었다. 그 아이는 너무 약해서 이런 일을 견딜 수가 없었다.”
“………..”
“이 누나는 못되고 음란하여 이런 생활을 즐긴다.”
“………..”
“너는 뭐냐, 어떻게 돌아왔느냐. 이 음탕한 누나를 벌할 힘은 가지고 있느냐..?”
“…..바라는 것이 무엇이오. 누님.”
“…날 죽이고.. 다 죽여라. 이 더러운 세상. 더러운 놈들.. 다 죽여라.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소. 그렇게 하리다. 누님….”
빌어먹을.. 진짜로 자기 누나를 죽여 버린다. 이어 지천공이 미친 듯 날뛰며 마구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 위로 자막이 뜨고 있다.
<이 후 당시 강호상에 알려진 거의 대부분의 인신매매 조직이 지천공의 손에 사라졌다. ‘혈마’라는 그의 명호 뒤에 ‘검호’라는 명호가 붙게 된 것이 이 시기였다. 인신매매 조직에 얽힌 여러 인맥에 의해 수많은 사마외도의 인물들이 그에게 도전하여 그와 싸웠고 그리고 죽어갔다. 혈마검호 지천공이 강호에 일으킨 혈겁은 4년의 세월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후우- 이제 끝인가? 웬지 지친 기분으로 영화(?)를 끝내려던 나는 또 손을 멈추어야 했다.
몇 명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사내들이 지천공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천공이 기습이던 뭐든 공격받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으나 이번엔 좀 달랐다. 지천공이 현격히 밀리고 있는 것이다.
상황은 한동안 이어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의 공세에 밀리던 지천공이 간신히 몸을 가누고 자세를 가다듬고 있을 때…
내게도 아주 낯익은, 그리고 재수 없는(?)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10대의 어린 소년이 주저 없이 자신에게 걸어오는 모습을 지천공은 다소 멍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
“저 마검인 월문의 진전을 이어 받아 당금 강호의 사마제일검으로 평가받는 지천공…”
“……….”
“과연- 이라고 해야겠군. 마극파천대의 정예 고수들과 그 대주의 연수합공으로도 제압할 수 없는 자가 있을 줄은 몰랐다.”
“마극파천대..? 그렇다면 설마 그대가..?”
“진하운이라 한다. 천하 마인들의 주인인 자의 이름이지.”
당시 10대 중반이었을 원판 녀석이다. 조금 싸가지 없어 보일 정도로 소년답지 않게 조숙하고 당당한 말투로군.
“어떤가, 그대. 내게로 오지 않겠는가?”
“………..”
“눈을 보면 알지. 그대는 마검인 월문과 다르다. 복수를 위해서 스스로 택한 마의 길이겠지만 그대는 혼자 사는 법을 모른다. 나와 함께 가자..!”
정말 저렇게 말했나? 잘은 모르겠지만 웬지 설득력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직 지천공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화면이 조금씩 멀어지며 드디어 대단원의 막이 내려지는 분위기이다.
드디어.. 엔딩 자막이 떠오르는 군.
음, 하나 새로운 사실은 총관 스스로 은퇴해서 비화곡에 들어 온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원판이 꼬드겼나 보다. 마냥 미친놈인 줄 알았더니 ‘스카웃’ 능력도 있었던 모양이지? 그것도 그렇게 어린 나이에….
그나저나, 이 시대 인간들, 특히 비화곡 식구들의 이야기는 그냥 듣고 흘려 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공연히 영화화해서 못 볼 꼴 본 기분이 드는 것이 나도 기왕에 ‘복수’를 한다면 화끈하게 하는 쪽을 선호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총관 지천공, 이 인간은 좀 아니 상당히 심했다. 게다가 아무리 이미 신세 망친 여자라고 해도 그렇지 자기 누나는 왜 자기 손으로 죽이고 난리야?
“자남..”
“예! 여기 대령했습니다.”
음, 이번엔 미리 대비했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소령이는 스윽 눈앞에 자남초(구기자)차를 내놓는다.
근래 드물게 오랜 시간 동안 가상 현실, 망막 스크린 기능을 써서 그런지 상당히 피곤하기도 하고 나는 한참을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누워 뒹굴 거리고서야 잠을 이룰 수가 있었다.
다음날 보고할 것이 있다고 찾아온 총관의 얼굴을 나는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제 얼굴에 뭔가 묻었..습니까?”
의아해하며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는 총관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하고 한편으로는 순진해 보이기까지 하다.
“아무 것도 아니야. 왕년의 사마제일검 얼굴을 좀 자세히 본 것일 뿐.”
“허, 허-! 새삼스럽게 왜 그런 말씀을…”
꽤나 어색하게 웃는 총관. 성실한 살림꾼에 성실한 마인이라… 뭐, 나름대로 이 곳 분위기에 어울리긴 하는 군.
“보고 할 내용이란..?”
“아, 오늘 아침 만독당주가 삼홍랑 구월화의 가족들과 함께 곡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지금 대청각에 대기시켜 놓았습니다만…”
어- 맞다. 얼마 전 구출 작전에 성공해서 이 곳으로 오는 중이라고 했었지? 여러 가지로 바빠서(?) 깜박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삼홍랑 구월화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봉황전으로 보내라고 지시하고는 나도 그 곳에 가 볼 생각으로 처소를 나섰다.
봉황전은 비취각 옆에 있는 4층 짜리 아담한 건물인데, 외부 손님이 있을 경우 지내게 하는 사설 호텔 같은 곳이다.
가만있자, 구월화는 2층 207호에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저기 봉황전 입구로 걸어가는 사람들이 구월화 가족들인가? 만독당주가 앞장서서 안내하는 걸 봐도 그렇고 인자해 보이는 중년의 부부와 청년은 간만에 보는 정상적인(?) 인간들이다.
음- 입구에서 구월화가 먼저 맨발로 뛰쳐나오며 감동적인 가족 상봉이 이루어지고 있다. 서로 얼싸안고 난리가 아니로군.
“만독당주 마상민이 곡주님을 뵙습니다.”
분위기 깨기 싫어서 조금 있다가 다가가려고 했더니 만독당주 노인네가 벌써 알아보고 정중하게 인사를 해 온다. 눈물에 범벅이 된 구월화는 아예 땅바닥에 엎드려 내게 큰절을 올린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이 은혜.. 결코 잊지 않겠나이다..!”
가족들 구하는 작전 짤 때도 비교적 침착한 모습이더니 막상 가족들을 만나니 감정이 복받치는 모양이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음란한 여자가 이 여자 맞나 싶어진다.
“항주의 오근명이라 합니다. 어떻게..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 지….”
인사하는 구월화의 양아버지 오근명과 가족들을 보니 웬지 기분이 이상해진다. 이게 도대체 얼마 만에 보는 민간인(?)들이냐 그래.
“후후- 나야 뭐, 만독당주가 보내 온 보고서 읽는 수고 한 것 밖에 없으니 감사는 만독당주에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오.”
음하, 역시 난 너무 겸손해. ..근데 ‘극악..’이 이렇게 착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알고 있겠지만, 내가 이 곳의 주인인 진하운이오. 당분간 이 곳에서 가족간의 회포를 풀며 지내도록 하시오. 달리 필요한 것이 있으면 봉황전에 요청을….”
“그보다, 묻고 싶은 것이 있소.”
음..? 구월화의 양사촌오빠(?)라는 ‘오상’인가? 이 친구는 어째 날 보는 눈이 껄끄럽다 싶더니만 내 말을 끊고 난리네..?
“상아. 너 은공께 무슨 말을 하려고…”
“아버지, 제가 듣기로 비화곡주는 결코 정의로운 사람은 못 됩니다. 우릴 구해준 것도 분명 다른 뜻이 있을 것입니다.”
이거야- 해남파의 일선녀 고화옥보다도 파격적인 걸? 나도 그렇지만, 만독당주 독수라 노인네와 소교 이하 자매들도 살기를 뿜어내기 앞서 어이없어 하고 있는 것 같다.
“장명! 그 더러운 위선자에게 이용당하며 지내 온 세월만도 지겹소이다.”
“오라버니! 더 이상 말하지 말아요!”
구월화가 그제서야 당황한 태도로 그에게 매달린다.
“만약 당신도 우릴 미끼로 월화를 이용하려는 생각이라면 이번엔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오라버니, 제발-!”
이 친구 이거 배짱이 좋은 거야? 아니면 강호인이 아니라서 날(원판을) 잘 모르는 거야?
“월화야. 지난 몇 년 동안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있다. 이제 널 다시 보았으니,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
“상 오라버니 어찌 그런 말씀을…”
쯧-! 어째 그런 대사가 오갈 것 같았다. 그래도 금방 지들끼리 알아서 죽진 않을 분위기는 아니어서, 나는 먼저 싱겁게 웃으며 만독당주에게 말했다.
“..이봐, 만독당주. 기껏 구해 온 다음 저런 소리 들으니까 좀 섭하긴 하지..?”
“허허-”
겉으로야 사람 좋게 웃지만, 좀 전에 몽몽이 경고했었다. 만독당주의 옷 속에 한 방에 집채만한 곰도 죽일 수 있는 독(毒)이 준비되고 있다고….
“만독당주는 이만 가서 쉬도록 해. 자세한 보고는 나중에 다시 듣기로 하지.”
“존명!”
힐끗 오상을 본 만독당주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휘적휘적 자리를 떠난다. 이봐 오상, 알기나 해? 자네 방금 죽을 고비 넘겼어. 이거 너무 친절한 것도 ‘극악..’ 본분(?)에 어긋나는 것 같은.. ..응? 얼씨구-! 이 인간, 기세 좋게 내게 따질 때는 언제고 그 사이 구월화와 ‘둘 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이제 우리 다시 만났구려, 어화둥둥 내 사랑아~
저도 당신 밖에 없어요, 오라버니~
마주보는 눈빛으로 대충 서로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하다. 이봐 들, 기어이 ‘극악..’이 성질 부리는 거 보고 잡냐?
나는 소령이에게 손짓으로 그녀의 쌍 검을 내 놓으라고 한 다음 그 걸 양손에 쥐고 검 날을 마주 쳐, 촹-! 소리를 냈다.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며 제정신을 차리는 닭살 커플-!
나는 손에 쥔 쌍 검의 날을 양쪽 어깨에 걸친 자세로 오상에게 말했다.
“너, 좀 전에 나한테 한 말 다시 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