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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86화


사영이 꼬장(?) 부리는 바람에 망가졌던 그동안의 분위기는 이제 사라져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다가도 먼 산 바라보며 눈물짓는 애잔한 모습으로 나까지 심란하게 했던 소교는 웃음을 되찾았고, 소령이도 심부름 헷갈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접시도 안 깬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사영에게 항상 어느 정도 반항적이던 미령이도 꼬박꼬박 병 문안을 가기 시작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자아- 이제 대교를 위한 준비의 마무리를 할 때가 왔다.
나는 대교가 곡으로 복귀 중이라는 소식을 받자마자 몇 명의 간부를 호출하여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총관, 이 비화곡 내에서 사방 200장 거리 안으로 아무도 올 수 없고 엿볼 수도 없는 은밀한 장소를 수배해 놔.”

“존명!”

“혈랑대는 전원 본단으로 복귀하여 별명이 있기까지 대기한다.”

“존명!”

“마극파천대 역시 전원 복귀하여 대기.”

“존명!”

“비취각주는 대대적인 환영연 준비해. 명목은 마봉 낭자 입곡 환영!”

“존명!”

후우~ 간만에 무지하게 무게 잡고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받은 간부들은 앞다투어 대청각을 나갔고 이제 월영당주 이자 총관의 부인인 소운연만이 외로이 남아 있었다.
나는 손짓하여 그녀를 가까이 오게 했다.

“자네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특별한 일을 맡겨야겠네.”

내 말에 월영당주는 즉각 포권하며 결의에 찬 음성으로 외쳤다.

“월영당주 소운연! 곡주께서 어떤 일을 지시하시든……”

“쉿! 쉿!”

내가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하자, 월영당주는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

“거참. 정보 전문 부서를 맡고 있는 이가 어찌 그리 목소리가 높은가.”

“죄, 죄송합니다.”

죄송은 뭐… 실은 전부터 이 여자는 한 번쯤 쫑크를 주고 싶었다.
전에 정보 유출로 한 번 깨진 후에도 이 여자는 만날 때마다 내가 오히려 무서웠다.
부부싸움 못하게 했더니 그 스트레스를 나에게 풀려는 건지, 아님 순수하게 자신의 일에 대한 의욕이 넘쳐서 그런지 몰라도 어쩌다 간부회의에서 내가 말실수라도 하면 어찌나 꼬치꼬치 따지는지……

“다른 것이 아니고 말야. 자네도 알고 있을 거야. 신수성녀(神手聖女)라는 명호를.”

“예, 물론 알고 있습니다. 신수성녀 조예린…! 10년 전 홀연히 강호에 등장했던 신비의 여인으로써 그 놀라운 의술로 인해 신수라는 명호를 얻었지만… 또한 그녀는 천하제사, 아니 천하제오미 중의 으뜸으로써 당금의 ‘천하제일미’이지요.”

“그래, 맞아. 바로 그녀를 말한 거야. 소당주가 그녀에 대해 좀 알아봐 주어야겠어.”

뭐, 현 시대의 ‘미스 차이나’라고 해야 하나? 얼마나 예쁘길래 이 넓은 중국에서 최고라고 하는지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내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 때문이 아니다.

“저… 아시다시피, 신수성녀에 관한 것은 정파와 저희 사마외도를 구분하지 않고 불가침의 영역입니다. 곡주께선 어느 선까지 원하시는지요.”

“아, 뭐… 그녀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자세히 알고 싶은 건 아니야. 그녀가 이번엔 강호에 모습을 드러낼 것인지. 그렇다면 언제쯤이 될 것인지를 알아내라는 거야.”

소운연 당주는 살짝 눈가를 찌푸리며 뭔가 생각해 보고는 입을 열었다.

“작년과 재작년… 2년 동안 강호에 나오지 않았으니 올해는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작년 여름 장강의 범람이 잦아 주민들의 피해가 막심하였으니 더욱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흠, 그래. 그러니까 한 번 알아봐. 혹시… 여의치 않으면 빨리 말해주길 바래. 자네가 힘들면 천이단에게라도 맡겨야 하니까 말야.”

“반드시 저희 월영당이 곡주께서 만족하실 만한 소식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천이단을 언급하자 대뜸 눈초리가 매서워지며 굳은 어조로 장담하는 소당주.

“기대하겠네.”

후후- 소당주도 바보가 아닌 관계로, 내가 일부러 자신을 도발한 것임은 알 것이다.
그런데도 감정을 숨기지 못하다니, 확실히 소당주는 천이단에 엄청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나 보다.

“소교, 니가 책임지고 양자경에게 좋은 선물을 준비해 줘. 뭐든… 알겠지?”

소당주가 나간 후 나는 소교에게 그렇게 지시했다.
신수성녀에 관한 아이디어를 바로 그 양자경이 제공했기 때문이다.

신수성녀 조예린.
그녀는 천수성자(天手聖者)라는 이름도 비슷한 전대의 명의로부터 의술을 전수 받은 여자인데,
그 출신 사문이나 신분도 불명이고 현재 거주지라던가 기타 신변에 관한 것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말 그대로 신비여인이었다.
강호에 처음 등장한 것은 10여 년 전이라는데, 어떨 땐 매년, 어떨 때는 2-3년에 한 번 정도 등장하여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이 많은 인명을 구했다고 한다.
그녀가 나타날 때 사용하는 교통편(?)은 거대한 신비선(神秘船)인데 장강을 타고 중원을 가로지르며 가난한 서민들에게는 곡식과 재물을 나누어주고 배를 찾는 환자들은 치료를 해주는데 정사마 어떤 인사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게 몇 달인가를 활동하다가 또 홀연히 사라지는…
신비로 시작해서 신비로 끝나는 여자가 신수성녀였다.
본래 미모도 뛰어나겠지만 죽기 일보 직전에 목숨을 건진 자들 눈에는 또 얼마나 아름다워 보이겠는가.
그래서 천하 오미 중에서 그녀는 항상 부동의 1위.

양자경이 그녀를 언급했을 때 내가 주목한 것은 그런 그녀의 전력 때문에 신수성녀라고 하면 강호에서는 성승 못지 않게 인망이 높다는 점이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신비에 성스러움이 더해지고 또 더해져 그녀가 타고 다니는 신비선은 아예 움직이는 ‘성지’가 된 모양이었다.
그녀의 배 안에서는 정사마 누구도 서로 다투지 못하는 것이 불문율이라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여기 창천각 중간보스 양자경, 한참 잘나가던 5년 전인가에 꽤 유명한 마도 고수의 사랑을 받아 그와 함께 강호에 나갔다가 신수성녀를 만난 일이 있다는 그녀의 증언(?)을 들어보자.

“…그때 저희들은 운이 나빠 정파 고수들과 큰 시비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정말 처절한 싸움이었지요.
소위 정파인들이라는 자들이 어찌 그리 잔인하고 집요했었던지…
저는 물론이고 그 사람은 저를 보호하기 위해 더욱 큰 부상을 입고 말았답니다.
그 상태에서도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며 피하던 저희들 앞에 나타난 것이 바로 무심히 흐르는 대하(大河)의 물결이었던 것입니다.
아- 그때 저희의 절망감이란…
그 사람은 결국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고 저를 살리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제가 잠시 방심한 틈을 타 저를 강으로 밀어넣고는…
끝내 추적자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지요.
정파인들을 저주하며 물속에서 의식을 잃었던 제가 깨어난 제가 제일 처음 본 것은 너무나 아름답고 고귀한 자태의 여인…
그래서 처음에는 제가 이승을 떠나 천상에 오른 줄로만 알았지요.
차츰 의식을 찾고 주변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저는 제가 신수성녀의 배에 구조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마도인의 딸로 태어나 그렇게 자라온 저로서는 처음으로 본 겪게 된 경험이었습니다.
배 안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정파의 고수들과 마도의 고수들이 함께 먹고 자며 다툼도 없이 평화로운 모습이라니……”

열흘 남짓 되는 치료 기간이 끝난 후에는 배에서 몰래 하선하도록 도와주기까지 하여 양자경은 무사히 곡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는 것이 증언의 끝이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인하여… 성승과의 동행이 불투명(사실상 거의 불가능)해진 지금 나는 그녀 신수성녀를 성승의 대체 병력(?)으로 꼽았다.
신수성녀의 배에 어떻게 든 탈 수 있으면 그 이후로는 내가 원한 대로 다툼 없는 강호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양자경의 말을 들은 이후 신수성녀의 지난 행적을 요모조모 따져본 결과 올 해,
그것도 내가 강호행을 나서는 비슷한 시기에 나타날 가능성이 많았고 주로 시작되는 곳이 의빈(宜賓) 지방이라니까 여기 비화곡에서 별로 멀지 않고,
비무장소인 목야평도 마침 장강 하류에 위치해 있다.
때맞추어 나타나기만 하면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여객선(?)인 셈인데……

뭐, 세상일이 다 바라는 대로 흘러갈 리는 없겠지만, 솔직히 속으로는 좀 기대가 된다.
이 세계로 날아온 이후의 내 운세대로라면 그런 무협지 전통 단골 신비 여인과 만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도 들고…
까짓 거 안 되면 할 수 없는 거지.
자, 탄력 받아 계속 다른 일도 진행하자 진유준. 대교가 돌아오고 있다.

“몽모옹~!”

[ …예, 주인님. ]

내 딴엔 기분이 좋아 한껏 느끼하게(?) 부른 것에 놀란 것처럼 몽몽의 대답은 평소보다 조금 늦었다.

“자, 결산하자.”

[ 지금까지의 데이터를 정리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전체 항목의 상이한 연관관계가 다수 존재하므로 원하시려면 항목을 먼저 선택하셔야만…… ]

“내, 내 말에 토, 토 달지 마! 그, 그건 배, 배반, 배신 이야. 배신!”

[ …이해할 수 없습니다. ]

“내, 내 말 잘 들어. 내, 내가 하늘 색깔. 하늘 색깔 빨간색, 그러면 그때부터 하늘 색깔 빨간색이야. 빨간색!”

[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현재 주인님은 신체의 이상 증세가 없고 정신도 위험 한계점에 도달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헌데 비정상적인 언어구사를 하고 있습니다. ]

쳇-! 역시 농담이 안 통하는 녀석이로군.
기분이 좋아서 넘버 3의 송강호 흉내로 장난 좀 쳐봤더니만.

[ 긴급 뇌파 정밀 검사로 들어가겠습니다. 약간의 충격을 대비…… ]

“어, 야~! 아냐. 아냐. 장난 친 거야. 그냥 장난이었다고!”

[ …… ]

“그려, 내가 잘못했다. 로봇인 니가 인간의 유머를, 그것도 20세기의 농담을 이해할 리가 없지.”

[ …… ]

“그건 20세기에 유명한 한국 영화에 나오는 대사야. ‘넘버 3’라고…
하여간 나 멀쩡하니까 쓸데없는 검사 같은 거 안 해도 돼 알겠지?”

[ 넘버 3… 제 실시간 가용 데이터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

“내가 잘못했다니까? 자꾸 따지지 말고.
에- 그래, 실은 이제 가상의 대교와 장청란의 모든 데이터를 결산… 아니, 최종 점검할까 해.”

[ 가상의 두 여성에 축적된 데이터는 현재 805회의 비무 경험,
대교 173회, 장청란 216회의 성격 및 재능 치 업데이트가 있었습니다. ]

“현재 대교의 승률은?”

[ 최근 100회의 비무에서 83%입니다. ]

흠, 그 정도면 아주 안심하긴 그래도 꽤 괜찮은 승률인 걸?
자- 이제 이걸 어느 만큼 실제의 승률로 바꾸느냐가 문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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