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88화
- 88 –
대교는 말할 수 없이 신기한 얘기를 듣는 표정이었다.
“환상… 제가 장청란의 환상과 싸우게 된다고요?”
“음, 간단히 말하면 그래. 비록 환상이라고는 해도 최대한 실제의 장청란과 비슷한 수준으로 구성했으니까 지금의 너도 쉽게 이길 수는 없을 거야. 그리고 주의할 것은 이게 비록 환상이라고 해도 말이야. 대교 니가 느끼는 감각… 즉 환상의 상대에게 당하는 상처나 부상까지도 실제처럼 생생할 거야. 미리 각오를 단단히 하도록 해.”
내가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해서 그런지 대교도 새삼 긴장하고 있었다. 사실… 몽몽 말에 의하면 내가 지금 말한 환상(몽몽이 제공할 가상 현실) 속에서의 부상은 현실 못지 않게 위험한 거란다. 최면에 걸린 사람의 손에 차가운 얼음을 쥐어 주면서 이건 불덩어리다…라고 했을 경우, 최면에 걸린 사람은 차가운 얼음에 데여 화상을 입게 되는 것과 같은 개념이란다. 지난 번 몽몽이 대교의 신체를 정밀 스캔했을 때 얻어진 데이터에 의하면 대교는 가상 현실에 대한 싱크로(synchro)율이 상당히 높아서 더 위험하다고도 했다. 그래서 우선 가상 현실의 현실성이라고 할까? 총 10단계로 나누어진 감각인지도 중에서 가장 낮은 10단계부터 시작하기로 했지만… 그래도 불안해서 난 대교에게 몇 번이고 조심하라고 당부를 했다.
“…알겠지? 너무 위험하다 싶으면 즉시 멈춰 달라고 하란 말이야.”
“명심하겠습니다. 곡주님.”
다짐을 받고 나서, 나는 전에 성지에서처럼 대교를 잠시 눈감고 있게 한 다음 몽몽을 팔목에서 떼어냈다. 미리 결정해 놓은 대로 몽몽은 곧 형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번엔 머리띠 형태라… 하여간 재주는 많은 놈이라니까. 몽몽 머리띠(?)를 이마에 부착하고 반미래 여전사가 된 대교. 조금 불안해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더니만 갑자기 놀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이…이럴 수가…! 정말 장청란……?”
가상 현실의 장청란을 만났는지, 내가 보기엔 그냥 허공인 곳에 대고 지껄이기 시작한 대교… 난 걱정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재미있기도 한 대교의 원맨… 아니 원우먼 쇼를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흠! 시간이 좀 지난 것 같은데 왜 말만 하고 대결을 시작하지 않지? 몽몽 녀석 설마 장청란이 아니라 엉뚱한 놈 불러다 대교와 가상 미팅 시켜 주고 있는 건 아니겠지?
오- 드디어, 응…? 가만? 나는 대교가 불쑥 청명검을 뽑아 들고 살기등등한 모습이 되었을 때에야 불현듯 며칠 전에 들은 몽몽의 경고를 떠올렸다.
[ 임시 사용자가 될 여성의 최고 전투력은 사방 50미터 범위까지 파괴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됩니다. ]
아이고~! 몇 번이나 들어 놓고 까먹었었다니! 나는 X됐다!를 외치며 일어서는 즉시, X빠지게 대교로부터 달아나기 시작했다.
[ …때문에 주인님께선 가상 현실의 대전이 시작되기 전, 대전 장소로부터 최소 70미터 바깥의 안전지대로 대피하시길 권고합니다. ]
그래, 그랬었다. 내가 왜 그걸 잊었지? 달리기 시작한 지 채 몇 초가 지나기도 전에 대교가 있는 방향에서 요란한 굉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한 20미터 달렸나 싶었을 때 후웅~!하는 이상한 파열음 같은 것이 들리는가 싶더니 달리고 있는 내 머리 위의 나뭇가지 몇 개가 부서져 떨어져 내린다.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정신없이 더 달렸다. 내 현재 몸… 저도 살고 싶은지, 숨은 벌써 턱까지 차 오르는데도 오늘따라 그나마 발이 계속 움직여 준다. 에구 조금만 더 달아나자. 전투 중에 적의 총탄에 당하는 것도 아니고 남 사격 연습하는 거 구경하다 유탄에 맞아 죽으면 그건 무슨 장렬한 전사도 아니고… 하여간 일단 피하자.
우왓-! 발이 돌부리에라도 걸렸는지 난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허우적대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프다. 무지 아프지만 그보다 쪽팔리다. 누가 봤으면 이게 무슨 개망신이냐 그래. 여자애들 싸우는 장소에서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자빠져 버리다니 으으~. 조금 전 쓰러져 있는 내 머리 위에서 뭔가 위협적인 소리가 난 것 같았지만 내 몸에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교가 가상의 장청란과 싸우느라 사방으로 검기인지 뭔지를 뿌려대는 소리가 다소 멀게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그 사이 꽤 멀리 달아나는데 성공한 모양이다. 에휴-! 그나마 목격자가 없는 것이 다행… 응? 뭐야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이 시커먼 바지… 사람의 다리……?
“너, 넌?”
에구, 흑주다. 그래 이 인간이 있었지? 항상 내 주변에 잠복하고 있는 특급 보디가드 겸 킬러 흑주.
“아, 저- 그게 말이지. 대교가 생각보다 많이 커……”
몸을 일으키면서 공연히 어색한 변명을 하려다 보니 제기, 몽몽이 없지 않은가. 흑주가 한국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으니 더 지껄일 의미가 없군. 현재의 내 꼴사나운 모습을 본 목격자가 아예 없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흑주야 뭐… 내가 화장실 갈 때도 따라오는 놈이니 새삼 의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나저나 내가 쓰러진 다음에 들었던 소리는 아무래도 지금 내 주변에 조각 난 채 떨어져 있는 저 나무 조각들이 낸 소리인 듯싶다. 대교의 검기에 잘려져 나간 나뭇가지, 본래는 꽤 큰 통나무 정도 되어 내가 맞았으면 죽지는 않더라도 어디 한군데 부러졌음직한 크기였는데, 그걸 흑주가 공중에서 조각조각 잘라 버린 모양이다.
“땡큐, 흑주!”
어차피 말도 안 통할 거, 되지도 않는 영어로 감사
를 표한 후, 나는 극악서생이 된 이후 최악의 부상(?)을 입은 상태로 얌전히 대교가 장청란과의 대결을 끝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나무들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교가 있는 장소가 이제 조용해진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그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면서 보니 참 난리도 아니다. 울트라 과장 무협지에서처럼 바위가 날아다니고 산과 강이 쩍쩍 갈라지는 식의 괴변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대전 장소에 가까워질수록 잘려지고 쪼개진 나뭇가지가 떨어져있거나 중간이 부러진 작은 나무들이 쓰러져 있었다. 큰 나무들과 일부 바위에도 눈에 띄일 정도로 패인 흔적이 발견된다. 화력이 약한 기관총을 사방으로 난사하면 이런 상황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아까 내가 달아났던 공터까지 돌아온 나는 조금 놀라서 황급히 대교에게 다가가야 했다. 대교는 아까 앉아 있던 바위 위에서 결가부좌를 튼 채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는데 얼굴에는 식은땀이 잔득 흐르고 있고 입가에는 붉은 선혈까지 내비치고 있었다. 이런 제기, 몽몽 녀석. 처음엔 싱크로 율을 낮게 조종하겠다고 하더니 이건 뭐, 진짜 격렬한 대전을 치룬 모습이잖아? 나는 눈을 감고 운기 조식을 하고있는 대교의 이마에서 서둘러 몽몽을 회수하여 다시 내 팔목에 장착했다.
“야! 몽몽! 어떻게 된 거야?”
[ 안심하십시오. 임시 사용자와 가상 현실 시스템과의 싱크로 율이 계산보다 빨리 상승했습니다만, 치명적인 손실 이전에 시스템을 차단했습니다. 시스템과의 최초 접촉에 따른 정신손실 가능성은 현재 7% 미만입니다. ]
몽몽의 설명을 들으며 다소 안도하고 있는데, 살짝 눈을 뜬 대교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곡주님… 죄송합니다. 소녀가… 패했습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어서 몸이나 더 회복시키도록 해. 그러고 나서 얘기하자.”
“예… 걱정 마시길……”
걱정 말란다고 걱정이 안 되겠는가 마는… 다행히도 창백했던 대교의 안색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거참. 몽몽을 이용해 대교가 장청란과 가상 스파링(?)을 하는 아이디어는 좋았던 것 같은데 본 게임 전의 스파링이 이렇게 살벌해서야 어디……
“후우~!”
마무리인 것으로 여겨지는 긴 호흡소리를 낸 대교가 이윽고 눈을 뜨더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는 말했다.
“세상에, 환상이라고는 해도 너무나 생생했습니다. 곡주님 말씀대로 공격받았을 때의 충격은 각오했지만, 설마하니 환상 속에서 당한 공격 때문에 제가 내상까지 입게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조심하라고 강조한 거였는데… 하여간 그 정도로 끝나 다행이다.”
“…화천루주는 정말 강하군요. 처음 한동안은 평수를 이룰 수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는 계속 우위를 빼앗긴 채 결국에는 치명상을 입을 뻔했습니다. 만약 그 순간에 요하검결의 17장을 응용한 임기응변을 발휘하지 못했다면… 아니, 그 후로도 비무가 계속 진행되었다면……”
대교는 자신이 패했던 상황을 다시 떠올리는지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계속해서 또 뭐라 입안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대교에게 다가가 어깨를 다독거려 주며 말했다.
“애초에 화천루주와 너의 격차는 엄청났었어. 짧은 기간 동안에 이만큼 너의 무공이 발전을 이루어 나는 오히려 네가 대견스럽다.”
“…곡주님의 안배로 내력은 확실히 화천루주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제가 미숙하여 아직 마봉후님의 무공을 완벽하게 펼치지 못합니다. 결국 이기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알아, 그래서 지금부터가 중요한 거야. 두 달 후에 장청란은 널 처음으로 알게 되지만, 넌 그 전에 여기서 장청란과 몇 번이고 싸워 본 후야, 그렇다면 누가 더 유리하겠어?”
“아…!”
대교는 그제야 내 뜻을 이해하고는 새삼 감탄과 존경이 버무려진 시선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 감탄과 존경의 표정은 이내 의아해 하는 표정으로 바뀌어 버린다.
“어머-? 곡주님 볼에 생채기가, 그리고 옷은 왜 여기저기 찢겨지고… 어머! 이 피! 다치셨어요?”
내가 뭐라 변명을 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대교는 평소 같지 않게 조금 호들갑스럽다 싶을 정도로 ‘어머’ 소리를 연발하며 내 몰골을 살폈다. 뭐라 변명을 할까 망설이는 사이, 난 대교에 의해 엄청난 부상자(?)로 취급되어지고 말았다. 대교는 반 강제로 날 바위에 앉혀 놓고는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금창약을 꺼내 아까 도망치다 자빠지면서 까진 내 무릎과 팔꿈치 등의 상처에 바르는 등 한동안 수선을 떨었다. 아주 미치는 줄 알았다. 쪽팔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