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115화 : 위험한 하늘로 날아간 새 (3)
5. 위험한 하늘로 날아간 새 (3)
-자룡대주! 조담 녀석에게, 조금만 참으면 재밌는 일을 하게 해준다,라고 전해 줘.
자룡대주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스마트폰을 든 손을 뒤로하여 상대의 시선을 피하면서 문자를 찍는 것 같았다.
‘복명!’
으음. 문자 메시지 끝에 붙일 수 있는 ‘포권 이모티콘’도 있는 모양이군. 그거야 어쨌든, 자룡대주의 태도가 전반적으로 차분하고 여유로운 것
같으니, 나도 좀 더 안심을 하고 지켜봐도 되려나?
지하 하수도에도 자체 조명이 있는 구역이 있고, 그런 구역은 보통 수로 옆으로 꽤 넉넉한 넓이의 인도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통로의 중간 중간에는 창고나 여하간의 작업을 위한 장소인 듯, 작은 공터 같은 공간도 있었다. 아무래도 하수도 지리에 밝은 살리나가 저렇게 쌈박질하기 좋은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지 싶었다.
그렇다곤 해도, 양 측의 병력들이 동시에 패싸움을 벌이기에는 너무 협소해. 그 점을 의식해서인지 조담측이나 살리나측도 지휘관 급만 공터 안으로 들어와 있고, 양측의 떼거지 수하들은 상대적으로 좁은 통로에 우글우글 모여서 대기하고 있는 형세로군. 우리 쪽이야 당연히 크루버 직속의 웨어 울프 부대지만, 살리나 쪽의 땅개(?)들은 아직 어떤 놈들인지와 대가리 수도 파악이 어렵네. 얼핏 보이는 선두 몇 놈의 외형 분위기로 봐선…………… “진유준님!”
살리나가 입을 여는 바람에, 적의 새로운 전투원들 분석은 뒤로 미루어야했다. 지금은 살리나에게 조담의 정체를 들키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사안이었다.
“초대에는 응하지 않으시더니, 이번에는 직접 이곳을 방문해 주셨군요.”
예상대로 가장 기본적이면서 치명적인 난관으로 시작되는군. 살리나는 지금 영어로 말한 거고, 조담 녀석은 영어를 잘 못해. 그리고 녀석은 나와 달리 몽몽을 가지고 있지 못한 처지이고 말야.
“흣~! 웨인은 쥐새끼라서 이런 곳에 있을 줄 알았지.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군.”
오호. 조담 녀석, 제법 자연스럽게 영어를 구사하는 걸? 물론 자룡대주가 전음으로 알려주는 문장을 그대로 따라하는 거겠지만, 그게 티나지 않게 해냈어! 제법인 걸?
“막연한 추측만으로 이렇게 많은 수의 부하들을 동원해서 보스턴의 지하 세계를 뒤집어 놓으셨다는 건가요?”
“훗. 내가 좀 심심했거든.”
불러주는 대본(?) 따라하는 타이밍이 꽤 빠르고, 대사 자체도 어느 정도 진짜 ‘나’스러웠어. 처음부터 날카로운 눈으로 조담 녀석을 관찰하는 기색이던 살리나의 표정이 조금 흔들리는 것 같지?
언어 문제만 해결되면, 누구라도 조담 녀석이 나와 다르다는 걸 눈치 채기 어려울 것이다. 조담은 본래 프리메이슨에서 ‘진유준의 복제인간 컨셉으로 키워진 녀석이라서 목소리까지 똑같이 내도록 훈련받았던 녀석이니 말이다.
“갑자기 식사 때문에 전쟁을 중단하시겠다고 하더니, 이젠 심심해서 쳐들어 오셨다는 건가요? 정말 예측하기 힘든 분이로군요.”
살리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더니, 문득 생각이 났다는 투로 물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진유준님의 형제분이 보이지 않는군요?”
쳇! 역시 조담 녀석을 의심해서 왔던 거군. 여기서 잘 대처해줘야 하는데, 과연?
“왜 그분에 대해서 묻는 거죠?”
불쑥 끼어든 것은 자룡대주였다. 그녀는 조담 녀석에게 양해를 구하는 척을 한 다음에 앞으로 나서며 말을 이었다.
“그 분은 천주의 집안 분이 맞지만, 우리 조직의 사람은 아니에요. 그 분이 어디서 무얼 하실 지는 그 분의 의지이며, 우리 중 누구도 관여할 수 없어요. 그건 심지어 천주께서도 마찬가지예요.”
잘한다, 자룡대주, 사실은 자룡대주가 조담 녀석의 모든 일에 관여하고 거의 ‘지배’하고 있는 거 같지만, 지금은 조담 녀석을 최대한 띄워줄 때지.
“그렇군요. 그런데 지금 말씀하신 분은?”
“천주 직속 어사조의 부조장, 제니퍼.”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자기소개를 마친 자룡대주의 입가에 상대를 비웃는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당신은 웨인이란 자의 친위대, 살리나, 맞죠? 감히 천주께 꼬리를 쳤다가 천모께 목이 잘렸었다고 들었어요.”
자룡대주가 손가락을 세워 목을 긋는 시늉까지 해보이자, 살리나의 안색이 굳어지며 이를 악무는 기색이 느껴졌다. 수치심과 분노, 어쩔 수 없는 공포 같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담님까지 넘보려는 마음도 있었던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그쪽도 쉽지는 않을 걸요? 그분을 만나기전에 저를 거쳐야할 테니까요.”
자룡대주는 드물게 정장 차림이 아닌, 청바지에 스웨터와 보랏빛 조끼 차림이었는데, 말을 마치면서 조끼의 한쪽을 살짝 열어보였다. 자룡대주는
언젠가 자신만의 특별한 단검을 만들었다고 했었는데, 오늘은 그걸 품에 차고 온 모양이었다.
「주인님! 조담씨 심장 박동이 장난 아니게 뛰면서 표정관리도 안되고 있어욧!」
이, 이런! 자룡대주가 ‘조담은 내꺼’라는 태도를 보이니까, 저 순진한 녀석이 평정심을 잃었어.
-조담! 정신 챙겨! 자룡대주가 헛수고하게 만들 셈이냐?
조담의 귓속에도 무선 장비가 지급되어 있어서, 내 전음이 재빨리 전송된 모양이었다. 조담 녀석이 정신과 몸을 추슬렀는지, 헤벌쭉하던 표정이 수습되면서 심장박동도 안정화 되고 있었다.
젠장! 살리나라면 벌써 눈치깠을 지도… 아, 아닌가? 다행히 저 여자도 자룡대주에게 집중해 있어서 조담 녀석의 변화를 살피지 못한 거 같아. 자룡대주가 자신과 조담의 관계를 강조한 것은, 조담과 살리나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조담의 말실수가 있을 것 같으니까, 자신이 대신 나설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랬는데, 조담의 순진성(?) 때문에 오히려 상황이 나빠질 뻔했던 셈이었다.
“흐음. 제니퍼, 당신이 그 남자의 ‘애인’이었군요.”
살리나의 말에 자룡대주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내 남자’예요.”
「앗! 조담씨 심장이 또!」
-조담! 정신 챙기래두!
“곤란하게 되었네요. 모처럼 발견한, 너무나 강한 남자들이 모두 임자가 있다니요?”
“훗. 역시 ‘내 남자’에게 관심이 있었군요.”
「앗! 또!」
-조담! 야!
우쒸! 이거 안 되겠다.
-자룡대주! 이제 그만해! 적보다 조담 먼저 잡겠다!
조담 녀석의 날 닮은(?) 순진무구성을 상기시키자, 비로소 자룡대주도 아차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송구스러워하는 표정은 살짝 떠오르는가 싶다가 금방 사라져버렸다. 자룡대주는 다시 비죽이 웃으며 품안에서 두 자루의 하얗고 독특한 단검을 빼들었다.
「어, 저거 아시죠? 연옥도의 대왕 상어 이빨로 만든 칼이에요.」
그래. 몽몽을 삼켜버리기도 했었던 요괴급 대형 상어를 잡았을 때, 난 상어 무덤에서 기념으로 가지고 나온, 상어 이빨을 자룡대주에게도 선물했었지. 자룡대주가 그걸 가공해서 자신의 칼로 만들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네. 근데 그보다, 자룡대주 저 아가씨, 대체 어쩌려는 거지? 설마 진짜 자신이 직접 살리나와 싸우려는 건 아니겠지?
그야말로 설마했는데, 자룡대주는 정말로 살리나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후후, 어때요, 살리나. 이쪽 가드는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지 않나요?”
「옴마나! 자룡대주가 질투심으로 제정신이 아닌가 봐요! 이를 어째!」
요몽의 호들갑이 사실일리 만무했으나, 자룡대주의 행동이 무모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지하무림의 일백마군과 보천구룡대를 통틀어도 살리나 정도의 뱀프를 맞상대 할 수 있는 자를 찾기 어려울 판국인데, 자룡대주는 그중에서도 최약자이니 말이다.
“훗. 전 아직 그 남자에게 아무 짓도 안했는데, 굳이 이럴 필요까지는…………….”
억울하고 씁쓸하다는 기색으로 말하던 살리나의 눈이 문득, 살기를 발했다. 다음 순간, 살리나의 몸이 사삭, 초고속 움직임을 시작했고, 자룡대주의 신형도 한순간에 사라졌다.
츠팟!
날카로운 파찰음을 내가 인식했을 때에는 이미 자룡대주와 살리나의 신형이 한번 합쳐졌다가 떨어진 후였다. 각자 움직임을 시작했던 곳의 반대편 지점에 멈춰선 두 여자가 다시 이를 악무는 순간, 공터 공간 전체가 쩌렁쩌렁 울리는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갈(喝)!”
상당한 내공이 실렸을 목소리의 주인공은 예상대로 조담 녀석이었다. 요몽의 음파 에너지 측정값을 보니, 최소한 3성의 내력이 담긴
사자후(獅子吼)였을 것 같았고, 놀란 여자들이 더 이상의 싸움을 진행하지 못하고 조담 녀석에게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그만둬, 자룡대주! 당신은 전투원이 아니잖아!”
나름 차분한 음성과 표정! 역시 자룡대주가 미리 ‘말려 달라’고 부탁해 놓은 모양이군.
“아! 제가 잠시 본분을 망각했었네요.”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칼끝을 거둔 자룡대주가 사삭, 뱀프 못지않은 스피드로 조담 옆으로 이동해 버렸다. 그녀는 살리나의 손톱(아마도)에 의해 날카롭게 찢겨진 조끼를 슬쩍 확인하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어머. 큰일 날 뻔 했었네요. 저는 본래 행정직이라 싸움은 못하는데, 잠깐 너무 흥분했었나 봐요.”
자룡대주는 얄밉게 생글거리며 말했고, 그 행정직의 칼에 베인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전투직(?) 살리나의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우와아~ 대박! 자룡대주가 언제 저렇게 강해진 거죠?」
-훗. 글쎄, 뭐. 자룡대주가 여러모로 강한 여자이긴 하지.
자세한 설명을 해줄 상황이 못 되는 것 같아서 대충 애매하게만 말했으나, 아무래도 자룡대주가 지금 보인 한 칼 쇼는 그야말로 기획된 ‘쇼’인 것 같았다.
자룡대주는 대교에게 전수받은 팔방종횡(八方縱橫)으로 스피드 하나는 분명 초고수의 수준이 되었어. 하지만 방금 자룡대주가 펼쳐보였던 공격 초식은 얘기가 다르지. 무엇보다 팔방종횡은 평소에도 실생활에 사용하며 수련까지 겸하고 있는 듯 했지만, 검법 수련을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아무리 남몰래 수련을 했다고 해도, 자룡대주처럼 바쁜 여자가 벌써 선대 초상희의 무공을 완성했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저 아가씨, 만약을 위해서 방금 선보였던 적엽쌍비(葉雙飛) 초식만 죽자고 익혀두었을 거야.
미리 조담 녀석에게 싸움을 중단시켜 달라고 해놓고, 딱 한번 계획된 공격을 성공시킨 것이 분명한 자룡대주. 그녀는 피 흘리며 열받아 하고 있는 살리나를 생까고 조담에게 포권하며 짐짓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천주! 저는 이제 뒤로 빠져 본래의 소임을 다하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조담 녀석의 뒤로 숨어버리듯 물러나는 자룡대주를 살리나가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정글도를 어깨에 걸치고 버티고 선 나(조담)에게 개겨 볼 엄두는 나지 않는 듯, 결국 어정쩡한 태도로 처음의 자리로 물러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은 조담의 정체 발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크루버! 지난번의 설욕전을 하고 싶지 않나?”
조담이 묻자, 크루버가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섰다. 지하로 들어가면서부터 늑대 웨어울프로 변신해 있던 크루버는 고르곤을 향해 으르렁거리며 털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살리나는 약간 오버해서 흥, 소리를 내더니 고르곤을 내보냈다.
1차전은 썰렁한 결말이 예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2차전은 시작부터 분위기가 달랐다. 크루버는 지난번의 치욕적인 패배의 굴욕을 씻기 위해 살기를 불태우고 있었고, 고르곤도 길모르에게 당했던 부상이 치유된 듯, 변함없이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짜깁기 생체 로봇, 고르곤이 분명 강하긴 해. 하지만 크루버도 수많은 웨어 울프들이 따를 정도로 특출한 강자! 내가 보기에는 고르곤에게 딱히 꿀릴 것도 없어. 그런데도 지난번에 그렇게 무기력하게 당했던 것은, 고르곤이 영혼, 혹은 감정이 없는 생체 로봇이라는 특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거야.
크와악! 크억!
두 괴수가 서로에게 포효하며 기선을 제압하려는 행태(?)는 여전했다. 그러나 나의 친절한(?) 지도를 겪어본바 있는 크루버는 전과 달랐다. 자신의 포효에 반응하여 반박자 늦게 포효를 시작한 고르곤의 입이 한껏 커졌을 때를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던 것이다.
쉬익! 퍽!
눈부신 스피드로 쏘아진 크루버가 고르곤의 몸을 스쳐간 순간, 고르곤의 얼굴이 패액 옆으로 돌며 피와 살점이 튀었다.
좋았어! 성공적인 선빵이다! 하지만 서두르면 안 돼, 크루버!
내 마음의 응원과 충고를 들은 것처럼, 크루버는 연속 공격을 펼치지 않고 고르곤의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고르곤의 거대한 몸에 비해서는 작고 날렵해 보이는 크루버의 회색 몸체가 스윽, 슥, 부드러우면서도 빠르게 상대의 주위를 돌고 있는 모습은, 보통의 육식 동물이 먹잇감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기회를 노리는 모습을 빠르게 돌리는 듯한 광경이었다.
고르곤의 벌어졌던 입 주변이 너덜거리게 된 것은 그렇다 치고, 크루버의 발톱 공격이 고르곤의 한쪽 눈까지 날려버린 것이 선빵 성공의 가장 큰 성과! 하지만 고르곤의 남은 한 눈은 여전히 초점이 불분명해 보이면서도 빈틈없이 크루버의 움직임을 쫓고 있어.
적의 공격에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음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대응하는 저 패턴이 생체 로봇 최고의 강점이었다. 누구나 싸우다보면 상대가 자신의 공격에 타격을 받았을 때의 고통과 공포를 감안하여 다음 공격을 준비하게 된다. 하지만 상대에게 고통을 느끼는 감각이나 공포와 분노를 일으킬 감정도 없다면, 반응 패턴이 현격히 달라지고, 거기서 이쪽의 판단 에러가 발생하는 것이다.
‘크루버, 당신도 이긴다, 죽인다 같은 감정대로 움직이지 마. 기계를 차근차근 부순다고 생각하는 거다.’
이게 내가 크루버에게 사전에 충고해줬던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크루버는 내 말에 충실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침착하게 주변을 돌던 크루버의 눈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쉬익- 퍽!
선빵과 비슷한 패턴의 공격으로 고르곤의 가슴 한복판에 크루버의 발톱 공격이 적중했다. 이번에도 반격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 공격이었다. 조담 쪽 통로에서 대기 중인 웨어울프들 사이에서 작은 함성이 들리기 시작했고, 크루버도 완전히 자신감을 되찾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아직 방심은 금물! 방금 고르곤이 허점을 보인 건, 놈의 마스터인 살리나가 섣불리 공격을 지시했기 때문일 거야. 내 판단으로는 살리나가 어설픈 참견을 그만두고 본능대로 싸우는 고르곤이 더 무서울 수 있어. 그렇게 되는 타이밍도 조심해야해.
크루버는 내 바람대로 방심하지 않는 기색으로 고르곤과의 거리를 섣불리 좁히지 않고 있었다. 처음부터 예상했듯, 기본적인 스피드는 확실하게 크루버쪽이 위였다. 고르곤의 폭발적인 스피드도 무섭긴 하지만, 그건 잔뜩 도사린 끝에야 나올 수 있는 거였다. 그런데 고르곤은 지금 그 단순한 몸통 박치기 공격을 감행하려고 했다.
쿠콰콰~ 쿠왕!
나름 굉장한 속도로 돌진한 고르곤의 어깨가 하수도 벽을 박살내며 무서운 굉음과 파편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 뿐. 크루버는 여유롭게 피하면서 고르곤의 등에 다시 한번 발톱 자국을 내주었을 뿐이었다. 고르곤의 단순한 몸통박치기 공격은 몇 번 더 이어졌으나, 그때마다 애꿎은 지하 구조물들이 부서졌을 뿐, 크루버의 몸은 스치기조차 못했다.
그리고 당연히, 그때마다 크루버의 반격이 성공하고 있어. 여기까진 내 예상대로 진행되어 좋은데, 슬슬 불안 요소가 나타나기 시작하는군. 무엇보다, 젠장! 저노무 고르곤 놈, 방어력이랄지, 내구력이랄지가 생각보다 강해!
보통 사람이었다면 단 한방에 참살되었을 정도로 무서운 크루버의 발톱 공격이 고르곤의 거대 바위 같은 몸에는 좀처럼 치명상을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본래 짜깁기 걸레 분위기였던 몸이 더욱 엉망이 되어 있긴 했으나, 거대한 몸에 비해 작아 보이는 상처에서는 피도 거의 흐르지 않았고, 움직임도 계속 큰 변화가 없었다.
크루버도 쉽게 지쳐서 스피드를 잃지는 않겠지만, 이대로 계속되면 결국 잡혀서 지난번 패배의 전철을 밟을 위험도 있어. 처음에 섣불리 연속 공격을 하다가 고르곤의 손에 잡혀서 패대기 쳐지면서 타격을 받고 스피드를 잃고 말았던 때처럼 말이지.
나는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필요성을 느꼈고, 전황의 불리함을 견디지 못한 것은 살리나쪽이 먼저였다.
“캬아아아아~”
살리나는 별안간 찢어지는 듯한 괴성을 내질렀고, 다음순간부터 그녀 뒤쪽의 어둠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살리나의 보병부대는, 아무래도 고르곤과 같은 생체 로봇들인 것 같았다.
덩치는 평균적으로 웨어 울프들보다도 작지만, 고르곤처럼 웨어 울프 이상의 내구력과 괴력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조담 뒤쪽의 통로에서도 웨어 울프들이 꾸역꾸역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양쪽 병력의 종합적인 전투력을 단순하게 비교하긴 어렵겠지만, 저 정도 공간에서 패싸움 양상이 되면, 내구력과 괴력이 앞서는 생체 로봇 놈들이 유리해 질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일단 해야겠군. 내가 벼르고 있던 그 실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