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124화 : 진유준의 비행 소녀들. (3)

랜덤 이미지

극악서생 4부 – 124화 : 진유준의 비행 소녀들. (3)


8. 진유준의 비행 소녀들. (3)

과연 황금 해골바가지! 나름 고급스러워(?) 보이는 해골바가지로군.

놈이 금방 다시 고개를 숙이면서 후드를 더욱 깊이 눌러쓰는 바람에 확실히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다른 해골바가지들에 비하면 확실하게 고급스러워(?) 보이는 해골바가지여서 색다른 느낌이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고, 해골바가지가 고급스러워 봤자 결국 해골바가지일 뿐이겠지만, 그거야 어쨌든!

‘그래, 뭐. 당신이 진심으로 내 수하들과 싸운 건 아니라고 인정해주지. 그런데,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지금이라도 다시 우리와 싸워보겠다는 거야?”

내가 비죽이 웃으며 묻자, 황금 해골바가지는 슬며시 나를 외면하며 대꾸했다.

‘그냥, 그랬다는 거야. 쓸데없는 싸움은 싫어.”

이 해골바가지, 싱겁기는. 아, 아니지. 이 해골바가지는 이미 항복한 몸인데, 내가 오히려 공연히 발끈했던 셈인가?

나는 조금 반성하며, 새삼 해골바가지 마법사를 살펴보았다. 여전히 후드와 일체형인, 왜소한 몸에 비해서 길고 넉넉한 망토로 몸을 싸매고 있는 듯한 패션(?)이어서, 어찌 보면 ‘은하철도 999의 철이’가 앉아있는 걸 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만큼 작고 초라해 보이는 비주얼이기는 하고, 당장은 그리 호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도 않지만, 중세 유럽의 마법 역사상 손꼽히는 공포의 존재였다니까, 방심은 금물이겠지?


‘당신과 같은 해골, 아니, 리치몬드는 800년 전쯤에 처음 나타났었다던데, 당신이 혹시?”

‘맞아. 내가 최초의 리치몬드이지. 그전까지는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어.’

흐음. 지금까지 만난 오컬트 존재 중에서도 손꼽히는 노인네였군. 그래서 본래는 구체적인 언어와 존대어 같은 것을 구분하기 어려운 텔레파시 대화중인데도, 내게 반말 찍찍하는 느낌이 드는 거였군. 뭐, 그렇다고 해도, 지난번의 일본 칼요괴, ‘아베’에게 그랬듯이 나이(?)로 누를 생각은 없으니까 그냥 넘어가주기로 하자.

‘당신 이름은?’

‘내 이름은 전해져오지 않은 건가? 하긴, 지난번 부활 때도 그랬었지.’

‘응? 전에도 부활했었다고? 그럼 혹시, 역사상 단 두 번 출현했었다는 리치몬드가 전부 당신이었다는 건가?’

‘아마도.’

이런, 이런. 본인은 가끔씩 부활해서 잘 모르겠다는 투지만, 아무래도 진짜 단 하나의 희귀종인 모양이네? 그 뭐냐, 산드라에게는 미안(?)하지만, 함부로 사망시키기 실험을 하는 건 삼가야 할지도 모르겠어.

‘리치몬드가 당신 하나라면, 그냥 리치몬드로 불러도 되겠군. 어때?”

어쩐지 이름을 밝히기 꺼려하는 거 같아서 물었더니, 리치몬드는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법계의 희귀 보호종인지 어쩐지는 나중에 따질 일이고, 당장은 기본 호구조사(?)를 끝냈으니, 이제 이 리치몬드가 시그마팀에게 맥없이 투항한 이유를 알아볼 차례였다.

‘리치몬드, 당신 말야. 웨인 놈 때문에 어쩔 수없이 우리와 싸웠었다고 해도, 웨인놈 자신이 도망쳐버린 시점에서는 당신도 그럴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우리에게 투항을 한 거지?’

흐으음. 왠지, ‘이제야 기다리던 얘기가 나왔군.’이라고 생각하는 기색이 느껴지긴 하는데, 그러면서도 뭔가 망설이며 대답을 하지 않고 있네. ‘애초에, 뱀파이어보다도 약점이 없는 불사의 마법사가 웨인 따위에게 휘둘린 것도 그렇고, 여길 떠나지 않으려하는 것도 그렇고, 당신 혹시 웨인 놈에게 빼앗긴, 되찾아야 할 무언가가 있는 건가?’

좀 더 구체적으로 묻자, 리치몬드가 반색을 하고 기뻐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굉장히 불쾌해하는 기색까지 함께 발산되고 있었다. ‘맞아! 난 내 물건을 되찾아야해! 하지만 빼앗긴 것이 아니야! 그 뻔뻔한 자가 훔쳐간 거지!’

‘아, 알았어. 당연히 그런 거겠지. 당신이 힘이 없어서 빼앗겼을 리가 없지.’

쯧. 역시 쫀심께나 앞세우는 스타일이었군. 그럼 혹시?

‘대체 어떤 물건인지, 엄청~ 무지막지 궁금하네, 그려! 나도 구경 좀 할 수 있게 해주면 안 될까?’

‘좋아! 당신에겐 특별히 보여 주도록 하지!’

너무 티나게 오버 떨었다 싶었는데도, 냉큼 받아들이기 바쁘구먼. 역시 도움 요청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도 쫀심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던 건데, 훗~! 800년 넘게 묵은 불사의 마법사치곤 귀여운 구석이 있네 그려.

자신이 먼저 요청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된 상황이 너무나 기쁜지, 리치몬드는 계속 쭈그려 앉아있던 자세를 풀고, 발딱

일어섰다. 선키는 생각보다 컸지만, 그래도 나의 명치정도 높이에 불과했다.

응? 근데 거기서 약간 키가 더 크는, 아니, 이건 허공에 살짝 떠오르는 건가?

‘당신만 따라와.”

리치몬드는 망토를 펄럭이며 땅위를 미끄러지듯 날아가기 시작했고, 나는 모두를 대기시키고 혼자 따라가 보았다. 그러나 리치몬드는 그리 멀거나, 심지어 모두가 있는 이 지하 공간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었다.

뭐, 같은 공간의 한쪽 구석탱이기는 해도, 횃불 조명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어서, 은밀한 장소를 찾아든 기분이 약간 나긴하네.

「주인님!」

친절한 몽몽 선생이, 리치몬드가 망토 유령같은 분위기로 서서 바라보고 있는 바위 벽면을 투시해서 보여주기 시작했다. 20여 센티 정도 깊이의 바위 안에 내 손바닥정도 크기의 보석 상자 같은 것이 숨겨져 있었다.

「주의 하십시오, 주인님. 1차 스캔결과, 바위 내부와 상자 안에도 성분 불명의 액체가 채워져 있습니다.」

그래. 숨겨진 장소를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꺼내지 못했다는 건, 리치몬드도 손댈 수 없는 무언가로 보호되고 있다는 거겠지. 리치몬드가 손대지 못하는 물이란 대체…

‘신성 파괴자, 진유준.’

‘앞에 건 빼고 부르지?”

‘알겠다, 진유준. 당신은 언데드가 아니지? 그렇게 느껴졌어.’

‘맞아. 난 그냥 보통 인간이야.’

갈수록 ‘보통 인간’을 자처하기 민망하긴 하지만, 그거야 어쨌든.

‘그럼 괜찮을 거야. 이 안의 ‘생명수’는 언데드에게만 치명적이니까.’

언데드에게만 치명적인 물질이라고? 훗. 그럼 내가 보통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망설이는 모습을 보일 수가 없겠군.

나는 즉각 정글도를 바위벽에 찔러 넣고, 슥슥- 잘라서 뚜껑을 만들어 열었다. 바위 안쪽의 공간에 고여 있는 액체는 매우 서늘하고 섬뜩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예상대로 별 문제없이 보석함 같은걸 꺼내들 수 있었다.

「와아~ 이거 뭐예요오? 마법사가 주인님께, 웨인의 비상금, 아니, 비상 보물을 알려주기라도 한건가요?」

응? 요몽이 뭔 헛소리를, 아, 그렇군. 나와 리치몬드의 ‘마음의 대화’는 요몽이 들을 수가 없어서 상황을 오해한 거야.

-그게 아냐, 요몽. 이건 본래 저 리치몬드의 물건이래. 이걸 되찾고 싶어서 웨인 놈에게 협조하는 척만 하다가 우리에게 투항한 거였어.

「아항~ 그랬었구나! 그런데 그거, 꽤 특별한 보석 같아요!」

-그치?

「강옥계열의 루비인데 특이하게 파란색이에요. 그리고 아직 몽몽 오빠도 파악하지 못한 미지의 에너지도 감지되고 있고요.」

요몽 말대로 보석함을 열기도 전부터 그 안의 보석은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향기처럼 풍기고 있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안에는 오백원짜리 동전정도 크기의 금빛 펜던트 목걸이가 들어 있었고, 펜던트 가운데에 파아란 보석 하나가 박혀있었다. 그 특이한 ‘루비’는 은은한 바닷빛 광채와 함께 마력인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한, 기묘한 기운까지 머금고 있었다.

이거 시간을 들여서 몽몽 선생의 감정을 받고 싶긴 한데, 보석의 주인인 리치몬드가 야리는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안 되겠네.

나는 하는 수없이 호기심을 누르고, 전투복 바지의 건빵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파란 루비 목걸이’에 묻어있는 생명수를 꼼꼼하게 닦아낸 다음, 리치몬드에게 내밀었다. 리치몬드는 왠지 주저주저하다가 손을 내밀어 받았는데, 망토 자락이 조금 걷히며 드러난 황금 뼈다구 손가락이 살짝

소름끼치기도 했다.

‘고마워.’

‘별말씀을.’

무심결에 웃으면서 답례를 했지만,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 텔레파시 목소리(?), 갑자기 그전까지와 달라진 듯한, 아니, 분명하게 달랐어! 저, 저 리치몬드, 설마?

놀라서 바라보는 내 앞에서, 리치몬드와 목걸이의 보석이 동시에 눈부신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각자 분수처럼 뿜어진 금빛 광채와 파란 광채가 어우러지며 오묘한 녹색 빛의 줄기가 되어 리치몬드의 전신을 휘감아 돌기 시작하는 것을 겨우 확인한 직후, 나는 반사적으로 한 팔을 들어서 눈을 가려야했다.

우쒸! 더럽게 눈부시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보이긴 했어. 리치몬드의 해골 위로 뭔가 뒤덮이는 모습을 말이지. 저 보석에는 리치몬드의 실체가 봉인되어 있었던 거야. 

“천주!”

어느 결에 모여든 수하들 중에서 자룡대주가 대표로 걱정스럽게 불렀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한손을 들어, 다들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왠지 전설로 전해 내려오던 것보다 약하게 부활한 괴인, 그가 따로 봉인되어 있던 모든 것을 되찾아서 완전체로 거듭난다는 설정, 그런 걸 미처 생각 못했어. 그건 리치몬드는 본래 실체가 해골바가지라는 생각 때문이었던 건데, 젠장! 만약 저 리치몬드가 완전체가 된 힘으로 깽판을 치게 되면, 저 리치몬드에게 봉인석을 갖다 바친 내 입장은 그야말로 대략 난감!

안 그래도 ‘민폐 마군황 콤플렉스’가 있는 나로서는, 심하게 껄적지근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 사이에 눈부신 광채가 사라지고 실체가 드러난 완전체 리치몬드의 비주얼은, 나에게 더욱 심한 부담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제, 제기랄! 저게(?) 이제 어떻게 나올지를 가늠하고 대처할 생각이, 그게 쉽지가 않아!

“진,유,준.”

완전체 리치몬드는 이제 텔레파시가 아닌, 인간의 음성을 내며 내 이름을 불렀다.

“덕분에, 800여 년 만에 나의 본 모습을 찾게 되었군.”

으~ 이 독특한 목소리를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고음을 자랑하는 록커가 괴성을 지를 때의 음색으로, 작고 천천히 발음하는 듯한 느낌? 하여간 무지 독특한데, 그거야 어쨌든!

“아니, 뭐, 굳이 내 덕분이라고 강조할 건 없어. 생각해보니까, 넌 본래 언데드 중에서도 언데드잖아. 네가 정말로 맘먹고 보석을 되찾으려고

들었으면, 그 생명수인지 뭔지도 널 막을 수 없었을 거 같은데?”

끄음. 책임회피 논조가 너무 약했나? 이미 800년이나 스스로는 보석을 되찾지 못했다고 했으니 말야.

“그렇기는 해. 난 언제든 내 목걸이를 되찾을 수 있었어.”

에? 동조해 주는 건 고마운데, 그렇게 딱 부러지게 말하면, 목걸이를 되찾을 때까지의 상황은 대체 뭐란 말이지?

“마법사 길드 놈들의 생명수도 나를 어쩌지는 못해. 하지만, 아프게 하지. 난 아픈 건 질색이야.”

“그, 뭐, 왠지, 무지 설득력 있다.”

설득력 있다는 표현은 좀 애매했지만, ‘아픈 게 싫어서 800년이나 완전 부활을 포기했다’는 리치몬드의 말이 정말이지 많은 것을 설명해주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눈앞의 난감한 존재를 어떻게 불러야할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저기, 리치몬드 양.”

그래. 이 녀석은 여자, 아니, 그렇게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어린 ‘소녀’였다. 심지어 우리 막내 미령이보다도 두어 살은 어려 보였다.

“혹시나 해서 그러는데, ‘부활한 악의 마법사가 세상을 공포로 뒤덮으려한다’는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들었었는데 말야. 너도 그렇게 식상한 행동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내가 책임지고 널 땟지해야 해’라는 말까지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예의 해골 소녀, 리치몬드는, 분명 인간이면서도 해골 못지않게 큰 두 눈에 힘을 주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난 리치몬드가 되기 전부터 ‘죽음의 공주’라고 불렸어.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는데도 말야”

“그랬냐? 그거 꽤 억울했겠다.”

리치몬드의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지만, 이 불사의 소녀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심정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 그게요, 주인님! 기본 바탕은 분명히 이쁘장하다고 할 수 있겠고, 독특한 매력이 넘치기도 해요. 그렇지만, 그게, 하여간, 무서워요.」

요몽의 평은 비교적 정확했다. 이 불사의 소녀께서는, 동그란 얼굴에 작고 귀여운 코와 입술을 가지고 있어서 체형으로 추정되는 나이보다도 어린, 아기 같은 느낌까지 주고 있었다. 하지만 두 눈만은 일본 만화의 여자 캐릭터처럼 컸고, 이마도 넓었다. 짙은 흑발의 머리와 선명한 눈썹, 상대적으로 창백하고 새하얀 피부는 커다란 눈망울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론은 ‘무섭다’야. ‘해골 소녀’, ‘죽음의 공주’, 그런 별명이 딱이긴 해. 하지만 지금 그런 얘기를 꺼내면 황금 뼈다구로 뚜드려 맞겠지?

“어쨌든, 리치몬드. 네가 사람들을 해칠 마음이 없으면, 나도 널 구속하거나 참견할 생각은 없어. 그런데, 리치몬드, 넌 현재의 시대, 21세기를 얼마나 알고 있지?”

“대충은 알아.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영어도 TV라는 것으로 익혔지.”

“그랬군. 그렇지만 실제로 세상 밖으로 나가본 건 아니지?”

“맞아. 난 십년쯤 전에, 저기 있는 ‘나누크의 후예’에게 발견되어서 이곳까지 왔어. 하지만 스켈레톤의 몸으로는 밖을 나갈 수가 없었어.”

이 녀석, 어쩌다가 황금 해골바가지가 되었는지 몰라도, 아까까지의 행동으로 보면, 자기의 해골 외모에 엄청 콤플렉스가 있었던 거 같아. 솔직히 얜 본래 인간으로서의 외모도 심하게 무섭지만, 지금의 당당한 태도로 보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야.

“언제 어떤 식으로 21세기 투어를 하던지, 그건 네 맘이지만, 나는 가급적이면 우리측 아가씨들의 안내를 받기를, 그런 걸 추천하고 싶군.”

나는 나의 어벤져스 중에서 여자들을 돌아보았고, 미령이는 슬그머니 나와 리치몬드의 시선을 회피했지만, 자룡대주와 페트라는 기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난 방금 남몰래, 자룡대주와 페트라에게 ’21세기 여성들의 화장 마법을 보여줘!’라고 지시했지만, 이걸 리치몬드에게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그런데 리치몬드 녀석, 잘도 저런 무표정으로 엄청난 기쁨의 감정을 뿜어내고 있군.

이 죽음의 해골 공주께서는, 안 그래도 무서운 인상의 얼굴에 한 가지 표정밖에 없었다. 무표정이라면 우리의 흑주양도 만만치 않으나, 흑주 녀석이 ‘멍때리는 무표정인데 비해, 죽음의 공주는, 공주답게 ‘도도하게 상대를 내려다보는 표정’ 하나로 굳어진 형태였다.

그런 무표정 아닌 무표정인 얼굴로 남몰래 표출하는 감정의 변화를, 나는 또 왜 이렇게 잘도 느끼게 되는 건지 모르겠네. 요즘 텔레파시를 자주 접하게 되면서, 나도 살짝궁 타인의 뇌파 감지력이 높아진 걸까?

“진유준.”

“응? 왜?”

“당신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타인과 의사소통을 하는 것 같아. 여러 언어를 쓰는 자는 많지만, 당신 같은 자는 처음이야.”

쳇. 얘한테는 나도 희귀종이란 건가?

“나의 텔레파시에 응할 때는 자신의 생각 중에서 언어에 속하는 마음만을 흘려내는 식이었어. 그리고 부하들에게 소리 없이 지시를 내릴 때는 또 다른 방식을 쓰는 것 같았는데, 맞나?”

이 녀석, 날카롭군. 보기엔 이래도, 역시 전설의 마법사라이거지?

“맞아. 내가 요즘 좀 복잡한 상황이 많다보니, 여러 가지 기술을 익혀야했는데.”

-이건, 전음입밀(傳音入密)이라는 수법이지.

리치몬드의 무서운 무표정 위로 ‘흥미롭다’는 기색이 떠오르고 있었다.

‘전음입밀?’

-그래. 이렇게 텔레파시와 말로 하는 것의 중간쯤 되는 건데, 나도 솔직히 정확하게 설명해 주기는 어렵네.

이 녀석, 여전히 무서운 무표정으로 가볍게 웃는 기색일세.

‘알겠어. 당신과는, 나도 당신이 주로 사용하는 언어를 익힌 후에, 다시 대화를 해보는 것이 좋겠어.’

-그러든가.

죽음의 해골 공주 리치몬드는 겉으로도 희미하고 섬뜩한(?) 미소를 머금으며 내게서 물러났다. 힐끔, 내가 추천한 자룡대주쪽을 먼저 보았으나, 결국 자기 세계와 가장 가까운 시그마를 선택했는지, 그쪽으로 스르르~ 이동하기 시작했다. 얼굴만 인간 소녀 코스프레(?)를 하고 있을 뿐, 똑바로 선 자세 그대로 망토 자락을 펄럭이며 ‘저공비행’하는 모습은 그 자체가 유령의 비주얼이었다.

하앙아아~ 뜬금없이 등장한 불사의 마법사까지, ‘비행소녀’일 줄이야!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