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130화 : 모래 지옥. (3)
10. 모래 지옥. (3)
나는 살짝 절망(?)했고, 피비는 나에게 ‘뭐야, 얘기가 다르잖아!’라는 의미의 시선을 쏘아붙여왔다. 이제라도 산드라에게 전음으로 코치를 해주거나, 나 자신이 나서야 할 것도 같았지만, 왠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산드라가 조금 강한 어조로 말을 잇기 시작하자, 피비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제가 도널드 웨인의 깊은 마음까지 읽어낸 것은 사실입니다.”
뭐, 어느 선까지 자백(?)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조금 주눅이 들어 난처해하던 산드라가 당당하게 말하기 시작한 모습 자체가 보기 좋군. 그래, 애초에 수백 년 묵은 뱀프 아가씨에게 일일이 참견하기도 좀 그랬고, 우리쪽 영업비밀(?)을 다 까발리든 말든, 그냥 냅두자.
“나누크의 후예, 피비! 당신에게 그 증거를 보여주겠습니다.”
증거를 보여 준다고? 도널드 놈의 의식 데이터 중에서 피비와 둘만이 공유할 수 있는 기억 영상을 텔레파시로 보내 줄 생각인 건가? 예상대로 산드라는 피비에게 텔레파시를 보내는 것 같았고, 피비의 눈이 빠르게 커지는가 싶더니, 급기야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아, 알겠어! 당신 정말 도널드의 기억을 읽어냈군!”
뭐지? 어떤 기억 영상이기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징그러운 도널드. 그딴 창피한 일을 아직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니! 그 자식, 죽여 버리겠어!”
피비의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리였으나, 정작 피비 자신이 놀라서 잽싸게 자기 머리 위의 다람쥐를 잡아서 떼어냈다.
뭐야, 이거 살기가 장난이 아니잖아? 내가 애써 유도할 것도 없이 지가 저러는 건 좋은데, 대체 뭔 일이 있었길래 저러는 걸까?
호기심이 모락모락 피어올라서, 몽몽이나 산드라에게 내용을 물어 볼까 망설이고 있자니까, 잠시 혼자 씩씩대던 피비가 눈치 없었던 마법 다람쥐 머리에 꿀밤을 때리고 있었다. 마법 통역 다람쥐는 다시 피비의 머리 위로 놓아졌지만, 앞발로 이마를 감싸고 아파하느라 곧바로 통역을 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저기, 산드라
‘예, 로드.’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내가 소심해진 것은 피비가 나를 사납게 노려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안심하세요, 피비. 로드께는 알려드리지 않았고, 앞으로도 듣기를 원하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저희들의 로드께서는 아무리 어린 소녀의
프라이버시라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신사’이시거든요.”
끄음. 물어보지 않길 잘했군. 산드라의 미소 띤 표정과 말로 봐선, 피비가 실제로 어렸을 때의 대단치 않은 사건 같기는 한데, 그런 걸 굳이 알아봐야 공연히 만수무강에만 지장이 있겠어.
“진,유,준. 산드라의 말이 사실인가요?”
쳇. 산드라보다는 나를 더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하군. 요령 없는 산드라가 살짝궁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나 자신의 반성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드네. 리버 녀석에 대해서 숨겨야할 전략적 필요성이 있고, 그건 도널드 놈의 범행을 밝히는 것과는 별개의 사항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나 역시 도널드 놈처럼 피비를 속이려한 건 인정해야지.
“음. 솔직히 말해서, 난 산드라의 말과 달리, 별로 신사적인 남자는 아니야. 하지만 지금 당신이 숨기고 싶어 하는 일이 뭔지 모르는 건 사실이고, 앞으로도 굳이 알고 싶지 않아.”
물론, 피비의 남부끄러운 사생활(?)까지도 도널드 놈을 잡는데 꼭 필요한 내용이라면, 나도 생각이 달라질 수가 있겠지.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가능성이 낮은 거 같으니까, 일단 패스!
나는 결국 완전히 솔직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닌 셈이었다. 그리고, 나를 향했던 피비의 사나운 눈초리와 살기가 빠르게 누그러지고 있었다. 다행이긴 했으나, 나는 어쩐지 뭔가 미심쩍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내 말을 곧바로 믿어준 건 고맙지만, 너무 쉽게 저러니까 오히려 찜찜하네. 가만있자, 피비가 내 말을 의심하고 적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 내가 무심결에 거짓말을 했을 때였지? 난 피비가 산드라의 능력치를 제대로 알고 있어서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어. 조금 전에는 내 말만을 뜬금없이(?) 믿어버리기도 했고, 이거, 혹시?
피비는 내가 지레 우려했던, ‘그럼 도널드의 과거 기억을 어떤 방법으로 읽어낸 거냐.’ 같은 질문을 해오지 않고 있었다. 나의 주장에 대한 의심을 거둘 수밖에 없게 되자, 반대로 도널드 놈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타오르기 시작한 듯, 우리를 외면한 채 입술을 깨물고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런 피비 머리 위의 마법 다람쥐를 새삼 주목해 보았다.
-요몽. 지금까지의 대화 영상 중에서, 저 마법 다람쥐 영상만 따로 좀 보자.
「짱 귀여운 월드페서 말이죠? 알겠사와요.」
요몽은 즉각 마법 다람쥐, 월드페서의 확대 영상을 보여주었고, 나는 어렵지 않게 마법 다람쥐의 의미심장한 패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으으음. 계속 비교적 차분하게 통역에 충실한 모습이지만, 나의 거짓말을 들었을 때만은 약간 몸을 도사리며 털을 곤두세우는 반응을 보였었군. 저 마법 다람쥐는 통역을 하는 과정에서 거짓말을 탐지하는 기능(?)까지 내장하고 있는 거야. 이거 참. 산드라의 고지식함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일이 상당히 꼬일 뻔 했었네.
-몽몽. 도널드 놈의 기억에 저 마법 다람쥐에 대한 것은 없었냐?
「일부 발견되지만, 피비가 어린 시절 잠시 데리고 있던 애완동물 정도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도널드 웨인은 나누크 종족의 언어를 알고 있어서 통역 없이 대화가 가능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나중에는 그랬는지 몰라도, 처음 만나고 한동안은 통역이 필요했을 텐데, 어쩌면 그때 피비가 호크와 도널드 형제 중에서, 호크를 선택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군. 거짓말 탐지기까지 겸한 마법 통역 다람쥐 덕분에, 누가 자신을 진심으로 대하는지를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야. 그리고 또, 피비에게 있어, 도널드 놈이 살리나보다도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느낌이었지? 그렇다는 건, 살리나가 한때라도 도널드 놈보다는 피비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었다는 것을 의미하려나? 그렇다면……………
「주인님! 주인니임!」
-음? 뭐냐, 요몽.
「이번에는 무의미한 무한루프에 빠지신 건 아닌 거 같아서 방해하고 싶진 않지만, ‘사막 원정대’의 교통편이 도착하고 있네요오!」
흠. ‘블랙 스마이커 비행 부대’가 왔다는 얘기로군. 거짓말 탐지기 겸 통역기를 탑재한(?) 마법 다람쥐를 중심으로 웨인 패밀리의 애증 관계를 재조명 해보는 것도 좋지만, 일단은 출발을 해야 할 시간이야.
“이봐, 피비! 난 호크의 무덤 안, 혹은 호크의 주검 자체에 도널드 놈의 죄악을 밝힐 수 있는 증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난 그래서 그곳에 가보려는데, 당신은 어쩔 거지?”
내가 묻자, 피비는 약간 숙이고 있던 고개와 시선을 다시 들어서 나를 지긋이 응시하기 시작했다.
“진유준. 당신은 도널드가 당신의 친구를 해치려고 했기 때문에 그를 죽이려는 거 아닌가요? 왜 호크의 일까지 밝히려고 이러는 거죠?”
“그건・・・・・・”
젠장. 저노무 거짓말 탐지기 내장 다람쥐가 쬐까 거슬리네. 에이~ 모르겠다! 다람쥐 상대로 더 신경전 벌이고 싶지도 않고, 그냥 다 까놓고 말해 버리자!
“솔직히, 내가 직접 놈을 해치우려면, 걸림돌이 너무 많아져 버렸거든. 그래서 방법을 찾던 중, 도널드 놈의 과거 죄악을 알게 되었지. 난 그 사실을 당신과 매퍼 가문에게 알리기만 하면, 당신들이 놈에게서 등을 돌릴 거라고 판단했어. 뭐, 기왕이면, 당신들이 알아서 놈을 처단해주면 더 좋겠지.” 「에고야, 주인님! 이건 또, 너무 솔직하신 거 같아요오.」
요몽이 어색하게 웃으며 끼어들었지만, 정작 피비 본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쓴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여기서 산드라의 텔레파시로 도널드 놈의 기억을 좀 더 보여줄 수도 있지만, 당신 입장에서는 그게 ‘조작된 것이라고 의심하겠지?”
“그래요. 과거로부터, 나쁜 정신감응 능력자들은 그런 방법으로 타인을 괴롭혔었죠.”
“난 그 의심까지도 이 자리에서 풀어줄 자신은 있어.”
그래. 저 마법 다람쥐의 검증을 받으면 되는 거니까 말이쥐.
“하지만 그렇게 해도, 이번에는 매퍼 가문이 문제가 될 거 같아. 그들은 순진한 당신을 내가 속인 거라고 의심할지도 모르지. 물론 그들도 어떻게든 평화적으로 설득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으~ 젠장!”
빌어먹을! 솔직하게 말하는 건 쉬울 줄 알았는데, 막상 하다 보니 이것도 못해 먹겠네! 무엇보다, 내가 왜 다람쥐한테(?) 내 생각을 구구절절이
늘어놓게 된 거야?
“여하간, 난 이제 일단, 사막으로 갈 거야! 가서 뭘 밝혀내던지 어쩌던지, 도널드 놈은 무조건 박살내겠어! 피비, 당신도 따라 오겠어?”
피비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옆에서 리치몬드가 키득- 소리를 냈다.
같은 날 밤, 혹은 새벽.
나와 대교, 그리고 꽤 많은 수의 기타등등(?) 병력들을 태운 헬기 부대는, 광활한 사막 위를 날고 있었다.
으으음. 피비의 자진 동행이 결정된 후로는 일사천리로 일정이 진행되었고, 나는 헬기에 타자마자 운기조식을 시작하여, 계속 비몽사몽(?) 상태였지. 그래서 그런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 멀고 먼 사막지대까지 날아 온 일이, 상당히 뜬금없고 성의 없이(?) 진행되었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네.
“하하핫~! 보스! 그만 기상하십시오! 하늘 버스 종점에 다 와 갑니다!”
훗, 그래. 이 시끄러운 목소리의 주인공, 블랙 스마이커 비행 부대의 대장, ‘터너’와 부하 조종사들이 뺑이치며 와줬는데, 성의없이 왔네 어쩌네하는 표현을 쓰면 안 되겠군. 어쨌거나.
-수고했어, 터너 대장. 덕분에 안락한 여행이었어.
“별말씀을! 그보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저희들 말고는, 이 시끄럽고 흔들리는 헬기 안에서 그렇게 태연하게 식사를 하고 주무시기까지 하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응? 그러고 보니, 도중에 야식도 챙겨 먹었었군.
“현역 시절, 이런 작전을 많이 뛰어 보셨지 말입니다!”
-아니. 난 군대에서 헬기 타본 건, 달랑 한 번뿐이야. 대신 ‘경운기’타고 다니면서 간식 먹은 경험은 몇 번 있지.
“예? 경운기? 한국 군대에는 그런 기종의 항공기도 있습니까?”
-아니, 그건 항공기가 아니고, 농사철에 대민 지원 나갔을 때, 아, 아니, 그 얘긴 이제 됐고, 그보다 터너! 아쉽게도 우린 이쯤에서 내려야 할 거 같군. “예? 좌표대로라면 아직, 아!”
터너가 한 박자 늦게 놀란 것은, 이제야 전방에 나타난 ‘회오리바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거리가 있긴 했으나, 마치 성질 나쁜 용처럼 꿈틀대는 회오리바람은 하나 둘이 아니었다.
“맙소사! 이번에는 또 어떤 괴물을 상대하러 가시는 겁니까? 저런 것들을 만들 수 있는, ‘미이라’쯤 되는 겁니까?”
-후후. 글쎄?
훗, 이 친구. 영화 미이라를 떠올렸나보군. 하지만 여긴 이집트도 아니고, 저 모래 회오리바람을 만들어 낸 마법의 원천은, 지금 우리와 함께 터너의 헬기에 탑승중인 피비야. 하긴 뭐, 피비가 명색이(?) ‘미이라 소녀’이긴 했었지.
어쨌거나, 피비가 저 썰렁만땅의 회오리바람 방어선을 만들어 낸 것은 맞지만, 현재의 상황에서는 피비 자신도 저걸 멈추게 할 수는 없다고 했으니, 헬기를 이용한 안락한 여행은 여기서 끝낼 수밖에 없었다.
-헬기 부대는 여기부터 뒤로 빠져서 대기한다! 후방 지원조는 당연히 헬기에 남고, 전투조에서도 지원자만 나를 따라 와!
나는 그렇게 전체 전음을 날린 후, 대교와 나란히 헬기에서 뛰어내렸다. 헬기는 이미 고도를 낮추고 있었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착지! 그런 우리 뒤를 따라서 리치몬드가 피비를 자신의 망토로 감싸 안은 모습으로 날아 내려오고 있었다.
리치몬드 녀석, 기어이 여기까지 따라왔군. 나름 든든하긴 한데, 냉정하게 보면, 우리보다는 피비와 더 가까운 사이니까, 너무 방심하면 안 되겠지? 다른 헬기들도 돌아보니, 거의 내가 예상했던 지원자들이 뛰어 내리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그렇다 쳐도 한 녀석이 조금 걱정이었다.
-소희! 너도 따라오는 거냐? 괜찮겠어?
「“아하하! 괜찮아요. 재밌어요.”」
으음. 미령이와 함께 불꽃의 힘으로 날아 내려오는 와중에도 전자 전음을 쓸 수 있다니, 얘도 걱정 없겠어.
스마트폰 문자 실력 때문에, 대규모 재난에 가까운 상황에서 안심한다는 건, 심하게 억지 같긴 하지만, 어쨌든 소희 일행도 전부 참여하기로 결정했고, 이제 무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모든 헬기들이, 강해지고 있는 모래 바람을 피해서 열심히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쿠콰콰아아아~!
어느 사이 가까워진 회오리바람은, 거대한 폭포의 물소리 같은 굉음까지 동반하고 있었다. 거친 풍압과, 그 속의 모래 때문에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든 것은 물론이고, 점차 가까워져오는 저 거대한 회오리바람의 비주얼 자체가, 이거, 이거, 제기럴! 솔직히 나부터 대빵 무섭네!
나와 대교, 그리고 조담 녀석 정도라면 지둔술로 모래 깊숙이 파고들어서 피한 다음, 천천히라도 땅속으로 이동하여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게 불가능한 군식구들이 너무 많았다.
-피비! 살리나가 ‘마법 방어진’을 발동한 거 자체는 당신도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저걸 어느 정도 진정시킬 수는 있다고 했지?
내가 묻자, 피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피비도 거센 모래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몸을 겨우 가누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온몸 문신이 신비로운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으며, 그 붉은 광채에 싸인 피비의 몸이 차츰 안정화되는 것 같았다.
“유준. 피비의 현재 마법력으로는, 저 모래 용중에서 하나만 겨우, 그것도 잠시만 멈출 수 있을 거야.”
리치몬드의 충고에 따라, 나는 모두에게 적절한 명령을 내렸다.
-틈을 봐서, 각자 알아서 통과할 것!
「우에~! 주인님! 너무 무책임하신 거 아니에요?」
-얌마 다들 불만 없는데, 왜 네가 투정이냐?
「저게 불만 없는 표정으로 보이셈? 다들 괜히 따라왔다는 표정이삼!」
-됐거든? 다들 지들이 자원한 거거든?
말이 그렇지, 무책임한 왕땅이 되기는 싫었기에, 나름 최선을 다해 모두를 챙길 생각이긴 했다.
-몽몽! 피비가 회오리바람 하나라도 멈추게 하면, 모두가 통과 가능한 루트를 정확하게 영상으로 보여줘!
내 말대로, 선두로 나선 피비 앞의 회오리바람 하나가 거짓말처럼 스러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달랑 하나만 사라진 것이어서, 다른 거대 모래
용들이 일으키는 모래폭풍 지롤(?)은 여전히 무시무시한 기세로 모두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조담! 나와 너뿐이다! 우리가 안전 루트의 기준점이 되어야 해!
-이씨! 내가 또 왜!
조담은 신경질적으로 외치면서도, 결국에는 내가 지시하는 위치로 이동해 주었다. 확실히 몸빵이 필요할 때만은 듬직한 녀석이었다.
우띠! 이러다가 삐끗하면, 나만 회오리바람에 휘말려서, 저 멀리 ‘오즈의 나라’로 날아가 버리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난 도로시도 아닌데, 양철 조담 나무꾼과 함께, 오즈를 민폐 탐험하면서 마녀들 좀 손봐주고, 아, 허수아비도 있어야하나? 내 쫄따구들 중에서, 허수아비에 가장 어울릴 만한 녀석을, 어떻게든 함께 끌어들여서… 에구, 나 왜 이러니?
현실도피성 망상을 자제하며 얼마를 힘겹게 걸었을까. 나이아가라 폭포 아래처럼 울려대던 굉음과, 온몸을 무섭게 후려치던 모래 폭풍의 압박감이 급속으로 스러져갔다. 뒤를 돌아보니, 수십 개의 모래 용들이 우리의 통과를 분해하는 것처럼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있었다.
-뱀프 무덤을 지키는,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거 같군. 대교, 괜찮아?
-후후, 그럼요. 전 재미있었지만, 고생하셨어요.
으으음. 대교는 물론이고, 그 옆의 미령이나 소희까지도 생글거리고 있군. 처음에는 겁을 먹었지만, 결국에는 위험한 놀이기구를 타듯 ‘모래 용 투어’를 즐긴 모양이야.
「호홍~ 저두 재밌었어요! 몽몽 오빠도 회오리바람의 실측 데이터 수집을 기뻐하고 있구요!」
하여간 내 주위의 소녀들은 왜 이렇게 겁들이 없는……………
“좋아하기는 아직 일러.”
다른 소녀들과 달리, 죽음의 해골 공주, 무서운 무표정의 소녀, 리치몬드는 시니컬하게 말하고는, 한 손을 들어서 어딘가를 가리켰다. 녀석이 가리킨 방향의 까마득히 먼 거리로 산 같은 것들이 보이긴 했으나, 그걸 보라고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산인지 모래 언덕인지 모를 것들이 솟아있는 지역과 우리 사이의 공간, 바다처럼 넓고 평탄하게 펼쳐진 모래사장 위로 왠지 낯익은 형태의 구멍 같은 것들이 무수하게 많이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뻥 뚫린 구멍이 아니라 어느 정도 깊이까지 깔때기 형태로 패여 있는 형태로군. 크기가 너무 커서 실감은 잘 안 나지만, 저거 혹시.
“모래지옥, 혹은 개미지옥?”
“응. 비슷한 거야. 그리고 보통.. 푸와아앗~!”
비교적 촘촘한 개미지옥들 사이에서 뭔가가 솟구쳐 올랐다. 얼핏 봐도 대형 유조차 크기 정도의 뭔가는, 허공에서 잠시, 그 멋지게 징글맞은 자태를 선보이고는, 다시 쿠콰콱! 모래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살짝 벙찐 우리 모두에게, 리치몬드의 친절한 설명 멘트가 이어졌다.
““샌드 킹’은, 두 종류를 함께 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