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83화 : 특별한 어둠 활용법. (1)
5. 특별한 어둠 활용법. (1)
SWALLOW.
rswallow!
1. (←『타동사』) 삼키다.
2. (감정을 억누르며) 침을 꿀꺽 삼키다.
3. (종종 수동태) 보이지 않게 하다.
4. (비격식) 곧이곧대로 믿다.
swallow2_
1. 제비
2. 제비 비슷한 새 J
몽몽이, 허공에 사전을 띄워 줬다. 사실 이 단어의 뜻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영어랑 심하게 안 친했던 나의 기억력을 신뢰하기 어려워서, 몽몽이 제공하는 영한사전의 뜻을 찬찬히 읽어 보았다.
우쒸. 무슨 데자뷰도 아니고, 예전에 이 단어를 종이 사전으로 찾아봤었을 때와 똑같은 생각이 떠오르네. ‘삼켜? 제비가 뭘 삼켜?”라는 식의 생각이 말야. 으으음. 그거야 어쨌든.
-몽몽. 난 아무래도 이게 블랙이 전하려했던 단어가 맞는 거 같아.
「저 역시 같은 판단입니다. 주인님.」
-에? 너도?
「예. 실은, 주인임께서 암호해독을 재개하시기 전부터, 저는 관련 스캔 데이터를 재검토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훗. 역시 성실한 몽몽 선생답군. 주인이 놀자고 해도 몰래 특근을 하고 있었단 말이지?
「처음의 문자 배열순서는, 문자가 포함된 념의 탄환이 공격에 사용된 순서를 정확히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공격 대상이 대교님이 아닌, 주인님이었을 경우를 상정하여 시뮬레이션한 결과는, 현재 주인님께서 선택하신 단어와 같은 배열 순서였습니다.」
그렇군. 블랙은 분명, 내가 대교를 전면으로 내세울지는 몰랐다고 했었어. 몽몽 녀석, 잘도 그 얘길 놓치지 않고 암호 풀이에 적용했어.
「또한, M과 W,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었던 문자는, 탄환으로 사용된 물체의 형태와 새겨진 문자의 상하 선택 패턴, 문자체의 패턴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결과, 두 문자 모두 W인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하핫! 역시 우리의 몽몽 선생! 난 솔직히 막연한 감으로 찍은 거라서 확신하기는 어려웠는데, 몽몽이 이렇게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해 주었으니, 안심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겠어!
-좋아, 몽몽, 완전한 단어는 이거로 확정하고, 이제 의미를 따져보자. 난 의미를 먼저 생각해낸 다음에 역순으로 거기에 맞는 단어를 선택한 거였어. 하지만 내 생각을 먼저 말해주면 편견이 생길 테니까, 넌 그냥 네가 생각한 걸 말해봐.
「알겠습니다. 도출된 몇 가지 추론 중, 가능성이 가장 높은・・・ 아, 요몽이 오려고 합니다.」
요몽? 그 녀석을 잊고 있었군.
「주인니임! 모하세요오?」
뒤늦게 슬그머니 나타난 요몽은, 한손에 팝콘 통을 들고 있었다.
「음. 음. 쩝. 움~ 주인님이 주연이신 영화(?) 상영 중인데, 왜 안보시고 여기서… 어머?」
요몽은 허공의 문자 영상을 발견하고, 포르릉 그 앞으로 날아갔다.
「오늘은 안하신다더니, 몽몽 오빠와 암호 풀이하고 계셨던 거예요? 저만 빼고?」
-어, 그래, 내가 문득 생각이 바뀌어서 시작은 했는데, 아직 시작일 뿐이야. 그러니까, 이제부터 너도 같이 하면 되지, 뭐.
「우움~ 모르겠어요. 저만 두뇌파에서 빠지는 건 싫은데, 그치만 솔직히 자신도 없어서리.」
호오. 이 녀석이 웬일로 이렇게 겸손을 떨지?
-지난번 화이트 판타지아에서, 주인님께서 원판씨의 대책 없는 초난감 비밀 메시지를 얼렁뚱땅. 하여간 풀어내시는 거 보고, 전 아주
질려버렸었지요. 블랙씨도 원판씨와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하니까, 도전 할 의욕도 잘 안 생기네요.」
훗. 이유가 뭐든, 자기만 두뇌파에서 뺀 거냐고 심통 부리지 않아서 다행이군.
「아! 곧, 인어 갈라테아와 처키의 대전 영상 차례예요. 전 그냥 그거 보러 갈게요. 후후~ 제가 실은, 그 영상 편집에 특히 공을 들였거든요.」
이제 영상 편집은 요몽이 거의 전담하게 된 모양이군.
-그래, 가봐라. 근데 기왕 온 거 뭐라도 한마디 할 거 없냐?
「글쎄요? SWALLOW, 저도 이 단어가 맘에 들긴 해요.」
-얌마. 단어의 단순한 의미 말고, 관련 되서 생각나는 거 없냐고.
「딱히・・・ 그냥, 진하연님이 생각나서요.」
헛! 이, 이 녀석이?!
「전에 주인님께서 그러셨잖아요. 진하연이라는 이름 만들 때, 원판씨의 본명인 진하운에 주인님이 좋아하시는 글자, ‘제비 연’을 붙이신 거라고요.」 그, 그 얘기를 지금 딱 맞게 떠올렸다고? 요몽이? 몽몽도 아닌 요몽이?
「사실은요. 블랙씨가 애써 죽음을 가장하여 사라진 건, 암중에 진하연님의 환생인 하은님을 지키기 위해서일 거예요. 그래야 주인님과 닥터 제이, 원판씨까지도 더욱 안심하고 프리메이슨과 싸울 수 있을 테니까요.」
허거걱~! 이게 정말 요몽 맞아? 혹시 몽몽이 요몽 탈을 쓰고 말하는 거 아냐?
순간적으로 그런 의심까지 들었지만, 진짜(?) 몽몽은 요몽의 조금 뒤에서 살짝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헤헤. 희망 사항을 말했을 뿐이에요. 하지만 진하연님, 아니 정하은님과 블랙씨는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니까, 그럴 리가 없겠죠? 아,
시간되었어요. 전 이만 가볼게요!」
요몽은 암 생각 없는 표정으로 포릉 사라졌지만, 나와 몽몽은 얼마간 더 멍하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몽몽.
「예? 아, 예. 주인님.」
하핫. 천하의 몽몽 선생도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군.
-너도, 요몽이 희망 사항이라고 한 말과, 비슷한 생각을 했던 거냐?
「그렇, 습니다.」
-나도 그래.
나는 멋쩍게 웃었고, 몽몽은 웃지는 않았지만 녀석도 비슷한 기분이지 싶었다.
이거야 원. 우리가 요몽 수준을 넘지 못한 건지, 요몽이 얼결에 눈감고 휘두른 스윙이 홈런을 친건지 모르겠네. 그래도 우리 삼인방이(?) 거의 같은 생각을 했다면, 그게 맞는 거라는… 그런 결론을 내려도 되…려나?
-몽몽. 정황상, 블랙의 암호 풀이는 이쯤에서 끝내야 할 거 같다. 아무래도 블랙은 이 일을 다른 텔레파시 능력자들에게도 읽히지 않으려고, 마음속 깊이 숨기고 있었을 거 같아. 그래서 닥터 제이나 원판에게도, 오랜 세월 아무 연락도 하지 않은 모양이고 말이지. 그러니까, 나도 앞으로는 그래야할 거 같아.
「알겠습니다, 주인님. 저도 해당 사안의 관련 보안 레벨을 높이겠습니다.」
-몽몽. 이제 급하게 생각했던 일들은 대충 마무리한 셈이니까, 너도 요몽처럼 좀 놀던가, 쉬는 게 좋겠다.
「배려는 감사합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놀거나 쉬는 걸 노력해서 하겠다고? 하여간 녀석도 참.
난 몽몽이 슬며시 사라지고 난 후에도 얼마간을 혼자 누워서 좀 더 마음을 다잡아 보았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정신 방어에 어느 정도 자신은 있었지만, 이번 블랙의 일을 더더욱 마음 깊숙한 곳에 봉인해야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한편, 천 년 전부터 내 동생으로 인식하게 된 하은이의 존재가, 프리메이슨과의 전쟁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도, 더욱 깊이 해보게 되었다.
하은이 문제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따져보고 고심해야할 일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거 자체가, 전쟁의 종착점으로 가까워져 간다는, 최소한 중요 고비가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거 같지? 너무나 거대하여, 어디서부터 손대야할지 막연했던 프리메이슨과의 전쟁이, 알게 모르게 많이 진행되어,
살짝이라도 끝이 보이기 시작하는 건・・・ 그런 건 좋은데 말이지. 젠장! 그래도 역시 당장은 너무 막연하고 복잡한 상황이 많아서 짜증이 앞서네! 에이~ 몰라! 오늘은 이제 정말 여기서 더 깊이 파고드는 건 그만두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이렇게 시간 길게 끌어봐야 소화불량만 걸리겠어.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선실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주인니임! 저 또 왔어요!」
요몽은, 그 큰 팝콘 통을 그새 다 비웠는지, 이번에는 음료수 잔만 들고 있었다.
「어머? 암호 해독을 벌써 다 끝내신 거예요? 아니면 그냥 포기?」
-글쎄? 나와 몽몽도, 우리 요몽 선생의 추리 내용 이상은 생각 못하겠더라. 아무래도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어.
솔직히 얘기해주자, 요몽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에? 진짜요? 진짜, 찐짜, 지인짜로요?」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요몽이 곧바로 만세를 부르며 ‘이제부터 나도 킹왕짱 두뇌파닷!’ 같은 외침을 하며 날아다닐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요몽은 오히려 미심쩍은 표정으로 시큰둥해하고 있었다.
「에이이~! 그럴리가요. 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
훗. 요몽의 돌발적 예리 감각에 대한 믿음은, 요몽 자신에게도 없는 모양이군.
「후훙 그치만, 자꾸 상상을 하게 되요. 예를 들어, 블랙씨는 어렸을 때, 딱 한번 우리 하은님과 만난 일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첫눈에 팍 필이
꽂혀서, 평생 첫사랑의 소녀를 지켜내겠다는 맹세를 하게 된 거예요.」
나는 복도를 걸어, 선내의 다른 선실로 향했고, 요몽의 수다는 계속되었다.
「그런데 말이죠. 이게 또 하은님께도 최고의 득템 기회・・・ 아, 아니 이건 표현이 좀, 하여간 우리 하은님은 오빠인 원판씨를 너무나 사랑하시잖아요? 근데 이제 원판씨 붕어빵인 블랙씨가, 눈앞에 나타나게 된다면………
요몽이, 뭔 러브 라인을 상상하는지는 알겠지만, 나로서는 한숨부터 나오는 얘기였다. 지금까지 알게 된 일들이 전부 사실일 경우, 하은이의 육체는 원판의 복제나 마찬가지고, 블랙은 짤없이 복제 맞다. 이쪽도 어차피 남매지간인 것이다.
복제 인간들끼리의 혈연을 대체 어떻게 규정해야할지, 그야말로 난감한 노릇이지만… 음? 뭐지? 나 지금 뭔가 또 중요한 사항을 떠올린 듯한
기분이.. 젠장. 뭐지?
「어, 근데 주인님. 지금 어디 가시는 거예요? 이쪽은 갑판 위로 가는 길이 아닌데요.」
응? 어~ 그게, 난 지금 대교에게 바로 가려던 거 아니었어. 잠깐 토르 녀석 좀 보고 가려고 하는데, 이길 맞냐?
「그러셨어요? 그럼 저 앞의 선실이 맞아요. 첨 오시는 건데 잘 찾으셨네요?」
후후. 지난번 구중천에서 길 헤맸던 경험 때문에, 이 흑해1호의 선실 배치도는 잘 숙지해두었었지. 뭐, 그거야 어쨌든.
“토르으~! 뭐하냐, 혼자?”
난 안으로 들어가며 일단 친한척을 해보았다. 토르는 한쪽 벽의 침상에 길게 누워 있다가 내 쪽으로 흘끗 시선을 주었으나, 곧 다시 눈길을 천정으로 돌려버린다.
“다들 한잔하는 분위기인데, 넌 술 안 좋아하나봐?”
흐으음. 계속 생까는군. 비사교적인 성향의 겨울의 여왕 나타샤와, 침묵의 유령 사사키 남매까지 갑판에서, 다른 사람들 노는 거 구경이라도 하는 분위기인데 반해, 상당히 사교적이고 가벼운 성격일 듯한 녀석이 이러고 있으니까, 왠지 더 신경이 쓰이네. 하지만 난 본래 소위 ‘밀당’은 질색인 사람이지.
“그냥 궁금해서 한번 와봤다. 갈게.”
나는, 다소 싱거운 말을 남기고 돌아서 나왔다.
「와아~ 과연 우리 주인님! 대교님 앞에서는 내숭떠시더니, 역시 밀당의 고수였어!」
-뭔 소리야, 임마.
「후후. 시침 떼시기는! 지금 토르가 주인님 잡으려고 몸을 일으킨 거 다 아시고 그냥 나오신 거잖아요.」
-응? 토르가 그랬어?
「우에! 계속 모른체 하시네. 역시 대교님 만나기 전부터 바람둥이셨을 거 같아.」
-나원참. 난 카메라로만 보는 게, 왠지 몰래 감시하는 것 같아서 직접 보러온 것뿐이야. 그리고 토르가 아직 생각할게 많은 것 같아서, 그냥 나온 거 뿐이고! 여기에 뭔 의미를 자꾸 부여하고 난리인거냐? 게다가 난, 그노무 밀당인지 뭔지가 왜 필요한지도 이해를 못하겠어.
「에고. 진심이신지 아닌지, 헷갈리네.」
-됐고, 그보다, 시그마와 산드라, 그 뱀프 커플은 어딨냐?
「어, 그들은 처음부터 가장 분위기 좋았어요. 조금 전까지도 함께 밤바다를 보면서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던걸요? 아참, 산드라가 주인님께 따로 감사드리고 싶다고, 주인님 바쁘신 일 끝나면 알려달라고 했어요.」
흐음. 그 뱀프 커플은 그럴만도 하지.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프리메이슨에 붙잡혀 있었는지 몰라도, 어쨌든 이제야 자유의 몸이 된 셈이니 말이야. 다만, 그 뱀프들이 이쯤에서 알아야할 비밀이 하나있는데,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군.
잠시 후.
나는 흑해1호의 한쪽 갑판의 난간에 사이좋게 서있는 뱀프 커플 앞에 섰다.
“진유준님!”
산드라는 밤기운과 술기운이 함께 돌아서 그런지, 그 어느 때보다 더 매혹적인 입술을 열어 반가움을 표하고 있었다.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진유준님이시라면 반드시 저희들의 저주를 풀어 주실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그래도 정말 이런 날이 올지는………….”
아까 블랙의 산화로 상황이 종료된 후, 수습 분위기까지만 해도 비교적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던 산드라였다. 하지만 지금은 술기운 때문에 새삼 감정이 복받치는 모양이었다. 그건 시그마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시그마와 산드라의 정중하면서도 감격 어린 인사를 몇 번이나 받고서야 겨우 분위기를 조금 가라앉힐 수가 있었다.
“산드라. 당신들이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기분이 좋아. 하지만 우리, 이 시점에서 냉정하게 집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어.” “말씀하시지요.”
시그마와 산드라는 살짝 굳어지는 것 같았지만, 나는 계속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선, 초롱이 문제.”
“아!”
산드라는 낮은 신음성과 함께, 자신도 모르게 초롱이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선미 방향으로 꽤 떨어진 곳의 뱃전에서, 몇몇 CR들과 어울려 깔깔대고 있는 초롱이를 보며, 슬픈 미소를 떠올렸다.
“세계정화재단이란 곳에서 들었는데, 뱀파이어들은 본래 자식을 가질 수 없다며?”
“그렇습니다.”
“산드라와 초롱이가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나도 알 것 같아. 하지만 초롱이는… 음. 하여간, 안 되는 거 알지?”
산드라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저 아이를 ‘죽지 않는 아이’로 만들어 영원히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그런 욕심을 품기도 했었습니다.”
그래. 산드라가 초롱이를 바라보는 눈길에서, 얼핏 그런 불길한 느낌이 들 때가 있어서, 지금 굳이 못박아놓는 거였어.
“그러나 결국 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무한한 시간의 잔인함에 내맡기기에는, 저 아이의 순수한 웃음이 너무나 소중하니까요.”
난 오래 안 살아봐서, 불사의 존재들일수록 왜 이렇게 죽지 않는 세월을 ‘저주’라고 표현하는지, 그런 건 잘 이해 못하겠지만, 하여간 진심인 거 같지?
“좋아, 이 문제는 믿기로 하고 더 언급하지 않겠어.”
“진유준님의 조금 전 그 살기, 그게 무서워서 드린 빈말이 아니었음은 말하고 싶군요.”
“응? 어~ 내가 그랬나? 미안, 이런 일이 강압적으로 되는 게 아닌데, 무심결에 그만.”
“후후. 불과 몇 번의 만남이 전부인 아이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그 다정함. 그것이야말로 진유준님의 진정한 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쳇. 이 아가씨는 다 좋은데, 가끔 이렇게 쑥스러운 칭찬을 해서 탈이야.
“크흠! 그보다, 이제 당신들은 어쩔 건가? 어차피 혼돈의 사도에게 대항할 수는 없을 테니, 우리 편에 서서 싸울 수는 없을 거 아냐.”
“저희들의 처지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어쩌면 저희들에게도 진유준님께 받은 은혜를 갚아드릴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은혜는 무슨, 음. 근데 그게 무슨 뜻이지?”
산드라는 새삼 주변을 경계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텔레파시를 보내기 시작했다.
‘혼돈의 사도님은, 본래 인간계의 일에 큰 흥미가 없으십니다. 따라서, 저희들이 그분께 직접 무례하지 않는 한, 프리메이슨의 누구와 싸워도 탓하지 않으실거라 생각합니다.’
호오~ 여전히 산드라가 대표로 말하고 있지만, 시그마도 만만찮게 투지에 불타는 표정이로군. 혼돈의 사도는 고사하고, 블랙에게 싸움 걸 엄두도 못 내던, 소심 커플이 그새 많이 발전했네?
-저기, 마음은 고마워. 하지만 무리할 필요 없어. 무엇보다 혼돈의 사도, 그 꼬마 사도가 나의 적이 될지 아닐지, 아직 확실하지가 않아.
천지파멸식(天地破滅式)이 발동했을 때, 그 꼬마 녀석만 내 칼부림 대상에서 빠졌다는 점이 간접 증거지만, 그 얘긴 일단 생략.
-그러니까, 당신들이 굳이 떠나려 하지 않고, 내 편에 남아있겠다면, 당분간 에레보스들과 우리 쪽과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어. 뭐, 사실 지금까지도 그래왔잖아?
그래. 어차피 초롱이 때문에라도, 이 커플이 아라크네와 아담처럼, 바로 사라져 버리는 건 좀 곤란했지.
‘그 정도 역할로 보답이 될지 모르겠지만, 원하신다면 기꺼이 수행토록 하겠습니다.’
전력에서 아예 뺄 생각이었던 것에 비해 상당히 기분 좋은 타협점을 찾은 거 같긴 한데… 은혜니 보답이니 하는 대사들이 영 부담스럽군.
-산드라. 당신들이 알아둬야 할 일이 하나있어.
난 살짝 망설여지는 마음이 생겼지만, 결국 말을 이었다.
-시그마의 심장을 묶고 있다는 그 흑마술 말인데, 그건 블랙이 죽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