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93화 : 최악의 뱀파이어.(2)
8. 최악의 뱀파이어.(2)
나의 예비 장인어른 사영은, 내가 이곳으로 쳐들어오는 걸 선택했을 때부터, 뒤로 빠져서 따라오지 않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 측 다른 누가 현재의 내 상황을 목격하게 되면, 당장 증원군을 불러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영은 그렇게 이 사윗감을 배려해 줄 양반이 아니지 싶었다. 「주인님! 객관적인 전력 차가 너무 큽니다. 회피 및 전력 보강을 권고합니다.」
내가 알아서 튀고 본 다음, 내 수하들이나 내 쪽 뱀프들을 부르라고? 으~ 나도 솔직히 그러고 싶다, 이 몽몽아. 하지만! 울 이쁜 대교의 파더 앞에서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잖아!
“크르르~ 걱정하지마라, 인간, 리버의 복수는 나 혼자………….”
“됐거든? 그냥 다 뎀벼!”
오 마이 갓! 내 입에서, 왜 이런 대사가 튀어 나오는 거냐? 난 하여간 이노무 쫀심이 문제야, 문제!
“크와아앙!”
대장 웨어 울프 놈의 입이 있는 대로 벌어지며 엄청난 포효가 터져 나왔다.
파앗!
놈의 포효 소리가 자르듯 멈춘 것은, 실제로 놈의 목에 가는 빛의 실선이 그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 빠르지도 않은 일검에, 삼분의 일쯤 목이 잘린 웨어 울프 놈이, 어이없어하는 기색과 함께 비틀, 옆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이 멍청이, 정말 그래 버렸네?
공격 직전에 무서운 살기를 담아 포효함으로서 적의 기세를 꺾으려는 야생 짐승의 습성, 그건 나 같은 빈틈 찾기 전문 칼잽이에게 ‘요럴 때 냉큼 날 죽여 줍쇼’라고 한 꼴이었다.
일단 한 놈, 공짜(?) 건식, 땡쓰!
내가 성큼 한걸음을 내딛은 건, 당연히 마무리 한 칼을 더 먹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내 정글도는 측면으로부터의 기습에 반응하여 목표를 바꿔야했다.
쉬익! 번득!
기습자의 공격과 나의 정글도 반격이 엇갈리는 순간, 기습자의 검은 그림자가 산산이 흩어졌고, 내 머리카락도 몇 올 날렸다. 부서지는 것처럼 사방으로 흩날렸던 기습자의 형체 조각들이, 날 놀리듯 트럼프 카드로 변하여 떨어져 내렸다.
“야! 너, 리버라고 했냐? 넌 전직이 마술사라도 되는 거냐?”
내 신경질적인 말에, 리버라는 뱀프 녀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카드 무리를 자신으로 위장하여, 내 공격을 흘려내고, 그 틈에 자신의 손톱으로(아마도) 내 머리카락 몇 올까지는 날리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쳇! 저 녀석의 교묘한 수법도 수법이지만, 상황 자체가 예측하기 어려운 패턴이었어. 난 다른 웨어 울프 놈들이 지들 대장을 구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일 줄 알았는데, 놈들은 하나도 움직이지 않고, 아직 부상회복이 끝나지 않은 뱀프 놈이 기습해 올 줄이야.
결과적으로, 뱀파이어 리버를 해치우는 건, 대장 웨어울프가 끼어들어 실패했고, 웨어 울프는 리버의 방해로 처리하지 못한 셈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 동료애 넘치는 콤비는 부상이 심해서, 대장 웨어 울프 앞에 리버가 겨우 버티고 서있을 뿐, 둘 다 더 이상 내게 반격해 올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쟤들은 그렇다 치고, 다른 늑대 놈들은 뭐야? 정원에 있던 놈들 모두가, 이 본 건물 앞에 모여들어 있는 상태이고, 너덧 마리는 건물 위까지 기어 올라와서 포진하고 있으면서도 공격해 올 기미가 없어. 혹시, 저 대장 늑대 놈이 ‘전군 대기’라는 명령을 내려서 그걸 충실히 지키고 있는 건가? “어때, 대장 늑대씨. 계속 혼자 날 상대할 수 있겠어?”
슬쩍 도발해 보자, 조금씩 회복의 기색과 살기를 키우던 대장 늑대가 발끈, 살기를 폭사했다.
“크으윽~! 너, 너어! 큭!”
열 받아서 부상도 잊고 지껄일 정도면서도, 아직 부하 늑대들을 동원할 생각은 없는 거 같네. 나로서는 고마운 오기와 쫀심이로군. 이 대장 늑대 놈만, 어떻게든 먼저 해치우면 전세를 확실하게 역전할 수 있… 응? 아, 아차!
나는 별안간 서늘한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느낌을 받으며, 늑대 인간과 뱀파이어 콤비로부터 시선을 거두어야했다. 가장 조심해야 할
대상이 등 뒤에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상기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비교적 얌전한 편이었던 뱀파이어 리버는 물론이고, 광폭함을 발산하기 시작하던 대장 늑대까지 주춤하여 기세가 시들해지는 것 같았다.
“웨, 웨인님. 죄송합니다. 이 남자는………….”
“리버, 더 말하지 않아도 된다.”
“크으~ 웨인님! 저는 아직………….”
“그만. 네 상대가 아니다.”
대장 늑대는 뱀파이어 리버보다 반항적인 기색을 보이고는 있었으나, 도널드 웨인의 조용하면서도 거역할 수 없는 위엄에 눌려 크윽- 분통함을 삼키는 것 같았다.
낸시 윌슨양, 미안. 나도 여기 올 때의 맘 같아선, 단칼에 이 괴물 노인네를 요절내서 당신의 원한을 풀어주고 싶었어. 근데 막상 와보니,
수하들부터가 장난이 아니네? 그게, 나도 살고 봐야 하니까, 조금 뜸 들이는 거, 양해해줘.
내가 얼굴도 모르는 희생자, 낸시양에게 소심하면서도 현실적인(?) 사과를 하는 사이, 도널드 웨인의 어두운 마력 발산이 멈추어 있었다. 흥분한 수하들을 다스리기 위한, 위엄 만땅의 살기를 거둔 도널드 웨인은, 이제 꽤 사람 좋게 보이는 백발의 주름투성이 노인으로 보일 뿐이었다. 나로서는 이 늙은 뱀파이어의 복장이, 편안한 가운차림인 것이 무엇보다 싸움 걸 의욕을 깎아먹고 있었다.
“오늘은 진정 놀라운 밤이구려. 나는, 나와 같은 밤의 귀족을 초대했을 뿐인데, 오신 것은 귀족조차 압도하는 난폭자, 신성 파괴자였으니 말이오.” 쳇. 역시 프리메이슨 물 좀 먹었군. 특히 신성 파괴자니 하는 건, 원판 녀석이 화이트 판타지아의 짝뽀 주석에게 했던 표현 같은데, 이제 보니 다른 곳에서도 그렇게 떠들고 다녔나보군.
“나의 권속, 리버와 ‘크루버’가 귀하를 몰라보고, 실례가 많았소, ‘마스터’ 진.유.준.”
대장 늑대의 이름이 ‘크루버’인 건 그렇다 치고, 나한테 뭐, 마스터? 자기딴에는 나를 자신과 최소 동급으로 쳐주겠다는 건가?
“날 뭐라 부르던 당신 맘이지만, 난 오늘 당신에게 사신일 뿐이야. 그 추한 목을 자르고 심장에 말뚝을 박아 줄, 진짜 사신!”
이런, 이런 낸시 양에게는 미리 사과했고, 당장은 이 늙은 뱀파이어의 숨은 전력을 탐색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있음에도, 말이 곱게 나와 주지가 않네. 정글도를 잡은 손에도 자동으로 힘이 들어가고 말이지.
“무례하군요, 진유준씨!”
싸늘한 음성과 눈빛으로, 나와 도널드 웨인 사이로 끼어든 것은 뱀프 리버였다. 등 뒤로부터 들려오는 늑대의 크르렁대는 목울림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었다.
대장 늑대 크루버가, 자기 주인을 지키기 위해서 자존심을 버리고, 부하 늑대들까지 동원하기 시작했군. 에효, 나란 놈은 하여간 이노무 성질머리가 문제야.
“물러나라, 리버. 너의 상대가 아니다. 아니, 너희들 모두가 이 남자, 진유준을 너무 모르고 있다.”
뱀프 리버가 약간 주저하며 옆으로 비켜서자, 다시 나름 인상 좋은 분위기의 늙은 뱀파이어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
“아무래도, 가엾은 낸시 윌슨의 죽음이 진유준씨를 화나게 한 모양이오.”
“맞아, 난 인간이거든. 다른 무고한 인간의 억울한 죽음에 열받아하는.”
“밤의 귀족 이상으로 초월적 존재인 당신이 평범한 인간을 자처할 줄은 몰랐소. 하지만, 사실, 밤의 귀족인 나 역시 그 가냘프고 순결한 꽃이 지는 걸 바란 건 아니었소. 당신은 아직 밤의 귀족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우리들은 본래, 다른 귀족을 초대할 때, 그런 방식으로 선물을 준비한다오.” 늙은 뱀파이어 웨인은 애석해하는 기색으로 작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내 실수였소. 인간의 피를 낸시양처럼 고결한 영혼의 아가씨의 피를 취한 건,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만 그녀의 귀한 생명이 이토록 쉽게 져버릴 줄은 몰랐지.”
저거,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거 같…긴, 같은데?
“허허~ 애초에, 오랜 관습을 이제 와서 생각해낸 것부터 잘못이었던 것 같소. 너무나 오랜 세월만에 동족을 만난 기쁨에 그만. 아, 그거 아시오? 우리 밤의 귀족들은 이제 전 세계적으로 멸종 상태에 가깝소. 한때 힘에 취해 인간들을 함부로 사냥한 댓가였소.”
쯧. 왠지 정글도를 쥔 손의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네.
“내가 귀족이면서도 왜 이렇게 늙은 모습인지 아시오? 그건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인간의 피를 멀리해 왔기 때문이오. 그래서 이렇게 늙고, 심지어 죽어가기까지 하지만, 다시 예전의 괴물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소. 이제야 끝이 보이는, 지긋지긋한 영생의 시간을, 나는 본래의 인간으로 끝내고 싶은거요.”
괴물로 살고 싶지 않아서, 피를 거부하고 죽어간다는 뱀파이어 노인의 눈빛은, 지극히 허무하면서도 자기 확신에 차있는 것 같았다.
“진유준, 내가 사신을 초대한 것은, 단지 죽기 전에 동족과 한가로운 옛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인 거요. 그러니 돌아가서 당신 친구, 사신에게 내 뜻을 전해 주겠소?”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천천히 뱀프 리버와 늑대 크루버까지 돌아보았다. 놈들도 도널드 웨인의 한없는 쓸쓸함과 슬픔에 동화된 듯, 고요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진유준, 내가 왜 인간의 피를 탐하지 않게 된지 아시오? 그건 내가 과거, 내 쌍둥이 형님의 피를 마셨기 때문이오.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목을 물었던 그 처절한 슬픔의 기억이…….”
이, 이렇게 슬픈 과거까지? 나란 놈은 어쩌자고 이토록 가여운 노인네를 해치려 들었단 말인가! 아아~ 이제라도 이 분께 사과하고 용서를 빌…긴, 뭘 빌어! 이런 우라질! 이 싸가지 뱀프 영감태기가 어떻게 나오나 궁금해서 잠시 정신줄 놓고 있어 줘 봤는데, 더는 못 참겠다!
나는 몽유병 환자처럼 힘없이 내딛던 발에, 순간적으로 힘을 실어 보법을 밟으며 정글도를 휘둘렀다. 그러나 늙은 뱀파이어의 몸은 반 박자 빠르게 흐릿해지며 흩어져 버렸다.
또 리버의 카드 은신술이 쓰인 건 아니고, 웨인 자신의 안개화 능력인가?
내 정글도를 피해 고운 가루처럼 흩어졌던 웨인의 몸이 십여 미터 위의 허공에 모여드는가 싶더니, 다시 어느 정도 인체의 형상을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처럼 완전히 실체화하지는 않아서, 마치 허공에 웨인의 모습을 파스텔 톤으로 그려진 것을 보는 기분이었다.
“나의 마안(魔眼)이 통하지 않다니, 과연 신성 파괴자라 불리는 남자답군.”
“마안? 그 따위 거짓말 사기술로 장수하면서, 부자까지 되었나보지?”
“거짓말이라니,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
웨인은, 이제 비열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웃고 있었다.
“타고난 거짓말쟁이답게, 기본적인 사항은 진실이었겠지. 예를 들어, 낸시양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으며, 그녀의 죽음을 아까워하고 있긴 한데, 그 이유는 네놈의 더러운 탐욕을 더 길게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야. 그 어줍잖은 마안 너머로 더러운 욕망이 빤히 보였단 말야.”
솔직히 빤히 보였다 정도는 아니고, 막연히 느껴지는 정도였지만, 그거야 어쨌든.
“인간의 피를 마시지 않아서 그렇게 늙어가고 심지어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내가 아는 뱀파이어는, 뱀파이어가 된지 얼마 안된 S뿐이 아니야. 오랜 세월 진짜로 인간의 피를 거부한, 기특한 뱀파이어들도 알고 있어. 넌 그들과 달리, 다른 이유로 젊음과 생명을 유지하기 어려워진 거지? 그 뭐더라? ‘블러드 드래프트’라고 했던가?”
웨인의 비열한 웃음기가, 천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자신의 형제를 물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거 같고, 그렇다면 그 형님이 먼저 뱀파이어가 되었던, 너의 마스터였겠지. 자신의 형제이자, 마스터를 잡아먹은 거야. 그로서 더욱 강한 뱀파이어가 되긴 했지만, 피의 계약을 근본적으로 어겼기 때문에, 늙고 죽어가는 부작용이 생긴 거지. 안 그래?” 나의 까발림이 이어지자, 웨인의 추악한 입술 사이로, 지금까지 본 어떤 뱀파이어보다 크고 긴 송곳니가 비집고 나왔다.
“크ᅳ흐으~ 나의 마안에도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그 정도까지 내 마음을 읽어 내다니! 친구들의 말처럼, 무섭군. 정말 무서운 남자야.”
「옴마나! 이번에도, 얼렁뚱땅 적의 비밀을 막 감 잡으신 거예요?」
요몽이 공연히 끼어들어 호들갑을 떨었지만, 나는 왠지 한숨이 포옥 나왔다.
-이번에는 좀 달라, 요몽. 지극히 너, 요몽스럽게 생각해 본 건데, 그게 맞은 거라고.
「에? 그게 또 무슨 말씀이세요?」
-제대로 감 잡고 논리적인 추리를 했던 게 아니라, 그냥 엄청 나쁜놈 같다는 느낌에, 최악의 경우를 연상해 봤던 거야. 그런데 그 얘기가 다 맞았다니, 저 빌어먹을 놈이 지금까지 어떤 짓을 하며 살아왔을지, 너무나 추악하고 끔직한 일들이 계속 마구 더 떠오른다.
요몽은, 그 사이에 더 흉측하게 변해가고 있는 웨인을 힐끔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왜, 왠지, 저와 패티는 더 자세히 듣지 않는 게 좋을 거 같네요. 주인님 홧팅!」
요몽이 소심한 파이팅을 남기고 사라지고 난 후, 나는 허공의 웨인에게 말을 이었다.
“네 놈이 S를 발견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것만은 나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을 거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진조에 가까운 마력, 그런데도 이게 웬 행운? S는 뱀파이어가 된 지 얼마 안 돼서, 네 놈의 악명도 모를 거 같고, 한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릴 만큼, 우직한 성격이야. 네놈에겐 피의 여신이 선물해 준, 최고의 제물로 보였겠지? 순진한 S를 제물로 삼아 젊음과 영생을 되찾을 생각을 하며… 그래, 지금 그 표정! 그렇게 추악하게 웃었을 거야.”
“큭, 큭, 크흐, 하, 핫, 학, 학! 학!”
독립군을 고문하던 친일파 순사 나까무라의 얼굴로 웃는 놈이, 웃음소리까지 혐오스럽네. 앞으로 딱 1분만 더 참아주고 요절을 내야겠어. “학핫! 처음이야! 이렇게까지 나의 검은 심장을 요동치게 하는 남자는 처음이야! 나는 오늘 밤, 반드시 이 남자의 뜨거운 피를 마셔야겠다!” 이제는 이 이상한 인기, ‘맛있어 보인다’는 의미의 말을 듣는 것에도 꽤 익숙해졌다고 할까? 그렇다곤 해도, 저 최악의 뱀파이어에게 듣는 말은 따따블로 거슬려. 어디, 1분 얼추 되었지?
나는, 정글도를 어깨에 걸치며 날에 월광절화결의 기운이 맺히게 했다. 그리고 뱀파이어 귀부인 카라와 싸웠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뱀파이어의 안개화 능력은, 아마도 자신의 육체를 미지의 아공간과 겹치는… 그런 능력. 그러니까 공간을, 공간 자체를 베어야 해. 공간, 공간베기……
「주인님! 힘 빼세요, 힘!」
-어, 야아, 요몽. 하필 삘 받기 시작한 참에
「어, 그럼 그냥 계속 하실래요?」
-그게, 음. 어째 난 이쯤에서 그만둬야 할 거 같긴 하다.
나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신경의 끈을 슬그머니 늦추었고, 나를 향해 추한 이빨을 드러내며 살기와 탐욕을 드러내던 웨인의 기세도 멈칫했다. 일제히 굳어진 것은 나를 포위한 채, 언제고 웨인과 함께 나를 협공할 태세였던 뱀프 리버와, 웨어울프들도 마찬가지였다. 카드놀이 뱀프 리버가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어, 어느 틈에 내 뒤로? 다, 당신은 누구?”
리버의 등 뒤에 그림자처럼 서서 싸늘한 냉기를 발산하고 있는 건, 짙은 회색 후드 망토를 걸치고 있는 여자 뱀프, 산드라였다. 그녀는 리버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실례예요, 숙녀의 이름을 물을 때는 자신부터 밝히세요.”
“아, 나, 난 리버. 마스터 웨인님의 서브입니다.”
“그렇군요, 리버. 난 산드라, 진유준님을 로드로, 시그마님을 마스터로 모시고 있지요.”
“사, 산드라? 설마 과거 영국과 프랑스 헌터들을 농락하고 탄식케 했다는 그 공포의 마녀, 산드라?”
“떨지 말아요. 과거의 별명일 뿐이에요.”
산드라가 리버와 다정한(?) 인사를 나누는 사이, 웨어 울프들의 무리가 주춤거리며 좌우로 갈라져 길을 트고 있었다. 그 사이를 휘적휘적 여유로운 걸음으로 통과해 들어오고 있는 것은 산드라의 마스터 뱀프, 시그마였다.
「어쩜!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등장하는 포스가 넘 예술이야!」
쯧. 요몽 녀석에게는 시그마의 등장씬만 슬로우 모션으로 보이고, 뭔가 어울리는 배경음악까지 들리는 모양이군. 그나저나, 내가 시그마와 산드라에게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지금의 무섭고 당당한 포스는 확연히 달라. 웨인의 수하들도 분명 엄청나게 강한 변종 괴물들인데, 우리측 뱀파이어 커플에게는, 뭔가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거 같아.
“진유준. 당신은 저들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권속으로 만들어두었던 것인가? 대체 어떻게 인간이 저 정도 귀족을 부릴 수가 있는 거지?” 웨인은 믿기 어렵다는 듯, 내게 의혹에 찬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놀랄 일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도널드 웨인! 오늘 밤 이곳에 초대한 것은, 본래 나였다지?”
자신의 말처럼, 본래 오늘의 주인공 등장이었다. 웨인과 우리 모두의 머리 위, 저택의 가장 높은 구조물 위에 S, 그가 서있었다. 애써 사신을 초대했던 웨인이 황망한 표정이 되어 넋을 잃고 있었다. 웨인이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S의 강대한 마력이, 무시무시한 분노와 함께 검은 용암처럼 저택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