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1권 – 13화 : 전생 인연(1)
전생 인연(1)
인생은 한방이라고 했던가.
축국에서 설우진이 초무석을 보기 좋게 때려 눕히면서 학관 내에서 그의 위상이 완전히 달 라졌다.
방학 전까지만 해도 그를 만만하게 보는 애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다들 근처로 오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했다.
설우진은 청월반 맨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창가의 햇볕이 잘 내리쬐는 소위, 명당자리였 다. 그리고 어제까지만 해도 그 자리에는 초무석이 앉아 있었다.
“무석아, 아직 멀었냐? 주먹질은 빠른 놈이 심부름하는 건 왜 이리 굼떠.”
설우진이 자리에 앉아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손에 두툼한 보자기를 들고 허겁지겁 뛰어오 는 초무석의 얼굴이 보였다.
잠시 후, 거칠게 문이 열리고.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초무석이 설우진의 책상에 보자기를 내려놨다.
“네가 말한 가게에서 사 온 만두야. 오는 길에 조금 식기는 했지만 괜찮을 거야.”
“그래? 설마 다른 가게에서 사 오지는 않았겠지?”
설우진이 은근한 눈빛으로 초무석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설 우진이 살짝 오른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그게, 네가 말한 가게에서 사 오려고 했 는데 문을 닫았더라고. 옆 가게에 물어보니까 문을 닫은 지 한참 됐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
‘이쯤인가? 막동이가 가게를 접고 길거리로 나섰다는 게.’
설우진의 만두 심부름은 단순히 초무석을 놀 리기 위함이 아니었다. 만두를 통해 전생의 못 다한 인연을 찾기 위함이었다.
막동이.
다소 촌스러운 이 이름의 주인공은 그가 낭인 으로 이름을 떨칠 때 처음 인연을 맺었던 동료 였다.
오척 단구에 허리까지 굽어 저 몸으로 어떻 게 낭인 생활을 할까 싶었지만 의외로 실력이 대단했다. 특히 돌발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 나 상대의 허를 찌르는 암기술은 경험 많은 낭 인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와의 인연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놈의 어쭙잖은 의협심이 화근이었다.
막동이는 낭인 주제에 협객을 꿈꿨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라는 걸 알면서도 곤경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질 못했다.
당시, 전낭 안에는 은전 하나와 철전 수십 개 가 들어 있었다.
‘어떻게………… 그 많고 많은 동전 중에 은전이 잡히냐고! 이게 다 설우진 그 개자식 때문이야. 놈이 심부름만 시키지 않았어도 시전에 갈 일 도 없었을 테고, 내 한 달 치 용돈이 이렇게 허 무하게 날아가지도 않았을 거야.’
초무석은 다시 한 번 적의를 불태웠다.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라도 마음의 위안을 삼고 싶었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한결 마음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한 달 치 용돈에 대한 미련은 끝내 버릴 수가 없었다.
“시전 전체를 다 뒤지는 한이 있더라도 은전 한 냥짜리 만두를 판 그 꼽추 자식, 꼭 찾아내고 야 말겠어.”
오랜만에 나선 시전 나들이.
설우진은 한가로이 주변을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길가에 늘어선 좌판에는 갖가지 물건 들이 진열돼 간택의 순간을 기다렸다.
그러던 와중에 결국 사달이 벌어졌다.
길거리에서 희롱을 당하고 있던 여인을 보고 선뜻 앞으로 나섰다가 뜻하지 않게 시비에 휘 말려 버린 것이다. 좋게 풀어 보려 했지만 상대 가 나빴다. 그들은 정파인의 가면을 쓴 진짜 악 당들이었다.
뒤늦게 설우진이 달려갔을 때, 막동이는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
‘내가 직접 시전으로 가서 찾아보는 게 좋겠어. 어차피 공부에는 취미도 없고.’
최근 들어 설우진은 다시 사는 삶에 무료함을 느꼈다.
몸은 어린아이지만 그의 정신은 오십 대의 낭왕.
어린애들과 함께하는 학관 생활이 재미가 있을리 만무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전생의 인연 찾기였다.
후미진 골목.
몸이 불편해 보이는 소년이 배를 움켜쥐고 신 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발에 밟혀 뭉개진 만두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이 병신 새끼야, 어디 우리 허락도 없이 여기 서 판을 벌여.”
“마, 만두 팔아서 돈 벌면 자릿세 드릴게요. 사흘, 아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장사를 하게 해주세요.”
“우린 외상 거래 안 해. 장사를 하고 싶으면 네 부모를 팔아서라도 돈을 만들어 와.”
풍야패 부두목 막철이 민머리를 거칠게 들이 밀며 꼽추 소년을 협박했다.
그는 풍야시전 일대에서 소문난 개차반이었다.
금전 제일주의의 표본으로 돈이 없는 사람은 짐승 이하의 취급을 했다. 그게 여자든 어린애 든 가리지 않았다.
“여기서 빌빌대지 말고 어서 꺼져. 늑장 부리 면 저 낡아 빠진 수레도 건사하지 못할 거야.”
막철이 한쪽 구석에 덩그러니 서 있는 수레를 가리켰다.
그 말에 꼽추 소년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 웠다. 발길질에 얻어맞은 배가 아직도 아리고 당겼지만 유일한 재산인 수레를 이곳에서 잃어버릴 순 없었다.
“하아, 어쩌지. 오늘 만두를 못 팔면 약을 살수가 없는데.”
수레를 끌며 꼽추 소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눈앞에 무섭게 생긴 소년이 길을 막고 섰다. 얼굴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데 덩치가 훨씬 컸다.
“야, 그 만두 파는 거냐?”
소년이 물었다.
“팔기는 파는데………….”
“그럼 남은 거 몽땅 줘, 시간 없으니까.”
무섭게 생긴 소년이 급하게 주문을 했다. 꼽추 소년은 당황하면서도 반사적으로 남은 만두를 보자기에 쌌다. 넉넉히 만들어 둔 터라 제법 묵직했다.
“만두값은 이걸로 충분할 거야.”
무섭게 생긴 소년이 동전을 내던지며 한 줄기 바람처럼 눈앞에서 사라졌다. 꼽추 소년은 한 바탕 꿈을 꾼 것처럼 멍한 얼굴로 손에 쥐인 동 전을 들여다봤다.
부들부들. 손이 떨렸다.
정말 오랜만에 만져 보는 은전이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진 않구나. 이 돈, 감사히 쓰 겠습니다. 그리고 배로 더 열심히 살겠습니다.’
꼽추 소년은 은전을 꼭 품에 안고 기분 좋게 수레를 끌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천근만근 무 거웠던 두 다리가 지금은 날개를 단 것처럼 가 볍게 느껴졌다.
“으아악, 내 돈!”
설우진이 수업을 빼먹고 홀연히 사라진 뒤. 다시 청월반의 실권을 차지한 초무석이 오늘 받은 용돈을 확인하려 전낭을 열었다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꼭 있어야 할 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 은전이 어디로 갔지? 시전에서 만두를 살 때 빼고는 전낭을 연 적이 없는데, 서, 설마 그때 철전이 아니고 은전을 내준 건가.’
불현듯 떠오르는 한 장면.
급하게 만두를 챙겨 들고 전낭에서 돈을 꺼내 던졌다.
하지만 그 어떤 물건도 그의 눈길을 잡아끌지는 못했다.
그사이 시전 중심부로 들어섰다.
주루부터 객잔, 도박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건물들이 오가는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중에 설우진의 마음을 잡은 곳은 무한주가였다.
‘저곳에서 파는 백화주가 일품이었는데, 어떻 게 마실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설우진은 코끝에 스미는 백화주의 향내에 숨 이 꼴깍 넘어갔다. 마음 같아선 술독이라도 훔 쳐서 달아나고 싶었다.
바로 그때.
무한주가에서 비슷한 또래의 소녀가 술동이 를 안고 힘겹게 걸어 나왔다. 그리고 불안하게 걸음을 옮기다 미처 바닥에 박힌 돌부리를 보지 못하고 걸려 넘어졌다.
부웅.
술동이가 소녀의 손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그 방향은 설우진의 정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