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1권 – 34화 : 공동 전인(1)
공동 전인(1)
팽천호가 주호장에 묵기 시작한 지 나흘째 되 는 날.
설우진이 다시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지난 이틀 동안 고생해서 만든 장포가 들려 있었다. 그런데 그 장포를 채 펼쳐 보기도 전에 연무 장에 나와 있던 팽천호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아침 운동이라도 했는지 시원하게 벗어젖힌 웃 통은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어렸을 땐 저 근육이 정말 멋져 보였었는데, 지금은 왜 저리 무식하게 커 보이지?”
설우진의 시선이 팽천호의 상체에 꽂혔다. 그의 몸은 한마디로 우락부락했다. 전설의 사 천왕들처럼 온몸의 근육이 도드라져 있었다. 특히, 과하다 싶을 정도로 튀어나와 있는 이두 박근은 그 크기가 아이의 허리통만 했다. “정말 내 제자가 될 생각 없냐?”
“전 그릇이 크지 못해서 스승은 한 분으로 족해요.”
“저 친구보단 내가 낫다니까. 네가 아직 내 실 력을 못 봐서 그러는데 저기 있는 칼을 들고 한 번 덤벼 봐. 네가 공격을 해서 내 발이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그때는 깔끔하게 포기한다.”
팽천호가 연무장 구석에 꽂혀 있는 역참도를 가리키며 대련을 제안했다. 설우진은 잠시 고 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칼이 꽂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역참도는 대련용으로 쓰이는 칼로 그 형태는 일반적인 도와 비슷하지만 결정적으로 날이 서 있지 않았다. 그래서 실수로 몸을 베게 되더라 도 부상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아까 하신 말씀 무르기 없기예요.”
설우진이 역참도를 뽑아 들며 팽천호에게 약 속이 걸려 있는 대련임을 주지시켰다. 이에 팽 천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중에 쥐고 있던 칼을 수평으로 눕히며 보통의 수비 자세를 취 했다.
‘이 묵직한 느낌, 역시 남자는 칼을 들어야 해.’
손목에 전해지는 역참도의 무게감에 설우진 은 고향에 돌아온 듯한 편안함을 느꼈다. 삼십 년도 넘는 세월을 이 칼만 쥐고 살았으니 그런 마음이 들 법도 했다.
“어르신, 조심하세요. 아직 칼을 다뤄 본 적이 많지 않아 어디로 날아갈지 모릅니다.”
“크큭, 걱정 붙들어 매라. 배탈 때문에 정상적인 몸이 아니라고 해도, 너 정도의 공격은 눈 감 고도 막아 낼 수 있다.”
‘그럼, 어디 한번 막아 보십시오, 사부.’
강한 자신감을 내비치는 팽천호에게 설우진 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강호에 흔하 게 알려진 도초들을 뒤섞어 공격을 전개했다. 중구난방의 느낌이 강했지만, 칼끝에 실린 기 운은 제법 매서웠다. 하지만 팽천호는 여유롭 게 역참도를 튕겨 냈다.
복잡하게 뒤섞인 도초 안에서도 야수안이 용 케 그 궤적들을 읽어 낸 것이다.
“네 녀석이 아무리 용을 써도 내게 야수안이 있는 이상, 내 발을 움직이게 할 수는 없다. 어 디, 지쳐 쓰러질 때까지 한번 휘둘러 봐라.’
팽천호는 야수안의 공능을 믿었다.
상대가 무림 고수도 아니고 이제 겨우 무공에 입문한 소년인데 야수안이 그 움직임을 읽어 내지 못할 리 없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야수안에 대한 믿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설우진이 야수안에 혼동을 주기 위한 노림수 로 변초를 뒤섞기 시작한 것이다.
역참도의 칼끝이 팽천호의 눈앞에서 변화무 쌍하게 움직였다. 정면에서 날아드는가 하면 갑자기 사선으로 방향을 틀고, 아래로 파고든 다 싶으면 갑자기 위로 솟구쳤다.
발을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거리를 려 충분히 대처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발이 묶
인 상태라 움직임이 상대적으로 제한됐다.
“빌어먹을.”
팽천호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그만큼 당황한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의 눈은 역참도를 끝까지 쫓았다. 그리고 임기응변의 수로 역참도를
아슬아슬하게 옆으로 흘려보냈다.
“바, 방금 전에 대체 뭘 한 거냐?”
팽천호가 놀라 부릅뜬 눈으로 설우진을 빤히 쳐다봤다.
이에 설우진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냥 이렇게 공격하면 좋을 것 같아서 마음 가는 대로 칼을 움직였는데요.”
“누구한테 배운 게 아니고?”
“네.”
‘이 자식, 진짜 물건이네. 제대로 칼을 쥐어 본 적도 없는 놈이 변초를 쓰다니. 이렇게 되면 무 슨 수를 써서라도 제자로 삼아야 돼. 주가와 공 동 사부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팽천호는 눈앞에서 설우진의 재능을 확인하 게 되자 더욱 욕심이 났다. 이제는 그 누구를 만 나더라도 자신의 눈에 차지 않을 것 같았다.
“대련은 이쯤 하자. 난 주가를 만나 담판을 지어야겠다.”
팽천호가 대련을 중단했다.
설우진은 막 몸이 달아오르던 참이라 이대로 끝내기 아쉬웠지만 그의 성정을 아는지라 조용 히 역참도를 내렸다.
큰 부침을 겪은 뒤, 설가 포목점은 천중 상단 의 투자금을 기반 삼아 새롭게 도약했다.
기존에 운영되던 본점은 그대로 두고 풍야시 전과 비슷한 규모의 광통, 무안, 나용 시전에 세 개의 지점을 새롭게 열었다. 그 세 개 지점에 서는 옷감으로 쓰이는 포목 대신 완성된 옷을 진열해 판매했다.
일 층에는 서민들도 부담 없이 입을 수 있는 옷을 진열하고, 이 층에는 멋을 따지는 고관들 이나 부자들의 기호에 맞게 자수가 들어간 고 급 의류를 진열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어디서 입소문이 돌았는지 무한 주변의 도시 들에서도 손님들이 찾아왔다.
특히 무인들의 출입이 눈에 띄게 잦아졌다.
“여기가 모용가의 설 소저가 봉황 잠의를 구 매한 곳 맞지?”
“응, 설 소저와 이름이 같아서 정확히 기억하 고 있어. 봐, 이른 시간인데도 손님들로 넘쳐 나잖아.”
“그럼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빨리 올라가자. 련 매가 좋아하는 화접 잠의가 팔리기 전에.”
광통시전 한복판에 자리 잡은 제이 호 설가 포목점.
그 입구에는 유난히 이십 대 청년 무사들이 많이 서성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광통시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전국 규모의 용봉 무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용봉 무전은 무림맹 산하의 기관으로 무관을 졸업하고 갓 강호에 출두한 청년들에게 실전 수련의 기회를 제공했다.
비용이 조금 비싸다는 단점은 있지만 안전이 보장되는 상태에서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기 때문에 매년 수많은 지원자들이 용봉 무전의 문을 두드렸다.
“쯧쯧, 한심한 놈들. 잠잘 시간을 쪼개 수련해 도 모자랄 판에 여자들 환심을 사겠다고 옷가 게나 기웃거리고, 무림의 미래가 참으로 암울 하다, 암울해.”
“백청, 지금 네가 저 애들 욕할 처지냐? 선배 라는 놈이 새벽부터 이곳에 죽치고 있었으면서.”
“후배들하고 난 처지가 다르지. 이제 몇 달만 지나면 졸업인데.”
잘생기진 않았지만 친근한 외모의 백청이 친 우인 석대검의 핀잔에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용봉 무전 삼 년 차로 내년 이월에 졸업이 예정 돼 있었다.
“과연 네 성적으로 졸업이 가능할까? 교관님 말씀으론 네가 우리 반의 평균 점수를 다 깎아 먹는다고 하던데.”
“마, 마지막 졸업 시험이 남아 있잖아. 그것만 잘 보면 부족한 점수는 충분히 만회할 수 있어.”
“이렇게 딴짓만 하고 다니는데 졸업 시험을 잘 볼 수 있겠어?”
“오늘 하루만이야. 너도 알잖아, 혜 매가 얼마 나 이 옷을 갖고 싶어 했는지.”
백청이 손에 쥐고 있던 옷을 살짝 펼쳐 보였다.
젊은 여인들이 입고 다니는 분홍빛 잠의였다. 그런데 가슴 어름에 정교하게 수놓인 봉황이 어딘가 눈에 많이 익었다.
“참, 그놈의 화무연이 문제다. 여자들한테 잔 뜩 헛바람만 집어넣고. 사실 초혜 못지않게 경 매도 그 옷을 바라는 눈치였다.”
“그런데 왜 안 샀어?”
“옷이 한 벌뿐인데 어떻게 사냐! 아마 무전으로 돌아가면 욕깨나 먹을 거다.”
석대검은 괴로운 표정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화무연을 기점으로 모용설이 입었던 봉황 잠의는 또래 여인네들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그 여파는 자연스레 그 주변을 맴도는 남자들 에게 미쳤고, 남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설가 포목점을 찾았다.
그런데 인기 만점인 봉황 잠의는 돈이 있어도 구하기가 힘들었다. 자수라는 게 기계처럼 막 찍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사람의 힘을 통해야만 하기 때문에 생산량이 극히 한 정적이었다.
“자식, 고맙다. 조만간 위로주 한잔 사마.”
백청이 석대검의 어깨를 두들기며 고마움을 전했다. 하지만 석대검의 굳은 얼굴은 좀체 펴 질 줄 몰랐다.
“고간아, 이제 우리 어떻게 하냐?”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십니까?”
“네가 우리 풍야패의 머리 아니냐. 이런 때, 그 좋은 머리 굴려야지.”
“전 그때 분명히 침묵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때는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 나라고 뭐 좋 아서 대원 포목점과 손을 잡은 줄 아느냐.”
천중 상단의 중재로 설가 포목점과 대원 포목 점의 싸움이 흐지부지 끝나 버리고 난 뒤, 풍야 패에는 비상이 걸렸다. 부랴부랴 백사문의 고 수를 초빙해 설우진을 상대케 했지만, 그 고수 는 퉁퉁 부은 얼굴로 나타나 강짜만 부리고 돌 아갔다.
이후, 풍야패의 식구들은 피가 마르는 심정으 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설우진이 언제 쳐들어 올지 모르기에 잠조차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풍야패를 탈퇴해 도망가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지금은 그 숫자가 소수에 불과했지만 이대로 시간이 흘러간다면 조직 자 체가 완전히 와해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 다.
“제발 가르쳐 다오. 풍야패를 살릴 수만 있다면 내 사비라도 털어 내마.”
호걸륜이 간절히 애원했다.
진심이 느껴지는 행동인지라 고간도 전처럼 외면만 할 수는 없었다.
“그럼 제가 하라는 대로 뭐든 하실 겁니까?”
고간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호걸륜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천기야, 우진이는 너 혼자 담기엔 너무 큰 그릇이다.”
“그래서 또 너한테 넘기라고?”
“그럼 좋겠지만, 나도 양심이 있으니. 공평하 게 우진이를 공동 전인으로 삼는 건 어떠냐?” “공동 전인?”
주천기가 호기심을 보였다.
강호의 긴 역사 속에서 공동 전인은 심심찮게 등장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강호의 영웅 또는 마웅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이가 구룡제다.
구룡제 초무상은 정사대전에서 굴욕의 패배 를 당한 정도구파가 복수를 위해 키워 낸 공동 전인이다.
초무상은 열세 살 어린 나이에 구파 명숙들에 의해 벌모세수를 받고, 그 이후에 구파의 비전 절기들을 하나씩 전수받았다. 하나만 익혀도 대단한 무공들인데 아홉 가지를 한꺼번에 익혔 으니 그 힘은 가히 하늘을 뒤엎을 만했다.
구룡제는 불혹의 나이에 당시 강호를 지배하 고 있던 사황성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사황성 은 코웃음을 쳤지만 그 방심의 대가로 힘들게 얻은 강호를 잃었다.
“우리 둘이서 우진이를 천하의 영웅으로 만들 어 보는 거야. 나한테는 감각도가 있고, 너한테 는 강철무의가 있잖아.”
영웅이라는 이름에 주천기의 눈동자가 흥분 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강호의 영웅들을 동경해왔다.
황실에서는 그들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가 르쳤지만 그는 황궁무고를 수시로 드나들며 무 공을 익혔다.
팽천호가 언급한 강철무의 역시 황궁무고에 서 얻은 것이었다.
독특한 이름의 이 무공은 호신공의 일종으로 그 화후가 올라가면 신체의 내외부를 강철처럼 단단하게 만들 수 있었다. 단순하게 외피만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 공능은 다양하게 활용 가능했다.
“어제 보니까, 우진이가 널 많이 싫어하는 것 같던데.”
“아마 내 인상 때문에 그런 거겠지. 자주 보면 괜찮아질 테니, 네가 가서 넌지시 마음을 떠봐.
팽천호가 주천기의 등을 떠밀었다.
내심 마음이 동하는지 주천기도 못 이기는 척 밖으로 걸어 나갔다.
팽천호가 자리를 비운 뒤.
설우진은 연무장에 홀로 남아 역참도를 휘둘 렀다. 오른손에 남아 있는 칼부림의 여운을 떨 쳐 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칼을 휘두르면 휘 두를수록 여운이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몸이 주체할 수 없이 흥분됐다.
‘허어, 그때는 초식 하나하나를 전개할 때마 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 댔었는데 지금 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초식이 연계되잖아. 예전보다 몸이 좋아져서 그런 건가?’
설우진은 묘한 괴리감을 느꼈다.
어린 시절 감각도는 그에게 공포의 대상이었 다. 감각도의 초식들은 대부분 사각에서 치고 들어가는 변초가 많아, 손목과 발목 그리고 옆구리에 큰 부담이 가해졌다. 덕분에 설우진은 감각도를 수련하는 날이면 살을 째는 듯한 근 육통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그런데, 오늘은 손목과 발목, 옆구리 그 어디 에서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좀 더 몸을 혹사시키는 야수감각도도 충분히 펼쳐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설우진은 거 기서 역참도를 거뒀다. 뒤쪽에서 다가오는 발 소리를 들은 것이다.
잠시 후, 주천기가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부님 오셨어요.”
설우진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주천기 를 깍듯이 사부 대접했다. 팽천호가 주호장에 들어온 뒤부터 생겨난 변화였다.
“흠흠, 아까 내 친우에게 흥미로운 얘길 들었 다.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역참도로 그 친구 를 궁지로 몰아넣었다고?”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그 친구는 그리 생각하지 않던데, 혹시 제대 로 도법을 배워 볼 생각은?”
“없어요, 칼은 본시 상대를 베기 위해 만들어진 병기인데 그걸 배워 봐야 칼부림밖에 더하 겠어요?”
“그, 그래도 호신을 위해서…………”
“호신용이라면 사부님의 가르침으로 충분해 요. 솔직히 칼은 들고 다니기도 힘들고 너무 눈 에 띄어서.”
설우진은 단호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운명의 장난질로 전생의 사부와 재회하기는 했지만 그는 그 인연을 계속 이어 가고 싶은 생 각이 없었다.
사부가 미워서?
솔직히 그런 마음이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 이다. 회귀 후에 미움의 감정이 많이 희석되기 는 했지만 그래도 그의 가슴 한구석에는 지워 지지 않는 상흔처럼 그때의 감정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전생의 삶을 반복하기 싫다는 데 있었다.
그가 살아온 낭인의 삶은 고달팠다.
근본이 없다며 무시당하는 건 예사고, 먹고사는 문제로 시도 때도 없이 칼부림이 일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건, 마음 편히기대 쉴 수 있는 집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낭인들은 의뢰를 쫓아 중원 전역을 떠돈다.
하지만 중원 그 어디에도 그들이 맘 편히 묵 을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설우진이 전생에 낭천 을 만들고자 했던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 다.
‘이거, 쉽지 않겠는데 어떡한다.’
설우진의 단호한 태도에 주천기는 고민에 휩 싸였다. 긴 시간을 봐 온 건 아니지만 설우진은 말로 설득될 유형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방법 을 달리할 필요성이 있었다.
“잠시 안채에 다녀오마.”
주천기가 다시 안채로 향했다. 안채에는 팽천 호가 초조한 얼굴로 방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어떻게 됐냐?”
주천기의 얼굴을 보자마자 팽천호가 다급히 물었다.
이에 주천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화를 이었다.
“아무래도 접근 방법을 달리해야 할 것 같다.”
“그게 무슨?”
“우진이보고 무작정 제자가 되라고 할 게 아니라, 제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들게끔 노력을 하자는 얘기다.”
“지금 그 말은 나보고 그 꼬마 놈 앞에서 아양이라도 떨라는 거냐?”
팽천호가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팽가의 마지막 후예라는 자부심 하나로 세상 을 살아온 그다. 그런데 열세 살 어린애에게 제 자가 되어 달라 사정을 하라니, 이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너무 그렇게 정색할 필요 없어. 네가 싫으면 안 하면 돼. 나도 너랑 제자까지 공유하고 싶지 는 않아.”
팽천호의 격한 반응에 주천기가 냉담한 말투 로 대꾸했다. 이에 팽천호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어, 어떻게 하면 되냐?”
“뭘?”
“네가 방금 전에 얘기한 거.”
“호오, 드디어 결심이 선 거냐? 그럼 우진이 한테 가서 입 안의 혀처럼 굴어. 목이 마른 것 같으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물을 갖다 주고, 어 깨를 매만지면 네 굵은 손으로 시원하게 안마를 해 줘.”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
“아쉬운 놈이 우물을 판다고 하잖아. 지금 눈 앞에 감각도의 끝을 볼 수 있는 인재가 나타났 는데 그대로 떠나보낼 거야?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져야지.”
주천기의 말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결국, 한참의 망설임 끝에 팽천호가 방을 나 섰다. 그리고 곧장 연무장으로 무거운 발걸음 을 옮겼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이곳에서 일하게 된 호걸륜이라 합니다.”
설우진의 부모가 근무하는 본점에 이른 아침
부터 풍야패의 두목 호걸륜이 들이닥쳤다. 덩치 좋고 인상 더러운 그의 방문에 옷들을 진열하고 있던 여소교는 커다란 두 눈을 깜빡 이며 힘겹게 대꾸했다.
“저, 저어기, 가게를 잘못 찾아오신 거 아닌가 요? 전 그쪽 분을 점원으로 뽑은 적이 없는데…”
“하하, 그게, 저랑 호형호제하는 장씨가 고향 에 일이 생겨 급하게 내려가 봐야 한다고 해서. 제가 그동안 가게 일을 대신하기로 했습니다.”
호걸륜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미리 짜인 각본 대로 말을 지어냈다.
사실, 장씨는 지난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풍야패에 납치를 당했다. 고간이 고안해 낸 풍 야패 살리기의 시작점이었다.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그리고 장씨 몫을 대 신하는 것이니 보수도 필요 없습니다.”
“일이 초보자가 하기엔 생각보다 힘들 텐데요?”
“괜찮습니다. 이래봬도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몸입니다.”
호걸륜은 자신의 풍부한 인생 경험을 강점으 로 내세웠다. 여소교는 그 말이 영 미덥지가 않 았지만 당장에 새로운 점원을 구할 수도 없는지라 일단은 일을 맡겨 보기로 했다.
오시초.
첫 손님이 찾아왔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여소교가 공손히 허리를 굽혀 손님을 반겼다.
그런데 오늘 무슨 날인지, 호걸륜에 이어 첫 손님도 인상이 참 더러웠다.
나이는 서른 후반쯤 됐을까.
쫙 찢어진 두 눈에 입술 새로 길게 가로지른 흉터가 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른쪽 목 덜미 쪽에 섬뜩한 해골 문신이 선명하게 그려 져 있었다.
“저기 입구에 걸어 둔 대호 장포, 얼마지?” 사내가 다짜고짜 호객용으로 걸어 둔 대호 장 포를 가리키며 가격을 물었다.
“손님, 죄송하지만 저 장포는 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여소교는 최대한 정중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하지만 사내는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사납게 얼 굴을 들이댔다.
“이봐, 팔지도 않을 물건을 왜 밖에 내놔서 사 람 헷갈리게 만들어, 저것 사려고 들어왔는데 괜히 헛걸음하게 생겼잖아.”
사내가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시비를 걸려고 작정하고 찾아온 것인지 여소 교가 아무리 사과의 말을 건네도 받아 주질 않 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위자료까지 요구했다. 결국은 돈이 목적 이었던 것이다.
‘어떡하지? 그이도 출장 가고 없는데.’
여소교는 사내를 앞에 두고 안절부절못했다. 이런 손님들이 왔을 때는 거의 남편인 설무백 이나 장씨가 나서서 해결을 했기에 그녀로서는 어찌 대처를 해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었다.
“어이,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그 예쁜 얼굴에 실금 좀 그어 줘?”
사내가 품속에서 석 자 길이의 단도를 꺼내 들었다.
잔뜩 날이 선 단도에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갔다.
바로 그때, 가게 안쪽에서 고성이 들려왔다. 화장실에 다녀온다던 호걸륜이었다.
“이놈, 사모님께 무슨 짓이냐!”
한달음에 달려온 호걸륜이 여소교의 앞을 가 로막고 섰다. 사내는 호걸륜의 얼굴을 보더니 살짝 긴장한 얼굴로 대꾸했다.
“보아하니 점원 같은데, 괜히 나서서 설치지 말고 돈이나 가져와라.”
“이 불한당 같은 놈이 어디서 강도질이냐! 좋게 말로 할 때 돌아가라. 이 이상 무례를 범하면 그때는 이 주먹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이 새끼가 덩치만 믿고 까부는 모양인데, 어 디 이 칼을 맞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보자.”
사내가 기습적으로 단도를 휘둘렀다. 호걸륜은 살짝 뒷걸음질 치며 단도의 궤적에 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났다. 동작이 컸던 탓에 사내의 옆구리가 열렸다. 호걸륜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바람같이 파고들어 옆구리에 주먹 을 박아 넣었다.
“크윽.”
사내가 외마디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기세 좋게 싸움을 걸어온 것치고는 너무 허무 한 결과였다.
“다시 한 번 우리 가게 주변에서 얼씬거리면 그때는 정말 내 손에 죽는다. 오늘은 이쯤에서 끝낼 테니 조용히 사라져.”
호걸륜이 사내의 귀에 대고 단단히 경고했다. 이에 사내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고마워요, 호씨 덕분에 살았어요.”
사내가 떠난 뒤, 여소교가 호걸륜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아이구, 민망하게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 까. 앞으로도 저런 불한당들 나타나면 무조건 저를 불러 주십시오. 다른 건 몰라도 이 주먹만 큼은 아직 쓸만합니다.”
호걸륜이 두툼한 주먹을 들어 보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갑자기 찾아든 불한당이 그에게는 복이 됐다. 생각보다 빨리 여소교의 신임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니미, 더럽게 아프네.”
“엄살 그만 피우게, 주먹 한 대 맞은 거 가지 고 요란 떨기는.”
“그건 네놈이 형님 주먹을 안 맞아 봐서 그래. 짜고 치는 건데도 갈빗대가 나가는 줄 알았다 니까. 괜히 소싯적 별명이 철권이 아니었어.”
설가 포목점과 마주하고 있는 이 층 주루.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한 명은 풍야패의 두뇌로 불리는 고간이었고, 다른 한 명은 설가 포목점에서 난동을 부렸던 그 불한당이었다.
“그나저나 이 방법이 먹힐까? 그 꼬마 놈, 성 질머리가 보통이 아니던데.”
불한당이 턱 밑을 살짝 긁더니 얼굴 거죽을 위로 거칠게 들어 올렸다. 얇게 펴낸 인피면구 너머로 풍야패의 부두목 막철의 얼굴이 보였다
“그건 걱정 말게. 아무리 성질 더러운 마두라 도 제 어미에게는 순종하게 돼 있거든. 두목님 이 저 설가의 안주인 마음만 확실히 얻어 낸다 면, 풍야패는 살 수 있네.”
“제발 좀 그랬으면 좋겠다. 두목님이 나이 먹 고 저리 뛰어다니시는데………….”
창문 너머로 여소교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호걸륜의 모습이 비쳤다.
쉭 쉬쉭.
수십 개의 창영이 하늘을 갈랐다.
내공이 실려 있지는 않아도 창두에 실린 힘은 제법 매서웠다.
“좀 쉬면서 하지 그러냐? 여기 시원한 냉수도 있는데.”
쉼 없이 창을 내지르는 설우진의 등 뒤에 팽 천호가 어색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의 양손에 는 냉수가 담긴 대접과 수건이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