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위 발현 (1)
“단주님, 이건 인간적으로 너무한 거 아닌가요? 아무리 제가 얹혀 가 는 입장이라지만 어떻게 말고삐를 쥐일 수가 있습니까.”
허름한 마차에 탄 설우진이 말을 몰고 있었다. 입으로는 쉴 새 없이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고삐를 쥔 손 은 자연스럽게 말 머리를 산길 한가 운데로 이끌었다.
그는 나흘 전, 일단의 무리와 함께 무한을 떠났다. 그 무리는 서안으로 상행을 떠나는 천중 상단이었다. 사실 그는 상단과 동행할 생각이 없었다. 무공을 사용해서 달리면 말 보다 훨씬 더 빨리 목적지인 서안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행여 나 서안으로 가는 길에 사고를 당하 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천중 상단에 부탁을 한 것이다. 설우진은 속으로 일정이 어긋나기를 바랐다. 한데 공 교롭게도 일정이 정확히 겹쳤다.
“이놈아,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냐! 돈 한 푼 안 내고 서안까지 편히 가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
‘빌어먹을 수전노.’
설우진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마차를 모는 건 눈에 보이는 것처 럼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다. 일단 마부석의 승차감은 등자 없이 낙타 를 타는 것과 같았고 두 눈은 매의 그것처럼 쉴 새 없이 전방을 주시해 야 했다. 덕분에 엉덩이는 욱신거리 고 두 눈은 모래를 끼얹은 것처럼 뻑뻑했다.
“이제라도 그냥 돈 내고 편하게 마 차 타면 안 될까요? 서안까지 하루 이틀 거리도 아니고.”
“안 돼. 너만 믿고 이미 마부를 집 으로 돌려보내 버렸거든.”
“그래도 예비 마부는 있을 거 아니 에요. 제가 알기로 각 상단들은 상행을 움직일 때 말을 몰 수 있는 이를 짐꾼으로 동행시킨다고 하던 데.”
설우진은 자신이 알고 있는 상행의 경험을 빌려 예비 마부의 존재를 언 급했다.
“크큭, 다른 상단은 어떨지 몰라도 우리 상단에는 예비 마부 같은 거 없어. 정 급하면 이 몸이 몰면 되거 든.”
‘하아, 정말 저런 인간이랑 서안까 지 가야 하는 거야? 몸이 힘든 건 둘째 치고 복장이 터져서 죽을 것 같은데.’
설우진은 속에서 울화가 들끓었다. 맘 같아선 당장에라도 마차를 버리고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강무호는 절대 갑이었다. 일품점에
투자된 일천 냥의 투자금이 문제였 다.
“이놈아, 너무 열 내지 마라. 저 언덕배기만 넘어가면 잠시 쉬어 갈 테니.”
눈앞에 경사진 언덕이 보였다. 더 열내 봐야 자신만 손해라는 생각에 설우진은 입을 닫아물고 고 삐를 힘차게 흔들었다. 놀란 말은 속도를 끌어올려 언덕배기를 향해 힘차게 내달렸다.
“물건은 확실합니까?”
“그건 걱정 마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귀안에게서 구매한 정보니까.”
호화스럽게 꾸며진 방 안.
두 명의 중년 사내가 얼굴을 맞대 고 있었다.
둘은 각기 호북과 섬서 땅을 근거 지로 활동하는 녹림십팔가의 일원이 었다.
녹림십팔가는 녹림도들이 자신들도 하나의 당당한 가문이라며 새롭게 붙인 이름이다.
강호인들 대다수는 이를 우습게 바 라봤지만, 십팔가의 이름을 얻은 후 녹림도들은 전에 없던 끈끈한 결속 력을 보이며 세력을 크게 확장해 나 가고 있었고, 그 흐름의 중심에 관 해철과 사위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먼저, 관해철은 순혈의 녹림도로 험악한 외모에 타고난 신력을 자랑 했다. 젊은 시절에는 광룡채에 몸담 고 있었는데 토벌에 나선 관군에 겁 을 먹은 채주가 도망을 치자 남은 이들을 이끌고 관군과 맞서 싸웠다. 수적으로 절대적 열세에 놓인 상황 이었지만 그는 저돌적인 공격으로 광룡채의 승리를 이끌었다.
그날의 승리 이후, 그를 동경하는 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그 숫 자는 해가 갈수록 늘어났고 이에 관 해철은 인근에 있는 녹림십팔채를 쳐 새로운 권력을 확립했다.
녹림에서 나고 자란 관해철과 달리 사위진은 외부에서 흘러들어 정착했다. 산적 같지 않은 수려한 외모 탓에 초창기에는 녹림도들 사이에서 샌님 이라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는데 시 비를 걸어온 금호채의 부채주 나곤 을 한 방에 쓰러뜨리면서 그 인식이 확 바뀌었다. 그 뒤로 사위진은 금 호채로 들어가 나곤의 빈자리를 채 웠다.
“호병들은 얼마나 따라왔습니까?”
사위진이 물었다.
“정찰 나간 애들의 보고에 따르면 스무 명 정도. 호병들의 수준은 잘 쳐줘 봐야 일류 무사 급이니, 우리 애들 한 백명 정도만 동원하면 될 듯싶은데.”
“그럼 암영은 누가 맡습니까?”
“그야 당연히 네가 맡아야지. 정찰 도 우리가 하고, 물건을 빼내 오는 것도 우리가 하는데.”
관해철이 당연한 얘기를 왜 묻느냐 는 투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교활한 곰 새끼. 그 두 가지 일보 다 암영 하나를 상대하는 게 훨씬 힘들다는 걸 뻔히 알면서 뻔뻔스럽 게 내게 그걸 요구하다니.’
사위진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식하고 힘만 세다는 세간의 평가 와 달리 직접 만나 본 관해철은 용 의주도했다. 쉽게 얘기해 자기 손해 날 짓은 안 한다는 뜻이다.
이번의 경우도 그랬다.
암영은 천중 상단주의 그림자 호위 다. 지근거리에 머물다가 적들이 출 현했을 때 보이지 않는 검을 날리는 데 그 검에 목이 잘린 녹림도가 기 백을 훌쩍 넘었다.
“알겠습니다. 가주님의 뜻대로 암 영은 제가 맡지요. 대신 저희 쪽지 분을 좀 높여 주셔야겠습니다.”
“사 할이면 충분히 높게 쳐준 것 같은데.”
“암영을 상대하려면 제 목숨을 걸 어야 합니다. 제 목숨값으로 일 할 만 더 쳐주시지요.”
‘이런 근본도 없는 녹림도 새끼가!’
수익을 더 달라는 사위진의 요구에 관해철은 사납게 호목을 치켜떴다.
하지만 그 요구를 거절할 수는 없었 다. 냉정하게 얘기해서 그의 무공은 천생 신력에 기반을 둔 것이라 내가 기공을 익힌 무인들에게는 상대적으 로 취약한 측면이 있었다. 그래서 그에겐 사진이 꼭 필요했다.
“좋다, 네가 암영만 깔끔하게 처리 해준다면 일할을 더 쳐서 금호가 몫으로 오 할을 내주마.”
“그 약속 잊지 마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사위진은 방을 나섰다.
산 중턱에 넓게 자리 잡은 공터. 천중 상단의 호병들이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부랴부랴 자리를 잡고 불을 피웠다.
여타의 상단에서는 볼 수 없는 희 귀한 광경이었다.
이는 쓸데없는 데 돈 나가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강무호의 성향 탓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런 잡다한 일 들을 하면서도 누구 하나 불평불만 을 늘어놓는 이가 없었다.
“그래도 양심은 있으신가 보네요. 밥하라고 떠밀지 않으시는 걸보니.”
“크큭, 그렇게 겪고도 아직 날 모 르겠냐. 네 역할은 밥 짓기가 아니 라 설거지다. 밥은 배불리 먹여 줄 테니 식사 끝나고 그릇들 깔끔하게 씻어 와.”
‘그럼
그렇지.’
설우진은 이제 더 화도 나지 않았다.
강무호란 인간에 대해서 그냥 체념 을 해 버린 것이다.
“그나저나 저 수레엔 뭐가 실려 있 죠? 호병들이 철통같이 경계를 서는 걸 보면 꽤나 비싼 물건 같은데.”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얘길 안 했 었나? 저기 실려 있는 물건들 모두 네 작품이야. 서안의 고관대작들이 대량으로 주문을 했거든.”
“꽤나 잘나가나 보네요?”
“잘나가지. 덕분에 우리 상단의 매출도 꽤나 올랐거든.”
“그럼 제가 매출 신장의 일등 공신 이네요! 뭐 느끼시는 거 없으세요?”
설우진이 은연중에 압박을 넣었다. 남은 길이라도 편안하게 가게 해 달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강무호의 반
응은 시큰둥했 다.
“이 녀석아, 그게 어찌 네 공이냐? 명품 사업을 고안해 낸 건 이 몸인 데.”
“그래도 제가 없었으면 사업을 시 행할 수도 없었잖아요.”
“그건 모를 일이지. 이 드넓은 중 원에 얼마나 많은 기인 이사들이 존 재하는데.”
‘하긴 틀린 말은 아니지. 단예만해도 자수에 대한 재능만큼은 나보 다 뛰어나니까.’
설우진은 서안으로 떠나기 직전까 지 단예와 함께 자수를 놨다. 벽뢰 진천의 이단계, 제뢰의 숙련도를 높 이기 위함이었다. 속도는 숙련도에 서 앞서는 설우진이 훨씬 빨랐다. 하지만 자수 자체의 완성도는 오히 려 단예 쪽이 더 나았다.
“단주님, 식사 준비 다 끝났습니다. 이쪽으로 와서 드시죠.”
둘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반반한 흙 바닥 위에 조촐하지만 깔끔한 한 상 이 차려졌다. 산에서 구할 수 있는 싱싱한 야채부터 건조시킨 어포를 넣어 끓인 어선탕까지. 어느 것 하나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게 없었다.
“잘 먹겠습니다.”
종일 마차를 모느라 허기가 졌던지 설우진은 눈앞의 음식들을 게 눈 감 추듯 비워 갔다. 그 모습에 자극을 받았는지 강무호도 만만치 않은 속 도로 젓가락을 놀렸다. 호병들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일각여 뒤.
식사가 끝나고 설우진이 설거짓거 리가 잔뜩 담긴 바구니를 들고 근처 계곡으로 향했다.
콸콸콸.
계곡물이 시원하게 굽이쳐 흘렀다. 설우진은 숙련된 동작으로 근처의 덩굴 가지를 끊어 오른손에 돌돌 감 았다. 그리고 손이 다 가려질 정도 로 촘촘해지자 이내 그릇을 닦기 시 작했다.
“이것도 오랜만에 하니까 재미있 네. 그때는 귀찮기만 했었는데.”
계곡물에 깨끗하게 닦여 나가는 그 릇들을 보면서 그는 옛 추억에 젖어 들었다.
그런데 추억이 뇌리에 그려지려는 순간, 멀리서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 께 비명이 연이어 들려왔다.
‘다른 곳도 아니고 녹림십팔가에 속해 있는 광룡가의 구역을 지나는 데 어째 너무 순탄하다 했어.’
설우진은 낭인으로 한참 활동할 때 지겹도록 녹림도들과 칼을 맞댔다. 가장 흔하게 맡게 되는 의뢰가 상단 호위이다 보니 어쩔 수 없게 겪게 되는 상황이었다.
‘광룡가는 궁을 즐겨 쓰기로 유명 해. 상단이 머물러 있는 개활지에서 놈들이 작정하고 궁을 쏴 댄다면 칼 한 번 휘둘러 보지 못하고 당할 수 도 있어. 이런 경우엔 궁수부터 제 압해야 하는데.’
설우진은 광룡가에 대한 기억을 떠 올린 뒤 급하게 설거지 바구니를 품 에 안고 뛰었다.
피슈슝.
개활지 안으로 화살 비가 내렸다.
호병들은 옆에 내려 뒀던 칼을 급 하게 챙겨 들고 화살을 튕겨 냈다. 내기가 실려 있는 건 아니라서 쳐 내는 데 그리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 다.
그런데 문제는 화살의 숫자였다. 얼마나 비축을 해 뒀는지 호병들이 숨 돌릴 새도 없이 계속해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상대적으로 무공이 떨어지는 호병 하나가 다리에 화살을 맞고 비틀거 렸다. 옆에 서 있던 호병이 도우려 나섰지만 되레 어깨에 화살을 맞고 말았다.
“비월, 아이들을 구해라.”
강무호가 굳은 표정으로 비월을 불렀다.
하지만 비월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 았다. 명령을 따를 수 없다는 무언 의 표시였다.
“비월, 명령이다. 당장 아이들을 구 해!”
강무호가 한 번 더 언성을 높였다. 그제야 비월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런데 비월의 시선은 호병 쪽이 아닌 수풀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단주님, 마차 안에 들어가 계십시 오.”
비월이 조심스럽게 검을 뽑아 들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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