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2권 – 23화 : 황하 출두 (2)
황하 출두 (2)
“너, 내가 만만하냐? 말 좀 트고 지낸다고 내가 우스워 보여?”
설우진이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나 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큰소리 를 내며 화를 내는 것보다 그 모습 이 오히려 더 위협적으로 비쳤다.
“오, 오해야. 나 한 번도 너한테 그런 마음 가진 적 없어.”
“근데 왜 나한테 묻지도 않고 네 멋대로 결정해?”
“미안해, 네가 이렇게까지 싫어할 줄은 몰랐어. 난 그저 학관에서 제일 친한 친구와 함께하고 싶었을 뿐인데…………….”
조인창이 잔뜩 기죽은 얼굴로 설우진에게 사과했다.
‘친구라・・・・・・자식, 싱겁기는.’
친구라는 말에 한껏 끓어올랐던 설 우진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그는 회귀 전 제대로 된 친구를 사귀어 보지 못했다.
어린 시절에는 사부와 단둘이 지내 느라 만날 기회가 없었고 낭인이 된 뒤에는 거짓과 위선이 난무하는 세 계에서 친구라는 존재를 아예 만들 지 않았다.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르기에.
“꼭 그렇게 나와 함께 가야겠냐?”
설우진이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니야. 그냥 나 혼자 다녀올 게.”
“자식아, 맘에도 없는 소리 그만하 고 내일 가져갈 짐이나 챙겨. 네가 좋아하는 착한 일 하려면 최대한 많 이 짊어지고 가야 할 거야.”
“정말 함께 가 주는 거야?”
조인창이 반색하며 물었다.
“그렇게 좋아할 필요 없어. 진짜 그냥 따라만 가 주는 거니까. 난 그 곳에서 따로 할 일이 있어.”
민망함에 괜히 지어낸 말이 아니었 다.
설우진이 황하행을 맘먹은 건 단순히 친구라는 말에 감동을 해서가 아 니었다.
그가 기억하는 황하 대범람은 그로 인해 발생한 수많은 이재민보다 한 가지 물건이 더 주목을 받았었다. 그 물건은 바로 서역에서 건너온 하 나의 작은 불상이었다.
‘혈옥불, 당시 서안에 피바람을 불 러일으켰던 마물. 불상 안쪽에 마천 의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해서 욕심 많은 놈들이 개떼처럼 달려들었었 지. 나도 그중 하나였고.’
설우진은 개인적인 욕심으로 혈옥 불 쟁탈전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그는 돈 많은 부자에게 고용돼 있었다. 그 부자는 혈옥불을 갖고 싶다며 다수의 낭인들에게 쟁 탈전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설우진을 비롯한 다수의 낭인 들은 거액의 선수금을 받고 쟁탈전 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많은 세력이 뒤엉킨 난장판에서 그들이 살아남기 란 요원한 일이었다.
‘그 빌어먹을 혈옥불 때문에 죽다 살아났지. 그때 정체 모를 고수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십중팔구 죽었을 거야.’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
당시의 그는 숙련되지 못한 낭인이 었다. 감각도를 익혀 무공 자체는 꽤 뛰어난 편에 속했지만 실전 경험 이 부족해 뜻하지 않은 위기에 봉착 하곤 했다.
혈옥불을 쫓을 때도 그랬다.
의욕만 앞섰던 그는 경험 많은 낭 인들이 은근슬쩍 뒤로 빠질 때 철모 르고 앞쪽에서 날뛰었다. 그러다 보 니 자연스럽게 주목받는 대상이 됐 고 혈옥불에 가까이 접근했을 때 사 방에서 칼이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온몸이 피로 얼룩졌다. 열심히 싸웠지만 초보 낭인이 견뎌내기엔 너무 가혹한 시련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악귀 탈을 쓴 이들이 쟁탈전 한복판에 등장했다.
새로운 적의 출현에 탐심 넘치는 군웅은 칼 머리를 그쪽으로 돌렸다.
그 틈에 설우진은 시체 밑으로 숨어 들었다.
그는 숨죽인 채 악귀 탈을 쓴 자 들과 군웅의 다툼을 지켜봤다.
잠시 후 일방적인 학살이 자행됐 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 대상이 군웅 이라는 점이었다. 악귀탈을 쓴 자들 은 압도적인 강함을 자랑했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침없이 군웅 사이로 파고들어 살수를 펼쳤 다.
피가 강이 되어 흐르고 시체가 산 처럼 쌓여 갔다.
무슨 철천지원수라도 된 것처럼 악귀 탈을 쓴 자들은 손 속에 전혀 사정을 두지 않았다.
‘그 자식들 대체 정체가 뭐였을까? 정황상 마천의 주구였을 확률이 높 지만…………….’
설우진은 새삼 그들의 정체가 궁금 해졌다.
당시에는 살아남기 바빠 관심을 가 질 새가 없었는데 이제는 달랐다. 마음먹기에 따라 혈옥불을 수중에 넣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정체까 지도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다.
‘혈옥불을 찾아 움직이려면 아무래 도 주변의 이목이 적은 것이 좋겠 지. 그러려면 일단 관음회부터 떼어 놔야지.’
“관음회 애들하곤 따로 움직이자. 분명 바리바리 싸 들고 움직일 텐데 그것들 기다리다간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된다.”
“그래도 약속한 게 있는데………….”
“그럼 너 혼자 관음회랑 같이 움직 이든가.”
“아, 알았어. 관음회주한텐 내가 잘 말할게. 대신 내일 새벽에 일찍 출 발하자. 다들 우리 도움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
“참 대단한 협객 나셨다. 그래, 내 일 새벽에 보자.”
설우진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교실을 빠져나갔다.
“미끼는 준비됐는가?”
누런 황토물이 흐르는 황하 강변.
적안의 노인과 날카로운 눈매를 지 닌 중년의 사내가 나란히 서 있었 다.
“사흘 전에 마천의 사자가 가져왔 습니다. 청무에게 미끼를 들고 움직 이라 했으니 조만간 철모르는 고기 떼가 그 주변으로 몰려들 것입니 다.”
“얼마나 물 것 같은가?”
“미끼가 탐스러우니 못해도 열이 상은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랜만에 자네의 청백검이 피로 얼룩지겠군.”
“바라던 바입니다.”
중년의 사내가 허리에 내걸린 검을 매만졌다.
주인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격렬한 검명이 사위에 울려 퍼졌다.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의심 많 은 마천의 장로들도 우리를 더는 배 척하지 못할 걸세. 멸천지계의 첫 단추를 꿰는 일이니 실수 없도록 하 게나.”
“염려 마십시오. 실수는 놈들을 믿 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
사내의 두 눈에 결연한 의지가 내비쳤다.
“잘 봐, 네가 저곳에서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배 기.
설우진이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 켰다. 그곳은 홍수가 나기 전 신하 촌이 들어섰던 자리였다. 한데 지금 은 온통 진흙으로 뒤덮여 있었다. 마을임을 짐작할 수 있는 흔적이라 곤 긴 세월 마을을 지켜 온 수호목 한 그루뿐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심각하네.”
“홍수가 본래 그래. 한순간에 모든 걸 앗아가 버리거든.”
“일단 아래로 내려가 보자. 다들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거야.”
조인창이 급하게 산 아래로 내려갔 다.
그의 등에는 집채만 한 봇짐이 들 려 있었다. 설우진의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여 마을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이것저것 챙겨 온 것이다.
‘어쩌다 저런 놈이 사파에서 태어 난 거지? 이럴 때 보면 운명이란 놈은 참으로 얄궂단 말이지.’
설우진은 조인창의 등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촌장님,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자는 건 둘째 치고 당장 먹을 식량도 없습니다.”
수호목이 자리한 곳.
모여 있었다. 그신하촌 사내들이 간의 마음고생을 말해 주듯 다들 낯 빛이 어두웠다.
“상윤이가 구휼미를 청하기 위해 서안현청으로 갔네. 나라에서도 이 번 홍수가 얼마나 컸는지 잘 알고 있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 보세.”
마을 촌장인 서 노인이 사내들을 달랬다.
하지만 터전을 잃어버린 이들의 불 안감은 쉽게 가실 줄 몰랐다.
“기다리라고만 하지 마시고 당장의 대안을 말씀해 주십시오. 촌장님은 전에도 이런 홍수 사태를 겪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목소리가 격앙됐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마을을 대표 하는 위치에 있는 촌장에 대한 분노 로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격한 반응에 도 서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 다. 마땅한 대안이 없어서였다.
“저기.”
바로 그때 조인창이 그들 앞에 모 습을 드러냈다.
낯선 청년의 등장에 마을 사람들은 의심과 불안이 교차된 눈빛으로 그 를 바라봤다.
“해를 끼치려고 온 게 아닙니다. 저는 근처 학관에 다니고 있는 조인 창이라 합니다. 홍수로 큰 피해를 입으셨다는 얘길 듣고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 찾아왔습니다.”
조인창은 마을 사람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자신에 대해 간 략하게 소개했다.
“정말 저희를 도우러 오신 겁니까?”
서 노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에 조인창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 며 등에 메고 있던 봇짐을 아래로 내렸다.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간단한 먹을거리와 옷가지를 챙겨 왔습니다.”
봇짐을 풀자 꾹 눌러 담은 옷가지 와 육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조인창이 한 달 치 용돈을 쏟아부은 결과물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오랜 만에 보는 깨끗한 옷과 고소한 내음 을 풍기는 육포에 온전히 시선을 빼 앗겼다.
“촌장님.”
마을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서 노인 을 불렀다.
서 노인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 니, 이내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조 인창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여기 옷가지들과 식량은 아녀자들 이 머무는 곳으로 가져가 나눠 주도 록 하게.”
“그럼 저희는?”
“우리들은 사내지 않은가? 상윤이가 올 때까지 조금만 더 버텨 보 세.”
서 노인의 말에 장정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들은 체력적 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었다.
“촌장님, 저희들은 며칠째 피죽 한 그릇 먹지 못했습니다. 아녀자들을 위하는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엉망 이 된 마을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저 희들부터 기력을 되찾아야 합니다.”
구릿빛의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청 년 길보성이 서 노인의 지시에 대놓 고 불응했다.
그는 신하촌의 전임 촌장이었던 길춘삼의 독자였다.
길춘삼은 십 년 전에 서 노인의 뒤를 이어 촌장이 된 인물로 촌장이 된 지 불과 일 년도 안 돼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덕분에 서 노인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촌장 자리를 맡게 됐다.
그 일로 길보성은 내심 서 노인에 게 악감정을 품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촌장이 되겠다는 그의 야심을 서 노인 때문에 접어야 했기 때문이 다.
“음, 자네 말도 일리는 있네만 그 래도 아녀자들부터 구하는 게 도리 일세. 지난밤에 자네도 보지 않았는 가. 시름시름 앓던 아녀자들을.”
‘빌어먹을 영감탱이. 자기가 무슨 성인군자인 줄 알아. 우리가 당장 굶어 죽게 생겼는데.’
길보성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당장의 맘 같아선 서 노인을 쫓아 내 버리고 저 봇짐을 차지하고 싶은 데 서 노인 옆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황룡 학관의 관도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가만, 내가 왜 여기서 쓸데없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거지. 여기만 벗어나면 내 맘대로 해도 뭐라 할 사람 없잖아.’
조인창의 눈치만 살피고 있던 길보 성이 한순간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리고 머릿속의 생각을 곧장 행동으로 옮겼다.
“촌장님, 제 생각이 짧았던 것 같 습니다. 이것들은 야산으로 가져가 아녀자들에게 나눠 주겠습니다.”
길보성이 집채만 한 봇짐을 등에 짊어졌다.
어릴 때부터 힘 하나는 타고났다는 얘길 들어 온 터라 따로 무공을 익 히지 않았는데도 크게 힘든 기색 없 이 봇짐을 지고 걸음을 옮겼다.
이에 눈치만 살피고 있던 마을 청 년들이 앞다퉈 그의 뒤를 쫓아갔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한시름 덜게 됐습니다.”
청년들이 자리를 뜨고 난 뒤 서 노인이 조인창에게 고개를 조아렸 다.
“어르신, 이러지 마십시오. 어려움 에 처한 이를 돕는 것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이 청년,진심이군. 우리 마을의 아이들이 이 청년의 반만 닮았어도 좋으련만.’
“앎을 직접 몸으로 행한다는 건 참 으로 어려운 일이지요.”
“하아, 제 얼굴에 너무 금칠을 하시네요.”
조인창이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