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2권 – 25화 : 측은지심 (1)
측은지심 (1)
‘저게 왜 이 식탁에 올라와 있는 거지. 다른 곳에서 채취한 석이버섯 인가?’
설우진의 시선이 석이버섯 죽이 담 긴 그릇에 고정됐다.
석이버섯은 생김새가 독특해 조리 를 한 뒤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 었다.
바로 그때 그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덕한 체구에 좌우로 쫙 찢어진 눈을 한 여인 손추향이었다.
“귀한 분들이 오셨다는 얘길 듣고 손수 준비한 음식들이에요.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네요.”
손추향이 한껏 자신의 음식 솜씨를 자랑했다.
눈치 없는 조인창은 음식을 하나씩 맛보며 그녀의 솜씨를 칭찬했다.
“이 요리는 처음 보는 듯한데, 뭘 넣은 거요?”
설우진이 젓가락으로 석이버섯을 들춰내며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호홋, 역시 눈썰미가 예사롭지 않 네요. 그 거뭇거뭇한 버섯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 는 험한 바위에서 자생한다고 알려진 석이랍니다.”
“석이는 꽤 비싸다고 알고 있는데.”
“제 아들 녀석이 귀한 손님 드린다 고 저쪽 바위 절벽을 내려가 손수 따왔답니다. 재주가 남다른 아이니 잘 봐 두셨다가 필요한 일이 있을 때 데려가세요.”
손추향은 소교에게서 빼앗은 석이 버섯을 아들의 공으로 왜곡시켰다.
“크큭, 아줌마, 말은 똑바로 하지. 그 석이버섯, 당신 아들이 딴 게 아니잖아.”
설우진이 냉소와 함께 일갈을 내질 렀다.
그의 돌발 행동에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우진아, 갑자기 왜 이래?”
조인창이 당황한 얼굴로 설우진을 말렸다. 하지만 한번 꼭지가 돌아 버린 그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무,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 …….”
“오해? 하긴 나쁜 연놈들치고 스스 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는 없지. 아줌마, 혹시 소교라는 애 알아?”
손추향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 렸다.
“대답을 못 하는 걸 보니 아는 모 양이네. 그 아이가 아까 당신이 말 한 바위 절벽에 매달려 있었어. 내가 우연히 그 밑을 지나고 있었는데 글쎄 그 아이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 졌지 뭐야. 그래서 내가 냅다 이 칼 을 던졌어.”
설우진이 등에 차고 있던 천뢰도를 뽑아 들었다.
“덕분에 그 아이는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 근데 그 아 이가 나보고 뻔뻔하게 부탁을 하지 뭐야. 바위에 붙어 있던 버섯들을 따 달라고.”
설우진의 얘기에 주변이 웅성거리 기 시작했다. 그가 얘기하는 아이가 누구인 줄 다들 짐작하는 것이다.
쉭.
설우진이 조용히 칼을 내뻗었다.
눈 깜짝할 새 칼끝이 그녀의 미간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주르륵.
그녀의 치마 밑이 축축해졌다. 극 도의 공포심에 저도 모르게 오줌을 지린 것이다.
“그 아이들한테 무슨 짓을 했지?”
“아,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아줌마, 사람의 입은 거짓말을 해 도 눈은 거짓말을 못하는 법이야. 근데 당신 눈 지금 엄청 떨고 있거 든.”
설우진은 그녀를 거세게 압박했다. 거의 졸도하기 직전이었다.
바로 그때.
잠시 모습을 감췄던 길보성이 뜻밖의 인물을 데리고 나타났다. 설우진 이 바위 절벽에서 석이버섯을 따 줬 던 어린 소녀 소교였다.
‘하필이면 저놈이 석이버섯을 따 준 장본인일 줄이야. 뭐, 하지만 상 관없어. 소교 이년이 스스로 줬다고 우기면 제 놈도 별수 없겠지.’
길보성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 올랐다.
그는 이곳으로 나오기 전에 소교에 게 단단히 일러뒀다. 물론 폭력이 동반된 협박이었다.
“교야, 손님이 오해를 하고 계신데 네가 좀 풀어 드려야겠다. 저 버섯, 네가 우리한테 준 거지?”
전에 없이 부드러운 어조로 길보성이 물었다.
소교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그가 주입했던 말들을 꺼내려 했다.
바로 그때 머릿속에서 난데없는 목 소리가 들려왔다.
-겁먹지 말고 사실대로 얘기해.
무슨 일인가 싶어 앞을 바라보는데 소교의 눈에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설우진의 얼굴이 들어왔다.
‘여기에 내 편이 있어.’
소교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았다. 유일한 친족인 큰아버지 내외는 부 모님이 남긴 재산을 빼돌린 것으로 도 모자라 바쁜 농사철마다 어린 그 녀를 일꾼으로 부렸다.
밥이라도 넉넉히 줬다면 고맙게 일 을 했을 텐데 고된 노동의 끝에 돌 아오는 건 다 말라비틀어진 밥이 전 부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자신을 동정하 면서도 막상 도움을 청하면 차갑게 외면하기 일쑤였다.
한데 오늘 난생처음 본 오빠가 먼 저 손을 내밀어 줬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서 그 오빠가 자신을 바라보 고 있었다.
“길 오라버니의 말은 다 거짓말이 에요. 저기 담겨 있는 버섯 죽, 제 가 상이 줄려고 만든 거예요. 근데 큰어머니가 억지로 빼앗아 갔어요.”
소교는 설우진을 보고 용기를 냈다.
“너, 너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 분명 네 손으로 가져왔었잖아.”
길보성이 당황한 얼굴로 소교의 어 깨를 잡고 흔들었다. 힘이 많이 들 어갔던지 소교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본 설우진은 지체 없이 식탁 끄트머리를 발바닥으로 거칠게 밀어 찼다. 그 충격에 세로 방향으 로 묶여 있던 대나무 조각이 밖으로 튀어나갔다.
퍽.
길보성이 배를 움켜쥐고 바닥에 주 저앉았다.
“연극을 하려면 좀 그럴싸하게 해. 방금 전 네놈의 눈동자가 얼마나 떨 렸는지 알아? 내가 얘기했잖아, 상 대를 속이려면 그 눈부터 단속하라 고.”
설우진이 길보성 앞으로 다가갔다. 몇 걸음 내딛지도 않았는데 순식간 에 둘 사이의 간격이 좁아졌다.
“이유가 뭐냐?”
“……”
“부모 잃고 힘들게 사는 애들을 괴롭힌 이유가 뭐냐고.”
“괴, 괴롭힌 적 없습니다.”
길보성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설우진은 소교가 입고 있던 다 떨어진 상의를 거칠게 잡아챘다.
그가 힘을 주자 상의는 힘없이 찢 어졌다.
“어머, 저게 뭐야. 멍이 시퍼렇게 들었잖아.”
“설마, 소문이 사실이었던 거야?”
“천하의 몹쓸 사람들이네.”
소교의 벗은 몸은 멍든 상처로 그 득했다.
일부러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 만 골라서 때렸는지 어깨와 가슴, 옆구리 쪽이 시퍼렇게 물들어 있었 다.
“시끄럽게 조잘대지 마. 당신들도 이 자식하고 하나 다를 거 없어. 직 접 괴롭히지 않았다 뿐이지 다들 알 면서도 쉬쉬했던 거잖아. 그게 어른이 돼서 할 짓이야!”
설우진이 마을 사람들에게 일갈을 내질렀다.
솔직히 소교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깊게 관여할 생각 은 없었다. 자신은 이방인이고 이곳 에서의 일을 마치면 곧장 떠날 생각 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손추향과 길보성 모자의 작태 를 보고 있자니 도저히 가만있을 수 가 없었다.
“적어도 한 명은 도왔어야지. 입장 바꿔 생각해 봐. 당신네 자식들이 부모를 잃고 소교 남매처럼 자란다
면 그 심정이 어떨 것 같아?”
“……..”
설우진의 물음에 마을 주민들은 고 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뒤늦게 스스로의 행동에 부 끄러움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니었 다.
이번 일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손추향은 되레 악에 받친 얼굴로 소 리쳤다.
“이건 우리 집안일이야. 제삼자가 끼어들어 왈가불가할 일이 아니라 고. 그리고 뭣보다 우린 모잔 소교 남매한테 할 만큼 했어.”
“아줌마, 아직 사태 파악이 안 되 나 보네. 뭐 상관없어. 당신이 내뱉 은 그 말이 당신 아들에겐 비수가 되어 돌아갈 테니까. 바로 이렇게.”
설우진이 손추향과 눈을 맞추며 오 른발을 길보성의 손 위로 가져갔다. 그리고 천천히 지르밟아 뼈마디를 하나씩 바스러뜨렸다.
“끄아악!”
길보성이 손목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러 댔다.
하지만 설우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내 아들한테 무슨 짓이야. 당장 그만둬.”
“왜, 당신 아들이 아파하니까 괴로 워? 근데 어쩌지, 난 멈출 생각이 없는데.”
설우진이 쐐기를 박듯 발뒤꿈치에 힘을 실었다.
이어지는 비명과 함께 길보성의 오 른손이 힘없이 축 처졌다. 손가락 신경이 가해지는 힘을 견디지 못하 고 끊어져 버린 것이다.
“이 악귀 같은 놈아! 차라리 날 때 려라. 어찌 사람을 그리 무자비하게 밟을 수 있느냐?”
“그럼 당신은? 이 아이의 몸에 난 상처들을 봐. 하루 이틀 사이에 생 긴 것들이 아니야.”
설우진이 소교의 몸에 난 멍 자국 을 가리키며 차갑게 반문했다.
보통의 멍은 외부의 충격으로 피부 안쪽의 혈관이 터지면서 생겨난다. 멍이 사라지기까지는 보통 이 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데 그 충격의 정도가 심한 경우에는 더 오래가기도 한다.
소교의 경우 멍들의 색깔이 제각각이었다.
어떤 것은 검고 어떤 것은 옅은 푸른빛을 띠기도 했다.
그럼 이 색깔들이 의미하는 바는 뭘까?
그건 매를 맞은 시기가 제각각 다 르다는 것을 뜻했다.
“당신은 저항할 힘도 없는 어린아 이를 상대로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 했어. 그건 무슨 변명을 늘어놔도 절대 용서할 수 없어.”
“그,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
“소교를 대신해서 당신에게 벌을 내릴 거야. 그간에 한 행동들을 뼈 저리게 후회하도록.”
설우진이 다시 발을 올렸다.
이번에 노린 곳은 길보성의 오른쪽 발목이었다.
“당신 때문에 아들이 병신이 되는 거야. 그것 하나만 기억해.”
설우진이 한 점 망설임 없이 발을 찍어 눌렀다. 갑자기 가해진 충격에 발목이 역팔자로 꺾였다. 비명을 지 를 힘도 남아 있지 않던 길보성은 몸을 부르르 떨며 앓는 소리만 냈 다.
“보성아.”
손추향이 아들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달려 나왔다.
그녀는 아들의 손과 발을 매만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지? 아마 하늘에서 소교 남매의 부모님도 그 런 마음이었을 거야. 그러니까 평생 동안 죄책감을 안고 살아. 아들의 원망을 들으면서.”
설우진은 그녀의 옆을 무심히 지나 쳤다.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아무리 저 두 사람이 잘못을 했다고 해도 손발 을 망가뜨릴 것까지야 없었잖아.”
“그럼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하는 데?”
“그야, 적당히 타일러서.”
“말로 들어 먹을 인간 같았으면 열살밖에 안 된 어린 여자애한테 손찌 검을 했을까?”
“그, 그건…….”
설우진의 직설적인 물음에 조인창 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네 녀석이 부르짖는 협의지심이 얼마나 알량한 자기만족인 줄 알아? 단적으로 우리가 떠난 뒤를 생각해 봐. 내가 저리 손을 봐 주지 않았다 면 소교 남매가 이 마을에서 무사히 지낼 수 있을까? 내가 장담하는데 아마 전보다 더 심한 괴롭힘을 당할걸.”
“……”
“내 말이 기분 나쁘게 들릴지도 모 르겠지만 협객이라는 거 네가 꿈꾸 는 것만큼 깨끗하고 고고한 존재가 아니야. 그들이 품고 있는 편협한 이상은 때론 마천의 마두들보다 더 한 위협이 될 수 있어.”
설우진은 조인창이 품고 있는 협객 에 대한 환상을 철저히 깨부쉈다. 그도 한때는 협객을 동경하던 시절 이 있었다.
돈을 쫓아 움직이는 낭인의 삶을 받아들이기 힘들 때였다.
바로 그 시기에 설우진은 하남 일 대에서 협명이 자자하던 무천강과 우연찮은 만남을 가졌다.
의뢰를 성공리에 마치고 동료들과 함께한 회식 자리였다.
한데 분위기가 너무 과열된 탓이었 을까.
옆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정파 쪽 무사들과 사소한 시비가 붙었다. 물론 문제의 원인은 그쪽에서 제공 했다. 낭인들을 들개에 비유한 것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