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8권 – 26화 : 판을 벌이다 (1)
판을 벌이다 (1)
“적사호, 내게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성싶으냐? 곧 날 구하기 위 해 역천회의 무사들이 이곳으로 들 이닥칠 것이다.”
밀폐된 석실 안, 의자에 사지가 결 박된 위가렴이 날카롭게 말을 뱉고 있었다.
내력이 통하는 길을 막아 놓은 탓 에 그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줄은 끊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발버둥친 위가렴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을 멈췄다. 상대가 받아 주질 않으니 제 풀에 지친 것이다.
“네 할 말은 실컷 한 것 같으니 이 제부턴 내가 묻지. 현무문의 고검대 와 백호문의 천호대 그리고 주작문 의 염봉대는 지금 어디에 있지?”
적사호가 말하는 이름들은 앞서 황 유하와 나눴던 얘기에 등장했던 세 가문의 수신무위였다.
쌍룡맹을 방문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세 수신무위의 소재를 파악해 두고 있었다.
그런데 당혹스럽게도 맹을 다녀온 이후 그들의 종적이 사라졌다. 급하 게 흑개방을 통해 그 소재를 파악하려 했지만 흑개방 수뇌부에 역천회의 입김이 닿은 것인지 아무리 기다 려도 연통이 오질 않았다.
그런 답답한 상황에서 위가렴이 손에 들어왔다.
천우신조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거듭된 적사호의 질문에 위가렴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말로 해서는 입을 열지 않을 것 같군. 그럼 할 수 없지.”
적사호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옆에 서 흥미로운 눈빛으로 두 사람의 대 치를 지켜보고 있던 설우진이 망치 를 건넸다.
“지, 지금 뭘 하려는 것이냐?”
망치를 본 위가렴이 당황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이에 적사호가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말로 해서 들어 먹질 않으니 부득 불 힘을 써야지 않겠느냐. 생각이 바뀌거든 말해라.”
위가렴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던 적 사호가 그의 오른쪽 손목을 틀어쥐 었다. 그러고는 손목을 의자 걸이에 고정한 채 망치를 들어올렸다.
저건 단순한 위협이야. 아무리 놈 이 막무가내의 성격을 지녔어도 내 손을 망가뜨릴 리 없어.’
위가렴은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붙잡았다.
한데 그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적사호는 몇 마디 건네지도 않고 그대로 위가렴의 손등을 향해 망치 를 내리쳤다.
내력을 싣지는 않았지만 망치의 중 량에 떨어지는 힘이 더해지다 보니 그 위력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퍽.
“크아악!”
위가렴의 입에서 참을 수 없는 비 명이 터져 나왔다. 방심하고 있던 차에 큰 충격이 가해지니 도저히 입 을 다물 수가 없었다.
“엄살 부리지 마, 이건 시작에 불 과하니까.”
적사호가 담담한 표정으로 다시 망 치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이번엔 손목이 아닌 발목 쪽으로 망치의 머 리를 향하게 했다.
‘차, 참아야 해. 이 정도 상처쯤은 나중에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어.’
위가렴은 발목으로 향하는 망치를 보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크윽.”
발목에 망치가 떨어지고 난 후, 위 가렴의 입술 사이로 가는 신음이 새 어 나왔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맞 아서 그런지 처음보단 덜 고통스러 워 보였다.
이후로 두 사람은 소리 없는 전쟁 을 치렀다.
하지만 끝내 적사호는 위가렴의 입을 여는 데 실패했다.
“크크큭, 네놈은 무슨 짓을 하든 역천회가 천하의 주인이 되는 걸 막 지는 못한다.”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위가렴이 웃 음을 터뜨렸다.
이에 발끈한 적사호가 끓어오르는 분기를 참지 못하고 망치를 그의 정 수리에 내리찍었다.
한데 바로 그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설우진이 그의 공격을 제지했 다.
-벌써 포기하시는 겁니까?
-저리했는데도 입을 안 열지 않느 냐!
-무조건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만 이 능사는 아닙니다. 본시 이 고문이란 건 희망을 품게 하는 게 우선 입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적사호는 설우진의 말에 황당하다 는 반응을 보였다.
한데 설우진의 얼굴엔 자신감이 흘 러 넘쳤다. 잠시 고민하던 적사호는 반 시진의 여유를 주겠다며 방을 나 섰다. 속는 셈 치고 한번 믿어 보기 로 한 것이다.
이제 밀실 안에는 두 사람만이 남 게 됐다.
위가렴은 원독에 찬 눈빛으로 설우 진을 쏘아보며 말했다.
“네놈이 무슨 말을 지껄이든 난 듣 지 않을 것이다. 괜한 헛수고 마라.”
“그래도 일단 얘기는 들어 보지. 혹시 모르잖아, 내가 널 이곳에서 내보내 줄지도.”
“그런 허황된 말을 내가 믿을 성싶으냐!”
위가렴이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이에 설우진이 씩 웃으며 그의 몸 에 채워져 있던 줄을 끊었다. 그리 고 더 나아가 기맥을 틀어막고 있던 혈도마저 풀어줬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신뢰의 증거.”
“괜한 수작질 마라. 이런 식으로 내 마음을 흔들어 보려는 모양인데 어림없다.”
위가렴은 설우진의 진의를 의심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목숨을 내걸고 싸 우던 사이였으니.
하지만 설우진은 날선 반응이 나오 리라는 걸 예상했다는 듯 태연한 얼 굴로 대화를 이어 갔다.
“너무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지 마. 난 이 통천문에 메인 몸이 아니야.”
“그게 무슨……?”
“돈을 받고 고용됐다고. 내가 통천 문에 메인 몸이었다면 쌍룡맹주 회 갑연에서 너희들의 암살을 왜 방해 했겠어.”
순간 위가렴의 눈빛이 흔들렸다.
쌍룡맹주 암살 건은 적사호도 적극 동의한 사안이었다.
이는 설우진의 말이 사실임을 알려 주는 확실한 증거였다.
“억지로 믿어 달라고 하지는 않겠 어. 하지만 기회는 한 번뿐이라는 걸 명심해.”
설우진은 위가렴에게 매달리지 않 았다. 굳이 자신이 내민 손을 잡지 않아도 아쉬울 게 없다는 태도였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준 것 같은데.”
설우진이 먼저 입을 뗐다.
위가렴은 단단히 결심이 선 듯 전 에 없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설우진 과 눈을 맞췄다.
“너의 제안을 받아드리기에 앞서, 어떤 방법으로 날 밖으로 빼낼 것인 지 들어야겠다.”
“간단해, 당신은 그저 적사호가 원 하는 답을 말해 주면 돼.”
“지금 나와 장난을 하자는 것이 냐!”
“아, 얘길 끝까지 들어. 적사호가 왜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을 알고자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적사호 를 덫 안으로 밀어 넣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어.”
“덫?”
“적사호가 네 말을 확인하러 간 사 이에 이쪽에서 한발 앞서 서찰을 보 내는 것이지. 그럼 천하의 적사호라 해도 그곳에서 무사히 빠져나오긴 힘들걸.”
설우진이 제시한 방법은 역발상이었다.
거짓이 아닌 진짜 정보로 표적을 밖으로 꾀어낸 뒤 미리 준비해 둔 덫으로 잡는 것.
냉정히 보면 억지스러운 느낌이 없 잖아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위가렴 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 법이었다.
결국 위가렴은 고민 끝에 설우진의 제안을 수락했다.
잠시 후 적사호가 밀실 안으로 다 시 들어왔다. 위가렴은 설우진과 미 리 입을 맞춘 대로 세 무력대가 모여 있는 장소를 적사호에게 알렸다. 적사호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위가 렴을 바라봤다. 그가 순순히 진실을 털어놓을 리 없다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위가렴의 태도는 당당했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은 보 이지 않았다.
“크흠, 좋다. 네 말을 한번 믿어 보겠다. 대신 거짓으로 밝혀졌을 때 에는 네놈의 혀를 뽑아 개천에 내던 질 것이다.”
적사호는 단단히 경고하며 밀실을 나섰다.
설우진은 자연스럽게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