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9권 – 21화 : 구출 (4)
구출 (4)
사내는 거지꼴을 하고 있었다. 머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감지 않았 는지 잔뜩 떡이 져 있고 턱 주변에 는 지저분하게 수염이 자라 있었다. 그리고 더 가관인 건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이었다.
마치 거적때기를 이어 붙인 것처럼 곳곳이 해지고 누런 흙먼지가 장식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어이, 산적!”
설우진이 윤허준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 생에서는 인연이 없었음에도 그의 말투는 친구를 대하듯 거침이 없었다.
한데 윤허준의 반응도 설우진 못지 않았다.
“니미럴, 어떤 새끼가 아침 댓바람부터 시비질이야!”
차지게 욕설을 뱉어 내는 윤허준은 거지같은 행색만큼이나 거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보통 의원하면 호리호리한 체구에 인자한 얼굴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윤허준은 그와 상반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일단 이목구비가 또렷하다. 눈, 코, 입 모두 큼지막했다. 특히 왕방울만 한 눈은 호목을 연상케 할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풍겼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른쪽 뺨에 날 짐승이 남긴 것으로 짐작되는 흉터 가 길게 나 있었다. 얼마나 깊게 패 였는지 말을 할 때마다 흉터가 지렁 이처럼 꿈틀댔다.
‘음?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떻게 내 별명을 알고 있는 거지?’
설우진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던 윤 허준이 눈꼬리를 씰룩거리며 속으로 읊조렸다.
산적은 마을에서 이름 대신 통용되 는 그의 별명이었다.
험악하게 생긴 외모 탓에 그리 불 리게 됐는데 그 별명을 쓰는 건 마을에서 함께 나고 자란 친우들뿐이 었다.
“너, 뭐냐?”
윤허준이 약초를 썰던 가위를 조심 스럽게 집어 들었다. 그는 의원이기 이전에 숙련된 사냥꾼이다.
좋은 약초를 구하기 위해선 필연적 으로 산에 들어가야 한다.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곳일수록 수령이 오래된 약초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깊은 산중에는 예측 불가능 한 위험들이 많이 도사리고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게 맹수와의 조우 다.
그래서 대다수의 마을 사람들은 맹 수를 피해 가는 법을 배웠다, 맹수와 싸워서 이길 수는 없기에.
한데 윤허준만은 다른 길을 택했다.
그는 치료를 받으러 온 사냥꾼으로 부터 맹수를 잡는 법을 배웠다. 마 을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극구 만류 했지만 아무도 그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이후 그는 약초를 구하러 갈 때마 다 사냥 도구를 함께 챙겨서 움직였 다. 그리고 돌아올 때쯤엔 약초와 더불어 한 가지 이상의 짐승 시체를 가져왔다.
“그 험악한 물건 좀 내려놓지. 보 다시피 환자가 있어서 불가피하게 이곳을 찾은 거거든.”
설우진이 살짝 몸을 돌려 잠들어 있는 남궁벽의 모습을 비췄다.
윤허준은 호목을 부라리며 남궁벽 의 얼굴을 살폈다.
‘얼굴에 핏기가 없고 입술이 메말 라 있는 것이 적어도 열흘 이상은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한 것 같 군. 그리고 팔이 축 늘어져 있는 것 이 근맥 쪽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 고.’
누가 의원 아니랄까 봐 윤허준은 눈대중으로 남궁벽의 상태를 읽어 냈다.
“어때? 치료할 수 있겠어?”
설우진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치료는 가능하지만 문제는 이거야.”
윤허준이 엄지와 검지를 이어 작은 원을 만들었다. 설우진은 그 원이 의미하는 바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찰그랑.
설우진이 품 안에 손을 넣어 전낭 을 통째로 바닥에 내던졌다.
“얼마나 들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 만 치료비로는 차고 넘칠 거야.”
“흥, 그 안에 철전만 가득할지 누 구 알아?”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직접 열어 보든지.”
“좋아, 사양 않고 열어 보지.”
윤허준이 전낭을 집어 그 입을 열었다.
전낭 안에는 누런 빛깔을 뽐내는 금두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 새끼, 나이도 한참이나 어려 보이는 놈이 뭔 놈의 돈을 이렇게 많이 가지고 다니는 거야?’
윤허준은 가슴이 벌렁거렸다. 태어 나서 이렇게 큰돈은 처음 봤다. 하지만 그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뭐, 이 정도면 부족하지는 않겠네. 환자의 상태를 보려면 일단 몸을 까 봐야 하니까 방으로 따라와.”
윤허준은 전낭을 품 깊숙이 박아 넣고 방문을 열었다.
방은 아늑했다.
벽 곳곳에 말린 약초들이 걸려 있 고 바닥에는 두툼한 이불이 깔려 있었다.
설우진은 방 안을 대충 살펴본 후 이불에 남궁벽을 내려놨다. 그사이 윤허준은 서랍에서 침통을 꺼냈다.
“옷 좀 벗겨 보지. 보다시피 난 남 는 손이 없어서.”
윤허준이 양손에 침을 든 채로 설 우진에게 옷을 벗겨 달라 청했다. 설우진은 어이가 없었지만 치료가 급한 상황이었기에 순순히 그 말에 따랐다.
옷을 벗기자 만신창이가 된 남궁벽 의 모습이 드러났다.
시퍼런 멍이 사방에 나 있는 건 둘째치고, 손목과 발목 쪽에 깊은 상흔이 나 있었다.
“이거 상태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데.”
윤허준이 굳은 표정으로 손목과 발 목에 난 상흔을 살폈다.
그는 깨끗하게 빤 면포로 일단 상 처 주위의 핏자국들을 닦아 내고 벌 어진 상처 안으로 침을 넣어 뼈와 근육이 얼마나 상했는지를 확인했 다.
“어때? 고칠 수 있겠어?”
“솔직히 말하면 완치는 불가능해. 뼈대는 손상의 정도가 덜하지만 근 육이 완전히 찢어졌어. 게다가 오랫 동안 방치한 탓에 근육이 괴사하기 시작했고. 최악의 경우 두 쪽 다 잘 라 내야 할지도 몰라.”
윤허준은 냉정하게 남궁벽의 상태 를 진단했다.
“그럼 무공은?”
설우진이 굳은 표정으로 반문했다.
“다시 걸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 르는데 무공은 무슨 무공이야!”
“그 녀석은 어릴 때부터 줄곧 천하 제일의 검수를 꿈꿨다. 한데 그 꿈 을 꿀 수 없다면 녀석의 남은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아마 전설의 화타 선생이 부활한다고 해도 그건 못 해낼걸.”
윤허준은 단호했다.
하지만 설우진은 그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윤허준은 전생에 남궁벽과 비슷한 환자를 완치시킨 일이 있었기 때문 이다.
물론 그 일은 지금보다 시기가 한 참 뒤였다.
“흑옥고. 아직 완성 못 시킨 거냐?”
“그 이름을 어떻게………?”
흑옥고란 이름에 윤허준의 두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