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1권 – 제 1부 :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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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1권 – 제 1부 :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 1화


…………따라서 이상의 예에서처럼 드래곤 라자와 드래곤의 관계는 인간의 주종의 계약으로 이해되기 곤란한 점이 많다. 드래곤 라자가 드래곤을 가리켜 ‘나의 충직한 친구여’라고 말했을 때 이를 국왕이 가신을 향해 하는 말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할 것이다. 그러나 드래곤 라자 가 보여주는 애매 모호한 태도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의 관계를 주종관계로 착각하고 있다. 이 드래곤 라자의 애매모호 한 태도는 훗날 그들의 재앙이자 바이서스의 재앙인…………

「품위 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추발렉의 도움으로 출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 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도 가치 있는 이야기」 돌로메네 지음, 770년. 제3권 527쪽.


1

“드래곤이야! 정말 화이트 드래곤이야! 우와, 멋있어!”

“흥, 달밤에 뱀 밟았을 때의 네 얼굴만큼이나 창백하군 그래?”

“후치 네드발! 너! 그 말 하지 말라고 그랬지?”

나는 피식 웃었다. 제미니는 펄쩍 뛰면서 누가 들었을세라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계집애. 뱀을 밟았으면 밟았지 왜 그렇게 덥석 안겨? 그렇게 안겨 들면서 설마 키스 한 번 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나는 그때를 떠올리고는 조금 전과 좀 다른 의미로 웃었다. 그러자 제미니는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고 나는 딴청을 피웠다.

“저것 봐! 후치, 저기, 저 애가 드래곤 라자인가 봐!”

제미니는 어느새 다시 그 화이트 드래곤에게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하긴,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는 모습이니까. 나는 제미니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 다.

화이트 드래곤의 바로 옆에서, 역시 하얀 말을 타고 걷고 있는 소년이 보였다. 고상한 취미군. 흰 드래곤 옆에 백마라. 게다가 어울리게도 소년은 흰 망토까지 두르고 있었다.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드래곤 라자야 드래곤에게 잡아먹힐 염려는 없겠지만 저 말은 정말 불쌍하군.”

“응?”

“웬만한 배짱이 아니면 드래곤 옆에서 저렇게 나란히 걷기 힘들걸.”

“어머? 그렇구나.”

“어쩌겠어. 자기가 하얗게 태어난 잘못이지. 그러니까 화이트 드래곤 옆에서 ‘혹시 절 잡아드시고 싶지는 않으시겠죠?”라고 묻는 눈으로 걸어야 되 는 것이고.”

“하하. 후치. 말을 너무 재미있게 하네.”

“하하하! 이놈, 정말 그럴듯하게 말하는군?”

내 말을 들은 주위의 어른들과 제미니는 허리를 꺾으며 웃었고 나는 침을 퉤 뱉었다.

화이트 드래곤을 귀족으로 바꾸고 백마를 평민으로 바꾸면 꽤나 그럴듯한 은유가 되겠지만 우리 마을의 단순한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제기랄, 내가 이상한 것인가? 사실 우리 영주님은 마음씨도 좋고 평민들을 괴롭히는 이야기 속의 영주들과는 아무런 유사점도 없다.

제미니는 웃다가 다시 발돋움을 했다. 주위에 몰려선 사람들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계집애, 도대체 남들 클 때 뭐한 거야? 난 입맛을 다신 다음 제미니의 허리를 잡았다. 제미니는 눈을 홉떴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제미니.”

그리고 제미니를 오른쪽 어깨 위에 올려 주위의 어른들 틈에서도 좀더 잘 보이게 해주었다. 제미니는 얼굴이 벌겋게 되었을 것이 틀림없지만 그래도 내려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좀 잘 보이냐?”

“으응……. 그러고 보니 저 드래곤 라자는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네?”

“쳇. 드래곤 라자는 나이와 상관없어. 드래곤이 보기엔 다섯 살 꼬마든 여든 살 현자든 모두 어린애로 보이니까.”

주위의 어른들은 나에게 놀란 눈길을 보내었고, 갑자기 시선을 받게 된 제미니는 어쩔 줄 몰라하는 모양이었다. 부끄러워서 몸을 꿈틀거리는 것이 그대로 내게 전해졌다. 여러 가지 하네.

나는 주위에 신경 쓰지 않고 앞의 광경만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장관이었다.

거대한 화이트 드래곤은 아무리 보아도 머리에서 꼬리까지 300큐빗은 넘을 듯했다. 간단히 머리와 목 부분이 100큐빗, 몸통 100큐빗, 꼬리가 100 큐빗 걷고 있느라 날개는 접고 있었지만 틀림없이 그 날개는 몸의 길이와 황금 비율을 이루고 있겠지. 먼길을 여행해 왔을 텐데도 그 거대한 머리는 꼿꼿이 곤두서 당당하게 하늘을 받치고 있었다. 저토록 거대한 생물이 어쩌면 저렇게 우아하게 걸을 수 있을까. 소나 말도 가끔 자기 목을 무거워하 는데 드래곤은 그보다 훨씬 더 무거울 저 목을 늘어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도 간혹 다리를 끌지만 드래곤은 사슴처럼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창공을 질주하는 가벼움으로 화이트 드래곤은 인간들의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라면 1000셀을 준다고 해도 서고 싶지 않을 자리, 즉 드래곤의 바로 옆에는 말을 탄 어린 소년이 가고 있었다. 말도, 망토도, 입고 있는 옷 도 그 소년에겐 죄다 너무 컸다. 물론 주어진 의무도 그 소년에겐 너무 크겠지. 소년은 긴 여행에 지친 듯 자기를 환영하러 나온 사람들에게도 별로

시선을 보내지 않고 있었다. 아니, 수줍어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보다 멀리 뒤처져서는 기사 약간 명과 보병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수도에서부터 화이트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를 호위해 온 병사들인 모양 이다. 내가 조금 전 말했듯이, 소년이 타고 있는 말이야 어쩔 수 없이 드래곤의 바로 옆에서 걸어야 했지만 그 병사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간신히 일행으로 보일 정도의 거리에 뒤처져서 걷고 있었다.

드래곤을 보고 기가 막혀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드래곤 라자 할슈타일 만세!”

“할슈타일 만세!”

소년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자 더욱 고개를 숙여 머리 전체를 옷깃 속에 파묻어 버릴 태세였다. 만세라고? 열 살도 안 된 꼬마에게 만세라 니 정말 웃기는군. 차라리 ‘무병장수하소서!’라고 말하지.

“위대한 드래곤 캇셀프라임 만세!”

“캇셀프라임 만세!”

저 허연 드래곤은 인간들이 외치는 만세라는 의미를 알면 얼마나 웃을까? 어쨌든 저 드래곤의 이름은 캇셀프라임이고 그 옆의 드래곤 라자 꼬마의 이름은 할슈타일인 모양이다. 가난한 우리 마을의 촌사람들이 그렇게 세상 물정에 해박할 리야 없다. 영주의 성에서 나온 사람들이 먼저 고함을 지르 면 주위의 마을 사람들이 눈치 빠르게 따라서 고함을 지르는 것뿐이다. 아마 오늘이 가기 전에 그 이름을 까먹을지도 모르지.

“아무르타트를 반드시 무찌르십시오!”

“아무르타트를 무찔러요!”

나는 순간 부르르 떨었다.

아무르타트. 그 이름은 절대로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적어도 이때만큼은 마을 사람들의 외침에도 진실성이 담겨 있었다. 놀랍게도 나 역시 팔을 휘두 르며 외치고 있었을 정도니까.

“빌어먹을, 아무르타트를 죽여버려요! 그 새끼를 박살내!”

내가 흥분하는 바람에 제미니는 하마터면 떨어질 뻔한 모양이다. 제미니는 기겁해서 내 머리칼을 쥐어뜯었고, 나는 퍼뜩 정신이 들어서 제미니를 붙 잡았다.

“어, 미안해. 제미니.”

“내려줘!”

제미니는 화난 목소리로 내려달라고 외쳤고 난 순순히 내려주었다. 제미니는 잉잉거리며 내 팔을 꼬집었다.

“일부러 그랬지! 응응?”

난 정신없이 꼬집히면서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나는 제미니의 입을 틀어막으며 귓속말을 했다.

“쉬잇! 쉿! 제미니, 조용히해! 드래곤은 계집애를 무척 좋아한단 말이야. 시선 끌 짓 하지 마!”

제미니는 눈을 똥그랗게 떴다. 난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며 잔인하게 말했다.

“씹기가 좋아서 그런대……. 그러니까 말이야, 다른 때는 한 번에 꿀떡 삼키지만 너 정도의 계집애는 저 이빨로 꼭꼭 씹어서 냠냠 먹는다구! 특히 빨 강머리 계집애는……..”

예상대로 제미니는 발발 떨면서 내 등 뒤로 숨어버렸다. 등 뒤로 숨는 바람에 내가 빙긋 웃는 것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 때문에 터무니없는 오명을 뒤집어쓴 줄도 모르고 화이트 드래곤은 점잖게 걸어가고 있었다. 과연 멋있는 놈이었다. 저렇게 강력해 보이고 무서워 보이는 것이 그 옆에 있는 조그만 꼬마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은, 어쩐지 서글픈 느낌이 들 정도로 멋있는 놈이었다.

이윽고 기다란 행렬은 영주의 성이 있는 언덕배기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서서히 흩어지거나 몇 사람씩 모여서 잡담을 나누었다.

“우리 영주님, 오늘 잠은 다 잤겠는걸?”

“그러게 말이야. 허허. 저런 드래곤이 안뜰에 있는데 곤히 잠들 수 있겠나.”

난 어른들의 그 말에 빙긋 웃었다. 그런데 그때 내 귀를 자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근사하더군. 저 정도면 아무르타트도 끝장이야.”

“글쎄. 아무르타트란 놈, 워낙에 괴물이라서.”

아무르타트, 아무르타트!

난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온몸이 차가워지는 느낌이 든다. 동시에 머릿속은 불타듯이 뜨거워진다. 아무르타트, 빌어먹을, 뒈져버릴, 칵! 썩은 두엄 더미에 처박고 똥물을 뒤집어씌우고 석 달 열흘 동안만 두들겨주고…… 에잇! 내가 하는 말은 왜 항상 이 모양이지?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욕설이라고 는 이 마을의 어른들이 자녀 교육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 애들 앞에서 뱉어내는 욕설들뿐이라고.

내 눈에 불꽃이 튄 모양이다. 제미니가 놀라서 내 팔을 붙잡았으니까.

“후치?”

“아, 제미니. 가자. 해가 저물겠는걸.”

“응. 그래. 후아! 멋있었어.”

제미니는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난 갑자기 짓궂어지고 싶어졌다.

나는 제미니의 귓가로 입을 가져갔다.

“그런데 말이야. 드래곤은 너 같은 빨강머리 계집애를 몸살나게 좋아한다고 말했지? 아까 네가 내 등 뒤에 숨었을 때 말이야, 저놈이 입맛을 다 시며 널 봤는데, 넌 못 봤지?”

제미니는 파랗게 질려버렸다. 아마 오늘밤에 제대로 못 자는 건 우리 영주님 말고 한 사람 더 있을 것이다.

나는 제미니를 너무 겁준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제미니는 자기 혼자서는 죽어도 못 가겠다고 내 팔을 붙잡고 늘어졌고, 그래서 난 어쭙잖게도 기사 흉내를 내며 제미니를 에스코트해야 되었다. 제미 니 집안은 숲지기 집안이고 그래서 집도 마을에서 좀 떨어진 숲 속인데, 내가 정말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숲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제미니가 해만 지면 숲 속에 못 들어가느냐는 것이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는 서녘 하늘을 바라보며 제미니는 도중에 해가 지면 어쩌나 하며 걱정하는 표정 이었다.

“야이, 계집애야! 도대체 나이가 열일곱 살인데 집에도 못 돌아간단 말이야!”

“그러게 누가 그렇게 겁주랬어?”

난 거칠게 머리를 긁으며 바삐 걸었고 제미니는 행여나 떨어질세라 바싹 따라왔다.

제미니의 집으로 가던 도중, 난 갑자기 칼의 집에 들를까 생각했다. 그의 집에 방문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고, 왜 칼이 구경나오지 않은 것인지 궁 금하기도 했다. 내가 갑자기 발걸음을 바꾸자 제미니는 놀라서 날 붙잡았다.

“어, 어디가?”

“조금만 더 가면 되잖아. 혼자 가.”

“칼에게 가는 거야?”

“응.”

“그럼 같이 가. 그리고 돌아올 때 끝까지 데려다줘.”

순결한 소녀와 엘프를 돌보시는 그랑엘베르여! 어쩌자고 이 소녀에게 이렇게 앞뒤 없는 억지를 부릴 수 있는 능력을 주시었습니까. 흠, 난 칼에게 배 운 말투와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습득한 말투 두 가지를 쓰며 때론 나 스스로도 내 말에 놀랄 때가 있다. 지금 같은 경우가 그렇지.

나는 아무 말 않고 걸어갔고 제미니는 승낙받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듯이 날 따라왔다.

칼의 집은 숲 언저리의 공터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는 밭을 갈지도, 가축을 키우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뭘 만들어 파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세금도 내지 않았고, 1년 중 며칠 동안 영주에게 바쳐야 되는 부역의 의무조차 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술을 빚고, 빵을 사며, 책을 읽으며 유유자적하며 살았다. 그것은 제미니에게는 도저히 풀지 못한 수수께끼였고, 그래서 제미니는 칼을 조금 어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칼에게 이것저것 배워서 사정을 안다. 때론 그것이 나를 뿌듯한 느낌에 젖게 만들곤 한다.

칼의 집 쪽으로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탁, 탁 하는 도끼질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눈앞에 공터가 나왔다. 적당한 몸집에 갈색 머리, 사람 좋게 생긴 중년의 얼굴이 보인다. 거리에서 만났다면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할 평범하 게 생긴 사나이가 나무를 쪼개고 있었다.

“네드발 군이 왔는가?”

칼은 도끼를 내려놓으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저것 또한 제미니에겐 불가사의한 일이다. 숲지기의 딸인 제미니로서는 자기 아버지의 허락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땔감을 해 쓸 수 있는 칼이 도대체 이해되지 않았다. 제미니는 경계하는 눈빛을 띠면서도 다리를 살짝 구부리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칼.”

나도 친절하게 인사했다.

“참 게으르군요. 칼. 해가 질 때 밤에 쓸 장작을 쪼개다니.”

“하하하, 네드발 군. 진짜 게으른 건 그게 아니지. 장작 쪼개기도 귀찮아서 그냥 떨면서 자는 게 정말 게으른 거라네. 오래간만이군요. 스마인타그 양.”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제미니가 칼을 어려워하면서도 이렇게 찾아올 수 있는 이유이다. 스마인타그 양이라고? 칼은 제미니의 부모나 마을 사람 대부분 이 제미니, 아니면 젬이라고 불러서 나도 가끔 잊어먹는 제미니의 성을 기가 막히게 기억하며 제미니를 이렇게 불러준다. 제미니는 배시시 웃었다. 어 이구, 징그러워.

“말이 되는 말을 해요. 그렇게 게으른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냐, 네드발 군. 내 친구 중에는 그런 녀석이 있어요. 나무 쪼개기 싫다고 벌벌 떨면서 자다가 감기에 걸려서 죽을 뻔한 친구지.”

“아니, 감기에 걸린다고 누가 죽어요? 점점 허풍만 느는군요.”

“이런이런. 도무지 연장자의 말이 통하지 않는 괘씸할 정도로 씩씩한 청년이로고. 허허. 들어오게나. 스마인타그 양? 들어오세요. 아름다우신 숙녀 께서 내방하셨는데 이렇게 세워둬서야 예의가 아니죠.”

“그럼 삼가 실례하겠습니다.”

제미니는 우아하고도 간드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악! 지상 최대의 닭살!

우리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자 그나마 남아 있던 해가 꼴까닥 넘어갔다. 그래서 칼은 방 한가운데의 테이블에 초를 밝혔고 제미니는 눈이 부시다는 표정을 과장되게 지었다. 하긴 영주님의 성이나 초장이인 우리 집 아니면 어디서 촛불을 구경할까.

칼은 우리를 앉힌 다음, 먼저 벽난로에 불을 피우고는 책보다는 술병이 더 많은 책장으로 걸어갔다. 책장에 있어야 할 책들은 모조리 바닥이나 침대 위에 뒹굴고 있었다.

그는 술병과 잔을 들고 와 우리 앞에 놓고는 술을 따랐다.

“들게나. 네드발 군. 사과주라네. 잘 익었을 겁니다. 스마인타그 양.”

아마 제미니의 집에서 보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우리 집도 별로 다를 바는 없다. 하지만 우리 둘은 능청스럽게도 아주 익숙하다는 듯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나야 양조장 막내 미티 녀석에게 간혹 술찌끼를 얻어다 먹기도 하지만 제미니는 술에는 전혀 익숙하지 않을 텐데도 앙큼스럽게 태연한 표정 을 지었다.

칼은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우고는 잠시 어떤 말로 건배할지 생각했다.

“어디 보자…… 음, 그렇지 두 청춘 남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해…….” “칼!”

내 비명소리가 조금 처절했나 보다. 칼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했다.

“어? 싫은가? 그렇다면 그들의 용기와 미모를 타고날 그 2세를 위해…….”

제미니는 온몸을 비비 꼬고 있었다. 어찌 정숙한 요조 숙녀인 자신을 나 같은 난봉꾼과 연결하여 생각하느냐는, 격조 높은 비난이 섞인 눈길이었다. 나로선 심히 억울 무쌍한 일이다.

그때 내 뇌리에 번뜩이는 생각이 있었다.

“아무르타트의 파멸을 위해 건배하죠.”

칼은 갑자기 입을 꽉 다물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제미니는 분위기가 갑작스럽게 변하자 당황했다.

칼은 잠시 후 한숨을 쉬고는 다시 웃음을 띠었다.

“그러세나. 음. 알았어. 자네가 그럴 결심인 줄은 몰랐군. 언제 출발할 건가? 그럼 용맹 무비한 네드발 군이 저 악명 높은 아무르타트를 물리쳐 드래 곤 슬레이어의 명예를…….’

“예?”

“어? 아냐? 그럼 스마인타그 양께서?”

“풋, 프흡, 프하하하하!”

제미니는 죽어라고 웃어대기 시작했고 나도 헛웃음을 지었다. 칼은 빙긋빙긋 웃으며 술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어쨌든 더 이상 다른 건배의 말을 생각 하다간 도저히 술을 마실 수 없을 것 같아 나도 술잔을 기울였다.

삽시간에 귓불과 목언저리가 뜨거워지고 숨결에서 단내가 났다. 나는 눈을 크게 끔뻑거렸다. 칼은 내 모습을 바라보며 빙긋 웃더니 지나가는 어투로 가볍게 물었다.

“드래곤 라자가 왔다더군?”

“예. 칼. 후우! 아무르타트 놈을 끝장내려고 왔지요.”

제미니도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는 자연스럽게 술을 마셨다. 아니, 술잔을 입가로 가져간 순간까지만 자연스러웠고 그 다음 곧 볼을 있는 대로 부풀렸 다. 틀림없이 간신히 삼킨 게 뻔하다.

“흠, 흠, 아흠! 큼. 아, 퍽 좋은 술이군요. 칼.”

“감사합니다. 스마인타그 양.”

난 빙긋 웃고는 다시 칼에게 말했다.

“왜 구경 나오지 않았지요?”

“장작을 쪼개느라고 갈 수 없었다네. 어떻던가? 장관이었을 테지?”

“예. 드래곤 라자는 겨우 예닐곱 살 정도던데 드래곤은 어마어마한 화이트 드래곤이더군요.”

“맞춰볼까? 화이트 드래곤이라면, 캇셀프라임이로군?”

제미니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난 태연할 수 있어서 기뻤다. 칼은 푸근하게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그리고, 그 꼬마는 설마 할슈타일은 아니었겠지?”

이건 틀렸다. 난 어리둥절한 눈으로 말했다.

“할슈타일 맞는데요?”

칼은 눈을 크게 떴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술잔을 정확하게 입에 가져갔다. 한 모금 마시더니 칼은 다시 눈을 뜨고 빙긋 웃었다.

“청년 처녀가 연장자를 찾을 땐, 연장자는 지나온 세월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그의 지혜의 두루마리를 펼쳐보여야겠지.” 나는 바짝 긴장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할슈타일 가(家)의 후계자라. 그 집안에 아직도 드래곤 라자의 혈통이 내려온단 말이지?” 칼은 혼잣말 비슷하게 말하더니 곧 피식 웃었다. “말 도 안 되는 소리.”

“말이 안 된다고요?”

“어디서 드래곤 라자의 재능이 있는 꼬마 하나를 데려와서 할슈타일 가를 잇게 한 거라네. 네드발 군.”

칼은 마치 자기 가문의 일처럼 자신 있는 태도로 잘라 말했다.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단정짓는 이유가 뭐지요?”

이렇게 말하니 나도 꼭 대륙의 일을 토론하는 현자의 한 사람이 된 듯해서 기분이 뿌듯했다. 특히 제미니가 감히 끼어들 생각도 못하고 감탄한 눈으 로 바라보는 것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칼은 촛불에 술잔을 비춰보면서 낮게 말했다.

“간단한 덧셈 뺄셈의 결과지. 할슈타일 가에 드래곤 라자의 혈통이 허락된 시간은 300년. 그 마지막 300년은 벌써 15년 전에 지나갔다네, 네드발 군. 그런데 그 꼬마는 예닐곱 살이라며? 따라서 그 아이가 할슈타일 가의 혈통이라면 드래곤 라자일 수는 없지.”

“300년? 그게 뭔데요?”

“아아, 네드발 군, 네드발 군! 제발 새집 뒤질 시간이 있다면 책 좀 읽게나!”

이로써 대륙의 일을 토론하는 현자의 한 사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새집이나 뒤지는 개구쟁이 하나만 남게 되었다. 제미니는 깔깔거리며 웃었 고 난 얼굴을 붉혔다.

칼은 계속 그 사람 좋은 웃음을 벙긋벙긋 웃으며 말했다.

“자넨 우리나라의 역사도 모르는가. 300년, 아니 315년 전은 우리나라의 개국 기원년이 아닌가? 그리고 그때 영광의 7주 전쟁 때 드래곤 로드는 할 슈타일 공(公)에게 드래곤 라자의 혈통을 약속했다네. 그 가문에 300년 동안 드래곤의 우정이 함께하여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지닌 후손들이 태어나 기로 했어요. 알았나?”

내가 좀 정신이 없었을 정도이니 제미니는 아예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칼은 두 명의 청중이 도대체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좀 쉽게 말하기 시작했다.

“음……, 스마인타그 양. 우리나라 바이서스가 언제 생겼지요?”

“아, 저 대왕께서 영광의 7주 동안 암흑의 들판을 가로질러 드래곤 로드를 물리치신 때입니다.”

“역시 기품에 어울리는 교양을 지니셨습니다. 스마인타그 양.”

제미니의 표정은…… 차마 말하기 싫다.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냐?

“개국왕이신 루트에리노 대왕께서는 그 영광의 7주의 마지막 날 드래곤 로드를 물리치셨지만 그 스스로도 다시는 검을 쥐실 수 없을 만큼의 상처를 입으셨지요. 그때 할슈타일 공이 드래곤 로드를 구출했지요. 드래곤 로드는 생명의 은인인 할슈타일 공에게 축복을 내렸습니다.”

난 성급하게 끼어들었다.

“300년 동안 그 가문에 드래곤 라자가 태어날 것이라고요?”

“그렇다네, 네드발 군. 그리고 제4대 국왕이신 에리네드 전하께서 북방 정벌을 하실 때 할슈타일 가문도 우리 전하께 복속되게 되었지. 에리네드 전 하께서는 개국왕 루트에리노 대왕에 반역한 할슈타일 가문을 멸망시키는 대신 주종의 서약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만족하셨다네. 사실 드래곤 라자는 희귀한 것 아닌가? 그런데 대대로 드래곤 라자를 배출하는 가문을 멸망시킨다는 것은 아까운 일이지. 게다가 드래곤 라자를 잃은 드래곤은 폭주하게 되니 그 또한 위험한 일이고.”

칼이 풀어놓는 해박한 지식은 제미니를 반쯤 얼어붙게 만들었다. 나는 질문했다.

“그런데 그 300년이 다 지났고요?”

“그렇다네. 따라서 여기서 재미있는 일이 발생해요.”

나와 제미니는 바짝 긴장해서 몸을 기울였다. 칼도 마치 무슨 비밀스러운 중대 회의를 나누는 것처럼 몸을 앞으로 숙이며 낮게 말했다. 초장이의 아 들과 숲지기의 딸과 신비스러운 무위도식자의 이야기도 비밀스러운 중대 회의라고 불릴 수 있다면.

“할슈타일 가문은 다른 개국 공신 가문에 비한다면 원래 반역자 가문이지? 하지만 대대로 드래곤 라자를 배출하는 집안이라는 이유로 그 동안 영화

를 누려왔다네. 그런데 할슈타일 가문에서 더 이상 드래곤 라자를 배출하지 못하게 된다면?”

“아항? 그래서 양자를?”

“그렇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지닌 아이들을 강제로 양자로 끌어들이는 거지. 아니, 잠깐. 수정할까. 사들인다고 해야 정 확하겠지? 어쨌든 가난한 집안에서가 아니면 아이를 내놓지는 않겠지.”

“돈을 주고 양자로?”

“그렇다네. 드래곤 로드의 약속 시한은 이미 끝났지만, 드래곤 라자들을 끌어모아 드래곤 라자의 혈통을 새로이 만들어내려는 것이라네. 마치 좋은 수말과 암말을 끌어모아 종마를 만들어내려는 것처럼.”

칼의 어투는 신랄했다. 제미니는 겁도 없이 술을 다시 한 모금 마시고는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추잡한 일이군요…….”

“네. 스마인타그 양. 300년 동안 권세를 누리고도 모자라 그 권세를 더 연장시키고자 가난한 부모들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그 가문에 입양시키는 거 지요. 물론 그 아이들로서는, 어쩌면 그 부모들에게도 좋은 일일지도 모르지요. 가난한 집안보다야 할슈타일 가의 양자가 되는 것이 낫다고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어디에나 운이 튀는 녀석이 있어.”

칼은 나를 바라보았다.

“부러운가, 네드발 군?”

“솔직히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요.”

“네드발 군은 나이도 있고 이것저것 주위를 살필 줄도 알겠지. 하지만 예닐곱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을 그 부모에게서 떼어내 처음 보는 사람을 부 모라 부르게 하는 것은 가엾은 일이야.”

“쳇, 그 자식들도 5년쯤 지나고 나서 다시 자기가 뒹굴던 오두막으로 돌아가라면 죽어도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그럴걸요?”

내 말투가 격해졌다. 제미니는 그런가 하는 표정을 지었고 칼은 담담하게 웃었다.

순결한 소녀와 엘프를 돌보시는 그랑엘베르여…… 쩝, 오늘 여러 번 당신을 불러서 저도 참 미안스럽게 생각합니다만, 도대체 어쩌자고 제 등에 업혀 있는 이 소녀에게 술을 벌컥벌컥 마실 수 있는 무모함을 주셨습니까?

제미니를 업고 숲길을 돌아오며 나는 악을 쓰고 싶어졌다.

칼이 빚은 사과주는 맛은 좋았지만 진짜 독했다. 그런 걸 마치 사과 주스처럼 마셨으니 제미니는 그대로 기절해 버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나 또한 그렇게 말짱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나는 휘청거리면서 간신히 제미니를 떨어뜨리지 않고 걸었다.

이미 해는 져서 숲 속은 캄캄해지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돌아다닌 숲이라서 취한 정신에도 얼마든지 자신 있게 걸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정말 힘들 었다. 특히 등에 업힌 제미니가 때때로 발작적으로 ‘잇힛히히힛!’ 하고 귀신 같은 웃음소리를 내서 나를 질겁하게 만드는 것은 정말 못 견딜 노릇이었 다.

“이히히힛! 히힛!”

“그만 웃어!”

“음냐, 거 참 우습네, 냠.”

“뭐가?”

“몰라. 그냥 우스워. 까르르륵.”

크아아악! 이 망할 계집애, 늑대가 물어가든 말든 집어던지고 튀어버릴까? 풀뿌리에 걸려 거의 쓰러질 뻔하면서 내가 떠올린 생각이다. 그때 제미니 가 내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내려주우!”

“넌 지금 당장 집에 돌아가 찬물 뒤집어쓰고 자야 돼.”

“이대로 들어가면 나 맞아죽어.”

음. 그건 맞는 말이군. 아무래도 술이 좀더 깬 다음에 들어가는 것이 낫겠다. 난 제미니를 내려놓고 그 옆에 쓰러지듯이 주저앉았다.

“후와! 넌 열 살 이후로 키는 안 크고 몸무게만 불렸냐?”

온몸이 땀으로 끈적거렸다. 얼굴에 가랑잎들이 달라붙어 있어서 그것을 떼어내었다. 제미니는 꿈틀거리며 내게 다가와 내 팔을 들어올리더니 자연 스럽게 자기 어깨에 척 얹었다. 즉, 내 겨드랑이에 파묻혔다.

“추워, 제미니?”

“우키기기키긱!”

“…..”

내가 허공을 향해 소리없이 갖은 욕설을 퍼붓고 있을 때 제미니가 내 겨드랑이에 대고 말했다.

“정말 우스워. 냠냠, 드래곤 라아자아.”

“뭐가 우습냐?”

물론 절대로 내 겨드랑이가 대답한 것은 아니다.

“우습잖아.”

“그러니까 뭐가?”

“우스운데.”

.으악! 저게 뭐야?”

“엄마야!”

제미니는 마을 대로에서 아장아장 걷던 시절 앞에서 영주님의 늙은 사냥개가 하품을 했을 때 이후로 항상 그래왔듯이 나에게 답삭 안겨들었다. 난 껄 껄 웃었고 제미니는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사태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얼떨떨해서 나를 쳐다보았다.

“우습다는 것은 이런 걸 말하는 거지.”

“후치 네드발! 너!”

“술이 확 깨지?”

제미니는 사과 향기가 나는 한숨을 쉬며 내게서 떨어졌다. 그러나 조금 후 숲 속에서 우석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다시 달려들었다.

“저, 저게 뭐야?”

“이런. 바람소리야.”

“내가 바람소리도 모를 것 같아?”

난 잠시 얼이 빠져서 제미니를 바라보았다. 밤만 되면 집 밖에도 못 나오는 겁쟁이지만 분명히 제미니는 숲지기의 딸이며 숲에서 태어나 자라왔다. 제미니가 바람소리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아닐 것이다.

그 추측은 정확했다. 잠시 후, 주위가 갑자기 밝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며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발자국 소리, 두런거리는 말소리, 그리고 절그럭거 리는 소리.

마지막은 검을 찬 사람이 걸을 때 나는 소리였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수였다. 눈앞이 빙 돌면서 다리가 풀렸다. 나무를 짚어 간신히 쓰러지지는 않았다. 제미니도 일어서서는 내 등 뒤에 숨었다. 나는 제미니를 나와 나무 사이에 서게 만들고 앞을 살폈다. 숲 속에서 일렁이는 불빛이 보였다. 분명 한 무리의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숲 속을 걷고 있는 것이다.

“사, 산적인가 봐!”

나는 제미니의 상상력에 깊은 경의를 보내었다.

“새로운 형태의 산적이군. 이름은 횃불단 정도 될까?”

횃불을 저렇게 밝히고 마음대로 소리를 내고 있으니 죽었다 깨어나도 산적일 수는 없다. 제미니는 내 말뜻을 알아듣고는 좀 밝은 표정이 되었다. 흠. 여기는 영주의 숲이고 내 뒤에는 영주의 숲지기의 딸이 있으니, 나로선 산적이 아니라면 별로 겁날 것은…….

“아차, 들키면 끝장이다!”

“응?”

“우리 둘은 취했잖아? 네 부모님에게 알려지면…….”

“히이익!”

제미니는 당장 나무를 타고 올라갈 자세를 취했다. 아니, 어떻게 저런 발상이 가능한 거지? 예상대로 제미니는 취해서는 도저히 나무를 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도 나무에서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고는 소리높이 비명을 지른 다음에 깨달은 것이다. 아이고, 순결한 소녀와 엘프를 돌보시 는…… 이젠 정말 지겹사옵니다.

“누구냐!”

사람들의 다급한 걸음 소리에 박자를 맞춰 그들이 차고 있을 검집에서 검이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쇳소리에 몸이 얼어붙는 것 같다. 삽시간에 사방에서 한 손엔 횃불을 들고 다른 손엔 롱소드를 뽑아든 병사들이 나타났다.

“영주의 숲에 밤중에 돌아다니다니, 넌…… 아니, 뭐야? 후치, 제미니?”

나와 제미니는 어쩔 수 없이 가장 적합한 태도를 취했다.

“에헤헤헤…….”

나타난 병사들은 모두 가죽 갑옷을 입고 있는 영주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롱소드를 다시 검집에 꽂아넣고 있었고 그들 중 우두머리인 샌슨 퍼시발이 피식거리며 다가왔다. 그는 성의 대장장이의 아들로 경비대 대장이며, 성에 초를 상납하는 초장이 아들인 나와는 잘 아는 사이다. 나보다 열 살이나 더 많아서 롱소드도 차고 병사도 인솔하지만 속마음은 나와 별 다름없는 악동이다.

그는 피식피식 웃으며 내게 다가오다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응? 뭐야, 이건? 너희들 술 마셨구나?”

“에헤헤헤…….”

샌슨은 나와 제미니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나를 퍽 불안하게 만드는 웃음을 지었다.

“음. 후치. 드디어 네가 이 정도의 일을 벌이게 되었군. 돈이 어디서 나서 술을 샀냐? 하긴 사랑의 힘으로, 아니 욕망의 힘이랄까? 어쨌든 술을 구했 군. 그리고 제미니를 잔뜩 취하게 했단 말이지. 의외로 소심하군. 취하게 해놓지 않으면 자신이 없었나 보군?”

“오해예요!”

제미니의 비명은 잘 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위의 병사들의 웃음소리가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이건 넘어가 줄 수 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나는 이 번엔 샌슨을 불안하게 만들기로 결심했다. 조금 전 샌슨의 입가에 있던 웃음을 이번엔 내가 지어보였다.

“성밖 물레방앗간에는 방앗소리 요란한데…….”

샌슨은 당장 내 말을 잘라들어왔다.

“위험한데 밤중에 돌아다니면 쓰겠냐? 크험! 흠. 빨리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오늘도 웬 처녀 남의 눈길 피해 방앗소리를 찾네.”

“후치!”

이번엔 주위의 병사들이 샌슨을 향해 웃었다. 그리고 일부는 내게 다가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해…… 부탁이야.”

“달빛에 드러난 처녀, 눈에 익은 걸음걸이.”

샌슨은 내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병사들이 재빨리 샌슨을 껴안았다. 샌슨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세 명이나 되는 병사가 샌슨을 꽉 잡은 채 껄껄거리고 웃었다. “이건 반란이닷! 놔!” “웃기네. 시끄러워, 샌슨. 노래 좋잖아?” 음. 우리 경비대 기강은 저 정도로 삼엄했던가.

“미풍에 스치는 처녀, 코에 익은 향기.”

“후치! 임마! 형님! 아버지! 할아버지!”

나는 샌슨의 애타는 외침을 못 들은 척하며 계속 여유 있게 노래를 했다. 제미니마저 그런 샌슨을 보며 키들거렸고 병사들은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술 때문인지 평소보다 훨씬 혀가 매끄러웠다.

“부엌의 음식 냄새? 빨래터의 잿물 냄새? 저장고의 와인 냄새?”

병사들은 손을 쥐었다 놨다 하면서 바짝 긴장했다. ‘주방의 마가렛인가? 빨래터라면 그 금발머리, 그래. 앤이다. 저장고라면 설마 그라디스인가?’ 병 사들은 재빨리 의견을 교환했다. 확신하건대 영광의 7주 전쟁 때 루트에리노 대왕과 여덟 별들의 작전 회의도 이보다는 덜 진지했을 것이다. 나는 시 치미를 뚝 떼고 노래를 계속했다.

“셋 중 하나 확실한데, 이 냄새는…… 이 냄새애애애느으으은…….”

병사들은 할딱거리며 날 응시했고 샌슨은 붉으락푸르락해지다가 못해 이제 눈물을 뽑을 지경이 되었다. 아무래도 앞으로 한 달은 샌슨 옆에 가까이 못 가겠는걸. 그때였다.

“어랏? 이게 무슨 냄새야?”

병사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겠지만 난 상관하지 않았다. 분명 냄새, 독특한 듯하면서도 익숙한 냄새가 났다. 그때 제미니도 눈을 껌뻑거리더니 말 했다.

“꽃향기 같은데……. 무슨 꽃인지 모르겠네?”

병사들은 어리둥절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때 병사들 등 뒤의 숲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아마 제게서 나는 향기일 거예요.”

숲을 헤치고 예닐곱 살 정도의 꼬마가 걸어나왔다. 난 취한 상태에서도 그 꼬마가 낯이 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보다는 제미니가 확실히 사람을 잘 알아본다.

“드래곤 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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