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1권 – 제 1부 :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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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레이디 제미니의 나이트 후치 경이다!”
“크아아앗!”
동네 꼬마들에게 달려들고 있는 내 꼴이 너무 한심하다. 입이 문제야. 어쩌자고 그때 그 이름을 불러버렸나. 아마 난 적어도 석 달은 레이디 제미니 의 나이트가 될 것 같다.
서점에서 칼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여, 후치 경!”
·어쩌면 평생일지도 모른다.
“칼! 그만 좀 해요!”
“글쎄. 생명의 위기에서 외친 자신의 진심을 부정하지는 말게나.”
“그때 난 돌았어요! 미쳤다고요! 아니, 나같이 머리가 나쁜 놈은 간혹 엉뚱한 말을 한다는 것도 잘 아시잖아요?”
꼭 이렇게 나 스스로를 비하해야 되나? 칼은 빙긋 웃으며 내 옆에 있던 타이번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타이번. 오늘도 그런 훈련입니까? 그럼 구경하고 싶군요?”
“좋을 대로. 우리 뒤의 이 굉장한 행렬이 보이지 않는가?”
사실 그렇다. 우리 뒤로는 일군의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가을걷이도 끝나자 마을 사람들은 별로 할 일이 없었고 내 훈련은 아주 멋진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아침에 나와 타이번이 산트렐라의 노래를 출발하면 곧 ‘야! 레이디 제미니의 나이트 후치 경이다!’라고 외치는 소리와 함께 마을 사람들이 한두 명씩 그 뒤에 따라붙는다. 아무리 그래도 피크 닉 바구니까지 챙겨들고 나오는 것은 또 뭐냐? 칼도 책을 구하러 왔다가 그 소문을 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기분 좋게 우리 일행에 합류했다. 그러자 곧 양조장 막내인 미티가 끼어들었다.
“이봐요, 칼? 어디 거시겠어요?”
“걸다니?”
“오늘은 후치가 누구 이름을 부르는지 말이에요. 내기예요. 현재 제미니가 압도적으로 높으니까 다른 이름을 선택하면 배당이 높을 텐데. 요즘 계집 애들이 후치에게 알랑거리면서 자기 이름을 불러달라고 꼬리치는 것 아세요?”
칼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이 되었고 난 미티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미티는 태연했다. 그 옆에 있던 다른 남자가 말했다.
“야, 미티. 그런데 오늘 후치가 확실히 죽는 것 맞아?”
“확실해요. 타이번은 오늘 키메라를 불러낸다고 했거든요.”
미치고 환장하여 팔짝팔짝 뛰다가 심장마비로 요절하시겠다. 타이번은 힘 조절을 가르쳐준답시고 매일같이 몬스터가 많이 보이는 우리 마을에서도 제대로 보기 힘든 괴물들의 일루전을 불러냈다. 일루전이니까 내가 죽을 일은 없지만 싸우는 동안은 정말 실감나게 덤빈다.
“좀 점잖게 코볼드 같은 거나 불러내면 안 돼요?”
“넌 OPG를 가졌잖아. 비슷하게 맞춰야지.”
“키메라가 나랑 비슷하기나 해요?”
“죽는 일은 없는데 뭐가 불만이야?”
“기분이 더럽단 말이에요!”
타이번은 히죽거릴 뿐이었다. 정말 죽는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의 기분은 더럽다. 가고일의 발톱에 맞아 나뒹굴다가 하늘을 덮으며 날아드는 가고일 을 볼 때의 느낌이나, 퓨리아의 뱀꼬리에 칭칭 감겨서 내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내 얼굴을 스치는 퓨리아의 숨결을 느낄 때의 그 끔찍 스럽고 역겨운 느낌은 말로 표현이 안 된다. 아, 여기서 내 변호도 좀 해야겠다. 난 결국 그 가고일의 머리를 뎅겅 잘라버렸고 퓨리아의 여자 상 체…는 좀 보기가 낯뜨거워서 등 뒤의 날개를 뜯어버렸다. 일루전인데 뭐가 겁나냐? 상처도 다 환각이라서 실제로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는데.
그런데 오늘 타이번은 키메라의 일루전을 불러낸다는 것이다. 맙소사. 그냥 죽여라. 품위 있게 죽게 해달란 말이야! 하지만 이런 내 기분과는 상관없 이 마을 사람들은 단체로 소풍이나 가는 분위기를 보이고 있어 내 참담함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너무 그렇게 기분 나빠하지 마. 너 이제 썩 잘하잖아.”
제미니가 날 다독거렸다. 하긴 이제 내 힘에 내가 휘말려 들어가는 일은 별로 없다. 난 어느 정도 원하는 대로 힘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난 양초 만드는 초장이야! 훈련받은 전사가 아니라고. 아무리 OPG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키메라와 싸울 수는 없어.
“응? 무슨 소리지?”
타이번이 갑자기 이상한 말을 했다. 난 타이번을 보았다.
“급한 발소리, 병사인데, 무슨 일이지?”
과연 잠시 후 저 앞쪽에서 병사들이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 귀 좋네? 병사들은 타이번을 보자 더욱 황급히 달려오며 외쳤다. “타이번 님! 급합니다, 위급 환자예요!”
어라? 위급 환자라니?
“타이번, 업혀요!”
난 두말할 것 없이 타이번을 업어들었다. 타이번 정도의 몸무게는 전혀 무겁지 않았고 나는 달려가면서 외쳤다.
“성에 무슨 위급 환자예요?”
마을 사람들도 놀라서 화급히 달렸다. 병사들은 내 옆에서 등에 업혀 있는 타이번에게 말했다.
“오늘 아침 정벌군의 병사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부상이 심합니다! 하멜 집사께서는 어서 타이번 님을 모셔오라고………”
뭐라고? 정벌군이라니, 아무르타트 정벌군 말이야? 그리고 부상이라니, 그리고 병사 하나라니. 다른 사람들은, 지휘관들은 어떻게 되고 병사 한 명 만이 왔다는 거야? 타이번은 내 등 뒤에서 음울하게 말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드는군.”
성에 도착하자 하멜 집사는 저택 현관에서 초조하게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멜 집사는 내 등에 업힌 타이번을 보자 곧 현관문을 열고 우리를 홀 안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환자는 안정이 필요하오. 궁금하겠지만 참고 있으시오.”
“잠깐! 집사 나으리! 한 명만이 돌아왔다니오! 그게 어찌된 일이오?”
“잠자코들 있으시오! 천천히 설명하겠소!”
“이봐요! 돌아온 건 누굽니까? 그건 말해 줘야죠?”
하멜은 묵묵히 고개를 흔들며 타이번만을 안으로 들여보내려 했다. 타이번을 업고 있는 나를 보자 하멜 집사는 마땅찮은 표정을 지었지만 현재 나는 타이번의 눈 역할 이외에 다리 역할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멜은 나도 들어가도록 했다. 그리고 하멜은 칼을 바라보았다.
“칼. 당신도 들어가십시오.”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갔다. 그렇게 우리 세 명이 들어가고 나자 하멜 집사는 문을 쾅 닫고는 밖의 주민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 셋 은 그것을 들을 겨를도 없이 병사들에게 2층으로 안내되었다.
난 긴장을 억누를 수 없었다. 혹시 아버지일까? 제발 아버지이기를! 부상을 입었다고는 했지만 아예 돌아오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2층 침실 의 침대에 눕혀져 있는 것은 젊은 병사였다. 그것도 이름도 모르는, 수도에서 온 중장보병이었다.
그는 죽어가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죽어가는 사람이 어떠해야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안색도 별로 이상하진 않았고 땀을 흘리거나 신 음을 흘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옆에 있던 성의 하녀들이 시트를 들어올리자 곧 나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왜 그래?”
타이번의 질문에도 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병사는 창백하지만 그런 대로 안정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가슴에서 복부까지는 참혹한 상처가 나 있 었다. 여러 개의 상처가 아니라 단 하나의 상처였는데 드러난 갈비뼈가 보일 정도였다. 타이번을 내려놓고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칼이 타이번의 손을 잡고는 병사에게 데려갔고 난 어지러운 가운데도 그 옆에 다가갔다. 타이번은 손끝으로 상처를 더듬었다. 병사는 눈살을 찌푸렸 지만 별로 통증을 호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타이번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이 집사님께서 말씀하시던 그 마법사입니까?”
“그래. 이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아니, 말할 새가 없군. 후치!”
“예, 예!”
“뜨거운 물쯤은 벌써 준비되어 있겠지?”
“옆에 있는데요.”
나는 수건을 적셔 타이번에게 건네려다가 내가 직접 병사의 상처를 닦았다. 타이번은 그새 캐스팅에 들어갔다. 내가 며칠 함께 있으면서 느낀 건데, 타이번은 간단한 주문을 말할 때는 문신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 주문도 별로 외우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거대한 주문, 그러니까 발러를 불러낼 때라든지 주문을 몇 개씩 연달아 말할 때는 그 문신에서 빛이 났다.
그런데 지금 타이번의 문신은 굉장한 빛을 내고 있었다. 하긴, 몸이 저 지경이니 주문도 엄청난 게 필요하겠는데. 그는 문신에서 빛을 내며 두 손을 그대로 병사의 상처 속으로 집어넣었지만 병사는 무표정하게 자신의 상처를 헤집는 타이번을 바라보고 있었다. 타이번은 보지 못했지만 나와 칼은 그 병사의 인내력에 졸도하고 싶었다.
“대단하군요. 휴리첼 백작의 부하다운데.”
칼은 내장을 바로 맞추는데도 아무런 신음소리를 내지 않는 병사를 칭찬했다. 놀랍게도 병사는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저게 인간인가? 끊어지고 갈 기갈기 흩어진 내장들이 타이번의 손에 의해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은 보고 있는 내가 다 질릴 정도였다. 나는 노랗게 된 얼굴로 물러났다. 타이번 은 그 작업을 계속하면서 칼에게 말했다.
“동맥은 안 다쳤지만 근육이 문제로군. 칼, 적당히 준비 좀 해주겠나?”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곧 ‘알았습니다.’라고 대답한 다음 하녀들에게 실, 바늘과 함께 몇 가지 약초의 이름을 불러주며 그걸 빨리 가져오라고 명령 했다. 칼은 내가 알기로 의학 서적도 꽤 읽는 편이지만 지금 불러주는 약초들은 나도 잘 아는 흔한 것이었다. 상처가 어마어마하긴 하지만 그만큼 단 순하다보니까 약초도 단순해지는 모양인데.
하녀들이 황급히 사라지자 칼은 그릇을 꺼내어 끓는 물에 삶기 시작했다. 하녀들이 약초 무더기를 가져오자 칼은 그것을 빻으려다가 나에게 말했다. “후치 경, 힘 좀 빌릴까? 저걸 가루로 만들어주게나. 손 좀 씻고.”
난 손을 씻은 다음 두 손으로 그걸 문질러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장갑에 약초 가루가 많이 묻었지만 어쨌든 가루를 만들자 칼은 그것들을 섞어서 통 째로 물에 타버렸다. 처방마저 단순한 것인가? 칼은 타이번에게 말했다.
“준비됐습니다.”
“좋아, 실과 바늘을 삶아.”
칼은 벌써 실과 바늘을 끓는 물 속에 집어넣고 있었다. 타이번의 몸에서 번쩍이던 빛은 사라졌고 그는 상처 속에서 손을 끄집어냈다. 병사의 얼굴을 흘끗 보니 그는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타이번의 솜씨를 재미있다는 듯이 감상하고 있었다. 맙소사…………. 타이번은 혀를 찼다.
“이상한 상처군. 어쨌든 난 눈이 안 보여서 안 돼. 칼?”
칼은 앞으로 나서더니 상처를 꿰매기 시작했다. 옆에서 보던 하녀들의 얼굴이 새파래졌지만 내 얼굴도 그에 못지않았을 것이다. 살을 뚫고 지나가는 바늘의 번쩍거리는 빛은 사람 졸도하게 만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칼은 묵묵하게 상처를 꿰매었고 병사는 자신의 살을 지나가는 바늘을 보며 마치 자 기 옷을 만드는 재단사를 바라보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칼은 병사를 보면서 말했다.
“정말 대단하시오.”
“별말씀을.”
칼이 바느질을 마치고 나자 타이번은 하녀들에게 붕대를 감으라고 지시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난 의자를 가져다가 그를 앉혔다.
“이상한 상처라고요?”
“저 병사는 벌써 죽었어야 정상이야. 상처 꼴을 보니 사나흘은 지난 것 같은데 아직까지 살아 있을 수가 없어. 인간의 잠재 능력에 감탄해야 하나?” 타이번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병사는 그 말을 들으며 히죽 웃었지만 칼이 조제한 약을 마시느라 대답하지는 않았다. 타 이번은 내가 들고 있는 대야에 손을 씻으며 말했다.
“손을 봤으니 죽지야 않겠지만 내장은 꽤 상했어. 원상태까지는 못 돌아가. 제대로 못 먹어. 그리고 근육도. 다시 검을 잡을 수 있기를 바라는 건 어 처구니없는 일이고…………. 상처 때문에 보통 일을 하는 것도 어려워. 흔히 그렇듯이 상이용사 딱지를 단 걸인이 되는 거겠지.”
그때 칼이 말했다.
“다행히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타이번은 못 보셨지만 꽤 신분이 높은 분입니다. 문장이 든 반지를 하고 계시는군요.”
병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타이번이 냉큼 말했다.
“그래? 귀족가의 골칫거리 환자가 되겠군.”
병사는 씁쓸하게 웃었다. 타이번은 계속 앞뒤 없이 말했다.
“대충 짐작이 가는군.”
나는 침을 삼켰다.
“저런 상처는 무기에 의해 나는 게 아냐. 아무르타트가 뭔가 전할 말이 있어서 저 병사 하나만을 반병신 만들어서 돌려보낸거야.”
뎅그렁! 난 대야를 놓쳤다. 타이번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그럼…………… 졌단 말이군요?”
“안타깝게도.”
“다, 다른 병사들은? 저 병사 하나만이라니, 그럼 다른 병사는?”
타이번은 여전히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올려다보다가 내뱉듯이 말했다.
“알 수 없다. 후치. 휴리첼 백작과 영주님은 어쩌면 안전할 거야. 저 병사를 보낸 것을 보니 아마 몸값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아무르타트 의 목적이 몸값이라면 병사들 모두를 포로로 잡아두었을 수도 있다. 포로가 많으면 더 많은 몸값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그, 그래요? 확실해요?”
그때 병사가 대답했다.
“그분의 짐작이 맞다.”
어쩔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하던 내 입에서 갑자기 폭언이 쏟아져나왔다.
“그 등신 같은 드래곤이!”
그 허옇기만 하고 민트나 처먹는 화이트 드래곤이 결국 아무르타트에게 진 것이구나. 병신 같은! 오만방자하게 머리나 쳐들 줄 알았지, 할 줄 아는 것은 주는 밥을 받아먹는 일밖에 없는 드래곤이! 차라리 아무르타트는 자신이 직접 사냥한다. 하지만 그놈은 인간이 가져다주는 밥을 먹는다. 난 아 무르타트보다 그 화이트 드래곤 캇셀프라임에 더 화가 났다.
하멜 집사는 회의를 소집했다. 영주님이 안 계시므로 하멜 집사가 영주 대리였고, 영주 부재시 치안을 담당하기로 했던 타이번이 참석했다. 그리고 칼이 참석했다. 난 타이번에게 간곡히 부탁해서 그의 조수 자격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경비 대장 샌슨이 없었으므로 대리로서 터너가 참석했 고 기타 영주의 보좌관들과 마을 촌장과 마을 어른들이 몇 명 참석했다. 이건 제대로 된 회의라고 할 수도 없다는, 상당히 비참한 느낌이 들었다.
회의의 목적은 스로이 마이어핸드의 진술을 듣기 위한 것이었다. 그 부상당한 중장보병의 이름이 스로이 마이어핸드였는데 그는 상당히 몸이 불편 했을 텐데도 의연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무리 자제력이 강해도 수술을 받은 지 한 시간 만에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모포를 두르는 것도 사양하고 조용히 앉아서 상황을 진술했다.
정벌군은 회색 산맥까지 별 이상 없이 진군할 수 있었다. 몇몇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긴 했지만 대단치 않았다. 마침내 회색 산맥의 가장 깊숙한 곳, 끝없는 계곡 입구에 진을 친 군대는 작전에 들어갔다. 앞선 정벌군들의 생존자의 이야기나 기타 정보를 종합해 볼 때 아무르타트의 레어는 골짜기 가 장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골짜기는 부대를 운용하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었고 어차피 부대가 별로 할 일은 없었지만 휴리첼 백작은 최대한 짜낼 수 있는 계략을 짜내기로 결심한 모양이다.
그는 캇셀프라임이 먼저 싸움을 걸면 군대는 계곡 양쪽과 그 뒤에서 지원한다는 식의 작전을 세웠다. 성의 경비병으로 구성된 경장보병들이 절벽 위 양쪽에서 궁병대를 엄호하고 수도에서 온 중장보병들은 창병대와 함께 계곡 아래에서 기다리다가 아무르타트를 공격하는 것이다. 물론 이 작전은 전 적으로 캇셀프라임의 패배를 염두에 둔 작전이다. 즉, 캇셀프라임이 아무르타트와 싸워 이기면 그만이고 혹시 지더라도 아무르타트는 꽤 부상을 입 을 테니 그때 놓치지 않고 양쪽에서 화살로 공격해서 아무르타트가 날아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중장보병대와 창병대가 공격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 에서 타이번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멍청한 계획이군…….”
스로이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곧 표정을 풀었다. 타이번은 그 표정을 보지 않았지만 자기 말에 대한 설명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약한 부대를 세 개로 나누다니. 차라리 한곳에 모여 있는 것만 못해. 그리고 그 계획은 전적으로 아무르타트가 계곡 아래로 내려온 다는 것을 전제로 하잖아.”
스로이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계속 설명했다.
작전 개시일 아침, 캇셀프라임은 계곡에서 포효하며 아무르타트를 불러내었다. 병사들은 각자 계곡 위와 계곡 아래에서 숨을 죽인 채 그 모습을 보 고 있었다. 그런데 캇셀프라임의 호출에 응한 것은 아무르타트가 아니었다. 계곡 위와 계곡 양쪽에서 트롤과 고블린의 군대가 나타난 것이다.
얼마 되지도 않는 부대를 세 개로 나누어놓았고, 게다가 빠르게 합류할 수도 없게 계곡 위아래로 나누어두었기 때문에 세 부대는 각자 고블린들과 싸워야 했다. 계곡 아래의 중장보병대와 창병대는 잘 싸웠다. 하지만 계곡 위의 경장보병대와 궁병대는 고블린들에게 밀렸다. 게다가 그들의 등 뒤는 절벽으로 막혀 있었다. 고블린들과 트롤은 치열하게 덤벼들었고, 갑옷이 부실한 경장보병은 자꾸 밀렸다. 특히 궁병들은 적과 아군이 마구 뒤섞여 싸 우는 그런 식의 싸움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결국 계곡 위의 부대는 고블린이 휘두르는 팔치온에 맞아 죽거나 계곡 아래로 떨어져 죽 었다.
캇셀프라임 역시 그런 난전에서는 끼어들 수 없었다. 겨우 고블린들의 뒤쪽에다가 브레스를 뿜는 정도였지만 그 정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캇셀프라임은 포효하며 드래곤 피어를 사용해 보려 했지만 고블린과 트롤들은 아무르타트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어서인지 캇셀프라임의 포효에는 전 혀 반응하지 않았다.
결국 계곡 위의 부대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며 간신히 계곡 아래로 도망친 다음에야 캇셀프라임은 계곡 위쪽으로 제대로 브레스를 날려 고블린과 트롤을 몰아내었다. 그 사이 중장보병대와 창병대는 계곡 아래쪽의 적 부대를 거의 몰살시켰다. 중장보병의 접근 공격력은 대단한 것이었고 창병은 그 긴 포차드로 무난하게 고블린과 싸울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검은 그림자가 계곡을 뒤덮었다. 블랙 드래곤 아무르타트가 나타난 것이다. 아무르타트는 그대로 내려오지도 않은 채 브레스를 뿜었다. 계곡에서 급히 날개를 펼 수 없었던 캇셀프라임은 일격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아무르타트는 그대로 캇셀프라임을 내려찍은 다음 그 목을 물어뜯으려 했다. 하지만 캇셀프라임도 반항하며 아무르타트의 다리를 물어뜯었다. 두 드래곤의 싸움에 절벽이 무너질 지경이었다. 날개가 절벽을 때릴 때마다, 그리고 드래곤이 엎치락뒤치락할 때마다 천둥소리가 났다. 돌이 튀고 나무가 뿌리째 나가떨어지고 바위가 굴렀다. 드래곤의 선혈이 비 바람처럼 몰아쳤다. 아무르타트의 산성 브레스에 맞은 절벽이 지독한 연기를 뿜으며 녹아내리다가 그대로 캇셀프라임의 아이스 브레스에 맞아 얼어 붙어버렸다. 순간적으로 끝없는 계곡에는 지옥이 펼쳐졌다.
그때 휴리첼 백작은 후퇴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모두 제각기 흩어져서 달아났다. 계곡 근처는 숲 지형이라 흩어져서 달아나는 것이 훨씬 나았다. 스로이도 그때 그렇게 달아났다. 그런데 한참을 달아나던 그는 갑자기 등 뒤에서 날개치는 소리와 광풍이 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겁에 질린 채 뒤로 도는 그 순간, 아무르타트의 발톱이 그를 후려쳤다.
일격에 배가 찢어졌다. 스로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드러누워 죽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고막을 찢는 공기의 흔들림이 들렸다. 스로
이는 복부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귀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진동은 천천히 정렬되면서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바뀌었다. “인간, 너의 상처는 앞으로 일주일은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다.”
스로이는 눈을 떠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르타트는 캇셀프라임과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인지 곳곳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드러누운 채 올려다보 는 그 까마득한 높이는 스로이를 기절할 지경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드래곤이 뭔가 마법을 건 모양인지 그의 복부의 상처에서는 희미한 빛이 번쩍였 다.
“일주일 동안은 피도 나지 않고 상처도 그대로일 것이다. 하지만 그 기간이 지나면 그 상처는 덧나기 시작하며 썩어들어갈 것이다.”
스로이는 부들부들 떨면서 아무르타트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르타트는 피곤하다는 듯이 어깨를 추슬러보인 다음 계속 말했다. 하지만 그 입은 꽉 다 물린 그대로였다.
“그래야 네놈의 그 빈약한 다리로 최대한의 속력을 내겠지. 가서 전하라. 너희들의 지휘관과 그 멍청이 영주의 목숨을 되찾고 싶다면 10만 셀에 달 하는 보석을 가져오도록.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 너희들이 늑장을 부리면, 그들은 새해를 맞이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르타트는 천천히 날개치기 시작했다. 흙바람이 마구 얼굴을 할퀴어 스로이는 얼굴을 가렸다. 아무르타트의 음성이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으로 이어졌다.
“일주일이다. 네 다리가 네 목숨의 담보다. 가라!”
스로이는 한참 후에야 얼굴을 가린 손을 치웠다. 하늘 저 멀리 날아가는 아무르타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그대로 나흘 동안 밤낮없 이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다.
“흠……… 그래서 그렇게 오래된 상처가 그대로였군. 자네가 이렇게 빨리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도.”
타이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로이는 희미하게 웃었다.
“예. 끔찍스럽더군요. 찢어진 배에서 내장이 쏟아져나오지 않도록 붙잡은 채 달리는 것, 상당한 경험이었습니다. 피도 배어나오지 않고 아무런 통증 도 없는, 마치 다른 사람의 상처 같은 느낌이 드는 상처가 더 무섭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회의중이던 사람들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난 도저히 더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저, 그럼 다른 병사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스로이는 나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들었다. 아버지가 참전하고 있었다며? 미안하지만 다른 병사들은 보지 못했다.”
난 고개를 떨어뜨렸고 칼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요. 네드발 군. 돌아가신 것을 봤다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창병대는 마지막까지 별로 상처를 입지 않았다고 하셨잖아.”
난 고개를 들며 밝게 말했다.
“그래요. 우리 아버지는 돌아오기로 약속했어요. 흠. 지금쯤 집에 숨어서 내가 돌아오면 놀라게 할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난 될 수 있는 대로 웃으며 말하려 했지만 주위의 사람들의 표정을 보자 내 얼굴이 엉망진창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난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하멜 집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전하께 연락해야 되겠군요.”
타이번은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그렇긴 한데…….이 작전은 국왕 소관이었소?”
“그건 아닌데요. 전하께서는 지원을 해주셨을 뿐이고 작전 책임은 영주님께 있습니다. 영주님은 전권 위임의 형식으로 휴리첼 백작에게 작전 지휘 권을 넘겨주셨고요.”
“그럼 책임은 헬턴트 영지에 있군. 두 사람을 되찾아와야 할 책임도, 그 돈을 장만할 책임도. 왕은 자신이 지원한 화이트 드래곤이 죽었다는 것만으 로도 몹시 화낼 텐데 몸값을 좀 주십사 할 수 있겠나?”
하멜 집사는 다시 고개를 쩔쩔 흔들었다.
“영주님의 재산을 다 처분한다 해도 10만 셀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게다가 그 재산은 대개 영지라서 누구 하나 살 수도 없는 것인데………… 이웃 영주들도 아무도 사려 하지 않을 텐데…………….’
그때 스로이가 힘겹게 말했다.
“휴리첼 백작가에 연락하면 지원해 줄 겁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 흔히 그렇듯이 전하께 요청하면 헬턴트 영지에 장기 무이자 대출을 해주시겠지 요. 그리고 이 영지를 판다면 꼭 이웃 영주가 아니더라도 수도에서는 이런 장원을 구입할 만한 귀족이 있을 겁니다.”
“알아봐야겠군요. 오늘이 며칠이지?”
터너가 말했다.
“9월 25일입니다.”
“새해를 맞이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여섯 달 조금 더 남은 걸까요?”
하멜 집사의 질문에 타이번은 여전히 입맛이 쓰다는 표정을 지었다.
“글쎄, 우리나라에서야 루트에리노 대왕의 칙명으로 4월 2일부터 새로운 해가 시작되도록 되어 있지만, 드래곤이 우리나라의 관례대로 햇수를 셀지 야 알 수 없지. 안전하게 하려면, 12월 말일까지라고 생각해 두는 것이 낫겠지.”
“그, 그럼 석 달 정도…………!”
하멜 집사는 절망적인 표정이 되었다. 전설적인 집사가 아닌 가난한 우리 영주님의 집사 하멜로서는 석 달만에 10만 셀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불가 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제길!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하멜 집사는 어떻게든 10만 셀을 만들어봄과 동시에 임금님께 보고를 하기로 했다. 마을 촌장님은 마을 사람들에게도 성금 을 거두어보겠다고 해서 하멜 집사를 감동하게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성의에 감동했다는 뜻이다.
타이번은 놀랍게도 엄청난 보석 하나를 내놓았다. 5000셀은 될 거라는 말에 하멜 집사는 타이번의 발등에 키스라도 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타이 번은 우리 마을과 이 일과 아무런 상관도 없으면서 치안도 담당하고 있는데다가 이런 거금까지 선뜻 내어놓는군. 회의가 끝나고 나는 타이번에게 그 사실을 물어보았다.
“타이번, 당신은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돕기로 서원을 세웠어요?”
“뭐야? 그건 나이트의 맹세잖아?”
그때 칼이 끼어들었다.
“그리고 프리스트의 맹세이기도 하고요.”
“그렇지. 어쨌든 마법사와는 상관없지.”
“그런데 왜 이렇게 보기에 예쁜 짓만 하세요?”
타이번은 내 머리를 치려고 했지만 내가 설마 장님의 주먹에 맞겠는가.
“이놈 말버릇 정말 큰일이다. 야, 임마! 내가 그런 보석 가지고 있어봐야 뭐하겠어? 난 눈이 멀어서 제자 가르칠 일도 없으니 학원 세울 일도 없어. 어차피 그건 성격에도 맞지 않고. 그리고 폼나게 마법 연구를 하려고 해도 글을 읽을 수 있나, 글씨를 쓸 수 있나. 그러니 탑 세울 일도 없고 던전 팔 일도 없어. 그러니 술 마시고 잠자리 구할 돈만 있으면 돼. 나머지는 가지고 있다가 필요한 사람이 있을 때 주는 권리를 누릴 거야.”
눈이 보였다면 다른 핑계거리를 찾았겠지.
칼은 존경스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타이번은 보지 못했다. 그는 내 뒤통수를 더듬더니 내 머리를 자기 머리로 가깝게 끌고 왔다.
“곧 겨울이 된다. 네 아버지는 야생에서 사는 지혜가 있는 양반이시냐?”
“….. 있다면 좋겠지만.”
“길 찾는 것은?”
“그건 다른 사람 정도는 돼요.”
“그럼 조금 더 기다려보자구. 스로이는 목숨을 걸고 달려왔으니 다른 사람보다 훨씬 일찍 온 것이다. 다른 패잔병들도 서서히 도착할 것이다. 나랑 나가서 함정들을 치워버리자. 패잔병들이 거기 걸리면 곤란하니까.”
“대로에는 설치하지 않았잖아요?”
“모른다. 지름길을 이용한답시고 산을 넘어올 수도 있다.”
“알았어요.”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다면 웃기겠지, 후치?”
“걱정한다고 뭐가 바뀌는 건 아니겠지만………… 기분상 그렇지는 않아요.”
“썩 마음에 드는 놈이로다.”
타이번이 내 눈의 눈물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다. 우리 아버지는 걸음이 느리니까, 아마 내 간장을 홀라당 태워먹은 후에야 어기적어기적 나타날 것 이다. 틀림없다.
간장이 아니라 온몸이 타버려도 좋으니 돌아오기만 하세요. 그럼 내가 매일 아침 씻겨드리고 저녁에 잘 땐 노래 불러드리고 양초도 무조건 내가 다 골 테니 아버지는 침대에 드러누워 낮잠만 자도록 해드릴게요. 아버지. 안 돌아오시면 가만 두지 않겠어요! 아버지가 안 돌아오면 난 제미니에게 끌 려가서 사랑받는 남편이 되려고 애쓰며 살아가야 된다고욧!
농담을 해봐도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내 우울한 기분과 더불어 부비 트랩을 해체하는 작업은 전반적으로 무거운 분위기였다. 하지만 타이번은 워낙 나이가 있다보니 주위의 분위기에 별 로 휘둘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런 노인 앞에서 17세짜리 소년이 어두운 분위기를 잡아봐야 얼마나 잡겠는가. 타이번은 분위기를 일부러 밝게 만들 려는 헛수고도 하지 않았지만 나와 같이 어두워지지도 않았다. 그는 여상스럽게 행동했고, 나는 거기에 전염되었다. 그것은 나의 원래 성격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 돌덩어리 하나가 데굴거리는 느낌은 정말 참기가 어려웠다. 그 돌덩이는 마치 눈덩이처럼 굴러다닐수록 커졌다. 이름은 ‘불안’. 빌어먹을 상상력 때문에 나는 계속 아무르타트에게 절반쯤 씹히고 있는 아버지라든지 아무르타트에 짓밟힌 아버지의 모습을 생생히 떠올리 며 땀을 뻘뻘 흘린 채 서 있는 일이 잦았고 내 숨소리가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는지 타이번은 나를 불러서 내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후치!”
해가 지고 있었고, 들판은 온통 검붉은 색이었다.
“타이번, 나 술 한잔 사줘요.”
“가자.”
산트렐라의 노래에는 그렇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스로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와 타이번이 들어가자 곧 접근하려고 했다. 타이번은 별 대답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아는 사실만을 대답했다. 사실 그 회의에서 밝혀진 사실이 별로 있는가? 놀랍게도 몇몇 사람들은 타 이번의 말을 듣자 휴리첼 백작의 작전은 엉터리였다고 말했다.
나는 맥주만 마셔대고 있었다. 해너 아주머니는 내게 별말하지 않고 술잔에 꼬박꼬박 술을 채워주었다. 그리고 나 역시 별말하지 않고 술만 퍼마시 고 있었다. 기분이 괴상망측해졌다. 침침한 펍 안은 왠지 드래곤의 화덕(이런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감은 그럴듯했다.)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나 는 간신히 그게 원래는 마법사의 화덕이라는 말이었음을 떠올렸다. 하지만 나 좋을 대로지 뭐.
“천천히 맛을 보면서 마셔라. 목젖 껄떡거리는 소리에 지붕 내려앉겠다.”
“참견하지 말라고 말한다면?”
“제대로 마셔보도록 널 개구리로 만들어 술잔 속에서 헤엄치게 만들 거야.”
“거 괜찮네.”
그때였다.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외쳤다.
“이봐요! 다른 병사들이 도착했답니다!”
그 순간 나는 의자를 박차고 테이블을 뛰어넘고는 창문으로 몸을 날려서 주점 밖으로 나와 세 바퀴 구르고 그대로 성으로 달려갔다. 아니, 달려가려 고 했다.
“후치! 임마!”
이런, 바빠 죽겠는데! 아차, 부상자가 있다면 타이번이 필요하지. 나는 도로 창문 안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역시 세 바퀴를 구른 다음 민첩하게 일 어서서 주위를 살폈다. 해너 아주머니가 얼빠진 표정으로 말했다.
“타이번 님은 문을 이용하셨는데?”
“음. 역시 괴팍한 노인이군.”
나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다음 문 쪽으로 갔다. 타이번은 거기서 날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그대로 그를 들쳐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야, 야! 똑바로 달리는 거 맞아?”
“소나무보다 곧게 달리고 있으니 걱정 말아요!”
물론 나는 정말 곧게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타이번은 고함질렀다.
“야이, 주정뱅이 꼬마 녀석아! 좀 똑바로 달려!”
난 정말 곧게 달리고 있었으므로 억울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욕을 하려면 자꾸 구불텅거리는 길을 보고 욕을 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