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오후 좀 늦게 우리는 부스스한 얼굴로 내려왔다. 점심은 먹어야 하니까. 샌슨은 운차이의 발목과 자신의 발목에 밧줄을 연결해서 내려왔다. 모두들 샌슨 때문에 잠을 설쳐서 비몽사몽간이었다. 샌슨과 운차이는 발목이 서로 묶여서 계단에서 구를 뻔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렇게 내려오니 홀에는 이루릴만이 앉아 있었다.
“늦으셨네요. 다른 손님들은 벌써 식사를 마쳤어요.”
이루릴은 언제나처럼 깔끔하고 침착한 태도였다. 그녀는 블라우스 차림으로 테이블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마치 자기 집 테이블에 앉아 있 는 것처럼 편안한 모습이었다. 가을의 낮은 햇살이 창으로부터 비쳐들어 이루릴의 옆얼굴에 부딪히는 모습도 평화로웠다.
“이루릴? 잠은 좀 잤어요?”
“네? 물론이죠. 그러고 보니……………, 여러분들은 왠지 제대로 휴식을 취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네요?”
우리는 모두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샌슨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샌슨은 이미 테이블에 앉아서 주문을 하고 있었다. 여관 주인 레네즈는 다른 사람 먹 을 때 같이 먹으라며 투덜거렸지만 우리가 밤새도록 달려왔다는 점을 감안하여 조금만 투덜거렸다.
샌슨은 마치 빵이 그 네리아인 것처럼 씹었다. 꼭꼭 씹는 것은 소화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상관없지만, 빵을 먹으면서도 계속 으르렁거리니 빵조각 이 사방으로 날린다. 운차이는 험악한 표정으로 빵 자르는 나이프를 들었지만 샌슨도 운차이를 감시하기 위해 롱소드를 들고 나와서 덤벼들지는 못 했다. 하지만 운차이는 치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너, 너, 얌전히 먹지 않으면………….”
“알았어, 알았다고! 제기랄, 분통 터져서 미치겠네.”
이루릴은 그런 우리 모습을 보며 생긋 웃더니 다시 무슨 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 중 여행 배낭에 책이 들어 있는 사람이 꽤 많군. 아니, 운차이와 나 외엔 전부 책을 가졌네? 칼은 순수 과학 서적과 여러 가지 잡 다한 책을 가졌고 이루릴도 마법 책으로 짐작되는 몇 개의 책을 가졌다. 하다못해 샌슨도 지리서를 가졌다. 나도 책이나 좀 구해서 읽을까? 여긴 수도 근처니까 책 구하기도 좋을 텐데. 아! 돈이 없었군. 망할.
그때 수프를 다 먹고는 수프 접시를 숟가락으로 긁적긁적하고 있던 샌슨이 느닷없이 외쳤다.
“잡아야 해!”
그리고 샌슨은 벌떡 일어서서 걷기 시작했다.
“으악!”
“어억!”
샌슨과 운차이는 발이 서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운차이는 의자째 뒤로 넘어졌고 샌슨은 앞으로 넘어졌다.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얼굴을 가렸다. 정 말 창피스럽군. 칼은 운차이가 일어나도록 부축했고 샌슨은 얼굴을 문지르더니 말했다.
“이봐요! 주인장 아주머니!”
레네즈도 허리를 꺾으며 웃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면서 걸어왔다.
“그래, 프흡, 왜 불렀소? 그건 그렇고 왜 그렇게 묶고 있는데?”
“그건 아실 필요 없고, 그 네리아라는 여자를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글쎄…………. 어떻게 할까? 난 현상금 사냥꾼이 아니라서 모르겠네. 여러분이 나보다 더 잘 알지 않아요? 모험가처럼 보이는데.”
“흠. 그 여자 집이 여깁니까?”
“집? 천만에. 그 여자 떠돌이요. 여기저기 떠돌다가 오늘은 이 마을에 들른 모양이군. 모르지. 어쩌면 벌써 떠났을지도.”
“아주머닌 그 여자를 어떻게 아십니까?”
“여관업을 하니까 당신들처럼 우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오. 보통은 그 여자에게 통행료랍시고 돈을 뺏기는 경우가 많지. 하지만 진짜 실 력 있는 사람들에게는 애교로 접근하지. 그 여자, 자기가 여자라는 점을 잘 이용해요. 턱없는 아양도 부리고 콧대 높은 철부지 아가씨 흉내도 잘 내 지.”
운차이는 신음소리를 뱉었다.
“그래서…………, 그래서 그 여자, 계속 그런 헛소리를 했군.”
샌슨은 씩씩거렸다.
“좋아. 그럼 어떻게 그 여자 자취를 추적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사람 없겠습니까?”
레네즈는 빙긋 웃다가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도둑 길드라는 거 들어보셨어요?”
우리는 모두 긴장해서 허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칼이 말했다.
“그건…………, 도둑들의 조직 아닙니까. 정보를 교환하고, 배신자를 처벌하고 등등.”
“그렇지. 그런데 그런 길드에서는 그것 말고도 하는 일이 많다더군요. 허가 없이 그 지역에서 그런 영업을 하는 자를 암살하거나, 도둑을 죽인 자에 대한 복수…………도 한다우.”
레네즈는 방글거리며 말했지만 내용이 좀 끔찍스럽다. 우리는 모두 불편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단념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냥 잊어요. 괜히 그 여자의 성질을 긁는 것은 좋지 않아요. 그 여자를 어떻게 잡는다손 치더라도, 다른 패거리들이 밤 에 잠자고 있을 때 찾아오면 어쩌시겠어요? 댁들이 웬만큼 손에 굳은살이 박였다 하더라도, 상대가 보통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도둑의 방식으로 싸 우게 된다면 어쩌시겠수? 꼼짝없이 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우.”
흐음. 좀 소름끼치는 말이군. 자고 있을 때라……………. 샌슨도 그 말에는 찔끔한 모양이다. 칼은 팔짱을 끼고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아, 제미니. 네가 그립구나. 속마음과 겉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던 타이번의 말을 이제야 알겠다. 제미니는 속셈 같은 것은 없는 아이. 어두운 계획 은 없는 그랑엘베르의 순결한 소녀. 화나면 토라지고, 기쁘면 헤헤 웃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덕목이었구나. 그렇다면 여인의 최 대의 무기는, 기쁨과 슬픔에 아무런 관계 없이 눈물짓거나 미소지을 수 있다는 점이겠지.
제미니. 난 정말 무서운 여자를 만났어. 난 멋도 모르고 어둡고 무서운 계획을 감추기 위한 그 여자와 운차이의 말싸움 사이에서 꼬박꼬박 말을 전했 지. 네가 전폭적으로 대책 없이 무조건 보고 싶구나! 너의 허리를 다시 붙잡고, 너의 가슴에서 콩닥거리는 고동소리, 그리고 너의 입술………….
··중증이다. 난 아무래도 갈 데까지 갔나 보다.
어쨌든 돈이 없어지니 당장 골치가 아팠다. 식료품을 구입할 돈이 없으니. 이루릴은 친절하게 자신이 다 사겠다고 말했고 샌슨은 눈물을 좍좍 흘릴 듯한 표정이 되었다.
“제가 멍청해서……, 정말 어떻게 말해야 할지….”
“피곤하셨잖아요. 그리고 노리고 덤벼오는데 어떻게 막겠어요.”
이루릴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샌슨은 거의 제정신을 못 차릴 만큼 괴로워하고 있었다. 어쨌든 우린 운차이를 데리고 쇼핑에 나섰다. 누구 한 사람에 게 운차이를 맡겨둘 수가 없으니 항상 다섯 명이 한꺼번에 움직여야 했다.
우리는 먼저 대장간으로 가기로 했다. 운차이의 발목에 채울 족쇄를 구하기 위해서다. 뭐, 우리가 일일이 신경쓸 수가 없으니 급할 땐 바로 채울 수 있는 족쇄가 필요했다. 수갑도 좋고.
그런데 이루릴이 거기서 반대하고 나섰다.
“유피넬이 두 다리를 준 것은, 그것을 묶으라는 의미가 아니었어요.”
허, 이것 참. 그렇다고 풀어두면 달아날 것이 뻔한 사람을 계속해서 밧줄 등으로 묶어둘 수야 없지 않은가. 샌슨은 난감한 표정으로 그것을 설명하려 했으나 이루릴은 전혀 뜻을 굽힐 기색이 아니었다.
“전 인간들끼리 나라를 나누는 것도 잘 이해하진 못하지만, 다른 나라의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친지나 가족에게는 하지 않을 모진 짓을 할 수 있다 는 것도 이해되지 않아요.”
“하지만 이루릴……, 놔두면 달아날 겁니다.”
이루릴은 운차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운차이. 달아날 건가요?”
운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루릴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내게 물었다.
“후치. 운차이에게 달아날 건지 물어봐 주세요.”
나는 우울하게 대답했다.
“그야 물어볼 필요도 없죠. 우리도 귀찮아요. 그냥 이 도시 경비대에 맡기면 편하죠. 하지만 간첩은 전범…………, 맞나? 어, 전범이라서 경비대에 맡길 수가 없어요.”
“그럼, 수도까지 데려갈 건가요? 그러면 그냥 동료로서 데려가지요.”
“달아난다니까요!”
“물어보지도 않고…………. 아, 후치는 현명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물어봐 주세요.”
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물어보았다.
“이봐요, 운차이. 라는데요?”
“뻔하잖아. 기회만 오면 달아날 거야.”
난 고개를 끄덕이며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거 봐요.”
“그럼 보내주면……….
“그게 안 된다고요! 이 사람은 간첩이고, 따라서 우리 국왕의 적이라고요. 그리고 우린 국민으로서 국왕의 적을 놔줄 수 없어요! 그건 우리 국왕에 대한 배신 행위라고요.”
꼭 이런 원론적인 수준의 이야기를 해야 되나? 나도 깊이 생각하지는 않는 이런 이야기를? 그러나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치 씨는 항상 설명을 잘하세요. 이제 이해했어요.”
그랑엘베르여, 감사합니다! 이루릴이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루릴은 족쇄에는 반대였다.
“그래도 반대예요. 제가 잘 감시할게요.”
감시한다고? 음. 감시라. 이루릴은 암흑 속에서도 볼 수 있고 아무리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감시자라면 최고지.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울까? 칼 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너무 힘드실 겁니다.”
“조금 집중하면 됩니다. 어렵지 않아요.”
결국 포기. 우리는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라무스 시의 사람들은 숲의 종족이 대로를 걸어가는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 모습을 보며 수군거렸다. ‘야! 저게 엘프인가 봐. 정말 미인인데? 뭐야? 뒤의 녀석들은? 그렇고 그렇게 생겼는데?’ ………그렇고 그렇게 생겨서 미안하군. 그러나 이루릴은 우리에게 친절하게 말했고 그러자 사람들은 완전히 혼란스러워져 버렸다. ‘저 뒤의 사람들 보기완 달리 대단한가 봐? 모험가들인가? 혹시 정체를 숨긴 귀족이나, 뭐 그런 사람 들이 아닐까?”
우리는 되도록 주위에 신경을 쓰지 않도록 주의하며 잡화점을 찾았다.
밀가루와 건육, 베이컨, 기타 조미료 계통을 사고 램프에 들어갈 기름도 산다. 기름은 모닥불에 불 붙일 때도 좋다. 나와 샌슨이 기름을 채우는 동안 이루릴은 자신의 비어버린 약병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힐링 포션을 구하려고 하는데요. 신전이 있나요?”
잡화점의 대머리 주인은 이루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면서 말했다.
“예! 여기서 잠깐만 가시면 됩니다. 아니, 제가 안내해 드리죠.”
곧 그 옆에서 앙칼진 고함소리. “여보!”
잡화점 사모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나와서 엄청난 시선으로 대머리 주인을 노려보았다. 결국 대머리 주인은 친절하게 지리를 가르쳐주는 정도로 끝내었다. 그때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칼이 말했다.
“이건 뭐죠?”
칼이 가리킨 것은 희한하게 생긴 브레이슬릿 한 쌍이었다. 금속으로 되어 있는데 빛깔이 곱고 무늬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여자아이나 찰 듯한, 그저 팔에 감는 장신구다. 잡화점 주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팔찌죠, 뭐. 예쁘지요?”
칼은 빙긋 웃더니 말했다.
“얼마죠? 누구에게 선물하려고 하는데.”
“1셀만 내세요.”
이루릴은 그 팔찌의 대금도 지불했다. 잡화점 바깥으로 나와서 나는 칼에게 물었다.
“그 브레이슬릿은 왜 샀지요?”
“말했잖은가. 선물하겠다고.”
“선물? 누구에게?”
“네리아 양에게.”
“예?”
칼은 미소를 짓더니 작전을 설명했다.
우리는 그 작전을 한참 동안 들었지만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다시 한번 더 들어야 했다. 칼은 자세하게 설명했다. 나는 반신반의하면서 말했다. “잘 될까요?”
“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일세. 세레니얼 양, 제가 말씀드리는 것들 다 준비되겠습니까?”
“되기는 되는데・・・・・・ 알겠습니다.”
“그럼, 문제는 없어. 어떤가, 친구들?”
샌슨은 무조건적으로 이유 붙일 필요 없이 찬성이었다.
“절대로 찬성입니다. 그 여자를 엎어놓고 볼기짝을 두드릴 수 있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그럼 네드발 군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소매치기당했다는 것은 기분 나쁘다. 게다가 돈이 없으면 앞으로 얼마나 고생을 해야 될까. 칼은 운차이에게도 질문했 다.
“운차이 씨는? 도와주겠소?”
“웃기지 마십시오.”
“그럴 줄 알았소. 그럼 할 수 없지. 일단 주위를 정찰하고 여관으로 돌아가세.”
우리는 마을 주변을 정찰했다.
이루릴은 신전에 들러서 힐링 포션을 구입했다. 이 이라무스 시에는 에델브로이의 신전이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에델린의 소개장을 보여주고는 꽤 싼 값에 힐링 포션을 구입할 수 있었다. 꽤 싼 값이라지만 그래도 50셀이나 나갔다. 하지만 원래 가격은 100셀이라고 했다. 엄청난데?
나는 신전의 수련사들이 내어주는 힐링 포션을 보며 이루릴에게 물었다.
“이거, 먹으면 만병통치인가요?”
“병에는 잘 듣지 않아요. 이건 치료보다는 회복에 가깝죠. 자연 치유되는 상처를 빨리 낫게 하는 거지요.”
흠. 그런가? 이루릴은 그것을 세 병 구입했다. 신전에서는 갑자기 거금을 손에 쥐게 되어 퍽 기뻐했다. 150셀이라면 대단한 돈이 아닌가. 수련사들 은 감사하며 말했다.
“바람 속에 흩날리는 코스모스를.”
“폭풍을 잠재우는 꽃잎의 영광을.”
여관으로 돌아온 다음 준비를 갖췄다. 이루릴은 꽤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되었다.
저녁이 될 때까지 기다린 다음, 식사를 든든히 했다. 그리고 우선 운차이를 단단히 묶기로 했다. 우리 인원이 전부 출동해야 되기 때문에 누구 한 사 람 감시하게 남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루릴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샌드맨을 불러 운차이를 재워버렸다. 운차이는 좀 반항하는 듯하더니 곧 곯아떨어 져 버렸다.
그리고 다음은 내 차례. 샌슨은 홀의 벽난로에서 가져온 재와 침대 아래의 먼지를 뒤섞어 내 얼굴에 발랐다. 골고루 펴 발라서 얼굴의 색깔을 몹시 거무죽죽하게 만들고 피부도 거칠어보이도록 만들었다. 그 동안 난 숨쉴 새 없이 기침이 나와서 퍽 고생했다. 어쨌든 칼이나 샌슨은 내가 아무리 봐 도 17세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확신할 때까지 얼굴에 재를 발라주었다. 나는 이제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모양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나왔다.
계획대로 각자 따로 여관을 나갔다. 먼저 이루릴이 나가고, 그 다음 칼, 그 다음은 샌슨, 그리고 내 차례다. 매일 함께 다니다가 혼자 떨어져서 행동 하려니 좀 겁나는군.
나는 이라무스 시의 대로를 걸어갔다.
등에는 바스타드를 메고 팔에는 오늘 낮에 칼이 산 브레이슬릿을 차고 있다. 난 되도록 평온해 보이는 동작으로 바지에 손을 꽂고는 휘파람을 불면 서이라무스 시를 걸어갔다. 바지 속에 집어넣은 손에는 동전들이 만져졌다. 이루릴에게 미리 받아둔 돈이다.
미드 그레이드의 중심부이고 수도에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꽤 커다란 건물들이 보였다. 건물들마다 불꽃이 환한 것이 모두 양초나 램프 정도는 기본 으로 갖춘 도시이다. 레너스 시도 비교가 안 되겠는데? 그리고 지나다니는 아가씨들도 모두 어여쁜 것 같았다.
뭐…………, 양갓집 규수라면 해가 지고 돌아다니는 일은 드물 것이다. 모두 커다란 저택의 하녀들이거나 여염집 처자들이겠지. 그래도 내가 보기엔 퍽 세련되어 보인다.
그러나 난 이제 여자를 별로 믿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여자라면! 이루릴이 여자다. 그리고 나의 레이디 제미니 스마인타그………… 아악!
나는 머리를 좀 휘젓고는 다시 느긋하게 걸어갔다.
이라무스 시를 거의 횡단해서 도착한 곳은 ‘트라모니카의 바람’이라는 주점 겸 여관이다. 오늘 낮에 이미 답사를 해뒀던 곳이다. 위치상으로 손님들 이 제일 많이 몰릴 만한 주점으로 정한 것이다.
나는 주점의 문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내가 처음 보는 스윙 도어라 불리는 문이다. 그냥 기분상 문처럼 만들어둔 것으로 가슴 높이에 작은 널빤지 두 개를 매단 것이다.
난 그 스윙 도어를 가슴으로 밀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넓은 홀이었다. 벌써 요란한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잔 부딪히는 소리, 호탕한 고함소리, 그리고 노랫소리들이 요란했다. 난 주점을 대충 훑어보았다. 역시 칼과 샌슨이 먼저 와서 제각기 앉아 있었다.
이루릴도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이루릴은 마법을 써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겠다고 했다. 그 주문은 몸의 모습을 비슷한 체형의 다른 모습으 로 바꿔준다고 한다. 엘프가 사람으로 변장하는 것은 쉽겠지. 어쨌든, 난 그녀를 알아볼 수 없었다.
난 주위에 별로 시선을 보내지 않고는 빈 자리를 찾았다. 다행히 샌슨에게 좀 가까운 자리가 비어 있었다. 난 거기에 앉았다.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가 달려와서 테이블을 닦았다. 난 동전 하나를 튕겨주며 말했다.
“맥주.”
내 나이와 비슷할 듯한 소녀는 고개를 꾸벅이고는 곧 달려갔다. 곧 맥주가 날라져 왔다. 가만히 한 모금 맛을 보았다. 제길. 레너스 시의 여관 주인 쉐린이 만드는 맥주는 정말 끝내줬는데. 수도 가까운 도시의 맥주는 오히려 맛이 떨어지는군.
그리고 잔을 비워놓고는 잠시 기다렸다.
주위의 소란스러움은 여전했다. 무슨 말을 하든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였지만 난 혼자니까 별 상관없다. 그때 그 여급 소녀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내 옆을 지나치는 것이 틀림없다. 그럼 시작해 볼까? 난 눈을 질끈 감을까 했지만 관두었다. 슬쩍 손을 옆으로 뻗었다. 제미니, 용서해 줘.
난 옆을 지나치는 소녀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꺄악!”
소녀의 앙칼진 고함소리에 주점이 고요해져 버렸다. 사람들은 놀라서 나와 그 소녀를 쳐다보았다. 난 능글맞게 웃었다.
“아이쿠! 여러 아가씨를 연주해 봤지만 이렇게 음이 독특한 아가씨는 처음 보겠네?”
샌슨은 바로 이렇게 능글맞게 말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떠맡게 되었지. 으윽, 젠장! 당장 와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샌슨이 일어났다.
“이놈! 무례하게!”
그리고 샌슨은 저렇게 말할 때 가장 어울리기 때문에 저 역을 맡게 되었다. 기분 나쁘지만, 난 인정할 것은 깨끗이 인정한다고. 난 능글거리며 말했 다.
“어어랏? 뭐야, 넌. 이 아가씨 기둥서방쯤 되시나?”
“뭐야? 이놈이 도대체 눈에 뵈는 게 없나?”
그렇게 말하며 샌슨은 탁자를 꽝 내리쳤다. 나는 유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거야?”
“오냐, 좋다! 너 오늘 임자 만났어!”
곧 사색이 된 주점 주인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실내에서 싸우면 안 돼요!”
샌슨은 그 말을 무시하면서 내게 주먹을 날려왔다. 난 가볍게 피하면서 샌슨의 복부를 올려쳤다. 물론 힘을 빼서. 하지만 샌슨은 허리가 덜컹 하는 시늉을 하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샌슨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는 표정으로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꺄악!”
“어, 어억!”
어쩔 줄 모르고 우리들을 보던 그 소녀가 먼저 달아나자 주점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좌우로 썰물이 빠지듯 물러났다. 검, 검이다! 시시한 주 정뱅이들의 싸움이 아닌 것이다. 난 조금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이봐, 이봐. 도시 내에서 그런 걸 쓰면 어떻게 해?”
“시끄러! 네녀석 가만 두지 않겠어! 검을 뽑아!”
난 손가락을 우드득거리며 좀 꺾은 다음 말했다.
“난 쇠창살 여관에는 관심 없어. 미친 돼지새끼를 다루는 데는 좀더 좋은 방법이 있지.”
“뭐야, 이 자식아!”
샌슨은 아주 실감나게 화를 내고 있었다. 아마 연극이라도 이런 말을 들었으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지. 자, 이제 이루릴 차례인데…………. 이 루릴은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난 이루릴을 믿기로 하면서 두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보이나? 내 팔찌.”
“뭐야? 그걸 줄 테니 살려달라는 거야?”
“이런, 돌대가리. 물건 볼 줄도 모르는군.”
난 그렇게 말해 주곤 아무 말이나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제미니는 귀여운 나의 천사. 키스를 하면 울어버리는 나의 악마.”
어, 물론, 절대로! 이 말이 주위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한 것은 아니다! 난 그저 입 속으로 웅얼거렸다. 그리고 고함을 질렀다.
“하압!”
번쩍! 순간 굉장한 빛이 주점을 가득 채웠다. 이루릴이 어디선가 정확하게 시간 맞춰서 마법을 써준 것이다. 주위 사람들도 놀랐겠지만 나도 꽤 놀랐 다.
“으으윽!”
사람들은 모두 허둥거리며 눈을 가렸지만 난 그럴 수도 없었다. 그리고 빛이 사라지고 나자 내 팔에 있던 브레이슬릿이 불꽃으로 이글거리기 시작했 다. 사람들의 숨막히는 탄성이 들려왔다.
“뭐, 뭐야, 저건!”
내 팔에서 손까지 몽땅 불로 휘감겨 있었다. 난 손이 타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었지만 다행히 뜨겁지는 않았다. 샌슨은 사색이 되어 뒤로 허둥 지둥 물러났다.
난 오른손을 들어올려 보이며 싸늘하게 말했다.
“해볼까? 난 주먹으로 싸우겠어. 그럼 난 잘못한게 없지?”
샌슨은 롱소드를 든 손을 부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몰랐어, 정말 몰랐어! 샌슨이 저렇게 연기를 잘할 줄이야. 샌슨은 목소리까지 떨면서 말했다.
“그, 그건 뭐야?”
난 씨익 웃으며 내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그것은 청동으로 된 보통 술잔이었다. 난 그것을 들어올려 샌슨에게 똑바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양 손으로 잡은 다음, 쫙 찢어버렸다.
사람들의 안색이 사색이 되었다. 난 그것을 종이 조각처럼 뭉쳐버린 다음 손에 놓고 던졌다 받았다 하다가 내 앞의 테이블에 던졌다. 쾅! 테이블은 산산조각이 났다.
“정말 해볼까?”
“비, 빌어먹을!”
샌슨은 외치며 달려들 태세였다. 그때 칼이 일어서더니 샌슨을 붙잡았다. “여보게, 젊은이! 관두게. 죽고 싶은 건가! 저건 파이어 자이언트의 팔찌야!” 샌슨은 당혹한 눈으로 칼을 바라보았고 나도 놀란 눈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어랏? 당신, 이걸 아나?”
칼은 샌슨의 팔을 잡아당기며 내게 말했다.
“젊은이, 어, 어떻게 그 귀한 것을 손에 넣었나?”
그야 잡화점에서 샀지. 난 눈을 가늘게 뜨며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말했다.
“그, 그건 돈으로 따진다면 수천 셀을 호가할 물건인데, 자, 자네 그것을 어디서 산 건가?”
사람들의 눈이 순간 당혹과 탐욕으로 빛났다. 난 유들거리며 말했다.
“이게 그렇게 비싼가? 고맙군. 알려줘서. 내가 모험에서 건진 물건인데, 감정해 볼까 하다가 그냥 가지고 다녔거든.”
“그건 파이어 자이언트의 팔찌가 틀림없어! 모든 불을 막아내고, 거인의 힘을 내는, 대마법사 헨드레이크도 가지기를 열망했던 물건! 도대체 그것을 어디서 구했나?”
끝내준다. 정말 말 잘 만든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웃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말이다. 마법사가 뭣 때문에 거인의 힘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칼 들고 싸울 일도 없는데. 하지만 사람들은 그저 ‘대마법사 핸드레이크’라는 말에 그 말을 믿어버리는 눈치다.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 알려줄 수는 없어. 조만간 다시 가볼 계획이라서.”
그리고 난 샌슨을 한 번 흘겨보면서 말했다.
“상대를 알아보고 덤벼라, 알았나? 내 상대가 되기엔 까마득한 놈이니 살려둔다.”
샌슨은 아마도 정말 화가 난 모양이다. 그는 길길이 날뛰었지만 내게 덤벼듦으로써 산통 다 깨지는 않았다. 난 샌슨을 차갑게 노려보고는 주점 주인 에게 말했다.
“방 하나. 술맛 다 떨어졌군. 방으로 가져와. 제일 독한 걸로.”
“이, 이쪽으로…….”
난 내가 치근거렸던 소녀를 가리켰다.
“술시중은 저 아이더러 들라고 해.”
아…………, 내가 이런 말을 해야 되다니! 여관 주인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저, 저, 손님, 그것은………….”
난 눈살을 찌푸리며 10셀짜리 은화 하나를 던져주었다. 주인은 은화를 보더니 곧장 고개를 조아렸다. 더러운 놈! 난 속으로 그 주점 주인에게 욕설 을 퍼붓고는 그 소녀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 소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바뀌어 있었다. 난 그 소녀에게 날카로운 미소를 지어주고는 주인을 따라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