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4권 – 제7부 : 항구의 소녀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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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4권 – 제7부 : 항구의 소녀 3화

3

“어명을 전한다. 전시 특별 명령 제89호로 넥슨 휴리첼을 체포한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넥슨 휴리첼을 긴급 수배, 체포하라. 넥슨 휴리첼을 보호하거나 은닉시 켜 주는 자 역시 국왕에 대한 반역자로 간주한다. 휴리첼 백작가로 출동하여 모든 서류와 동산을 압류하고, 휴리첼 가문과 그 방계 가문 소속의 모든 부동산과 권리를 무기한부로 동결한다. 즉각 시행하라!”

“예!”

궁성 수비대 분대장들의 엄청난 호령소리. 그러나 나는 풀이 죽은 채 베란다에서 멍한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가을에도 꽃이 만발한 궁성의 풍경이 아름답다. 바람에 따라 흩날리는 꽃잎들이 궁성의 회색 돌벽들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하지만 내 마음 속은 너무도 살풍경하 다.

궁성까지 달려오던 순간의 영상들이 머릿속에 어지럽다.

다급한 샌슨의 얼굴, 눈이 빠져라 우리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모습, 달리는 말, 거칠게 볼을 할퀴는 바람, 궁성 앞에서 우릴 기다리다가 그대로 안으로 끌고 들어간 길 시언의 모습, 그리고 우리를 2층으로 끌고 오던 모습, 다급하고 빠른 말, 말, 말. 그러나 난 아무것도, 아무런 말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한 순간순간마다 항상 내 머 리를 떠나지 않고 있던 것은 흩어진 시체, 땅을 적시는, 그리고 도로의 포석 사이로 기하학적으로 흘러가는 핏물, 직선으로 흐르다가 직각으로 꺾여 흐르는 핏물, 그 위로 이를 번뜩이며 달려오는 넥슨의 모습, 넥슨의 무서운 모습, 인간의 웃음이 아닌 서늘한 웃음뿐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늘이 새하얗다. 아니, 캄캄한가? 넥슨의 얼굴만이 보일 뿐이다. 웃고 있다. 웃고 있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진다.

“머리가 엉망이야.”

네리아였다. 난 고개를 돌려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싱긋 웃었다. 그것은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미소였다. 하지만 곧 나도 그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달리다 보니까………..”

네리아는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가락을 갈퀴처럼 만들어서 내 머리를 빗어내렸다. 난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아내렸다.

“괜찮아요. 네리아.”

네리아는 손을 모아쥐고는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내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들어가자, 후치. 할슈타일 후작이 설명하겠다.”

“예에.”

베란다에서 방 안으로 몸을 돌렸다. 이곳은 임펠리아 3층의 회의실이었고, 회의실 안에는 일행들이 제각각의 자세로 앉아 있었다. 주위로는 방문들이 있었다. 간신 히 그 방들이 우리의 침실로 배정받은 방이라는 것이 기억났다. 난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칼은 회의실 가운데 테이블에 엄한 얼굴을 하고 곧은 자세로 앉아 있었으며 샌슨과 엑셀핸드도 테이블 주위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말 위에서 마법을 사용하느라 몹 시 지쳐버린 아프나이델은 안락의자에 거의 쓰러지듯이 앉아 있었다. 칼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좀 괜찮으십니까, 아프나이델?”

“아, 예. 죄송합니다. 워낙 모자란 재주라………….”

“천만에 말씀이오. 당신이 아니었다면 누가 넥슨을 저지했겠소.”

아프나이델은 겸연쩍게 웃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테이블 반대편을 보았다. 길시언과 함께 할슈타일 후작이 앉아 있었다. 길시언은 날 보더니 손을 들어올려보였다. 난 목례하고는 테이블에 앉았다. 네리아도 내 곁에 앉았다.

할슈타일 후작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의 수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칼은 그 말에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할슈타일 후작에게 한 수고는? 그의 집을 털었지, 뭐. 할슈타일은 유머 감각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도 없는 저런 얼굴 로 이렇게 말해 왔고, 그래서 우리는 모두 고개를 거북하게 꺾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계속 냉랭하게 말했다.

“그 수고가 좀 이상하긴 했지만, 어쨌든 도움이 되었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알았소.”

후작은 먼저 화려한 소매의 주름을 잡아 폈다. 그러곤 손을 가볍게 올려 손짓을 해가면서 설명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넥슨 휴리첼은 도둑 길드를 장악해 왔습니다. 그는 잃어버린 가문의 영광에 대한 갈망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의 삼촌이 되는 카뮤 휴리 첼의 사망 이후 크라드메서가 미드 그레이드에 끼친 해악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요.”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 어쨌든 그 대가로 휴리첼 백작가는 많은 지위와 권리를 상실하게 되었소. 다행히도 그 가문이 지난 세월 동안 바이서스에 행해 온 충성과 노력을 감안하신 전하의 성총으로 백작의 지위는 상실치 않게 되었지만, 결국 그 로넨 휴리첼은 군부에 백의종군하는 신세와 다를 바 없게 되었소. 그 명문가의 수장이 대 자이펀 전쟁

의 최전선이 아닌 당신네 영지 같은 곳에 출동하게 된 것만 보아도 대충 짐작할 거요.”

당신네 영지? 쳇. 헬턴트 영지가 어때서. 국왕 전하도 그러더니 할슈타일 후작도 우리 속을 긁는군.

할슈타일 후작은 냉랭한 어법 그대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말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반골의 기질은 그 가문의 전통이었나 보오. 넥슨 휴리첼이 에델브로이의 성직자 흉내를 내게 된 것은 모든 사람들의 예상 밖이었소. 아마도 로넨 휴리첼 백작은 더 이상 자식에게 기대를 걸 수가 없게 되자 자신의 힘으로 가문의 영예를 되찾을 생각이었던 것 같소. 그래서 그는 아무르타트 정벌군에 자원한 것이 지.”

“그렇군요………….”

“그렇소. 그런데 그의 아버지를 실망시켜 가며 에델브로이의 재가 프리스트가 된 넥슨이지만, 나에게는 그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는 것처럼 보였소. 그래서 나는 그 를 주의해서 보았지. 그는 성직자의 길을 걸을 인물이 아니었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내 눈엔 그의 아버지보다 그가 더 격렬한 야망을 가진 인물로 보였소. 그가 에 델브로이의 재가 프리스트가 된 것도 어쩌면 그의 야망을 감추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지.”

“그렇습니까?”

“그랬소. 그래서 나는 그를 예의 주시했소. 불행하게도 내 눈은 정확했소. 그의 아버지는 창칼을 어깨에 메고 전선으로 달려나가 가문의 영예를 되찾으려 했소. 존경 받을 무인이지. 하지만 그는 가문의 영예보다 더 큰 것을 과녁으로 삼고 있었소. 그는 불경하게도 왕좌를 노리고 있었던 모양이오.”

사람들의 눈이 동시에 커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할슈타일 후작은 냉랭하게 말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루어진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 바이서스 임펠의 도둑 길드를 장악하게 되었소. 물론 반역의 중추부대로 삼을 만한 세력은 아니지만 전쟁 수행국인 바이서스에서는 충분히 위험한 힘이 될 수 있는 집단이오.”

샌슨의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전쟁 수행국인 바이서스에서는 도둑 길드라도 나라를 한번 뒤집을 수 있다? 흠. 어쩐지 일리 있는 말인 것 같다. 칼도 그렇게 말했다. ‘전쟁중에는 많은 일이 가능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는 자이펀과의 협력을 기도했소.”

“역시!”

길시언의 말이다. 언젠가, 레브네인 호수 옆. 그렇군. 칼은 다시 정확하게 지적했군. 밖으로 자이펀과 손을 잡으며, 안으로는 도둑 길드의 힘을 통해 내부를 장악한 다. 이것이 반란 계획이었구나! 우리는 긴장한 얼굴로 할슈타일 후작을 노려보았다. 후작은 차가운 얼굴 그대로 말했다.

“다행히 나는 그자가 자이펀으로 파견한 밀사를 붙잡을 수 있었소. 넥슨은 에델브로이의 재가 프리스트였고, 따라서 그가 위임한 사람은 간단히 국경을 통과할 수 있었지. 하지만 그는 누군가가 그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은 몰랐을 거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전선에서 지골레이드와 함께 활약중인 내 아들 돌맨이 있소.”

“들었습니다.”

아아. 돌맨이라는 사람도 디트리히처럼 할슈타일 후작의 양자인가 보지? 그리고 지골레이드라는 드래곤과 함께 자이펀과의 전쟁에 참전하고 있고? 할슈타일 후작은 말했다.

“음. 어쨌든 내 아들이 나의 밀명을 받아서 그 밀사를 붙잡았지. 그 밀사의 품에서 나온 책은 나를 놀라게 만들었소. 당신들도 기억할 거요. 당신들이 내 집에서 가져 간 책이니까.”

우리는 다시 고개를 꺾었다. 할슈타일 후작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와! 저 얼굴에도 미소가 떠오를 수 있구나. 하지만 싸늘한 미소다.

“힐책하는 것은 아니오. 불쾌하긴 하지만.”

“죄송합니다. 후작님.”

“아니오. 길시언 왕자님께 이미 들었소.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하더군. 어쨌든 나는 그 서류를 회수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밀사의 입을 열게 하는 데는 실패했소. 그는 자결해 버렸지.”

“자결을…………….”

“그렇소. 그래서 나로서는 난감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소. 그 서류는 되찾았지만 그 서류가 넥슨이 자이펀에게 건네려 한 서류라는 것을 입증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 오. 넥슨을 의심하고 그를 계속 감시해 온 것은 나 혼자뿐이오.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슨 증거를 댈 수가 없었지.”

“그럼, 미끼?”

칼은 이상한 말을 했다. 그러자 할슈타일 후작의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

“그렇소. 현명한 분이군. 나는 그 책이 우리 집에 있다는 소문을 내었소.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소. 도둑 길드에게서 무엇을 감추는 것은 어려워도 무엇을 드러내 는 것은 간단한 일이니까. 그래서 어떤 녀석이든 그 책을 되찾으러 오면, 그놈을 붙잡아 넥슨이 반역자임을 실토하게 만들 생각이었소.”

그리고 그때, 다시 한번 할슈타일 후작의 얼굴에 희한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날 낮, 당신들이 찾아왔을 때 난 당신들이 넥슨의 패거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칼의 얼굴이 팍 붉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나보단 낫다. 할슈타일 후작은 나에게 조금 징그러운 미소를 보낸 것이다. 으아, 맙소사!

“자네의 여장은 매우 인상적이었네, 소년.”

네리아의 눈이 동그래졌고 난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고, 유피넬이여! 할슈타일 후작은 다시 칼에게 말했다.

“그러나 칼 당신의 연기가 훨씬 더 훌륭했소. 결국 난 당신들이 그저 뜨내기일 거라고 생각했지. 심지어 불쾌하기까지 했고, 능란했소.”

“감사하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군요.”

“그렇겠지. 그러고 곧장 우리 집을 터셨더군.”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괜찮소. 당신들 덕분에 넥슨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말았소. 그 서류가 그에게 그토록 중요한 것이기에, 그는 대로상에서 그런 난동을 부렸지.”

“중요한 서류…”

“그렇소. 넥슨은 자이펀과의 완벽한 신뢰 관계를 얻기 위해 그 서류를 선물 삼아 보내려 한 모양이오. 자이펀으로 하여금 전쟁에 승리하게 만들고, 그 대가로 이 나 라의 통치를 원한 것이오. 이해하시겠지?”

“그렇군요.”

“좋소. 어쨌든 귀하들의 노고에 찬사를 보내는 바이오. 국왕 전하와 모든 각료들을 대표해서.”

할슈타일 후작은 정중히 목례까지 했다. 우리는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그때 칼이 말했다

“그럼 넥슨 휴리첼은 어떻게 됩니까? 그리고 그랜드스톰은…….”

할슈타일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넥슨은 당연히 반란자로서 체포, 처형될 것이오. 그랜드스톰에서는 그러한 반란자를 프리스트로 두었으니만큼 처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아무래도 그랜드스 톰은 모르는 일이며, 전통적으로 통치권은 신권의 경계를 존중하는 법이오. 신권 측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따라서 별다른 처벌은 받지 않을 것 같소.”

“그렇군요. 그런데 제가 정말 궁금하게 여기는 것은 로넨 휴리첼 백작의 일입니다. 저, 국왕 전하께서는 아무르타트에게 줄 보석을 구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데 로넨 휴리첼은 반란자의 아버지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소. 하지만 아무르타트가 포로로 붙잡고 있는 것은 그만이 아니오. 그러니 그 일은 과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이오. 물론 전하께서 결정할 일이지만.”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들 쉬시오. 국왕 전하께서 조만간 당신들을 불러 직접 치하하실 것이오.”

할슈타일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났으며 우리들도 모두 일어났다. 후작은 가볍게 목례하고는 별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우리는 다시 자리에 모여앉자 칼은 말 했다.

“일이 그렇게 된 거였군. 그것 참.”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 서류는 원래 넥슨이………….”

의자에 거의 쓰러져 있던 아프나이델이 그 말을 이었다.

“아, 그래서 그렇군요. 그렇게 빨리 우리의 속임수를 알아차렸군요. 그가 직접 작성한 책이었으니까.”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심호흡을 하고는 팔짱을 끼었다.

“그렇습니다. 어쨌든 넥슨의 일은 해결되었고, 이젠 다시 우리의 일을 생각해 볼 때로군요.”

“우리의 일이오?”

“예. 붉은 머리 소녀의 추적 말입니다. 엉뚱하게도 반역자를 하나 색출하는 이득이 있었긴 하지만 아직 우리 추적의 원래 목표에는 별로 접근하지 못했군요.”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그러고 보니 또 국왕 전하 좋은 일만 시켰군. 우리 일은 언제 하지? 네리아는 고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보다 배는 어려워지겠어요. 에휴……………”

“무슨 말입니까, 네리아 양?”

“길드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잡아먹으려 들 거라구요, 칼 아저씨.”

“그렇겠군요. 어쩔 수 없지요.”

그때 네리아는 실실 웃으며 칼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갑자기 칼의 목을 콱 껴안았다. 칼은 크게 놀랐다.

“으어어어?”

“그래도, 진짜 고마워요. 아직 인사 못했죠? 나 때문에 정말 고생들 하셨어요. 음!”

“으어, 어, 이런!”

네리아는 칼에게 키스했다. 칼은 눈이 둥그레져서 당황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네리아는 고개를 들더니 우리를 둘러보았다.

“그 다음은……”

“바깥 날씨가 어마어마하게 궁금해!”

쿠당! 먼저 샌슨이 뛰쳐나갔고 그 뒤를 이어 내가 방을 뛰쳐나왔다. “나도 궁금해!” 내 뒤에서 네리아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나는 궁내부원들의 놀란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정원까지 달려나왔다. 샌슨은 정원 한귀퉁이의 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나도 그 옆에 앉았다.

샌슨은 온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에이, 이상한 일에 휘말려 버렸어.”

샌슨의 말에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샌슨은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쳇. 수도에 오면 모든 사람들이 선량할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야. 하지만 최소한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젠장. 이렇게 심한 일들을 보고 들 을 줄은 몰랐어.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왜 이리 지저분하게 구는 거지?”

나는 샌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칼의 말이 생각났다.

“여기다 아무르타트를 데려다 놓을까?”

혼잣말 비슷한 내 말에 샌슨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뭔 말이야?”

“그럼 최소한 서로 쥐어뜯고 싸울 생각은 못할 테니까.”

“헤헷? 말도 되는 것 같다. 어지간히.”

“말 안 돼?”

“서로 쥐어뜯고 싸우든, 아무르타트와 싸우든.”

그게 또 그렇게 되나? 내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사이에 샌슨은 아예 땅에 드러누웠다. 그는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씨 익 웃었다.

“이거 하나는 좋군.”

“뭐가?”

“이 계절에 잔디에 드러누울 수 있다는 거.”

“아이고, 오거야. 좋기도 하겠다. 쳇. 데미 공주님께 감사!”

“알았어. 에, 데미 공주님께…………, 음. 후치야? 네가 해봐라.”

“뭐가 어려워? 그러니까 해지기 직전의 서녘 하늘, 가장 상쾌한 바람이 스치는 호수 표면, 가인의 손가락이 스치는 현의 울림, 가장 높은 나뭇잎에 반짝이는 밤이슬, 이 모든 것들의 아름다움으로 노래하라, 데밀레노스 공주님을.”

“괜찮네. 하하하. 정식으로 노래 한번 불러봐.”

나는 나무에 기대어앉아 궁성의 벽을 바라보았다. 11월의 하늘 아래에서도 여전히 푸르른 녹음이 그 벽을 물들이고 있었고, 세찬 바람이 불 때마다 흩날리는 꽃잎들 은 대기를 타고 도는 분홍빛의 눈보라 같았다. 아름답군. 하지만, 젠장! 이따위 수도의 이따위 사람들을 위해 노래부르지는 않겠어! 나는 샌슨을 위해 노래부르겠어. 진짜 인간에 대한 노래를 불러주지. 들어보라구! 인간이 뭔지를.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노래불렀다.

검은 녹슬고

책은 낡아가지.

봄날에 새싹이 싹트고

미풍에 낙엽이 날리면

빛나는 이들, 모두 사라져가네.

노래는 물결처럼

전설은 바람처럼

매끄러운 가인의 입술에도

시간의 입맞춤이 더해지고

결국 모든 것은 자취도 남지 않네.

여기 잠시 서 있다가

결국엔 떠나가고

지나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이정표 없는 길을 하염없이 걸어가는

우리는 모두 세상의 나그네.

그러나 돌아보라!

그대 스치는 황량한 길가에도 꽃은 피어 있음을!

벗이여 노래하라!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을!

별빛이 스러지는 새벽이 올 때

대마법사 펠레일은 눈을 뜨네.

캄캄한 공허 속에서도 그는 보지.

마법보다 신비하고 신화보다 아름다운

사랑하는 그의 50명의 꼬마들을.

태양이 가장 아름다운 빛을 뿌릴 때

대마법사 펠레일은 웃음짓네.

뛰고, 달리고, 울고, 웃고,

노래하고, 고함지르고, 아이들은 다시 돌아와

팔에 매달려 노래부르네, 그 노래 귓가에 울리네.

석양이 어둠을 약속하며 부정할 때

대마법사 펠레일은 손을 젓네.

아이들은 달려가고 어둠이 모든 것을 덮지만

밤바람이 실어나르는 웃음소리들.

은은하게 울려퍼져 부드럽게 멀어지네.

루루루루루루루루루……………

은은하게 울려퍼져 부드럽게 멀어지네.

라 라라라 라라라라라…………

나그네는 고개 돌려 다시 밤 속으로 걸어가네.

매일 수 없는 그의 발걸음은 끝이 없지만

그러나 그의 귓가엔 아직도 울려퍼지네.

50명의 꼬마들의 아름다운 웃음소리가.

루루루루 루루루루루・・・・・・

라 라라라 라라라라라……………

“루 루루루 루루루루루·

샌슨이 미쳤다! 아니, 어떻게 샌슨이 여자 목소리를 내는 거지? 그런데 그 목소리 꼭 데미 공주님의 목소리 같네. 샌슨은 부리나케 일어나다가 머리맡에 있는 낮은 나뭇가지를 부러뜨렸다. 물론 그의 머리는 끄떡 없다. 달리 오거냐?

“데, 데미 전하. 인사드리옵니다.”

나도 엉겁결에 일어났다. 허름한 작업복에 온갖 잡동사니를 쑤셔박고 손에는 전정가위를 들고 있는 꺽다리 공주님. 데미 전하는 배시시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 었다.

“궁성에서 이런 노래를 듣는 것은 생전 처음이군요.”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공주님과 샌슨은 이 노래를 듣는 최초의 사람입니다.”

“어머, 그런가요? 영광이네요. 그럼 이 노래는?”

“방금 지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소란을 피워서..”

“아뇨. 괜찮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이런 노래라는 것은 아무런 반주도 없이 그저 흥에 겨워 부르는 노래, 그런 노래를 처음 듣는다는 거지요. 궁중 음악 들어보셨어 요? 참 졸리는 노래죠.”

“그렇습니까. 아, 네.”

샌슨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너 어떻게 그렇게 겁도 없이 공주님과 부담없이 말을 나누냐는 눈초리였다. 으악! 그러고 보니 내가 미쳤나 봐? 공주님은 배시시 웃으시더니 곧 샌슨에게 다가갔다. 샌슨은 당황해서 물러났으나 공주님은 허리를 굽혀 샌슨이 부러뜨린 나뭇가지를 주워들었다.

공주님은 작업복 주머니에서 천과 실 등을 꺼내었다. 그러고는 나뭇가지를 부러진 자리에 다시 가져다대고는 천으로 감싸고 실로 묶었다. 샌슨은 무안한 얼굴로 말 했다.

“아, 죄송합니다. 저, 그런데 그런다고 다시 살아나지는 않을 텐데요?”

공주님은 실을 감으면서 빙긋 웃었다. 실을 단단히 묶고 나서 공주님은 두 손을 모았다. 기도? 공주님이 무언가를 웅얼거리자 곧 공주님의 두 손에서 빛이 나기 시작 했다.

나와 샌슨은 입을 딱 벌리고 공주님을 바라보았다.

데미 전하는 나뭇가지를 감싼 천에 그 빛나는 손을 가져갔다. 잠시 어루만지듯 데미 전하의 손이 움직이자, 마치 그 손에서 나무로 빛이 옮겨가듯이 손에서 빛이 사 라지며 나무가 잠시 빛을 뿜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그 빛이 희미해졌다.

그렇군. 공주님은 아샤스의 재가 프리스트였지. 놀랍군.

“이젠 괜찮을 거예요.”

“아, 예. 다행입니다.”

데미 공주님은 두 손을 작업복의 주머니에 쑤셔박은 자세로 서서는 우리를 바라보았다. 정말 공주님 같지 않아. 공주님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감사드립니다.”

“예? 뭘요?”

“덕분에 시집가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샌슨은 입을 딱 벌리고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군. 닐시언 국왕 전하는 데미 공주를 헤게모니아로 시집보내서 북부 대로의 상로를 확보하려고 했지. 소금값을 내려보기 위해서. 그런데 칼이 그건 안 된다고 말 했지.

“죄송합니다…………….. 결혼을 방해해서.”

“아뇨. 정말 가고 싶지 않았어요. 얼굴 한 번 못 본 사람에게 시집가라는 것은 가혹해요.”

데미 공주는 팔을 펼쳐 주위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 정원을 두고 그 먼 북부의 땅으로 떠난다는 것은 몸서리가 쳐지는 일이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그렇습니까? 어, 그렇다고 해서 저희들에게 감사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건 우리 일행인 칼의 의견이었는걸요.”

“그런가요? 그럼 칼 씨에게 감사드려야겠군요. 역시 여기 오셨지요?”

“예.”

“그렇잖아도 찾아가는 길이었어요. 안내해 주시겠어요?”

“예? 아, 예.”

데미 공주는 어슬렁거리듯이 걸어왔다. 아무래도 무슨 드레스 같은 것을 입은 모양을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녀는 작업복이 참 잘 어울리는 느릿하고 처지는 걸 음걸이로 걸어왔다.

궁내부원들이 질겁하며 우리를 따라왔다. 삽시간에 거의 일개 소대에 가까운 궁내부원들이 데미 공주의 뒤를 따랐다. 이건 뭐야? 아, 수행원이구나. 그러나 데미 공 주는 뒤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내 주머니 튼튼해요.”

“예?”

궁내부원 중에 하나가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데미 공주는 어눌하다 싶을 정도로 낮게 대답했다.

“흘릴 거 없어요. 그러니 따라다녀 봐야 주울 것도 없어요.”

샌슨과 난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입술을 틀어막았다. 그 궁내부원은 입을 크게 벌린 채 공주를 바라보다가 대단히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전하!”

“가서 일들 봐요.”

그러나 궁내부원들은 전혀 흩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데미 공주의 뒤를 따라왔다. 데미 공주는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곧 말없이 우리를 따라왔다. 잠깐, 그럼 뭐가 어 떻게 된 거야? 궁내부원은 공주의 수행원이고, 공주는 우리를 수행하고 있나? 허헛, 참.

방에 도달하자 곧 궁내부원들은 다급히 앞으로 나서서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 때문이 아니라 공주님 때문이겠지. 흐흠. 공주님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안으로 들어갔 고 우리도 따라 들어갔다.

방 안에서는 칼이 여전히 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고 엑셀핸드는 그런 칼의 표정을 보고 있기 괴롭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네리아는 안락 의자에 쓰러져 누운 아프나이델을 괴롭히고 있었고 길시언이 제일 먼저 문소리를 들었다. 길시언은 우리들이 돌아온 줄 알았는지 가볍게 고개를 돌리다가 곧 눈이 커 졌다. 그는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어, 이런? 데미야!”

데미 공주는 잠깐 얼빠진 얼굴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우리가 길시언과 동행이라는 것을 몰랐던 모양이다. 하긴 그렇겠군. 데미 공주는 곧 쇳소리를 내었다. “오빠!”

데미 공주는 정신없이 달려가 길시언에게 안겼다. 길시언은 데미 공주를 번쩍 들어올리다가 곧 숨막히는 신음을 흘렸다.

“으윽. 6년 전과는 다르구나.”

데미 공주는 길시언의 가슴에 정신없이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그래, 응. 나 컸어. 응응, 너무해. 이렇게 클 때까지 얼굴도 비치지 않고, 너무했어! 내가 커가는 모습 하나도 보지 못했잖아?”

길시언은 따스하게 웃으며 데미 공주의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랬다면 별로 놀랍진 않았을 거야. 갑자기 이런 모습을 보게 되니 놀라움이 더 큰데? 하하. 정말 예뻐졌구나.”

“으응……, 오빠……………”

데미 공주는 한참 후에야 좀 진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잠시도 길시언의 옆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길시언의 손을 꼬옥 잡은 채 칼에게 인사했다. “여러분들의 이야기 들었어요. 국왕 전하께서 저보고 가서 인사를 전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러셨습니까?”

“예. 전하께서 직접 오셔야 되지만 넥슨의 뒷수습이 바쁘셔서.”

흠. 그러니까 우리가 한 일은 귀족원의 원로가 되는 후작과 최고위 왕족인 공주가 감사를 드려야 되는 문제라는 말인 모양이군. 그래서 국왕 전하는 다른 사람을 보 내지 않고 공주를 보낸 모양이다. 우리는 참 대단해. 하지만 생각해 보니 데미 공주가 더 대단하군. 그녀도 분명히 그런 의미를 알 텐데 저렇게 작업복 차림으로 어슬 렁어슬렁 왔군.

칼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백성된 도리를 다했을 뿐입니다.”

데미 공주는 생긋 웃을 뿐 겸양에 다시 칭찬을 더해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지게 하진 않았다.

“국왕 전하께서는 내일쯤 여러분들을 장엄의 홀에서 접견하실 거예요.”

칼은 기겁했다.

“자, 장엄의 홀? 오, 맙소사. 그럼 문무백관들이 ………….”

“다 불편한 옷을 입고 모이시겠지요.”

일행은 모두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샌슨은 아예 까무러치는 표정을 지었다. 전사로서 장엄의 홀에 무릎을 꿇고 전하를 접견할 수 있다는 것은 최대의 영광이라고 했던가? 칼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텐데요.”

“전시엔 영웅이 필요해요.”

데미 공주는 간단히 말했고 칼의 얼굴은 조금 일그러졌다.

“그렇군요……. 젠장.”

아아아니! 젠장이라니! 공주님 앞에서 또다시! 아프나이델은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그러나 데미 공주는 그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기분 나쁘시겠지만 이건 피하실 수 없어요. 당신들의 일은 꼭 공개해야 돼요. 대로에서의 난동도 설명해야 되고…………. 그러니 잠시만 견디세요. 그렇게 길진 않을 거 예요.”

“알았습니다. 쳇. 하지만 예복이 없는데요?”

“내일 아침까지 모두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비 전하가 아직 계시지 않으니 제가 궁성의 안살림을 책임지고 있거든요.”

나는 피식 웃었다. 궁성의 안살림은 궁내부원들이 책임지는 거 아닌가?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데미 공주는 말했다.

“이건 공식적인 일이 아닙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도 감사드려요.”

“예?”

“고맙습니다. 덕분에 이 나라를 떠나지 않게 되었어요.”

“무슨………… 아, 헤게모니아?”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칼은 기분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천만에요, 공주님. 그건, 그저 우리나라의 상익 보호를 위한 조언이었습니다. 특별히 공주님을 염두에 두고 한 일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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