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어느새 기울어버린 햇빛이 베란다를 통해 들어온다.
방 안 허공으로는 사각형의 빛들이 조용히 흐르고 있다. 빛이 닿는 곳은 밝고, 닿지 않는 곳은 어둡다. 불그스름한 광선들과 검은 어둠 사이로 300년 전의 이야기가 휘감아돈다.
“그런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칼의 감탄 어린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와, 우와. 어느새 네리아나 엑셀핸드마저도 데미 공주님의 이야기에 빨려들어가 있었다. 아프나이델마저 몸을 일으켜 데미 공주 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역사 이야 기라면 항상 지루하지만 이건 정말 재미있는데? 역사에 관심을 좀 가져봐도 되겠네.
칼은 말했다.
“그래서, 핸드레이크는?”
“페어리퀸 다레니안은 핸드레이크를 바이서스 군으로 옮겨주었습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떠났지요. 프리스트들의 힘으로 핸드레이크는 구제되었습니다. 하지 만 신력은 마력에 위험한 법. 핸드레이크는 이후 몇 주일 동안 마법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침상에 누운 채 바이서스 군을 지휘했습니다.”
“그 최고의 후퇴 작전이 침상에서 나왔습니까?”
샌슨의 어처구니없는 목소리였다. 길시언도 혀를 차고 있었고 데미 공주는 미소를 지었다.
“핸드레이크는 이렇게 말했다죠. 항상 모든 것을 마법과 연관지어 생각하다가 마법을 완전히 배제해 놓고 생각하니 머리가 더 잘 돌아간다고.” 우리는 모두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흐흠. 갑자기 며칠 전의 빛의 탑의 소동이 생각나는군. 칼은 두 손을 맞잡아 무릎에 올려놓은 자세로 말했다. “핸드레이크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많군요.”
“흐음. 독단의 드워프라.”
엑셀핸드가 투덜거리는 어투로 말했다. 석양의 햇빛이 닿은 그의 수염은 황금이었다. 칼 역시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속눈썹을 움직여 미소를 지었다. 나의 왕이라.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데. 나의 왕이라.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먼저고 왕이 나중이군. 왕은, 내가 있음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자인가. 그것 참. 에라, 관둬라.
저녁 식사 시간은 악몽이었다.
화려한 테이블로 안내되어 간 우리들은 단숨에 의기소침해졌다. 물론 엑셀핸드와 길시언, 그리고 샌슨은 제외된다. 우리는 불편한 마음으로 우리 속옷보다 더 깨끗 한 식탁보가 덮인 식탁에 앉았고 궁내부원들은 모두 자기 동작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듯한 표정으로 우아하고 부드럽게 음식물들을 날라왔다. 아으, 아으! 궁성에서 식사를 하다니! 영광스러워라. 하지만 식탁에서 영광이란, 소금이나 양념처럼 꼭 필요한 것이긴커녕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 임을 알게 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우, 제길!
샌슨이 내 대신 창피를 당해 준 덕분에 난 간신히 샌슨처럼 손 씻는 물을 마시지는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요리라고 해도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뭘로 먹어야 되죠?”
난 나지막하고도 심각하게 칼에게 질문했다. 내 앞에 있는 요리의 이름을 알게 되는 것까지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이게 손으로 집어먹는 건지, 포크로 찍어먹어야 되는 건지, 스푼으로 떠먹어야 되는 건지만이라도 알게 된다면 좋겠다. 칼은 진지한 얼굴로 속삭였다.
“길시언 전하를 참고하세나.”
“현명하세요.”
아프나이델은 우리보다는 훨씬 똑똑했다. 역시 마법사라 그런가? 아프나이델은 어떻게 먹어야 되는 건지 확실한 음식만 골라서 먹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손을 댄 것은 수프와 빵이 다였다. 반면 샌슨과 엑셀핸드는 그와 정반대의 태도로 나와 칼을 정신없게 만들었다. 그 두 명은 어떠한 예법으로 먹든 음식물의 최종 목적지는 입 이 아니냐고 웅변을 토하는 듯한 동작으로 음식들을 입 속으로 쓸어넣었다. 다행히도 길시언은 천천히 확실한 동작을 취해 주었고 그래서 나와 칼, 네리아 등 상식이 있어서 여태까지 피곤했던 세 사람은 그 모습을 훔쳐보며 저녁 식사를 마쳤다.
하지만…………. 이건 정말 못 견디겠다.
왜 다른 사람 식사하는 것을 들여다보냔 말이다! 궁내부원을 향해 내뱉는 나의 소리없는 항변이다. 젠장. 왜 다른 사람 식사하는데 옆에 서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시 중을 들기 위해서일 거라는 것은 짐작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옆에 사람 세워놓고 밥먹기가 어디 쉬운가? 게다가 난생 처음 보는 요리들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간신히 저녁 식사를 마쳤다. 나는 진저리를 치며 식당을 빠져나왔다. 도대체 무슨 맛이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네리아와 칼도 곧 내 뒤를 따랐고 길시언과 아프나이델도 천천히 따라나왔다. 오로지 샌슨과 엑셀핸드만이 아직도 식당을 점거한 채 궁성 주방장을 기쁘게 만들고 있었다. 네리아는 심각하게 말했다. “무시하자.”
“좋아요.”
그래서 우린 그 두 명을 무시해 버리고 3층으로 올라와 버렸다.
우리 침실은 낮에 우리들이 몰려 있던 회의실 옆에 붙어 있었다. 나와 칼, 샌슨이 한방을 쓰고 길시언, 아프나이델, 엑셀핸드가 한방을 쓰며 네리아는 혼자 방을 쓴 다. 나는 내 발로 궁성의 화려한 침대의 탄성을 좀 조사해 보고는 곧 밖으로 나왔다. 책을 읽던 칼이 헛기침을 해대었기 때문이다.
회의실로 나와보니 네리아와 아프나이델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길시언은 방에 틀어박혀 있는 모양이고 두 명의 주방장 옹호인들은 아직도 올라오지 않은 모양이 다. 네리아는 감탄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상에……………, 이제야 조금씩 실감이 나네. 나이트호크 네리아가 궁성에 들어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이렇게 유유히 앉아 있다니.”
나는 테이블에 앉으며 말했다.
“그 동안 묻고 싶었어요. 도둑 길드에서는 고생하지 않았어요?”
“응. 별로. 아무리 포로라도 같은 업종 종사자들끼리니까 괜찮아.”
“그날 날 보낸 것은 그 때문이에요?”
네리아는 그 말을 듣더니 시선을 내게 돌렸다. 그녀의 눈이 재미있게 빛났다.
“그럼 꼬마를 두고 내가 어떻게 마음 편히 나오니?”
“그러셨군요, 할머니.”
네리아는 깔깔거리며 손을 뻗어 내 코를 비틀었다. 어, 어어!
“그래. 이야기나 듣자. 도대체 어떻게 그 책을 훔쳐낸 거야? 나이트호크 자부심에 금 가는 소리가 들려오네.”
난 곧 신이 나서 우리들의 계획을 줄줄 이야기했다. 내가 여장을 했다. 네리아는 죽어라고 웃어대면서 나의 옷차림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그러곤 아프나이 델의 패밀리어를 숨겨 들어갔다. 네리아는 박수를 딱 쳤다. 그러고는 패밀리어를 통해 시동어를 알아내었다. 네리아는 숨을 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도둑 소란을 일으키면서 아프나이델을 숨겨 들여보냈다. 네리아는 감탄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프나이델에게 고개를 돌렸다. 표정이 풍부한 아가씨야. “그래서요?”
아프나이델은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뭐, 대단할 것은 없습니다. 저택에 숨어 들어가니 모두들 1층에서 우왕좌왕하더군요. 그래서 2층에 몰래 올라가는 것은 간단했습니다. 그러고는 시동어를 말하고 3 층에 올라갔지요. 방이 많아서 좀 헤매기는 했습니다만 결국 후작의 방을 찾았습니다. 사실 방마다 뒤지다가 서가가 있는 방을 발견하고는 거기가 후작의 방일 것임 을 짐작한 거죠. 푸른 표지의 책을 찾기는 쉬웠습니다. 무슨 장치나 함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자신이 항상 사용하는 방이라 그런 것은 없더군요. 후작은 텔레포트 마법과 창문마다 걸려 있는 알람 주문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리고 아프나이델은 정면의 창문을 깨뜨리고는 뒤쪽 창으로 뛰어나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장면에서 난 칼의 판단력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했고 아프나이델 과 네리아 모두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영리해….. 정말, 모두들. 흠. 난 후치 너희 일행과 만나고부터 내가 너무 멍청한 도둑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고.”
“에이, 설마요. 우린 운이 좋았겠죠.”
“후치 군의 말이 옳아요. 우리 계획은 급조된 것이었고 모두들 익숙지 않았지만 운이 좋아서 성공한 거죠.”
네리아는 헤헤거렸다. 그리고 내가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네리아가 좀 말해 봐요. 잡혀 있으면서 뭐 들은 거 없어요?”
“응? 듣다니?”
“넥슨 말이에요. 뭐가 못마땅해서 반란을 저지르려던 건지, 뭐 참고가 될 만한 말 듣지 못했어요?”
“아니. 전혀. 난 거의 감옥에만 잡혀 있었고 넥슨은 만나지도 못했어. 거기 있던 도둑들에게 이야기를 좀 시켜보려고 했지만 별로 들은 게 없어.”
“그래요? 흐음. 도대체 뭐가 답답해서 반란이죠?”
“글쎄다.”
그때 아래쪽으로 통하는 계단에서 즐거운 콧노래가 들려왔다. 우리들은 계단을 돌아보았다.
샌슨과 엑셀핸드가 나란히, 그렇다, 저렇게 무지막지하게 말이 안 되는 구도라니. 샌슨과 엑셀핸드가 나란히 올라오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즐거운 표정으로 이 를 쑤시며 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손에손에 하나씩 술병을, 총 네 개의 술병을 들고왔다. 네리아가 반색했다.
“와아! 그거!”
샌슨은 씨익 웃었다. 이쑤시개가 하늘로 솟구쳤다.
“주방장이 우릴 너무 좋아하던데? 이거 선물이래.”
“퍼헐헐헐헐. 자네들도 좀더 있다가 가지 그랬나. 그럼 좀더 많이 받아왔을 텐데.”
난 아무래도 의심스러워 질문했다.
“잠깐. 그저 음식 잘 먹어줬다고 술병을 줘?”
“응? 어, 뭐 부탁을 좀 했지. 좋은 음식을 먹었으니 좋은 술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더니 말 잘 알아듣고는 즉각 선물을 주던데?”
선물…………. 강탈물, 혹은 전리품이 어울릴 것이다. 상식이 있어 뵈는 사람들은 모두 나가버리고 아무도 말려줄 사람이 없는 가운데 술병을 내놓으라고 점잖게 추궁하 는 오거와 드워프를 상대해야 했던 그 불쌍한 궁내부원들과 주방장을 위해 묵념.
그리고 시음. 푸하하.
난 지긋지긋하게 떠오르는 넥슨의 얼굴을 잊기 위해 더 빠르게 마셔대었고, 그래서 다음 날 아침 칼에게 물어보니 난 술병을 껴안고 테이블 아래에 들어가 자고 있었 다고 한다. 그 상황이 되도록 왜 말리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다. 모두들 엄청나게 취했던 모양이군.
다음날 아침, 참으로 감격스러운 경험을 또 한 가지 하게 되었다.
“샌슨…………, 믿을 수 있겠어?”
“뭐 말이야?”
“나 뜨거운 물로 세수하는 것 처음이야.”
“사실 나도 처음이야. 놀라워……….”
그 경험은 분명 평생에 남을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아침 식사는 여전히 고통스러웠다. 왜 저녁 식사와 아침 식사의 요리 종류가 다른 거지? 또 다른 고민의 흔적들을 무수히 테이블 위에 남겨놓은 다음 진저리를 치며 물러나 방에서 쉬고 있자니, 궁내부장 리핏 트왈리전이 각자 예복을 하나씩 받쳐든 여섯 명의 궁내부원과 함께 우 리를 찾아왔다.
칼은 마땅찮은 얼굴로 리핏 트왈리전과 여섯 명의 궁내부원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한숨을 쉬었다. 모두들 별로 반기는 표정이 아닌 것을 보고는 리핏 트왈리전 씨 는 좀 당황한 모양이다. 리핏 트왈리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전하께서 내리신 의복입니다.”
칼은 꼭 이런 옷을 입고 나서야 되나 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잠자코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네리아 양은 저를 따라오시죠.”
“저요? 왜요?”
“저…………, 데밀레노스 전하께 안내하겠습니다. 공주님께서 시녀들과 더불어 네리아 양의 의복을 돌봐드릴 겁니다.”
“그래요? 흐음.”
네리아는 리핏 트왈리전을 따라서 회의실을 나갔다. 리핏 트왈리전과 궁내부원, 그리고 네리아가 나가고 나서 우리는 각자 받아든 옷을 보았다.
샌슨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어떻게 조달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샌슨에게는 대단히 커다란 옷이 주어졌다. 샌슨은 싱글거렸다. 엑셀핸드 또한 놀랐다. 드워프 의 체격에 맞는 옷이 주어진 것이다.
“허, 묘하네.”
엑셀핸드는 그렇게 말하더니 곧 그 옷을 집어던져 버렸다. 길시언은 의아해서 말했다.
“입지 않으실 겁니까?”
“내가 왜? 난 노커야. 독단의 드워프가 하는 일에 간섭 말게.”
그 말에 아프나이델은 빙긋 웃었다. 아프나이델에게 주어진 로브는 새하얗고 품위 있는 옷이었다. 아프나이델은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이건 너무 화려한데.”
“예복이니까, 뭐. 입고 다닐 것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거 입으면 정말 톱메이지처럼 보이겠네요.”
아프나이델은 겸연쩍게 웃었다. 하긴 저 옷을 입혀두면 정말 무슨 현자처럼 보이겠다.
그리고 난 내게 주어진 옷을 보고는 한숨을 쉬어버렸다. 어깨가 부푼 핑크색 블라우스에 꼭 달라붙는 흰색 더블릿, 아이고 미치겠다! 제킨에는 자수까지 놓여 있었 다!
“이건 애나 입는 옷이잖아.”
길시언이 웃었다.
“그럼 네가 노인이냐?”
그 말에 나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칼은 푸른색 로브를 보고는 나와 똑같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내 옷을 보고는 곧 웃음을 지었다. 난 그 옷을 던져버리고는 선언 했다.
“절대로! 이 옷 이대로 가겠어요.”
“그러겠는가? 좋을 대로.”
길시언은 자기에게 주어진 옷을 보고는 한참 고민하는 표정이 되더니 역시 집어던졌다.
“자네를 따르지, 후치, 동생에게 예의를 지킬 필요는 없어.”
잠시 후 리핏 트왈리전은 네리아를 안내해 주고 돌아왔다. 그는 우리 모습을 보더니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샌슨과 아프나이델, 칼의 세 명은 새옷으로 갈아입고 점 잖게 기다리고 있었으나 나와 길시언, 그리고 엑셀핸드는 원래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입고 있었다. 리핏 트왈리전은 당황해서 질문했다.
“저, 세, 세 분은?”
엑셀핸드는 근엄하게 말했다.
“내 옷은 드워프 최고의 의복이오. 인간의 왕이 준 옷이라 해도 이 옷보다 더 품위 있고 예절 바르다 하진 못할 것이오.”
드워프의 노커의 말에 리핏 트왈리전은 뭐라 대꾸도 못하고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저, 전하……?”
“내가 궁에 있을 때 어떻게 입고 돌아다녔는지는 기억하지요?”
리핏 트왈리전은 거의 울 듯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묻기 전에 말했다.
“전하께서는 격의를 무척 싫어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평범한 옷을 입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번에도 서재에서 뵈었지요.” 리핏 트왈리전의 울 듯한 얼굴이 이번엔 노여움으로 바뀌었다. 그는 나를 한참 노려보다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성총은 물과 같아 사방으로 흘러가지만, 지나고 나면 흔적도 남지 않을 수 있다.”
뭔 말이지? 아, 이거군. ‘네가 아무리 공을 세웠다 해도 까불면 재미없다.’ 이 말인가 보네? 흠. 마음대로 하셔. 그렇다고 나에게 저런 유치한 옷을 입힐 수는 없지. 내 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거리자 리핏 트왈리전 씨는 말없이 몸을 돌려 우리를 안내했다.
밖으로 나와서 잠시 걸어갔다. 통로는 길고, 화려하고, 어쨌든 걷기 불편한 곳이다. 시무룩한 얼굴로 걸어가고 있는데 샌슨이 갑자기 말했다.
“자, 후치. 너의 확인이 필요해.”
“뭘 확인해 줄까?”
“저게 네리아 맞냐?”
우리가 걸어가는 복도 반대쪽에서 몇 명의 시녀들과 함께 걸어오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저게 네리아라고? 에이, 샌슨도 무슨 그런 말도 안, 안, 안… 맙소사. “난 확인해 줄 자격이 없을 것 같아.”
아이고 맙소사. 지금 바닥에 사르락거리는 드레스 자락을 끌고 걸어오는 저 여자가 네리아라고? 네리아는 우리 모습을 보더니 수줍게 웃었다.
어깨를 시원하게 파버린 드레스 위로 네리아의 살결이 잘 드러나 보인다. 약간 까무잡잡한 건강한 살결에 맞춘 것인지 드레스는 붉은 색이었고 그 색깔은 네리아의 머릿결과도 잘 어울렸다. 원래 날씬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저 드레스는 허리를 더욱 강조해 놓아 네리아는 숨을 쉰다는 것이 신기해 보일 정도로 가는 허리를 보여주고 있었다. 치마는 주름 장식을 해놓았는데 희한하게도 아래로 내려갈수록 진해져가는 검정색 세로 줄무늬를 넣어두었다. 그래서 네리아의 전체 모습은 아래: 검다. 허리: 가늘고 선명한 붉은 색이다. 어깨와 얼굴: 드레스 색깔 때문에 하얗게 보인다. 머리카락: 다시 붉다. 그래서 검은 산 위로 솟아오르는 아침 햇살처럼 그 얼 굴로 시선이 집중되도록 되어 있었다. 희한하게 멋진 배색인데.
“오, 네리아 양? 아름답습니다.”
칼의 찬탄에 네리아는 샐쭉 웃더니 곧 의아한 표정으로 날 보았다.
“후치? 넌?”
“으윽. 나도 데미 공주님께 찾아가는 건데. 데미 공주라면 훨씬 멋진 의상을 마련해 줬을 거예요.”
“옷이 마음에 안 들었어?”
“예. 뭐, 괜찮겠죠. 그런데 네리아 정말 예쁘네요?”
“헤헤헤. 얼굴 가득히 분칠을 했어. 기침이 나와 죽을 뻔했다고.”
샌슨은 근엄하게 평했다.
“지금이라면………… 범죄에 속할 만큼 예쁘다고 말해도 돼.”
“어머나? 샌슨까지? 호호호.”
네리아와 합류하고 나서 우리는 다시 걸어갔다.
궁성 임펠리아의 화려한 복도를 걸어가면서 우리 일행은 점점 기가 죽었다. 단 두 명, 그러니까 궁성이 자기 집이었던 길시언과 엑셀핸드만 빼놓고. 왜냐고? 생각해 보라.
걸어감에 따라 궁내부원들이 좌우로 좌악 갈라지면서 코가 땅에 닿으라고 인사를 하고, 마침내 장엄의 홀 가까이 들어가자 홀 바깥에 도열한 병사들이 일제히 발뒤 꿈치를 따닥! 소리가 나도록 부딪치고, 문이 좌우로 열리면서 순식간에 꽃이 뿌려지는 가운데,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트럼펫 소리가 빠바바빵바빠앙! 짜랑 짜랑하게 울리면서 그 엄청난 장엄의 홀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으아! 안 돼! 이럴 거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잖아!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옷을 입고 와야겠어!
농담이 아니다….. 장엄의 홀 설계자가 누군지 모르지만 정말 악취미하게 설계를 해두었다. 가운데 커다란 길은 홀 바닥보다 1큐빗 정도 높게 뻗어 있었다. 그래서 좌우에 도열한 문무백관들은 가운데를 걸어가는 사람들을 올려다보게 되어 있었다. 어느 게 문관복이고 어느게 무관복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쪽으로는 푸른 예복을 입고 있는 남자들이 좌악 도열해 있었고 다른쪽으로는 노랑색 예복을 입은 남자들이 도열해 있었다. 국왕의 면전이라 검을 휴대할 수 없어 그런지 문관복과 무관복은 구별할 수가 없었다.
위를 보자 더 미치겠다. 좌우의 벽에는 베란다가 설계되어 있었고 귀부인으로 짐작되는 여인들이나 처녀들, 또 다른 예복의 남자들이 베란다에 선 채로 우리를 내려 다보고 있다. 이런 지경이니 아래로도 시선을 못 두겠고 위로도 못 보겠다. 오로지 앞의 앞 사람의 뒤통수만을 바라보고 걸어가야 했다. 왜 앞의 앞 사람이냐고? 내 앞 엔 엑셀핸드가 걷고 있었으니까. 맨 앞에 걸어가고 있는 길시언과 칼은 어디다 시선을 보낼까?
우리가 걸어가는 길 앞쪽으로는 높은 단이 있었고 그 위에 왕좌로 짐작되는 의자가 있었다. 그 위에는 닐시언 전하가 곧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어쨌든 좌우의 그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걸어가려니 먼지와 땀에 절은 내 검은 옷들이 모조리 걸레 비슷하게 보였다. 좌우의 정장한 백관들이 날 보 며 수군거리는 것 같아 얼굴이 붉어진다. 호흡도 좀 가빠지는 것 같다. 젠장, 뭐야 이건? 겨우 스파이 하나 잡았다고(물론 엄청난 서류도 회수했지만) 이런 어마어마한 대 우라니? 우리는 모두 질린 채로 걸어갔다. 걷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았으니까.
중간쯤 걸어갔을 때 다시 한번 트럼펫 소리가 요란했다. 빠바바빵바빠앙!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잠시 주저했다. 그런데 트럼펫 소리가 울리자마자 좌우의 문무백관들이 모조리 정면으로 돌아보며 무릎을 꿇었다. 이거구나! 우리는 모두 부 리나케 무릎을 꿇었다. 아윽! 무릎이야! 그러나 엑셀핸드만이 무릎을 꿇지 않았다. 무릎을 꿇지 않아도 눈높이가 비슷했지만. 난 흘긋 옆을 돌아보았다. 네리아가 바 알개진 얼굴로 힘겹게 무릎을 꿇는 것이 보였다. 치마가 좌악 퍼지게 멋있게 무릎을 꿇는 것이 힘든 모양이다.
“일어나시오.”
고요한 장엄의 홀 가운데로 닐시언 국왕의 목소리는 잘 퍼졌다. 우리는 주저하면서 일어났고 주위의 신하들도 모두 일어났다. 잠시 소음이 들렸다가 다시 일시에 고 요해졌다.
“바이서스의 국왕이자 기사 중의 기사인 나 닐시언 바이서스가 그대들을 환영하오.”
뭐라고 대답하지? 우리 일행이 잠시 주춤했을 때 국왕의 옆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 하나가 의젓한 동작으로 문건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저 극악, 간교, 포악, 잔혹, 무도한 자이펀의 악도의 무리들이 천인공노할 사악의 손길로 지극, 지존, 지고, 지인, 지애로우신 우리의 국왕 닐시언 바이서스 전하께 서 한없는 성총으로 다스리시는 이 복된 땅 바이서스에 무도한 위해를 가하고자 한 전쟁이 벌어진 작금에 있어 가련한 백성들은 불안에 떨고 인심은 날로 흉흉해지며 가없는 폭력 행위와 불충한 반역 행위가 곳곳에 창궐하고 있음이 기왕의 현실이다. 보라. 이러한 현실에서 악행의 유혹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찾아옴이니 한때 누 대의 명문으로 대대손손 국왕 전하의 은혜가 함께한 절륜한 가문의 후손마저도 성총의 은혜 갚음을 도외시하고 저 극악, 간교, 포악, 잔혹, 무도한 자이펀의 악도의 무리들과 내통하려드는 비참한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오로지 의로운 자 있어 성총의 빛은 한없음을 되새기며 누대의 명문에 미거한 힘으로 대항하니 그들은 지극, 지존, 지고, 지인, 지애로우신 우리의 국왕 닐시언 바이서스 전하의 손길이 그들과 함께함을 알았기에 이토록 경이롭고 정의롭고 영광되며………….”
안 돼, 지금은! 지금은 졸면 안 돼! 하지만 조는 거나 다름없다. 극도로 긴장해 버린 귀에는 저 낭랑한 목소리가 들어오기는 하지만 하나도 이해되지 않는다. 말은 그 저 소리일 뿐이다. 아아아. 미치겠다!
…하니 …………해서 …………하므로 …………하나 .하지만 …………..하기 때문에 이왕의 사실은 명료하다.”
도대체 뭐가 명료한지 모르겠네. 그렇게 길게 말하니 명료하던 것도 불명확해지는 것 같잖아. “……이므로 …………이어서 ……………이지만 ……………이나 ………… 이기 때문에 더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맞아 맞아, 그렇게 길게 말할 수 있다는 것, 정말 놀랍기 짝이 없어.
난 발바닥이 가려워 미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만인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필사적으로 눈을 굴리는 것뿐이다. 그런 괴로운 시간이 어쩌면 영원히 계속될지도 모른다고 여기게 되었을 때쯤.
“그들을 찬양하라!”
느닷없는 문건 봉독자의 외침소리에 나는 기겁했다. 찬양하라고? 알았어. 그런데 그들이 누구지? 오우, 젠장! 열심히 들어둘걸. 에라, 무조건 찬양하자. 내가 팔을 반 쯤 들어올렸을 때였다.
“그대들을 찬양하오!”
좌우에서 열렬한 박수와 함성이 들려왔다. 우리들이구나! 난 들어올리던 손을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뒷머리로 가져갔다. 머쓱한 듯이 뒷머리를 긁는 가운데 닐시언 전하마저도 왕좌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을 보게 되었다. 닐시언 전하는 천천히 우리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주위의 박수소리가 높아가는 가운데 닐시언 전하는 우리들에게 걸어와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기 시작했다.
“칼 헬턴트. 그대는 나에게 놀라움을 선사하려고 바이서스 임펠에 오신 것 같소.”
칼은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조금 숙여 예를 표했을 뿐이다. 하지만 닐시언 전하는 힘차게 그의 손을 흔들다가 아예 그를 포옹해 버렸다. 칼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리고 닐시언 전하는 길시언의 손을 붙잡았다.
“형님. 야인으로 계시면서도 이 미력한 동생에게 무한한 은혜를 베푸시는군요.”
길시언은 씨익 웃으며 간단히 대답했다.
“전하. 감당할 수 없는 광영의 말씀이옵니다.”
닐시언 전하는 허리를 좀 숙이며 엑셀핸드의 손을 쥐었다.
“위대한 드워프의 노커, 엑셀핸드 아인델프여.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그 크나큰 우정, 길이 잊지 않을 것입니다.”
“천만에요. 바이서스의 왕이여.”
엑셀핸드 역시 간단하게 대답했다. 닐시언 전하는 이어 아프나이델에게도 인사했고 아프나이델은 긴장에 다리가 풀려버려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리고 닐시언 전 하는 네리아에게 살짝 무릎을 굽히며 손등에 키스했고 네리아는 발개진 얼굴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는 입속으로 뭐라고 조금 우물거렸다. 마지막으로 닐시언 전 하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헬턴트 영지의 초장이 후보 후치 네드발. 국왕에 대한 충성이 나이에 상관없음을 보여준 나의 사랑하는 백성이여.”
당신 나 사랑해? 미안하군. 난 당신 사랑하지 않아. 남자는 싫어. 그리고 우리가 한 일을 은근슬쩍 당신에 대한 충성으로 만들지 마. 우린 네리아를 위해 그렇게 했을 뿐이야. 나는 입을 열었다.
“영광이옵니다. 전하.”
젠장.
국왕님에 의해 우리는 모두 그럴듯한 칭호도 받고 상패도 받고 훈장도 받았다. 아이고 머리야. 그 동안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오로지 기억나 는 것은 거대한 사람들의 덩어리와 거기서 울려퍼지는 박수소리뿐이다.
간신히 그 복잡한 의례가 끝나고 우리는 식장을 빠져나왔다. 장엄의 홀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골치가 아파. 네리아는 다시 데미 공주에게 갔고 우리는 3층의 우리 회 의실로 몰려와 앉았다. 그러나 앉기가 무섭게 달려온 리핏 트왈리전 씨에게서 뜻하지 않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무도회?”
리핏 트왈리전 씨는 여러분들의 공로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저녁에 무도회가 열린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말도 안 돼. 돌아버리겠어. 칼은 이제 완전히 체념하는 얼굴 이 되었다.
“저녁 시간에요?”
“예. 그렇습니다.”
“꼭 참석해야 됩니까? 훈장 수여식에도 참석했는데………
“그러니까 이젠 보다 가벼운 자리에서 여러분들을 신하들께 소개해야지요.”
칼은 졸린 표정이 되었다.
“알겠습니다. 언제입니까?”
저녁 시간이 되어 우리는 다시 리핏 씨에게 끌려가듯이 내려가게 되었다.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과연 이번에야말로 눈 딱 감고 그 유치한 옷을 입어야 되는가? 난 결심했다. 역시 안 돼.
“무도회에 그런 복장으로 가려는가?”
“어차피 춤 못 춰요. 구석에 가만히 서 있다가 나올래요.”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내 생각도 그렇다네.”
홀에 이르렀다. 새하얀 벽에 화려한 장식들, 역시 화려한 복장의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사방에 풍족하게 쌓여 있는 음식물들과 중앙에 넓게 비워진 댄스장, 그리고 사방에 놓인 의자들과 한쪽에 몰려앉아 있는 악사들. 화려하군. 난 입을 벌리고 침을 질질 흘리지 않기 위해 무척 애써야 했다.
인사, 소개, 답례, 아이고 정신없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당하고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끌려다니며 인사를 하고 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소개받은 사람 중에 기억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칼은 품위 있게 미소를 지었고 나도 그러려고 애썼다. 샌슨과 엑셀핸드의 경우엔 별로 끌려다니지 않았다.
간신히 폭풍 같은 소개가 끝나고 나는 되도록 주의를 끌지 않도록 행동했다. 난 벽에 기댄 채 그야말로 멍청하게 서 있었다. 샌슨과 엑셀핸드는 죽이 맞아서 음식 테 이블로 걸어가 버렸고 아프나이델은 웬 귀족 처녀에게 이끌려가 버렸다. 아프나이델은 절망적인 얼굴로 자신은 댄스와 사이가 나쁘다는 것을 설명하려 했지만 설명 은 먹혀들지 않았다. 길시언과 칼은 그 모습을 아주 품위 있게 감상하며 각자 손에 든 술잔을 홀짝거렸다.
“시무룩한 얼굴이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고개를 돌렸고, 그 다음 휘파람을 불려다가, 곧 여기서는 그게 어울리지 않음을 깨닫고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네리아, 멋있어요.”
네리아는 이번엔 새카만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검은 드레스에는 금실로 정교하게 수놓아진 무늬가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었다. 네리아는 발그레해진 볼을 어쩔 줄 몰라하며 말했다.
“에헤헤. 데미 공주님 옷이야. 내게 맞게 하느라 시녀들이 몹시 고생을 했어.”
“데미 공주님은 키가 크니까…………. 그런데 딱 맞춘 것처럼 잘 어울리네요.”
“그러니? 고마워.”
곧 쟁반을 받쳐든 궁내부원 하나가 지나쳤고 네리아는 술잔 하나를 받아들었다. 그녀는 내 옆에 기대어서서는 춤추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네리아는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아아……………. 근질거려.”
그 말에 나와 길시언, 칼이 동시에 움찔했다. 이크! 그녀는 전문직 종사자이고, 여기엔 수많은 보석들과 장식물들이 춤을 추고 있다. 오, 하지만 여기선 안 돼. 들키면 그게 무슨 개망신이야? 그러나 네리아는 도발적인 눈으로 앞을 바라보며 날 불안하게 만들었다.
“도저히 못 참겠는걸?”
“제, 제발!”
“아냐. 견딜 수 없어. 자아, 가자구요!”
그러면서 네리아는 재빨리 잔을 내게 주면서 칼의 손을 잡아당겼다. 기습을 당한 칼은 영문도 모른 채 끌려나갔고 잠시 후 나와 길시언은 네리아와 칼의 춤을 보게 되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고 길시언은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의 춤을 평했다.
“괜찮은데. 칼도 의외로 스텝이 훌륭하군.”
나는 싱긋 웃으며 네리아가 건네준 잔을 들이켰다. 잠시 후, 음악이 끝나고 시종장의 낭랑한 목소리로 국왕 전하의 입장이 예고되었다.
나는 급히 허리를 숙이느라 자칫하면 술을 쏟을 뻔했다. 휴우. 다행이다. 술잔이 비어 있었다. 잠시 후 고개를 들었다. 으아, 아직 아니잖아? 나는 사람들이 아직 허 리를 숙이고 있는 것을 보고는 냉큼 다시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누군가가 내 등을 톡톡 두드렸다.
“후치? 그만 일어나.”
길시언이었다. 음. 이젠 들어도 되나? 고개를 들어보니 국왕 전하와 데미 공주가 입장해 있었다. 국왕 전하는 품위 있게 데미 공주의 손을 잡은 채 가운데로 들어왔 고 곧 음악이 다시 연주되자 두 사람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비 전하가 안 계셔서 공주님과 춤을 추는 건가요?”
“응. 그래. 저 녀석 왜 아직 장가가지 않았지?”
길시언은 간단히 대답했다. 난 국왕 전하와 데미 공주의 댄스를 구경하다가 그만 미소를 지어버렸다. 허허. 참. 닐시언 전하에 비해 데미 공주님이 너무 훤칠한데. 그리고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여전히 아프나이델이 절망의 끝에 도달한 인간의 표정으로 그 귀족 처녀에게 끌려다니고 있었다. 내 보기엔 그래도 칼과 네리 아의 커플이 가장 나은 것 같다. 키나 체격도 저 정도면 서로 어울리고, 칼의 품위 있는 스텝과 네리아의 맵시 있는 몸놀림도 잘 어울렸다. 아빠와 딸처럼 보이긴 하지 만 그것도 보기 괜찮은 요소였다. 길시언에게 물어보자 그도 내 의견에 찬성했다.
잠시 후 음악이 끝나고 칼과 네리아는 다시 걸어왔다.
“후와 칼 아저씨 너무 잘 추시네.”
“아니, 네리아 양에게 모자라는 솜씨라 힘들었을 거요.”
칼의 부드러운 답변. 그리고 조금 후 아프나이델이 초죽음이 된 얼굴로 걸어왔다. 아프나이델은 등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내게 물었다.
“후, 후치. 그 여자 아직도 날 보고 있냐?”
나는 아프나이델의 어깨 너머로 바라보았고 저쪽에서 그 귀족 처녀가 아쉬운 눈길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곧 아프나이델은 다음 음악이 들릴 때까지 사라지기로 결심한 모양이다. 그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달아날 곳이 없었다. 내가 ‘테이블 아래로 숨으면 어떨까.’ 등의 얼빠진 의견을 내 어 아프나이델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을 때 네리아가 그를 구원했다.
네리아는 손을 아래로 내리며 허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한 곡 추실까요, 메이지?”
이 바뀌어버린 남녀의 역할에 아프나이델은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저쪽의 그 처녀를 돌아보고는 곧 결심을 굳혔다.
“감사합니다, 레이디.”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걸어가 버렸다. 흠.
난 여전히 음식 테이블을 장악중이던 두 사람을 둘러보았다. 씩씩하군….. 궁내부원들은 울상이 되어 테이블에 음식이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 다. 고개를 다시 돌려보았다. 그러자 데미 공주가 우리들에게 다가와 있는 것이 보였다. 데미 공주는 길시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고, 그러자 길시언은 피식 웃어버렸 다.
“한 곡 추실까요?”
데미 공주는 살포시 드레스 자락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영광입니다.”
“요즘도 파트너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냐?”
“확인해 봐.”
난 웃으며 그 광경을 감상했다. 발을 걸어 넘어뜨리기는커녕, 두 사람은 아주 멋있게 춤을 추었다. 훌륭한걸? 난 칼에게도 평가를 내리게 하려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칼은 나와 조금 떨어져서 닐시언 전하와 함께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뭔가 낮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뭐지? 난 눈치채이지 않도록 다가가 볼까 생각했다. 그러나 곧 관둬버렸다. 이야기를 엿들어 봐야 뭐하겠어. 나중에 칼에게 물어보지.
난 다시 벽에 기대어 서서 주위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둘러보았다. 손에 든 술잔은 다시 궁내부원에게 넘겨주고 새 잔을 들었다.
갑자기 심사가 뒤틀리는걸. 여기다 아무르타트를 데려다놓으면 어떨까.
에이, 무슨 심술. 모두들 즐거운데.
아아아. 제미니. 네가 여기 있었더라면. 그럼 난 지금 저기서 우아하게 춤추고 있는 길시언과 데미 공주, 그리고 날렵하게 춤추고 있는 네리아와 아프나이델 모두들 한방에 보내버릴 정도로 멋진 춤을 출 텐데.
“무슨 말씀 나누셨어요?”
잠시 휴게실로 나왔을 때 칼에게 말했다. 칼은 지그시 날 바라보았다.
“닐시언 전하와 말인가?”
“all.”
“아. 대단한 건 아닐세.”
“전 대단치 않은 이야기가 좋아요. 충격이 적으니까.”
칼은 빙긋 웃었다.
“일스 공국에 파견될 사절을 맡아달라시더군.”
난 잠시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사절이라니, 사절? 칼은 너무나 평범한 표정이어서 난 내가 잘못 들은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한 번만 더 말씀해 주시겠어요?”
“일스 공국에 파견될 사절 말일세. 날더러 그걸 맡아달라고 하시던데.”
아무래도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난 얼빠진 표정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뭐라고 그러셨어요?”
“외교는 모른다고 했지.”
“잠깐만요. 이해가 되지 않아요.”
“뭐가 말인가?”
“왜 외교관이죠? 국왕 전하는 칼을 선전용으로 쓰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칼을 전쟁 영웅으로 만들고 동시에 칼을 등용시킨 국왕 전하의 위명도 높이고요.” “궁성에서 듣기엔 거북한 말이네만.”
“그런데 무슨 사절단이죠? 군사 쪽으로 가야 되는 것 아닌가요?”
“핸드레이크처럼 말인가? 참모라도 맡기지 않냐고?”
“예.”
칼은 빙긋 웃으며 아직까지 스승에 미치지 못하는 제자를 바라보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스승의 대답을 애타게 기다리는 제자의 표정을 지어보였다.
“자네도 내가 핸드레이크처럼 되길 원하는 모양이군.”
“그렇다고 보고.”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는 난세의 인물이야. 그러나 지금 바이서스는 체제가 굳건한 사회고. 함부로 나를 중요 군사관계에 임명할 수는 없다네. 군부의 반대 도 심각할 테고, 또한 귀족원의 반대도 만만찮겠지. 다행히 사절단의 자리라면 별 마찰 없이 내가 맡을 수도 있겠지. 그리고 내가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고 입지를 키 워나가면 차차 날 군사 관계로 끌고 가려는 계획이겠지.”
“휴우. 다 꿰뚫어 보시는군요. 그런데 반대를?”
“우린 할 일이 있잖은가.”
난 빙긋 웃으며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휴게실까지 들고 온 술잔을 조금씩 비웠다. 하여튼 술잔 하나를 잡으면 하룻밤을 샐 수 있다니까.
외교관이라. 흠. 칼이?
칼은 좀 쉬겠다고 말했고 그래서 난 칼을 내버려두고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어지러운 밤이군. 무도회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싫고, 음. 정원으로 나가볼까? 기억 을 더듬어 간신히 정원으로 나가는 길을 찾아내었다. 궁성 내의 궁내부원들은 모조리 무도회장 근처로 집결해 있어서 그런지 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정원까지 나섰 다.
밤바람, 시원하군.
이 계절에 풀향기를 맡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거야. 국왕님은 생각을 잘못했어. 좀 춥기는 하지만 가든 파티를 했어야 했어. 이 향취, 좋잖아. 난 가슴 깊이 풀내음을 빨아들였다. 우훗. 속이 다 후련하군.
난 아무도 없는 정원을 털레털레 걸어갔다. 어디 으슥한 곳을 찾아 앉아서 별이나 봐야지. 그런데 조금 걸어갔을 때였다. 저 앞 나무 옆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뭐 지?
“아프나이델이라고?”
응? 이게 뭐지? 난 조심스럽게 소리없이 그 나무 근처로 다가가 보았다. 어두운데다가 나무들이 방해가 되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들려온 목소리는 나도 잘 아는 목소리였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아프나이델의 목소리잖아? 그런데 스승님?
“돌아왔다면, 왜 내게 찾아오지 않았는가?”
잠깐, 이 목소리는 누구지? 에, 에…………… 아! 궁성 수비대장 조나단 아프나이델? 아프나이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찾아뵈려고 했습니다만………… 엄두가 나지 않아서.”
“못난 놈.”
“죄송합니다.”
“돌아온 이유는 뭐냐?”
“전…… 마법사였습니다.”
“다시 마나를 주물럭거리고 싶어졌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스승님. 용서해 주십시오!”
잠깐. 그러면 아프나이델이 말하던 그 스승님이 바로 궁성 수비 대장 조나단 아프나이델인가? 난 숨죽여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조나단이 천천히 말했다. “돌아왔으니 됐다.”
“스승님!”
조나단의 목소리는 따스했다.
“놈. 자식 이기는 부모 없고, 제자 이기는 스승 없다는 것을 알렸다? 돌아왔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과거는 불문이다.”
“스승님…….”
“그래, 네 방은 그대로 비워뒀다. 언제든 들어오너라.”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아프나이델이 말했다.
“스승님. 죄송합니다만 지금 당장은…….”
조나단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뭐냐? 과거의 미련이 남아 있단 말이냐?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다는 말인 게냐?”
“그게, 저, 그게 아닙니다. 전 지금 함께하는 동료들이 있습니다.”
조나단의 어조가 다시 차분해졌다.
“그래. 굉장한 모험가들과 함께 다니더구나.”
“예. 지금 전 그들과 함께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하냐? 무슨 일인데?”
“저, 그건 제 동료들에게 의향을 묻지 않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오냐. 알았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해서 네게 무슨 득이 있느냐?”
“제가 그들에게 득이 됩니다.”
“뭐라고?”
“그들 중에 한 소년이 있습니다.”
“안다. 후치라는 그 꼬마 말이냐?”
“예. 그 소년이 저에게 어떤 별명을 주었는지 아십니까? 톱메이지입니다.”
조나단의 가벼운 웃음소리. 아이고, 얼굴 뜨거워라. 아프나이델은 말했다.
“전 스승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미력한 재주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저의 이 미력한 재주를 훌륭히 쓰도록 기회를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그 소년은 고위 마법 이든 초급 마법이든 도움이 되는 마법이 최고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전………….., 전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대가를 바라지 않고 순전한 선 의로서 제 마력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아프나이델의 말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내가 조바심을 내려는 찰나에, 조나단이 말했다.
“네 방은 비워둘 테니 언제든 찾아오너라.”
“스승님!”
“마력을 다루는 것은 기술이다. 그러나 마법사는 기술자 이상의 무엇이어야 한다. 내 누누이 가르친 것인데도 네가 알지 못하더니, 날 떠나 그들을 만남으로써 네가 알아차렸구나. 나보다는 그들이 너의 스승이다. 그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노력해라.”
“알겠습니다, 스승님.”
난 히죽 웃고는 다시 조용히 몸을 돌려 궁성으로 돌아왔다.
아프나이델은, 그럼 그의 본명이 아니겠군. 그는 스승에 대한 애정이나 존경의 표시로 그 가명을 사용했던 거겠지. 본명이 뭘까? 에이, 알 게 뭐냐. 아프나이델은 아 프나이델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