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5권 – 제9부 :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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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봄날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주위는 따스했다. 모든 것이 부드러워 보였다. 난 눈을 비볐다. 이상한데. 분명히 아까 그대로의 차가운 대리석 건물인데. 하지만 지금은 그 위에 담쟁이 덩굴이 대롱 대롱 매달린 것처럼 보였다. 담쟁이 덩굴들은 따가운 오후의 햇살에 졸음을 참지 못해 축축 늘어지며 그 뽀송뽀송한 잎들을 한껏 펼치고 있다. 그리고 바람에 실리는 꽃향기가 느껴졌다. 숨막힐 정도로 짙은 향기가 폐부를 온통 씻어내는 것 같았다.
멀리 떨어진 녹색의 산으로 날아가는 새들의 모습이 보였다. 주위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들. 그리고 저 멀리 햇살을 머금어 반짝이는 시냇물은 터무니없이 아스라했 다. 반짝반짝하는 실을 들판에 대충 던져둔 것처럼 보인다. 꽃들 사이로 날아다니는 나비들의 움직임이 어지럽다. 그리고 덩굴풀이 가득 매달린 대리석 기둥 뒤에선 점잖은 사슴이 풀을 뜯고 있었다. 사슴의 순한 눈이 아름다웠다. 무장이라는 것은, 전쟁이라는 것은 모두 사라진 최후의 낙원에 돌아온 것 같았다.
드래곤 로드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하얀 옷을 입고 한없이 인자한 얼굴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즘 천국 사정이 어떠냐는 질문을 해도 아무도 이상 하게 여길 것 같지 않았다.
드래곤 로드는 말했다.
“당신은 따스한 마음을 가진 아가씨야.”
네리아는 가만히 선 채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주위의 모든 사물은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젠장. 왜 갑자기 이런 질투심이 느껴지는 거지? 아니, 질투 심이라기보다는 경외감에 가깝다. 난 네리아를 존경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세계는 그녀를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 네리아의 웃음에 새들이 노래했다. 네리아의 손짓에 꽃들이 피어올랐다. 네리아의 걸음걸음에 산들바람이 불었다. 여기에 이 루릴이 있지만, 솔직히 타오르는 붉은 머리를 흩날리며 경쾌하게 걷는 네리아는 이루릴보다 더 엘프다웠다. 아니, 그것은 실제의 엘프라기보다는 엘프의 좋은 점을,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엘프의 모습을 모조리 모아둔 것처럼 보였다. 엘프의 주위에선 나타나는 깊은 세월의 그림자들이 네리아에겐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영원 한 현재를 살고 있는 여신이었으며, 영원한 아이였으며, 영원한 주인이었다.
만물은 그녀를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 난 아무래도 네리아의 전속 초장이라도 되어야 할 것 같은데. 그리고 샌슨은 그녀를 위해 발 씻을 물이라도 대령해야 될 것 같 고.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기분 나쁘지 않은 일이다. 기분 나쁘기는커녕 어서라도 그렇게 해주고 싶다. 네리아의 웃음을 위해서라면, 네리아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해주고 싶은 기분이 든다.
네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덩굴풀에 뒤덮인 폐허에서, 드래곤 로드는 인자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에 남겠는가?”
당연하지! 드래곤 로드가 왜 저리 멍청한 질문을 다 하는 거야? 도대체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데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하다니, 존경받기는 어렵겠어? 당연히 이 현실을 영원히 고정시켜! 세상은 이렇게 되어야 해. 네리아를 위해서. 그녀를 위해서 존재해야 해. 이것이야말로 천국이야. 다른 것들은 다 거짓말이야. 환상이라구. 우리는 기어코 도착한 천국의 입구에서 네리아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요. 네리아. 이겁니다. 어서 대답해요.
그러나 네리아는 갑자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들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어마어마한 불안감을 느꼈다. 안 돼요. 네리아! 세상을 어둡게 만들지 말 아요. 이건 절대로 안 돼! 이 아름다운 세상을 버리지 말아요. 웃어줘요!
우리는 감히 그녀에게 명령을 내리진 못했다. 그래서 가슴이 죄어드는 불안감 속에서 우리의 여신이신 네리아의 안색만을 살펴보았다. 미칠 것 같은 세상의 거짓됨 이 느껴졌다. 안 돼, 안 돼요.
네리아는 말했다.
“싫어요.”
“싫다고?”
네리아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한숨을 쉴 때마다 우리는 가슴을 저미는 슬픔을 느꼈다. 안 돼요. 제발! 한숨을 쉬지 말아요. 네리아!
네리아는 이제 우물거리며 말했다.
“저, 음. 난 엘프가 아니에요.”
“엘프가 아니라구?”
“예. 어어……. 그러니까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나에게 조화를 이루는 이런 세상은…………. 저, 그러니까 나는 충실한 나이트호크예요.”
“충실한 나이트호크?”
“그래요. 음, 저, 그러니까 난 슬쩍할 수 있어야 돼요. 모든 것이 내 것이면 훔칠 수가 없는걸요.”
드래곤 로드는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네리아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말했다.
“저, 잘 설명하진 못하겠는데, 어쨌든 그래요. 예. 모든 것이 내 것이고, 모든 것이 날 위한 것이라면, 그건 삶이 아니에요. 제겐 그렇게 생각되어요. 이건 세상이 아 니라구요.”
“자넨 자네를 경멸하는 세상을 원하는가?”
네리아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굳이 말하라면, 예, 그래요. 날 싫어하기도 하는, 날 죽여버릴지도 모르는, 날 타락시키기도 하는 세상을 원해요. 난 역경과 고난이 가득찬 세상을 원해요.”
그런 지옥을 원하다니! 네리아, 도대체 제정신이에요? 우리는 모두 대경실색하여 창백한 얼굴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네리아는 이제 확신을 얻은 얼굴로 자 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 저에게 맞추어진 세상은 싫어요.”
다음 순간, 우리들은 다시 원래의 공간으로 돌아왔다.
주위는 차가운 물뿐이다. 아까보다 더 어두워진 것 같았다. 물은 이제 진파랑빛이었다. 차가운 대리석은 여전히 완벽한 건축미를 뽐내며 고고하게 서 있었다. 담쟁이 같은 것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드래곤 로드 역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지만 아까처럼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친근한 분위기는 없었다. 그는 드래곤의 제왕, 위 대한 드래곤 로드였다.
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굴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런 천국에 살 수 있었는데, 멍청한 네리아 같으니라구! 안타까워진 내 가 뭐라고 말하려 할 때 네리아는 히죽 웃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훔쳐내었다. 그리고 두 손을 뒤로 모으고는 고개를 살짝 꺾으며 드래곤 로드에게 미소지었다.
“드래곤 로드. 너무했어요.”
“그랬나?”
“예. 이건 샌슨에게 한 거보다 더 심하네요. 이잉. 이제 죽을 때까지 아까 그 장면을 잊지 못할 텐데. 허락하신다면, 당신이 밉다고 말하고 싶어요.”
네리아의 표정은 안타까운 듯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즐거웠다. 우리는 그제야 가슴이 통째로 날아가 버릴 정도의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건 아니었어. 그건 지나치게 아름다웠고 몸이 녹을 정도로 따스했지만,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선물은 아니야. 내 생각이지만 아마도 그건 엘프에게 주어 진 선물일 거야.
드래곤 로드는 날 돌아보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데?
“후치 네드발.”
“예.”
이제 무슨 질문을 할 것인지? 난 칼에게 도와달라는 시선을 보내었지만 칼은 지금까지와 똑같이 가만히 서서 날 바라볼 뿐이었다. 젠장. 나 혼자서 드래곤 로드를 상 대해야 되나? 난 드래곤 로드의 입이 벌어지기를 기다리며 내 맥박이 쾅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목구멍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와서 크게 기침이라도 해버리고 싶지만 그럴 배짱은 없었다.
드래곤 로드는 말했다.
“자네가 원하는 소원을 말해 보게.”
윽! 이건 또 무슨 질문이지? 난 주위를 돌아보았다. 칼은 약간 근심스러운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샌슨은 아랫입술을 크게 내민 채 날 바라보고 있었고 네리아 는 궁금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레인트는 씨익 웃으면서 대답이 기대된다는 듯한 얼굴이었고 이루릴의 얼굴은 설명하기 어려웠다. 다만 불편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자, 이거, 머리가 아파오는 질문이로군.
“그러니까, 제가 원하는 소원이오?”
“그렇다네. 말해 보게.”
사실대로 말해야 되나? 난 침을 삼켰다.
“에, 그러니까 레니를 되찾고 여기서 나가는 거요.”
드래곤 로드는 의아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대답을 잘못했나?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칼만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나를 알겠 지. 나는 자신을 되찾았다.
“그것뿐인가?”
“그것뿐이라니요? 그것 하나를 위해 나우르첸에서 여기까지, 영원의 숲을 지나서 카르엔 드래고니안까지 들어왔는데요.”
“자네 평생의 소원을 듣고 싶네만?”
“예? 그런 거 없어요.”
“없다고?”
“예. 아직 평생을 다 살아보지 못해서 평생의 소원이 뭔지 모르겠어요.”
드래곤 로드의 눈이 갑자기 깊어지는 듯했다. 몸이 조금씩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거 짜릿하군. 뭐라고 말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난 계속 말해 버렸다.
“레니를 만나기 전에는 그런 소원이 없었어요. 그리고 레니가 납치당하지 않았다면 역시 그런 소원은 없었겠지요. 하지만 레니는 납치당했고, 그리고 그녀는 중요해 요. 그래서 여기까지 왔어요. 드래곤 로드께서 저에게 어떻게 질문하신다고 해도 전 요 며칠 동안의 절 부정할 수는 없어요. 요 며칠 동안의 전 그것 하나를 위해 달려 왔고, 그리고 지금 여기 서 있는 거니까.”
숨이 가빠져서 말을 멈추었다. 난 호흡을 고르며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젠장. 이건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와는 너무 다른데. 표정의 변화나 분위기의 변화 같 은 것이 대화에 있어서 이렇게 중요한 것인지는 몰랐군. 도대체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때 드래곤 로드가 말했다.
“자네에겐 그 소녀, 레니가 중요한가?”
“예…………, 그래요.”
드래곤 로드는 싱긋 웃었다. 평범한 대화에서라면,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서라면 미소를 짓는 것은 퍽이나 대화에 도움이 되는 행동이겠지만 지금 드래곤 로드와의 대화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결정하게. 레니와 자네 둘 중의 하나만 나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예?”
“레니와 자네 둘 중에 하나는 카르 엔 드래고니안에서 생명을 끝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네. 그러니 선택하라는 것이야.”
순간 울화가 치밀어오르면서 떨림은 사라져버렸다.
나는 차분히 그를 바라보았다. 드래곤 로드는 내 변화가 이상하다는 눈치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굳어버린 내 얼굴을 보는 모양이다. 이거 괜찮은 기분이 군. 좋아. 내가 말할 테니 잘들 들어보라구.
“드래곤 로드. 아까부터 거의 비슷한 질문을 해오시는데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느리시군요.”
“느리다고?”
“아까부터 이런 질문이에요. ‘너와 다른 무엇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맞지요? 제레인트도 대답했고 샌슨도 대답했고 네리아도 대답했어요. 그런데 나에게까지 같은 것을 묻는 겁니까?”
“그렇다네. 그렇다면 자네의 대답은 무엇인가?”
“당연히 레니를 내보내라는 거지요.”
“이유는?”
난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자, 진정해. 진정하라구. 난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낮고 차갑게 말했다.
“내가 나가면 난 죽는 것이지만 레니가 나가면 난 사는 거니까.”
드래곤 로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칼만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그 끄덕임은 내게 힘을 주었다. 난 말했다. “레니가 나가지 않으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요. 예, 그래요.”
“그래? 하지만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이지 자네가 죽는 것이 아니잖은가.”
난 한심한 기분이 들어버렸다.
“이런 말을 언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군요. 지금 그 말이 생각나고, 또 좋은 대답이 될 거라고 생각되어서 말씀드리니까 잘 들어보세요.”
드래곤 로드가 이 말을 알까?
“나는 단수가 아니다.”
드래곤 로드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나는 질겁했다. 그렇군. 그는 알고 있었군. 드래곤 로드는 차갑게 말했다.
“그 간악한 녀석의 말이로군.”
드래곤 로드의 목소리의 울림은 스산했다. 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예.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에요. 당신이 아까부터 우리 일행에게 던져온 질문, 아마 당신은 우리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셔서 그렇겠지요. 무례하다고 꾸짖지 않으시 겠다면 설명드리겠습니다. 나는 하나가 아니에요. 따라서 당신은 아까부터 얼빠진, 죄송하지만 이렇게밖에 표현이 안 돼요. 예. 얼빠진 질문을 하고 있었던 셈이지 요.”
가슴이 쾅쾅거리는걸? 다행히도 드래곤 로드는 초장이의 맛이 어떨지 심사숙고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는 차분히 말했다.
“나의 실수를 설명해 주겠나?”
“당신은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눠놓고는 선택하라고 질문하셨어요.”
“나눌 수 없는 것?”
제레인트는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고 네리아는 두 손을 꽉 쥔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샌슨은 파랗게 질려 있었고 이루릴은 무표정했다. 하지만 칼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요. 당신은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어서 질문하셨어요. 당신 보시기에는 나눌 수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우리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드래곤 로드께서 는 샌슨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지요.”
샌슨은 덜커덩 하는 소리만 내지 않았을 뿐 그 외에는 심장이 내려앉은 사람의 모든 징후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주고는 계속 말했다. 손바닥에 땀이 나는걸? 난 슬쩍 그것을 바지에 닦아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으면서 말했다.
“샌슨의 가족들을 죽이겠는가, 샌슨을 죽이겠는가. 조금 달랐을지 몰라도 대충 그런 의미였지요. 하지만 그건 나눌 수 없어요.”
“어째서지?”
“샌슨은 하나가 아니니까. 샌슨은 헬턴트의 경비 대장 샌슨이고, 나의 좋은 동료 샌슨이고, 샌슨의 아버지 조이스 씨의 사랑하는 장남이에요. 칼의 신뢰받는 길잡이 이고, 그리고 그 아가씨에게는 사랑하는 연인인 샌슨이에요.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샌슨이지요. 이런 식의 이야기도 들어보셨겠지요? 어쨌든 당신은 샌슨 하나를 살려 주는 대신 그 가족들을 죽이겠다고 말했지만, 그 가족들을 죽이면 샌슨도 죽는 셈이에요.”
난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 이마에 열기가 올라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도저히 말을 멈출 수가 없다.
“그래요. 그 모든 것이 샌슨이에요. 당신이 헬턴트 영지를 파괴하면 헬턴트 경비 대장 샌슨은 죽는 셈이에요. 당신이 날 죽인다면 후치의 동료 샌슨을 죽이는 셈이구 요. 당신이 조이스 씨를 죽인다면 조이스 씨의 아들인 샌슨은 죽는 셈이에요. 당신이 칼을 죽인다면 칼의 길잡이 샌슨이 죽지요, 그리고, 그리고 그 아가씨를 죽인다 면 그 아가씨의 연인인 샌슨을 죽이는 셈이라구요.”
“샌슨은 하나가 아닌가?”
난 기가 막혀서 고함을 빽 질러버렸다.
“하나가 아니에요!”
그러곤 곧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계속 다물 수가 없었다.
“영원의 숲, 영원의 숲 아시죠? 거기서는 자신이 자신을 죽이게 되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지요?”
드래곤 로드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건 안다만, 그것이 이 이야기와 어떤 상관이 있는지 말해 주겠나?”
“나가면 그 사람은 사라져버려요! 나라는 존재가 아무리 남아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잊어버리게 되면 그 사람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아직까지 그걸 모르 세요? 나라는 것은, 나라는 것은 이 몸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구요.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모든 것들에 다 내가 있어요. 그것이라구요! 그 모든 것을 모았을 때 내가 있는 거라구요. 우리는 그렇게 살아요. 그것이 인간이에요!”
말을 마치고 나자 숨이 찼다. 너무 흥분해 버렸나 봐. 난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냈다. 지금 누군가 나에게 차가운 냉수 한 잔만 준다면 그를 위해 노래 100 곡을 바치겠어. 농담이 아니라구.
드래곤 로드는 침울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랬군…………. 그럴 거라고 짐작했지. 이제야 확신을 얻게 되었군.”
드래곤 로드는 뭔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거기에는 감히 끼어들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우리는 모두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너희들은 혼자가 아니로군.”
드래곤 로드는 스스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이 나와 너희들의 차이였군. 그래서 루트에리노는 그렇게 나에게 달려들 수 있었군. 자신이 죽어도 그의 나머지들은 다른 인간들에게 남아 있을 테니. 그리고 핸드레이크는 그렇게 무모할 수가 있었군. 그의 나머지 역시 다른 인간들, 그를 아는 인간들에게 남아 있을 테니까.”
드래곤 로드의 입술이 조금씩 올라갔다.
“너희들이야말로 불사의 생명이었군………. 하, 하하하, 핫하하하……”
드래곤 로드는 곧이어 온세상이 뒤흔들릴 정도로 웃었다.
“아핫하하하하!”
우렁찬 웃음소리. 천지가 울리는 웃음소리였다. 나는 갑자기 너무도 행복해져 버렸다. 샌슨을 돌아보니 온 얼굴로 웃고 있었다. 네리아의 눈은 꿈결 같았고 제레인트 는 이미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그것은 온세상의 웃음이었다.
“핫하하하하하!”
드래곤 로드는 그렇게 세계와 함께 웃었다. 우리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웃었다. 너무도 유쾌했다. 정말 이렇게 웃어보는 것은 태어나고 처음인 것 같았다. 칼마저 도 얼굴을 형편없이 일그러뜨리고 있었고 우리는 그 얼굴을 보며 다시 숨이 막히도록 웃었다. 이루릴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큭큭거렸다. 아름다웠다.
드래곤 로드는 마침내 웃음을 멈추고는 미소를 띤 채 말했다.
“300년 만에 대답을 얻었군. 내 패배의 원인을 이제야 알게 되었군.”
칼은 눈물을 닦더니 숨을 고르려 애썼다. 그는 한참 후에야 그런 대로 정중하게 말할 수 있었다.
“드래곤이여…………, 당신은 혼자서 오롯한 생물이십니다.”
우리들도 서서히 웃음을 멈추며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아랫배가 당겨서 제대로 설 수도 없었다. 드래곤 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난 하나인 생물이지. 다른 피조물에 투영된 나 같은 것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네. 그래서 나의 죽음은 나라는 것 전체의 파멸이지.”
“당신은…………, 너무도 오랜 시간을 존재하는 분입니다. 당신에게 선사된 그 무한한 시간은 당신 개인만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지요. 그러 나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나누고 서로에게 자신을 건네야 됩니다.”
드래곤 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자네들에게 내려진 선물일세. 그리고 나에겐 다른 선물이 내려진 것이고. 하지만 이제 서로의 선물을 비교하지는 마세나. 자네는 이미 이해했고, 나도 이제 야 이해했네. 하지만 그 두 가지의 경중을 논하는 것은 우리들 중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
드래곤 로드의 온화한 목소리에 칼은 겸손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조금 전의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아니야. 잘못은 나에게 있네. 이미 말했지만 자네는 이미 날 이해했고 난 그렇지 못했으니 그런 고약한 말들을 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험들을 내어야 했지. 그 래. 장난치는 짓거리였지. 용서해 주게.”
드래곤 로드는 수염을 쓸어내렸다.
“자네들의 반응을 바라보는 것은 나에게 대단한 신비를 주었네. 이해할 수가 없었지. 하지만 후치 군. 자네의 대답에서 비로소 난 해답을 얻었네. 드래곤 로드의 이 름으로 감사하지.”
“아, 예. 하하. 당연, 아, 아니, 저, 음, 천만 부당한 말씀입니다.”
평소의 날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건 도저히 내가 한 대답이라고 생각지 못할 것이다. 윽. 난 간신히 그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지만 드래곤 로드는 그저 웃었다. 그는 우리 모두를 돌아본 다음 점잖게 말했다.
“자네들을 내보내 주겠네. 자네들과의 시간은 무척이나 즐거웠다네.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군.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이곳은 자네들에게 허락된 장소는 아닐세.”
칼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해합니다. 저, 그런데 그 소녀와 다른 일행들은 어디 있습니까?”
“그 소녀와 나머지들은 모두 대미궁 밖으로 보냈다네. 제레인트에게 물어보니 그들은 동료가 아니라고 하더군. 난 이 장소에서 싸움이 이는 것은 원하지 않았네. 그 래서 그들은 내보내고 자네들만을 만나기로 했지.”
칼은 안타까운 모습으로 혀를 찼다.
“할 수 없지요. 주인은 자신의 집에서 무엇이든 마음대로 하실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자는 이곳에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아마 다시 들어올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자네는 그의 목적을 아는가?”
“아니오. 모릅니다.”
드래곤 로드는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그의 목적을 안다네. 그는 휴리첼 가문의 사나이였지?”
“예? 아, 예. 그렇습니다. 어떻게 아시는지요?”
“나는 카뮤 휴리첼이라는 사람을 알지. 그와 같은 기운이 느껴지더군.”
칼은 눈을 크게 떴다.
“카뮤 휴리첼을 어떻게 아십니까?”
“카뮤 휴리첼은 크라드메서의 라자였지. 나는 드래곤 로드이지 않은가.”
“아………, 그렇습니까? 그럼 저, 그가 왜 이곳에 들어왔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드래곤 로드는 칼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혼잣말처럼 말했을 뿐이다.
“거대한 불은 거대한 불씨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자는 우둔한 자겠지. 덤불 깊은 곳에 숨겨진 미약한 불씨, 입김으로도 꺼뜨릴 수 있는 불이 온 세상을 태울 수도 있겠지.”
드래곤 로드는 그냥 그렇게만 말한 다음 다시 우리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자는 다시는 오지 못할걸세. 걱정하지 말게나.”
칼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를 이만 나가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자를 뒤쫓아야겠습니다. 시간을 많이 낭비하게 되었습니다만, 거기에 대한 사과를 받는 것은 관두겠습니다.” 드래곤 로드는 쓸쓸한 얼굴로 말했다.
“시간…………, 난 그것도 이해할 수 없다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마음의 모습이야.”
칼은 빙긋 웃었다.
“말씀드렸다시피 그것이 우리의 선물입니다.”
“그래. 그 무모해 보일 정도의 발걸음, 참으로 무섭군. 자네 덕분에 핸드레이크의 악몽을 다시 꾸게 되겠군. 그렇다면 나가보게. 시간을 빼앗은 데 대해서, 그리고 내 게 해답을 준 것에 대해서 선물을 하고 싶군. 내 창고에서 내키는 것이 있다면 가져가도 좋네.”
칼이 대답하기도 전에 네리아가 먼저 펄쩍 뛰었다.
“예엣?”
그녀는 비명처럼 고함을 질렀다가 곧 움츠러들면서 말했다.
“저, 저,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 그런데 정말요? 정말 마음대로 가져가도 돼요?”
“가져갈 수 있는 만큼 내키는 대로 가져가게.”
“고맙습니다!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네리아는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태세였다. 칼은 정중히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 모든 일이 끝나면 다시 들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눈에 확연히 확인될 정도로 빛이 줄어들었다. 드래곤 로드의 하얀 옷은 이제 청회색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주위의 물빛도 좀더 어두워졌다. 약간 떨어져 있는 드래곤 로드의 안색을 살피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는 인간에게 내려진 선물 같은 것은 받지 못했다네.”
순간 칼은 굳어버린 얼굴로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드래곤 로드는 빙긋이 웃고 있었다. 이제 그의 얼굴은 생동감 없는 바위가 아니었다. 그는 웃고 있었 고, 그 웃음은 밝았다.
칼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드래곤 로드여.”
드래곤 로드는 빙긋 웃었다.
“관두게. 관둬. 자네도 나도 어울리지 않아.”
그러자 칼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대화는 내 눈에는 꼭 여든 살 먹은 노인 둘이서 장난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해 맑게 웃는 모습, 아무런 욕심도 욕망도 없이, 그런 것들은 모두들 잊어버린 채 장난스럽게 말을 나누고 있는 늙은이들처럼 보였다.
칼은 뜻모를 말을 했다.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
“고맙군.”
그때 이루릴이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그녀는 조용히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드래곤 로드는 이루릴에게 고개를 돌렸다. “할말이 있는가, 숲의 딸이여?”
이루릴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차분하게 말했다.
“두 분의 대화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만 그것은 칼 씨에게 물어보면 되겠군요. 저에겐 당신께서 대답해 주실 수 있는 질문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핸드레이크는 어디에 있습니까?”
드래곤 로드는 말없이 이루릴을 바라보았고 이루릴의 검은 눈 역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드래곤 로드는 위엄 있게 말했다.
“그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모든 것을 다 잃은 가련한 자에게.”
“클래스 10의 마법을 원합니다.”
드래곤 로드의 눈이 꿈틀거렸다. 그는 말했다.
“자네들은……, 이제 결심했는가?”
“그렇습니다.”
“알았네. 유피넬의 어린 자식이여. 헬카네스는 어디다 열쇠를 숨기는지 짐작해 보게.”
이루릴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를 만나고 나서 지금처럼 환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환한 얼굴이었다.
“정녕 그러합니까?”
“그렇다네.”
“감사합니다. 영광의 드래곤 로드여.”
드래곤 로드는 빙긋 웃었다. 그는 손을 들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우리 모두가 고개를 돌리자 기둥들 사이로 빛의 판들이 죽 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이 바닥에서 시작하여 위로 일정한 간격으로 떠 있었다. 마치 계단 같은 모 습이었다.
드래곤 로드는 더 이상 말할 태세가 아니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에겐 작별의 말이란 필요 없는 모양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들 모두는 그저 목 례를 보낸 다음 각자의 배낭을 들어올리고는 천천히 빛의 계단쪽으로 향했다.
나는 다시 한번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떠나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지 않고 가만히 다른 장소를 응시하고 있었다. 난 고개를 돌려 계단을 밟았다.
물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조금도 젖지 않았다.
우리는 빛의 계단을 밟고 올라섰다. 그것은 위로 나선을 그리며 뻗어 있었다. 숨을 쉴 수 있었지만 물 속에 있다는 것 때문인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 없이 올라갈 때였다. 맨 뒤에서 오던 제레인트가 말했다.
“없어지네?”
고개를 돌려보니 우리가 지나온 계단들은 하나씩 희미해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 어두운 물 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계단의 끄트머리에 서 있었다. 그때 난 숨을 깊이 들이켜고 말았다.
저 아래의 호수 바닥에 거대한 황금의 용이 잠들어 있었다.
황금의 드래곤은 아찔할 정도로 거대했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한참 돌려야 그 끝에서 끝까지를 볼 수 있었다. 마치 우리가 개미가 된 채로 사 람을 바라보는 기분이다. 거무튀튀한 물 속에서 황금색은 그렇게 빛나지 않았지만 그것 때문인지 더 거대함이 느껴졌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황금의 드래곤은 그 거체를 호수 바닥이 모자랄 정도로 눕힌 채 웅크리고 있었다. 잠든 것처럼 보였다. 소란을 일으켜 그의 잠을 방해하는 것은 세상에 다시 없이 무 례한 일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두번 다시 그를 돌아볼 생각을 못한 채 재빨리, 그러나 조용히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마치 제왕의 침실에 무례하게 침범한 시 종 나부랭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우와, 떨려.
계단을 올라감에 따라 주위는 더욱 어두워졌다. 캄캄할 정도였다. 꽤 멀어졌을 거라고 생각되어 난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렸다.
드래곤 로드의 모습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윤곽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없이 거대한, 그러나 과거에 속하는 무엇이 거기 있었다. 우리의 시간엔 존재할 수 없는 위대 한 존재가 희미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갑자기 지독하게 슬퍼졌다.
물 밖으로 나오게 되자 이루릴은 먼저 윌로위스프를 불러냈다. 우리들이 서 있는 곳은 중앙 호수의 옆길이었다. 마지막으로 제레인트가 올라오고 나자 빛의 계단은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다시 물은 검은 거울처럼 바뀌었다. 하지만 난 잊지 못할 것 같다. 저 아래에 잠들어 있는 그를.
곧이어 네리아는 팔짝팔짝 뛰면서 동굴이 무너질 듯한 환성을 올렸다. 그녀는 곧 한쪽 방향으로 무서운 속도로 달려갔다. 물론 복수의 방, 화렌차의 방이었다. 칼은 머쓱하게 우리를 바라보더니 곧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흠, 허흠. 침버 씨. 가실까요?”
“그러시지요. 칼.”
제레인트도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하게 말한 다음 둘은 곧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순결의 방, 그랑엘베르의 방으로 총총히 사라져버렸다. 난 어깨를 으쓱거리다가 샌슨에게 말했다.
“음. 선물을 챙기는 것은 천천히 하고, 우리 왼쪽의 방에 가볼까?”
“아. 그러지.”
그리고 샌슨은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웃으며 우리와 함께 걸었다.
왼쪽에 있는 방들은 각자 파괴, 폭풍, 불이라고 적혀 있었다. 따라서 각자 레티, 에델브로이, 카리스 누멘의 이름을 말함으로써 들어갈 수 있었다. 검과 파괴의 레티 의 방은 무기고였다. 온갖 종류의 무기들과 갑옷, 방패 등이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해괴한 무기들도 많았고 아무리 보아도 사람의 무기로는 보이지 않는 무기들도 있었다. 우리는 혹시나 마법검이 없나 싶어서 검들을 쥐어보았지만 잠시 후 포기하고 말았다. 아무리 쥐어봐도 쥐자마자 떠들기 시작하는 무기가 없었을 뿐만 아니 라, 검만 잡아본다고 해도 며칠은 걸릴 정도로 무기가 많았다. 게다가 이루릴이 말하기로 모든 마법검이 프림 블레이드처럼 떠드는 것은 아니라는 거였다. 샌슨은 입 맛을 다시더니 말했다.
“뭐, 난 헬턴트 경비 대장이고, 영주님이 주신 롱소드면 충분해.”
샌슨이 그렇게 말하고 나자 나도 별로 할말이 없어졌다. 이제껏 죽어라고 휘둘러대어 간신히 이 바스타드에 익숙해졌는데 다른 무기로 바꿀 생각을 하니 앞이 노랗 다. 더군다나 나야 무기의 성능보다는 OPG에 더 기대는 놈이니 좋은 무기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래서 이루릴이 화살을 좀 챙긴 다음, 우리들은 그 방을 나섰다. 폭풍과 코스모스의 에델브로이의 방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레너스 시에서 보았던 아프나이델의 지하 연구실을 떠올렸다. 이루릴은 내 생각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곳은 마법 연구실이군요.”
우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라서 멀뚱히 서 있다가 잠시 후 괴상하게 생긴 도구들을 붙잡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이루릴은 마법책으로 보이는 책들과 스크롤 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지만 얼마 있지 않아 그것들을 다 내려놓았다.
“이건 300년 전의 마법 체계로군요. 너무 오래되어 별로 필요없는 것이에요.”
이루릴은 몇 개의 약병과 스크롤만을 가지고 나왔다. 우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마지막 방으로 향했다.
마지막 방인 드워프와 불의 카리스 누멘의 방은 아무리 보아도 연장실이었다. 가지가지 도구들과 연장들이 놓여 있었다. 굴 파는 데 쓰일 듯한 도구가 가장 많았지만 그외 각종 공사에 다 쓰일 만한 도구들이 있었다. 망치나 곡괭이, 톱, 드릴, 집게, 지렛대, 가위나 펜치 등등의 공구들. 엄청나게 많은 밧줄과 철사, 못, 나사들과 도르 래, 기중기, 용도를 알 수 없는 온갖 해괴한 도구들이 다 있었다. 그 웅장한 연장의 천국에서, 나는 랜턴 하나를 들고 나왔다. 횃불이 있긴 하지만 내가 골라든 랜턴은 인간의 것보다 월등히 좋아보였다. 아무래도 드워프제인 것 같은데? 방 한구석에서 기름통을 찾아서 기름을 채우고 불을 붙여보니 과연 찬란한 불빛이 주위를 밝혔 다.
“이루릴, 이제 윌로위스프를 돌려보내세요.”
우리는 랜턴 불빛을 받으며 다시 우리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칼과 제레인트는 참으로 가여운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이 노릇을 어찌 한다…………. 참으로 고약한 지경이군………….”
칼은 그렇게 한탄했고 제레인트 역시 한숨을 푹푹 쉬어대고 있었다. 책이라는 것은 썩 부피가 나가는 물건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들고 다닐 수 있는 책의 수효는 그 렇게 많지 않다. 따라서 이 거대한 도서관에서 들고 나갈 수 있는 만큼의 책을 고르라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 가혹한 형벌이었던 모양이다.
네리아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보석들이라는 것은 책에 비하면 월등히 부피가 작다. 하지만 무게라는 면에서는 책보다 더 심했다. 네리아는 내가 들어서자마자 날 붙잡고는 모든 상자를 꺼내도록 명령했고, 그래서 나는 상당한 중노동을 해야 되었다. 마침내 칼이 들어와서 넥슨을 빨리 추적해야 된다고 말하고 나서야 네리아 는 마지못한 얼굴로 다이아몬드들을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잠시 후 네리아의 주머니는 터져버렸고 그래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보석들을 옮겨가기 위해 나와 샌슨이 카리스 누멘의 방에서 가죽 주머니들을 찾아왔다. 칼은 대충 주머니 하나를 채우더니 말했다.
“이 정도면 10만 셀이 될 거야.”
그리고 칼은 주머니 하나를 더 채워서 가졌다.
“이 정도면 죽을 때까진 쓰겠군.”
나머지 사람들도 각자 챙겨들었다. 이루릴은 보석들에 별로 관심이 없는 모양인지 여비로 쓸 금화만 약간 가졌다. 제레인트는 희희낙락한 얼굴로 가죽 주머니들을 채워들고는 말했다.
“이 정도면 하이 프리스트도 기절하실 거야. 하하하! 대미궁의 침입자 제레인트. 그의 전설의 증거가 되겠지?”
나와 샌슨도 욕심껏 보석들을 챙겨들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모두 허리가 휘청할 정도였다. 샌슨은 무조건 큰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부피에 비해 가짓수가 많지 못했 지만 그래도 엄청난 보물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네리아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그녀는 칼이 헛기침 소리를 심하게 낼 때까지 고르고 골라서는 부피가 작으면서도 가장 값비싸 보이는 보석들만을 골라가졌다. 그랬어도 그녀는 가죽 주머니 열다섯 개를 채우고야 말았으며 지금 배낭을 들어올리지 못해서 울상이 되어 있었다. 칼은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몇 개 덜어내시오.”
네리아는 그만 울어버릴 듯했다. 그래서 내가 한숨을 쉰 다음 내 배낭과 그녀의 배낭을 바꿔들 것을 제안했다. 네리아는 기뻐 날뛰며 내게 키스를 퍼부어대었다. 우리들, 특히 네리아가 그토록 보물들을 가졌지만 방 안에 남겨진 보물들에는 덜어낸 흔적도 없었다.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로 많은 보물이다. 네리아가 차마 떨어지 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놓은 것은 칼의 무수한 잔소리가 있은 다음의 일이었다.
어쨌든 우리들은 가까스로 다시 수로로 돌아왔다. 랜턴 불빛을 받으며 밖으로 나오는 길은 고달픈 길이었다.
아, 물론 모두들 평생 쓰고도 못다 쓸 보물을 가졌고, 게다가 나나 샌슨, 칼의 경우에는 우리 여행의 원래 목적까지 완수했다. 아무르타트에게 줄 보석을 장만한 것이 다. 도대체 생각도 하지 못한 장소에서 생각도 하지 못한 방법으로 얻게 되긴 했지만 어쨌든 이제 우리 아버지, 그리고 영주님, 게다가 다른 병사들 모두의 목숨은 건 지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레니를 아직 되찾지 못했고, 따라서 우리의 여행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아무르타트에게서 풀려난 다음 크라드메서에게 죽게 된다면 결국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허리가 너무 아파서 고달팠다. 거의 가진 것이 없는 이루릴은 가볍게도 걸어갔지만 칼이나 제레인트의 경우엔 책들의 무게
때문에,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보석의 무게 때문에 모두들 허리가 아파서 낑낑거렸으며 특히 네리아의 엄청난 배낭을 짊어진 나는 OPG를 끼고 있어도 죽을 맛이 었다.
폭포 소리가 가까워지면서 간신히 수로 입구로 돌아오게 되었다. 앞쪽에서 점점 발갛게 불타오르는 동그라미가 보였다. 걸어감에 따라 점점 붉어지는 동그라미는 황 혼의 하늘이었다. 돌아나온 것이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게다가 물살도 사납게 쏟아져 우리가 타고 내려온 밧줄은 허공에 흩날리고 있었다. 이루릴은 실프를 불러내어 밧줄을 우리 쪽으로 끌어왔다. 이 루릴이 먼저 올라가고 나서 칼, 제레인트, 네리아가 올라갔다. 또 우리 둘이 마지막으로 남았군. 으으…………, 그런데 내려왔을 때보다 훨씬 불안한걸.
“이거 참. 배낭이 무거워서 밧줄이 끊어지지나 않을지 모르겠네.”
내 혼잣말에 샌슨은 파랗게 질려버렸다.
밧줄은 끊어지지 않았지만 올라가는 것은 내려올 때보다 훨씬 힘들었다. 게다가 벌겋게 타오르는 절벽을 밟고 올라가려니 눈앞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절벽에 휘 몰아치는 바람은 내 몸을 그대로 날려버릴 것 같았다. 배낭 때문에 어깨가 뒤로 처지고, 들어올리는 팔은 너무도 힘들었지만, 밧줄에 끝은 있었다. 난 절벽 위로 올라 왔다.
절벽 위에선 이미 일행들이 모여앉아 내게 팔을 내밀어주었고 난 칼과 제레인트의 도움을 받아 쉽게 올라왔다. 그리고 난 숨을 좀 고른 다음 아래로 고함을 질렀다. “샌슨! 밧줄을 몸에 묶어!”
그리고 나는 배낭을 내려 둔 다음 밧줄을 위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후치! 칼!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영주님! 나의 님이여!”
아래에서는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지만 난 상관하지 않고 밧줄을 끌어당겼다. 그런데 그 비명소리 웃기네. 웬 사람 이름들을 저렇게 불러대는 거야? “날 잊지 말아요!”
밧줄을 놓을 뻔했다.
이윽고 샌슨의 모습이 절벽 위로 나타났다. 샌슨의 얼굴은 석양의 하늘 아래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샌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 로 절벽 위에 주저앉아 버렸다.
우리는 할슈타일 저택의 폐허에 주저앉아 이글이글 타오르는 해가 지는 모습을, 그리고 반대편으로부터 영원의 숲 위로 어둠이 내리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높은 지 대에 앉아 있어 하늘은 끝없이 광막했다. 그 광막한 하늘 전체가 더 붉은 색을 찾을 수 없도록 붉어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영원의 숲에 밤이 찾아들었다.
“오늘이 며칠이지?”
칼의 뜬금없는 질문이다.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대미궁에서 잠을 두 번이나 잤더니 오늘이 정확하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어제 아침에 대미궁에 들어가고……………, 오늘은 11월 19일입니다.”
“그래요? 음. 저 아래에서 몇 년을 보낸 것 같은 느낌이 들더니.”
그리고 우리는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숲을 굽어보았다. 발 아래로는 폭포의 물소리가 땅을 울렸고 바람은 사방으로 치닫고 있다. 짙어가는 밤하늘에 별이 떠올랐다.
한없이 많은 별이었다. 이 높은 절벽 위에서 나는 세상에 우리 일행만 남겨진 채 수없이 많은 별들을 바라보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말했다.
“드래곤 로드…………. 직접 만나보았지만 아직 감상이 정리되지 않는군요.”
칼은 피식 웃더니 말했다.
“드래곤 로드는 태양이지.”
우리는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칼의 말은 조용히 이어졌다.
“그는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고, 그리고 그의 빛은 무서울 정도로 세계를 비추지. 그는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와 권능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그는 바라볼 수 없 는 존재이며, 그 빛을 강요하는 존재야. 그는 자신의 빛 때문에 오히려 다른 어둠을 바라보지 못하지. 그는 너무나 위대하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말했다.
“루트에리노 대왕은?”
칼은 여전히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달이지.”
“달이오?”
“우리가 어둠을 걸어갈 때 달은 우리를 비추지. 그의 빛은 똑바로 바라볼 수도 있고, 바라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지. 그는 만물을 다스릴 정도로 위대하진 않을지 몰 라도,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조력이 되고 희망이 되는 존재였지.”
“……우리는요?”
네리아의 약간 가냘픈 목소리였다. 칼은 빙그레 웃었다.
“우리 말이오?”
“예. 우리, 뭐, 예. 우리요.”
“우리는 별이오.”
“별?”
“무수히 많고 그래서 어쩌면 보잘것없어 보일 수도 있지. 바라보지 않는 이상 우리는 서로를 잊을 수도 있소. 영원의 숲에서처럼 우리들은 서로를, 자신을 돌보지 않 는 한 언제라도 그 빛을 잊어버리고 존재를 상실할 수도 있는 별들이지.”
숲은 거대한 암흑으로 변했고 그 위의 밤하늘은 온통 빛무리들뿐이었다. 칼의 말은 이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바라볼 줄 아오. 밤하늘은 어둡고, 주위는 차가운 암흑뿐이지만, 별은 바라보는 자에겐 반드시 빛을 주지요. 우리는 어쩌면 서로를 바라보는 눈동자 속에 존재하는 별빛 같은 존재들이지. 하지만 우리의 빛은 약하지 않소. 서로를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빛을 뿜어내지.”
“나 같은 싸구려 도둑도요?”
네리아의 목소리는 슬프지 않았다. 그리고 칼의 대답도 평온했다.
“이제는 아시겠지? 네리아 양. 당신들 주위에 우리가 있고, 우리는 당신을 바라본다오. 그리고 당신은 우리들에게 당신의 빛을 뿜어내고 있소. 우리는 서로에게 잊혀 질 수 없는 존재들이오. 최소한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이상은.”
어둠 속에서 네리아의 눈이 별처럼 아름답게 반짝였다. 나는 혹시 반짝인 것은 그녀의 눈물이 아닐까 따위의 생각은 관두기로 했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밤하늘을 바 라보았다.
내가 바라보자, 별들은 나에게 빛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