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5권 – 제9부 :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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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5권 – 제9부 :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 2화

2

난 주의 깊게 바라보며 말했다.

“샌슨이 남긴 신호겠지요?”

“다른 추측을 하긴 어렵겠군. 하지만 뜻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은데.”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무에는 누군가 칼로 급히 새긴 자국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곧은 길을 쭉 따라오다가 산 속에서 갈림길을 만났고, 그래 서 양쪽 중에서 어디로 갈까 제레인트에게 물어보려고 했다. 그때 이루릴은 밤에도 보이는 그 눈으로 이 자취를 발견한 것이다.

나무에는 ‘S-R’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샌슨 씨가 루미너스가 질 때 여기를 지나갔다는 말인 것 같군요.”

우리는 놀란 눈으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허헛? 정말 그럴 듯한데?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은 새벽녘이니…………, 한두 시간 전에 지나갔다는 말이군요. 좋습니다. 계속 달려갑시다.”

제레인트는 기진맥진한 얼굴이었지만 칼의 말을 듣자마자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샌슨 씨는 아무런 장비도 준비도 없이 떠났으니, 빨리 따라가야겠습니다.”

“이랴아!”

산으로 다가감에 따라 비바람은 차차 멎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밤새도록 비를 맞으며 달려온 우리 일행은 새벽녘의 살을 에는 추위에 모두들 무섭게 떨고 있었다. 지속적으로 뺏긴 체온은 어디서도 보충되지 않았다. 해가 뜨면 좀 나을까. 그러나 겨울밤은 길었다.

고원을 넘고 산등성이를 타고 돈다. 끝없이 펼쳐진 낮은 산들. 주위에는 몇 아름도 넘어보이는 거대한 나무들이 기둥처럼 서 있어 하늘엔 지붕이 펼쳐진 것 같다. 그 러나 그런 거대한 숲 속에까지도 빗방울은 사납게 몰아치고 있었다.

나뭇잎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의 소리가 날카롭다. 우리는 숲을 지나 조금 높은 지형에 올라섰다. 끝없이 펼쳐진 고원. 수목 한계선 위로 올라왔나 보다. 우리는 어찔 어찔한 산등성이를 따라 달렸다.

시선이 몽롱해진다. 주위의 나무들과 풀, 산등성이들이 밤하늘과 엉겨버려 윤곽을 잃고 있다. 들려오는 소리는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와 연속적으로 계속되는 말발 굽 소리.

다가닥다가닥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손발의 감각은 점점 사라지고 난 아무데서도 나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지독한 밤이 흘러가고 있었고 흔들리는 주위의 환상. 우리를 제외하고 주위의 세계 전체가 마구 흔들리고 있었고 그 흔들리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암흑의 허공을 쉼없이 느릿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다가닥다가닥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후치! 정신 차려!”

네리아의 날카로운 고함소리. 난 퍼뜩 정신을 차렸고, 덕분에 급한 산비탈로 달려가던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미칠 것 같은 밤이다.

네리아가 외쳤다.

“칼 아저씨! 안 되겠어요. 여기서 멈춰요. 비 맞으면서 너무 오래 달렸어요.”

칼은 잠시 멈추더니 다시 고개를 저었다.

“저 산등성이까지만 올라갑시다.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안 돼요, 이 상태로선…………. 무리라구요.”

“넥슨도 마찬가지일 거요. 그도 더 이상은 달려가기 힘들 테지. 퍼시발 군도 그렇고. 그러니 조금만 더 무리합시다. 퍼시발 군이 이 상태에서 아침을 맞이하기는 쉽 지 않을 거요.”

네리아는 할말이 없어졌다. 저것은 평소의 칼이 아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절대로 수용하지 않으며 달려갔다. 그 단호한 인도에 따라 우리는 보슬비가 흩뿌려 지는 밤의 숲 속을 달려갔다. 온몸은 이제 뻣뻣해져 더 이상 습기는 습기가 아니었고 주체할 수 없이 떨리던 몸도 더 이상 떨리지 않게 되었다.

간신히 우리는 주위보다 조금 높은 산등성이까지 올라섰다. 모두들 힘에 겨워 말에서 뛰어내렸지만 칼과 이루릴은 여전히 주위를 돌아다녔다. 잠시 후 칼은 돌멩이 하나를 주워들었다.

“이게 무슨 뜻이지?”

칼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도 않는다. 난 간신히 고개를 들어올려 칼을 바라보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멩이를 들여다보는 칼의 모습이 마구 흔들리는 것을 깨닫고 는 머리를 힘없이 떨구었다. 그때 이루릴의 근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을 피우죠.”

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모두들 체온을 너무 많이 빼앗기셨군요.”

그러곤 이루릴은 칼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는 주위의 나무를 모으기 시작했다. 폭풍우 때문에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가득 널려 있었다. 네리아는 땅바닥에 앉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제레인트는 하얀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위에 기대앉아 있었고, 난 앉지도 못한 채 허리를 꺾어 무릎을 짚은 자세로 헉헉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루릴과 칼 두 명이서 나뭇가지를 모았다. 칼은 나뭇가지를 주워모으면서 말했다.

“넥슨이 가까이 있다면 불을 피우는 것은 위험할 텐데.”

“불을 피우지 않으면 더 위험할 것 같아요.”

“……알겠소.”

두 사람이 모아온 나뭇가지를 쌓아놓고, 이루릴이 샐러맨더를 불러내어 불을 피웠다. 이 지독하게 젖은 나뭇가지들에 불이 붙는 것이 신기했다. 난 없는 힘이나마 내 어 네리아를 부축해 불가로 옮겨와서 앉혔다. 모두들 우울한 얼굴이 되어 불가에 모여앉았다.

칼은 불가에 앉아서 자신이 발견한 돌멩이를 보여주었다. 거기엔 반반한 돌멩이 표면을 칼끝으로 긁어 만든 것 같은 자취가 나 있었는데 ‘SH’라고 적혀 있었다. 샌슨 도 정말 답답하군. 이게 무슨 뜻이지?

“퍼시발 군은 군대 암호를 사용하지 않았군. 우리들이 그걸 읽을 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하지만 이건 정말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난 쾅쾅 울리는 것 같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샌슨이 여기 있었다..”

“그게 적당할 것 같기는 한데.”

그때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여기 멈춰라.’ 하는 뜻이야.”

우리는 황급히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샌슨이 서서 씨익 웃고 있었다.

“샌슨!”

네리아는 힘없이 웃었다. 샌슨은 약간 낮은 산등성이에서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때 태양이 떠오르며 주위는 환하게 바뀌었다. 샌슨은 태양빛을 받으며 정상 에 올라왔다.

샌슨의 옷은 완전히 젖어버린 데다가 무엇에게 걸려 찢어졌는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산기슭을 급하게 달리느라 그렇게 된 모양이다. 팔다리에도 곳곳에 상처가 나 거나 흙이 묻어 있거나 했다. 하지만 샌슨은 그저 조금 피로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일어나지도 못한 채 그를 맞이했다.

“샌슨? 괜찮아?”

“그런 대로.”

샌슨은 싱긋 웃으며 앉았다. 우리는 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칼에게 설명했다.

“넥슨과 그의 종복은 저 앞쪽 산 너머에서 야영중입니다. 레니는 몹시 지친 것 외에는 별일 없어 보였습니다. 야영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훌륭하네, 퍼시발 군!”

“뭘요. 지독하게 피곤하긴 하지만…………. 다른 분들도 모두 많이 지쳐 보이는군요.”

칼은 뭔가 물어볼 것이 많다는 얼굴이었지만 자신을 억제하며 말했다.

“자네, 우선 옷부터 어떻게 해야겠네. 짐 안의 마른 옷을 꺼내어 갈아입게나. 그리고 다른 분들도 모두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읍시다.”

잠시 후, 옷을 들고 조금 떨어진 수풀로 걸어갔던 이루릴과 네리아가 돌아오자 칼은 본격적으로 질문했다. 네리아와 나는 모포 속으로 들어가 머리만 내놓은 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그래, 납치범은 그 둘뿐인가? 넥슨과 그 말없는 종복?”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넥슨과 그 마부 녀석을 따라 저 앞의 산을 넘어갔는데 거기서 다른 녀석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략 20여 명 되는 무리들이 캠핑 준비까지 해놓 고서 그들을 기다리더군요.”

“이런…….”

“넥슨은 레니를 그 녀석들에게 넘겨주고는 잠들었습니다. 그 마부 녀석도 마찬가지고요. 둘 다 밤새도록 비 내리는 산속을 달려서 대단히 힘들어하더군요. 레니 역 시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저는 우선 돌아와서 아까의 그 표시를 남겨두었습니다. 혹시 뒤따라 오는 여러분들이 거기까지 다가왔다가 들킬까 싶어서였지요.”

“아아, 그런가?”

“예. 그리고 다시 돌아가서 그 녀석들을 정탐했습니다. 무슨 특징이 될 만한 기장이나 계급장, 장식 등은 없이 모두 제멋대로에 가까운 복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 아 정규군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최소한 단체 생활을 하던 놈들은 아니더군요. 지휘 체계도 보이지 않고 엉성했습니다. 지금 그들은 그저 캠핑 준비를 하는 것 외에 다른 활동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넥슨이 일어나면 무슨 활동에 들어갈 모양입니다.”

“그래? 흠. 정말 수고가 많았네, 퍼시발 군. 어디 보자. 정규군이 아니지만, 어쨌든 일단의 무리가 넥슨을 따른다는 말이지. 그는 바이서스 임펠의 길드 마스터였으니 까, 어쩌면 도둑 길드 쪽의 인원일지도 모르겠군.”

모포 속에서 엎드려 있던 네리아가 팔 위로 힘들게 머리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아아……, 그럼 제가 가서 보면 되겠어요. 음냐. 여기서 멀어, 샌슨?”

“산을 넘어가니까.”

“죽을 각오를 해야겠네.”

칼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푹 쉬고 움직입시다. 넥슨은 몰라도 나머지 무리들은 별로 피곤하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게다가 20여 명이나 되는 많은 인원이니 섣불리 다가가는 것도 고려할 일은 못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지요?”

“퍼시발 군. 자네 생각에 그들이 오늘 내로 움직일 것 같던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짐은 별로 없이 모두 개인 물품을 지니고 있더군요. 그래서 움직이려고 들기만 한다면 당장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런가. 음. 골치 아픈 일이군.”

나는 힘들게 고개를 들어 말했다.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놈들은 갈색 산맥으로 향하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네드발 군.”

“그렇다면…………, 그들의 방향을 아니까 계속 따라가다가 밤에 기습하지요. 그래서 레니를 구출하는 겁니다. 어떻든 낮에 그들을 습격해서 레니를 빼내오는 건 어려울 테니까.”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낫겠군. 여기서 갈색 산맥까지의 거리는 꽤 되니까…………. 좋네. 어차피 우리는 레니 양을 갈색 산맥으로 데리고 가려 했으니 방향이 틀려지는 것도 아니군. 추적 을 계속하면서, 적당한 기회를 노리도록 하세나. 하지만 저들이 갈색 산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갈 경우도 생각해 봐야겠어.”

그러자 이루릴이 말했다.

“제가 어떻게 감시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제레인트도 쇠약한 목소리로나마 유쾌하게 말했다.

“테페리의 프리스트는 레인저만큼 빠르지는 못하지만 레인저보다 정확한 추적자입니다.”

칼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예. 엘프의 눈은 별빛 아래에서도 수천 큐빗 떨어진 지빠귀와 박새를 구별한다 했지요. 게다가 테페리의 가호가 함께하시니 우리는 길을 어긋날 염려도 없겠군요. 음. 일단 여기서 피로를 풀고 추적을 계속합시다. 그런데 우리는 급하게 달려와 여행 준비가 퍽 부실하군, 그래.”

“제가 조사해 보겠습니다. 쉬십시오.”

샌슨은 그렇게 말하고 곧 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대단한 철골이야. 난 좀 부끄러웠지만 도저히 쏟아지는 졸음을 어쩔 수 없었다. 진저리를 치고 나서 곧 잠에 빠 져들고 말았다.

타이번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가 보이세요?”

타이번은 피식 웃어버리더니 내 귀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그는 내 얼굴을 자기 얼굴 옆에 바짝 붙이더니 시선의 방향을 일치시키고는 말했다.

“임마, 하늘이 보이냐?”

“보이죠.”

“난 안 보인다. 하지만 내가 볼 수 없다고 해서 하늘이 없겠느냐?”

아무르타트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점잖게 꼬리를 깔고 앉더니 그 기다란 목을 우아하게 휘어서는 타이번의 반대쪽 볼에 얼굴을 가져다대어 역시 시선의 방향을 일치시켰다.

“보이는군.”

그래서 나와 타이번과 아무르타트는 얼굴을 나란히 한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박쥐로 변한 시오네가 하늘을 날아가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뭐해?”

그녀는 망연히 위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타이번은 시오네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난 박쥐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박쥐가 없겠느냐?”

아무르타트는 브레스를 확 뿜어 시오네를 떨어뜨렸다. 시오네는 잘 구워진 박쥐 구이가 되어 떨어졌다. 난 말했다.

“박쥐가 안 보이는데요?”

타이번은 당황한 얼굴이 되더니 다시 그 허연 눈을 하늘로 향했다.

“야! 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저기 박쥐가 있지 않아?”

“안 보여요.”

타이번은 턱을 긁적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군.”

아무르타트는 고개를 갸웃했다가 다시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와 타이번, 그리고 아무르타트는 얼굴을 나란히 한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크르르릉!”

굉장한 콧김 소리를 내며 크라드메서가 하늘을 날아갔다. 타이번은 하늘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크라드메서가 날아가는데요?”

내가 말하자 타이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보이면 없는 거야.”

“없다고요?”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거야.”

“아버지는 보이지 않아요. 그렇다면 난 아버지가 없나요?”

“그렇지.”

아무르타트는 씩 웃더니 역시 브레스를 확 뿜었다. 그러나 크라드메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크르르릉!”

“크르르릉!”

눈을 떠보니 크라드메서가 아니라 샌슨이 코를 골고 있었다. 샌슨은 내 모포 속에 들어와 열렬한 동작으로 날 껴안은 채 잠들어 있었고 난 몸부림을 쳐 간신히 그의 포옹에서 벗어났다. 으으으! 아무래도 앞으로 사흘은 재수가 없을 것 같다.

네리아는 내 모습을 보더니 낄낄 웃었다. 그러고 보니 칼은 나무에 기대어 자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도 아직 잠들어 있었다. 하늘을 보니 해가 흘끔흘끔 서쪽을 곁 눈질하는 시간이었다.

“일어났어?”

“저 상태에서 네리아라면 잘 수 있겠어요?”

“나? 좋지. 까르르르. 샌슨도 괜찮은 남자니까. 어젯밤엔 정말 멋지지 않았어?”

“아, 샌슨이 멋지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겠는데, 난 남자라구요!”

네리아는 히죽히죽 웃더니 불 위에 얹어둔 주전자를 들어올렸다.

“차 마실래?”

“예.”

나와 네리아는 찻잔을 든 채로 주위에 펼쳐진 고원과 산악을 바라보았다. 산 정상의 지독한 바람에 난 옷깃을 끌어올렸다. 주위는 온통 헐벗은 나무들이 끝없이 펼쳐 진 고원과 산의 분수령들. 사방 어디를 보아도 산이고 산이며 산이다. 우리 위치가 꽤나 높은 모양인데. 난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물 구하기 어렵겠는데. 물통이 어떤지 모르겠어요.”

“아, 걱정 마. 샌슨은 물통도 다 채워놓고 잠든 거니까.”

“그래요? 흐음. 역시 멋지네.”

난 잠들어 있는 샌슨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곤 곧 얼굴을 굳히며 외면하고 말았다. 이를 바악바악 갈아대며 잠들어 있는 샌슨을 바라보며 미화된 정서를 불 러일으킨다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난 불길을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이런 산 정상에서 이렇게 불 피우면 엘프가 아니라도 누구나 볼 수 있을 텐데.”

“할 수 없지, 뭐. 이렇게 싸늘한 날씨인데 불 피우지 않고 견디다간 동사할 거야.”

그건 그렇군. 난 갑옷을 꿰어입고 검을 바싹 당겨놓았다.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가 아파왔다. 난 머리를 가로저으며 요리 도구를 꺼내었다.

“모두들 어젯저녁부터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달려왔으니………….”

“흐음. 기대할 테니 만들어봐.”

“빈말로라도 좀 도와주겠다고 하면 안 될까요?”

“내가? 요리? 싫어. 잘하는 사람이 해라.”

네리아는 날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내가 밀가루를 반죽하는 동안 네리아는 멀리 고원을 스쳐 지나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어제의 지독한 날씨는 온데간데없 고 하늘은 희푸르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얼음장 같은 하늘이다.

달그락. 떼구르르.

난 실수로 그릇 하나를 걷어찼고 굴러가던 그릇을 주워든 네리아는 날 바라보았다. 난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니가 걱정되는군요.”

네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릇을 도로 집어던졌다. 내가 그릇을 받아들자 네리아는 말했다.

“할 수 없지. 넥슨에게도 레니는 소중한 사람이야. 그러니 별일은 없겠지.”

“그렇긴 하지만……………. 지금 얼마나 불안하고 무서울지.”

네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난 다시 말했다.

“이런 말 우습지만, 우리가 그녀를 찾아가기 전까지 그녀는 그야말로 행복했겠지요. 세상은 단순했고, 아마 즐거웠겠지요.”

네리아는 미간을 좁히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펼쳐진 산을 바라보았다.

“어지러운 세상에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순 없어.”

콰당, 풀썩.

“이, 이런 내가 졸았군…………….

나무에 기대앉아 자고 있던 칼의 목소리다. 나와 네리아는 고개를 돌려 칼을 바라보고는 빙긋 웃었다.

“졸다니요? 저언혀. 완전히 잤다고 말해야 되지요.”

칼은 겸연쩍게 머리를 가로젓더니 하늘을 보고는 크게 당황했다.

“이런! 벌써 이렇게 늦었다니. 안 되겠군, 모두들 깨워요들.”

“아니, 잠깐……. 먹을 건 먹고 움직이지요. 나 요리 끝날 때까지만 모두 자게 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칼은 눈을 비비며 내 프라이팬을 바라보더니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주게. 네드발 군.”

칼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멀리 산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멀리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다리 옆에선 네리아가 무릎을 모으고 앉아서 역시 비슷한 시선으로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치이이익.

“음? 냄새가 난다.”

말과 함께 샌슨이 몸을 일으켰다. 웃음밖에 안 나오는걸. 잠시 후 이루릴도 일어나더니 잠에 취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흐으음. 잘들 잤어요?”

그러나 제레인트는 끝까지 모포 속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몹시 흔들어 깨워야 했다. 제레인트는 이를 사납게 부딪치며 말했다.

“멋지군요. 눈을 뜰 때 요리가 준비되어 있다니. 그리고 식후엔 아마도 격렬한 추격전이 준비되어 있겠지요? 어쩌면 목숨이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는. 하하! 음식 맛 나겠어요.”

칼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샌슨은 콧김을 핑핑거리며 음식을 쑤셔넣었다.

즐거움보다는 그 실용적 의미에의 접근에 보다 더 주안점을 두었던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런 말 없이도 재빨리 짐을 챙겨 말에 올랐다. 샌슨은 원기 왕성하게 앞장을 섰다. 수목 한계선 위에까지 올라왔기 때문에 주위는 그저 짧은 풀이나 노출된 흙들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고원 지형을 따라 앞으로 죽죽 나아갔다. 말들이 아직 지쳐 있었고 주위의 풀들도 말들 먹기엔 별로 좋지 않다는 점이 문제였다. 말도 황소처럼 풀만 먹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서는 길시언처럼 황소를 타 는 것이 더 나을까나?

“조만간 마을에 들르긴 해야겠군요.”

“레니를 구출하고 나서 가지.”

“그래야죠.”

우리는 힘차게 30분쯤 달려갔다. 오른쪽 멀리로는 넓게 펼쳐진 황야가 아스라하게 보였고 왼쪽으로는 까마득한 준령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사이로 작은 구릉을 넘 어가면서 샌슨은 말없이 손을 들어 속도를 늦추도록 지시했다.

“마구 노출된 지형이니 척후가 있다면 곤란해.”

우리는 말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갔다. 구릉 정상을 넘어서자 샌슨은 곧 혀를 찼다.

“제길! 벌써 출발했군.”

그리고 샌슨은 다시 말에 올라서 달려 내려갔다. 우리들도 그 뒤를 따랐고, 잠시 후 우리는 거대한 침엽수림이 형성된 숲을 따라 내려가다가 계곡 사이에 위치한 공 터에 내려설 수 있었다.

공터 주위를 돌아보며 샌슨은 혀를 찼다. 우리들도 우울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불 피운 자리라든지 풀 베어낸 자리 등이 보였고 천막을 쳤던 것으로 추측 되는 말뚝 자국도 보였다. 네리아는 불을 피운 자리로 걸어가더니 돌을 만져보았다.

“온기가 약간 남아 있는데. 그렇게 많이 지나지는 않았을 거야.”

“어디로 향했을까?”

이루릴은 눈을 깜빡이더니 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우리가 달려온 방향과 반대쪽이다.

“풀들이 꺾였고, 그리고 비 때문에 발자국도 잘 남아 있군요.”

이루릴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과연 젖은 흙 위에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숲 사이로 난 길, 아마도 짐승의 길이 아닌가 싶은 험한 길이었다. 험하다 해도 이 거대한 숲 의 아래쪽에는 관목이나 잡목 등이 거의 나 있지를 않아서 걸어다니기엔 수월해 보였다. 칼은 물었다.

“퍼시발 군. 그들은 말을 이용하던가?”

“아니오. 말은 넥슨과 그 마부 녀석이 타던 것뿐이더군요.”

“좋아. 그러면 따라잡을 수 있겠군. 갑시다, 여러분.”

다시 숲 사이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산 가운데 있다고 믿기엔 신기할 정도로 평탄한 길이어서 말들을 가볍게 달리게 하는 것은 간단했다. 다시 말없는, 그러나 숨가 쁜 추적이 계속되었다.

지붕처럼 펼쳐진 나뭇가지와 잎들 사이로 간혹 광선이 내리비추는 것 이외엔 숲 속은 대체로 컴컴했다. 어두운 숲 속의 검은 나무들은 묵묵히 선 채 지나가는 우리들 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커튼처럼 늘어선 광선들은 곧고 날카롭게 어둠을 절단하고 있었다. 숲 속에서 스며나오는 특유의 산뜻한 내음. 그리고 단속적으로 들려오는 말

발굽 소리. 우리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변함없이 일정한 속도로 달려가는 동안 속도감은 상실되어 사라져버렸다. 달리는 것인지 서 있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도대체 얼마나 지났을까.

“이상하군. 잠깐 멈춰볼까.”

칼의 말이었다. 우리 모두는 조용히 멈추었다. 칼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해가 보이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방향이 이상해. 우리가 바이서스에서 여기로 넘어오는 동안 이런 수해(樹海)를 보았던가?”

수해라. 그러고 보니 정말 끝도 없는 숲이군. 아까 식사를 하던 산봉우리만 해도 헐벗은 산들뿐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샌가 끝도 없이 거대한 숲 속에 들어와 있 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거의 동시에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고 칼이 그 불안감을 간단하게 말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지?”

이런 맙소사.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있다. 방향도 모르겠고 위치도 모르겠다. 샌슨은 안간힘을 써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분명 나우르첸에서 서쪽으로 달려왔습니다. 에, 바이서스 쪽으로 향해 오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네리아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아냐. 햇살의 방향이 이상해.”

“햇살이 이상하다고?”

“지금 이 시간에 우리가 서쪽으로 달려가고 있다면, 햇살은 정면 쪽에서 우리에게 뻗어와야 돼.”

어라? 우리는 머리를 들어 숲 속으로 내려꽂히는 광선의 각도를 바라보았다. 광선은 모두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북쪽으로 달려가고 있었어?”

우리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제레인트는 황급히 말했다.

“잠깐, 중간에 다른 길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는데요? 우리는 곧장 달려왔는데.

“아, 분명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발자국 방향이 그대로인데?”

“그렇다면 넥슨은 북쪽으로 가고 있다는 말이잖아?”

“갈색 산맥으로 가는 것이 아니야?”

우리는 모두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넥슨을 계속 따라간다 해도,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끝까지 따라갈 수야 없다. 나우르첸 을 떠날 때 워낙 급하게 떠났기 때문에 우리 짐 속엔 보급품도 별로 없다. 그때 이루릴이 말했다.

“일스의 북쪽엔 뭐가 있지요?”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고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일스의 북쪽엔 뭐가 있지? 그러다가 우리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모든 사람이 자신 을 바라보자 잠시 당황하다가 말했다.

“어, 어. 일스의 북쪽에는 헤게모니아가 있지요. 영원의 숲 너머로…….”

제레인트는 갑자기 입을 딱 벌렸다. 그는 질린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네리아가 동그래진 눈으로 말했다.

“영원의 숲?”

“어라? 잠깐, 북쪽이라고 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영원의 숲 쪽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제레인트는 얼빠진 얼굴이었다. 칼이 질문했다.

“영원의 숲이 무엇입니까?”

제레인트는 얼빠진 얼굴로 주위를 둘러볼 뿐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칼은 한 번 더 질문해야 했다. 제레인트는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더듬더듬 말했 다.

“예? 아, 예. 그건, 그건 드래곤 로드와 핸드레이크의 맹약으로 영원히, 영원히 존재하기로 된 숲입니다. 핸드레이크는 다레니안을 치료하는 대가로 그 숲을 드래곤 로드에게…….”

“잠깐, 뭐라구요!”

칼은 비명 비슷한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 대부분이 마찬가지였다. 우리들이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자 제레인트는 그제야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만요. 여러분들은 모른다는 말입니까?”

“예? 아, 예. 모릅니다. 핸드레이크와 드래곤 로드의 맹약이라니요?”

제레인트는 기가 막히다는 얼굴을 하고선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허허, 이런 바이서스 분들이 핸드레이크의 이야기를 일스 사람에게 묻는다는 말입니까? 그것 정말 우습군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여러분들은 그럼 대미 궁에 대한 이야기도 모릅니까?”

칼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아, 대미궁이야 영광의 7주 전쟁의 마지막 날, 루트에리노 대왕에게 패퇴당한 드래곤 로드가 숨은 곳 아닙니까? 할슈타일 공이 아마 그를 그곳으로 데리고 갔지 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거기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칼은 당혹한 얼굴로 말했다.

“예? 아, 그건 아무도 모르는 장소라고…….”

제레인트는 껄껄거리기 시작했다.

“아, 아무도 모르는지는 몰라도 전 압니다. 대미궁은 영원의 숲에 있지요.”

“예?”

칼은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다가 혼잣말 하듯이 말했다.

“잠깐……….. 분명히 할슈타일 가문이 바이서스에 귀속된 것은 제4대 에리네드 대왕의 북방 정벌…………, 북방 정벌 때였지. 그렇지! 할슈타일 가문은 원래 북쪽의 호족이 었지.”

제레인트는 주위를 둘러보며 누가 엿듣기나 하듯이 나직하게 말했다.

“정확하게는 이 영원의 숲이 원래 그들의 영지입니다.”

“여기가요?”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곳에 있는 대미궁에 드래곤 로드를 숨겨주었고……………. 아니, 그런데 정말 이 이야기를 모른다는 말입니까?”

“전혀 모릅니다. 금시초문인데요?”

제레인트는 고개를 심하게 갸웃거렸다. 샌슨은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그때 이루릴이 말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군요. 조금 더 달린 후 해가 진 다음에 듣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금도 레니 양은 계속해서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있을 텐데.”

“아, 예. 일단은 계속 따라가 봅시다.”

“안 됩니다. 아니, 됩니다.”

제레인트가 황급히 말했다. 우리는 어이가 없는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고 제레인트는 자신의 말에 놀라는 얼굴이었다. 칼은 의아쩍은 얼굴로 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 이건 정말 이상한데?”

“아, 그런 거 같군요?”

“이런, 죄송합니다. 영원의 숲은 드래곤 로드와 핸드레이크의 맹약에 의한………. 이곳엔 들어가면 안 됩니다. 일스 사람이라면 아무도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하지 만…………, 들어가야겠군요.”

샌슨은 어이없는 얼굴로 말했다.

“들어가야 된다는 말입니까, 들어가면 안 된다는 말입니까?”

“들어가면 큰일 나지요. 하지만, 하지만 들어가야 됩니다.”

우리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지만 제레인트 스스로도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침버 씨의 말은 테페리의 말이지요?”

우리는 다시 놀란 얼굴로 칼을 바라보았다가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크게 당혹한 얼굴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여긴 들어가면 안 되는데……………, 그런데 들어가야 된다는 느낌이 강력하게 오는군요. 이런 젠장!”

제레인트는 이제 화를 내기 시작했다. 네리아는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이건 말이 안 돼!”

“침버 씨?”

“이건, 이건 정말 웃기지도 않은……

그러다가 제레인트는 황급히 손을 모아 기도에 들어갔다. 우리는 어쩔 줄을 모른 채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제레인트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전 테페리의 지팡이입니다.”

그의 굳은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칼은 엄숙하게 그를 바라보았지만 제레인트는 거의 자신에게 말하듯이 말했다.

“따라서, 전 그분의 의지대로라면 죽음의 길을 가도 상관은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안 됩니다!”

칼은 잠시 창백한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다가 곧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렇게 물어볼까요. 저희들이 들어가면 안 됩니까?”

제레인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군요. 침버 씨는 우리가 들어가면 보나마나 죽을 거라고 생각하나 보군요. 하지만 침버 씨를 이끄는 테페리께서는 우리가 들어가야 된다고 말씀하시나 보군 요?”

제레인트는 이제 처량한 얼굴로 칼을 바라보았다.

“칼씨…….”

“그렇지요?”

우리는 묵묵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테페리께서….. 절 통해서 여러분들을 죽음에 이르도록 하시는지도 모릅니다.”

“알 수 없지요. 테페리께서는 우리들을 영광의 길에 이끄는 것인지도.”

“영원의 숲에서 영광이란 없습니다.”

“지금까지 없었다는 말로 고칩시다.”

칼은 확고부동한 얼굴이 되었다. 제레인트는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제레인트를 보며 말했다.

“침버 씨는 이곳에 가공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제레인트는 침울하게 칼을 바라보다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위험? 위험이지요. 허헛!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우리는 영원의 숲을 무서워합니다.”

“무엇인지 모르신다고요?”

“예! 흔히 그러하듯이 ‘영원의 숲으로 들어가면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다.’, 뭐 그런 것도 아닙니다. 몇 명은 돌아오지 못하지만, 몇 명은 돌아옵니다. 그것은 다른 곳 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지요. 그 점에선 영원의 숲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럼 무엇을 무서워하는 겁니까?”

“돌아온 사람은 사라져요.”

“예?”

제레인트는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지독한 공포입니다. 영원의 숲에 들어갔던 사람들 중엔 분명히 돌아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사고도 당하지 않고 건강하게 돌아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라져갑니다.”

“사라지다니………..”

“잊혀진다구요! 하핫!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제레인트는 상쾌하게 웃었지만 그의 눈은 무서운 공포를 나타내고 있었다. 빠르게 깜빡거리는 그의 눈 주위로는 지독한 열기가 끓어오르는 모양이다.

“사라지고, 잊혀집니다. 어쩌다가 부모가 그를 못 알아봅니다. 자식들이 그를 못 알아볼 경우도 있지요. 그 주위의 사람들은 서서히 그와 함께했던 옛 추억을 잊어갑 니다. 왠지 주위에 있는데도 시선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에게 완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몸이 없어진다거나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렇지요. 여러분의 방에 있는 기둥의 나뭇결은 어떤 모양이지요? 대개 신경 쓰지 않으면 모릅니다. 바로 그런 일이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나는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말도 안 돼!

“이해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정말 그렇게 됩니다. 영원의 숲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남자가 있습니다. 그에겐 사랑하는 애인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죠. 별로 달라 진 것도 느끼지 못하지만 어느샌가 서서히 기억들이 사라져갑니다. 남자가 묻지요. ‘그때 같이 거닐었던 길 기억나?’ 여자는 ‘아니, 모르겠어. 그게 언제였지?”라고 대 답합니다. 이 정도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지요? 하! 예. 그저 사소한 추억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이 차츰 더 심해지기 시작합니다.” 제레인트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고 우리들의 숨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그의 생일은 언제더라? 뭘 좋아하더라? 첫 만남은 언제였지? 그리고 다른 중요한 일들이 그녀의 앞을 막습니다. 왠지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 면서도 느끼지 못하지요. 매일 만나지던 것이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어듭니다. 그러다가 완전히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 사람이 누구였지?’ 이렇게까지 되어버립니다. 그 남자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반응을 일으키게 됩니다. 심지어 그 자신까지도!”

칼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고 제레인트는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 자신도 자신을 잊어갑니다. 어릴 때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게 되다가, 차츰 주위의 사람들을 잊어가게 되고, 끝내 자신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게 되고, 자기가 존재하는 것인지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분명히 존재하는데,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렇게 없어집니다! 아무도 그를 모르고, 심지어 그 자신도 그를 모르는데 어떻게 그가 존재하는 사람이 됩니까? 그러다가 아주 드물게, 거의 일어나지 않는 행운을 통해 누군가가 간신히 그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이봐, 어떤 친구가 있었는데…………, 그 왜 있잖아?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아.’ ‘누구 말이야?’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제 그는 이미 세상에 없는 것이 됩니다. 아무도 몰라요.”

칼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되죠. 절대로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됩니다.”

“잠깐, 이상한데요. 그렇게 아무도 모른다면 그가 사라졌다는 것은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기록은 없어지지 않으니까요.”

“예?”

“기억은 없어집니다. 하지만 기록은 남아요. 아까 그 남자의 예를 듭시다. 그 애인이 일기를 썼다면? 그 기록은 남아 있습니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다음, 그 애인이 어느날 옛 일기를 뒤적거립니다. 그러곤 처음 보는 이름이라든지 도저히 기억도 안 나는 사건들을 읽으면서 당황하게 되지요. 이게 도대체 뭐야? 그제야 우리는 알아 차립니다. 또 누군가가 사라졌던 것이구나. 어쩌면 그 사람은 나의 부모이거나 형제, 혹은 내 자식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제레인트는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하하하! 그런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처음 일어난 것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조차도 모릅니다. 어쩌면 300년 전 영원의 숲이 처음 생겼을 때인지도 모르지 요. 하지만 분명 그런 이상한, 믿을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고부터 우리는 영원의 숲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혹 누군가 배짱 있는 사람들이 계속 들어

갔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는 어쩌면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하지만 우리는 절대로 모르는 친지들로 둘러싸인 셈이지요. 하하!”

“그런…………, 그런 일이 왜 다른 곳에 알려지지 않았………….”

“모르니까요!”

“예?”

“모르니까요! 우리는 모릅니다. 누가 사라졌는지. 원래 있었는지조차 모른단 말입니다! 누군가는 사라졌습니다. 그건 확실합니다. 하지만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 스스로 영원의 숲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리게 되었습니다. 아예 다가가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른 나라에는 알려지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일스의 사 람들은 전부 다 압니다. 혹시 다른 나라의 여행자들이 찾아왔다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영원의 숲에 들어갔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들 역시 사라졌을 겁니다. 그러니 누가 압니까? 우리들도 기록에 의지해서, 존재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있지도 않았던 사람들의 당황할 정도로 낯선 기록에 의지해서 간신히 알아차리는 일인데 어떻게 다른 곳에 알립니까?”

우리는 모두 심한 추위를 느꼈다. 낮아진 오후의 햇살에 한기를 느끼고, 제레인트의 말에 한기를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페리는 우리들이 들어가기를 바란다는 말입니까?”

제레인트는 다시 대답하지 않았다. 칼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전 가겠습니다.”

“예?”

“침버 씨도 물론 들어가시겠지요? 다른 분들은 어떻습니까?”

다른 분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무엇을 결정하라는 거야? 그때 이루릴이 말했다.

“어차피 스스로 믿지 못한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침착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으로 자신을 확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난 레니 양을 구출하려는 내 자신을 압니다. 난 들어 가겠습니다.”

칼은 쓰게 웃으며 질문했다.

“자아가 사라질지도 모르는데도?”

“시간 아래 영원한 것은 없어요.”

바로 그 말이 우리의 행동 지침이 되었다. 샌슨은 손바닥을 딱 치며 말했다.

“하핫! 어차피 우리가 죽고 나서 100년, 200년쯤 지나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죠. 우리에 대한 기억은 아무데도 남아 있지 않을 테니. 그렇다면 현재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렵니다.”

그리고 내가 그 뒤를 이었다.

“우리는 지금을 사는 거니까요. 난 갑니다. 내가 사라지면 우리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는…………….”

말이 맺어지지 않는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아서 눈앞이 흐려졌다. 샌슨은 묵묵히 내 어깨를 짚었고, 바로 그때 난 악쓰듯이 외쳤다.

“술주정꾼 아들 하나 완전히 사라지는 거지요!”

샌슨은 웃음을 터뜨렸고 나도 눈을 쓱 닦으며 웃었다. 칼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우리에겐 테페리의 인도라는 담보가 있다네. 해볼 만하지 않은가? 누구는 신의 권능을 무기로 사용하는 이 마당에, 우리도 신의 권능을 한번 담보물로 삼아 보세나. 하하하.”

제레인트는 입을 딱 벌린 채 칼을 바라보았지만 칼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우리는 아직까지 의사 표현을 하지 않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네리아 역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칼은 강요하지는 않겠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네리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긴, 뭐. 난 황야 어디서 죽어버리면 아무도 내가 살아 있었다는 것을 기억 못할 거야. 내가 세상을 살아갔고, 사람을 좋아했고, 반짝거리는 것을 몸살나게 좋아했 다는 거,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겠지. 그렇다면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함께 사라져보는 것도 괜찮아.”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어버렸다. 제레인트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사라져도 좋습니까?”

칼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사라집니다.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사라질 때까진, 제대로 살아보렵니다.”

제레인트는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푹 숙였고, 그러곤 고개를 들고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는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좋아요!”

“예?”

칼이 반문했지만 제레인트는 거의 듣지도 않은 채 외쳤다.

“그렇다면 자기가 걸린 모험이군요. 끝내줍니다. 사상 최대의 모험이군요! 최소한 자아를 가진 개인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한 모험은 없겠군요. 하핫! 지성을 가진 존 재 최후의 모험입니다!”

“아, 예. 그렇긴 하군요.”

제레인트는 갑자기 팔을 들어올려 앞을 가리켰다.

“남겨진 사람의 기억에는 신경 쓰지 말고, 우리 뜻에 따라, 갑시다! 영원의 숲으로.”

그리고 제레인트는 힘차게 달려갔다.

“이랴아, 히하! 아우우우우우!”

우리는 그 미친 듯이 흔들리며 달려가는 뒷모습을 얼떨떨하게 바라보다가, 그냥 히죽 웃어버렸다. 그러곤 곧 그의 뒤를 따라서 출발했다.

“이랴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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