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5권 – 제9부 :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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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5권 – 제9부 :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 6화

6

“네드발 군! 자네에게 경의를 표하네! 그렇군. 역시 열쇠는 문제 옆에 있었군!”

칼은 크게 기뻐했고 샌슨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네리아는 숨쉴 새 없이 손가락을 튕겨대었고 제레인트는 숨쉴 새 없이 자기 머리를 치고 있었다. 하하. 뭐, 별거아 니지. 순결이라고 하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

잠시 소란을 벌인 다음 우리는 문 쪽으로 다가섰다. 문 안쪽은 무슨 방인 모양인데 안은 캄캄했다. 먼저 나와 샌슨이 횃불을 들고는 문에 접근했다.

열린 문으로 접근하자 뭔가 쾨쾨한 냄새가 났다. 샌슨은 곧 험악한 얼굴이 되더니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혹시 독이라도?”

그러자 곧 뒤에서 칼의 목소리가 들렸다.

“음. 책은 독일 수도 있겠지. 책 냄새로군.”

곧 샌슨은 네리아에 의해 책을 독으로 여기는 남자가 되어버렸다. 난 어깨를 으쓱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파아앗.

갑자기 빛이 쏟아져 눈을 꽉 감아버리고 말았다. 으윽!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아. 난 눈물을 찔끔거리며 실눈을 뜨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빛은 천장에서 뿜어나오고 있었다. 마치 닐시언 전하의 서재처럼 천장 전체가 빛을 뿜고 있었다. 그리고 방은, 이걸 방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쨌든 굉장히 넓은 공간이었다. 중간중간에 천장을 받치는 기둥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넓은 공간은 온통 책장이었다. 사방 벽은 말할 것도 없고 방 가운데에도 책장들이 열을 지어 서 있었다. 하나의 열은 책장 열 개씩 서로 등을 맞대고 서 있 었으며 그러한 열이 최소한 쉰 개는 되어 보였다. 그러니까 가운데 있는 책장들만 해도 모두 일천 개. 현기증 나게 많은 책들이었다.

칼은 탄성을 질렀다.

“이런!”

그는 곧 책장으로 달려갔다. 우리들도 흩어져서 책장의 이곳저곳을 훑어보았다. 잠시 후 칼의 탄성이 들려왔다.

“맙소사! 이 책이 남아 있었어! 크라이제의 『문명 비평』이 책은 이미 200여 년 전에 모두 사라져버렸지. 200년 전에 남아 있던 마지막 한 권이 루스휴레인 전쟁 때 소실되었다구. 그런데 여기 남아 있어! 게다가 이 깨끗한 상태라니.”

그리고 곧 제레인트의 탄성도 들려왔다.

“맙소사! 이거 보십시오, 칼, 헤트로이처의 『신에게로의 사색적 산책』 초판본입니다.”

“예? 뭐라구요?”

나도 역시 책을 한 권 뽑아들었다. 순간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히, 히야아!”

“응? 뭔가? 왜 그러는가, 네드발 군!”

칼은 다시 기대감 넘치는 표정으로 나에게 황급히 달려왔다. 난 감동적인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보여주었다.

『따사로움과 즐거움이 가득한 주방을 위한 요리 100선』

칼은 책 제목을 읽더니 곧 한심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난 기쁘게 말해 주었다.

“나도 이 책 있는데, 여기도 있어요! 우와!”

“그, 그런가? 허허, 기쁘겠군, 네드발 군.”

칼은 그 말만 남겨놓고는 곧 부리나케 걸어가 버렸다. 그러곤 또다시 제레인트와 더불어 비명을 올리며 책 구경을 계속했다. 난 책을 꽂아놓고는 혹시 요리 1000선 이나 1만 선 같은 책은 없는지 찾아보았다.

제레인트와 칼은 모두들 즐거워하며 책을 뽑아들고 있었다. 우리는 왜 저 아름다운 경악에 동참하지 못하는 것일까. 음. 옆을 보니 이루릴도 책 한 권을 뽑아들고는 미소를 지은 채 읽고 있었다. 나와 샌슨, 그리고 네리아는 매우 익숙하다는 태도로 서가에서 책을 뽑아들어 펼쳐보았지만 곧 거의 동시에 책을 꽂고 말았다. 탁탁탁!

모두들 아름다운 장식이 되어 있어 책장만 치더라도 대단한 고가일 것 같았다. 일급의 장인이 달려들어 1년 내내 만들었다고 말한다 해도 믿어줄 만한 책장들이었 다. 게다가 책들의 정리 상태는 완벽했다. 책들마다 장정의 화려함이라든가 크기, 두께 등은 다 달랐지만 이렇게 주욱 꽂혀 있는 모습이 그렇게 조화로울 수가 없었 다. 제레인트와 칼은 내키는 대로 뽑아보고 있었지만.

칼과 제레인트가 진정하게 되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렸고 그래서 그 동안 샌슨과 네리아는 퍽 지루해했다. 칼은 사방의 책들에 탐욕스러운 눈빛을 보내면서 말했다. “이거 정말 굉장한 곳일세. 몇 백 년 묵은 고서들이 모여 있군, 그래. 그것도 이렇게나 많다니.”

“몇 백 년 묵은 고서라구요?”

“그렇다네. 이것 좀 보게나.”

그리고 칼은 손에 든 책을 들어올렸다. 그는 굉장하지 않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책을 보여주었는데,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왜 책의 표지를 보여주지 않고 책등 을 보여주는 거지? 너무 흥분해서 칼의 머리가 이상해진 것이 아닐까? 우리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칼은 혀를 차면서 말했다.

“여보게. 이런 제책 방식을 본 적이 있는가? 이건 까마득하다고 말할 정도로 오래된 제책 방식이라구!”

윽. 그게 그런 의미였군. 하지만 난 봐봐야 책들의 제책 방식을 구분 못하겠다. 이루릴은 조용히 말했다. “여긴 도서관인 모양이군요. 그랑엘베르의 도서관을 흉내낸 모양입니다.”

“예. 그 도서관은 사실 책들의 도서관이라 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비슷하기는 하군요. 허어, 이거 참!”

“칼. 저, 그런데.”

“아, 그래. 나가세. 그거 참.”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하는 칼을 붙잡아 끌고 나오는 데 꽤나 고생해야 되었다. 칼은 몇 권이라도 가져가고 싶다는 눈치였지만 차마 그런 말을 꺼내진 못했다. 이 환하고 아름다우며 정숙한 도서관은 도저히 책 도둑질을 감행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밖으로 나오자 방 안의 불은 꺼졌으며 다시 문이 스르르 닫혔다. 신기하군. 아마 안에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경우에 닫히도록 되어 있나 보다. 갑자기 어두운 바깥으로 나오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잠시 시력을 회복하기 위해 머뭇거린 다음, 우리는 다시 앞서의 통로로 돌아갔다.

앞쪽의 통로는 복수였지. 우리는 두 번째 문 앞에 섰다. 난 제레인트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고, 제레인트는 쾌활한 목소리로 멋들어지게 말했다.

“화렌차.”

문은 우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오크와 복수의 화렌차의 이름이 불려지자 문이 스르르 열린 것이다. 다시 나와 샌슨이 앞장섰다.

“방 안에 들어가면 불이 켜지겠지?”

“확인하자구. 눈 조심하고.”

난 눈을 가늘게 뜬 다음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파아앗!

방 안은 곧 환해졌다.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역시 눈이 부셨다. 눈물을 찔끔거린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는 일행들이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는 우리들을 밀어붙일 태세였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우리는 모두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네리아는 몸을 날렸다.

“보물이다!”

네리아는 산더미처럼 쌓인 금화와 금관, 금반지, 보석 팔찌와 귀고리, 브로치 등의 금 장식 액세서리, 보석 홀과 보석 상자, 각양각색의 부채와 값비싸 보이는 검, 방 패들 속에서 헤엄을 칠 자세였다. 물론 보물이라는 것은 대개가 단단한 것이다. 네리아는 틀림없이 몸에 멍이 들었을 테지만 괘념치 않는 모양이다. 네리아는 웬만한 언덕이라고 불러주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보물더미 앞에 무릎을 꿇더니 곧 손가락이 부러져라 그 속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그녀는 힘든 내색도 하지 않고 그 무거운 금화를 집어들더니 곧 황홀한 표정으로 금화들을 떨어뜨렸다.

좌르르………… 딸랑딸랑.

금화에서는 저런 소리가 나는구나. 음. 저렇게 많은 금화가 떨어지는 것은 처음 보니, 그 소리도 역시 처음 듣는 셈이다. 어쨌든 다음에 누군가에게 ‘금화가 떨어질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느냐 하면 말이야.’ 이런 식으로 이야기는 꺼낼 수 있게 되었군.

우리는 일제히 주욱 늘어서서는 턱이 빠진 얼굴로 앞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쌓여 있는 보물을 세어본다는 것은 아무래도 웃기는 일이 될 것 같다. 굳이 세어야 된다면 무슨 됫박이나 커다란 저울 같은 것을 가져와서는 부피로 되든지 무게로 달아야 될 것 같다. 물론 이 보물들을 다 셀 때까지 됫박이나 저울이 부서지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아냐. 그걸로는 안 되겠어. 정말 웃기는 말이지만 아무래도 이렇게 세어야 될 것 같군. 보물 몇 수레 하는 식으로.

그리고 그것은 다른 쪽에 견고하게 쌓여 있는 금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대단히 무겁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저 금괴를 벽돌로 삼아 아담한 집 한 채는 지을 수 있 을 것 같다. 샌슨은 넋빠진 얼굴로 금괴 무더기로 걸어갔다. 그는 질린 표정으로 손을 뻗어 금괴를 집어들려다가, 곧 당혹한 얼굴이 되어서는 두 손으로 들어올렸다. 그러고도 무거워서 낑낑거렸다.

“진짜 금이야?”

맙소사. 드워프들이라면, 이 광경을 볼 수 있다면 자신의 수염을 깨끗이 면도해도 좋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상도 할 수 없는 보물이라니. 금괴가 쌓인 곳의 반대편 벽은 더 기가 막혔다. 벽에는 커다란 선반들이 줄을 서 있었고 그 위에 옷상자 정도로 보이는 상자 수십 개가 얹혀 있었다. 그런데 상자들의 색깔이 다채롭기 그지없었다. 푸른색, 붉은색, 노란색, 검정색, 흰색 등 별의별 색깔이 다 있었다. 제레인트가 상자로 다가가며 말했다.

“뭐가 들었는지 볼까요?”

제레인트는 상자들 중에 푸른 상자 하나를 들어올리려다가 곧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내가 다가가서 그를 도와주었다. 하지만 OPG를 끼고 있는데도 허리가 휘청했 다. 뭐가 이렇게 무거워?

쿵. 묵직한 소리를 내면서 상자를 바닥에 내렸다. 상자는 잠겨 있지 않았다. 뚜껑을 여는 순간 휘황찬란한 빛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았다. 보석, 셀 수도 없이 많은 푸 르스름한 보석들이 들어 있었다. 상자에서 뿜어져나오는 푸른 빛이 얼굴을 후려갈기는 기분이 들었다. 난 얼빠진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의 얼굴은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이런 엄청난 빛이라니.

“그거 무슨 빛이야!”

네리아는 누가 본다면 원래 네 발 짐승이었을 거라고 말할 정도의 몸짓으로 상자로 다가왔다. 그녀는 상자 안을 들여다보더니 곧 졸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 사, 사파이어야! 이렇게 많은 블루 사파이어라니!”

네리아는 곧 무서운 속도로 몸을 돌렸다.

“후치야, 후치야! 사랑하는 후치야! 제발! 저기 하얀색 상자 좀 꺼내줘. 응? 제발!”

난 후들거리는 다리를 다잡으며 하얀색 상자를 들어내렸다. 일행들은 모두 상자 주위로 모였고 네리아는 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상자를 열어젖혔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았다. 상자 속에서 번개가 튀어나오는 느낌이었다. 네리아는 말도 제대로 못했다.

“다, 다, 다…… 다, 다, 다………..”

칼이 그녀를 도와주었다

“다이아몬드.”

“예. 다, 다, 다………….”

이거 이름이 다이아몬드인가? 그것은 다른 것과는 달리 투명한 보석이었는데 거의 스스로 빛을 뿜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흐음, 이거 반짝거리기는 하지만 아까의 블 루 사파이어가 파르스름한 것이 더 예쁘던데. 어쨌든 그 다이아몬드라는 보석이 상자 가득히 쌓여 있었다. 네리아는 신음을 흘렸다.

“아무나 날 잡아. 쓰러질 거야.”

이루릴은 곧 네리아의 어깨를 붙잡았고 네리아는 한숨을 쉬며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칼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허어. 이토록 많은 보물이라니. 나라 한두 개쯤 사고도 기념품이 몇 개는 남겠는걸?”

“네? 칼 아저씨, 이걸로 나라도 살 수 있어요?”

네리아의 숨막힌 목소리를 듣자 칼은 곧 빙긋 웃었다. 그는 상자 속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곧 다이아몬드라는 보석을 하나 들어올렸다. 칼이 들어올린 것은 직경이 손 가락 두 마디쯤 되어 보이는 보석이었다. 그 아름다운 가공이라니, 도대체 몇 개나 되는 면이 있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이거 하나로도 웬만한 성채 하나는 살 수 있소.”

“됐군요! 칼, 챙기죠!”

“응? 무슨 말인가, 네드발 군?”

“아무르타트에게 줄 보석이요!”

“아, 그렇군. 하지만 이 보석들의 임자는 드래곤 로드일 텐데.”

“그거 하나로도 성채 하나는 살 수 있다면서요? 그럼 몇 개만 들고 나가면 아무르타트에게 줄 10만 셀은 우습게 되겠는데요? 이렇게 많은데 몇 개 없어진다고 누가 알 수 있을까요.”

내 말이 끝나자 네리아는 곧 칼에게 간절한 시선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길바닥에 보석이 굴러다닌다 해도 저녁 약속은 지켜야 되는 법이다.’ 누구의 말이지, 네드발 군?”

“루트에리노 대왕의 말이지요. 하지만 저녁 약속이 아니잖아요, 이건.”

나와 네리아의 안타까운 표정에도 불구하고 칼은 여전히 딱딱한 얼굴이었다.

“그건 약속의 귀중함을 얘기하는 말이 아니었다네. 네드발 군.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그건 자기 것이 아닌 것에 대한 욕심을 경계하는 의미였네.”

제레인트와 이루릴은 정말 화나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미치겠네! 이런 엄청난 보석을 앞에 두고, 그중 몇 개가 없어진다 해도 도저히 셀 수가 없어서 모를 정도의 보 석을 앞에 두고 무슨 구름 잡는 이야기람. 그러나 칼은 완고했다.

“이 보석의 주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바에야 절대로 취할 수는 없다네. 여보게, 네드발 군. 아버님을 생각하는 자네의 마음은 짐작할 수 있네. 나 또한 형님의 일이 걸려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렇게 하세.”

이런, 포기해야겠군. 나는 시무룩하게 말했다.

“이렇게 하세. 다음에 나오는 말은 대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경우가 많지요.”

칼은 싱긋 웃었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한 이 동굴을 완전히 탐사해 보세. 그리고 양심에 비추어 한점 티끌도 없이 저 보석을 취할 수 있도록 해보세나.”

“칼 아저씨이이이!”

네리아의 앙탈에 가까운 말에도 칼은 요지 부동이다.

“네리아 양. 이건 차라리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요. 네리아 양도 사람이 들어오면 빛이 들어오는 이 방을 보지 않았소?”

네리아는 퍼뜩 정신을 차리는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질겁을 했다. 맞다! 이런, 그 생각을 못했어. 보석에 눈이 멀어버렸나 보군.

“난 이다지도 많은 보물을 보니 욕심보다는 차라리 두려움이 앞서는구려. 여기에 빛의 마법 외에 어떤 마법이 걸려 있는지 알 수 없소.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자에 게 경계나 징벌을 줄 만한 무서운 마법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그러자 네리아는 곧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윗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저 아가씨, 뭐하는 거야? 잠시 후 네리아의 가슴에선 꽤나 큼직해 보이는 보석들과 금화가 나왔다. 칼은 기막힌 어조로 말했다.

“그새 챙겼소?”

네리아는 멋쩍은 표정으로 장화에도 손을 집어넣었다. 소매 속에서도, 혁대에서도 보석과 금화들이 쏟아져나왔다. 아이고 맙소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 데 참 많이도 챙겼다. 샌슨은 ‘다람쥐 도토리 챙기듯 어쩌고 하다가 네리아에게 꼬집히고 말았다. 네리아는 온몸에서 수십 개나 되는 보석들을 꺼내어 원래 위치에 돌려놓았다.

네리아는 사방으로 안타까운 표정을 보내었다.

“그래두우…………, 보는 건 괜찮겠지요? 음, 후치후치후치야. 저기 검은 상자 좀 내려봐. 블랙 다이아몬드는 가장 비싼 보석 중의 하나라구. 혹시 흑진주가 있을까?”

“네리아 양. 우린 급하오.”

“이이이잉!”

내가 상자를 원위치에 돌려놓고 모든 사람들이 방 밖으로 나왔을 때까지도 네리아는 나오지 않았다.

“저, 동굴 탐사에서 한 사람쯤 빠져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난 여기서 기다릴 테니……”

“네리아 양!”

“어어어어!”

결국 네리아는 칼에게 정신적으로 귀를 붙잡힌 듯한 모습으로 시무룩하게 끌려나왔다. 네리아마저 나오고 나자 역시 불이 꺼지며 문이 스르르 닫혔다. 제레인트는 그 닫히는 모습을 보더니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런 말 우습지만, 어째 보안이 너무 부실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저 안에 있는 저 엄청난 보물에 비해 볼 때 말입니다.”

“예. 내 생각도 그러하오. 약속어만 말하면 그냥 열리는 문이라든지, 사방으로 갈림길 하나도 없이 뚫려 있는 통로들이라든지. 아무래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마법이 있을 거라는 의심이 점점 확실성을 띠는데요.”

“예. 그럴 거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 확실히 눈에 보이지 않는 함정이 있을 가능성이 높지요. 아무 물건도 가지고 나오지 않기로 한 것은 잘한 결정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 통로를 나서자마자 죽음을 당하게 될지도…….”

“화렌차!”

우리는 모두 네리아를 돌아보았고, 네리아는 열린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질린 표정으로 방 안을 들여다보니 네리아는 바지춤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아이고 맙소사. 잠시 후 네리아는 손을 탁탁 털더니 겸연쩍은 얼굴로 걸어나왔다. 샌슨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말했다.

“이젠 더 없냐?”

네리아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샌슨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벗어볼까?”

“됐어. 만일 가지고 있다면 네가 위험해지는 거야. 알겠지?”

“아니까 도로 돌려놓았잖아.”

우리는 웃으며 다시 통로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첫 번째 통로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칼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이 방마저도 무슨 창고나 그런 것이라면 우리의 탐색은 무위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것 참 큰일이로군. 세 번째에는 행운이 있어야 될 텐데.”

제레인트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필요할 때엔 작은 행운이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행운을 기대하며 첫 번째 통로의 첫 번째 문 앞에 늘어섰다. 이 통로의 입구 위쪽에는 회상이라고 적혀 있었지? 제레인트는 씩씩한 얼굴로 말했다.

“시무니안.”

대지와 회상의 시무니안의 이름이 불려지고, 곧 시무니안의 아들들에게 문이 열렸다.

방문이 열리고 역시 불이 밝혀졌다. 우리는 침착한 걸음걸이로 안으로 들어섰다.

이번엔 샌슨의 입이 딱 벌어졌다.

“이게 다 뭐야? 음식이잖아?”

맙소사. 엄청난 공간 안에 쌓여 있는 것들은 모조리 먹을것과 마실것이었다. 벽 가득히 쌓여 있는 통은 아마 술통일 것 같다. 그리고 반대편 벽에 쌓여 있는 통들은 밀가루나 기타 등등 곡식류를 저장한 곳인 듯하다. 벽 위쪽으로는 선반이 있었고 선반엔 갖가지 병들이 놓여 있었다. 잼, 마멀레이드인가? 그리고 양념거리, 조미료 계통이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향초는 무더기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그리고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린 햄과 훈제육 등은 기가 막힌 냄새를 풍겨대었다. 방 구석에는 거 대한 수조 비슷한 것이 만들어져 있었고 그 안에선 생선들이 퍼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득 쌓여 있는 채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일행 모두가 순식간에 꼴깍거 리는 소리를 내었다 해도 별로 겸연쩍어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방 다른 부분에는 엄청난 식기들이 놓여 있는 찬장이 보였다.

샌슨은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이건 뭐야? 헬턴트 주민을 모조리 데리고 와도 여기 있는 거 반도 못 먹겠네.”

그리고 칼은 기막힌 어조로 말했다.

“그것 참. 300년 묵은 술이라면 혹 모르겠지만 이 음식들은 마치 오늘 아침에 장만해 둔 것 같은데?”

이루릴은 차분하게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보존의 마법을 사용했나 보군요.”

“아, 그렇군요.”

샌슨은 척척 걸어가더니 통 하나를 열었다. 그러고는 곧 환한 얼굴이 되더니 사과 하나를 꺼내어들었다. 그의 손이 입으로 움직이기 전에 재빨리 말리느라 부리나케 움직여야 했다.

“샌슨! 건드리면 안 된다는 팻말이 꼭 있어야겠어?”

“어? 아, 그렇지. 음. 하지만 이 계절에 사과라니. 허엇!”

샌슨은 멋쩍은 표정으로 사과를 도로 집어넣었다. 으음. 도서관, 보물 창고 다음으로 여기는 음식 창고인가?

“대지의 시무니안, 무한한 음식 창고를 가지고 있다는 그녀에 대한 전설이 기억나는군. 음. 그걸 상기시키는 데가 있군 그래.”

칼은 그렇게 평했다. 그런데 이 기가 막힌 음식들을 보는 것이 즐겁긴 하지만 이렇게 되면 우리 탐색은 끝이 아닌가. 그것 참.

그때 네리아가 말했다.

“저거!”

20큐빗 떨어진 곳, 그러니까 방 전체의 중간쯤 되는 곳에 갑자기 희뿌연 모습이 떠올랐다. 차츰 뚜렷해지는 영상은 두 개의 다리와 두 개의 팔, 그리고 몸이 있었고

그 위엔 머리가 있었는데 머리엔 눈이 두 개고. 그것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후다닥 물러나며 제각기 손을 검으로 가져갔다. 샌슨은 허리에, 난 어깨에. 그리고 네리아는 트라이던트를 앞으로 내밀었다. 완전한 긴장 상태를 유지한 근 육. 모두들 완벽한 대응이었다. 우리는 매서운 눈으로 그 영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영상은 우리들에게 말했다.

“주문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퍽 한심스럽게 만드는 질문인데 그래. 이 질문을 듣고도 계속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난 나도 모르게 맥이 풀려서 스르르 손을 내려 버렸다. 샌슨은 이를 악물면서 낮게 속삭였다.

“긴장을 풀게 하고 덤빌 작정인지도 몰라. 조심해!”

난 정신이 퍼뜩 들어서 다시 바스타드의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때 칼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 특별한 주문은 없소. 식사 시간은 아니구려.”

그러자 그 남자의 영상은 고개를 조아리며 그럴 수 없이 다정하고 충성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간단히 음료라도 대접해 드릴까요? 다과라도 준비할까요?”

“아, 고맙지만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예. 준비 가능한 음식의 목록에는…………….”

“아, 아니오. 뭐가 준비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아니오.”

그러자 영상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충성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현재 보관중인 재료의 목록에는……”

“어, 그게 아니오. 부탁이니 내 말을 먼저 듣고 대답해 주지 않겠소?”

“네, 알겠습니다.”

이런 지경까지 와서 긴장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은 더 우스웠지만 난 끝까지 바스타드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다. 하지만 샌슨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더니 다시 편한 자세를 취했다.

“야, 후치. 긴장 풀어라.”

이잇! 나도 긴장을 풀고 똑바로 섰다. 제레인트는 앞으로 걸어가더니 신기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영상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공중에 살짝 비치는 아지랑이 같은 것이었다. 제복으로 짐작되는 단순하면서도 딱딱한 선의 옷을 입고 있었으며 선량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점잖게 칼의 말을 기다리는 그 모습은 완전한………….

“시종이다.”

그래, 맞아요, 네리아. 우리는 네리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느긋하게 그 시종의 영상을 바라보았다. 제레인트가 먼저 참지 못하고 말을 걸었다.

“어, 난 제레인트 침버라는 사람으로 테페리의 지팡이요. 당신은 누구시오?”

“원하시는 이름으로 절 부르십시오.”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없나 보군. 하긴 이건 필요에 따른 영상이니까 특별히 개성을 주지 않을 수도 있겠지. 음. 내가 묻겠는데, 이곳의 주인은 누구요?”

“이곳의 주인은 접니다.”

“예?”

“제가 이 주방의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손님 여러분들이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명만 하시면 제가 즉각..

칼은 난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아니. 이 동굴과 이 모든 것의 주인이 누구냐고요.”

그러자 시종의 영상도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겸손한 얼굴로 말했다.

“하늘 아래,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의 주인은 한 분이시지 않습니까?”

“예?”

“위대하신 드래곤 로드가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드래곤 로드. 역시!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레인트는 심호흡을 하면서 말했다.

“아, 그럼 여기는 대미궁입니까?”

시종은 갑자기 쌀쌀맞은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가 의아한 표정이 되었을 때 칼이 말했다.

“여보시오. 묻겠는데, 여기가 드래곤의 안식처, 카르 엔 드래고니안입니까?”

시종은 즉각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 영광된 이름이 이곳을 지칭합니다.”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들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래곤 로드가 드워프들에게서 이 대미궁을 빼앗은 다음 그런 이름을 붙였다네. 그건 추악한 사기극이었지만 지금은 그걸 거론할 때가 아니로군. 시종은 드래곤 로 드에게만 충성을 바칠 테니 모두들 입을 조심하게.”

네리아는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어, 음. 우리는 가만 있을 테니 칼 아저씨가 말해요.”

칼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몸을 돌려 시종에게 말했다.

“저희들은 그 위대한 드래곤 로드께 경배를 바치기 위해 이곳을 찾았습니다만, 이 위용 있는 모습에 감탄하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군요.”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어쨌든 칼의 말은 시종의 얼굴에서 동정의 빛이 떠오르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아, 그러십니까? 안내자가 불성실했던 모양이군요. 전 미거한 주방 담당인이지만 항상 그 오크들을 쫓아내고 인간이나 엘프들을 고용하자고 드래곤 로드께 상주했 지요. 하지만 드래곤 로드께서는 그 추악한 피조물들에게도 애정을 거두시지 않으시는 관대한 성품을 지니셔서………….”

“아, 예. 고충을 이해하겠습니다.”

아하. 원래는 오크들이 이 대미궁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안내하기로 되어 있었나 보군. 그렇다면 저 시종이 말하는 안내자는 아마 하얀 백골이 되어 있겠군. 시종은 계속해서 말했다.

“예. 안내도 없이 이 최하층까지 오시느라 정말 고충이 대단하셨겠군요. 저 추악한 오크들을 대신하여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아, 테페리의 프리스트 께서 함께하셨군요. 그래서 이 아래까지 내려오실 수 있으셨던 모양이군요.”

내려온다고? 어, 아차, 그렇지. 우리들은 통로가 바위로 막히는 바람에 수로로 들어왔지. 그렇다면 우리는 지름길로 온 셈이군. 칼은 미심쩍은 얼굴로 말했다.

“고생이라니요? 음, 저희들은 별로 고생 없이 이곳까지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만, 위쪽에 뭔가 위험한 것이 있었습니까?”

시종은 크게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아아. 여러분들께는 테페리의 가호가 함께하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이 위쪽엔 저 욕심 사납고 추잡스러운 드워프들이 지독한 함정들을 설치해 두었답니다. 드래 곤 로드께서는 그 함정들을 침입자에 대한 징계용으로 남겨두기로 결심하셨지요. 그것은 세련된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허락 없이 찾아드는 무례한 침입자들은 그 목숨을 내놓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골치 아픈 것은, 저 저능하고 미련스러운 오크들이 오가다가 자주 함정을 작동시킨다는 점입니다. 그럴 때는 정말 카르 엔 드래고니안 전체가 소란스러워집니다. 통로가 봉쇄되고 갈림길의 위치가 바뀌어버리니 참으로 곤란합니다. 땅강아지처럼 지하를 돌아다니는 드워프들마저도 이 곳을 대미궁이라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땅강아지라. 허헛. 우리는 뭐라 할말이 없어서 그냥 웃어버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마 엑셀핸드가 여기 있었다면 저 영상을 향해 무서운 욕설을 뱉으며 배틀 액 스를 집어던져 버렸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칼은 웃지 않았다. 그는 근심스러운 얼굴이 되었다가 빠르게 말했다.

“저런, 그렇습니까? 이거 큰일이군요. 사실 저희들의 일행 중 일부가 아직도 여기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함정이 있다면 정말 큰일이군요. 미안합니다만 위로 올라 갈 방법을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저희들은 내려오기는 내려왔는데 도대체 어떻게 내려왔는지도 모르겠군요.”

우리는 무슨 소리인지 몰라 칼을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칼은 넥슨 일행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길이 아닌 곳으로 들어와서 다행히도 함정을 피 할 수 있었지만 넥슨 일행은 위쪽의 입구로 들어왔을 테니 이 시종이 말하는 엄청난 함정들에 걸려 있을지도 모른다. 제길, 큰일이군!

시종은 근심스럽기 짝이 없는 얼굴이 되었다.

“그렇습니까? 이런. 하지만 전 주방 담당인이라 이곳을 나갈 수 없습니다. 밖으로 나가서 통로 양쪽에 있는 가고일들에게 말씀해 보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을 안내해 드릴 겁니다.”

통로 양쪽의 가고일이라구? 어, 미안하지만 당신이 말하는 가고일은 이미 세월의 풍상에 묻힌 존재일 거라구. 칼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만 저희들이 좀 소심한지라 가고일에게 말을 거는 것이 저어되는군요. 그렇지 않아도 가고일에게 혹시 대화하기 편한 사람을 만날 수 없냐고 물어보 자 여기로 가보라고 하더군요.”

저, 저 엄청난 거짓말 구사 능력! 칼은 꼭 진짜처럼 이야기했고 그러자 시종의 영상은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하. 그러셨군요. 음. 어떻게 하지요? 전 나갈 수가 없는데.”

“말씀으로 설명해 주실 순 없겠습니까?”

“예. 음. 중앙 폭포 뒤편에 있는 통로로 내려오셨지요? 그 위에 있는 중앙 홀에서 가장 왼쪽 끝에 있는 통로로 가시면 됩니다. 그 다음부터는 지나가는 오크들 아무 놈이나 붙잡고 물어보면 대답해 줄 것입니다. 아, 위압적인 어투를 쓰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오크들은 도저히 예의라는 것을 가르칠 수가 없는 놈이라서요. 그러한 피조물에게까지 차별 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드래곤 로드를 다시 한번 칭송할 일입니다.”

“예. 정말 그러합니다. 친절히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르 엔 드래고니안에 있는 모든 기쁨을 느끼시길.”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영상은 희미하게 변하더니 곧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칼을 쳐다보았고 칼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네리아는 가느다란 눈으로 칼을 바라보며 말했 다.

“거짓말 잘하시네요?”

칼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이왕이면 상대와의 의견 조절을 위한 자기희생 능력이 충분하다고 말씀해 주시겠소?”

우리는 모두들 피식피식 웃으면서 밖으로 나왔다. 우리들이 나오자 불이 꺼지며 문은 조용히 닫혔다. 나는 횃불을 다시 높이 들었다. 네리아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 다.

“그 이름도 없는 영상, 참 불쌍하네요. 저 안에서 나오지도 못하니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고 있어요.”

칼은 빙긋 웃었다.

“그것은 영상일 뿐이오. 네리아 양.”

“하긴 그렇지만.”

이루릴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흐음. 원래 사람이라는 것이 좀 그래요. 이루릴.

밖으로 나온 우리들은 호수 옆을 따라 중앙 폭포라는 그 폭포로 걸어갔다. 이 뒤에 통로가 있다고? 다가감에 따라 폭포 소리는 굉음으로 바뀌었고 수면에 그려지는 파문은 더욱 커졌다. 횃불 빛에 비친 폭포의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수많은 금실, 은실이 풀어헤쳐지는 것 같다.

샌슨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곧 폭포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폭포 뒤를 바라보더니 곧 손을 들어 우리를 불렀다. 그쪽으로 걸어가 보니 과연 폭포 뒤쪽으로 계속 해서 길이 나 있었으며 거기엔 폭포의 물살로 숨겨진 통로가 보였다. 음. 이게 네 번째 통로로군. 그렇다면 확실히 통로의 위치는 팔각형이 맞는데.

네리아는 귀를 막으며 고함을 질렀다.

“저 방들에는 안 가봐요?”

그러고 보니 폭포 뒤쪽에 길이 있어서 왼쪽에 있는 세 개의 통로에도 걸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역시 고함을 질렀다.

“레니 양을 먼저 찾아야 하오. 저 방들도 아마 무슨 창고들이겠지. 가볼 필요는 없소.”

네리아는 바로 저기가 창고이기 때문에 가보고 싶다는 표정이었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음. 사실 궁금하기는 하네. 저 방들에는 과연 뭐가 쌓여 있을까.

그런 궁금증을 남겨두고는 우리는 폭포 뒤에 있던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통로를 조금 걸어가자 지금까지와는 달리 거대한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잠시 후 층계참이 나타나면서 왼쪽에는 반대 방향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다시 층계참이 있었고 왼쪽으로 중앙 폭포의 위를 지나가는 다리가 나타났다. 다리는 위치상 아래쪽에서는 보이지 않게 되어 있었다.

발 아래로 빠르게 지나가는 물을 바라보다가 우리는 계속 걸어갔다. 다리 건너편에는 다시 계단이 있었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우리는 갑자기 넓은 홀에 서 있게 되 었다.

홀 주위를 둘러싸고 기둥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기둥마다 무슨 조각들이 새겨져 있었다. 천장은 별로 높지는 않았지만 횃불을 비춰보자 그림이 그려져 있었던 흔적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무슨 그림인지 도저히 알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그리고 홀 바닥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으며 지저분하게 흩어진 나 뭇조각, 천조각, 부러진 칼 등이 보였다. 곳곳에 걸린 거미줄은 덩어리져 늘어져 있었다. 바닥은 온갖 지저분한 것들이 기어다닌 모양이다. 별의별 얼룩들과 무엇의 시체인지도 구분하지 못할 썩은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이상하군. 여기는 확실히 300년은 묵은 느낌이 나는데.”

칼은 먼지를 들이마시지 않으려 애쓰면서 말했다. 칼이 말하자마자 ‘푸드드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들은 주춤하며 고개를 들었고 곧 복도 저편으로 날아가는 박쥐의 모습을 보았다.

샌슨은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가리면서 말했다.

“아니, 어떻게 지하 동굴에 먼지가 이렇게도 많이 쌓여 있지요?”

“아마도 환기 시설이 되어 있다는 말이겠지. 그러한 환기구를 통해 외부의 먼지들이 들어와 쌓였을 테고. 하긴 이런 지하에 환기 시설이 되어 있지 않다면 큰일이겠 군.”

우리는 모두 샌슨을 따라서 손수건을 꺼내어 복면을 만들었다. 칼은 복면이 가장 안 어울리는 얼굴이었고 두 아가씨들은 복면을 해도 예뻤다. 제레인트는 천장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저 그림은 왜 저리 훼손되어 있을까요? 이 아래에는 음식 재료마저도 신선하지 않았습니까?”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래는 주로 창고로 이용되는 공간이라 보존의 마법을 부여한 것일 테지요. 우리가 들어온 수로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아래는 대미궁의 최하층일 테니까 중요 물품을 보존하는 창고의 위치로는 적당하겠지요. 그리고 여기는 원래 거주 공간이라 그런 것을 걸어두지 않았고, 우리는 대미궁의 아래쪽에서부터 거꾸로 들어온 셈 이군요.”

“음. 그렇군요. 그런데 가장 왼쪽 통로로 가라고 했던가?”

우리가 올라온 계단 맞은편으로 긴 통로가 보였다.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에도 긴 통로가 있었다. 우리는 그중에서 왼쪽 통로로 들어섰다.

통로 바닥에는 원래 카펫이 깔려 있었을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형체를 짐작하기 어려운 넝마가 깔려 있을 뿐이다. 먼지와 수많은 얼룩, 게다가 발자국이 덮이고 쌓 인 모습, 그리고 수많은 세월이 더해져 거의 돌바닥처럼 굳어 있었다. 여름철에 들어왔다면 각종 곤충들과 뱀들이 우리를 성대히 환영해 주었을 듯하다.

“저게 뭐야?”

샌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들은 통로 앞쪽에 뭔가 희끄무레한 것이 보이는 것을 깨닫고는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이루릴은 말했다. “유골입니다.”

유골? 조금 더 다가가 보니 과연 통로 옆벽에 기대어 앉은 백골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횃불을 가까이 비추자 우리 일행들은 유골을 조사했다.

그것은 누가 봐도 오크의 유골이었다. 손을 대면 바스라져버릴 지경이지만 저 갑옷은 그런 대로 원형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오크식이었다. 두개골의 모양을 봐 도, 손이나 발을 봐도 확실했다. 칼은 나직하게 말했다.

“여기가 대미궁, 드래곤 로드의 거처였으니 오크가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아. 그런데 이 오크는 참 이상하군.”

“예?”

“왜 통로에 죽어 있지? 통로라는 것은 죽어 있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지. 그건 둘째치더라도, 이 통로를 지나다니던 다른 오크들에게 거치적거렸을 텐데 왜 그대로 놔 두었지?”

“어? 그러네요. 음. 뭔가 난투가 일어난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내분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상하군. 드래곤 로드가 그런 것을 용납할 리가 없는데.”

그 순간 우리들은 모두 전율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낡은 공간, 도대체 누군가 손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통로와 홀과 계단, 이 아래쪽의 창고엔 보존의 마법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도대체 누군가 현재 거주하는 꼴 이 아니다. 제레인트는 이 광경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결론을 빠르게 말했다.

“우리는 드래곤 로드의 묘지에 들어와 있는 것일까요?”

“글쎄요. 수면기일까? 음. 어쨌든 현재 이곳은 전혀 관리되고 있지 않소. 그리고 관리가 소홀한 틈을 타서 어떤 내분 같은 것이 일어났을 수도 있겠지요. 좀더 둘러봅 시다.”

우리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통로 양쪽에는 간혹 방이 보였고 문짝이 떨어져 나간 방도 있었다. 우리들은 문짝이 떨어져 나간 방 안을 보고는 크게 의아해하게 되 었다.

방 안의 가구들은 모조리 없어져 있었으나 우리는 그것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오랜 기간에 걸쳐 불을 피운 자리가 남아 있었 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원래 화려하고 아름다웠을 것으로 짐작되는 가구들의 파편이 남아 있었다.

“가구를 부숴 불을 피웠군.”

게다가 사방에 흩어져 있는 모포 쪼가리들, 그리고 흩어진 취사 도구들은 아무래도 야영을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불룩한 모포를 들춰보니 그 아래에서는 오크의 유 골이 우릴 보고 불평하듯이 턱을 달각거렸다. 물론 모포를 들어올리자마자 곧 부서져버렸지만. 그러니까 뭐냐? 이 공간 전체가 한꺼번에 야만으로 돌아가 버렸다는 말이렷다? 제레인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상하군요. 이 아래에 막대한 창고가 있었는데 왜 거기서 살지 않고 여기서 이렇게 옹색하게 살았을까요?”

“역시, 그 창고의 물건은 건드릴 수 없는 것이오.”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했고 그러자 네리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칼은 추리를 계속했다.

“확실히 이곳은 관리되지 않았소. 이런 지하에서는 굶어죽기 십상이겠지. 우선은 가구와 남아 있던 물자들을 가지고 생활했겠지만 곧 물자는 바닥났고, 이 아래의 창고는 도저히 건드릴 수 없었던 것이오. 아래에 약탈의 흔적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아 틀림없소. 어쨌든 그런 궁핍한 생활 끝에 모조리 대미궁 밖으로 달아나 버렸 겠지. 그 와중에 생긴 무법 상태에서 살육이 있었을 테고.”

우리는 어두운 기분을 느끼며 방 바깥으로 나왔다.

다른 방들도 몇 개 들여다보았지만 사정은 비슷했다. 거의 모두가 휑뎅그렁한 공간이었을 뿐이고 어쩌다가 몇 개의 파편들이 흩어져 있을 뿐이다. 발견할 수 있는 것 이라고는 네리아가 주워든 금화 하나뿐이었다. 금화는 지금 사용되는 것과는 모양이 전혀 달랐다.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드래곤 로드 시대의 화폐로군. 우리가 배운 소중한 지식들 중엔 드래곤 로드에 기인하는 것도 많지. 화폐 제도도 그렇고.”

“마법도 그렇지요.”

이루릴의 말에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리아는 그것을 튕겼다가 받아내며 말했다.

“이건 가져도 되겠지요? 음, 여기는 심한 약탈을 당했잖아요. 그래도 안전한 것을 보니 무슨 마법은 없겠지요?”

“그렇겠지요.”

네리아는 금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면서도 아쉬운 얼굴이었다.

“에휴, 산더미 같은 금화 다 제쳐두고 겨우 요거 한 닢이라니.”

우리는 피식 웃으며 걸어갔다.

통로 끝에 도달하자 오른쪽으로 계단이 나타났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었다. 칼은 일행에게 말했다.

“자, 이 아래는 창고, 그리고 여긴 거주 공간이었으니 상관없지만, 이 위쪽부터는 정말 대미궁일 거야. 모두들 조심하십시다. 그 영상이 말했던 엄청난 함정이 있겠 지.”

그래서 선두에는 이루릴과 네리아가 섰다. 이루릴은 날카로운 눈이 있었고 네리아는 나이트호크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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