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7권 – 제13부 : 대마법사의 만가 4화

드래곤 라자 7권 – 제13부 : 대마법사의 만가 4화

4

콰과광! 덜컹덜컹.

폭풍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 문이 세차게 덜컹거렸다. 쏴아아아! 굉장한 빗소리와 함께 바라크 안으로 매서운 바람과 빗방울이 들이치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촛불은 당장 꺼졌고 벽난로의 불빛만이 남았다. 벽난로의 불꽃도 바람 때문에 크게 흔들려 방 안은 어둠 속에서 무시무시한 그림자들이 광란하는 악몽으로 바뀌고 말았다.

난 재빨리 달려가서 문을 붙잡아 다시 닫았다. 와! 굉장한걸? 문을 밀어붙이는 바람의 힘은 마치 여러 명의 인간들이 밀어붙이는 듯한 느낌마저 주 었다. 아니, 문 스스로가 살아 있는 생물처럼 반항하려 드는 것같이 느껴지는데? 간신히 문을 닫고 나자 그 짧은 시간 동안 몰아친 비바람 때문에 난 흠뻑 젖어버리고 말았다. 문에 등을 기댄 채 바라보자 난로의 희미한 불빛 속에서 쓰러진 초를 더듬어 세우고는 파이프를 이용해서 다시 초에 불을 붙이는 엑셀핸드의 모습이 보였다. 다시 방 안이 밝아졌다.

모든 사람들이 제각기 뭐라고 투덜거렸지만 칼과 하슬러만은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들의 고뇌에 빠진 얼굴을 한 채 주위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테이블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문을 밀어붙이는 힘이 더 강해진 것이 느껴졌다. 어, 어? 이거 장난이 아니네? 문을 걸어 잠가야 되겠군. 쾅쾅! 어라? 그 바람소리 마치 노크하는 소리처럼 들리는군?

“뭐야! 어서 문 여시오! 얼어죽을 지경이오!”

난 당황한 얼굴로 문을 열어 길시언을 맞이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내가 맞이한 것은 길시언으로 짐작되는 ‘무지무지한 속도로 뛰어 들어오는 시커먼 무엇’이었다.

“으, 으아아앗! 추워라. 에, 에취!”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왕위 계승권을 걷어차버린 완고한 남자답게, 길시언은 문과 벽난로 사이에 무서울 정도로 정확한 직선을 그리며 삽시 간에 방을 가로질렀다(그게 그거랑 무슨 상관이 있냐곤 묻지 마라. 나도 모르겠다.). 벽난로 속으로 뛰어들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운 속도로 달려가서 그 앞에 주저앉은 길시언의 모습은 볼 만했다. 완전히 젖어버린 데다가 두 팔을 감싸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몸에서 뚝뚝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아 래턱과 위턱을 맹렬하게 부딪치던 길시언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제야 벽에 기대앉아서는 무릎에 기절한 네리아를 올려둔 운차이를 발견하게 되었 다. 길시언의 눈이 커다랗게 바뀌었다.

“어, 어라? 보기 좋은, 우에취! 광경이군, 운차이. 훌쩍. 언제부터 그렇게 가까워진 거지?”

운차이의 얼굴이 팍 일그러지는 것을 보면서 길시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수건을 찾아 길시언에게 건네면서 네리아가 번개를 무서워한다는 사 실을 말해 주었다.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아, 그래? 에취! 그럼 숙녀를 잘 모시, 모시, 에취! 이런.”

길시언은 젖은 갑옷을 뜯어내듯이 벗고서는 셔츠까지 벗어서 물기를 짜내었다. 수건으로 상체를 대충 닦고 나서 그는 벽난로 앞에 앉아서는 셔츠를 들고 말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는 그때까지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라?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고 계셨던 겁니까? 훌쩍. 혹시 내 험담이라도 하고 있었습니까?”

칼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길시언은 앞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지만, 먼저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천천히 앞 이야기를 들려드리면 될까요?”

“예? 아, 얼마든지. 좋을 대로 하십시오.”

길시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길시언에게 목례하고는 하슬러를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시겠소?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아무도 모르는 그런 이야기들을 알게 된 것인지 궁금한데요.”

하슬러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시오네에게서 들었소.”

“시오네? 그 뱀파이어 말이오?”

“그렇소.”

아무래도 하슬러는 잠시 분위기가 소란스럽게 바뀌자 원래의 성격, 그러니까 과묵한 성격으로 돌아가버린 모양이다. 다시 아까처럼 말을 술술 꺼내 려면 퍽 힘든 모양이지? 칼은 인내심 있게 말을 걸었다.

“시오네가 어떻게 그 과거의 이야기를 아는지는 혹시 모릅니까?”

하슬러는 팔짱을 낀 채 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아야 되는 이유를 모르겠소.”

칼은 힘겨운 표정을 지으며 하슬러를 바라보았다. 하슬러는 길시언을 흘긋 바라보더니 잔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주인의 증오는 이제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소? 루트에리노 바이서스는 모든 자유로운 종족의 내일을 없애버린 자요. 모든 종족의 공적이지.”

“뭐라구?”

쿠다당.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길시언의 반문이 터져나왔다. 길시언의 목소리는 그의 경악을 담아 굉장히 높은 소리로 울려나왔다. 거의 비명이나 다름없었다. 칼은 찌푸린 얼굴로 하슬러를 바라보다가 다시 길시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길시언은 여전히 한 손엔 자신의 셔츠를 든 채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있었다.

“이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반역자답게 왕가를 능멸하려는 것이냐?”

하슬러는 적의가 충만한 눈으로 길시언을 노려보며 말했다.

“왕자님. 진실을 말하는 것이 능멸하는 것이라면, 난 지금 바이서스 왕가를 능멸하고 있소.”

길시언은 손을 들어올리다가 그제야 자신이 아직도 셔츠를 쥐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거친 동작으로 셔츠를 내팽개치고는 허리에 찬 칼자 루로 손을 가져가려다가 멈추면서 말했다.

“뭐가 진실이라는 거냐! 대왕께서 자유로운 종족들의 내일을 없애버렸다고? 모든 종족의 공적이라고? 네가 지금 분명히 그렇게 말한 거냐?”

“그렇소. ……심지어 인간마저도.”

“뭐라구?”

하슬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난 양쪽을 빠르게 살핀 다음 가슴을 벌렁거리며 호흡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는 길시언 쪽을 선택 했다. 싸움이 나면 길시언부터 말려야 되겠는걸. 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샌슨 쪽을 바라보니 그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는 눈 동자만 움직여 눈짓을 보내었다. ‘길시언을 말려.’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알았어.’

하슬러는 이제 똑바로 서서 길시언을 노려보며 말했다.

“인간마저도. 다른 모든 종족들이 용서한다 하더라도 인간들, 동족들의 내일마저 없애버린 점에서 루트에리노는 용서받을 수 없소. 왕자님.”

길시언은 타오르는 눈으로 하슬러를 쏘아보며 빠르게 말했다.

“설명해라.”

“길시언.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칼은 안타까운 듯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길시언은 칼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하슬러는 아무런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팔짱 을 낀 채 호기로운 태도로 길시언을 마주보면서 말했다.

“여덟 별을 파괴했으니까.”

“여덟 별이 대체 무엇이기에! 보석 따위 비싼 돌멩이가 무엇이기에!”

“우리를 무엇으로든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보석이지.”

하슬러의 대답은 평온했지만 길시언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하슬러를 바라보았다. 그는 입술을 몇 번 적시고 나서야 간신히 대답했다.

“무엇으로든?”

하슬러는 또박또박한 어조로 대담했다.

“영원한 부조리, 영원한 패러독스, 영원히 반복되는 비극을 모조리 소멸시킬 수 있는 보석입니다. 우리를 불사의 생물로 바꿀 수도 있겠지요, 무한 을 생각하는 유한 생명이라는 것이 우리의 부조리라면. 우리의 성(性)을 없애버릴 수도 있을 겁니다, 하나되어야 살 수 있는 존재가 남성과 여성으로 나뉜 것이 우리의 패러독스라면. 심지어 우리를 신으로 바꿀 수도 있겠지요, 우리가 신을 꿈꿀 줄 아는 인간인 것이 우리의 비극이라면.”

“뭐라구?”

길시언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칼자루로 향하던 길시언의 오른손은 어느새 허벅지쯤으로 늘어뜨려져 있었다. 다행이군. 당장 칼부림 날 일은 없겠는데. 나의 작은 안심과는 상관없이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젓다가 말했다.

“날더러 지금 그 허무맹랑한 말을 믿으라는 거냐?”

“진실을 믿을 줄 안다면, 제 말도 믿을 수 있을 거요, 왕자님.”

길시언은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그는 하슬러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 보석이 네가 말한 대로의 어처구니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없애버리는 것이 낫다. 대왕께선 현명하셨다.”

하슬러 역시 길시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이제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없애버리는 편이 나은 것이 아니라 없애버려야 된다. 왜 우리가 우리 아닌 다른 자가 되어야 된단 말인가. 난 자신을 바라볼 줄 몰라서 자신 이 다른 것 되기를 바라는 바보가 아니다. 그리고 누구도 그런 바보여서는 안 되고.”

하슬러는 한숨을 내쉬더니 그 한숨의 끄트머리에 혼잣말 하나를 달았다.

“핏줄의 힘은 무섭군.”

길시언은 빙긋 웃으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는 벗은 상체를 내려다보더니 집어던진 셔츠를 다시 주워올리며 말했다.

“난 그런 자들을 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자가, 자신 스스로도 감싸안을 줄 모르는 자가 자신에게 불만을 느끼고 다른 자 되기를 원 하는 것이다. 그 주제에 관해서라면, 운차이에게 물어보면 그들 동족 사이로 전해 내려오는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주겠지.”

여전히 무릎에 네리아를 얹은 채(만일 누군가 나서서 네리아를 치워주지 않으면 운차이는 오늘 밤새도록 저런 자세로 있게 될 것이 확실하다.), 천장을 노려보던 운 차이는 피식 웃었다. 불만족스러운 소년의 이야기였지. 길시언의 이야기든 하슬러의 이야기든 제대로 이해하고 판단하긴 어려웠지만 왠지 길시언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더 끌리는 것 같은데.

그러나 하슬러는 별로 끌리지 않는 모양이다.

“왕자님. 당신의 이야기를 듣자니 저 역시 어떤 자들이 떠오르는군요.”

길시언은 삐딱한 눈길로 하슬러를 바라보았다.

“자신만을 끌어안은 채, 자신의 힘으로 일어선다고 생각하고 타인이라는 것의 의미를 모르는 작자들이 있소. 그런 자들은 타인이라는 것이 도대체 뭔지를, 자신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도무지 모르오. 자신을 희생할 줄 모르기 때문에 타인의 희생에 대해서는 아예 이 해하질 못하는 사람들, 그래서 마음대로 타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작자들이오. 혹 머리로는 알지 몰라도 가슴으로는 모르오.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똑같이 가족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을 알며…………, 가족들을 사랑하는…………….”

하슬러의 말끝은 희미하게 사그라들었다. 그는 뜨거운 눈으로 침대 위에 누운 에포닌을 바라보았다. 방 안의 누구도, 설령 프림 블레이드라도 이 침 묵에는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슬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힘없이 칼을 바라보며 말했다.

“날 어쩔 생각입니까.”

칼은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그는 먼저 길시언을 바라보다가 다시 하슬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길시언을 바라보며 말했다.

“길시언이 아니라 바이서스 전하께 묻겠습니다. 그 반란 혐의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국왕의 적인 그란 하슬러를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 까.”

길시언은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셔츠를 내려다보더니 탁탁 털어서 꿰어입기 시작했다. 셔츠를 다 입고 나서는 옷의 주름을 펴고 솔기와 소매 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칼은 조용히, 하지만 끈끈한 시선으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길시언은 한숨을 쉬듯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여기 레인저 대장에게 부탁했습니다. 내일 아침 하슬러를 수도로 연행할 대원을 몇 명 차출해 달라고 말입니다.”

하슬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칼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한결같은 시선으로 길시언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그러실 겁니까.”

“예. 반역은……………. 내가 아무리 궁성과 연을 끊은 자라곤 하지만 반역자를 사사로이 방면할 수는 없습니다.”

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반역자의 경우 그 가족에게서도 죄의 고리를 벗길 수 없을 텐데요. 에포닌 하슬러 양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칼은 태평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길시언을 궁지로 몰아가고 있었다. 엑셀핸드는 한가롭게 파이프를 피우면서도 간혹 파이프 위로 길시언을 향해 번 쩍이는 눈빛을 보내었다. 아프나이델은 그저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제레인트의 경우엔 아예 드러내놓고 길시언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찬가지로……..”

하슬러의 눈이 번뜩였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그의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가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칼은 말했다.

“압송됩니까?”

“그렇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칼은 더 이상 할말이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래서 길시언은 다음 말을 꺼내놓기가 상당히 힘들어졌다. 그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에포닌 양은 할슈타일 가문에 양녀로 있었고, 그러니까 이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은 누구의 눈에도 확실합니다. 나는, 에, 그러니까 편지를 쓸 생각입니다.”

“편지라구요.”

“예. 그란 하슬러와 에포닌 하슬러 부녀에 대한…, 그러니까, 진정서 같은 것을 쓸 생각입니다. 닐시언 전하에게 그들의 죄를 보지 말고 그들 자체 를 살피기를 간청할 작정입니다.”

칼은 미소를 지었다. 샌슨은 불만족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왕자님. 그게 당신의 최선이라는 것은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요. 이왕이면 앞으로 당신께서 궁성과 연을 끊었다는 거짓말 좀 그만 하면 더 좋겠는데 말이야. 쳇. 갈 데 없는 왕자님 같으니라구. 오늘 아침 임펠 리 버의 당신 모습, 기억에 생생한걸요?

하슬러는 슬픈 눈빛으로 다시 에포닌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더니 모든 사람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천천히 침대로 걸어갔다. 침

대 옆에 무릎을 꿇은 하슬러는 손을 뻗더니 에포닌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에포닌은 뭐라고 잠꼬대를 웅얼거리더니 몸을 뒤척이다가 한 손을 시트 밖으로 내놓았다. 하슬러는 두 손을 조심스럽게 뻗어 에포닌의 손을 잡았다. 마치 건드리면 그대로 손자국이 나버릴 순금 덩이라도 잡아올리듯, 하슬러는 부드럽게 에포닌의 손을 잡아올려서는 두 손으로 꼭 쥐었다.

그는 에포닌의 손을 자신의 이마로 가져왔다.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에포닌의 손에 이마를 가져다댄 하슬러의 분위기는 성직자만큼이나 경건했고, 그 옆에 앉아 있는 제레인트가 오히려 칼잡이나 술주정꾼 정도로 보였다. 하지만 하슬러를 바라보는 제레인트의 따뜻한 눈길은 나로 하여금 그가 프 리스트임을 잊어먹지 않도록 해주었다.

하슬러는 에포닌의 손을 꼭 감아쥔 채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왕자님. 이 애만은………… 눈감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길시언은 찌푸린 눈으로 하슬러의 등을 바라보았다. 촛불 빛을 등진 하슬러의 얼굴은 캄캄했다. 단지 그의 넓은 등만이 발갛게 떠오를 뿐이었다. 길 시언은 뭔가 쓴 것을 맛보는 얼굴로 말했다.

“에포닌을 놔줄 거라면 당신도 놔줬을 거요. 당신은 넥슨의 종복으로서의 활동 이상을 한 적이 없소. 하지만 법 앞에 만인은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오. 법이 그 시녀로서 봉사하는 정의에 비추어보아도 마찬가지고.”

하슬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굳어버린 듯했다.

바람 소리는 격렬하게 온 산을 흔들었다. 이 두껍고 튼튼한 바라크 안에 앉아 있지만 어디선가 새어들어 온 바람은 초의 불꽃을 일렁거리게 만들었 다.

난 가만히 초를 바라보았다. 누가 옳은 것이지?

루트에리노 대왕과 길시언, 그리고 핸드레이크와 하슬러. 누가 옳은 것일까? 인간의 부조리라. 글쎄. 세상에 부조리 없는 생물이야 없잖아. 물에서 떠나면 죽어버리는 개구리도 물 속에선 빠져죽는다. 그러니까 나와서 개골거리지. 완전한 것이 어디 있겠어? 그냥 살면 되는 거 아닐까.

하지만…………, 아이는 커서 어른이 되고, 시간이 있는 한 어떻게든 변화해야 되지. 그렇다면 영원히 자신의 부조리를 안고 산다는 것도 고려해 볼 문제 야. 엄연히 있는 시간을 무시하고 사는 자가 정말 바보지. 변화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발전과 퇴화 중에선 발전이 낫지 않을까. 우리는 신이 되어 야 하는 것 아닐까.

촛불은 쉼없이 깜빡거렸다.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나는군.

‘초가 이야기한다고요?”

‘봐. 입을 움직이고 있잖아. 초는 깜빡거리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거야.’

‘아버지. 아무런 걱정 마세요. 내일 칼을 모시고 올 테니까요. 칼은 약학에도 능숙하니까…………, 악!’

‘욘석아! 입을 꽉 다물어. 그래야 들을 수 있어. 초의 이야기를 말이야.’

좋아, 해볼까? 난 입을 꽉 다물고 내 코에서 나는 호흡소리에서도, 먼곳에서 들려오는 듯하지만 사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내 맥박소리에서도 멀어지기 시작했다. 가만히 촛불의 불꽃만을 바라보았다.

초가 대답해 주었다.

‘이봐, 넌 헬턴트 마을의 초장이 후보이자 빛의 세공사다. 잠자코 내 자태를 감상해. 그리고 다음에 나 같은 멋진 빛을 만들어낼 생각을 하라구. 자크 의 말이 기억나지 않아? 하드 베팅은 피하는 법이고, 거물들의 일에는 끼어드는 것이 아니야.’

맙소사. 아버지! 왜 초는 멍청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말해 주지 않았어요? 이 멍청한 초야. 넌 틀림없이 제조 과정에서 엉터리 밀랍이 들어갔을 거 야. 지방 덩어리에 뼛조각이 섞여 들어갔거나…………. 아니면 파라핀을 제대로 녹이지 못해서 불균질 상태일 거다. 이봐, 들어보라구. 넌 자신을 태워서 빛을 만들어. 그렇다면 인간도 자신을 태워서 뭔가가 되어야 하지 않겠어? 타는 것이 두려우면 영원히 빛을 만들지 못한다는 초장이 농담도 몰라? 으윽. 아버지껜 죄송한 말이지만 초와 이야기를 나누자니 수준이 떨어지는 느낌이군. 제레인트는 신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고개를 돌려 제레인트를 보았다. 두 눈엔 벽난로의 불빛을 담아 반짝거리는 제레인트의 얼굴. 난로의 불길은 산사의 생활을 하며 검게 탄 그의 얼굴 을 희한한 색으로 물들여 놓았다. 게다가 조금 전의 대화는 그의 얼굴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놓은 듯하다. 제레인트는 말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하슬러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시언은 방금 말린 셔츠가 불편하다는 듯이 몸을 이리저리 뒤틀다가 얼굴을 좀 만지작거리고는,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운차이는 원래 간첩이었소. 간첩도 사면되는데 반역자라고 해서 특별히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거요.”

의도야 좋았지만, 길시언의 말은 하슬러를 안심시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운차이마저도 얼굴을 찡그리게 만들었다. 안하느니만 못한 말이지, 뭐. 엑셀핸드의 파이프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칼이 입을 열었다.

“하슬러 씨.”

하슬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칼은 목소리를 더 높일 듯이 가슴을 펴다가 그냥 조용히 하슬러의 등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하슬러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에포닌의 이마를 쓸어주고는 에포닌의 손을 조심스럽게 시트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 동작은 엄숙하기까지 했다. 아버지! 저걸 좀 보라구요! 매 일 아침 날 걷어차서 깨우는 거 이젠 지겹지 않아요? 아버지 구해 드리고 나면 먼저 이 광경에 대한 이야기부터 들려드려야겠다.

하슬러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칼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심정이 괴롭겠지만, 이왕이면 아까의 이야기를 다 듣고 싶소.”

하슬러는 그저 조용히 테이블만을 노려보았다. 고개를 조금 돌리자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몸을 뒤틀며 하품을 간신히 참아넘기는 샌슨의 모습이 보 였다. 칼은 이야기했다.

“루트에리노 대왕의 선택에 대해서는 지금 당장은 뭐라 말할 수가 없군요. 어차피 과거의 일. 300년 전의 일이니만큼 거기에 대해 뭐라 화를 낸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 될 것 같소.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이 모든 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입니까? 시오네에게 들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시오네는 어떻 게………….”

“생의 모든 희망이 파괴되고.”

하슬러는 갑자기 터지듯이 말문을 열었다. 깜짝 놀란 엑셀핸드는 파이프를 떨어뜨릴 뻔하다가 간신히 잡아내었지만 불행하게도 손가락을 파이프 속 에 집어넣고 말았다. 그는 울상이 되어 손가락을 빨기 시작했고 하슬러는 헛기침을 좀 한 다음 다시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다.

“생의 모든 희망이 파괴되고, 남은 하나의 희망마저 거절당한 핸드레이크는 자포자기하게 되었소.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마법 연구에 정진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자신의 손으로 일구어내다시피한 바이서스에도 거의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마법 연구에만 골몰했소.”

길시언은 무릎에 팔꿈치를 얹은 채 하슬러 쪽으로 상체를 굽혔다.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소. 바이서스 건국 초기의 핸드레이크의 활동은 거의 드물지요. 그만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나타나야 할 업적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고 그래서 아직껏 그에 관한 이야기는 기록보다는 전설에서 더 많이 찾아볼 수 있지.”

아프나이델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예. 심지어 빛의 탑의 기록에도 핸드레이크의 일은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아마도 그는 마법 연구에 골몰하느라 국사나 길드의 일에 대해선 관심도 두지 않은 것이었겠지요. 그리고 그 이유는 짐작할 수 있겠군 요.”

“짐작하신다구요?”

아프나이델은 당혹한 목소리로 말했고 하슬러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천천히 한 마디 한 마디를 꺼내놓았다.

“내 생각이지만, 아마도 파괴된 여덟 별을 대신할 클래스 10의 마법을 만들어내려는 것이었겠지요.”

뭐? 클래스 10의 마법?

맞아! 그렇구나.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아프나이델은 의아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그래, 맞았어! 모든 것이 딱 맞아떨어진다. 이루릴의 말에 의하 면 클래스 10의 마법은 세계 창조였다. 핸드레이크는 여덟 별로써 모든 존재가 완전해지는 세계를 만들려고 했지만, 그 여덟 별은 파괴되었으니까, 그래! 그러니까 그는 여덟 별 대신 모든 존재가 완전할 수 있는 세계를…………, 직접 창조하려 했던 것이었겠지!

“세상에, 이토록 야심만만한 사나이라니!”

내 감탄에 아프나이델의 눈은 더욱 휘둥그레졌다.

“어? 어? 후치. 무슨 말이지? 클래스 10이라니? 게다가 내가 아니고 왜 네가 놀라는 거지? 내가 마법사라는 것은 불확실할지 몰라도 네가 마법사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고 보는데?”

“아프나이델은 마법사 맞으니까 겸양하지 않아도 돼요. 난 클래스 10이라는 말에 놀란 것이 아니라 핸드레이크의 꿍꿍이 때문에 놀란 것이고.”

“꿍꿍이?”

난 어깨를 으쓱였다. 뭐라고 설명해 주기가 어려운 말이니까. 핸드레이크는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 세계를 뜯어고치려고 든 자란 말이야! 드래곤 로드로 하여금 꼬리를 말고 달아나게……… 잠깐, 드래곤이 하늘을 날 땐 꼬리를 말지 않던가? 그럼 그 대신 아무거나 말고 달아나게 만든 작자답게 이 황당한 남자는 스스로 신이 되려 했던 거였다구!

하슬러는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이야기는 천천히 해드리리다. 지금은 당신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습니다만.”

하슬러는 칼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어쨌든 그는 바이서스 임펠에는 거의 머물지 않고 다시 세계를 주유하는 생활을 계속했소.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정체를 숨긴 여행이었 지. 때론 가명을 쓰고, 때론 마법으로 모습을 바꾸고…………. 이 과정에서 그가 만나고 때론 지도하기도 했던 마법 수련사들이 훗날 빛의 탑을 이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당신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알고 있습니다. 남부 대로의 솔로처가 핸드레이크를 만난 이야기는 유명하지요.”

아프나이델은 내가 설명해 주지 않아서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자신의 대선배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곧 반색을 하며 다시 하슬러와 칼의 이야기에 빨려들어 갔다. 길시언은 의자를 거꾸로 돌리더니 등받이 위에 턱을 올려놓고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는 이때 저 먼 자이펀에도 갔던 모양이오.”

천장을 바라보던 운차이는 이 말에 고개를 내렸다.

“세계를 제멋대로 돌아다닌 자였으니 별로 이상할 것은 없소. 그런데 그는 언젠가 자이펀과 사우스 그레이드의 접경지에 위치한 아비스의 미궁에 들어갔던 모양이오.”

“아비스의 미궁에!”

손가락을 빨고 있던 엑셀핸드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하슬러는 차가운 눈으로 엑셀핸드를 바라보았지만 엑셀핸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 다.

“그가 아비스의 미궁에도 들어갔단 말인가! 맙소사! 그렇다면 그는 우리 드워프들 중에서도 한 명도 없는 2대 미궁의 침입자란 말인가!” “2대 미궁의 침입자?”

엑셀핸드는 수염이 모두 곤두설 만큼 흥분해서는 말했다.

“그는 대미궁에도 들어갔다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는 대미궁과 아비스의 미궁 양쪽에 모두 발을 들여놓았다는 말이지 않나! 맙소사. 이건 드워 프의 수치로군. 드워프들도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을 인간이 해내다니! 물론 대마법사 핸드레이크니까 가능한 일일 테지만, 정녕 놀라운 일이군!” 하슬러는 차갑게 웃었다.

“그렇소, 노커여. 조금 전 칼 씨가 말하지 않았소?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로 바꿔버리는 존재요. 어떻게 본다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종족이지. 어 떤 미궁도, 어떤 산악, 어떤 바다도 인간의 발 앞에 점령되지 않을 수 없소. 당신은 말 위에서도 불안해하지만, 우리는 하늘도 정복했다오. 마법사들 은 하늘을 날아다니지.”

“끄으으응!”

엑셀핸드는 끔찍한 신음을 흘렸지만 별말은 하지 않은 채 다시 주저앉아 파이프만 뻑뻑 피워대기 시작했다. 마치 말 같지 않아서 대꾸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슬러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테이블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핸드레이크는 아비스의 미궁도 정복했소. 시오네를 만나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으니까.”

칼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시오네가 핸드레이크를 만났다고요?”

시오네가? 아, 잠깐. 시오네는 뱀파이어지. 그러니까 그 수명은 무한이라고 할 수도 있지. 최소한 그녀의 그 끔찍한 생명의 원천인 피가 공급되는 한 그녀는 영원히 사는 셈이지. 맞아! 가능해! 300년 전의 인물과 만나는 것도 가능한 일이군! 하지만 이건 정말이지 혼란스러운걸. 현재가 제멋대로 과 거와 연결되어 버리니 시간 관념이 엉망이 되잖아.

“그렇소. 시오네는 뱀파이어였지 않소? 아비스의 미궁이야말로 그녀에게 어울리는 장소지. 그녀는 그곳에서 감히 아비스의 미궁에 도전하는 인간들 을 자신의 제물로 삼아 불유쾌한 삶을 이어나가는 몬스터였소.”

놀랍게도 하슬러는 강한 불쾌감을 나타냈다. 동지 아니었던가?

“그녀는 그 안에서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살고 있었소. 드래곤 로드가 세계를 지배하다가 핸드레이크와 루트에리노의 손에 의해 쫓 겨났다는 사실 같은 것은 전혀 알지도 못했소. 그녀는 공허하고 암흑만이 가득한 아비스의 미궁을 모든 세계로 여기고 살았던 비참한 괴물이었소. 핸 드레이크가 그곳에 들어갔을 때도 시오네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를 공격했지.”

“맙소사…………. 그래서?”

“시오네로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고 할 밖에. 핸드레이크는 간단히 그녀를 제압해 버렸소.”

아프나이델은 히죽 웃었다. 대선배의 위업을 듣는 일이 그를 즐겁게 만든 모양이다. 난 빙긋 웃고는 다시 하슬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핸드레이크는 그녀를 없애버리지 않았던 모양이오. 그 비참함을, 미궁 이외에 세계를 알지 못하고 자기 이외의 모든 것은 먹이로만 생각하 는 비참한 몬스터를 동정했던 것인지, 나로선 알 수가 없소. 시오네도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들려주지 않았으니까. 어찌 되었건 시오네는 핸 드레이크 본인으로부터 그 이야기들을 듣게 된 모양이오. 아마도 함께 다닌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정확하겐 모르겠소.”

“그렇습니까.”

칼은 평온하게 말했지만 아프나이델은 격정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면, 에, 그러니까 시오네는 핸드레이크의 전인인 모양이군요! 알려진 대로 무지개의 솔로처가 핸드레이크의 마지막 전인인 것이 아니라 시 오네가 바로 핸드레이크의 마지막 제자였군요?”

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아프나이델 씨. 당신 생각으론 시오네가 핸드레이크의 제자라 할 만한 실력이었다고 봅니까?”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끄덕여가며 말했다.

“예………, 사실 마법 사용자들 중에서 인간 마법사들만큼 우수한 실력을 갖춘 자들은 보기 어렵습니다. 인간들은 빛의 탑을 이용하거나, 뭐 기타 등등 으로 선학께서 후학에게 지식을 전수해 주고 후학을 단련시켜 주시니까요. 아, 저 조화로운 엘프에겐 마법의 전승 지식이 대단합니다만, 뱀파이어는? 글쎄요. 뱀파이어는 누구에게 마법을 배우겠습니까? 시오네는 분명 보통 뱀파이어에게서 기대될 수 있는 정도보단 훨씬 숙련되고 고급한 마법 실력

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그래서 시오네는 그런 이야기를 아는 것이었군요. 그리고 시오네가 당신 주인에게 그런 이야기들을 들려준 것입니까?”

“그렇소. 그리고 난 항상 주인의 곁에 있었으므로 그 이야기를 같이 들을 수 있었소.”

“그랬군요………….”

칼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슬러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 들려줄 말은 다했소. 됐소? 그럼 난 이만 자고 싶은데. 내일은 수년 만에 내 딸과 함께 걸을 수 있을 테니 푹 자두고 싶군요.” 하슬러는 표정 없는 얼굴로 길시언을 흘끔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어두운 표정으로 하슬러를 바라보았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하슬러는 몸을 던진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 될 듯한 동작으로 침대에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보던 샌슨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성격에 맞지 않게 너무 말을 많이 해서 피곤한 모양이야.”

별로 귀담아 들을 말도 아니었고, 샌슨은 그저 어깨를 으쓱이고는 역시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난 칼의 얼굴을 살폈다.

칼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벼락이 칠 때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한 망령처럼 보였지만, 난로의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또 정반대로 뭔가 세 상을 위한 따스한 계획이라도 세우기 위해 고심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난 자신도 모르게 말해 버리고 말았다.

“그래봐야 세상은 제멋대로 돌아가요.”

“응? 뭐라고 했나, 네드발 군?”

“웃긴다구요. 핸드레이크가 어쨌건 루트에리노 대왕이 어쨌건 세상은 제멋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데요?”

길시언은 등받이에 괴고 있던 머리를 내 쪽으로 움직였다. 칼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넨 그 두 분이 모두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보았다고 여겨지는 모양이지?”

“어…………, 물론 핸드레이크는 아직도 이름이 자자한 대마법사고, 루트에리노 대왕도 뭐라 흠잡을 데 없는 모범적인 영웅이시지만, 두 사람이 세상을 가지고 이랬다 저랬다 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글쎄? 최소한 루트에리노 대왕께선 드래곤 로드의 세상을 자유 종족들의 세상으로 바꾸시지 않았는가?”

“칼. 능청을 떨어서 제자를 시험에 빠뜨릴 생각인 모양인데,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뭐가 드래곤 로드의 세상이고 뭐가 자유 종족들 의 세상이라는 거예요?”

칼은 대답없이 그저 벌쭉 웃었다. 길시언은 등받이 위를 줄타기하고 있는 자신의 머리를 조금 흔든 다음 말했다.

“후치. 그렇게 생각하냐? 드래곤 로드의 세상도 아니었고, 자유 종족의 세상도 아니라구?”

“세상은 세상이에요. 누가 이 세상을 가지고 나의 세상이니 어쩌니 생각하겠다면, 난 말릴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나완 아무 상관없어요. 그걸 주장 함으로써 날 귀찮게 굴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나는 나고 너는 너다라는 식이냐?”

“나는 네가 될 수 없고 너는 내가 될 수 없다는 거죠. 사람 수만큼 많은 세상이라는 이야기 들어보셨어요? 핸드레이크의 세상은? 글쎄요. 뭔가 크게 개선해야 될 세상이었던 모양이죠. 여덟 별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루트에리노 대왕의 세상은? 아마 자기 다리로 걸으면 충분한 세상이었나 보지요. 도움 같은 거 없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인가 보지요.”

“……네 세상은 뭐냐?”

“제 세상이요? 글쎄요. 대왕님의 세상 쪽이 마음엔 좀더 들어요.”

“대왕의 세상이?”

“예. 세상이 자기 다리로 충분히 걸을 수 있는 편이 좋지, 지독한 부조리로 가득 차서 사는 게 곧 고통인 세상이라면 그거 어디 살맛 나겠어요? 게다 가 난 핸드레이크처럼 대마법사도 아니니까 여덟 별 같은 것을 찾아서 세상을 뜯어고칠 능력도 안 되는걸요. 그러니 세상은 적당히 노력하면 자기 다 리로 얼마든지 걸을 수 있는 편으로 남는 게 좋지요.”

칼은 촛불에서 고개를 조금 돌려 볼만 발갛게 빛나고 있을 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음흉스럽게도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길시 언은 날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세상의 원래 모습이야 어쨌든, 불합리하든 합리적이든, 개선해야 될 필요가 넘치는 그 자체로 완벽하든 너완 아무 상관이 없단 말이냐? 세상의 진실보다는 너 자신이 더 중요하다는 거냐?”

“예. 그래요. 페어리퀸의 말을 좀 바꿔 말해 볼까요? 페어리퀸은 자기가 있고 타인이 있다고 했어요. 난 이렇게 말하지요. 자기가 있어야 세계도 있 다고. 그런데 난 지금 몹시 졸리고, 따라서 날 세계와 단절시켜서 수마(魔)의 나라로 보낼 생각인데요.”

길시언은 갑자기 두 팔을 들어올렸다. 그는 머리를 쓸어올리더니 목 뒤로 손을 깍지 끼고는 천장을 바라보며 소리없이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길 시언은 다시 고개를 내려 날 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 긴 하루였다. 그리고 피로한 사람들의 대화 주제론 너무 무겁기도 하고. 쉬도록 해라.”

고맙다고 말해야 되나? 내가 자고 싶어서 자는데 말이야. 하하.

밤새 내리던 비는 보슬비로 바뀌어 있었다.

가까운 산들의 녹색은 촉촉하게 젖어 반짝였고 조금 떨어진 산들은 청회색으로 아련히 사라져갔다. 산자락 자락마다 감고 도는 아침 안개의 희뿌연 흐름 속에 대지는 잠겨들어 보이지 않았다. 안개 위로 산봉우리와 산등성이만이 흘러 떠가는 듯했다.

머리카락을 촉촉이 젖어들게 만드는 빗방울들. 검푸른 아침 공기 속에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빗방울들이 스며들듯 떠가듯 그렇게 내리고 있었다. 난 잠시 고개를 돌려 내 어깨의 갑옷 가죽에 맞아 튕겨오르는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어젯밤엔…………, 미안했어.”

“잊었다고 전해 줘.”

“라는군요.”

“저……………, 불쾌했을 텐데, 끄, 끝까지 신경 써줘서 고마워.”

“마지못해 한 일이지 본심으로 한 일이 아니라고 전해 줘.”

“라는군요.”

“……………그렇게 정떨어지게 말하지 마.”

“특별히 정 붙이고 싶은 생각도 없다고 전해 줘.”

“그런데 내 생각에도 그렇게 말…, 알았어요! 그렇게 노려보지 말아요. 라는군요, 젠장.”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은 자칫 무서운 상황을 야기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바라크를 나서서, 볼에 엉겨붙 는 빗살 속을 걷는 일까지에선 별로 위험을 느끼지 못했다. 느낀 것이라고는 촉촉한 싱그러움뿐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난 절벽 언저리의 바위 위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가부좌를 틀고 앉은 운차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내가 위기로 다가가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운차이는 은자라도 되는 양 바위 위에 그럴듯한 자세로 앉아 명상을 하고 있었고 난 그저 그의 옆에 앉아 함께 산자락과 아침 안개를 내려다보았다. 아, 운차이는 눈을 감고 있었으므로 산자락과 아침 안개, 그리고 대기 속으로 녹아가는 듯한 빗방울은 나 혼자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때 문이 열리며 네리아가 나온 것이다. 네리아는 나와 운차이를 보더니 흠칫했다. 그러다가 네리아는 천천히 걸어왔고 난 그때서야 뭔가 불안하게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난 도망갈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네리아는 날 사이에 두고 운차이와 떨어져 앉아서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고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운차이는 눈도 뜨지 않은 채 냉랭하게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말을 전해 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감정이 없는 무정물 흉내를 내야 하는 것이다. 젠장.

고요한 아침이다. 귀밑머리에 엉겨드는 미세한 빗방울들은 선뜻하면서 따스하다. 그리고 희푸른 산과 언덕들 주위로는 안개들이 꿈결 속의 무엇처 럼 꿈틀거리고 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내려다보면서 무정물 흉내를 내어야 하다니 정말 신세 고약하기 짝이 없군그래.

네리아는 다시 조심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기분 많이 나빴어?”

운차이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라는군요.’라고 말하려다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네리아가 이상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 았다. 에휴.

운차이는 눈을 감은 채 여전히 곧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네리아는 입술을 깨물더니 운차이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쏘아보는 것은 좋은데, 네리아. 당 신과 운차이 사이엔 내가 끼여 있다구.

“기분 더러웠어?”

네리아는 뾰족한 목소리로 말해 버렸다. 음. 그래. 말해 버렸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겠는걸. 운차이는 여전히 바위보다 더 바위 같은 자세로 앉아 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네리아의 목소리가 더욱 날카롭게 바뀌었다.

“역겨웠어? 구역질이 났어?”

아이고, 젠장! 사람을 정말 난처하게 만드는군.

“네리아. 말이 좀 심하군요. 설마 운차이가…………….”

“끼어들지 마!”

“예…….”

제길! 그럼 이왕이면 난 좀 빼놓고 말할 것이지, 애매한 사람을 가운데 끼워놓고 사람 취급도 하지 않으면서 말싸움이라니. 그때 바위가 말했다. 아 니, 운차이가 말했다.

“별로. 측은했을 뿐이다.”

“라는군…………이 아니라!”

으아아, 맙소사! 난 내 귀가 들은 말이 의심스러워 네리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네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진 것을 보고서야 내 귀의 성능에 대해 안심 할 수 있었다. 음. 좀 잘려나갔지만 그래도 들을 건 제대로 듣고 있군그래. 그런데 정말 운차이가 저렇게 말했나? 네리아는 몹시 당황한 목소리로 말

했다.

“그랬어? 어, 저, 운차이?”

운차이는 눈을 꾹 감은 채였다. 그는 입술을 움직이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금씩 움직여 가며 말했다.

“다른 감정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를 비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네리아는 손을 가슴 앞까지 들어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그러더니 네리아는 두 손을 꼭 마주쥐었다가 다시 손을 들어올려 허공을 더듬었다.

“저, 저, 지금 나한테 말하는 거 맞아?”

운차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네리아는 이제 손을 입 앞에 모으더니 손톱을 깨물기 시작했다.

“측은했어? 저, 멍청하게 번개 같은 거 무서워하고 그런다고…………, 바보처럼 보이지 않았어?”

운차이는 갑자기 눈을 떴다. 그는 고개를 휙 돌리더니 네리아를 바라보며 쌀쌀맞게 말했다.

“내가 여자에게 말을 못한다고 날 바보라고 생각했나?”

너무 똑바로 바라보며 말해서 오히려 이상하긴 하지만 분명히 네리아를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네리아는 다시 정신 없이 손을 휘젓기 시작했다. 조금만 지나면 아마도 청회색 아침 하늘을 향해 날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 어, 그런 거 아냐, 아니, 그런 적 없어. 그러니까…………….”

“널 바보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네리아는 운차이를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마워!”

그녀는 그대로 운차이에게 다가갈 것인지 아니면 몸을 돌려버릴 것인지 고민하는 것처럼 좌우로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운차이는 다시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았고 그러자 네리아는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급한 발소리가 등 뒤로 멀어졌다. 탁탁탁탁탁.

그리고 등 뒤에서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동시에 엑셀핸드의 비명이 들려왔다.

“으악! 내 코!”

“꺄하하하! 누가 그렇게 문 뒤에 서 있으래요? 좋은 아침이에요! 으음!”

“어, 어! 뭐야? 뭐하는 거야? 아니, 잠이 덜 깼어? 아침부터 이 늙다리 드워프가 인간 미남자로 보인 거야?”

“꺄하하하! 엑셀핸드 볼 너무너무 탱탱하네. 드워프는 나이 먹어도 그런가 보죠? 그런데 수염 좀 깎는 게 어때요? 키스할 때 너무 간지럽네용!”

고개를 돌려보니 문 안쪽으로 사라지는 네리아의 뒷모습과 자신의 볼을 쓰다듬으며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엑셀핸드의 모습이 보였다. 엑셀핸 드는 극히 의심스러운 얼굴로 문 안쪽을 바라보더니 곧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손을 들어 귀 옆에서 수직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묻는 듯한 눈길 을 보내었고 난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 절벽 저쪽의 내리막길에서 누군가가 안개 사이로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바라보니 안개 사이로 나타난 그림자는 아는 사람이었다.

“칼?”

“오, 일찍 일어났군, 네드발 군.”

칼은 뒷짐을 진 채 한 손엔 나뭇가지를 하나 들고 이리저리 휘저으며 느긋하게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어깨 부분이 적당히 젖어 있는 모습이 잘 보였 다. 운차이가 눈을 뜨면서 돌아보았다.

“이제 오십니까. 산책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예. 산속이라 그런지 아침 공기가 참 상쾌하군요.”

산책? 어, 칼도 참. 여행 중에 무슨 산책을 다녀왔다는 거야? 게다가 이렇게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산길에서 산책을 하다니. 칼은 내게 뭐라 말을 건 네려다가 어이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엑셀핸드의 모습을 보았다.

“아인델프 님? 아침부터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바로 그때 바라크 안쪽에선 샌슨의 당혹한 신음소리와 뭔가 우당탕 퉁탕거리는 소리, 그리고 레니의 기겁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 언니! 뭐 하는 거예요! 하지 마요!” “일어나! 잠꾸러기야. 햇님이 아침 산책을 시작했단 말이야! 꺄하하하!” 거짓말이다. 온통 구름이 낀데다가 비까지 오고 있어 해는 구경도 할 수 없는걸. 그리고 제레인트의 넋이 나간 듯한 웃음소리와 함께(“으허, 으허허허! 어흐?”), 무서운 기세로 엑셀핸드를 밀어젖히며 튀 어나오는 아프나이델의 모습이 보였다.

칼은 대경실색한 얼굴로 운차이와 날 번갈아 쳐다보았고, 그래서 난 재빨리 고개를 돌려 운차이를 뚫어지게 노려봄으로써 칼 역시 운차이만을 바라 보게 만들었다. 그러자 운차이는 헛기침을 하면서 다시 먼 산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뒤에선 여전히 괴상망측한 소음이 들려오는 가운데, 메드라인 고 개의 활기찬 아침이 시작되었다. 세상은 복된 것이야. 푸하하.

“아침에만 저런 거요, 아니면 하루 종일 저 상태요?”

메드라인 1-4………… 어쩌고의 레인저 대장 카무이 라다는 두 손 위에 턱을 올리고 앉아서 운차이를 바라보며 방긋방긋 웃거나 간혹 입을 가리고 ‘킥킥 킥!’하는 톱날 긁는 소리로 웃음으로써 운차이의 평화로운 아침 식사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네리아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샌 슨은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아침에만 저렇게 양호한 편입니다, 대장님.”

“……이해했소.”

“킥킥킥!”

이번엔 네리아가 아니라 레니였다. 레니는 먹던 빵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고는 웃음을 참기 위해 턱을 가슴에 박고 부르르 떨고 있었다. 빵을 입에 물고 부르르 떠는 항구의 소녀라. 우리 일행의 품위가 전폭적으로 하강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군. 길시언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입은 웃으면서 라 다 대장에게 말했다.

“어젯밤의 폭풍이 꽤 심하던데요.”

라다 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조끼에 갈색 바지를 입고 머리는 정수리까지 벗겨진 것이, 레인저의 대장이라기보다는 마음씨 좋은 농부처럼 생 긴 남자였다. 하지만 강건하면서도 질겨 보이는 팔뚝이라든지 허리에 차고 있는 폭 넓은 쇼트 소드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듯 마치 몸의 일부분 처럼 매달려 있는 것을 보면 과연 레인저의 대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바람을 많이 맞아서 생긴 것이 분명한 눈가의 주름을 조금 찌푸리면서 그는 말했다.

“예. 왕자님. 하지만 새벽에 나가본 대원들의 보고에 의하면 길이 유실되거나 한 일은 없답니다. 혹시라도 조난자가 발생했을까봐 열심히 살펴본 결 과니까 안심하셔도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예. 그런데 어젯밤에도 여줬던 일입니다만, 목적지가 어떻게 되십니까? 목적지는 갈색 산맥 안에 소재한다고 하셨는데, 갈색 산맥 내부에 무슨 용 무가 있으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산맥 안의 일이라면 저희 대원들을 파견해 드릴 수 있습니다. 쓸 만한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러자 곧장 엑셀핸드가 들고 있던 술잔을 탕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니, 카무이. 지금 날 못 본 척하는 건가? 내가 이 친구들을 안내하고 있잖은가?”

음. 광산에서 일하는 드워프들의 노커인 엑셀핸드가 갈색 산맥의 레인저 대장과 아는 사이라 해서 이상할 것은 없지. 라다 대장도 웃으며 대답했다. “엑셀핸드. 지하에서라면 난 언제든지 당신에게 길잡이를 맡길 겁니다. 하지만 산봉우리 위나 숲 속에서라면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만은 피해 다 닐 겁니다. 혹시 그런 곳에서 길잡이를 하겠다고 나선다면, 달갑잖은 일행을 대하는 레인저의 예법대로 당신을 묶어서 데리고 다니는 것도 심각하게 고려해 보렵니다.”

“핫하하하!”

제레인트는 엑셀핸드의 무서운 눈길을 받으면서도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엑셀핸드는 헛기침 소리를 좀 내고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걱정 말게. 날 묶기 전에 자네 턱부터 쪼개놓을 테니 고려하실 필요는 없네. 게다가 자네의 왕자님을 숲으로 끌고 가서 나 몰라라 할 일도 없으니까 안심해도 되겠지. 우리 용무가 지하에 있다면, 자넨 누구에게 길잡이를 맡기겠는가?”

라다 대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하에? 허허. 물론 지하에서라면 내 부하 열 명보다도 당신을 더 신뢰할 것입니다만. 그런데 혹시 드워프들의 광산에 용무가 있으신 겁니까?” “비슷한 곳에 있네. 어쩌면 정반대가 될지도 모르지만.”

라다 대장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우리 일행들은 엑셀핸드의 말을 알아듣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크라드메서는 땅속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나면 하늘로 날아오를 테지. 그때 샌슨이 말을 꺼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긴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인가, 퍼시발 군?”

“만일 레니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에는 말입니다. 우리도 뭔가 안전 대책을 강구해 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레니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우리 는 꽤 위험한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걸요.”

어, 어? 그런가? 만일 레니가 크라드메서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크라드메서는 인간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드래곤인 셈이고 따라서 마음대로 우 리를 공격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지?

샌슨의 말을 듣고 놀라버린 레니는 입에 빵을 문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을 보고서 제레인트는 스푼을 테이블에 떨어뜨리며 웃었다. 아프나 이델은 스푼을 주워 제레인트에게 건네면서도 불안한 얼굴로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물론 그런 걱정도 일리가 있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

“반대로라니요?”

“만일 우리가 실패한다면 대륙 전체가 어차피 지옥으로 바뀌지 않겠는가.”

소름이 쫙 돋아올랐다. 칼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이건 담담하게 들어줄 내용이 아니잖아.

“어느 황야나 깊은 계곡으로 달아나서 기구한 생명을 이어갈 수는 있겠네만, 글쎄. 그렇게라도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거 정

말 비참하겠는걸.”

샌슨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우리들의 일의 무게가 뒷덜미를 콱 누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실패하 면, 대륙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죽는다. 모든 사람들이 죽지는 않을지 몰라도 최소한 300년 동안 유구하게 내려오던 나라는 철저하게 파괴될 것이고 문화와 역사, 전통, 모든 것이 소멸될 것이다. 목숨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목숨은 남겠지만 그것은…………… 저 넥슨과 같다. 우리를 이루고 있던 모 든 선조의 소산들이 파괴되어, 살아 있는 것이지만 존재하지는 않는 자가 되는 것. 300년 전 드래곤 로드의 지배기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다.

숨소리 하나하나가 아프게 들려왔다. 귀가 잘려나간 것 때문일까. 그렇지 않았다. 저마다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뿜어내는 한숨소리들. 이건 성공해 도 좋고 실패하면 다음에 도전하면 되는 그런 일이 아니다. 망친 양초처럼 모조리 부서뜨려 다시 녹여 시작할 수 있는 일도 아닌 것이다. 실패하면 그 걸로 끝장이다. 왜 지금까지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길시언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갑자기 칼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사는 게 좋지?”

샌슨은 멋쩍게 웃었고 다른 사람들도 간신히 얼굴을 좀 폈다. 엑셀핸드는 팔짱을 낀 채 테이블을 바라보며 웃었고 제레인트는 맑은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웃었다. 다만 우리들의 이 황당한 대화에 넋이 빠져버린 라다 대장만은 아직도 경황 없어하고 있었지만, 칼은 침착하게 말했다.

“난 드래곤의 레어에 대해서는 책에서 읽은 것밖엔 없다네. 내가 아는 것이라곤, 그것은 대개 잘 은폐되어 있지만 안은 넓고, 음…………, 당연한 말이지. 안은 넓어야 되겠지. 그리고 드래곤이 움직여야 되므로 그렇게 복잡한 구조나 갈림길은 없다고 알고 있네.”

아프나이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드래곤들은 트롤이나 오거, 혹은 자이언트들을 노예로 삼아 레어를 지키게도 합니다만 수면기에 들어가 있는 드래곤이라 면 그 노예들은 다 달아나버렸을 겁니다. 따라서 별다른 방해는 없을 겁니다. 드래곤에게 붙잡혀 있는 몬스터들의 수효도 적을 테고.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크라드메서뿐일 겁니다.”

“조건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군요. 어쨌든 접근해서 주변 정황을 잘 관찰한 다음 안전을 도모해 봐야겠다……라는 소극적인 생각 외엔 없는데 말이 야. 퍼시발 군. 난 차라리 자네에게 묻고 싶은데. 우리들 중에 드래곤과의 전투를 경험해 보신 분 또 있습니까?”

길시언은 당황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잠깐, 그렇다면 샌슨은 드래곤과 싸워본 적이 있다는 말입니까?”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시언이 놀란 얼굴로 뭐라고 말하려 했을 때 라다 대장이 더 이상 못 참겠다는 어조로 끼어들었다.

“잠깐, 잠깐만요. 이거 아무래도 내가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자면, 왕자님께서는 지금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기 위해 드래곤을 찾아가는 것으로 생 각되는데, 맞습니까?”

“드래곤 슬레이어? 당치도 않습니다. 난 루트에리노 대왕의 후예지만 그분의 용력까지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분처럼 좋은 동료분들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만.”

길시언은 빙긋 웃으며 말했고 일행들 모두에게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세 사람만 빼놓고. 네리아는 여전히 운차이를 바라보며 방글거리고 있었고 그래서 운차이는 속이 거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레니는 겁에 질린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라다 대장은 여전히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제가 들은 말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드래곤의 레어라니, 그리고 전투? 레어를 지키는 트롤과 자이언트? 이게 다 무슨 말이란 말입니까?” 그러자 길시언은 팔을 뻗어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 레니를 가리켰다.

“여기 있는 이 아가씨는 드래곤 라자입니다. 우리는 드래곤 라자의 계약을 위해 드래곤 크라드메서를 찾아가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