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7권 – 제13부 : 대마법사의 만가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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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늘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에 일어난 머리카락이 베어져나간 귀 부분을 간질여서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레니안은 손바닥이 타오르는 것 같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양초를 들고 있는 것 같은걸. 불이 꺼진 채 300년 동안 싸늘하게 식었던 아름다운 양초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 뜨거운 촛농이 내 손바닥을 태우며 내 가슴도 태우는 것 같았다.
“고마워……………, 고마워………….”
다레니안은 두 마디를 어렵게 꺼내놓고는 계속해서 흐느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제레인트의 모습이 보였다. 제레 인트는 뒤로 돈 채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날아올랐다. 정말 재주가 탁월해. 제레인트는 그대로 새카만 밤하늘로 날아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난 다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다레니안은 내 손바닥 위에서 꿈틀거리더니 내 엄지손가락을 붙들고 일어났다. 그녀는 내 엄지손가락을 무슨 기둥처럼 짚고 선 채 울었다. 목이 뜨 거웠지만 겨우 말했다.
“선량한 마음에서 나온 친절로 받아들여 주시겠다면………….”
난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다른 손을 들어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물빛 머릿결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녀는 흠칫했지만 곧 움직이지 않고 내 손길을 내버려두었다. 300년 전의 어떤 손길에야 비교할 수 없겠지만, 난 그가 지금 여기 와서 보더라도 화내지 않게끔 부드러 운 손길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다레니안은 몸을 돌리더니 내 엄지손가락에 기댔다. 난 다른 손을 치우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대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네 속에도 핸이 있나 보구나.”
대답하지 않았다. 다레니안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핸은……… 모든 것 속에 그를 남기려 했으니, 네 속에도 핸이 남아 있겠지. 아니, 너나 그 프리스트의 말대로라면 그게 원래 인간인 것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 알았어.”
다레니안은 다시 입을 다물고 하늘만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손등으로 눈을 닦아내더니 배시시 웃었다.
“이런, 부끄럽네. 내가 페어리퀸이라고 믿어지지 않지?”
“아뇨. 믿습니다. 당신은…….”
이 말을 해야 되나? 고민은 깊었지만 결심은 빨랐다.
“당신은 핸드레이크의 다레니안입니다.”
다레니안은 고개를 조금 움직여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바라보는 나마저도 웃고 싶게 만드는 밝은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후훗. 핸의 말투. 네 속에 있는 핸이 이제 똑똑히 보여.”
“뭐라 말해야 될지…………. 감사합니다.”
“저 호수를 보렴.”
다레니안은 검은 호수를 가리켰다. 난 다레니안을 떨어뜨리지 않으려 주의하면서 그녀를 손에 올려놓은 채 칼을 지나쳐 호숫가를 향해 걸어갔다. 철썩거리는 물이 호숫가의 모래를 적시고 있었다. 백사장처럼 보이는걸.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는 모래 위로 난 천천히 걸어갔다. 잠시 후 발목이 물에 들어가는 느낌이 왔다.
“우습지? 난 저 거대한 호수를 만들었어. 날 사랑하는 자로부터 날 지키기 위해. 하지만 사실 상처 입고 괴로워한 것은 핸이었어. 그런데 내가 그에 게서 도망을 친 거야. 저 호수엔 300년간의 오해가 쌓여 있지. 그런데도 저렇게도 맑게 출렁이는구나.”
다레니안은 물끄러미 수면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그녀를 손바닥에 올려놓은 채 수면만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다레니안이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저길 봐. 나와 핸이야.”
다레니안이 가리키는 것은 수면에 어리는 두 개의 달이었다. 하나는 셀레나의 보름달이었고 다른 하나는 루미너스의 초승달이었다. 그 둘은 물결 위 에서 일렁거리고 있는 것이 마치 열심히 달려가는 모습처럼 보였다. 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다레니안은 수면의 달빛만 바라보며 말했다.
“저 보름달은 나야. 아무것도 나눠주지 않은 채 가득 차서 더 이상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요정의 여왕. 그리고 저 초승달은 핸처럼 보이는구나. 다 나눠줘 버리고 저런 모습으로, 하지만 곧 다시 부풀어오를 핸이야.”
“당신은…………, 글쎄요. 말하긴 우습지만, 절 받아들였습니다.”
“넌 특별한 것 같아.”
“글쎄요. 모든 이가 다 특별하겠지요.”
“그래? 후후. 인간아. 인간으로 서고 인간으로 말하는구나? 너희들은 모두 하나이며 모두가 특별하다는 말이겠지?”
다레니안은 농담을 건네듯 말했고 난 머쓱하게 웃어버렸다. 다레니안은 고개를 돌려 우리 동료들을 주욱 둘러보다가 칼에게 시선을 멈췄다.
칼은 정말 대단한 고집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웅크리고 앉아서는 수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레니안은 손가락으로 턱을 탁탁 두드리며 말 했다.
“저 남자는 너희들을 무척 그리워하고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것 같아. 그리고 내가 그의 소망을 받아들여 너희들을 풀어준다면, 그는 나에게 고마워 하겠지. 그리고 난 그의 고마움을 느낄 때 기쁘겠지. 그게 인간식이지?”
“그런 것 같…………, 그렇습니다.”
“알았어. 돌아가렴.”
“아, 저, 그런데 그 프리스트가 날아가 버려서, 음. 그가 돌아올 때까지 다른 말씀을 좀 물어보면 안 될까요?”
“뭐가 궁금하니?”
다레니안은 살짝 날아올라 다시 내 눈앞에 섰다. 휴우. 이제 팔 좀 내리게 되었군. 난 슬그머니 팔을 내리며 물었다.
“이루릴에게 뭐라고 전하면 좋을지요?”
“아, 쓸모없는 추적. 음. 이젠 쓸모없는 추적이 아냐. 나 역시 핸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하니까.”
“예. 그런데 아까는 왜 쓸모가 없다고 하신 것인지요?”
다레니안은 잠시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에 깊이 빠져들어 마치 잠꼬대처럼 들리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핸에게서 클래스 10의 마법을 배울 작정이라는 것은 알고 있니?”
“예. 알고 있습니다.”
“그래? 난 핸이 그 마법을 만들어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그가 그런 마법을 만들어내었다면, 과연 사용할 수 있을까?”
“예?”
다레니안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난 페어리야.”
물론 그렇지.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인지?
“차원의 경계는 나에겐 별 의미가 없어. 너희들이 말을 타고 국경을 넘듯, 난 차원을 넘어다니지. 조금 전 네가………… 과거의 나와 핸을 보았던 것 도………… 내가 기억 속에 있는 과거의 차원으로 도피했기에………….”
다레니안은 말꼬리를 흐렸고 난 시선을 조금 돌렸다. 그런데 도대체 차원이라는 것이 뭐야? 그건 시간을 말하는 것인가? 그런데 지금 내 상황을 보 자면 그건 공간과도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러나 다레니안은 거기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차원을 만들어내었다면 난 거기로 갈 수 있어.”
“가실 수 있다고요? 핸드레이크가 만들어낸 새로운 세상에?”
“그래. 그럴 수 있겠지.”
“그렇다면, 페어리퀸께서 하시는 말씀은, 페어리퀸께서는 그런 차원은 보지 못했다는 말씀입니까? 핸드레이크가 만들어낸 새로운 세계를 못 보셨다 고요?”
“그래. 난 보지 못했어.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있는 이상, 핸드레이크는 모순에 빠져버리기 때문에 클래스 10의 마법을 만들 수…………. 난 끝까지 그를 방해하고 있어.”
다레니안은 고개를 돌렸다. 모순이라구? 모든 모순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신세계를 만들어내려 한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것 자체가 모순이라구? “저,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레니안은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난 차원을 건너다녀. 핸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면, 난 거기에도 갈 수 있어. 그런데 내가 거기에 가게 되면 나라는 존재 때문에 이 세계와 그 세 계가 연결되고, 결국 새로운 세계가 아니게 되지.”
“예……, 에?”
다레니안은 싱긋 웃었다.
“너희들이 알아듣게 말하는 것은 어렵구나. 그렇지. 너희 나라 바이서스는 국왕이 우두머리가 되지?”
“예? 아, 그렇습니다.”
“그리고 일스 공국, 거기는?”
“일스 대공이 우두머리가 됩니다만.”
“일스는 루트에리노에게 공을 인정받아 그렇게 새로운 나라를 만들 수 있었어. 하지만 그게 새로운 나라일까? 육로로 이어져 있고 누구든지 오갈 수 있잖아. 너희들이 말하는 나라라는 것은, 음. 그렇지. 너희들끼리 정해 놓은 이야기일 뿐이잖니. 결국 광대무변한 땅에 금을 그어놓은 것에 불과하지. 일스 공국을 완전히 새로운 세계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선을 없애버려도, 일스의 세금이 바이서스의 국왕에게로 간다는 것 외에는 달라지는 것이 아 무것도 없지 않겠니?”
“아. 알겠습니다. 금을 그어놓은, 그러니까 국경선을 그어놓았을 뿐 똑같은 대륙에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세상이 다른 것은 아니라는?”
“그래. 그런데 핸이 만들려고 했던 것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야. 그런데 난 거기에 갈 수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렇군요. 대충 알 듯합니다.”
대충 알 듯하다는 것은, 상당 부분 모르겠다는 말이다. 으윽. 이 이야기를 잘 기억해 두었다가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고는 토론을 좀 시켜봐야겠는데. “그럼 페어리퀸께서는 핸드레이크가 절대로 클래스 10의 마법을 만들어낼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돼.”
“하지만 이루릴은 현명한 엘프입니다. 저야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이루릴은 페어리퀸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모순을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만 제가 보기엔 이루릴은 확신을 가지고 추적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난 모르겠어. 핸이 그런 모순마저도 뛰어넘고 클래스 10의 마법을 만들어내었는지, 그리고 만들어내고도 아직 사용하질 않아서 내가 못 본 것인지. 만일 그렇다면 난 존재 자체가 끝끝내 핸을 방해하게 된다는 죄의식에서는 벗어날 수 있겠지. 하지만 난 다른 이유에서도 그것을 반대해.”
“왜입니까?”
다레니안은 잠시 대답을 보류했다. 그녀는 물끄러미 호수를 바라보기 시작했고, 잠시 후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도 보지 못했는데 그녀의 말이 들려왔다.
“난 엘프들이 다 이 땅을 떠나버리는 것이 싫어.”
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다레니안의 말은 그대로 내 마음이다.
왜, 무엇 때문에 저 아름다운 종족이 이 땅을 떠나야 된단 말인가. 지평선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너머에 모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수평선 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너머에 미지가 있기 때문이고. 어쨌든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지,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면 그건 아름다울 까닭이 없다. 이 대륙이 아름다운 이유는,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엘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상당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왜 그들이 우리를 버리고 떠나야 한단 말인가.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긴 하겠지. 이루릴은 그들 스스로가 견딜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이 이 땅에 남아 불행하기보다는 새로운 세계에 서 행복을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하긴 하다. 하지만 그것이 그토록이나 불행일까. 다른 모든 종족들은, 어쨌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핸드레이크가 틀린 것일까?
불행이든 부조리든, 우리는 살아가고 있어. 아무튼 현재로선 그렇다. 난 핸드레이크만큼의 위대한 지혜를 가진 현자는 아니라서 미래가 어떻게 될지 는 모르겠다. 나도 범부인가 보지. 젠장.
“알겠습니다. 이루릴에게 그대로 전하면 되겠습니까?”
“그래.”
“아, 그리고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리치몬드가 핸드레이크입니까?”
“응?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너도 조금 전에 느끼지 않았니?”
느꼈다고? 아, 그래. 난 조금 전 다레니안을 손에 든 핸드레이크였다. 그리고 그때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다레니안은 300년 동안 핸드레이크 를 만난 적이 없다. 그래서 오해는 오해로 남았던 것이지.
“알겠습니다. 그 대답은 이루릴이 스스로 구해야겠군요.”
“리치몬드라는 자가 핸드레이크라고 주장했니?”
“아, 그렇진 않습니다. 단지 이루릴이 그렇게 의심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
다레니안은 대답하더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보았고, 곧 어두운 밤하늘에서 멋들어지게 날아오는 제레 인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푸핫하하!”
그는 오른팔을 앞으로 쭉 뻗고 왼팔은 옆으로 쭉 뻗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다리는 뒤로 길게 뻗고 왼다리는 살짝 구부려 왼발로 오른쪽 무릎 안쪽을 받친 자세로 날아오고 있었다. 완전히 익숙해졌구나! 제레인트는 그야말로 유성처럼 밤하늘을 날아오고 있었다. 다시 우리 세계로 돌아가면 제레인 트는 아쉬워서 어떻게 할까? 하하하.
제레인트는 우리 머리 위까지 우아한 호선을 그리며 날아오더니 공중제비를 틀고는 그대로 두 팔을 좌우로 펼친 채 한쪽 무릎을 꿇으며 착지했다. “멋집니다!”
짝짝짝. 박수를 쳐주었는데도 제레인트는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황급히 다레니안에게 말했다.
“저, 우리들을 빨리 돌려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 왜 그래요, 제레인트? 뭐 급한 일이라도 있어요?”
“할슈타일 후작 일행이 쫓아오고 있는 모습을 봤다. 거리가 가까워!”
“이런!”
아차, 까먹었다. 중부 대로에 그 횃불! 이 밤에 움직이고 있었지. 이런, 그렇다면 후작 일행이구나! 다레니안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선선히 허락 했다.
“알겠어. 급한 용무가 있는 모양이구나. 좋은 만남, 가슴 깊이 간직할게. 너희들을 페어리의 친구로 받아들이겠어. 이 호수는 너희들에게 언제든지 열려 있을 거야. 언제라도 이 호수를 다시 찾아올 땐 나에게 들러줘. 그리고 너희들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땐 페어리들이 도와줄 거야.”
“아, 감사합니다. 다레니안.”
나와 제레인트는 나란히 다레니안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했다. 다레니안은 가만히 고민하는 얼굴이 되더니 말했다.
“후치. 네 덕분에…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 보는 취미가 생긴 것 같아.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니?”
“예? 아. 그렇습니다.”
“내가 도와줄까?”
“예? 그래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니? 알았어.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니?”
샌슨의 눈을 가린 다음, 난 기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게?”
샌슨은 눈이 가려지고서도 달인답게 정확하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빵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 우물거리며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난칠 기분 아냐, 후치. 지금 후치들이 어떻게…………, 으악!”
샌슨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고 네리아는 벌떡 일어나다가 냄비를 걷어참으로써 엑셀핸드로 하여금 눈물을 찔끔거리게 만들었다. 엑셀핸드는 분명히 30초 정도는 다시 나타난 나와 제레인트보다는 엎어진 냄비에 더 신경을 쏟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프나이델은 탄성을 질렀지만 그 탄성은 저 멀 리서 들려온 칼의 비명소리에 덮여버리고 말았다.
“으아악!”
“칼? 괜찮아요?”
길시언의 황당한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칼은 다시 일어나 역시 무서운 속도로 달려왔다. 저러다가 또 넘어지실라. 몇 번 휘청거렸지만 다행히도 칼은 제대로 달려와서는 내 얼굴을 붙잡고 좌우로 흔들어댈 수 있었다.
“네드발 군! 네드발 군! 정말 네드발 군 맞는가?”
“이런 식으로 조금만 더 흔들면 우리 아버지께서도 내가 후치라는 걸 못 알아보게 될 거예요…………. 어지러워요!”
“맞군! 네드발군이야! 다행이야! 오, 다레니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칼은 날 부둥켜안고는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 다음 칼은 네리아에게 날 빼앗겼고 네리아는 칼보다 더 열렬한 동작으로 빙빙 돌았다. 제레인트 역시 비슷한 취급을 당하고 있었고 그래서 한 10분 동안은 우리 둘 다 아무 말도 못한 채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했다. 말들까지도 우리를 끌어안으려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시간이 지나가고, 난 간신히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었다.
아,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제레인트는 내 설명의 상당 부분에 걸쳐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모양이고 그런 필요성을 느낄 때마다 곧잘 끼어들었다. 그리고 우리 일행들도 상당 부분에 걸쳐 다시 설명하게 하거나 이야기를 앞으로 돌아가게 만들어대었다. 제레인트가 하늘을 날아다니던 광경에 대한 설명은 엑셀핸드와 레니로 하여금 눈이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다. 차원이 어쩌고 하는 부분에서는 칼과 아프나이델만이 고개를 가로저으 며 몇 마디 질문을 했을 뿐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질문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핸드레이크와 다레니안의 이야기는 네리아와 레니의 귓불을 발갛게 만들었고 그녀들의 입술을 조금씩 벌어지게 만들었 다. 그러나 마지막 제레인트의 이야기에서는 모두들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후작이 오고 있단 말이군.”
칼은 눈살을 찌푸리며 턱을 긁적거렸다. 길시언은 이를 드러내며 나에게 물어보았다.
“페어리퀸께 이곳에서 싸움을 벌여도 좋은지 물어보았나?”
“윽. 그런 건 물어보지 않았어요. 우리가 달아날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냐고 물어보았죠.”
“달아나? 흐음. 제레인트 씨. 적의 병력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길시언은 이미 상대를 ‘적군’으로 간주한 모양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아군’이 되어버리는 모양이고. 흐흠. 제레인트는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횃불의 숫자는 십여 개입니다만, 모두 횃불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던걸요.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보았습니다. 아, 말씀드렸다시피 요정의 나라에서는 바로 옆에까지 다가가도 현실의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전 옆에까지 다가가 관찰해 볼 수 있었습니다. 재미있더군요.”
바로 옆에까지 다가가서 어쩌고 하는 부분에서 칼과 아프나이델을 제외한 다른 일행들은 다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 역시 도저히 이해를 못하는 모양 이다. 제레인트는 그가 후작의 일행의 바로 앞에까지 다가가 어떤 괴상망측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무슨 농담을 걸었는가에 대해 장황하게 말하려 했 지만 이구동성으로 외쳐대는 일행의 제지를 받아 간신히 본론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우두머리는, 에, 그러니까 일행 중간쯤에서 말을 타고 호위가 따르며, 복장이 좀 화려한 것으로 보아 우두머리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만, 그 남자 는 날카로운 얼굴에 드문드문 새치가 섞인 짙은 갈색 머리더군요.”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슈타일 후작이요. 갈색보다는 밤색에 가깝지. 역시 그가 직접 오고 있는 모양이군.”
“그렇군요. 어쩐지 섬뜩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외에 다부져 보이는 전사들이 모두 말을 타고 있었는데 37명이더군요. 모두들 중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장들이 굉장하던걸요. 이루릴 양의 무장보다 더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겠더군요.”
“이상하군……. 후작의 사병은 모두 30명 아니었던가? 어제 낮에도 상당수가 부상을 입었을 텐데 어떻게 37명이라는 숫자가 나올 수 있지?”
길시언의 말에 운차이가 피식 웃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나 같으면 30명 이상 되는 사병을 가지고 있다고 떠들고 다니진 않겠어.”
“그렇군! 비밀리에 키워둔 것이군! 이놈이!”
길시언은 화를 버럭 내며 말했다.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비밀리에 키워둘 작정을 했다면, 쩨쩨하게 열 명 스무 명을 키우지는 않았을 테지요. 못 돼도 100명은 넘게 준비했겠지요. 아, 천 단위까지 올라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 정도의 인원을 들키지 않게 관리하는 것은 어려울 테니까. 후작에게 군권에 관련된 권한이 있습니까?”
“아니. 군무에 관련된 부분은 없습니다. 드래곤 라자의 가문이니까요.”
“그렇겠군요. 으음.”
그때 제레인트가 말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으로…………….”
“또 다른 사람? 더 있다는 말입니까?”
“예. 두 사람이 더 있더군요. 그 둘은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더군요. 넥슨 휴리첼과 자크였습니다.”
“이런……, 젠장! 잡혔군!”
“예. 두 사람 모두 몰골이 말이 아니더군요.”
“크게 다쳤어요?”
조용히 듣고 있던 네리아가 갑자기 질문했다. 제레인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옷이나 겉모습은 엉망이었지만 움직임을 보아하니 그렇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다그쳐대는 후작의 사병들에게 반항할 정도더군요. 그 넥슨 은 재가 프리스트라면서요? 아마 치료를 했던 모양입니다.”
네리아는 안심하는 표정이 되었다. 제레인트는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그 둘의 몸에 묻은 피를 보아하니 꽤 많은 인원을 쓰러뜨린 모양입니다. 후작의 일행이 37명이었지만 말들의 숫자는 훨씬 더 되던걸요. 뒤 를 따라오는 수레에 실린 짐도 꽤 많았습니다.”
칼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이렇게 된 것이군요. 37명보다 훨씬 더 많은 인원이 쫓아오고 있었지만 우리들과, 그리고 어제 넥슨과 자크와 교전하면서 많은 인원이 쓰러져 서 그 숫자가 되었다. 이 말입니까?”
“예.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 둘은 모두 단단히 포박당해 있었고 무장과 OPG는 모두 빼앗긴 모양입니다. 그들의 OPG 중 하나는 후작이 끼고 있었 는데 다른 하나는 보지 못했습니다.”
“흐음. 꽤 세밀하게 관찰하셨군요. 훌륭하십니다.”
“하하, 뭘요. 바로 옆에 다가가도 알아차리지 못하니까, 쉬운 일이었습니다.”
칼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길시언을 보면서 말했다.
“예. 아무래도 교전할 필요는 없겠군요?”
“없겠습니다. 젠장.”
“그럼 준비를 합시다.”
서둘러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뒷정리를 끝내었다. 뒤집힌 마차를 다시 세울 수는 있었지만 바퀴축이 크게 부러져 있었고 바퀴도 두 개 박살이 나 서 타고 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말을 풀어내어 짐을 실은 다음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오늘 밤에 달려버리면 내일 낮에 말들은 지치고 말 테니까.
마차에서 짐을 꺼내어 정리하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선더라이더의 갈기를 쓸어내리고 있는 길시언의 모습이 보였다. 길시언은 애정이 가득 담긴 눈 으로 말없이 선더라이더를 어루만지고 있었고 선더라이더 역시 커다란 목을 움직여 길시언의 머리에 비벼댔다. 길시언의 밝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운차이가 다가왔다.
“이봐, 후치.”
“예?”
운차이는 별말 없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그것은 그가 깎고 있던 나무 조각이었는데 이제는 완성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웅크리고 있는 말 의 모습이었다. 얼떨결에 받아들고는 의아한 눈으로 운차이를 올려다보자 운차이는 먼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낙타를 깎아볼까 했는데, 맘이 바뀌었어.”
난 무슨 말인지 몰라서 손에 그 말 조각을 든 채 운차이를 올려다보았다. 운차이는 헛기침을 좀 하더니 말했다.
“제미니를 깎아보았는데, 별로 안 비슷하군.”
제미니?
난 손에 나뭇조각을 든 채 운차이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선더라이더를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여전히 그 옆에 선 채 선더라이더를 애무하고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면서 선더라이더가 제미니로, 그리고 길시언의 모습이 나로 보였다.
내 목소리가 그렇게 젖어 있지 않기를 애타게 바라며, 난 운차이에게 감사했다.
“고마워요, 운차이. 잘 간직할게요.”
운차이는 다시 헛기침을 하더니 몸을 돌리려다가 불쑥 말했다.
“돌아와서 기쁘다. 계속 지붕 위에 앉아서 말만 바라보고 있는 짓, 이젠 그만해.”
아……………, 그거였군.
내가 계속 마차 지붕 위를 고집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군. 나도 모르는 사실이었는데, 운차이는 그 날카로운 눈으로 정확하게 알아보 았던 것인가. 무섭도록 날카로운 저 눈으로? 쳇. 나도 모르는 속마음이 들키니 이거 제법, 아니, 꽤나 부끄러운걸. 난 멋쩍게 한마디 했다.
“어차피 이젠 마차도 없는걸요.”
운차이는 피식 웃더니 다시 짐더미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난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팔짱을 낀 채 날 바라보고 있는 칼의 모습이 보였다. 칼이 뭐라고 말하려 할 때, 난 재빨리 손을 들어올리며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말했다.
“부탁인데,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아시겠지요?”
“아, 그래, 네드발 군. 그런데 그 동안 정말 가슴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니까요!”
“음. 그래. 그런데 그 조각품은……”
“카아아알!”
칼은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난 화난 동작으로, 하지만 조심스럽게 말 조각을 배낭 속에 던져넣었다. 깨지면 큰일이잖아? 칼은 웃음을 멈추더니 길시 언과 선더라이더를 보면서 다른 말을 했다.
“선더라이더의 저주가 풀렸으니, 그건 리치몬드가 죽었다는 말인가?”
“아, 그렇겠네요?”
무심결에 칼의 말에 대답하다가 순간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칼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그 얼굴에는 별 표정이 떠올라 있지를 않았다.
“이루릴이?”
“그럴 수도 있겠지, 네드발 군. 아니면 지골레이드가 리치몬드를 처치했을 수도 있고.”
“흐음.”